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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미뢰
저: 김은주 수필집
출: 학이사
독정: 2023.12.20.
<미뢰>
-혀 아래서 찰랑찰랑 침이 고이나 싶더니 그새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할머니 눈은 이미 도마를 떠났는데도 칼질은 여전히 맞춤하게 움직인다. 착착 칼 너머 국수 가닥 같은 웅어가 쌓인다.
-국밥 집 뒷골묵에 죄판 하나 두고 앉아 할머니 봄과 여름 사이를 곡진하게 썰 듯 웅어를 썰고 있다. 움푹하게 볼우물 패인 도마를 보니 세월이 그곳에 소복하다. 웅어 맛은 솔직, 소박하다. 소박하니 꾸밀 것이 없고. 솔직하니 속내가 훤히 보인다. 낙동강 하구의 갈대밭과 먼 바다 냄새도 함께 난다. 익히지 않고 생것에만 숨어 있는 살아있는 맛이다. 씹을수록 입안이 화하다. 박하사탕 먹은 뒷맛 같다.
<인연섭수>
-햇살 들이치는 아침. 구불구불 드러난 핏줄 같은 나무의 결. 그대로 정직한 나무 모습이다. 몇 해를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가 또 얼마의 세월로 이층장이 되어 살아왔는지 아침 햇살 아래 그 모습 처연하다.
-언제부턴가 남의 눈보다 내 마음 동하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자유로움 속에서 새로움이 생겨난다. 새로움은 또 다른 호기심을 낳고 그런 가운데 나만의 세계가 구축된다. 견고한 그곳에서 나는 다만 나만의 즐거움을 익히는데 골몰한다.
사랑하고 마음 다해 쓰다듬어 세상에 곱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다 발라놓고 보니 훤하고 출렁거린다. 복사꽃 핀 야산 언덕처럼
옷장은 볕 잘 드는 남향 안방에 앉아 빛 좋은 호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주인 팔자 따라 이리저리 고단하게 이사도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쓴다. 씻고 닦아 이층장에 쌓는다. 시골집 구석방에 둬도 마음의 의지처가 생긴 듯 든든하다. 한 이틀 사랑하고 정성 쏟았더니 무심하던 이층장이 피가 돌고 생기가 난다. 모든 인연은 처음 만났을 때 가장 그 인연을 풀어내기 좋은 때라고 한다. 새 인연이 시작되었으니 받아들여 내 안에 녹여내고 가꾸어봐야겠다.
<희영층>
얕은 야산에 천지가 복숭아나무다. 제 할 일을 마친 복숭아나무는 겨울바람을 이기고 서서 내년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날은 차지만 가지 끝은 이미 붉다. 촘촘히 모인 붉은 가지가 봄을 기다리며 환하다.
세상물건이란 주인이 따로 있는 법. 쓰임이 다하면 떠난다. 자연 이치는 차면 넘쳐 흐르고 부족한 곳으로 고이게 마련. 물건도 그 인연 따라 오간다. 항아리도 연이 닿아 내게 왔으니 귀하게 품는다. 찬란한 보석을 가진들 이리 행복할까?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달빛으로 쓰다듬고 나니 그사이 인물이 훤해졌다. 숨어 있던 무늬가 보이고 흙 색깔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단지를 굴리며 혼자 잘도 논다, ‘희영층’ 무슨 일이든 스스로 기쁘고 그득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
<꽃 탁발>
바람이 길을 열어주는 대로 산을 오르면 꽃이 나를 부른다. 먹이가 없으니 벌레도 보이지 않고 숲이 우거지지 않아 움직임이 자유롭다. 성근 숲 사이로 곳곳에 꽃이 환하다. 모진 겨울 건너온 꽃을 숲이 받치고 섰다. 무시로 산을 오르다 보면 저절로 나만의 지도가 생긴다. 돌어본 적 없고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데도 산길 모퉁이마다 돌 복숭아꽃 저절로 눈부시다. 볕이 잘 든 쪽의 가지는 꽃 무게에 못 이겨 둥글게 휘어졌다. 일 년 만에 만나니 뭉클, 반갑가까지 하다. 모진 추위를 이기고 아무도 모르게 나이테 하나 더한 모습이 씩씩하고 대견하다.
꽃을 솥에 넣고 살살 만지면 만질수록 다른 색이 돋아난다. 몸 안 수분이 날려 서서히 자리 잡는 생물일 때의 활기가 가고 가벼워지며 차분해져 고요가 깃든다. 덖고 다시 말려 잠까지 재우면 탁발한 꽃을 유리 다관에 넣고 더운 물을 부어 우린다. 돌돌 말렸던 꽃잎이 활짝 풀어지며 알싸한 향이 내 몸을 감싼다.(선 문장)
<숭어>
-안개를 밀어낸 아침 해 눈부시다. 찹찹 혀에 감기는 밥알이 기름지다. 가는 길 드문드문 이른 못자리 속에 산이 들어앉았다. 자잘한 바람이 산을 흔든다.
