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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姜玉)
세종 37권, 9년(1427 정미/명선덕(宣德) 2년) 7월 20일(병오) 4번째기사
명나라에 보낸 마적, 여아, 다반을 지을 줄 아는 부녀에 대한 주본
안수산(安壽山)이 마적(馬籍)의 주본(奏本)을 가지고 갔는데 그 주본에,
“조선국왕 신(臣) 모(某)는 삼가 아뢰옵니다. 선덕(宣德) 2년 4월 21일 흠차 태감(欽差太監) 창성(昌盛), 윤봉(尹鳳)등 관원이 칙유(勅諭)를 받들고 본국(本國)에 도착하여, 말 5천필을 뽑아가지고 와서 국용(國用)에 도우라고 하므로, 이 일에 대하여 신은 본국의 종친과 문무의 모든 신료들과 군사와 백성들의 말이 있는 집에는 힘을 다하여 조치 처리하여, 잡색마 5천필을 나누어 아홉 갈래로 만들어 차관(差官)이 감독하여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가게하여 교부(交付)하기를 마쳤으므로, 지금 도착된 마적(馬籍)을 두 짝[扇]을 만들어 배신(陪臣)인 중군도총제 안수산(安壽山)을 보내 주본(奏本)을 가지고 예부(禮部)에 와서 바치고 난 후에 삼가 주문(奏聞)합니다.”하였다.
여아(女兒)를 바치는 주본(奏本)에,
“신은 흠차태감(欽差太監) 창성(昌盛), 윤봉(尹鳳)등 관원과 함께 먼저 간택한 여아(女兒) 5명중에서 다시 3명을 가려뽑고, 또 서울에 있는 종친, 문무 양반과 각도의 부, 주, 군, 현의 양반, 군사, 민간의 집안 여아 4명을 가려 뽑아 합계 7명인데, 배신(陪臣)인 중군도총제 안수산(安壽山)과 각 집의 부친, 친족과 공조판서 성달생(成達生)등 7명의 관원을 보내어 흠차관(欽差官) 을 뒤따라 호위하여 서울 밖으로 보냈습니다. 지금 각 여아의 생년월일과 아버지의 관직, 성명 본관까지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열거합니다.
한 사람은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니, 나이 17세로서 신묘년 8월 17일 신시(申時)에 출생하고, 본관은 경상도 창녕현(昌寧縣)인데 현재는 한성부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우군동지총제 차지남(車指南)의 딸이니, 나이 17세로서 신묘년 10월 21일 해시(亥時)에 출생하고, 본관은 황해도 연안부(延安府)인데 현재 한성부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진용부위(進勇副尉) 우군사정 안복지(安復志)의 딸이니, 나이 11세로서 정유년 윤5월 12일 인시(寅時)에 출생하고, 본관은 충청도 죽산현(竹山縣)인데 현재 한성부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진용부위 우군사정(右軍司正) 오척(吳倜)의 딸이니, 나이 12세로 병신년 10월 26일 인시(寅時)에 출생하고, 본관은 전라도 보성군(寶城郡)인데 현재 충청도 진천현(鎭川縣)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선략장군호용시위사우령호군(宣略將軍虎勇侍衛司右領護軍) 정효충(鄭孝忠)의 딸이니, 나이 14세로서 갑오년 12월 29일 묘시(卯時)에 출생하고, 본관은 충청도 청주(淸州)인데 현재 한성부(漢城府)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수의부위중군부사정(脩義副尉中軍副司正) 최미(崔濔)의 딸이니, 나이 13세로서 을미년(乙未年) 2월 16일 해시(亥時)에 출생하고, 본관은 전라도 화순현(和順縣)인데 현재 경기도의 김포현(金浦縣)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창신교위좌군사직(彰信校尉左軍司直) 노종득(盧從得)의 딸이니, 나이 12세로서 병신년 9월 28일 자시(子時)에 출생하고, 본관은 경기도 교하현(交河縣)인데 현재 한성부(漢城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라 하고,
다반(茶飯)을 지을 줄 아는 부녀의 주본(奏本)에는,
“다반(茶飯)을 지을 줄 아는 부녀 10명을 가려뽑아서 가는 여아들을 뒤따라 북경(北京)으로 가게 했사온데, 지금 부녀들의 화명(花名)을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열거합니다.
1. 부녀 10명은 소옥(小玉), 중금(重今), 조운(朝雲), 보대(寶臺), 진주(眞珠), 연연(娟娟), 계화(季花), 선장(善莊), 수정(守貞), 연아(燕兒)입니다”라고 하였다. 여사(女使)와 화자(火者)의 주본(奏本)에는,
“지금 가는 여아(女兒)들에게 뒤따라 보내는 여사(女使)와 화자(火者)의 수목(數目)과 화명(花名)을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열기(列記)합니다.
1. 여사(女使)는 16명인데, 돈일(頓一), 사계(四季), 장명(長命), 작약(芍藥), 팔월(八月), 이아(李兒), 고지(古芷), 연이(衍伊), 정월(正月), 장미(薔薇), 황부(黃富), 칠보(七寶), 권득(權得), 연지(燕脂), 최장(崔莊), 소구(小狗) 이고,
1. 화자(火者)는 10명인데 최해(崔海), 최원(崔原), 박순(朴順), 김충(金忠), 김경(金敬), 김우(金雨), 강옥(姜玉), 한녹(韓祿), 고우(高祐), 지만(池滿)입니다.”하였다.
○安壽山齎去馬籍奏本曰:
朝鮮國王臣某謹奏。 宣德二年四月二十一日, 欽差太監昌盛、尹鳳等官, 齎捧勑諭到國, 〔節〕該: “選取馬五千匹進來, 以資國用。” 欽此。 臣於本國宗親及文武大小臣僚幷軍民有馬之家, 儘力措辦, 雜色馬五千匹, 分作九運, 差官管押, 送赴遼東都司, 交割了訖。 今攅造到馬籍二扇, 差陪臣中軍都摠制安壽山, 齎領前赴禮部投呈外, 謹具奏聞。
女兒奏本曰:
臣同欽差太監昌盛、尹鳳等官, 將在先選揀女兒五名內, 更選三人,又將在城宗親文武兩班及各道府州郡縣兩班軍民之家女兒, 選揀四名共七名, 差陪臣中軍都摠制安壽山及各家父親親眷工曹判書成達生等七員, (根)〔跟〕同欽差官等, 衛送赴京外, 今將各女兒生年月日幷父職姓名籍貫, 一一開坐。 一名正憲大夫、工曹判書成達生女子, 年一十七歲, 辛卯八月十七日申時生, 籍貫慶尙道昌寧縣, 見住漢城府。 一名嘉善大夫、右軍同知摠制車指南女子, 年一十七歲, 辛卯十月二十一日亥時生, 籍貫黃海道延安府, 見住漢城府。 一名進勇副尉、右軍司正安復志女子, 年一十一歲, 丁酉閏五月十二日寅時生, 籍貫忠淸道竹山縣, 見住漢城府。 一名進勇副尉、右軍司正吳倜女子, 年一十二歲, 丙申十月二十六日寅時生, 籍貫全羅道寶城郡, 見住忠淸道鎭川縣。 一名宣略將軍、虎勇侍衛司右領護軍鄭孝忠女子, 年一十四歲, 甲午十二月二十九日卯時生, 籍貫忠淸道淸州, 見住漢城府。 一名脩義副尉、中軍副司正崔濔女子, 年一十三歲, 乙未二月十六日亥時生, 籍貫全羅道和順縣, 見住京畿道金浦縣。 一名彰信校尉、左軍司直盧從得女子, 年一十二歲, 丙申九月二十八日字時生, 籍貫京畿道交河縣, 見住漢城府。
做會茶飯婦女奏本曰:
選揀到會做茶飯的婦女一十名, 令(根)〔跟〕隨進去女兒等赴京外, 今將婦女開坐花名。 一, 計婦女子一十名, 小玉、重今、朝雲、寶臺、眞珠、娟娟、季花、善莊、守貞、燕兒。
女使火者奏本曰:
今將進去女兒等(根)〔跟〕隨女使火者數目花名開坐。 一, 女使一十六名, 頓一、四季、長命、芍藥、八月、李兒、古芷、衍伊、正月、薔微、黃富、七寶、權得、燕脂、崔莊、小狗。 一, 火者一十名, 崔海、崔原、朴順、金忠、金敬、金雨、姜玉、韓祿、高祐、池滿。
문종 3권, 즉위년(1450 경오/명경태(景泰) 1년) 8월 11일(임오) 9번째기사
윤봉이 다시 입조하기를 청하다
윤봉(尹鳳)이 다시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니, 화자(火者)650) 최존자(崔存者), 강옥(姜玉), 김득(金得), 박근호(朴根戶)와 조양(趙良)의 아우 조귀(趙貴)와 수호(守戶)가 따라갔다.
註650]화자(火者): 거세(去勢)하여 부리던 남자 아이. 환관(宦官) 후보자를 말함
○ 尹鳳 請復入朝, 火者 崔存者 、 姜玉 、 金得 、 朴根戶 , 及 趙良 弟 趙貴 、 守戶 , 從之。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2월 24일 을묘 1번째기사
명나라 사신 강옥, 김보가 출발하다. 김석을산을 체포하다
주문사(奏聞使) 고태필(高台弼), 사은사(謝恩使) 조근(趙瑾), 정조사(正朝使) 박훤(朴萱)등이 통사(通事) 김자해(金自海)를 보내어 아뢰기를,
“명(明)나라 사신(使臣)인 태감(太監)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출발하여 옵니다.”하고,
김자해가 아뢰기를,
“강옥(姜玉)의 집은 공주(公州)에 있는데, 어미와 아우, 누이의 존몰(存沒)을 물었고, 김보(金輔)의 집은 장단(長湍)에 있는데 또한 그 부모(父母)의 안부(安否)를 물었습니다.”하니,
임금이 즉시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그 부모, 형제의 존몰을 물어서 계문하게 하였다. 당시에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 호조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등이 입내(入內)하여 사신(使臣)을 지대(支待)할 모든 일을 의논하니, 임금이 홍윤성(洪允成)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김석을산(金石乙山)의 살인(殺人)한 일로 염려하지 말라. 일이 사직(社稷)에 관계될 것같으면 말겠거니와 제가 스스로 살인한 것이니, 경(卿)이 어찌 참여하겠느냐?”하니,
신숙주(申叔舟)가 대답하기를,
“살인한 것은 비록 김석을산에게 있더라도, 그러나 죽이게 한 것은 진실로 홍윤성의 위세(威勢)에 인연하였으니, 홍윤성은 책임을 사양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윤성은 죄가 없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하고,
명하여 모두 밖에서 술을 먹이어 술을 두 번 돌렸는데, 홍윤성이 급히 그의 장막(帳幕)으로 돌아가고, 잠깐 있다가 유도장상(留都將相)등이 김석을산을 잡아 형틀에 매어서 보냈으므로,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의 옥(獄)에 내려 단단히 가두게 하였다.
○乙卯/奏聞使高台弼、謝恩使趙瑾、正朝使朴萱等, 遣通事金自海啓: “明使太監姜玉、金輔出來。” 自海啓曰: “姜玉家在公州, 問母及弟妹存沒。 金輔家在長湍, 亦問其父母安否。” 上卽令其道觀察使, 問其父母兄弟之存沒以聞。 時, 高靈君申叔舟、綾城君具致寬、寧城君崔恒、仁山君洪允成、戶曹判書盧思愼等入內, 議使臣支待諸事。 上謂允成曰: “卿勿以石乙山殺人事動慮。 事若關係社稷則已矣, 彼自殺人, 卿何與焉?” 叔舟對曰: “殺人雖在石乙山, 然使之殺者, 實因允成威勢, 允成不得辭責。” 上曰: “允成無罪, 勿復有言。” 命皆饋酒于外, 酒二行,允成遽歸其幕。俄而留都將相等,捕械石乙山以送,命下義禁府獄牢囚之。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2월 26일 정사 2번째기사
강옥의 누이에게 쌀을 주고, 매형의 군역을 면제하다
태감(太監) 강옥(姜玉)의 누이인 학생(學生) 김득(金得)의 아내와 김화상(金和尙)의 아내에게 각각 미두(米豆) 5석씩을 내려 주고, 이어서 김득(金得)의 군역(軍役)을 면제하여 벼슬을 주었다.
○賜太監姜玉妹、學生金得妻及金和尙妻, 各米豆各五石, 仍免金得軍役授職。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2월 26일(정사) 4번째기사
원접사에게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사목을 내리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원접사(遠接使) 윤자운(尹子雲)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여기에 동봉(同封)하는 사목(事目)을 잘 살펴서 시행하되, 또 각처(各處)의 선위사(宣慰使)등에게 무릇 차는 문서(文書)와 낭자(囊子)8237)에 들은 것을 보이어, 모름지기 견고하게 매는데에 힘써서 이제는 유실(遺失)함이 없게 하라.”하고,
그 사목(事目)에 이르기를,
“1. 명나라 사신(使臣)인 강옥(姜玉)이 만약 그 어미의 안부를 묻거든, 대답하기를, ‘우리가 올 때 듣건대, 전하께서 대인(大人)을 위하여 본향(本鄕)을 방문하게 하였더니, 모씨(母氏)는 일찍이 갑술년8238) 5월 초1일에 몸이 죽었다하며, 그 나머지 친척에게는 혹은 물건을 내려주고, 혹은 벼슬을 제수하며, 혹은 완호(完護)하게 하였다.’하라. 만약 어찌하여 자문(咨文)8239)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묻거든, 대답하기를 ‘사는 곳의 주관(州官)에서 아뢰지않았던 까닭으로 자문을 보내지 못하였다.’고 하되, 승문원(承文院), 예조(禮曹)의 문서(文書)를 상고하여 만약 이미 자문을 보냈다면, 모년(某年) 모월(某月) 일(日)에 이미 자문을 보낸 것으로써 대답하게 하라.
1. 무릇 공사(公事)에 관계되거든, 모두 대답하기를 ‘마땅히 전하(殿下)에게 아뢰겠다.’하고, 긴요하게 관계되는 절목(節目)에 이르러서는 더욱 천단(擅斷)하여 대답함은 불가(不可)하니, 일체 관찰사(觀察使), 수령(守令)과 더불어 한가지로 노상(路上)에서 의논하게 하라.
1. 명나라 사신 앞에서 고장(告狀)하는 사람과 기곤(飢困), 빈잔(貧殘)한 사람을 금지하게 하라.
1. 지나가는 여러 고을과 여러 역(驛)의 법령(法令)과 문서책(文書冊)은 관찰사, 수령과 더불어 미리 먼저 조치하여, 남김없이 철거(撤去)하게 하라.
1. 무릇 행례(行禮)에 관계되는 절차(節次)는 차오(差誤)가 있어서는 불가하니, 관찰사와 더불어 마음을 다하여 고찰(考察)하게 하라.
1. 만약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한 일을 묻거든, 대답하기를 ‘칙서(勅書)가 이르던 날로 즉시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에게 명하여, 본도(本道)의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정벌하러 들어갔다.’하고, 만약 다시 자세하게 묻거든, 대답하기를 ‘우리의 소관(所管)이 아니니 자세히 알 수 없다.’하라.
1. 만약 이시애(李施愛)의 반역한 일을 묻거든, 대답하기를 ‘이시애는 함길도(咸吉道)에 살면서 절도사(節度使)와 더불어 원한을 품고, 인하여 난(亂)을 일으켰다.’하되, 만약 자세하게 묻거든, 대답하기를 ‘한번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다.’하고, 그 장수가 누구냐고 묻거든, 대답하기를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조석문(曹錫文), 강순(康純)등이다.’하라.
또 자세하게 묻거든 소관(所管)이 아니라 알지못한다고 대답하라.
1. 원접사(遠接使), 선위사(宣慰使)는 전례에 따라 교외에서 맞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칙(詔勅)이 이른 뒤에 행례(行禮)하게 하라.
1. 기녀(妓女)가 있는 곳은 여악(女樂)을 쓰되, 물리치거든 쓰지말게 하라.
1. 지대(支待)하는 모든 일은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하게 하라.
1. 연로(沿路)의 군사(軍士)는 구례에 의하여 앞에 3패(牌), 뒤에 3패(牌)로 하고, 의갑(衣甲)8240)이 정제하지못한 자는 관(官)에서 주되, 공사(公私)의 갑옷은 다른 빛깔로 하지말게 하며, 기마(騎馬)는 비록 서로 빌려주더라도 파리하고 수척한 것은 하지말게 하라.
1. 명나라 사신의 의복[衣], 갓[笠], 목화[靴]의 체제(體制)는 번거로워 자세하게 알지못하니, 미리 먼저 계문(啓聞)하게 하라.
1. 번국(藩國)8241)의 의주(儀註) 1건(件)을 가지고 가게 하라.
1. 역기(驛騎)가 부족하거든 역(驛)을 지나게 하라.”하였다.
註8237]낭자(囊子): 주머니 註8238]갑술년: 1454 단종 2년 註8239]자문(咨文): 조선조때 중국과 왕래하던 외교문서의 하나. 국왕의 명의로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의 각 부인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과 동등한 관계에서 조회, 통보, 회답하던 문서임.註8240]의갑(衣甲): 갑옷.註 8241]번국(藩國): 우리나라
○承政院奉旨馳書于遠接使尹子雲曰: “可審此同封事目施行, 且示各處宣慰使等, 凡所佩文書所入囊子, 務要牢繫, 勿令遺失。” 其事目曰: “一, 明使姜玉, 若問其母安否, 答曰: ‘我來時聞, 殿下爲大人, 訪問本鄕, 母氏曾於甲戌五月初一日身死, 其餘親戚或賜物, 或除職或完護。’ 若問何不移咨, 答曰: ‘所居州官不啓, 故不移咨。’ 考承文院、禮曹文書, 若已咨, 則答以某年某月日已移咨。 一, 凡干公事, 皆答曰: ‘當啓殿下。’ 至於緊關節目, 尤不可擅便對之, 一與觀察使、守令, 同議於路上。 一, 禁明使前告狀人及飢困、貧殘人等。 一, 所徑諸邑諸驛法令文書冊, 與觀察使、守令, 預先措置, 無遺撤去。 一, 凡干行禮節次, 不可差誤, 與觀察使盡心考察。 一, 若問征建州衛事, 答曰: ‘勑書到日, 卽命康純、魚有沼、南怡, 領本道兵一萬入征。’ 若更詳問, 答曰: ‘非我所管, 不能詳知。’ 一, 若問李施愛叛逆事, 答曰: ‘施愛居咸吉道, 與節度使構怨, 因而作亂。’ 若詳問, 答曰: ‘一命將討之。’ 問其將誰, 對: ‘以龜城君浚、曺錫文、康純等。’ 又詳問, 則答以非所管不知。 一, 遠接使、宣慰使, 依前除郊迎, 詔勑至後行禮。 一, 有妓處用女樂, 却之則勿用。 一, 支待諸事, 一依舊例。 一, 沿路軍士依舊例, 前三牌後三牌, 衣甲不整者, 官給之, 勿令公私甲異色, 騎馬雖相借與, 勿令羸瘦。 一, 明使衣、笠、靴體制, 不煩詳知, 預先啓聞。 一, 齎去藩國儀註一件。 一, 驛騎不足, 則過驛。”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2월 29일(경신) 2번째기사
윤길생, 김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길생(尹吉生)을 행중추부첨지사(行中樞府僉知事)로, 김담(金淡)을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으로, 김순복(金純福)을 충좌위부호군(忠佐衛副護軍)으로, 김동(金同)을 호분위부사과(虎賁衛副司果)로, 김득(金得)을 의흥위부사맹(義興衛副司猛)으로 삼으니, 윤길생은 윤봉(尹鳳)의 삼촌질(三寸姪)이고, 김담은 김흥(金興)의 삼촌숙(三寸叔)이며, 김순복은 김보(金輔)의 아비이고, 김동은 김보의 형(兄)이며, 김득은 강옥(姜玉)의 매부(妹夫)이었다.