-동그란 대숲 안 그늘에서 멀리 백사장을 실눈 뜨고 본다. 이곳 그늘과 숲 밖의 밝음이 묘한 기운으로 충돌한다. 몇 번의 바람이 자나갔는지 목덜미 볕이 따갑고 보리 익는 냄새 구수하다.
-말은 멋있고 품은 각이 선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아쉬움이 남는지 숭어 사라진 강을 오래 바라본다. 검은 욕심이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꼼짝없이 숭어 생각에 사로잡혀 머리로 회를 뜨고, 튀김을 하고 매운탕을 끓인다. 일행은 숭어를 생명으로 여기지만 나는 충실히 식재료로 보는 중이다. 풍경 하나를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이 엉킨다.
<환생>
귀밑머리 돌려 깎은 아이처럼 길이 단정해 보인다. 집 앞 작은 수로에 밑둥치가 잘려나가 누워 있는 꽃은 제 몸이 명을 다했는지도 모르고 맥없이 붉다. 꽃이 잡초더미에 섞여 갈고리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간다. 내 아이가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것 같다.
-선: 내 눈엔 꽃인 것이(일거리인 것이>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이겠다. 꽃의 몸내가 입 안 가득 향기롭다.
<달하>
보는 순간이 만남이다. 술상 앞에 앉으니 영덕에서 올라온 생새우가 접시에 가지런히 누워있고 문어숙회와 깨글 갈암 우엉 셀러드가 ‘달하’와 어깨동무하고 상위에 놓였다.
<눕는다>
대처에 나간 자식은 눈앞에 밥숟가락 걱정에 노모를 잊기 일 수. 언제 어느 때라도 고향 찾으면 날 반기라라는 마음 때문에 부모는 늘 급한 일 다음으로 밀려난다.
-잎이 창창할 때는 양파가 땅에 제 몸을 숨기고 있더니 위 대궁이 나니 하얀 속살을 땅 위로 쑥 밀어 올린다. 양파 대궁이 안에 힘을 뿌리로 다 쏟았으니 기진해서 누웠나 보다 저래 팍팍 자빠지면 양파가 알이 다 찼다는 증거다. 술잔에 봄볕이 소복하다. 옴폭 패인 할머니 볼이 오래 열무를 씹는다.
-오리들은 고개를 외로 꼬고 조는 놈, 털 고르는 놈. 서로 몸 비비며 노는 놈. 편안해 보이고 밭 가는 할매 뒤를 겹겹이 누운 앙퍄가 든든하게 호위하고 있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장미 분홍은 눈보다 마음을 먼저 흔든다. 붉고 격정적인 빨강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묘목 사이에 있는 분홍 두 그루를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런데 그렇게 키운 긴 덩굴장미 가지를 뒷집주인은 톡톡 분질러 수북이 쌓아놓고 온데 간데 없다. 뿌리에 약까지 부어놓으니 이 무슨 가당찮은 살심인가. 나야 꽃 보는 호사를 내려놓으면 그만이지만 살심을 똬리처럼 품고 살 그분이 못내 안타깝다. 담 넘어 큰소리 오가지 않고 서로 마음 전할 길을 궁리하다가 마당에 돌 몇 개 주어 그림을 그린다. 천에 그리던 물감으로 천천히 내 마을 그린다. 우선 서로 웃고 살자고 환하게 웃는 말 한 마리 그리고 동그란 눈의 부엉이도 한 마리 그린다. 우선 맺혔던 내 마음이 풀리고 나니 그깟 일 싶다. 먼저 가는 마음을 앞질러 가기보다 마음 고삐는 천천히 잡고 뒤따라간다. 마음 앓을 일도 없어진다. 꽃이야 피면 이내 지지만 돌 그림은 내내 봄이다.
<까닭>
내가 이곳에 앉고 싶어 앉은 것이랴. 콩밭 논두렁도 있고 옆집 빈 공터도 있는데 하필 이런 곳에 둥지를 틀고 싶었겠는가. 아마 늦은 봄인지 싶다. 주인장이 살짝 썩어 물러진 내 어미를 거름으로 쓸 요량으로 배룡나무 아래 던지고 며칠 후 꿈틀거리며 몸을 키운 것이 까닭이라면 까닭이다. 애초에 담장 위는 생각도 없었고 옆집 플라타너스 아래로 뻗어 갈 참이었다. 담만 살짝 넘으면 너른 곳이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싶었는데 감나무 가지가 길을 막는 바람에 잠시 길을 잃었다.
포도 덩굴도 제법 실 더듬이를 길게 뻗어 담장을 기어오르고 뒷산 솔밭 뻐꾸기는 바람 따라 울어 쌌더니만 그새 알 까러 갔다. 산나리가 더덕 줄기 새로 고고한 자태를 보이더니 고추 모종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살살 쇠 담장 사이로 기어나가 옆 공터로 뻗어나갈 작정이었다. 좁은 마당보다는 넓고 환한 그곳이 좋았다. 그런데 예정에도 없던 곳으로 내 몸 반이 척 걸쳐져 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 할꼬. 허리를 비틀어 흔들어 봐도 몸은 아미 쇠 담장 사이에 끼여 요지부동이다. 중간마다 아래쪽이 근질거리다 보니 아마도 꽃 피울 모양이다. 꽃진 자리에 며칠 후 열매가 맺혔다. 위태로운 난간에서 생명을 키워야 한다니. 처음에는 왕 구슬만해서 대문과 우체통 사이에 그저 매달려 있을 때만 해도 견딜 만했다.
그런데 칠월 뜨거운 볕과 긴 잠이 지나자 점점 몸이 불어나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하듯 힘들어졌다. 곧 땅으로 떨어질 듯 해 하는 수 없어 덩굴손을 뻗어 우체통과 쇠기둥 사이로 몸을 피신키셨다. 양쪽으로 내 몸을 감싸주는 우체통과 쇠기둥이 있어 얼추 견딜만 하다. 더는 몸피가 불어나지 않게 뿌리에서 물 길어 올리는 일을 조금씩 자제해야겠다. 살아가는 법을 따로 배운 바 없지만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안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면 죽기 살기로 그곳에 적응해야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고 이듬해를 기약할 수 있다. 오로지 비치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만 맞고 주어진 것 이외에 탐심을 내지 않는 것.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 이것이 저절로 알고 있는 내 삶의 전부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는 말처럼 주인장이 짚방석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겠거니 내심 기다리며 나를 달래는 사이 몸이 불어나 엉덩이가 조여 오기 시작했다. 참다가 태풍을 만난 것은 팔월 한 밤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담장에 덩굴손을 말아 쥐고 엄마나 매달렸는지 묵은 간장 같은 밤을 보내고 나니 엉덩이에 깊은 생채기가 생겼다. 진물이 나고 다시 아물다 보니 그새 초록은 어디 가고 덥석 가을이 왔다. 주인은 감나무에 몇 달리지 않은 감을 따러 왔다가 나를 툭툭 치며 아는 체를 했다. 엉덩이 아래 상처를 발견하고는
“대견도 하지 이리 위태로운 곳에서 비바람을 견디다니.”
시난고난(병이 깊지 않으면서 오래 앓는 고난) 겪은 그간의 세월을 알아주는 이 있어 와락 목이 멘다. 배꼽을 자르고 주인장이 내 몸을 흔든다. 못 이기는 척 주인장의 손으로 고단한 몸을 내려놓는다. 주인장은 마당 가운데 따 놓은 조롱박 사이에 나를 눕힌다. 감과 조롱박은 마루로 올리고 나는 방으로 모시고 간다. 주인장이 어머니 사진 틀 앞에 동그랗게 뙤리 방석 만들어 그곳에 나를 앉힌다. 못 생긴 내 등도 쓰다듬어 주고 찌그러진 엉덩이를 추슬러 바로 앉혀준다. 방안은 따습다. 훈훈한 꽃차 향기와 달달한 조청 냄새 가득하다. 비람을 견딘 대가로 분에 넘치는 호사다. 견딜 수 없는 일을 견뎌내었더니 달달하고 훈훈한 차향과 따뜻한 겨울밤을 상으로 받는다. 비바람을 견딘 까락이 여기에 있다.
<찰>
곤줄박이가 담장에 나타남을 관찰하며 쓴 글이다. 무심히 한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의 마음이 훤히 보이는 순간이 있다. 바라보는 순간에 서로 꿰뚫어 보는 심법이 생긴다. 내가 곤줄박이와 놀면서 익히는 통찰의 한 방법이다.
<청을 잡다>
솥에 엿물을 부으면 처음으로 끌어 오른 순간이 있다. 솥 가장자리부터 동그랗게 거품이 올라 중심에 모여든다. 분화구처럼 맹렬하게 끓어오르던 거품이 사라지면 잠잠해진다. 이때가 최적의 순간, 딱 알맞은 청의 순간이다. 이때 바람의 속도로 곡식 넣고 비벼준다. 서로 엉키다가 다시 뭉쳐져 사근 실이 생기면서 청 잡이가 끝나간다. 주걱에 감기는 엿의 농도를 보며 창밖의 날씨도 함께 가늠해 본다. 별이 좋고 맑은 날은 주걱에서 떨어지는 엿물의 농도가 조금 낙낙해도 좋고 밥이 흐린 날은 엿물이 되적해야 한다.