○以 尹吉生 行中樞府僉知事, 金淡 行龍驤衛副護軍, 金純福 忠佐衛副護軍, 金同 虎賁衛副司果, 金得 義興衛副司猛。 吉生 , 尹鳳 三寸姪; 淡 , 金興 三寸叔; 純福 , 金輔 父; 同 , 金輔 兄; 得 , 姜玉 妹夫也。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3월 2일 임술 5번째기사
태감 강옥의 족친들의 정원을 묻다
신숙주(申叔舟), 구치관(具致寬), 우승지(右承旨) 어세겸(魚世謙)등에게 명하여, 태감(太監) 강옥(姜玉)의 족친(族親)들의 정원(情願)을 묻게하니, 매부(妹夫) 박금생(朴今生)이 말하기를,
“노비(奴婢)를 판결하여 얻은 뒤에 입안(立案)을 받지못하였습니다.”하고,
조카 중[僧] 신은(信恩)은 말하기를,
“법(法)을 어겼다하여 중[僧]이 되고 정병(正兵)의 조정(助丁)이 되었으니, 이제 환속(還俗)하여 벼슬을 받고자 합니다.”하고,
표질(表姪)8254) 김남(金南)은 말하기를,
“상송(相訟)하는 노비(奴婢)를 빨리 처결해주기를 원합니다.”하고,
먼 일가붙이 김보생(金寶生), 김모지리(金毛知里)등은 말하기를,
“노비(奴婢)를 송리(訟理)한 일을 가지고 상언(上言)한 뒤에, 결정하여 끝낸 것을 알지 못합니다.”하고,
유극명(劉克明)은 말하기를,
“변방(邊方)으로 옮기는 예(例)에 들어 있으니 민망하고, 또 김옥(金玉)과 더불어 노비(奴婢)를 상송(相訟)하였으니, 빨리 처결해 주기를 원합니다”하므로, 신숙주등이 아뢰기를,
“아울러 원하는 대로 따라 시행(施行)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으나, 다만 중[僧] 신은(信恩)만은 환속(還俗)하지 말고, 단지 군역(軍役)만을 면제하게 하였다. 신숙주등이 또 아뢰기를,
“강옥(姜玉)의 매부(妹夫) 김득(金得), 김보(金輔)의 아비 김순복(金純福)등은 아울러 평안도(平安道)에 보내고, 강옥(姜玉)의 매부(妹夫) 박금생(朴今生)과 삼촌질(三寸姪) 김남(金南)등은 아울러 벽제역(碧蹄驛)에 보내며, 김보(金輔)의 동생(同生)과 숙질(叔姪), 형제(兄弟)등은 환궁(還宮)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아울러 개성부(開城府)에 보내어 맞이하여 오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김득(金得), 박금생(朴今生), 김남(金南)등에게 아울러 병조(兵曹)로 하여금 역말[馹]을 주어 올려 보내도록 하라.”하였다.
註8254]표질(表姪): 외당질
○命申叔舟、具致寬、右承旨魚世謙等, 問太監姜玉族親等情願。 妹夫朴今生曰: “奴婢決得後, 未受立案。” 姪子僧信恩曰: “以違法爲僧, 爲正兵助丁, 今欲還俗受職。” 表姪金南曰: “願速決相訟奴婢。” 遠族金寶生、金毛知里等曰: “以奴婢訟理事上言後, 未知發落。” 劉克明曰: “在徙邊之例爲悶, 且與金玉相訟奴婢, 願速決。” 叔舟等啓曰: “竝依從願施行。” 從之。 但僧信恩勿還俗, 只除軍役。 叔舟等又啓曰: “姜玉妹夫金得、金輔父純福等, 竝送平安道, 姜玉妹夫朴今生及三寸姪金南等, 竝送碧蹄驛, 金輔同生及叔姪、兄弟等, 還宮後更議, 竝送開城府迎來。” 傳曰: “金得、朴今生、金南等, 竝令兵曹給馹上送。”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3월 24일(갑신) 2번째기사
원접사 윤자운이 사신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음을 아뢰다
원접사(遠接使) 윤자운(尹子雲)이 승정원(承政院)에 봉서(封書)하여 아뢰기를,
“이달 22일에 명(明)나라 사신인 강옥(姜玉), 김보(金輔)등이 칙서(勅書)를 가지고 압록강(鴨綠江)에 도착하였는데, 두목(頭目) 40인, 궤자(樻子) 1백70, 도사(都司) 2인이었습니다.”하였다.
○遠接使尹子雲奉書于承政院以啓曰: “本月二十二日, 明使姜玉、金輔等, 齎勑到鴨綠江, 頭目四十人, 櫃子一百七十, 都司二人。”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3월 26일 병술 1번째기사
원접사 윤자운이 강옥, 김보의 행보를 아룀. 군정의 일외에 역말의 사용을 금지하다
원접사(遠接使) 윤자운(尹子雲)이 승정원(承政院)에 봉서(奉書)하여 아뢰기를,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이달 24일에 의주(義州)를 출발하였으니, 마땅히 4월 초9일에는 서울에 들어갈 것입니다.”하였다.
의주지인(義州知印) 김태산(金泰山)이 이 글을 가지고 의주(義州)로부터 무릇 3일을 달려 서울에 도착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빨리 달리면, 말[馬]이 반드시 피폐(疲斃)할 것이다.”하고,
즉시 승정원으로 하여금 8도의 관찰사(觀察使), 절도사(節度使)에게 치서(馳書)하게 하기를,
“이제부터는 군정(軍情)의 일이 아니면, 역말 달리는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라.”하였다.
○丙戌/遠接使尹子雲奉書于承政院以啓曰: “姜玉、金輔, 本月二十四日發義州, 當於四月初九日入京。” 義州知印金泰山將此書, 馳自義州, 凡三日到京, 上曰: “如此疾馳, 馬必疲斃。” 卽令承政院馳書于八道觀察使、節度使曰: “自今非軍情事, 不許馳驛。”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3월26일 병술 2번째기사
강옥의 족친이 강옥을 알현할 때에 김보의 족친의 예에 따라 갖추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이계전(李季專)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명(明)나라 사신인 강옥(姜玉)의 족친(族親) 김득(金得)등이 개성부(開城府)에서 강옥을 알현(謁見)할 때에는, 주효(酒肴)와 떡[餠]을 김보(金輔)의 족친의 예(例)를 따라 갖추어 주라.”하였다
○承政院奉旨馳書于京畿觀察使李季專曰: “明使姜玉族親金得等, 於開城府謁見姜玉時, 酒肴及餠, 依金輔族親例備給。”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3월 27일 정해 7번째기사
강옥, 김보가 가평관에 도착하니, 성윤문이 행신할 물건을 주다
이날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가평관(嘉平館)에 도착하니, 별선위사(別宣慰使)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윤문(成允文)이 행신(行贐)8328)할 물건을 가지고 가서 주었는데, 강옥, 김보가 배수(排受)하고 사례하기를,
“전하(殿下)의 후의(厚意)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하였다.
두목(頭目)의 처소에도 또한 행신(行贐)을 주었더니, 모두가 재배(再拜)하고 사은(謝恩)하였다. 김보가 사사로이 성윤문에게 이르기를,
“신(臣)은 전하가 즉위한 뒤에 중국 조종에 뽑혀 들어갔는데, 전하가 임(臨)하여계신 태평스러운 해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동쪽으로 돌아와 천안(天顔)을 뵙게 되니, 이는 바로 천(千)의 하나 밖에 없는 다행함이니, 모름지기 이 뜻으로써 돌아가 전하에게 아뢰겠습니다.”하였다.
강옥, 김보가 안주(安州)에 도착하니, 처음으로 여악(女樂)을 썼다.
선위사(宣慰使) 윤필상(尹弼商)이 병이 있어 원접사(遠接使) 윤자운(尹子雲)이 선위례(宣慰禮)를 대행(代行)하였는데, 강옥, 김보가 조석(朝夕)의 식사와 선위(宣慰)한 뒤마다 말하여 일컫기를,
“우리들은 본국(本國)사람인데, 전하께서 곡진하게 사랑하여 위로하고 접대하여 주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천지(天地)가 감동(感動)할 것입니다.”하였다.
註8328]행신(行贐):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시문이나 물건을 주는 것.
○是日, 姜玉、金輔到嘉平館, 別宣慰使右副承旨成允文將行贐物件贈之, 玉、輔拜受謝曰: “殿下厚意, 圖報末由。” 頭目處亦贈行贐, 皆再拜謝恩。 輔私謂允文曰: “臣於殿下卽位之後, 選入中朝, 殿下臨朝太平之年, 奉使東還, 得覩天顔, 斯乃千一之幸, 須將此意歸啓殿下。” 玉、輔到安州, 始用女樂。 宣尉使尹弼商有疾, 遠接使尹子雲代行宣慰禮。 玉、輔每於朝夕食及宣慰後說稱: “我等本國人, 殿下曲盡垂憐, 慰接至此, 感動天地。”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일 경인 1번째기사
도적을 추국하는 일의 의논. 강옥의 친지가 사은을 심으려하는 것을 효유하다
비현합(丕顯閤)에 나아가,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좌의정(左議政) 박원형(朴元亨)을 불러 근일에 잡은 도적(盜賊)의 추국(推鞫)하는 일을 의논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영유(李永蕤의 종[奴] 망달(亡達)이란 자가 같은 무리를 고발하여 잡게 하고 면천(免賤)을 얻었으니, 이것은 바로 만이(蠻夷)로써 만이(蠻夷)를 공격함이다. 이 뒤로 이 종[奴]은 반드시 도적의 무리에 뜻하지를 못할 것이니, 진실로 이 종의 불행한 일이다.”하니,
구치관이 말하기를,
“사패(賜牌)의 안에, ‘같은 무리의 강도 아무 아무[某某]를 고발하여 잡게 하고 상(賞)을 받았다.’고 일컬었으니, 이것은 마땅히 자손에게 전하여, 영구히 강도의 이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 종[奴]은 우선 면천(免賤)하여 상(賞)을 받은 것만을 기뻐하였지 어찌 그 다른 것을 헤아리겠느냐?”하니,
신숙주가 말하기를,
“근일에 도적을 잡는 것이 바야흐로 급한데, 몰래 훔치는 것은 더욱 심합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까닭이 없고 수색하여 잡는데에 도(道)를 잃었을 뿐이다.
이제부터 방(牓)을 낸 뒤에는, 서로 잡고 고발하기를 다툴 것이니, 비록 수고롭게 수색하여 잡지않는다 하더라도 도적이 스스로 그칠 것이다.”하니,
박원형이 말하기를,
“도적(盜賊)은 마땅히 그 대강(大綱)만을 다스릴 것이요, 세쇄(細鎖)한 도적을 어찌 일일이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명(明)나라 사신인 강옥(姜玉)의 매부 김득(金得), 박금생(朴今生)등이 사사로이 사신(使臣)의 부모(父母)의 상장(喪葬)에 제수(祭需)로 쓴 것과 치부(致賻)한 사람의 성명(姓名)을 기록하여, 강옥이 오기를 기다려 인연하여 계청(啓請)하여서 은행(恩幸)을 요구하려 함을 듣고, 신숙주등에게 이르기를,
“김득(金得)등이 강옥(姜玉)을 빙자하여 사은(私恩)을 심으려하여, 나에게 아뢰지않고 강옥에게 고하려한다하니, 강옥이 비록 있더라도 오히려 죄를 다스릴 만하거든, 하물며 이미 간 뒤이겠느냐?
경(卿)등은 마땅히 김득등을 불러 이 뜻으로써 효유하라.”하였다.
註8329]비현합(丕顯閤): 사정전(思政殿) 동쪽모퉁이의 내상고(內廂庫) 2간(間)에 창문을 그대로 두고서 임금이 거주하는 곳으로 삼고, 이름을 비현합(丕顯閤)이라 하였는데, 《서경(書經)》에서 매상비현(昧爽丕顯)의 뜻을 취한 것임.
○庚寅朔/御丕顯閤, 召高靈君申叔舟、綾城君具致寬、左議政朴元亨, 論近日所捕盜賊推鞫事。 上曰: “李永蕤奴亡達者, 捕告同黨而得免賤, 此正以蠻夷攻蠻夷也。 此後此奴, 必不得志於賊類, 實此奴之不幸也。” 致寬曰: “賜牌內稱: ‘捕告同黨强盜某某而受賞。’ 此當傳之子孫, 永未免强盜之號也。” 上曰: “然。 此奴姑喜免賤受賞, 豈計其他哉?” 叔舟曰: “近日捕賊方急, 而攘竊尤甚。” 上曰: “此無他, 搜捕失道耳。 自今出牓之後, 爭相捕告, 雖不勞搜捕, 而盜自止矣。” 元亨曰: “盜賊但當治其大綱耳, 細瑣之盜, 豈能一一治之?” 上聞大明使姜玉妹夫金得、朴今生等, 私錄使臣父母喪葬所需及致賻人姓名, 待玉來欲因緣啓請, 以要恩幸, 謂叔舟等曰: “金得等憑藉姜玉, 欲樹私恩, 不啓於予, 而欲告姜玉, 姜玉雖在, 猶可治罪, 況旣去之後乎? 卿等宜招金得等, 諭以此意。”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1일 경인 4번째기사
강옥의 본가를 고치도록 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이 아뢰기를,
“강옥(姜玉)이 오면 반드시 공주(公州)의 본가(本家)에 갈 것이니, 경유하는 여러 고을로 하여금 방사(房舍)를 지붕을 잇고 수리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中朝]의 관사(館舍)도 또산 정결(淨潔)한 곳이 없으니, 본가(本家)만은 수즙(修葺)하도록 하라.”하였다.
○都承旨權瑊啓曰: “姜玉來則必往公州本家, 令所徑諸邑, 葺理房舍。” 上曰: “中朝館舍, 亦無凈潔處, 但令修本家。”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일 경인 5번째기사
강옥등이 황주에 이르니, 선위사 성임이 선위례를 행하고 여악을 쓰다
이날 강옥(姜玉)등이 황주(黃州)에 이르니, 선위사(宣慰使) 성임(成任)이 선위례(宣慰禮)를 행하고 여악(女樂)을 쓰니, 김보(金輔)가 말하기를,
“내가 본국(本國)에 있었을 때에 기생[妓] 옥생향(玉生香)의 집에서 자라며 한림별곡(翰林別曲)과 등남산곡(登南山曲)을 익히어, 일찍이 경태황제(景泰皇帝)8333)의 앞에서 불렀다.”하고,
즉시 기생 3, 4인을 불러서 부르게 하고, 말하기를,
“이 곡(曲)은 내가 전에 들었던 것과 다르다.”하고,
또 원접사(遠接使) 윤자운(尹子雲)에게 말하기를,
“건주(建州)를 정벌하는데 군사를 얼마나 썼습니까?”하므로,
대답하기를,
“1만병(兵)이었습니다.”하니,
또 묻기를,
“장수(將帥)는 누구였습니까?”하여,
대답하기를,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입니다.”하였다.
註8333]경태황제(景泰皇帝): 명(明)나라의 경제(景帝).
○是日, 姜玉等至黃州, 宣慰使成任行宣慰禮, 用女樂。 金輔曰: “吾在本國時, 長於妓玉生香家, 習《翰林別曲》及《登南山曲》, 嘗於景泰皇帝前唱之。” 卽招妓三四人唱之曰: “此曲與吾前所聞異矣。” 又語遠接使尹子雲曰: “征建州, 用軍幾許?” 答曰:“一萬兵。” 又問:“將帥誰歟?” 答曰:“康純、魚有沼、南怡。”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6일 을미 1번째기사
강옥 등이 개성부에 이르다. 강옥과 김보가 족친을 만나다
강옥(姜玉)등이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선위사(宣慰使)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등이 선위례(宣慰禮)를 행하였는데, 강옥이 족친(族親) 2인을 보고 그 어미의 안부(安否)를 물으므로, 갑술년8334)에 죽은 것으로 대답하니, 강옥이 슬피울기를 마지아니하였다. 김보(金輔)의 아비 김순복(金純福)이 들어와보니, 김보가 맞아들여 북벽(北壁) 의자(倚子)에 앉게하고, 사배(四拜)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서벽(西壁)의자에 앉았다. 형(兄) 김동(金同)이 들어와 알현하니, 동벽(東壁)에 앉게 하였다. 숙부(叔父) 김순우(金純祐), 김순선(金純善), 김순수(金純粹)도 또한 들어와 알현하려 하니, 김보가 말하기를,
“이분들이 아비의 동모형제(同母兄弟)인가? 내 알지못하였다.”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버린 것은 오로지 이 숙부들이 지휘한 것이다”하였다.
註8334]갑술년 : 1454 단종 2년.
○乙未/姜玉等至開城府, 宣慰使鄭昌孫、魚世謙等, 行宣慰禮。 玉見族親二人, 問其母安否, 答以甲戌年身死, 玉悲泣不已。 金輔父純福入見, 輔迎入坐諸北壁倚子, 四拜扣頭, 坐於西壁倚子。 兄同入謁, 令東壁。 叔父純祐、純善、純粹, 亦欲入謁, 輔曰: “是父之同母兄弟乎? 吾未之知也。” 因曰: “父之棄我母, 專是叔父等指揮也。”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8일 정유 1번째기사
강옥등이 봉산에 도착. 김보가 군수(郡守) 성중식(成重識)등이 절하지않은 것을 책망하다
강옥(姜玉)등이 봉산(鳳山)에 도착하였으므로, 군수(郡守) 성중식(成重識), 훈도(訓導) 윤수영(尹壽榮), 송화현감(松禾縣監) 신석렴(申碩廉)등이 강옥의 앞에 나아가 절을 하려하니, 강옥이 팔을 잡고 억지로 중지시켜 바로 읍례(揖禮)만을 행하였다. 다음에 김보(金輔)를 뵈었는데 읍(揖)만 하고 절하지않았더니, 김보가 성중식등의 사모(紗帽)를 벗기고 책망하기를,
“만약에 윤재상(尹宰相)에게 말하면 마땅히 죄책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본향(本鄕)사람인 까닭으로 용서한다.”고 하였는데,
원접사(遠接使) 윤자운(尹子雲)이 듣고 즉시 봉서(奉書)하여 아뢰었다.
또 관찰사(觀察使)가 취초(取招)하여 아뢰니,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의논이 다르고 같은 것이 있으므로, 어찰(御札)로 이르기를,
“계본(啓本)의 일은 강옥등에게 알게하지말고, 만약 알고서 묻거든, 대답하기를 ‘관찰사가 그 실례(失禮)한 것을 듣고 바야흐로 추핵(推核)하여 장차 전하(殿下)에게 아뢰려고 한다.’하고, 원접사의 대답은 마땅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丁酉/先是, 姜玉等到鳳山, 郡守成重識、訓導尹壽榮、松禾縣監申碩廉等, 就玉前將拜, 玉執臂强止之, 乃行揖禮。 次謁金輔, 揖而不拜, 輔脫重識等紗帽, 責之曰: “若語尹宰相, 則當有罪責。 然汝等本鄕人, 故赦之耳。” 遠接使尹子雲聞之, 卽奉書以啓。 又觀察使取招以啓, 命大臣議之, 議有異同。 御札曰: “啓本之事, 勿令玉等知之, 若知而問之, 答曰: ‘觀察使聞其失禮, 方推劾, 將啓殿下矣。’ 遠接使之答, 隨宜可也。”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9일 무술 1번째기사
강옥, 김보등이 서울에 들어와 칙서를 맞이하다
강옥(姜玉), 김보(金輔)등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서울에 들어오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서를 맞이하기를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다. 임금이 경복궁(景福宮)에 돌아와 막차(幕次)에 들어가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불러 말하기를,
“박원형(朴元亨)은 정승(政丞)으로서 관반(館伴)8336)이 되어 구례(舊例)에 합당하지 못하니, 모름지기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의 호패(號牌)를 차게 하고, 강옥등이 만약에 박원형의 직사(職事)를 묻거든 마땅히 영사(領事)로써 대답하라.”하고,
우승지(右承旨) 어세겸(魚世謙)을 불러 이르기를,
“칙서(勅書)와 상사(賞賜)는 네가 가서 조치하되, 일시에 아울러 들어오게 하라.”하였다.
얼마 있다가 사신(使臣)이 대궐에 이르니,
임금이 칙서를 받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는데, 그 칙서에 말하기를,
“전자에 짐(朕)이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건주(建州)의 역로(逆虜)를 정토(征討)하려고 하여 왕으로 하여금 천병(天兵)을 협조하게 하였는데, 이제 왕의 주문(奏文)을 얻어 보고 배신(陪臣) 중추부관(中樞府官) 강순(康純)등을 보냈음을 알았다. 강순등은 군중(軍衆) 1만여명을 거느리어 압록강(鴨綠江),발저강(潑猪江)8337) 2강(江)을 건너 올미부(兀彌府)의 제채(諸寨)를 공파(攻破)하고, 역로(逆虜) 이만주(李滿住), 이고납합(李古納哈) 부자(父子)등을 죽이었으며, 그 부속(部屬)의 두축(頭畜)을 참획(斬獲)하고 그 여사(廬舍)에 쌓아서 모아놓은 것을 불살라 그들이 약탈한 우리 동녕위(東寧衛)의 인구(人口)를 얻게하고, 배신(陪臣) 이조참판(吏曹參判)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포로를 바치니, 이미 왕이 가져다바친 적속(賊屬)은 관례에 따라 인구(人口)를 처치하여 친히 완취(完聚)하게 하여주었고, 우축(牛畜)은 군둔(軍屯)의 종자로 주었다. 진실로 왕은 대대로 돈독하고 충정(忠貞)함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짐(朕)이 척찰(尺札)로써 왕에게 명하고 왕의 나라의 군중(軍衆)이 해동(海東)8338)에 향응(響應)하여, 짐의 장수와 군졸이 벼락같이 빠르고 바람같이 몰아, 내외(內外)가 합세(合勢)하여 역로(逆虜)가 와해(瓦解)하였으니, 왕은 짐의 명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짐과 왕은 군신(君臣)이 마음을 한가지로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제 내관(內官) 강옥(姜玉), 김보(金輔)를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 백금문금(白金紋錦), 서양포(西洋布)를 주고, 그 강순(康純), 고태필(高台弼)등에게도 또한 각각 주어서 그 노고를 정표(旌表)하니, 왕은 그것을 공경하여 받으라. 국왕(國王)에게는 은(銀) 1백냥(兩), 청여의규심융금(靑如意葵心絨錦) 1단(段), 백지록수대보상화융금(柏枝綠壽帶寶相花絨錦) 1단(段), 청련구화융금(靑蓮球花絨錦) 1단(段), 단반홍전지보상화융금(丹礬紅纏枝寶相花絨錦) 1단(段),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대홍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大紅紵絲) 2필,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흑록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黑綠紵絲) 2필,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청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靑紵絲) 2필, 소암화팔보골타운대홍저사(素暗花八寶骨朶雲大紅紵絲) 1필, 소청육운저사(素靑六雲紵絲) 2필, 소암골타운대홍저사(素暗骨朶雲大紅紵絲) 1필, 소앵가록육운 저사(素鷪歌綠六雲紵絲) 2필, 남채견(濫綵絹) 4필, 홍채견(紅綵絹) 8필, 백서양포(白西洋布) 10필(匹)을, 영병관(領兵官)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에게는 각각 은(銀) 20냥(兩), 직금흉배호표대홍저사(織金胸背虎豹大紅紵絲) 1필, 소앵가록육운저사(素鷪歌綠六雲紵絲) 1필, 소청육운저사(素靑六雲紵絲) 1필, 소흑록육운저사(素黑綠六雲紵絲) 1필, 홍채견(紅綵絹) 3필, 남채견(藍綵絹) 1필(匹)을 준다.”하였다.