<도다리 쑥국>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애쑥은 아직 초록을 띠지 못하고 이파리 가득 솜털이 하얗다. 두 닢 사이로 봄 햇살이 쏟아지고 바다 둔덕에 애채들이 잎을 튀우면 통영 바다색도 한결 순해진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를 조각공원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멸치 때들이 튀어 오를 듯 눈부시다. 주인장이 급하게 쓴 도다리 쑥국이라는 메뉴판이 벽에 떡하니 내걸리면 통영에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는 증거다.
-지천으로 넘치는 해산물과 들썩이는 포구의 기둥들이 술을 찾게 부추긴다. 무사히 건너온 겨울을 축하하며 한 잔 팽팽하게 다가 올 봄을 위해 한 잔, 눈 뜨면 나가 싸워야 할 바다를 위해 한 잔, 무참히 모가지를 떨어뜨린 동백을 위해 한잔, 봄이 술을 부르고 술이 봄을 맞는다. 열어둔 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다지 차지 않다. 부두를 내다보는 내게 김이 썰썰 오르는 도다리 쑥국이 나왔다. 말간 국물부터 한 숫깔 맛 본다 .코끝을 감싸던 쑥 향과 함께 남도 된장 맛이 먼저 혀끝에 닿는다. 구수한 된장 맛 뒤에 쌀뜨물 맛도 함께 느껴진다. 함께 모여 절효만 뒷맛을 낸다. 금방 등에서 땀이 난다. 더운 국물이 주는 힘이다. 잠자던 세포들이 툭툭 먼지를 털고 일어나 통영 앞바다를 내다보고 있다.
<황금 꽃비>
만지면 금방 손에 치자 물이 오를 것 같은 모감주나무, 모감주 꽃이 피면 곧 장마가 잰걸음으로 우리 곁에 온다. 소나무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초록이 절정에 닿았다. 맹렬히 기어오르는 담쟁이는 고단함도 없어 보인다. 그저 여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듯 싱싱하고 힘차다.
-딱딱한 생각으로 사람의 마음에 길을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부터 무르게 익어 만지면 손가락이 들어올 만큼 부드러워진 다음, 상대를 살펴야 옳다. 그래야 만사가 술술 풀린다.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반죽하려면 혼절할 만큼 즐거운 일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 품고만 있어도 즐거워지는 일, 생각만 해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생기는 일, 그런 일 하나쯤 지니고 살아야 버거운 하루가 황금꽃비로 저문다. 모감주가 제 속을 훤히 열고 나를 내래다보니 천지가 황금빛이다.
<고래 두 마리>무덤 상징
보리잎 사이에 초록 고래 두 마리 바다를 향해 엎드려 있다. 꼬리는 어디로 감추었는지 초록등짝만 해살 아래 눈부시다. 금방이라도 등에서 푸른 물줄기를 뿜어 올릴 듯 등위의 곡선이 팽팽하다. 뭍에서 고래라니 그것도 보리밭이랑 사이에서 고래 만날 일이 있기나 한가? 그런데 내 눈에는 분명 고래 두 마리가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가고 있다. 살아생전 바다를 끼고 살았겠지만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자손들이 동해의 푸른 파도라도 보고 지내라며 이곳에 터를 잡은 모양이다. 보리밭보다 조금 낮은 지향이 포근하고 안락해 보인다. 무심코 보리밭을 보러 왔다가 만난 두 봉분. 등 굽은 자식이 그 봉분을 매만지고 있다. 바다로 못 가고 흙에 몸을 묻고 있는 일이 애달파 보였는지 봉분 만지는 손길이 사뭇 정성스럽다. 봉분 옆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베는 그의 등 뒤에 그림자가 길다. 묘지 앞 작은 발뙈기에는 전부 해당화로 가득 찼다. 농사짓는 농부가 곡식 아닌 꽃이라니. 별일이다 싶다. 키 큰 해당화를 쓰러지지 않게 끈으로 잘 둘러놓은 걸 보니 저절로 자란 해당화도 아닐성싶다. 묘지보다 좀 더 넓은 길 쪽에 서서 두 부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해당화 밭으로 내려갔다. 다가가니 뜨거운 지열에 묻어 올라오는 해당화 향이 아찔하다. 미리 핀 해당화는 제법 굵은 열매도 맺었다. 분홍 꽃잎 속에 황금빛 꽃술이 향기만큼 눈부시다. 등 굽은 자식이 잔디 고르던 손길을 놓고 낯선 객을 쳐다본다.
“해당화가 우째 이래 곱습니꺼?”
“글치요. 울 엄마 꽃이구만요. 생전에 얼마나 해당화를 좋아했는지 모르니더. 가고 나니 내가 뭘 해줄게 있어야지. 꽃 밭 맹글어 주는 것 말구는.”
말로만 객을 맞고 손은 여전히 잔디를 고른다. 굵은 손가락에 풀물이 파랗게 올랐다. 벌초로 끝낸 묏자리처럼 말끔하다.
“내가 우리 어매 애 많이 먹였다 아잉교. 원양어선 타고 바람처럼 떠돌아 댕기미 애 많이 태웠소. 곡식 심어 배부른 것보다 꽃보고 좋아할 어매 생각하마 내 배가 더 부르다 아잉교. 어메 보고 싶은 마음만 생기면 여그 와서 풀도 뽑고
-꽃고래 같다. 멀리 보이는 바닷가 기울어진 햇살에 쓸려 은빛으로 반짝인다. 등 굽은 자식은 봉분 사이에 앉아 바다를 내다보는 일이 그저 행복이다. 햇살에 익은 얼굴이 검다. 누렇게 일렁이는 보리밭 사이로 고래 두 마리 바다로 나아가고 그 옆에 등 굽은 새끼 고래도 함께 따라가고 있다.
<활짝>
아저씨는 몽땅 빗자루로 흩어진 튀밥을 쓸어 모으다 다시 기계 쪽으로 가 온도와 시간을 확인한다. 긴 쇠막대기로 돌아가는 기계를 두드리며 시간과 기다림 사이에서 서성거린다. 더딘 식산이 작은 통 작은 길 위에서 어슬렁거린다. 길 건너 과일 집 아주머니는 앞에 찬 전대 깊숙이 손을 넣고 졸고 있다. 오른쪽으로 기운 고개를 얼른 다시 추스르면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어 간다. 등 뒤에 그림자가 사과상자 아래로 구부러져 있다. 어디서 빛이 드나 고개를 들어보니 좁은 골목길을 덮은 갖가지 천막이 딱 자기 집 가게 크기만큼 하늘을 덮고 있다. 얼기설기 끈으로 기둥을 찾아 묶어 둔 천막, 빽빽이 들어선 천막 사이로 가을빛이 스미고 있다. 가게 없이 난전에 앉은 할머니 머리 위는 휑하니 민얼굴의 가을 하늘이다. 온전한 가을볕이 그대로 쏟아진다. 할머니 뒤척뒤척 온몸으로 가을볕을 다 받아내고 있다.
햇살에 눈부신 몸을 드러내고 있는 저것은 분명 홍옥이다. 태양이 붉다 못해 검은 홍옥의 몸속으로 들어갔는지 뜨겁게 붉다. 눈길로 쓰다듬다가 한입 먹어 보는 상상을 하다가 와락 입안에 침이 고인다. 밥도 끓고 나면 불을 끄고 잠시 뜸들이듯 뻥튀기도 잠시 불을 빼고 몸을 식히고 있다. 아저씨 서둘러 긴 뻥튀기 망을 끌어와 멈춰선 기계에 물리고 가슴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함껏 분다. 왁자하던 골목에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짧은 정적 사이로 긴장한 눈길이 모여든다. 팽팽한 골목 기운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다. 한 무리 견기,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날아가는 곡식, 천지에 진동하는 고소한 냄새, 펑 소리와 함께 잠시 정지된 골목길이 다시 분주해지고 아저씨는 긴 망을 사선으로 들고 소쿠리에 튀밥을 붓는다. 활짝 폈다. 단단한 곡식이 제 속살을 드러내고 둥글게 부풀었다. 앞 다투어 봄꽃 일어나듯 일제히 소쿠리 가득 튀밥이 피어났다. 그 모습 참 곱다. 천막 사이로 가을 하늘이 활짝 열리고 있다.
<소요>
물길 옆으로 조가비 같은 집이 엎드려 있다. 동네가 둥글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물길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보니 동네의 첫 집과 끝 집은 턱없이 멀다. 높낮이가 다른 돌담 사이를 걸어 동네 끝에 서니 마당가에 백구 한 마리 길게 누워 낮잠을 즐긴다. 내가 옆을 자나가도 길게 벋은 다리를 오므릴 생각이 없다. 천하 태형이 따로 없다. 백구가 누운 담 너머로 돌 복숭아꽃 철없이 불고 인기척 없는 마당에는 빨래만 한가롭다. 민들레는 이미 노란 꽃술 안에 씨방을 품었다. 그 옆에 냉아가 흰꽃을 머리에 이고 있다. 개울 옆 묵은 가지를 타고 올라간 으름덩굴이 그새 커졌다. 칭칭 감긴 다래 덩굴이 갈 길을 막는다. 덩굴이 얼마나 튼튼한지 그네를 타도 되겠다. 먼저 핀 큰 잎과 작게 말려 올라오는 잎들이 그늘 아래서 졸고 있다. 발아래 흐를 한 뼘도 안 되는 개울 속을 들여다본다. 돌미나리 사이로 버들치 한가롭고 물이끼 아래 다슬기도 보인다. 모여 무리를 이루니 그 모습 더 아름답다. 조용한 듯 보여도 물속에 가라앉은 뭇 생명이 봄 하늘을 안고 흔들리고 있다. 그 위로 내 얼굴이 비친다. 전에 없이 평화로운 모습이다. 바람이 분다. 이른 산 복숭아 꽃잎 개울로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 물결 따라 떠내러가고 개울 감고 돌던 꽃잎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개울이 흘러가 고이는 저수지는 주변 산빛을 보니 연두 사이 분홍이라 더 눈부시다. 그늘은 바람이 차고 햇살 아래는 볕이 따갑다.