예(禮)를 마치고, 사신(使臣)의 자리를 정전(正殿)의 동쪽에, 어좌(御座)를 서쪽에 설치하니, 강옥(姜玉)등이 말하기를,
“감히 서로 마주 대할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인(王人)8339)은 서로 마주 대하여 앉는 것이니, 어찌 감히 예(禮)에 어긋난다 하겠는가?”하였다.
강옥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비록 중국조정(朝廷)에서 보냈다하더라도 원래 본국(本國)의 백성입니다. 전하(殿下)의 정전(正殿)에서 서는 것도 또한 옳지못하온데, 어찌 감히 마주 앉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대인(大人)은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왔으니, 빈주(賓主)가 서로 마주 대함은 고금의 통례(通禮)이며 폐할 수 없는 것이다.”하였다.
강옥등이 말하기를,
“그러면 전하의 자리를, 청컨대 북쪽에 가까이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인의 자리가 너무 낮은데 부합될까 두렵다.”하였다.
강옥등이 재삼 강권하여 곧 조금 자리를 옮기니, 강옥등이 자리에 나아가 다례(茶禮)8340)를 행하기를 마치고, 강옥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적을 정토(征討)한 공로를 중국조정에서 매우 가상히 여기는데, 칙서(勅書)에 기록된 물건은 예부(禮部)에서 아뢴 것이고, 그 직금망룡(織金蟒龍) 6필은 칙서에 기록되지않은 것이니, 이것은 황제가 특사(特賜)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바가 없다.”하였다.
강옥등이 태평관(太平館)에 가니, 임금이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우승지(右承旨) 어세겸(漁世謙)등에게 명하여, 상사(賞賜)한 궤(櫃)를 내전으로 들여오게 하고, 강순(康純), 어유소(漁有沼), 남이(南怡)를 불러 나누어주었다. 임금이 강옥등을 대접함이 심히 후하니, 강옥 등도 또한 나단(羅段), 보패(寶貝)등의 물건을 매우 많이 올리었다.
註8336]관반(館伴):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태평관(太平館)이나 동평관(東平館)에 임시로 파견하던 관원. 정3품 이상에서 임명하였음. 접반사(接伴使).註8337]발저강(潑猪江): 파저강(婆猪江).註8338]해동(海東): 우리나라 註8339]왕인(王人): 임금의 명을 받들어온 사람 註8340]다례(茶禮): 임금이 중국의 사신을 맞아서 차[茶]를 대접하던 의식
○戊戌/姜玉、金輔等, 捧勑入京。 上率百官, 幸慕華館, 迎勑如儀。 上還至景福宮, 入幕次, 召都承旨權瑊曰: “朴元亨以政丞爲館伴, 不合舊例, 須佩中樞府領事號牌, 玉等若聞元亨職事, 當以領事答之。” 召右承旨魚世謙謂曰: “勑書及賞賜, 汝往措置, 令一時竝入。” 有頃, 使臣至闕, 上受勑如儀。 其勑曰:
嚮者, 朕命將率師, 致討建州逆虜, 俾王協助天兵, 今得王奏, 知遣陪臣中樞府官康純等。 康純等統衆萬餘, 渡鴨綠、潑猪二江, 攻破兀彌府諸寨, 殺逆虜李滿住、古納哈父子等, 斬獲其部屬頭畜, 焚其廬舍積聚, 得其所掠我東寧衛人口。 遣陪臣吏曹參判高台弼獻俘, 已將王所獻賊屬, 依例處置人口, 給親完聚, 牛畜給軍屯種。 良由王世篤忠貞, 故朕以尺札命王, 而王國之衆, 響應于海東, 朕之將士, 雷厲風驅, 內外合勢, 逆虜亙解, 王可謂無負朕所命矣。 朕與王, 君臣同心, 豈不美哉? 今遣內官姜玉、金輔至王國, 賜王綵段、白金紋錦、西洋布。 其康純、高台弼等, 亦各有賜, 以旌其勞, 王其欽承之。 賜國王銀一百兩、靑如意葵心絨錦一段、栢枝綠壽帶寶相花絨錦一段、靑蓮球花絨錦一段、丹礬紅纏枝寶相花絨錦一段、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大紅紵絲二匹、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黑綠紵絲二匹、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靑紵絲二匹、素暗花八寶骨朶雲大紅紵絲一匹、素靑六雲紵絲二匹、素暗骨朶雲大紅紵絲一匹、素鷪哥綠六雲紵絲二匹、藍綵絹四匹、紅綵絹八匹、白西洋布十匹; 領兵官康純、魚有沼、南怡, 各銀二十兩、織金胸背虎豹大紅紵絲一匹、素鷪哥綠六雲紵絲一匹、素靑六雲紵絲一匹、素黑綠六雲紵絲一匹、紅綵絹三匹、藍綵絹一匹。
禮訖, 設使臣座於殿東, 御座於西, 玉等曰: “不敢相對。” 上曰: “王人相對坐, 何敢違禮?” 玉等曰: “我等雖朝廷所遣, 元是本國百姓。 殿下正殿立亦不可, 安敢對坐乎?” 上曰: “兩大人承帝命來, 賓主相對, 古今通禮, 不可廢也。” 玉等曰: “然則殿下之座, 請近北。” 上曰: “恐副大人之座過卑。” 玉等再三强之, 乃小移座, 玉等就坐, 行茶禮訖, 玉等曰: “殿下討賊之功, 朝廷甚嘉之, 勑書所錄之物, 禮部所奏也。 其織金蟒龍六匹, 勑書所不錄, 是皇帝特賜也。” 上曰: “我國以小功, 優荷天恩, 惶恐無地。” 玉等往大平館, 上命永順君溥、綾城君具致寬、右承旨魚世謙等, 令入賞賜櫃于內, 召康純、魚有沼、南怡, 分賜之。 上待玉等甚厚, 玉等亦進羅段寶貝等物甚多。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9일(무술) 4번째기사
태평관에 거둥하여 하마연을 베풀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하마연(下馬宴)8341)을 베풀고, 우선(羽扇)8342)을 강옥(姜玉)등에게 주고 또 말하기를,
“지선(紙扇)은 비오면 쉽게 파손되고 더러우면 씻기가 어려우나, 이 부채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씻을 만하다.”하니, 강옥등이 사례하였다.
임금이 강옥등에게 이르기를,
“대인(大人)의 말에, 칙서(勅書)에 기록하지 않은 상사(賞賜)가 있다고 하여, 내가 진실로 황송(惶悚)하다.”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적을 정토(征討)한 공(功)을 황제가 심히 가상하게 여기어 이로써 특사(特賜)한 것입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공(功)은 적고 상(賞)은 중하여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겠다.”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중국의 대소인(大小人)이 모두 말하기를, ‘건주(建州)를 공파(攻破)한 것은 조선(朝鮮)이 아니면 불능하였다.’고 하니, 지금의 상사가 어찌 과다(過多)하겠습니까?”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주량(酒量)이 본래 얕은데 억지로 마시어 대취(大醉)하였으니, 빌건대 잔치를 파(罷)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건주(建州)를 정벌한 세 장수에게도 황제의 상사(賞賜)가 있었으니, 세 대장(大將)과 술을 마시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생각건대 강순(康純)에게 명하여 궁시(弓矢)를 차고 들어와 술을 돌리게 하소서.”하고,
김보(金輔)는 가만히 화살을 뽑아서 보았다. 잔치가 파(罷)하자 임금이 환궁(還宮)하여,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명하여 〈사신을〉문안하게 하고, 각기 아청면포단단령(鴉靑綿布單團領), 초록면주겹탑호대홍면주(草綠綿紬裌塔胡大紅綿紬), 남요선겹철릭(藍腰線裌帖裏), 백초겹리두(白綃裌裏肚), 백초삼아(白綃衫兒) 각각 1령(領), 백초겹고(白綃裌袴) 1개, 흑초립(黑草笠) 1정(頂), 백녹비 겹금화(白鹿皮裌金靴) 1쌍(雙)을 주니, 강옥이 기쁘게 받으며 이르기를,
“사물(賜物)을 많이 받으니 감대(感戴)함이 망극(罔極)합니다.”하고,
즉시 북면(北面)하여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김보(金輔)는 취(醉)하여 쓰러져서 일어날 수 없으므로 주지 못하였고, 또 두목(頭目)등에게도 차등있게 물건을 주었다.
註8341]하마연(下馬宴): 중국의 사신이 도착한 당일에 태평관(太平館)에서 임금이 직접 베풀던 잔치. 이튿날 베푸는 잔치를 익일연(翌日宴), 닷새째 되는 날에 베푸는 잔치를 온짐연(溫斟宴), 떠나는 날에 베푸는 전별연(餞別宴)을 상마연(上馬宴)이라 하였음 註8342]우선(羽扇):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
○上幸大平館, 設下馬宴。 贈羽扇于姜玉等, 且曰: “紙扇, 雨則易破, 汚則難洗, 此扇不畏雨, 且可洗也。” 玉等謝。 上謂玉等曰: “大人言, 有賞賜不錄勑書者, 予誠惶悚。” 玉等曰: “殿下討賊之功, 皇帝甚嘉之, 是以有特賜。” 上曰: “功微賞重, 不任惶恐。” 玉等曰: “中朝大小人皆曰: ‘攻破建州, 非朝鮮不能也。’ 今賞賜豈過多乎?” 仍啓曰: “酒量本淺, 强飮大醉, 乞罷宴。” 上曰: “征建州三將, 帝有賞賜, 飮三大將酒, 不亦可乎?” 玉等曰: “惟命康純, 帶弓矢而入行酒。” 金輔潛抽矢以觀之。 宴罷上還宮, 募承旨權瑊問安, 各贈鴉靑綿布單團領ㆍ草綠緜紬裌塔胡ㆍ大紅綿紬藍腰線裌帖裏ㆍ白綃裌裹肚ㆍ白綃衫兒各一領、白綃裌袴一、黑草笠一頂、白鹿皮裌金靴一雙。 玉喜受曰: “多受賜物, 感戴罔極。” 卽北面扣頭謝。 輔醉倒莫能起, 未得贈, 又贈頭目等物有差。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0일 기해 3번째기사
강옥등에게 편포등을 주고 5일마다 보내어 먹이다
환관(宦官) 신운(申雲)을 보내어 각각 강옥(姜玉)등에게 편포(片脯) 1백55정(脡), 건장(乾獐) 5구(口), 건문어(乾文魚) 60미, 건오적오(乾烏賊魚) 6백미(尾), 감자(柑子) 1백개(箇)를 주었는데, 이로부터 5일마다 보내어 먹이었다.
○遣宦官申雲, 各贈姜玉等片脯一百五十五脡、乾獐五口、乾文魚六十尾、乾烏賊魚六百尾、柑子一百箇。 自是每五日送餽。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1일 경자 1번째기사
익일연을 베풀다. 금강산에 가는 문제에 대해 말하다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익일연(翼日宴)을 베푸니, 강옥(姜玉)등이 중문(中門)에 나와 맞이하여 머리를 조아려 재배(再拜)하고 사례하므로, 의복등의 물건을 내려주며 임금이 답배(答拜)하였다. 박원형(朴元亨)으로 하여금 강옥 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들으니 대인(大人)들이 금강산(金剛山)을 보려고 한다는데, 두 대인이 모두 갈 것인가?”하니,
강옥 등이 말하기를,
“모두 갑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두목(頭目)은 몇 사람을 거느리겠는가?”하니,
강옥은 말하기를,
“나는 6인을 머무르게 하겠습니다.”하고,
김보(金輔)는 말하기를,
“나는 4인을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거느리고 가겠습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두목(頭目)들도 또한 보고자 하면 다 거리느리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니, 강옥등이 기뻐하였다. 또 강옥(姜玉)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박원형(朴元亨)으로 원접사(遠接使)를 삼고, 노사신(盧思愼)으로 지대사(支待使)를 삼았다.”하니,
강옥등이 또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황제가 금단(錦段) 4필(匹)을 내다가 우리들로 하여금 친히 금강산에 이르러, 번(幡)을 달라고 하였으니, 이제 전하에게 보이고자 합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니, 부처[佛]에게 바치는 물건을 열어 보는 것은 응하지 못하겠다.”하니,
강옥 등이 말하기를,
“옳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또 강옥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금강산(金剛山)은 참으로 영산(靈山)이다. 그러나 황제가 어떻게 알았는가?”
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노태감(老太監)등이 주달(奏達)하였습니다.”하였다.
두목등이 모두 사급(賜給)한 의립(衣笠)을 착용하고, 월대(月臺) 위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니, 임금이 박원형에게 명하여, 소선(小膳)을 가져다 나누어 주게 하였다. 잔치가 파(罷)한 뒤에 또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윤문(成允文)에게 명하여 또 어탁(御卓)과 대선(大膳)과 아울러 선온(宣醞) 20병(甁)을 두목등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庚子/幸大平館, 設翼日宴。 姜玉等出迎于中門, 扣頭再拜謝, 賜衣服等物, 上答拜。 使朴元亨語玉等曰: “聞大人等, 欲見金剛山, 兩大人皆去乎?” 玉等曰: “皆去。” 上曰: “率頭目幾人?” 玉曰: “我則留六人。” 金輔曰: “我則留四人, 餘皆率去。” 上曰: “頭目等亦欲見之, 則盡率何妨?” 玉等喜。 又使語玉等曰: “以元亨爲遠接使, 盧思愼爲支待使。” 玉等又大喜曰: “皇帝出金段四匹, 使我等親到金剛山掛幡, 今欲見于殿下。” 上曰: “今日飮酒食肉, 不應開見獻佛之物。” 玉等曰: “是。” 上又使語玉等曰: “金剛山眞是靈山, 然皇帝何以知之?” 玉等曰: “老太監等奏達。” 頭目等皆着賜給衣笠, 就月臺上四拜叩頭謝, 上命元亨, 齎小膳分賜。 宴罷後, 又命仁山君洪允成、右副承旨成允文, 又以御卓及大膳, 幷宣醞二十甁, 分賜頭目等。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2일 신축 2번째기사
권감에게 명하여 인구마, 이마 제연 모마장등을 강옥등에게 나누어주게 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에게 명하여, 안구마(鞍具馬) 2필, 이마제연모마장(理馬諸緣毛馬粧), 나과(鑼鍋) 각각 2부(部), 모편(毛鞭) 2사(事), 사의(蓑衣) 2령(領), 유롱(油籠) 20사(事), 접선(摺扇) 1백 파(把), 도자(刀子) 2파(把), 유지석(油紙席) 6장(張), 활[弓] 2장(張), 화살[矢] 2부(部)를 가지고 강옥(姜玉)등에게 나누어주게 하니, 강옥등이 이를 받고, 분향(焚香)하고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고 말하기를,
“소인(小人)등은 노예(奴隷)의 천인(賤人)으로서 여러 번 후하게 내려 주심을 받으니, 감극(感極)합니다.”하였다.
또 두목(頭目)에게도 각각 유롱(油籠) 2사(事), 접선(摺扇) 3파(把), 도자(刀子) 1파(把)를 주었다.
○募承旨權瑊, 將鞍具馬二匹、理馬諸緣毛馬粧ㆍ鑼鍋各二部、毛鞭二事、蓑衣二領、油籠二十事、摺扇一百把、刀子二把、油紙席六張、弓二張、矢二部, 分贈于姜玉等。 玉等受之, 焚香北向再拜曰: “小人等, 以奴隷之賤, 累受厚賜感極。” 又贈頭目各油籠二事、摺扇三把、刀子一把。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13일 임인 1번째기사
온짐연을 베풀다
강옥(姜玉)등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근정전(勤政殿)문밖의 섬돌아래에 나와 사정전(思政殿)에 맞아들였다. 강옥등이 청하기를,
“전하께서 마땅히 남쪽을 향하여 앉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황제의 사신을 대접함에 남쪽을 향하는 이치가 없으니, 대인(大人)들이 비록 종일토록 청하더라도 감히 명(命)을 따를 수 없다.”하였다.
강옥등이 말하기를,
“근정전(勤政殿)과 태평관(太平館)에서 이미 공례(公禮)를 행하였고, 여기는 전하의 사저(私邸)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은 원래 본국(本國)의 노복(奴僕)으로 일신(一身)의 골육(骨肉)은 모두 이것이 전하(殿下)의 은혜이오니, 친히 거두시어 어좌(御座)를 남쪽으로 향하여 설치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부득이 남쪽을 향하여 앉으니, 강옥등이 절하므로, 임금이 답배(答拜)하였다. 강옥이 궤(樻) 11개, 추롱(杻籠) 6개, 말[馬] 1필을 올리니, 김보(金輔)도 또한 궤(樻) 9개, 말 1필을 올리었으며, 아울러 태감(太監) 최안(崔安),임귀봉(林貴鳳)이 바치는 물건을 올리었다.
다례(茶禮)를 행한 뒤에 온짐연(溫斟宴)을 베풀고, 임금이 박원형(朴元亨)으로 하여금 강옥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중국 조정(朝廷)에서는 예로부터 조선(朝鮮)을 중하게 대우하는데, 이제 건주(建州)를 정벌한 일은, 요동(遼東)의 여러 대인(大人)의 자문(咨文)을 통함을 받아, 이미 군사를 조발하게 하였더니, 마침 칙지(勅旨)를 받았으므로 즉시 명하여 정벌하러 들어가게 하였다. 다행히 저 적(賊)이 뜻하지 않은 때를 타서 남김없이 살략(殺掠)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황은(皇恩)의 소치이고 우리의 공(功)이 아닌데, 이제 상사(賞賜)의 후함을 입으니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다. 원컨대 이 뜻을 가지고 중국 조정에 전달(轉達)하여 달라.”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오로지 이것은 전하(殿下)의 홍복(洪福)이니, 이치가 후상(厚賞)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들이 마땅히 중국 조정에 전달(轉達)하겠습니다.”하였다.
잔치가 파(罷)하자, 임금이 그대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명하여 세자(世子)와 신숙주(申叔舟)등에게 차례로 술을 올리게 하고, 일어나 춤을 추어 즐거움을 다하고는 이에 파(罷)하였다.