<유자>
천 색깔에 싸여 제대로 색을 내지 못하던 유자가 자루를 열자 향기와 함께 내게 안겨온다. 모양은 울퉁불퉁 제각각이다. 한참을 자루 안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살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 속에 동동 떠다니는 유자 껍질, 톡 쏘는 동치미 국말 맛도 기가 막히지만 향기롭게 씹히는 유자 한쪽은 추위에 떠는 나를 금방 남해로 데려간다. 겨울에도 땅이 얼지 않는 남해는 모진 추위를 견디며 일하는 내게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남해 강진이라는 단어만 떠올라도몸이 이불 아래 단술단지처럼 따뜻해져 온다. 뭉근히 따시다가 끝내 보글거리며 마음에 단맛이 차올라 내 시린 손끝을 보듬어 주기 때문이다. 혀끝에 녹는 남해 단어만으로 겨울을 거뜬히 생미역 줄기처럼 즐긴다. 어린 유자를 대견스러운 마음으로 쓰다듬는다. 긁히고 패인 상처들이 노란 몸을 칭칭 감고 있다. 바람을 견디지 못했다면 도사리(다 익지 못한 채 떨어진 과실)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장하다. 남해의 바람과 햇살이 상처 안에 촘촘히 숨어 있다. 그 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꽃탑>
백발 할아버지 묵은 동백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계신다. 바위와 대면하고 무얼 저리 열심히 하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세상에 꽃탑을 쌓고 계신다. 등 뒤 사람 그림자는 아랑곳 않고 그저 쌓는 일에만 몰두한다. 촘촘하게 한 덩이를 쌓아 올린 돌 위에는 동백 한 무더기 척 올려놓고 길게 외로 빼 올린 돌 위에는 작은 동백 한 송이 올려놓는다. 높고 낮음, 많고 적음의 미를 배운 바 없어 보이지만 뼛속 깊이 숨어 있는 오감으로 그저 그렇게 손가는 대로 탑을 쌓고 계신다. 의도하지 않고 작정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선, 가다 뚝 떨어지고 다시 모여 탑을 이룬다. 할아버지 키보다 더 큰 바위 사이에 앉아 오월 한나절을 참으로 눈부시게 움켜잡고 계신다. 작은 돌멩이를 주워 모아 바위의 골을 따라 꽃을 피우고 속절없이 떨어진 동백이 할아버지 손끝에서 환생한다. 꽃탑에서 무슨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지 금방 마음이 환해진다. 그저 땅에 떨어진 동백이라고 귀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사람을 설레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무한의 복을 짓는 할아버지 복잡한 세상과 달리 풍요로운 분이다.
<몸이 기억하는 음식>
잘 자란 미나리가 얼마나 탐스러운지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면 금방 초록 물이 묻어날 것 같다. 약간 습하고 따뜻한 하우스 안에 공기는 굳은 몸을 부드럽게 만들고 고양이를 하품나게 한다. 미나리 가지런히 쌓아 놓으면 하수 안으로 들이치는 봄볕에 초록이 눈부시다. 청도에서는 푸른 미나리가 밥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 학자금도 된다. 청도 미나리는 줄기가 붉은 것이 특징. 엣날 개울가에 저절로 자라던 야생미나리와 흡사하다. 불미나라라고도 하는데 푸른 미나리와 비길 바 아니다. 해독기능이 뛰어나고 피를 말게 한다. 미나리는 겨우네 싹을 튀워 두 뼘 정도 키가 자랐을 때 그 맛이 최고다. 적당히 물이 올라 줄기는 이삭하고 잎은 부드럽다. 몸 안에서 쌉사름하고 약간 새콤한 것이 자꾸 당기면 봄이 온 것이다.
옆구리에 소쿠리를 끼고 논둑길을 얼어 집으로 온다. 바람은 차갑지만, 등에 내리는 봄볕은 따스하기만 하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 드는 일이 그중 으뜸이다. 미나리의 나리는 낱일, 햇빛에서 비롯된듯하고 미는 미더덕이나 미역처럼 물에서 왔으리라
<파꽃 피면>
무논에 개구리 울고 모들이 제법 땅 냄새를 맡으면 밭 언저리에는 파꽃이 핀다. 콩잎 물김치는 콩잎 크기가 예닐곱 살 아이의 손바닥만 해야 김칫거리로는 제격이다. 조금만 커도 잎이 꺼칠하니 줄기가 씹히고 이르면 코잎에서 풋내가 난다. 비릿한 횟집 골목을 지나 건어물 골목에 들어서면 시큼한 풋콩잎 김치 앞에 두고 할머니 몇, 난전에 나앉아 있다. 탑탑하고 풋내나는 내 유연의 여름 한 철을 내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설핏 해가 지는 툇마루 끝에 앉아 풋 콩잎 물김치에 쌈을 싸 먹었다. 쌈 위에다 젓국을 얹어 먹거나 잘박하게 지진 강된장을 얹어먹을 때도 있었다. 콩잎 할머니는 국자로 빡빡한 보리 풀물을 떠 켜켜이 재워진 콩잎 위에 끼얹는다. 얼마나 맛있는지 보란 듯 국자 젓는 손길이 제법 리듬을 탄다. 시큼한 냄새는 내 온 몸의 돌기를 일으켜 세운다.
“맛싯것제, 한 보시기 가져가 묵어봐라. 보리밥에 척척 걸쳐 묵어보마 임금님 부럽지 않을끼다.”
집에 오자 마자가 보릿가루, 밀가루, 콩가루를 모아 물을 끓여 식혀놓고 홍고추를 어슷썰기로 썰어 놓는다. 식은 풀물에 생된장 한 숟가락을 풀어놓는다. 콩잎 뒷면이 약간 까칠한데 된장이 들어가면 콩잎이 부드러워지며 풋내도 가신다. 마지막에 소금 간한 풀물을 부어두면 금방 맛있는 김치가 된다.
마른 오징어를 물에 불렸다가 살살 찟어 막 달린 애호박을 얍실하니 썰어 넣고 갖은 양념을 한 다음 밥 위에 쪄냈다. 마른오징어 껍질에서 우러난 국물색깔은 가지 색이었다.
<헐티로 568>
다문다문 집이 보이고 전부 산과 들이다. 절정에 닿은 초록이 온통 마을을 감싸고 있다. 저수지 뚝방 길을 지나 산 아래로 돌아나가는 길은 산책길로 적당하다.
-고구마 줄기 벗기는 할머니 엄지에 까맣게 풀물이 올랐다. 세월이 고스란히 쌓인 손가락든 지문이 닳아 없어지고 깊게 균열이 갔다. 슬쩍 끼어 앉자 늘 같이 다듬던 사람인 양 이물 없이 다리를 죽 뻣고 앉아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한다. 그 이야기 맛이 단지 안에서 하나씩 꺼내 먹는 홍시처럼 달고 맛나다. 잠시 쪼그리고 앉으니 익숙한 향기가 전해진다. 알싸한 초피냄새. 뜨거운 추어탕 먹을 때 국보다 먼저 코를 자극해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게 하는 초피. 그 냄새가 작은 소쿠리에 잘 익어 벌어진 초피가 소복이 담겨 있다. 씨는 까맣게 반질거리고 껍질은 단풍이 들어 날개처럼 펼쳐졌다. 검은 씨앗보다 우리가 정작 음식에 사용하는 것은 얇은 저 껍질이다.
-장독대에 바바람과 햇살이 수시로 넘나들어야 음식이 제대로 익는다. 그 이후 움식 빚는 것은 자연이다. 음식을 말려 보면 볕에 마르는 것보다 바람에 더 잘 마른다. 볕은 음식을 소독해주고 바람은 음식 사이에 수분을 거둬가는 일을 한다. 볕보다 바람이 잘 쳐야 음식이 고루 잘 마른다.
<논배미에 물을 빼면>-추어탕
<겨울 한>
목단 꽃 이불 아래 온 식구가 부챗살처럼 발을 묻고 누웠으면 겨울이 깊을 대로 깊었다. 능금나무 가지 사이로 무성하던 이파리들이 사라지고 동구 밖이 훤히 내다보이면 겨울은 이미 반이나 지난 때였다.
<눈빛 승마>
우기의 숲은 축축하고 깊다. 초록이 짙어지면 검정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여름 숲에서 깨닫는다. 넝쿨이 나뭇가지를 딛고 음습한 숲 안에는 비릿한 풋내 가득하다. 긴 작대기로 풀을 눕히고 숲의 내부로 들어간다. 거미줄이 목을 감들 때도 있고 넝쿨이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 음식은 먹어 맛이기도 하지만 장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이런 생소한 즐거움이 나를 더 매료시키는지 모른다.
<은월당>오밀조밀 머리 맞댄 봉분이 정겹다. 비탈 위에 앉은 집은 아래서 올려다보니 작은 오새 같다. 낮은 추녀를 감싸고 둘러 처진 흰 차양은 멀리서 보니 영락없는 성벽이다. 창 열고 내다보니 푸른 배 밭이 발아래 출렁인다.