○壬寅/姜玉等詣闕, 上出勤政殿門外階下, 迎入思政殿。 玉等請曰: “殿下當向南而坐。” 上曰: “自古待帝使, 無南向之理, 大人等雖終日請之, 不敢依命。” 玉等曰: “勤政殿與大平館, 已行公禮, 此則殿下之私邸。 況我等元是本國奴僕, 一身骨肉, 皆是殿下之恩, 親撤御座南向設。” 上不獲已南向坐, 玉等拜, 上答拜。 玉進櫃十一、杻籠六、馬一匹, 金輔亦進櫃九、馬一匹, 幷進太監崔安、林貴奉所獻物件。 行茶禮後, 設溫斟宴, 上使朴元亨語玉等曰: “朝廷自古重待朝鮮, 今也征建州之事, 承遼東諸大人通咨, 已令調軍, 適承勑旨, 卽命入征。 幸乘彼賊不意, 殺掠無遺, 此實皇恩之致, 非我之功也。 今蒙賞賜之厚, 惶恐無地。 願將此意, 轉達朝廷。” 玉等曰: “專是殿下之洪福, 理當厚賞。 我等當轉達朝廷。” 宴罷, 上仍御思政殿, 命世子與申叔舟等, 以次進酒, 起舞極歡乃罷。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3일 임인 2번째기사
권감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姜玉)등에게 문안하게 하고,
이어서 말하게 하기를,
“오늘 나로 하여금 북쪽에 앉게 한 것은 대인(大人)이 나를 그르치게 함이다.”하니,
강옥이 말하기를,
“소인(小人)들은 본국의 노복(奴僕)으로 동벽(東壁)에 앉는 것도 마음으로 오히려 미안합니다.”하고,
권감에게 채단(綵段), 사(紗) 각각 1필씩과 사모(紗帽) 1정(頂), 백령(白翎) 1쌍(雙)을 주고 말하기를,
“이미 우리를 노상(路上)에서 맞이하고, 이제 또 자주 와서 문안하시는 까닭으로 애오라지 정성을 표합니다.”하였다
권감이 말하기를,
“모두 전하의 명을 받들어 내왕하였으니, 무슨 사사로운 수고가 있다고 후하게 주는 것을 감히 받겠습니까?”하였는데,
강옥이 강청하기를 마지아니하므로, 권감이 부득이하여 받으니, 김보(金輔)도 또한 권감에게 채단(彩段), 사(紗) 각각 1필씩을 주었다.
○遣都承旨權瑊問安于姜玉等, 仍語曰: “今日俾我坐北, 是大人誤我也。” 玉曰: “小人等本國奴僕, 坐於東壁, 心猶未安。” 贈瑊彩段ㆍ紗各一匹、紗帽一頂、白翎一雙曰: “旣迎我於路上, 今又亟來問安, 故聊以表忱。” 瑊曰: “皆承殿下之命來往, 有何私勞, 敢受厚貺?” 玉强之不已, 瑊不得已受之。 輔亦贈瑊彩段、紗各一匹。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3일 임인 3번째기사
강옥 등이 관반 박원형, 윤자운에게 사라, 사모등을 주다
강옥(姜玉) 등이 관반(館伴) 박원형(朴元亨), 윤자운(尹子雲)에게 각각 사라(紗羅) 1필, 사모(紗帽) 1정(頂), 백령(白翎) 1쌍(雙)씩을 주었다.
○姜玉等贈館伴朴元亨、尹子雲, 各紗羅一匹、紗帽一頂、白翎一雙。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
강옥등이 중국에 들어간 본국 출신 환관의 부형을 보고 서계와 물건을 전할 것을 청하다
강옥(姜玉)등이 관반(館伴)에게 이르기를,
“중국 조정에 들어간 화자(火者)8344) 윤봉(尹鳳), 김흥(金興), 최안(崔安), 임귀봉(林貴奉), 김충(金忠), 오현(吳賢), 박순(朴順), 송경(宋敬), 이금동(李金同), 김옥(金玉), 장득성(張得成), 임수(林守)의 부형(父兄)을 보고, 그 서계(書契)와 물건을 전(傳)하려하는데, 만약에 부형이 없으면, 족속(族屬)을 보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서울에 사는 자는 가서보고, 서울 밖에 사는자는 불러오게 하였다.
註8344]화자(火者): 중국의 궁중에 들어가 내시(內侍)의 일을 보고있는 본국(本國) 출신의 환관(宦官)을 말함
○癸卯/姜玉等謂館伴曰: “欲見入朝火者尹鳳、金興、崔安、林貴奉、金忠、吳賢、朴順、宋敬、李金同、金玉、張得成、林守父兄, 傳其書契與物。 若無父兄, 則見族屬。” 上令居京者往見, 居外者招來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4일 계묘 3번째기사
강옥이 영순군 이부, 귀성근 이준에게 채단 3필을 주다
강옥(姜玉)이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채단(綵段) 3필을 주었다.
○姜玉贈永順君溥、龜城君浚, 綵段三匹。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14일 계묘 4번째기사
강옥등이 금강산에 가는 문제로, 노사신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호조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을 지대사(支待使)로 삼고,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순명(金順命)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으니, 강옥등이 장차 금강산에 가려하기 때문이었다
○以戶曹判書盧思愼爲支待使,軍資監正金順命爲從事官,以姜玉等將往金剛山也.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 성화(成化) 4년) 4월 15일 갑진 1번째기사
강옥등이 원각사, 흥천사에서 향을 사르다
강옥(姜玉), 김보(金輔)등이 원각사(圓覺寺)에 나아가 향(香)을 사르고, 각각 채단(彩段), 사견(紗絹)을 시주하였다. 또 흥천사(興天寺)에 나아가 향을 사르고 관(館)8345)에 돌아와서, 김보가 교외(郊外)에서 사냥하기를 청하므로,
관반(館伴) 박원형(朴元亨)이 말하기를,
“오늘은 예불(禮佛)한 지가 얼마 되지 못하는데, 잠깐만에 다시 사냥하여 살생(殺生)함이 옳겠습니까?”하니, 곧 중지하였다.
註8345]관(館): 태평관.
○甲辰/姜玉、金輔等詣圓覺寺燒香, 各施彩段、紗絹。 又詣興天寺燒香還館。 輔請獵于郊外, 館伴朴元亨曰: “今日禮佛未幾, 尋復田獵殺生可乎?” 乃止。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5일 갑진 2번째기사
강옥등이 중국 조정에 들어간 궁인들의 족친을 보고자 청하다
강옥(姜玉)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 들어간 궁인(宮人) 불씨(佛氏), 성씨(成氏), 차씨(車氏), 오씨(吳氏), 안씨(安氏), 최씨(崔氏)와 고(故) 정씨(鄭氏), 비(婢) 이칠보(李七寶)의 서계(書契)와 물건을 아뢰니, 전하(殿下)께서 족친(族親)에게 분부(分付)하소서. 또 황제도 우리로 하여금 족친등의 생활하는 계책을 친히 보고 회주(回奏)하도록 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지금 서울에 사는 자에게 먼저 보게하고, 서울밖에 사는 자는 불러 오게 하였다
○姜玉曰: “入朝宮人佛氏、成氏、車氏、吳氏、安氏崔氏與故鄭氏婢李七寶書契及物, 啓殿下分付族親。 且皇帝, 令我親見族親等, 活計回奏。” 上令居京者先謁, 居外者招來。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6일 을사 2번째기사
강옥등이 5일에 한번씩 주연을 베풀 것을 청하다
강옥(姜玉)등이 주연(晝宴)을 사양하므로, 관반(館伴)등이 말하기를,
“예(禮)는 폐할 수 없습니다.”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5일마다 한 차례씩 베푸소서.”하였다.
○姜玉等辭晝宴, 館伴等曰: “禮不可廢。” 玉等曰: “然則每五日一設。”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6일 을사 3번째기사
강옥등이 사모, 각대등을 근시하는 환관에게 주다
강옥(姜玉)이 사모(紗帽), 각대(角帶) 각각 20개, 백령(白翎) 25쌍(雙)을 근시(近侍)하는 환관(宦官)에게 주니, 승정원(承政院)에서 이존(李存)등 9인에게 나누어 주고, 아뢰기를,
“그 나머지는 어떻게 구분 처리해야 합니까?”하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돌려주어라.”하므로,
승정원에서 또 아뢰기를,
“어떻게 사양해야 합니까?”하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관반(館伴)이 이르기를, ‘근시(近侍)는 9원(員)뿐이고, 이미 분부(分付)한 까닭에 돌려보낸다.’고 하라.”하였다.
○姜玉以紗帽ㆍ角帶各二十、白翎二十五, 贈近侍宦官。 承政院分給李存等九人, 啓曰: “其餘何以區處?” 御書曰: “還之。” 承政院又啓曰: “何以爲辭?” 御書曰: “館伴云: ‘近侍只九員, 已分付故還之。’”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7일 병오 3번째기사
강옥이 황제에게 진헌할 토포, 황응등을 청하여 물건을 준비하게 하다
강옥(姜玉)이 토포(土豹), 황응(黃鷹), 당구(唐狗), 해채(海菜), 해대(海帶), 난해(卵醢), 송균(松菌)을 청하며, 장차 황제에게 진헌하려 하니, 임금이 위장(衛將) 구겸(具謙)을 함길도(咸吉道)에 보내어 토포(土豹)를 잡게 하고,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팔도(八道)에 치서(馳書)하여 미리 매[鷹], 개[狗]등의 물건을 준비하게 하였다.
○姜玉請土豹、黃鷹、唐狗、海菜、海帶、卵醢、松菌, 將欲進獻于皇帝。 上遣衛將具謙于咸吉道, 捕土豹, 令承文院馳書于八道, 預備鷹、狗等物。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8일 정미 1번째기사
세자가 태평관에 나가 명나라 사신에게 잔치하다
세자(世子)가 태평관(太平館)에 나아가 명(明)나라 사신에게 잔치하였다. 처음에 명나라 사신의 자리를 북벽(北壁)에, 세자의 자리를 동벽(東壁)에 설치하였더니, 강옥(姜玉)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토민(土民)8347)입니다. 이와 같이 하심은 옳지 못합니다.”하고, 곧 동서(東西)로 나누어서 앉았다
註8347]토민(土民): 본토의 백성
○丁未/世子詣大平館, 宴明使。 初, 設明使座於北壁, 世子座於東壁, 玉等曰: “我等土民也, 不可如是。” 乃分東西而坐.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19일 무신 1번째기사
사신 스스로 황제에게 진헌할 물건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관반(館伴) 박원형(朴元亨)이 아뢰기를,
“전날 강옥(姜玉)등이 말한 바의 진헌(進獻)할 일을 물리치고, 신(臣)이 말하기를, ‘전하(殿下)가 바치는 것입니까? 대인(大人)이 스스로 바치는 것입니까? 만약 전하가 바치는 것이라면 반드시 문서(文書)가 있어야 합니다.’하니, 강옥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가져 온 것으로써 말하겠습니다.’하고, 또 각궁(角弓)과 화살[箭] 잘 만드는 집을 청하여 진헌하려 하기에, 신이 듣고서 대답하지 않았더니, 강옥이 말하기를, ‘전하가 주신 궁전(弓箭)을 다른 날 조정에 돌아가 차고서 입시(入侍)하면, 황제가 보고 반드시 묻는 까닭으로 바치려 할 뿐입니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답하기를, ‘대저 황제가 패어(佩御)하는 물건은 칙지(勅旨)에도 없고 함부로 바치기가 어렵다.’고 하라.”하고,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등을 불러 의논하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내전으로부터 하서(下書)하기를,
“잔치 전에 관반(館伴)이 모름지기 방차(防遮)8349)하기를 청하니, 그 방차(防遮)할 말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청구하는 말이 있으면, 관반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의 말은 무슨 말인들 따르지 않겠습니까마는, 전에는 칙지(勅旨)가 있는 까닭으로 비록 예비(豫備)하였다하더라도 마음에 심히 어려웠던 전례(前例)의 일이 있어 오히려 감히 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칙지에도 없고 전례에도 없는 물건을 어찌 감히 경솔히 진헌하겠습니까? 비록 전하에게 아뢰더라도 반드시 감히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라.”하니,
박원형이 그 말로써 강옥등에게 말하였는데, 또 화목(花木)과 조수(鳥獸)를 청하므로 진헌(進獻)하지 말라는 칙지를 보이니, 강옥이 이르기를,
“있으면 준비하고 없으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하고,
또 김보에게 보이니, 대답하기를,
“만약에 일찍이 칙지가 이같음을 알았다면 어찌 감히 구하였겠습니까?”하였다. 박원형이 이것을 갖추어 아뢰고, 이어서 말하기를,
“사신(使臣)이 날로 구하고 청하는 것으로 일삼고 조금도 돌아갈 의사가 없으니, 만약에 사은사(謝恩使) 김양경(金良璥)이 내알(內謁)하면〈사신이〉반드시 회정(回程)할 기일을 말할 것이니, 즉시 나아가 말하게 하여 그 뜻을 보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렇겠다.”하였다.
註8349]방차(防遮): 막아서 차단함.
○戊申/館伴朴元亨啓曰: “退前日姜玉等所言進獻事, 臣語之曰: ‘殿下獻之乎? 大人自獻乎? 若殿下獻之, 則必有文書。’ 玉等答曰: ‘我等以覓來爲辭。’ 又請善造角弓及箭家, 欲進獻, 臣聞而不答, 玉曰: ‘殿下所給弓箭, 他日還朝, 佩而入侍, 則皇帝見之必問, 故欲進獻耳。’” 上曰: “宜答以凡皇帝佩御之物, 無勑旨而擅獻爲難。” 召高靈君申叔舟、綾城君具致寬、上黨君韓明澮等議之。 俄而自內下書曰: “請宴前館伴須防遮, 其防遮之說則如左。 若有求請之言, 館伴曰: ‘大人之言, 何言不從? 但前有勑旨, 故雖預備, 而心甚難之。 有前例事, 尙且不敢, 況無勑旨, 無前例之物, 豈敢輕易進獻? 雖啓殿下, 必不敢從。’” 元亨以其言, 言于玉等, 又以花木、鳥獸勿進獻勑旨示之。 玉曰: “有則備之, 無則不必强也。” 又示金輔, 答曰: “若早知勑旨如此, 安敢求之?” 元亨具此以啓, 仍曰: “使臣日以求請爲事, 暫無回還之意, 若謝恩使金良璥來謁, 則必說回程日期, 卽令就辭以觀其志。” 上然之。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20일 기유 1번째기사
강옥등이 사은사 김양경에게 명나라로 떠날 날짜에 대해서 말하다
사은사(謝恩使) 김양경(金良璥)이 태평관(太平館)에 나아가 강옥(姜玉)을 알현하니, 강옥이 말하기를,
“재상(宰相)이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태감(太監)등이 만약 우리들의 행지(行止)를 묻거든, 대답하기를, ‘4월 초9일에 왕경(王京)에 들어왔고, 26일에 번(番)을 다는 일로써 금강산(金剛山)으로 향하였으니, 장차 7월 그믐이나 8월 초에 길을 떠난다.’고 하십시오.”하고,
다음에 김보(金輔)를 알현하니, 김보가 말하기를,
“만약에 7월 그믐이나 8월 초에 길을 떠난다고 말하면, 반드시 생각하기를 더디고 느리다고 하여 독촉할 것이니, 마땅히 말하기를, ‘금강산은 왕경에서 한달 길을 가야 하니, 왕래하려면 반드시 두 달을 경과할 것이며, 만약 왕경에 돌아오면 며칠 안으로 길을 떠날 것이다.’고 하십시오.”하고,
즉시 두목(頭目) 김총(金聰)으로 하여금 강옥에게 의논하게 하니, 강옥이,
“그렇겠다.”하므로,
김보가 김양경(金良璥)의 면전에서 부탁하여 보냈다. 김양경이 이를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와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신숙주가 말하기를,
“금강산(金剛山)은 왕경(王京)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중국 사람도 또한 혹 알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날에 명나라 사신이 본국에 이르러, 금강산 보기를 요구하면 반드시 행로(行路)의 원근을 알 것이니, 이로써 중국에 말하게 함은 옳지 못하며, 관반(館伴)이 말을 따라서 사신에게 상세히 말함이 편하겠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己酉/謝恩使金良璥, 詣大平館, 謁姜玉。 玉曰: “宰相到北京, 太監等若問我等行止, 答曰: ‘四月初九日入王京, 二十六日以掛幡事向金剛山, 將以七月晦、八月初起程。’” 次謁金輔, 輔曰: “若言七月晦、八月初起程, 則必以爲遲緩督之矣。 當曰: ‘金剛山去王京一月路, 吾來必經兩月, 若回到王京, 則不日起程。’” 卽令頭目金聰議於玉, 玉然之。 輔面囑良璥而送。 良璥將此以啓, 上命高靈君申叔舟, 與承政院議之。 叔舟曰: “金剛山離王京不遠, 中朝之人, 亦或知之。 況他日明使到本國, 求見金剛山, 則必知行路遠近, 不可以是語之於中朝, 館伴因言詮語于使臣爲便。” 從之。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21일 경술 1번째기사
도승지 권감을 보내어 강옥등에게 흑마포, 철릭등을 주게 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姜玉), 김보(金輔)에게 각기 흑마포철릭(黑麻布帖裏), 백저포철릭(白苧布帖裏) 각각 2령(領), 백저포한철릭(白苧布汗帖裏), 백면포단철릭(白綿布單帖裏), 백면포단직신(白綿布單直身) 각각 1령(領), 호슬(護膝), 약낭(藥囊), 납위(蠟韋) 각각 1사(事)씩과 대홍세조(大紅細條) 1요(腰), 흑초립(黑草笠) 1정(頂), 흑사피협금화(黑斜皮挾金靴), 마피 협금유화(馬皮挾金油靴) 각각 1쌍(雙), 각궁(角弓) 1장(張), 대전(大箭) 6개(箇), 궁대(弓帒), 전가(箭家) 각각 1사(事)씩 주고, 두목(頭目) 40인에게도 각각 저포철릭(苧布帖裏), 백면포단철릭(白綿布單帖裏) 각각 1령(領)과 마피화(馬皮靴) 1쌍(雙)을 주게 하였다.
○庚戌/遣都承旨權瑊, 各贈姜玉、金輔黑麻布帖裏ㆍ白苧布帖裏各二領、白苧布汗帖裏ㆍ白綿布單帖裏ㆍ白綿布單直身各一領、護膝ㆍ藥囊ㆍ蠟韋各一事、大紅細條一腰、黑草笠一頂、黑斜皮挾金靴ㆍ馬皮挾金油靴各一雙、角弓一張、大箭六箇、弓帒ㆍ箭家各一事。 贈頭目四十人, 各苧布帖裏ㆍ白綿布單帖裏各一領、馬皮靴一隻。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21일 경술 2번째기사
사신이 금강산에서 하산하는 날 문안하고 잔치 하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명(明)나라 사신이 금강산(金剛山)에 번(幡)을 단 뒤에 하산(下山)하는 날은 승지(承旨)를 보내어 문안하게 하고, 또 김화(金化), 양주(楊州)에 사자를 보내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承政院啓曰: “明使金剛山懸幡後下山日, 遣承旨問安, 又於金化、楊州遣使慰宴。” 從之。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22일 신해 1번째기사
사신과 진헌할 물건에 대해 얘기하다. 강옥이 조카를 환속시킬 것을 청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姜玉)등을 청하여 근정전(勤政殿)에 맞아들이니, 강옥등이 전하가 남쪽으로 향하여 앉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 사정전(思政殿)에서는 대인(大人)이 사저(私邸)가 된다고 하여 재삼(再三) 강권하여서 부득이 따라서 실례(失禮)하였지만, 여기는 정전(正殿)이라 많은 눈이 보는 곳이니,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 하물며 대인을 따라온 자는 모두가 중국 조정(朝廷)의 사람이니, 대인을 실례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여기는 전하(殿下)의 조전(朝殿)이고 우리들은 노복(奴僕)이니, 어찌 감히 앉아서 예(禮)를 받겠습니까? 청컨대 사정전(思政殿)으로 옮기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술을 돌릴 때에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으로 하여금 술잔을 받들게 하였는데, 잘못하여 술이 김보의 옷에 쏟아지니, 김보(金輔)가 이를 눈여겨보았다. 임금이 술을 돌리기를 마치고, 홍윤성을 불러 큰 그릇으로 잔질하여 벌을 주니, 강옥등도 또한 일어나 와서 술잔을 가득 채워 권하였다.
임금이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강옥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진헌(進獻)할 물건은 방금 예비(預備)하였으나, 다만 토표(土豹)8351)는 대인이 이르기를, ‘진헌할 필요가 없다.’고 한 까닭으로 위임하여 간 사람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습니다.”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 말을 하지않았으나, 그러나 이제 여름을 당해서 덥고 풀이 무성하여 잡기에 매우 어려울까 염려되니, 이미 불러 돌아오게 하였으면 잡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승지(承旨)가 잘못 전한 것이다. 비록 건주(建州)의 강한 오랑캐[虜]라 하더라도 오히려 노루, 사슴과 같이 사냥하여 죽였거든, 하물며 이 토표(土豹)이겠는가?
초목(草木)이 비록 무성하더라도 잡는데 무엇이 어렵겠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개[狗兒]는 이미 많이 왔으니, 먼저 진헌(進獻)할 것을 택(擇)한 뒤에, 두 대인이 마음대로 취(取)하라.”하니, 강옥등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해청(海靑)은 이미 칙지(勅旨)에 진헌을 정지하라고 있어 일찍이 잡지 않았고, 또 이번 여름날에 잡게하였어도 얻지못하였으니, 오는 겨울이나 잡아서 명(命)을 기다리겠다.”하니,
김보가 말하기를,
“모든 조수(鳥獸)에 간여되는 물건은 아울러 진헌하지 말게 하소서. 이미 성지(聖旨)에 있는 것은 비록 있다하더라도 갖다 바침은 불가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송균(松菌)8352) 이외도 또한 버섯이 있으나, 그러나 독기(毒氣)가 있어 바칠수 없는 까닭으로 송균(松菌)만을 갖추었다.”하니,
강옥 등이 말하기를,
“전하(殿下)의 명이 심히 좋습니다.”하였다.