-끓는 물에 소금 넣고 나물을 데치니 비릿한 풋내와 함께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한 숨 생기를 거둔 나물을 찬물에 행귀 한 뭉치는 초고추장에 나머지는 된장에 무친다. 손가락 사이로 양념이 빠져나올 만큼 치댄 뒤 맛을 보니 부드러운 나물 저 너머에 봄이 함께 있다.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빙 둘러앉으니 식구 같다. 멀었던 시간이 단번에 좁혀지며 밥상머리가 따뜻해진다. 이 따뜻한 시간이 포개져 탑을 이루면 또 한 생애가 되는 것을.
-귀한 소채에 밥 한 덩이 얹고 쌈을 싼다. 볼이 미어지라고 한 쌈 먹고 나니 저 아래서부터 차올라 오는 그득함이라니 입안이 극락이다. 밥 한술에 만복이 깃들어 있다. 만화방창(따뜻한 봄날, 만물이 자라남을 뜻함) 넉넉함보다 부족한 가운데 피우는 일에 몰두한 저 가녀린 새싹이 내 마음을 흔드는 새벽, 다시 실뱀 같은 길을 따라 차밭에 오른다.
<고수레>
가을은 절로 인심 나는 계절이고 삼라만상 보이지 않는 영혼에게도 아낌없이 나누는 때라 더욱 그러하다. 곳간에서 인심 나누고 우선 그득하게 쌓이는 계절이니 마음 퍼내는 일 또한 넉넉해질 수밖에 없다. 가을에는 필요 이상의 욕망이 꼬리를 내리고 사라진다. 꼭 필요한 하나만 가져도 삶은 얼추 굴러가기 때문이다. 하는 뒤로 감추고 다시 하나 더 갖기를 애쓰다 보면 허깨비에 홀려 즐거움을 포기하게 된다.
-술이 차니 잔이 살아난다. 세상 모든 기운이 술잔에 찰랑거린다.
<꽃감>
봄은 스미듯 오고 가을 찬바람은 채비할 새도 없이 황급히 달려든다. 하늘로만 치솟던 기운이 모두 땅으로 내려앉았다. 찬기가 땅으로 내려오니 땅에 뿌리를 둔 모든 것이 알이 차고 단맛이 든다. 감나무 잎이 하루가 다르게 붉게 물 더니 까치의 걸음도 잦아졌다. 부지런히 쪼아 먹은 까치와 제 볼을 다 뜯기고도 가지 끝에 의연히 매달린 감을 보면 가을은 분명 서로 아낌없이 나누는 계절이다. 초록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붉게 물 드는 시간이 더 빠른 시절이다. 할머니는 무슨 거름과 덕담으로 농사를 짓는지 늘 동네에서 제일 알이 실한 놈으로 수확을 한다. 오래 가을볕을 몸속에 받아들이고 나면 점점 떫은맛은 사라지고 단맛이 차올라 올 것이다. 척척 걸어둔 곶감 사이로 산바람이 드나든다. 가을비만 잘 피하면 제대로 단맛이 오르겠지. 꽃 피우는 일은 뿌리의 안간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차 오르는 말>
숲의 품이 가을 되어 성글어지더니 초겨울 비바람에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가지 사이로 산의 등짝이 여기저기 뼈대를 드러내고 골과 골 사이 물의 흔적도 잎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적막한 겨울을 보내고 나면 생명이 되는 씨앗과 거름이 되는 씨앗이 따로 있을 것이다. 아무도 눈치 못 채는 땅 속 분주함이 씨앗 속에는 함께 공존한다.
-완만하게 휘어진 논둑길은 흙이 아직 얼지 않고 부드럽다. 한참을 걸어 가까이가 보니 백양나무다. 흰 표피 사이로 검은 점들이 널려 있고 자잘한 점 사이로 옹이같은 큰 점이 하나씩 박혀 있는데 얼른 보니 사람의 눈 같다. 드문드문 하나씩 박힌 옹이는 아무리 봐도 외눈박이다. 촉촉이 젖은 커다란 눈은 백양나무 곳곳에 숨어 처연히 깊어가는 겨울을 내다보고 있다 .나무 어디쯤에서 길어 올리는 눈빛인지 자못 깊고 검다.
-해를 배경으로 촘촘히 지어진 까치집 구조가 있는 그대로 풍경이다. 얼기설기 짠 나뭇가지 사이로 해가 지는 쪽과 그 반대쪽의 명암이 선명하게 갈라지며 여태 없던 까치집이 오늘 새로 이사라도 온 듯 도드라져 보인다. 넋 놓고 까치집 사이로 부서지는 해를 바라본다. 은행나무 품속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집이 숨어 있었구나.
<꾼>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장사꾼은 돈과 싸우지 않는다.
‘손님구함’ 문구를 써 붙여 두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마음 반은 무장해제 시킨다. 짧고 환한 말 한마디가 언 마음을 일시에 녹인다.
<복>
복이 생기되 지닐 수 있을 만큼만, 남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소소하게 다가오는 그런 복이 진짜 복이다.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으니 구름 위를 걸어가는 듯 황홀해진다. 돈을 버는 사람이 임자가 아니라 돈을 쓰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