잔치가 파(罷)하여 강옥등이 관(館)8353)에 돌아가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등에게 문안하게 하였는데, 강옥이 취(醉)하여 누웠으므로 권감이 김보에게 가서 문안하니, 김보가 은밀히 말하기를,
“상사(上使)8354)가 올 때에 황제에게 아뢰기를, ‘해청(海靑), 토표(土豹)등의 물건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니, 마땅히 가지고 와서 바치겠습니다.’한 것이지 처음부터 황제가 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날에 백치(白雉)8355 )를 바친 것은 국가의 지성(至誠)인데도, 전에 내린 칙서(勅書)의 말이 심히 엄절(嚴切)하였으니, 이제 또 진기한 새와 진기한 짐승을 바침은 옳지 못합니다. 만약에 또 바친다면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천(賤)하게 여길까 두렵습니다.”하였다.
권감이 다시 강옥에게 가서 문안하니, 강옥은 중[僧] 신은(信恩)을 환속(還俗)시켜서 조부(祖父)의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하여, 전하에게 아뢰어 2, 3간(間)의 폐려(弊廬)를 주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註8351]토표(土豹): 스라소니.註8352]송균(松菌): 송이버섯 註8353]관(館): 태평관 註8354]상사(上使): 강옥(姜玉).註8355]백치(白雉): 흰 꿩.
○辛亥/遣都承旨瑊, 請姜玉等, 迎入勤政殿, 玉等請殿下南向坐, 上曰: “前日思政殿, 大人以爲私邸, 再三强之, 不得已從之, 已失禮焉。 此則正殿, 衆目所視, 未敢依命。 況隨大人來者, 皆是朝廷之人, 無乃以大人爲失禮乎?” 玉等曰: “此則殿下朝殿, 我等奴僕, 何敢坐而受禮? 請移思政殿。” 從之。 上行酒時, 令仁山君洪允成奉爵, 誤以酒濺輔衣, 輔目視之。 上行酒訖, 召允成, 酌以大器罰之, 玉等亦起來滿酌勸之。 上使高靈君申叔舟, 語玉等曰: “進獻之物, 今方預備, 但土豹則大人云: ‘不必進獻。’ 故委去人, 已招還。” 玉等曰: “我無此言, 然今當夏熱草深, 恐捕之甚難, 旣招還則勿捕可也。” 上曰: “此必承旨誤傳也。 雖建州强虜, 尙能獵殺之如獐鹿然, 況此土豹乎? 草木雖深, 捕之何難?” 又曰: “狗兒則已多來, 先擇進獻後, 兩大人任意取之。” 玉等大喜。 上曰: “海靑已有勑旨停進, 未曾捕捉,且今夏月, 捉之不得, 來冬當捕之待命。” 輔曰: “凡干鳥獸之物, 竝令勿進, 已有聖旨。 雖有之, 不可齎進。” 上又曰: “松菌之外, 亦有菌焉, 然有毒氣, 不可獻之, 故但備松菌。” 玉等曰: “殿下之命甚好。” 宴罷, 玉等還館, 遣都承旨權瑊, 問安于玉等, 玉醉臥, 瑊就輔問安。 輔密語曰: “上使來時, 啓皇帝曰: ‘海靑、土豹等物, 我國所産, 當齎來以獻。’ 初非帝命也。 前日獻白雉, 國家至誠也, 而前降勑書, 辭甚嚴切, 今不可又進珍禽奇獸也。 若又進, 則中國恐賤我國也。” 瑊更就玉問安, 玉欲使僧信恩還俗, 以奉祖父之祀, 請啓殿下, 給弊廬二三間。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22일 신해 2번째기사
강옥, 김보가 조궁등을 청하다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각각 조궁(造弓) 2백장(張)을 청하고, 강옥이 또 조비(造匕)8356)와 아울러 도자(刀子) 5부(部)를 청하였다.
註8356]조비(造匕): 비수(匕首)를 만들어 줌
○姜玉、金輔, 各請造弓二百張, 玉又請造匕幷刀子五部。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25일 갑인 2번째기사
권감에게 강옥등을 문안하게 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姜玉)등을 문안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가 다시 두 대인(大人)을 보시려 하고 또 문밖에서 전송하려 하시나, 대인이 재계(齋戒)함을 인연한 까닭으로 과단하지 못하였습니다.”하니,
김보(金輔)가 말하기를,
“이제 가지고 온 칙서(勅書)를 전하에게 아뢰어, 등사(謄寫)하여 보내기를 청합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토표(土豹), 해청(海靑)은 이미 잡았습니까? 잡지 않았습니까?”하므로,
권감이 대답하기를,
“해청은 시기가 아니면 얻기가 어렵고, 토표같은 것은 상사(上使)의 말이 저와 같은 까닭으로 전하가 사람을 보내어 잡게 하였지만, 그러나 잡고 못잡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비록 얻었다하더라도 전에 내린 칙지(勅旨)가 이와 같은 까닭으로 전하가 실로 어렵게 여깁니다.”하니,
김보가 말하기를,
“칙서가 이와 같이 바치기가 심히 어려우니, 모름지기 전하에게 아뢰어 예비하지 말게 하십시오.”하고,
또 말하기를,
“전일 모친(母親)을 뵈었을 때에 위연(慰宴)을 후하게 입고, 또 의복을 내려 주셨으니, 전하의 은혜는 망극(罔極)합니다. 다만 어미가 남의 집에 우거(寓居)하고 있으니, 청컨대 전하에게 아뢰어 집을 내려주게 하소서.”하였다.
○遣都承旨權瑊, 問安于姜玉等, 且曰: “殿下欲更見兩大人, 又欲餞于門外, 緣大人齋戒, 故未果耳。” 金輔曰: “今陪來勑書, 請啓殿下謄寫以送。” 且言: “土豹、海靑已捕不?” 瑊答曰: “海靑則非時難得, 若土豹則上使之言如彼, 故殿下遣人捕之, 然未知獲與不。 雖使得之, 前降勑旨如此, 故殿下實難之。” 輔曰: “勑旨如此, 獻之甚難, 須啓殿下, 勿令預備。” 又曰: “前日覲母親時, 厚蒙宴慰, 又賜衣服, 殿下之恩罔極。 但母僑居人家, 請啓殿下賜家。”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4월 28일 정사 1번째기사
권감에게 금강산에 가서 강옥등에게 문안하게 하다
도승지 권감(權瑊)을 보내어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강옥(姜玉)등에게 문안하게 하였다.
○丁巳/遣都承旨權瑊, 往金剛山, 問安于姜玉等。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0일 기사 1번째기사
강옥에게 내일 사냥하면서 사신을 기다릴 것을 전하게 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양주(楊州)에 보내어, 강옥(姜玉)등을 보고 문안(問安)하게 하며, 교상(交床)을 주고 말하게 하기를,
“내일은 내가 중로(中路)에서 타위(打圍)8400)를 하며 두 대인(大人)을 기다리겠으니, 원컨대 이로써 초차(草次)8401)의 앉을 도구로 삼으라.”하니,
강옥등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註8400]타위(打圍): 사냥을 말하는데, 여진(女眞)은 대개 몰이하여 짐승을 잡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음 註8401]초차(草次): 노숙(露宿), 야숙(野宿).
○己巳/遣都承旨權瑊于楊州, 見姜玉等問安, 贈交床曰: “明日予打圍於中路, 以待兩大人, 願以此爲草次所坐之具。” 玉等?頭謝。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1일 경오 1번째기사
홍복산의 사장에서 사신을 마중하다. 강옥이 중인 조카를 환속시킬 것을 청하다
밤 4고(鼓)에 동가(動駕)하여 홍복산(洪福山)의 사장(射場)에 이르렀다. 백관(百官)이 호종(扈從)하니, 명하여 사관(史官)만은 수종(隨從)하지 말게 하였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강옥(姜玉)등에게 말하기를,
“이제 산(山)에 있으면서 비가 점점 심하나, 그러나 이미 포위(布圍)하고 명령을 대기하고 있으니, 다만 두 대인이 비를 무릅쓰느라 노고스러울까 염려된다.”하니,
강옥이 말하기를,
“진룡(眞龍)인 천자(天子)가 거동(擧動)하면 반드시 풍우(風雨)가 있는 것이니, 노배(奴輩)가 감히 비를 무릅쓰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마땅히 즉시 나아가겠습니다.”하고,
김보가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전하가 거동하시는데 바람이 없으면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오늘의 비도 또한 전하(殿下)를 위함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먼저 홍복산(洪福山)의 동봉(東峯)에 올라가 강옥등이 오기를 기다려, 교상(交床)에 앉아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묻기를,
“금강산(金剛山)은 어떻던가?”하니,
강옥등이 대답하기를,
“낭떠러지로 된 봉우리[崖峯]가 험준하고 가파랐으나, 다행히 등덩굴을 의지하여 휘어잡고서 올라가, 부처[佛]에게 절하고 법문(法文)을 들으니, 깨끗하게 진세(塵世)의 일이 없어지고 오직 한 조각의 착한 마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술자리를 베푸니, 사슴을 잡은 자가 잇달아서 이르므로, 명하여 할선(割鮮)하여 술을 수차례 돌리었다. 김보가 노루, 사슴 네 마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궁시(弓矢)를 차고 도보(徒步)로 달려 산을 내려가니,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권맹희(權孟禧)가 아뢰기를,
“김보가 탄 말은 성질이 사나와서 혹 넘어질까 두렵습니다.”하므로,
임금이 말을 보내고, 또 신숙주, 윤자운에게 명하여 술을 가지고 함께 사슴을 따르게 하였다. 김보가 혹은 걸어서 달리고 혹은 말을 타고 쫓거늘,
강옥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은 한가지로 황제의 명(命)을 받았으니, 부사(副使)가 탈선하여 넘어지는 일이 있으면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두려우니, 청컨대 전하께서 소환(召還)하소서.”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사신(使臣)이 하는 바를 내가 저지할 것이 아니니, 청컨대 대인이 중지하게 하라.”하니,
대답하기를,
“나도 또한 금지할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 족속(族屬)이 모두 직임을 배수(拜受)하였으나, 다만 조카가 중[僧]이 되었으니, 원컨대 전하께서 구휼(救恤)하여 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중이 되면 이미 불제자(佛弟子)가 된 것이니, 비록 군부(君父)라 하더라도 그 뜻을 빼앗을 수가 없다. 만약에 스스로 환속(還俗)한다면 직임을 제수하여도 가(可)할 것이다.”하였다.
강옥이 말하기를,
“조카 중[僧]은 그 아비가 일찍 죽고 어미는 다른데로 시집가서 의지할 데가 없어 바로 중이 되었을 뿐, 처음부터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또 우리 형제 2인은 나는 시인(寺人)8402)이고 아우는 일찍 죽었으니, 조카가 머리를 기르지 않으면 죽은 자나 다름이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 마땅히 직임을 제수하겠다.”하였다.
강옥이 포위(布圍)한 것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를,
“이 같은 한여름에는 초목(草木)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타위(打圍)하기가 가장 어려운데, 몰아내리는 것이 끊어졌다 이어졌다함이 없고, 한 줄기 길[路]과 같습니다.”하였는데,
김보가 한 마리의 꿩을 쏘아 잡아서 돌아와 구워 바치니, 인하여 술을 돌리고는 바로 파(罷)하였다. 거가(車駕)가 주정악전(晝停幄殿)8403)으로 환어(還御)하여 잔치를 베푸고, 날이 저물어서야 환궁(還宮)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태평관(太平館)에 보내어 〈사신을〉문안하게 하고, 이날 잡은 짐승이 많았으므로, 병조좌랑(兵曹佐郞) 김양완(金良琬)에게 명하여 사슴 20마리, 노루 2마리, 아록(兒鹿) 17마리를 가지고 강옥(姜玉)등에게 나누어주게 하니, 강옥등이 기뻐하여 즉시 포(脯)를 만들게 하였다.
註8402]시인(寺人): 환관(宦官).註8403]주정악전(晝停幄殿): 임금이 거둥하는 도중에 임시 머물러 낮수라를 들기 위하여 마련한 장막
○庚午/夜四鼓, 動駕, 至洪福山射場。 百官扈從, 只命史官勿從。 遣高靈君申叔舟, 語姜玉等曰: “今在山雨漸甚, 然已布圍奉待, 但慮兩大人冒雨勞苦。” 玉曰: “眞龍天子擧動, 必有風雨, 奴輩敢憚冒雨? 當卽進去。” 輔曰: “曾聞殿下擧動, 無風則雨, 今日之雨, 亦爲殿下。” 上先登洪福山東峰, 以待玉等至, 坐交床行茶禮。 問曰: “金剛山何如?” 玉等答曰: “崖峯險巇, 幸賴藤蔓攀緣而上, 拜佛聞法, 淨無塵事, 唯有一片善心而已。” 上命設酌, 獲鹿者絡繹而至, 命割鮮, 酒數行。 輔見獐、鹿四走, 佩弓矢徒步走下山。 京畿觀察使權孟憘啓曰: “輔所乘馬性惡, 恐或蹉跌。” 上送馬, 又命叔舟、尹子雲, 持酒與鹿隨之。 輔或步走, 或乘馬馳逐, 玉言於上曰: “吾二人, 同承帝命, 副使脫有蹉跌, 則恐非美事, 請殿下召還。” 上曰: “使臣所爲, 非予所沮, 請大人止之。” 答曰: “吾亦不能禁也。” 又曰: “吾族屬皆拜職, 但姪子爲僧, 願殿下恤之。” 上曰: “凡人爲僧, 則已爲佛弟子, 雖君父不可奪其志。 若自還俗, 則可除職。” 玉曰: “姪僧其父早歿母適他, 無所聊賴, 乃爲僧耳, 初非本心也。 且吾兄弟二人, 我則寺人, 弟乃早歿, 姪不長髮, 則與死者無異。” 上曰: “然則予當除職。” 玉望見布圍, 嘆曰: “如此盛夏, 草木茂密, 打圍最難, 而驅下無斷續, 如一條路也。” 輔射獲一雉而還, 灸而獻之, 因行酒乃罷。 駕還御晝停幄殿, 設宴, 日暮還宮。 遣都承旨權瑊于大平館問安。 是日獲禽多, 命兵曹佐郞金良琬, 齎鹿二十、獐二、兒鹿十七, 分贈玉等, 玉等悅, 卽令作脯。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2일 신미 2번째기사
강옥에게 사냥개 등을 주다. 세종을 사모하는 마음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대전(大箭) 4통(筒), 낭미(狼尾) 2개, 호전(虎箭) 2개를 가지고 강옥(姜玉)등에게 주고, 또 전견(田犬)8404) 26마리를 주게 하였다. 또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윤문(成允文)을 보내어 강옥등을 청하였는데, 강옥등이 이르니, 사정전(思政殿)에 맞아들였다. 강옥등이 전하에게 남쪽으로 향하여 앉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부득이하여 북벽(北壁)에서 조금 동쪽으로 앉아서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강옥등에게 말하기를,
“오늘 아침에 사냥개[田犬] 26마리를 보냈더니, 대인이 우리로 하여금 가려 보내라 하여, 곧 재상(宰相)으로 더불어 그 좋은 놈 20마리를 가려서 나누어 드리도록 뜰에 끌어들이게 하였습니다.”하니,
강옥등이 뜰에 내려가서 보고, 전(殿)에 올라와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임금이 강옥에게 말하기를,
“조카는 젊고 잔약하니 고관(高官)을 재배(除拜)할 수 없어, 우선은 비직(卑職)을 주고, 겸하여 의복을 내려주었다.”하니,
강옥이 즉시 앞에 나아와 관(冠)을 벗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강옥등이 전(殿)에 입시(入侍)한 종친(宗親), 재신(宰臣)이 차고 있는 화살을 뽑아 주기를 청하므로 명하여 각각 1시(矢)씩을 뽑아 주게하니, 강옥등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잔치가 파(罷)하여 하직하고 나아가니,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이르러 전송하고, 도승지 권감(權瑊)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였다.
김보가 지나가다 어미의 집으로 들어가거늘,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을 보내어 주육(酒肉)을 가지고 나아가 내려주게 하였다. 이극증이 그 집에 이르렀더니 김보가 벌써 뵙고 관(館)8405)으로 돌아갔으므로, 이극증이 관(館)에 나아가 보았는데, 김보가 두목(頭目)으로 하여금 어미의 집에 보내게 하였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종친, 재신, 제장(諸將)과 담론(談論)하며 각각 술을 올리게 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명하여 8기(妓)에게 언문가사(諺文歌辭)을 주어 부르도록 하니, 곧 세종(世宗)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었다. 임금이 세종을 사모하여 묵연(默然)히 호조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을 불러 더불어 말하고, 한참 있다가 눈물을 떨구니, 노사신도 또한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좌우가 모두 안색이 변하였는데, 명하여 위사(衛士)와 기공인(妓工人)을 후하게 먹이게 하였다.
註8404]전견(田犬): 사냥개 註8405]관(館): 태평관
○遣都承旨權瑊, 齎大箭四筒、狼尾二、虎箭二, 分贈于姜玉等, 又贈田犬二十六。 又遣右副承旨成允文, 請玉等, 玉等至, 迎入思政殿。 玉等請殿下南向坐, 上不獲已於北壁稍東而坐, 設宴。 上令高靈君申叔舟, 語玉等曰: “今朝送田犬二十六, 大人令我擇送, 乃與宰相擇其良者二十, 分呈令牽入於庭。” 玉等下庭見之, 上殿扣頭謝。 上語玉曰: “姪子少弱, 不可拜高官, 姑授卑職, 兼賜衣服。” 玉卽就前免冠扣頭謝。 玉等請抽侍殿宗宰佩箭, 命各抽一矢與之, 玉等扣頭謝。 宴罷辭出, 上送至勤政殿, 遣都承旨權瑊問安。 輔歷入母家, 遣左承旨李克增, 齎酒肉就賜之。 克增至其家, 則輔已謁還館, 克增就館示之, 輔令頭目, 送於母家。 上御思政殿, 與宗宰諸將談論, 令各進酒。 又命永順君溥, 授八妓諺文歌詞, 令唱之, 卽世宗所製《月印千江之曲》。 上慕世宗默然, 呼戶曹判書盧思愼與語, 良久墮淚, 思愼亦伏俯泣下, 左右皆變色。 命厚饋衛士及妓工人。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3일 임신 1번째기사
강옥이 조카가 수직하였다하여 말을 진상하게 하다
강옥(姜玉)이 조카 강계숙(姜繼叔)이 수직(受職)하였다하여 강계숙에게 말 1필을 주어 진상(進上)하게 하니, 강계숙은 바로 중[僧] 성공(性空)이었다.
○壬申/姜玉以姪姜繼叔受職, 給繼叔馬一匹, 令進上。 繼叔卽僧性空也。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5일 갑술 1번째기사
강옥등이 원각사에서 부처에게 절하다. 강옥이 옛 은인의 집을 방문하다
강옥(姜玉)등이 원각사(圓覺寺)에 나아가 번(幡)을 달고 향(香)을 불살라 부처에게 절하였다. 김보(金輔)는 먼저 관(館)에 이르고, 강옥은 곽존중(郭存中)의 양녀(養女) 아들 조휘(曹彙)의 아내 홍씨(洪氏)의 집을 지나다가 들려서, 단(段), 사(紗) 각각 1필씩과 생초(生綃) 4필, 화수파(畫手帕) 4, 분(粉), 연지(臙脂), 바늘[針] 각각 1봉(封), 백령(白翎) 1쌍(雙)을 주니, 강옥이 미천할 때에 일찍이 곽존중의 집에서 기양(寄養)한 까닭에, 이에 이르러 그 양녀(養女)의 아들을 찾아 본 것이다. 도승지 권감(權臙)을 보내어 주육(酒肉)을 가지고 가서 내려주게 하니, 강옥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기를,
“40년 만에 와서 이 집을 볼 수있는 것은 진실로 전하의 은혜입니다.”하고, 드디어 눈물을 흘렸다.
○甲戌/姜玉等詣圓覺寺, 懸幡燒香拜佛。 金輔先到館, 玉歷入郭存中養女子曺彙妻洪氏家, 贈段ㆍ紗各一匹、生綃四匹、畫手帕四粉、臙脂ㆍ針各一封、白翎一雙。 玉微時, 嘗寄養存中家, 故至是求見其養女子。 遣都承旨權瑊, 齎酒肉往賜之, 玉扣頭謝曰: “四十年來, 得見此家, 實殿下恩也。” 遂泣下。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7일 병자 1번째기사
강옥, 김보등에게 자초립등의 물건을 주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 김보에게 각각 자초립(紫草笠) 1정(頂), 백어피과초대도(白魚皮裹鞘大刀) 1파(把), 접선(摺扇) 10파(把), 흑마포직신(黑麻布直身), 흑마포철릭(黑麻布帖裏), 백저포철릭(白苧布帖裏), 백저포한철릭(白苧布汗帖裏) 각각 1령(領), 마피 유화(馬皮油靴) 1쌍(雙)을 주고, 말하게 하기를,
“대인(大人)이 장차 귀향(歸鄕)하는 까닭으로 자질구레한 물건을 주며, 내일은 더불어 상면하여 작별하려고 합니다.”하니,
강옥등이 사례하기를 마지않았다. 또한 두목(頭目)에게도 접선(摺扇) 각각 3파(把)를 주었다.
○丙子/遣都承旨權瑊, 贈姜玉、金輔, 各紫草笠一頂、白魚皮裹鞘大刀一把、摺扇十把、黑麻布直身ㆍ黑麻布帖裏ㆍ白苧布帖裏ㆍ白苧布汗帖裏各一領、馬皮油靴一隻。 語之曰: “大人將歸鄕, 故贈以薄物, 明日欲與面別。” 玉等稱謝不已。 亦贈頭目摺扇各三把。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17일(병자) 2번째기사
문수덕이 사신에게 보낸 공인을 바꿀 것을 청함.
문수덕의 근무 태만을 책망하다
이 앞서 강옥(姜玉)등이 궁시(弓矢) 만드는 공인(工人)을 구하여,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문수덕(文修德),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조준(趙嶟)등이 명(命)을 받고 역사를 동독(董督)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문수덕이 와서 아뢰기를,
“야장(冶匠) 고용(高龍)은 본시 우인(優人)8408)으로 맹인(盲人), 취인(醉人)의 형상을 하는 놀이[戲]를 하매, 강옥등이 보고서 기뻐하며 여러 번 유희를 시켰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말지않으니, 끝내는 잡희(雜戲)를 갖추어 올리어 이르지않는 바가 없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소서.”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문수덕등이 아랫사람을 능히 검찰하지 못하였다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어서(御書)로 보이기를,
“네가 임무를 삼가지 않았으니, 무슨 일인들 위임하여서 믿을 만하겠느냐? 뒤로는 망령되게 살아서 날을 보내지 말라.”하였다.
註8408]우인(優人): 광대.
○先是, 姜玉等求工人造弓矢, 尙衣院僉正文修德、軍器寺僉正趙嶟等, 承渺役。 至是, 修德來啓曰: “冶匠高龍本優人, 戲爲盲人、醉人之狀, 玉等見而悅之, 累使作戲。若此不已,恐終備呈雜戲,無所不至。請以他人代之。” 承政院以修德等不能檢下,請罪。御書示之曰:“汝不謹任,何事可委信? 後勿妄生度日。”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8일 정축 1번째기사
김보가 활을 청하다. 진상하는 물건에 얘기하다
김보(金輔)가 통사(通事)에게 이르기를,
“저번에는 이미 남재상(南宰相)8410)의 화살[矢]을 취하였으니, 오늘은 마땅히 그 활[弓]을 취하여 장차 중원(中原)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하므로, 분예빈시(分禮賓寺)에서 이를 아뢰니, 임금이 즉시 궁공(弓工)에게 명하여 병조(兵曹)에서 시재(試才)하는데 쓰는 강궁상현(强弓上絃)을 취하여서 대령하게 하고, 도승지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姜玉)등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맞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두 대인을 위하여 장사(將士)로 하여금 사후(射侯)하고, 기사(騎射)하게 하겠다.”하니,
김보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말을 거느리어 앞에서 달려야겠습니다.”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술을 돌리게 되자, 강옥등이 전하에게 양보하니, 세자가 곧 임금에게 술을 올리었다. 임금이 박원형(朴元亨)으로 하여금 강옥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지난번의 칙지(勅旨)에, ‘이제부터는 해청(海靑)과 조수(鳥獸), 화목(花木)은 진헌하지 말라.’한 까닭으로, 내가 감히 진헌하지 않았으니, 이제 구아(狗兒),해물(海物)을 주는 것은 대인들이 스스로 바치는 것이 옳겠고, 내가 감히 함부로 바치지 않겠다. 그러나 이 물건을 싸는 것을 황복(黃袱), 황궤(黃櫃)를 사용하면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같으니, 어찌 하였으면 좋겠는가? 원컨대 대인이 지휘(指揮)하라. 만약에 또 아울러 주문(奏聞)하는 문서를 쓴다면 예부(禮部)에 마땅히 돌아갈 것이므로, 이것은 심히 옳지 못하니, 다만 수목(數目)만 써서 대인에게 부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대인들이 모두 귀향(歸鄕)하는데 역마(驛馬)가 노둔(駑鈍)할까 염려되니, 이제 말 2필을 주려하는데, 모두 내가 평일에 타던 것이다.”하니,
강옥등이 앞에 나와서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김보가 말하기를,
“원컨대 남재상(南宰相)이 쏘는 강궁(强弓)을 보았으면 합니다.”하니,
명하여 상현강궁(上弦强弓)을 취하여 주게 하였다. 김보가 청하여 남이(南怡)로 하여금 쏘게 하매, 남이가 즉시 띠고 있는 대전(大箭)을 뽑아서 한껏 당겨서 쏘았더니, 강옥(姜玉)이 하례하기를,
“이와 같은 양장(良將)은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데, 이 같은 사람이 좌우를 모시었으니 전하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하고,
김보가 말하기를,
“저들에게 쏘았던 궁시(弓矢)를 원컨대 제도(帝都)로 가지고 돌아가 뭇 사람들에게 과시(誇示)하기를, ‘이것은 우리 조선이 건주(建州)를 정벌할 때의 비장(裨將) 남이(南怡)의 활이다.’라고 하겠습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남이(南怡)뿐만이 아니라, 오늘 정중(庭中)의 장수와 군사들의 궁력(弓力)은 이보다 강한 자가 또한 많으니, 이것을 어찌 중원(中原)에 족히 보이겠는가?”하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경궁(勁弓)8411)은 천하(天下)에서 얻기 어려우니, 보이게 하여도 해롭지 않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친히 잔(盞)을 잡아 두목(頭目)에게 내려주니, 두목등이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받아 마시기를 마치고는 머리를 조아려 물러났다.
註8410]남재상(南宰相): 남이(南怡).註8411]경궁(勁弓): 센 활
○丁丑/金輔謂通事曰: “曩者旣取南宰相矢, 今日又當取其弓, 將示中原人。” 分禮賓寺啓之。 上卽命弓工, 取兵曹試才强弓上絃以待, 遣都承旨權瑊, 請姜玉等, 上迎入慶會樓下設宴。 上曰: “今日爲兩大人, 令將士射侯騎射。” 輔喜曰: “我當領馬前馳。” 及王世子行酒, 玉等讓于殿下, 世子乃先進酒于上。 上令朴元亨語玉等曰: “曩者勑旨有: ‘自今海靑與鳥獸、花木勿進。’ 故予不敢進獻, 今贈狗兒、海物, 大人等自獻可也, 我不敢擅進。 然此物裹用黃袱、黃櫃, 則似予之自獻, 何以則可? 願大人指揮。 若又幷修奏聞文書, 則當歸之禮部, 此甚不可, 但書數目, 以付大人何如?” 玉等曰: “殿下之言是矣。” 上曰: “大人等皆歸鄕, 恐驛馬駑鈍, 今將馬二匹以贐, 皆我平日所乘。” 玉等進前扣頭謝。 輔曰: “願觀南宰相所射强弓。” 命取上弦强弓與之。 輔請令怡射之, 怡卽抽所帶大箭, 引滿射之。 玉賀曰: “如此良將, 世所難得, 以如是之人侍左右, 殿下何所畏哉?” 輔曰: “彼所射弓矢, 願持歸帝都, 誇示於衆曰: ‘此我朝鮮征建州時, 裨將南怡之弓也。’” 上曰: “非獨南怡, 今日庭中將士弓力, 强於斯者亦多, 是何足示中原?” 玉等曰: “如此勁弓, 天下難得, 示之不妨。” 上親執盞賜頭目, 頭目等進前跪受飮訖, 扣頭而退。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19일 무인 1번째기사
강옥이 공주에 가는데, 만응고 1관을 진상하다
강옥이 공주(公州)에 가는데, 떠나면서 만응고(萬應膏) 1관(貫)을 진상(進上)하였다. 예빈시(禮賓寺)가 제천정(濟川亭)에서 전송하니, 임금이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주육(酒肉)을 주게 하였는데, 어부(漁父)가 물고기 몇 마리를 얻었으므로, 강옥이 기뻐하여 어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즉시 도감관원(都監官員) 권정(權侹)으로 하여금 진상하게 하였다.
○戊寅/姜玉往公州,臨行以萬應膏一罐進上。禮賓寺餞于濟川亭,上遣高靈君申叔舟、都承旨權瑊,贈酒肉,漁人得魚數尾,玉喜飮漁人酒,卽令都監官員權侹進上。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21일 경진 1번째기사
어세겸을 공주에 보내 강옥을 문안하게 하다
우승지(右承旨) 어세겸(魚世謙)을 공주(公州)에 보내어, 강옥(姜玉)을 문안하게 하였다.
○庚辰/遣右承旨魚世謙于公州, 問安姜玉。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24일 계미 1번째기사
김보가 장단에 가고자 하여 전실, 궁대를 요구.
윤자, 이계전이 강옥을 지대하게 하다
김보(金輔)가 장차 장단(長湍)에 가고자 하여 통사(通事)로 하여금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계순(韓繼純)에게 청하기를,
“궁대(弓帒), 전실(箭室)을 다시 전하에게 아뢰어 보내주기를 바랍니다.”하니, 임금이 명하여 한계순에게 표미구궁대(豹尾具弓帒), 전실(箭室) 1부(部), 달구(韃狗) 2마리를 가져다주게 하였다. 당시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권맹희(權孟禧)는 아비의 병이 극심하다하여 집에 있어, 명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 윤자(尹慈), 행첨지사(行僉知事), 이계전(李季專)에게 그 임무를 대신하여 강옥(姜玉)등을 지대(支待)하게 하였다.
○癸未/金輔將往長湍, 令通事請於同副承旨韓繼純曰: “弓帒、箭室, 更望啓殿下送之。” 上命繼純, 齎豹尾具弓帒ㆍ箭室一部、韃狗二贈之。 時, 京畿觀察使權孟禧, 以父病劇在家, 命漢城府尹尹慈、行僉知事李季專, 代其任, 支待姜玉等。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5월 28일 정해 2번째기사
어세겸이 공주로부터 와서 복명하여 강옥의 행적을 아뢰다
우승지(右承旨) 어세겸(魚世謙)이 공주(公州)로부터 와서 복명(復命)하기를,
“강옥(姜玉)이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관찰사(觀察使), 도사(都事), 목사(牧使), 판관(判官), 수령(守令)등과 사후(射侯)하여 물건을 차등있게 주고, 강옥이 그 집에 이르러, 당우(堂宇)를 두루 보고는 기뻐하며 사례하였습니다. 신이 선온례(宣醞禮)를 행하였더니, 그 족친(族親)이 각각 내려주신 옷을 입고 와서 뵈었으며, 가옥이 율사(栗寺)에 이르러 비단[絹] 20필(匹)을 시주하고 말하기를, ‘하나는 황제와 전하(殿下) 및 신민(臣民)을 위하여 설법(設法)하고, 하나는 나의 죽은 부모(父母)를 위하여 설법하라.’하고, 또 수좌승(首座僧)과 조카 강계숙(姜繼叔)의 사승(師僧)등에게 각각 비단 1필을, 옛날에 서로 알던 중들에게는 수파(手帕)를 주었습니다.”하였다.
○右承旨魚世謙, 自公州來復命曰: “姜玉到公州, 與觀察使、都事、牧使、判官、守令等射侯, 贈物有差。 玉至其家, 周覽堂宇, 喜謝。 臣行宣醞禮, 其族親各服賜衣來謁, 玉至栗寺, 施絹二十匹曰: ‘一爲皇帝及殿下曁臣民設法, 一爲我亡父母設法。’ 又贈首座僧及姪繼叔師僧等絹各一匹, 昔日相知僧等手帕。”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4일 임진 1번째기사
강옥이 직산에 머물은 것에 관한 경기관찰사 이훈의 봉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이훈(李塤)이 승정원에 봉서(奉書)하여 아뢰기를,
“이달 초3일에 강옥(姜玉)이 홍경천(洪慶川)에 이르렀다가 물이 창일(漲溢)하여 건널 수가 없어서 직산(稷山)에 물러가 머물었습니다.”하였다
○壬辰/京畿觀察使李塤, 奉書于承政院以啓曰: “本月初三日, 姜玉到洪慶川, 水漲未得渡, 退次稷山。”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5일 계사 4번째기사
강옥이 공주로부터 돌아오자 노고를 위문하다
강옥(姜玉)이 공주(公州)로부터 돌아왔다. 분예빈시(分禮賓寺)가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베푸니,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주육(酒肉)을 먹이게 하고, 또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선위(宣慰)하였다. 관(館)8433)에 돌아오자, 또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을 보내어 노고를 위문하게 하고, 각궁(角弓) 1장(張), 대전(大箭) 6개를 주었다.
註8433]관(館): 태평관
○姜玉還自公州。 分禮賓寺設宴于濟川亭, 遣都承旨權瑊, 餽酒肉, 又遣高靈君申叔舟宣慰。 及還館, 又遣左承旨李克增勞問, 贈角弓一張、大箭六介。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7일 을미 1번째기사
강옥등을 청하여 경회루 아래에서 잔치하다
임금이 도승지 권감(權瑊)을 보내어, 강옥(姜玉)등을 청하여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잔치하였다. 세자(世子)가 술을 돌리니, 강옥등이 전하에게 먼저 돌리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부득이하여 받았는데, 잔치가 파(罷)하자 임금이 누하(樓下)에 나아가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사후(射侯)하게 하였다.
○乙未/上遣都承旨權瑊, 請姜玉等, 宴于慶會樓下。 世子行酒, 玉等請先殿下, 上不得已受之。 宴罷, 上御樓下, 令諸將射侯。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7일 을미 2번째기사
강옥이 족친에게 관직, 노비, 전택등을 주도록 요구하자 그대로 따르다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각기 말1필과 아울러 궤자(櫃子)를 올리었다. 김보가 경주경저(慶州京邸)를 지나다 들어가 부모(父母)를 뵈었는데, 족친(族親)이 다 모였으므로 예빈시(禮賓寺)에서 잔치를 베푸니, 임금이 환관(宦官) 신운(申雲)을 보내어 선온(宣醞)과 어육(魚肉)을 가지고 가서 주게 하였다. 강옥 등이 관(館)에 돌아오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였는데, 강옥이 권감에게 이르기를,
“조카 강계숙(姜繼叔)에게 부모(父母), 노비(奴婢), 전택(田宅)이 있는 의관(衣冠)의 집안 딸과 장가들게 하고, 또 전하에게 아뢰어 강계숙에게 토전(土田)과 노비(奴婢)를 주게 하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입조(入朝)한 궁인(宮人)의 족친(族親)은 전하에게 아뢰어, 관직이 있는 자는 품질(品秩)을 올리고 관직이 없는 자는 직위를 제수하기를 빕니다. 내가 중국에 돌아가면 마땅히 아뢰겠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최태감(崔太監)이 말하기를, ‘매부(妹夫) 김복진(金福眞)을 모름지기 명년 정조(正朝)에 들여보내겠다.’고 하였으니, 또 전하에게 아뢰어 토전과 노비를 주고, 윤태감(尹太監)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어서 조석지간에 땅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모름지기 전하에게 전달(轉達)하여 조카 윤길생(尹吉生)을 호휼(護恤)하여 주게하라’하였는데, 내가 이제 여기에 이르러서 윤길생이 이미 재상(宰相)이 된 것을 보았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나, 그러나 태감의 말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하에게 아뢰어 주기를 빕니다.”하므로,
권감이 돌아와 아뢰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르고, 김보의 어미에게 노비(奴婢) 아울러 6구(口)를 내려주었다.
○姜玉、金輔, 各進馬一匹竝櫃子。 輔歷入慶州京邸, 謁父母, 族親畢會, 禮賓寺設宴。 上遣宦官申雲, 齎宣醞魚肉, 往贈之。 玉等還館, 上遣都承旨權瑊問安, 玉謂瑊曰: “姪姜繼叔, 令娶有父母、奴婢、田宅、衣冠之女, 且啓殿下, 給繼叔土田奴婢。” 又曰: “入朝宮人族親, 乞啓殿下, 有官者進秩, 無官者除職。 我回朝當奏。” 又曰: “崔太監言曰: ‘妹夫金福眞, 須於明年正朝入送。 且啓殿下, 給土田奴婢。’ 尹太監言曰: ‘我已老, 朝夕入地, 須轉達殿下, 護恤姪吉生。’ 我今到此, 見吉生已做宰相, 無復可言, 然太監之言, 不可不達, 乞啓殿下。” 瑊回啓, 上皆從之。 賜輔母奴婢幷六口。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8일 병신 1번째기사
달구 10두를 강옥등에게 나누어주게 하다
주서(注書)를 보내어 달구(㺚狗) 10두(頭)를 강옥등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丙申/遣注書, 分贈㺚狗十頭于姜玉等。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9일 정유 1번째기사
달구 6두를 강옥등에게 나누어주게 하다
주서(注書)를 보내어 달구(㺚狗) 6두(頭)를 강옥등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丁酉/遣注書, 分贈㺚狗六頭〔于〕姜玉等。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강옥등이 낮참에 대접하는 술을 베풀지 말기를 청하다
처음에 강옥등의 말을 따라 5일에 한번 주봉배(晝奉杯)8438)를 베풀었는데, 이에 이르러 관반(館伴)에게 이르기를,
“금후로는 다시 베풀지 마십시오,”하였다.
註8438]주봉배(晝奉杯): 낮참에 대접하던 술을 말함.
○辛丑/初因姜玉等言, 五日一設晝奉杯, 至是謂館伴曰: “今後勿復設。”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17일 을사 1번째기사
강옥이 활을 청하였으나 거절하다
강옥(姜玉)이 남원경저(南原京邸)에 이르러, 매부(妹夫) 김득(金得)을 보고 문병(問病)하니, 분예빈시(分禮賓寺)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임금이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가지고가서 위로하게하니, 강옥이 말하길,
“청컨대 전하(殿下)에게 아뢰어 활[弓子]을 더 주게 하십시오.”하므로,
권감이 돌아와 아뢰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관반(館伴)은 말하기를, ‘활을 청한다고 이미 전하에게 아뢰었더니, 군기(軍器)가 무디어 중국의 선물에 쓸 수가 없는데도, 대인(大人)등이 사재(私財)로써 조작(造作)할 것을 청한 까닭으로 부득이하여 허락하였고, 또 전에 여러 번 서로 준 것은 모두 일로 인하여 서로 아는 뜻을 표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또한 예사(例事)가 아니며, 또 전일에 조작하였던 활은 그것이 상등품이고 다시 별다른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니, 조정의 물의가 두려워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고 하라.”하였다.
○乙巳/姜玉至南原京邸, 見妹夫金得問病, 分禮賓寺設酌。 上募承旨權瑊, 齎宣醞慰之。 玉曰: “請啓殿下, 加賜弓子。” 瑊回啓, 御書曰: “館伴語曰: ‘請弓子, 已啓殿下, 軍器頓, 不可用於上國人情之物, 而大人等請以私財造作, 故不得已許之。 且前累次相贈, 皆因事而表相知之意耳。 然亦非例事也, 且前日所造之弓, 卽是上等, 無復有別樣, 恐朝廷物議, 不敢從命。’”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18일(병오) 1번째기사
분예빈시의 잔치에서 통사 전성을 잘못 금하여 다툼이 생기다
강옥(姜玉)등이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무인(武人)이 활쏘는 것을 구경하므로 분예빈시(分禮賓寺)에서 잔치를 베푸니, 명하여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에게 선온(宣醞)과 어육(魚肉)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공조판서(工曹判書) 남이(南怡)가 명을 받들어 사후(射侯)하는데 가서 참여하니, 여러 사람들도 또한 잔치에 참여하였다. 병조좌랑(兵曹佐郞) 김이정(金利貞)이 명을 받아 잡인(雜人)을 금(禁)하다가 통사(通事) 전성(田成)을 잘못 금하였더니, 전성이 김이정의 옷깃을 잡고 욕을 하며, 도리어 김보(金輔)에게 호소하기를,
“병조낭관(兵曹郞官)이 김동(金同)의 갓[笠]을 빼앗고 욕하였습니다.”하니, 김보(金輔)가 대노(大怒)하였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먼저 예궐(詣闕)하여 아뢰었는데, 임금이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쓰게 하기를,
“관반(館伴)은 대답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병조(兵曹)에서 전하의 명을 받들어 잡인을 금하게 한 소위(所爲)입니다. 병조낭관은 우리들의 함부로 국문(鞫問)하는 것이 아니니, 만약 전하에게 아뢰면 병조낭관과 통사는 반드시 엄중한 국문을 입어 큰 옥사가 장차 일어나고, 김동(金同)도 또한 반드시 왕래하며 증인으로 참여할 것이니,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에 아시면 법을 쓰는 것이 엄격하여 반드시 법을 굽히지 않을 것이니, 시끄럽게 하지 않음만 같지 못합니다.’고 하라.”하였다.
○丙午/姜玉等往慕華館, 觀武人射, 分禮賓寺設宴。 命左承旨李克增, 齎宣醞魚肉往慰之。 上黨君韓明澮、工曹判書南怡, 承命往參射侯, 諸人亦參宴。 兵曹佐郞金利貞, 承命禁雜人, 誤禁通事田成成, 執利貞衣領辱之, 反訴於輔曰: “兵曹郞官, 脫金同笠辱之。” 輔大怒。 兵曹參知柳子光, 先詣闕以啓, 上令申叔舟書曰: “館伴答曰: ‘是必兵曹受殿下之命, 禁雜人者所爲也。 兵曹郞官, 非我等所擅鞫問, 若啓殿下, 兵曹郞官與通事, 必被嚴鞫, 大獄將興, 金同亦必往來參證, 何以處之? 殿下若知之, 用法嚴, 必不曲法, 不若勿喧。’”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0일 무신 1번째기사
강옥, 김보가 정선의 묘에 치제하다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광주(廣州)에 가서 정선(鄭善)의 묘(墓)에 치제(致祭)하였다. 강옥등이 관반(館伴) 윤자운(尹子雲)에게 이르기를,
“전하께서 우리 무리를 극진히 사랑하여 이미 죽은 자에게 땅을 가려서 후하게 장사지냈으니, 저 세상과 이 세상에서도 갚기 어렵습니다.”하고,
정항(鄭恒)을 보고 말하기를,
“너는 죽은 형의 은재(銀財)와 송종(送終)8513)하는 물건을 많이 받았는데, 이제 무덤을 보건대, 석인(石人), 표석(標石), 삼계(三階)의 설치는 모두 이것이 전하의 은혜이니, 너는 무슨 공력(功力)을 썼으며, 무슨 전량(錢糧)을 소비하였기에, 어찌 정희(鄭希)와 여러 가족에게 골고루 나누지 않았느냐?”하니, 정항이 말하기를,
“저 정항은 이미 도량사(道場寺)에 재(齋)를 베풀었고, 또 원각사(圓覺寺)에 시주하여 들였으며, 또 정희(鄭希)와 여러 가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하였으나, 강옥등이 믿지 않고 재삼 말하였다.
제천정(濟川亭)에 다시 도착하니, 임금이 도승지 권감(權瑊),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고, 관(館)에 돌아오게 되자 좌승지 이극증(李克增)에게 명하여 문안하게 하였다.
註8513]송종(送終): 장사(葬事)에 관한 모든 일.
○戊申/姜玉、金輔往廣州, 致祭于鄭善墓。 玉等謂館伴尹子雲曰: “殿下極恤我輩, 已死者擇地厚葬, 幽明難報。” 見鄭恒曰: “汝多受亡兄銀財送終之物, 今見塋墳, 石人、標石、三階之設, 皆是殿下之恩。 汝則用何功力, 費何錢糧, 何不均分於鄭希與族?” 恒曰: “恒已設齋於道塲寺, 又施納於圓覺寺, 又分諸鄭希及諸族。” 玉等不信, 言之再三。 還到濟川亭, 上募承旨權瑊、高靈君申叔舟, 齎宣醞往慰之, 及還館, 命左承旨李克增問安。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1일 기유 1번째기사
강옥등이 도감관과 통사에게 한 자급 승차하도록 청함을 권감이 아뢰다
도승지 권감(權瑊)이 아뢰기를,
“어제 강옥(姜玉)등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감관(都監官)과 통사(通事)는 일찍 나오고 저물어서 물러가며, 옷을 벗지 못한 지가 이제 넉 달이나 되었으니, 갚기를 생각하여도 행할 길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우리들을 무휼하였으니, 각각 한 자급을 승차(陞次)하여서 우리들로 하여금 유명(留名)하기를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己酉/都承旨權瑊啓曰: “昨者姜玉等語臣曰: ‘都監官及通事, 早進暮退, 未得脫衣, 于今四閱月, 思報無由。 殿下旣恤我等, 請各陞一級, 俾我等留名。”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3일 신해 2번째기사
강옥, 김보가 한치인의 집에서 자을산군을 보다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입조(入朝)한 여자의 족친(族親)을 서원군(西原君) 한계미(韓繼美)와 사직(司直) 차효주(車孝輖)의 집에 가서 보고, 서성군(西城君) 한치인(韓致仁)의 집에 이르니, 우부승지(右副承旨) 윤계겸(尹繼謙)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당시 자을산군(者乙山君)【금상(今上)8541)】이 발[簾]안에 앉아서 보는데,
김보가 한치인에게 이르기를,
“어린 아들을 오라고 부르십시오.”하니,
한치인이 두 아들로 하여금 보게 하니, 김보가 말하기를,
“저 발[簾] 안에 아름다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므로, 한치인이 실지로써 대답하였더니, 강옥등이 말하기를,
“봉알(奉謁)하고 싶으나, 행례(行禮)함이 어려워 감히 못하겠습니다.”하였다.
○姜玉、金輔往見入朝女氏族親西原君韓繼美及司直車孝輖于其家, 至西城君韓致仁家, 命右副承旨尹繼謙, 齎宣醞往慰之。 時, 者乙山君【今上諱】於簾內坐觀之, 輔謂致仁曰: “呼兒子來。” 致仁令二子見, 輔曰: “彼簾內好的何人也?” 致仁答以實, 玉等曰: “欲奉謁, 難於行禮未敢也。”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5일(계축) 1번째기사
죄를 범한 통사등은 명 사신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죄주도록 하다
관반(館伴)이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김동(金同)이 내일 김득부(金得夫)의 딸에게 장가들려고 하는데, 이 앞서 김득부는 강계숙(姜繼叔)을 여서(女壻)8543)로 삼으려다가 국가에서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몰래 김동의 처(妻)를 삼으려 하니, 중지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에 알지 못하는 자는 명나라 사신이 가기를 기다린 뒤에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겠다. 이 사람뿐만 아니고 죄를 다스릴 자가 진실로 많다.”하고, 드디어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죄를 범한 통사(通事)등은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곧 죄주게 하라.”하였다.
註8543]여서(女壻): 사위.
○癸丑/館伴遣人啓曰: “ 金同 將以來日, 娶 金得夫 之女。 前此, 得夫 欲以 姜繼叔 爲女壻, 國家不聽。 今又欲潛妻 金同 , 止之何如?” 上曰: “若不知者, 待 明 使去後, 當治其罪。 非徒此人, 治罪者固多。” 遂傳于承政院曰: “犯罪通事等, 待 明 使還, 乃罪之。”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7일(을묘) 1번째기사
정선의 양자 정현, 정해를 인견하다
태감(太監) 정선(鄭善)의 양자(養子)인 두목(頭目) 정현(鄭賢), 정해(鄭海)등이 예궐(詣闕)하여, 후장(厚葬)을 사례하고 각기 백견사(白繭絲) 6근(斤)을 올리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서 먹이게 하고, 육조(六曹)에서는 강옥(姜玉)등을 태평관(太平館)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乙卯/太監 鄭善 養子頭目 鄭賢 、 鄭海 等詣闕, 謝厚葬, 各進白繭絲六斤。 上御 思政殿 引見, 命左承旨 李克增, 饋于賓廳, 六曹餞 姜玉 等于 大平館 。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8일(병진) 1번째기사
김보가 이신효의 가직과 정자주 집의 복호를 청하다
도승지 권감(權瑊)이 강옥(姜玉)등에게 문안하니,
김보(金輔)가 권감에게 말하기를,
“대저 사람은 은혜가 있는자에게는 은혜로써 보답하고 원한이 있는자에게는 원한으로써 갚는데, 장단군수(長湍郡守) 이신효(李愼孝)는 바로 향관(鄕貫)의 수령(守令)이고, 의원(醫員) 정자주(鄭自周)는 어미의 병을 본 것이 무릇 넉 달이나 지났어도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모름지기 전하에게 아뢰어 이신효에게 가직(加職)하고, 정자주의 집을 복호(復戶)하여 주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조궁감역관(造弓監役官)등은 수월(數月)을 근고(勤苦)하였으니, 전하에게 아뢰어 가직(加職)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丙辰/都承旨權瑊問安于姜玉等, 金輔語瑊曰: “凡人有恩者, 報之以恩, 有怨者, 報之以怨。 長湍郡守李愼孝, 乃鄕貫守令, 醫員鄭自周, 視母疾凡四閱月, 報恩無由。 願須啓殿下, 加愼孝職, 復自周家。” 又曰: “造弓監役官等, 數月勤苦, 請啓殿下加職。”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8일 병진 2번째기사
강옥, 김부에게 흑마포, 백저포등을 주게 하다
도승지 권감(權瑊)을 보내어, 흑마포(黑麻布) 2천 필(匹), 백저포(白苧布) 5백 필을 가지고 강옥(姜玉)에게 주고, 흑마포(黑麻布) 1천6백50필, 백저포(白苧布) 5백필을 김보(金輔)에게 주게하니, 강옥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기를,
“박(薄)한 물건을 올리고서 후사(厚賜)를 받으니, 이것은 장사[沽貨]를 한 것입니다.”하였다
○遣都承旨權瑊, 齎黑麻布二千匹、白苧布五百匹贈姜玉, 黑麻布一千六百五十匹、白苧布五百匹贈金輔。 玉扣頭謝曰: “進薄物而受厚賜, 是沽貨也。”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8일 병진 5번째기사
강옥에게 회봉한 물목을 잘못 기록하여 권감이 사과하다
강옥(姜玉)에게 회봉(回奉)한 물목(物目)안에 흑마포(黑麻布) 2천필(匹)을 3천 필로 잘못 썼는데, 강옥이 포(布)를 받아 세다가 물목과 서로 어긋나므로, 강옥이 관반(館伴)에게 말하여 아뢰었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등이 말을 갖추어서 아뢰고, 또 대죄(待罪)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권감이 스스로 실수한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가서 사과하게 하라.”
하였다. 권감이 즉시 태평관(太平館)에 나아가 사과하고, 사사로이 회봉(回奉)할 마포(麻布) 6필(匹), 접선(摺扇) 14파(把)를 강옥에게 주고, 또 마포(麻布) 11필을 김보에게 주었으며, 또 임금의 명(命)이라 하여, 강옥에게 횡자 옥새포(鐄子玉璽布) 88필을, 두목(頭目) 김성(金成)에게 44필을, 정현(鄭賢)에게 10필을, 윤태(尹泰)에게 40필을, 정해(鄭海)에게 10필을 주니, 모두 진상(進上)한 것을 회봉(回奉)함이었다
○姜玉回奉物目內, 黑麻布二千匹, 誤書三千, 玉受布數之, 與物目相違, 玉語館伴以啓。 高靈君申叔舟、都承旨權瑊等, 具辭以啓, 且待罪。 傳曰: “是瑊自失也, 宜自往謝。” 瑊卽詣大平館謝之, 以私回奉麻布六匹、摺扇十四把贈玉, 又以麻布十一匹贈金輔。 又以上命, 贈玉鐄子玉璽布八十八匹, 頭目金成四十四匹, 鄭賢十匹, 尹泰四十匹, 鄭海十匹, 皆進上回奉也。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6월 28일(병진) 6번째기사
김순명, 권건, 권인, 이신효등에게 당상관을 제수하다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 이조판서 성임(成任), 승지(承旨)등을 불러 강녕전(康寧殿)에 들어와 정사를 의논하게 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글을 관반(館伴)에게 보이고, 강옥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분예빈시(分禮賓寺) 관원(官員)인 녹사(錄事)와 통사(通事), 감조궁전관(監造弓箭官), 장단군수(長湍郡守)에게 가직(加職)하는 일과 정자주(鄭自周)에게 복호(復戶)하는 일을 이미 명하여 유사(有司)가 시행하였습니다.”하였다.
당시에 강옥등이 분예빈시 관리의 작위를 청하므로 임금이 어렵다하니, 강옥 등이 굳이 청하므로, 명하여 군자정(軍資正) 김순명(金順命), 훈련첨정(訓鍊僉正) 권건(權健), 도총부진무(都摠府鎭撫) 권인(權引), 장단군수(長湍郡守) 이신효(李愼孝)에게 아울러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고, 나머지도 각각 가자(加資)하니, 이로부터 자궁자(資窮者)는 반드시 이 예(例)를 이끌어서 당상관을 희망하는 자가 더욱 많았다.
○召 綾城君 具致寬 、戶曹判書 盧思愼 、吏曹判書 成任 、承旨等, 入 康寧殿 議事, 設酌。 以書示館伴, 使言於 姜玉 等曰: “分禮賓寺官員錄事及通事, 監造弓箭官、 長湍 郡守加職事, 鄭自周 復戶事, 已命有司施行。” 時, 玉 等請爵分禮賓寺官吏, 上難之, 玉 等固請, 命以軍資正 金順命 、訓鍊僉正 權健 、(者)〔都〕摠府鎭撫 權引 、 長湍 郡守 李愼孝 , 竝授堂上官, 餘各加資。 自後凡資窮者, 必援引此例, 希望堂上官者益衆。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3일 경신 3번째기사
승정원에서 강옥, 김보가 집을 받고 사례함을 알리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이양조(李陽祚)의 집을 강옥(姜玉)에게 주고, 강효문(康孝文)의 집을 김보(金輔)에게 준다는 것을 관반(館伴)으로 하여금 강옥과 김보에게 말하게 하였더니, 강옥과 김보가 기뻐하며 사례하였습니다.”하였다.
○承政院啓:“以李陽祚家贈姜玉,康孝文家贈金輔,令館伴說與玉、輔,玉、輔喜謝。”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4일 신유 1번째기사
예빈시가 강양, 진서, 윤태, 이상 등에게 모화관에서 잔치를 베풀다
두목(頭目) 강양(姜亮), 진서(陳恕), 윤태(尹泰), 이상(李祥), 엄종(嚴宗), 왕쇄(王璽), 김웅(金雄), 호청(胡淸), 오식(吳寔), 이선(李宣), 이통(李通)등이 먼저 가니, 예빈시(禮賓寺)가 모화관(慕華館)에서 잔치를 베풀고, 분예빈시(分禮賓寺)의 관리인 윤기반(尹起磻)이 가서 이들을 먹이었다. 강옥(姜玉)의 행장(行裝)은 91궤(櫃) 41바리[駄], 달구(韃狗)가 19이었고, 김보(金輔)의 행장은 50궤에 26바리, 달구가 20이었는데, 행부호군(行副護軍) 권인(權引)이 거느리고 갔다.
○辛酉/頭目姜亮、陳恕、尹泰、李祥、嚴宗、王璽、金雄、胡淸、吳寔、李宣、李通等先行, 禮賓寺設宴於慕華館, 分禮賓寺官尹起磻往饋之。 姜玉行装, 九十一櫃, 四十一駄, 韃狗十九; 金輔行装, 五十櫃, 二十六駄, 韃狗二十。 行副護軍權引領去。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4일 신유 2번째기사
강옥이 조카등에게 벼슬을 제수해 주기를 청하다
강옥(姜玉), 김보(金輔)가 하사(下賜)받은 집을 가서 보았다. 분예빈시(分禮賓寺)에서 잔치를 베풀고 좌부승지(左副承旨) 윤계겸(尹繼謙)을 강옥의 집에,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계순(韓繼純)을 김보의 집에 보내어 각각 선온(宣醞)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강옥이 윤계겸에게 이르기를,
“이미 공주(公州)의 큰 집을 주었고, 또 이와 같은 좋은 집을 내려주시니, 전하(殿下)의 은덕(恩德)은 한 입으로 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하고,
또 조카인 강계숙(姜繼叔), 김남(金南), 김내은동(金內隱同)과 박사번(朴思蕃) 등의 이름을 써서 윤계겸에게 주며 이르기를,
“강계숙은 집과 노비(奴婢)는 족합니다마는 녹(祿)이 박(薄)하니, 어떻게 스스로 지켜 나가겠습니까? 빌건대 가직(加職)을 하도록 계달(啓達)해 주고, 김남, 김내은동등에게는 벼슬을 제수(除授)해 주고 군역(軍役)도 면(免)하게 해 주소서. 박사번은 내가 어릴 때에 같은 절에서 글을 읽은 자이니, 빌건대 아울러 벼슬을 제수하게 해 주소서.”하고,
또 강계숙의 집안에서 쓸 집물(什物)을 청하였다.
김보는 한계순을 보고 기뻐하여 사례하기를,
“전하(殿下)께서 하사(下賜)하신 술인데, 어찌 다 마시지 않겠습니까?”하고, 지극히 기뻐하다가 파(罷)하였다.
○姜玉、金輔往見所賜家。 分禮賓寺設宴, 遣左副承旨尹繼謙于玉家, 同副承旨韓繼純于輔家, 各齎宣醞, 往慰之。 玉語繼謙曰: “旣給公州大家, 又賜如此好家, 殿下恩德, 一口難盡。” 又書姪姜繼叔、金南、金內隱同及朴思蕃等名, 付繼謙曰: “繼叔家舍, 奴婢足矣, 然祿薄則何以自守? 乞啓加職。 金南、金內隱同等授職, 俾免軍役。 思蕃吾幼時同寺讀書者也, 乞幷授職。” 又請繼叔家中什物。 輔見繼純, 喜謝曰: “殿下賜酒, 何不劇飮?” 極歡而罷。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5일 임술 2번째기사
강옥과 김보에게 문어, 마른 꿩, 오적어등을 나누어 주게 하다
환관(宦官) 신운(申雲)에게 명(命)하여 문어(文魚) 60미(尾), 마른 꿩[乾雉] 1백수(首), 오적어(烏賊魚) 1천2백마리, 마른 광어(廣魚) 1백40마리, 마른 전복어(全鰒魚) 1백속(束), 곤포(昆布) 80속, 노루[獐] 2구(口), 호도(胡桃) 10두(斗), 잣[松子] 10두를 가지고 가서 강옥(姜玉)과 김보(金輔)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命宦官申雲, 齎文魚六十尾、乾雉一百首、烏賊魚一千二百尾、乾廣魚一百四十尾、乾全鰒魚一百束、昆布八十束、獐二口、胡桃十斗、松子十斗, 分贈于姜玉、金輔。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8일 을축 1번째기사
강옥과 김보에게 소주, 녹미, 마른 노루등을 나누어 주다
환관(宦官) 신운(申雲)에게 명(命)하여 소주(燒酒) 40병(甁), 녹미(鹿尾) 4백 개, 마른 노루[乾獐] 20구(口), 마른 꿩[乾雉] 4백 수(首), 마른 대구어[乾大口魚] 2백미(尾), 편포(片脯) 4백개, 해채(海菜) 80속(束), 해의(海衣) 4백첩(貼), 마른 대하[乾大蝦] 2백속, 곤포(昆布) 1백속, 마른 문어[乾文魚] 2백 미(尾), 송자(松子)8555) 20말[斗], 향심(香蕈)8556) 20말을 강옥(姜玉)과 김보(金輔)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강옥이 말하기를,
“이미 경외(京外)에 집과 노비(奴婢) 및 토지(土地)를 내려 주셨는데 또 물품을 내려 주심이 주첩(稠疊)하니, 전하(殿下)의 두터운 은총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하고,
이어서 대홍직금망룡슬란(大紅織金蟒龍膝襴) 1필(匹), 앵가록계지전지보상화(鷪哥綠界地纏枝寶相花) 1필, 백왜초(白倭綃) 1필, 백세삼릉면포(白細三稜綿布) 2필, 흑연향(黑硏香) 1관(罐), 금박(金珀) 1관(串), 자단향(紫檀香) 1관을 진상(進上)하였으므로 명하여 흑세마포(黑細麻布) 70필을 가지고 회증(回贈)하였다. 김보가 이르기를,
“이미 집과 노비와 토지를 내려주셨고, 또 분예빈시(分禮賓寺)의 관원(官員)들의 벼슬을 올려 주셨기에 곧 두목(頭目)으로 하여금 사례를 올리고자 했고, 또 표(表)를 진상(進上)하고자 했으나 진실로 번독(煩瀆)할 듯하여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註8555]송자(松子): 잣 註8556]향심(香蕈): 버섯
○乙丑/命宦官申雲, 齎燒酒四十甁、鹿尾四百箇、乾獐二十口、乾雉四百首、乾大口魚二百尾、片脯四百箇、海菜八十束、海衣四百貼、乾大蝦二百束、昆布一百束、乾文魚二百尾、松子二十斗、香蕈二十斗, 分贈于姜玉、金輔。 玉曰: “旣賜京外家舍, 及奴婢土田, 又餽遺稠疊, 殿下厚恩, 報答無由。” 乃以大紅織金蟒龍膝襴一匹、鸚哥綠界地纏枝寶相花一匹、白倭綃一匹、白細三稜綿布二匹、黑硏香一罐、金珀一串、紫檀香一串進上, 命以黑細麻布七十匹回贈。 輔曰: “旣賜家舍、奴婢、土田, 又陞分禮賓寺官員等職, 卽欲令頭目進謝, 且欲進上表, 誠恐煩瀆, 不敢請。”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9일 병인 1번째기사
강옥과 김보에게 담청주, 대구어등을 내리다
강옥(姜玉)과 김보(金輔)가 김담(金淡)을 가서 보니, 담청주(淡淸酒) 5병(甁), 대구어(大口魚) 10구(口), 생선 10미(尾), 포(脯) 3속(束), 젓갈[醢] 2동이[缸]를 내려주고 분예빈시(分禮賓寺)로 하여금 술자리를 베풀도록 하였다. 다음에 윤길생(尹吉生)의 집에 가니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에게 명(命)하여 선온(宣醞) 10병, 포(脯) 10속, 대구어 15미(尾), 젓갈 2동이, 사슴 1구(口)를 가지고 가서 이를 위로하게 하였다.
○丙寅/姜玉、金輔往見金淡, 賜淡淸酒五甁、大口魚十口、魚十尾、脯三束、醢二缸, 令分禮賓寺設酌。 次往尹吉生家, 募承旨權瑊, 齎宣醞十甁、脯十束、大口魚十五尾、醢二缸、鹿一口, 往慰之。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10일 정묘 1번째기사
강옥과 김보에게 해채, 마른 물고기, 석수어등을 나누어주다
환관(宦官) 신운(申雲)에게 명(命)하여 해채(海菜) 4백속(束), 마른 물고기[乾水魚] 1백미(尾), 석수어(石首魚) 1백속, 마른 광어[乾廣魚] 1백40미(尾), 황어젓[黃魚醢], 석수어란젓[石首魚卵醢], 망어란젓[芒漁卵醢], 송어젓[松魚醢] 각각 2동이를 강옥(姜玉)과 김보(金輔)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丁卯/命宦官申雲, 齎海菜四百束、乾水魚一百尾、石首魚一百束、乾廣魚一百四十尾、黃魚醢ㆍ石首魚卵醢ㆍ芒魚卵醢ㆍ松魚醢各二缸, 分贈于姜玉、金輔。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10일(정묘) 2번째기사
김보가 족척의 승직을 청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에게 명(命)하여 진헌(進獻)할 향심(香蕈), 석균(石菌), 탑사(塔士), 마열(麻裂), 마른 복어[乾鰒漁], 곤포(昆布) 각각 1궤(櫃), 마른 팔대어[乾八帶魚] 4궤, 대포(大脯), 마른 오즉어[乾烏鰂魚], 전건복어(全乾鰒魚) 각각 2궤, 옥비담황세구(玉鼻淡黃細狗), 옥비담흑세구(玉鼻淡黑細狗) 각각 1척(隻), 담황세구(淡黃細狗) 2척, 백세구(白細狗) 3척을 강옥(姜玉) 과 김보(金輔)에게 주니 강옥과 김보가 일일이 자세히 살펴보고, 모두 스스로 봉하여 쌌다. 김보가 권감(權瑊)에게 말하기를,
“매사(每事)에 전하(殿下)의 은덕(恩德)을 후하게 입었으므로 오래도록 입을 열지 못하였는데, 이제 아비 김순복(金純福)과 형(兄) 김동(金同)과 외숙(外叔) 강말생(姜末生)의 승직(陞職)을 전하께 계청(啓請)하여 주기를 원합니다.”하므로, 권감이 아뢰니 모두 초자(超資)하도록 명(命)하였다.
○募承旨權瑊, 以進獻香蕈ㆍ石菌ㆍ塔士ㆍ麻裂ㆍ乾鰒魚ㆍ昆布各一櫃、乾八帶魚四櫃、大脯ㆍ乾烏鰂魚ㆍ全乾鰒魚各二櫃、玉鼻淡黃細狗ㆍ玉鼻淡黑細狗各一隻、淡黃細狗二隻、白細狗三隻, 付姜玉、金輔。 玉、輔一一審視, 皆自封裹。 輔謂瑊曰: “每事厚蒙殿下恩德, 久未開口, 今願父純福、兄金同、表叔姜末生陞職, 請啓殿下。” 瑊以啓, 命皆超資。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10일(정묘) 3번째기사
김보에게 선온과 어육을 보내 위로하다
김보(金輔)가 부모(父母)의 집에 가서 돌아갈 것을 고(告)하며 사례하니, 우승지(右承旨) 어세겸(魚世謙)에게 명(命)하여 선온(宣醞)과 어육(魚肉)을 가지고 가서 이를 위로하게 하니, 김보가 사례하기를,
“매양 근신(近臣)을 보내어 위로해주시니 전하(殿下)의 은덕(恩德)은 감대(感戴)함이 망극(罔極)합니다.”하고,
이어서 어세겸(魚世謙)과 관반(館伴) 윤자운(尹子雲)에게 운아청단자(雲鴉靑段子) 각각 1필씩을 주므로 어세겸등이 이를 사양하였으나, 김보가 굳이 주므로 부득이 받았다. 강옥(姜玉)이 강계숙(姜繼叔)의 집에 가서 강계숙의 아내와 부모(父母)를 보고 유별(留別)을 하므로,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 에게 명(命)하여 선온(宣醞)과 어육(魚肉)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니, 강옥이 북면(北面)하여 고두(扣頭)하고 받았다.
○金輔謝父母家告歸, 命右承旨魚世謙, 齎宣醞、魚肉, 往慰之。 輔謝曰: “每遣近臣慰宴, 殿下恩德, 感戴罔極。” 仍贈世謙及館伴尹子雲, 鴉靑段子各一匹。 世謙等辭之, 輔强之, 不得已乃受。 姜玉往姜繼叔家, 見繼叔妻及父母留別, 命左承旨李克增, 齎宣醞、魚肉往慰, 玉北面扣頭而受。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10일 정묘 4번째기사
강옥이 요청한 물품 중 쇄자갑은 군기에 관계되므로 거절하다
강옥(姜玉)이 토표피(土豹皮), 동과(銅鍋), 자주(紫紬), 피체(髲髢), 쇄자갑(鎖子甲), 유지개장(油紙蓋張)을 청하였는데 명(命)하여 토표피 2장(張), 동과 4사(事), 자주 6필, 피체 1백개, 유지개장 2부(部)를 강옥과 김보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이들에게 말하기를,
“쇄자갑(鎖子甲)은 군기(軍器)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인정(人情)8557)에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하고 〈중국〉조정(朝廷)의 물의(物議)가 두려워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하였다.
註8557]인정(人情): 선물.
○姜玉請土豹皮、銅鍋、紫紬、髲髢、鎖子甲、紬紙蓋張, 命以土豹皮二張、銅鍋四事、紫紬六匹、髲髢一百箇、油紙蓋張二部, 分贈玉及金輔, 語之曰: “鎖子甲係是軍器, 不可用於人情, 恐朝廷物議, 不敢從。”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11일 무진 1번째기사
태평관에 행행하여 강옥과 김부를 만나다
태평관(太平館)에 행행(行幸)하니, 강옥(姜玉)과 김보(金輔)가 중문(中門) 밖에 나와서 맞아들이고 전하(殿下)에게 남향(南向)하여 서기를 청하고서 사례(謝禮)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사양하였다.
강옥과 김보가 고두(扣頭)하고 사례하기를,
“이미 가사(家舍)와 궁전(弓箭)을 내려주시고 또 친속(親屬)에게 벼슬까지 주시니 고맙고 기쁨이 지극하여 뼈가 가루가 된다하더라도 갚기가 어렵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슨 사례할 것이 있겠는가? 〈중국〉조정(朝廷)을 공경하여 감히 그렇게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하였다.
강옥과 김보가 전하께 앉기를 청하니, 임금이 통사(通事) 김유경(金由敬)으로 하여금 강옥과 김보에게 말하게 하기를,
“내가 근일(近日)에 식상(食傷)이 나서 서로 만나지 못할까 걱정하였더니, 오늘 조금 나았으므로 와서 보게 된 것이다.”하였다.
강옥과 김보가 이르기를,
“우리 노복(奴僕)들은 이를 십분 근심하며 오히려 자칫하면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할까 두려워합니다.”하니,
또 통사(通事) 김자해(金自海)로 하여금 강옥과 김보에게 말하게 하기를,
“진헌(進獻)하는 물목(物目)의 단본(單本)에 압인(押印)을 하는가? 하지않는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하니,
강옥과 김보가 이르기를,
“만일 보(寶)를 사용하면 마땅히 전하의 휘(諱)를 써야하므로, 보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인(大人)의 말이 옳다.”하였다.
또 관반(館伴) 박원형(朴元亨)으로 하여금 강옥과 김보에게 말하게 하기를,
“오늘이 곧 전위(餞慰)하는 날이니 마땅히 두 대인(大人)과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 잔만 들고 세자(世子)로 하여금 이를 대신하게 한다.”하니,
강옥과 김보가 이르기를,
“오직 명령대로 하겠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나가니 강옥과 김보가 공손히 전송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진헌하는 구아(狗兒)는 미리 준비한 물건이 아니고, 근일(近日)에 널리 구하여 다만 7척(隻)을 얻었는데, 진선(盡善)되지 못할까 두렵다.”하고,
드디어 환궁(還宮)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에게 명(命)하여, 흑세마포(黑細麻布) 30필, 백세저포(白細苧布) 20필, 흑세마포원령(黑細麻布圓領) 2령(領), 백세저포철릭(白細苧布帖裏) 4령, 아청단자초피허흉(鴉靑段子貂皮虛胸) 2령, 아청단자초피이엄(鴉靑段子貂皮耳掩) 2, 초관(貂冠) 2정(頂), 대홍 단자초피호슬(大紅段子貂皮護膝) 2부(部), 녹비화(鹿皮靴) 2쌍(雙), 초피심아수달피변녹비아다개(貂皮心兒水獺皮邊鹿皮阿多介) 2, 석등잔(石燈盞) 4사(事), 초피(貂皮) 1백20령(領), 호피(狐皮) 80령, 채화석(彩花席) 16장(張), 표지(表紙) 8권(卷), 인삼(人蔘) 40근을 강옥과 김보에게 나누어주고, 또 두목(頭目)에게는 각각 흑마포(黑麻布), 백저포(白苧布) 각 1필과 초록유 철릭(草綠, 帖裏) 1령, 청서피관(靑鼠皮冠) 1정(頂), 이엄(耳掩) 1개를 주었다.
○戊辰/幸大平館, 姜玉、金輔出中門外迎入, 請殿下南向立, 欲行謝禮, 上辭之。 玉、輔扣頭謝曰: “旣賜家舍弓箭, 又爵親屬, 感喜之至, 糜粉難報。” 上曰: “何謝之有? 敬朝廷, 不敢不爾。” 玉、輔請殿下坐, 上令通事金由敬, 語玉、輔曰: “予近日食傷, 恐未相會, 今日小愈, 故來見。” 玉、輔曰: “我奴僕等, 十分憂之, 猶恐動勞聖體。” 上又使通事金自海, 語玉、輔曰: “進獻物目單本, 押印乎否? 何以爲之?” 玉、輔曰: “倘用寶則當書殿下之諱, 不可用寶。” 上曰: “大人之言是。” 又令館伴朴元亨, 語玉、輔曰: “今日乃餞慰之日, 當與兩大人醉懽, 然予尙稍未寧, 但奉一爵, 使世子代之。” 玉、輔曰: “惟命。” 上旣出, 玉、輔祗送。 上曰: “進獻狗兒, 非預備之物, 近日旁求, 但得七隻, 恐未盡善。” 遂還宮。 募承旨權瑊, 以黑細麻布三十匹、白細苧布二十匹、黑細麻布圓領二領、白細苧布帖裏四領、鴉靑段子貂皮虛胸二領、鴉靑段子貂皮耳掩二、貂冠二頂、大紅段子貂皮護膝二部、鹿皮靴二雙、豹皮心兒水獺皮邊鹿皮阿多介二、石燈盞四事、貂皮一百二十領、狐皮八十領、彩花席十六張、表紙八卷、人參四十觔, 分贈于玉、輔。 又贈頭目各黑麻布ㆍ白苧布各一匹、草綠襦帖裏一領、靑鼠皮冠一頂、耳掩一。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7월 13일 경오 1번째기사
모화관에 행행하여 강옥과 김보를 전송하다
모화관(慕華館)에 행행(行幸)하여 강옥(姜玉)과 김보(金輔)를 전송(餞送)하였는데, 강옥등이 전하(殿下)께서 남향(南向)하여 앉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사양하니, 강옥등이 재배(再拜)하고 고두(扣頭)하고 임금이 답하여 절하고, 드디어 동(東), 서(西)로 대좌(對坐)하였다.
관반(館伴) 박원형(朴元亨)으로 하여금 강옥에게 말하게 하기를,
“여름철에 여러 날 동안 괴로움을 받았을 것인데, 지대(支待)하는 모든 일이 뜻과 같지 못한 것을 한(恨)한다. 또 여러 족친(族親)에게 내가 높은 관작(官爵)을 제수(除授)하고자 하였으나 견문(見聞)하는 이가 놀랄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행(行)하지 못하였으니, 천천히 마땅히 올려 제수할 것이니 후에는 필시 이를 알 것이다. 다만 오늘 서로 이별하는 것을 생각하니, 실로 슬픔이 더한다.”하니,
김보가 이르기를,
“우리 족친에게 벼슬을 제수하는 일이 어찌 긴요하겠습니까? 원컨대 염려하지 마소서.”하였고,
강옥은 이르기를,
“전하(殿下)의 은총(恩寵)은 하늘과 같아서 망극(罔極)한데, 오늘 이별하니, 어찌 창연(愴然)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단배(單杯)로 술을 돌리면서 이르기를,
“몸이 아직 편치 못하므로 마실 수 없으니, 완배(完杯)를 하지 아니하고, 세자(世子)가 술을 돌릴 것이다.”하니,
강옥 등이 회배(回杯)를 행(行)하고자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의 분기(分岐)가 어찌 촉박(促迫)하기가 이러한가? 비록 마시지 않더라도 청컨대 아직 성례(成禮)는 머물러 두게 하라.”하였다.
강옥등이 이르기를,
“저희들은 길 갈 사람이며, 또 전하께서 오래 앉아 계셔서 수고로울까 두렵습니다.”하므로,
임금이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강옥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본국(本國)의 재상(宰相)이 〈중국〉서울에 나아가는 날에 전별의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하여 벽제(碧蹄)의 길을 알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대인(大人)은 본국 재상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은 봉별(奉別)로 대접을 박하게 하여 보내는 것이 걱정스럽다.”하니,
강옥등이 이르기를,
“저희들 노복(奴僕)은 다시 효순(孝順)할 것이 없으니, 예(禮)로써 마땅히 명에 따르겠습니다.”하고 드디어 돌아가서 앉았다.
임금이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과 자을산(者乙山)【금상(今上)의 휘(諱)】으로 하여금 강옥등을 뵙게 하였고,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차례로 술을 돌렸다. 명하여서 직모(織毛), 늑추(勒鞦), 사의(蓑衣), 궁전(弓箭), 가궁(家弓), 전모(箭帽), 유지석(油紙席) 각각 2부(部)와 모편(毛鞭) 2병(柄)을 나누어주게 하니, 강옥등이 감사히 받았다.
임금이 손으로 큰 칼 2자루를 집어 강옥등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동팔참(東八站) 길에서 만일 야인(野人)을 만나거든 이것을 가지고 베어라.”하니, 강옥등이 이르기를,
“오직 명령대로 하겠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또 관반(館伴) 윤자운(尹子雲)에게 명(命)하여 소선(小膳)을 두목(頭目)들에게 내려주게 하였다.
강옥등이 잔을 돌리고 작별에 임하여 임금이 강옥등에게 말하기를,
“건주(建州)를 정벌하는 일은 이미 중국 황제의 명(命)이 있었으니, 실로 신하된 직분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황제께서 특별히 후하게 상(賞)을 주시니 황공(惶恐)하기가 배나 더하다.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가지고 중국 조정에 전달(轉達)하라.”하니,
강옥등이 대답하기를,
“건주(建州)의 정벌은 실로 황제(皇帝)의 큰 복(福)이요, 전하(殿下)께서 충성(忠誠)을 다하신 소치(所致)입니다. 이러한 경사(慶事)로 연유하여 저희들이 본국(本國)에 이를 수 있었고, 전하의 은총을 깊이 입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저 건주의 도적은 금시에 조공(朝貢)하다가도 금시에 배반하므로 황제께서도 심히 초절(勦絶)코자 하니, 전하께서 만약 능히 이를 멸(滅)하여 유육(遺育)하지 못하게 하면 황제께서 더욱 기뻐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함부로 정벌하는 것은 진실로 감히 하지 못할 바이고, 다만 저들이 와서 우리를 범(犯)하면 이를 막을 뿐이다. 대개 섬멸(殲滅)하는 것은 기약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미 자멸(自滅)할 조짐이 있다.”하였다.
강옥등이 이르기를,
“다른 날 〈중국〉조정에서 만일 거병(擧兵)하여 서쪽을 공격하면, 곧 저들은 반드시 동쪽으로 향할 것이니, 그때에 미쳐서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면, 저들은 마땅히 섬멸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서쪽을 공격하는 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 감히 우리에게 달려오겠느냐?”하였다.
강옥등이 두 번 절하고 사별(辭別)하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말로도 다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다할 수가 없다.”하니,
강옥등은 다만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갔다. 강옥등이 세자(世子) 앞에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또 종친(宗親) 및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의 반항(班行)에 나아가 각 반항마다 두 번씩 절하였다. 3품(三品) 이하(以下)에 이르러서는 읍(揖)을 하면서 지났다.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분예빈시(分禮賓寺)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강옥등이 이르기를,
“상별(傷別)함이 지극하여 감히 다시 마시지 못하겠습니다.”하고,
인하여 슬피 울면서 자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떠났다.
○庚午/幸慕華館, 餞姜玉、金輔。 玉等請殿下南向坐, 上辭之, 玉等再拜扣頭, 上答拜, 遂東西對坐。 令館伴朴元亨語玉等曰: “暑月多日受苦, 支待諸事, 恨不如意。 且諸族親, 予欲授高爵, 恐駭見聞未敢, 徐當陞授, 後必知之。 但念今日相別, 實增悽悲。” 輔曰: “我族親除職事, 有何打緊? 願爲勿慮。” 玉曰: “殿下之恩, 如天罔極, 今日分離, 豈不愴然?” 上以單杯行酒曰: “體猶不平, 不可以飮, 故未完杯, 世子行酒。” 玉等欲行回杯, 上曰: “今日分岐, 何迫促乃爾? 雖不飮, 請姑留成禮。” 玉等曰: “我等行路之人, 且恐殿下久坐勞神。” 上使高靈君申叔舟, 語玉等曰: “本國宰相赴京之日, 亦飮餞泥醉, 不知碧蹄之路, 況大人非本國宰相比也。 只如此奉別, 恐涉薄送。” 玉等曰: “我等奴僕, 更無孝順, 禮當從命。” 遂還坐。 上使月山君婷、者乙山【今上諱】見玉等, 永順君溥、龜城君浚以次行酒。 命以織毛、勒鞦、蓑衣、弓箭、家弓、箭帽、油紙席各二部, 毛鞭二柄, 分贈之, 玉等感受。 上手執大刀二把, 分贈玉等曰: “東八站路, 如遇野人, 將此斬之。” 玉等曰: “惟命。” 上又命館伴尹子雲, 以小膳賜頭目等。 玉等回杯臨別, 上語玉等曰: “征建州之事, 旣有帝命, 實我臣職當爲, 帝特厚賞, 倍深惶恐。 須將此意, 轉達朝廷。” 玉等答曰: “征建州, 實是皇帝洪福, 殿下忠誠所致。 緣此慶事, 我等得到本國, 深蒙殿下之恩, 不然何鎰來? 且彼建州之賊, 乍朝乍叛, 皇帝深欲勦絶, 殿下若能滅之無遺育, 則皇帝尤喜。” 上答曰: “擅伐誠所不敢, 但彼來犯我, 禦之而已。 若夫殲滅, 固難必也。 然自今已有自滅之漸。” 玉等曰: “他日朝廷, 若擧兵擊西, 則彼必向東, 及其時而擊走之, 則彼當殲滅矣。” 上曰: “雖有擊西之擧, 彼何敢奔我乎?” 玉等再拜辭別, 上曰: “言無盡意無窮。” 玉等但叩頭泣而出。 玉等就世子前再拜, 又就宗親及議政府、六曹班行, 各行再拜。 (○)至三品以下, 行揖而去。 至洪濟院, 分禮賓設宴, 玉等曰: “傷別之至, 不敢更飮。” 因悲泣不就坐而去。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8월 4일(신묘) 2번째기사
함길도 채방 구겸이 올린 아토표중 큰 것은 놓아주고 작은 것은 사복시에서 기르게 함
함길도 채방(咸吉道採訪) 구겸(具謙)이 아토표(兒土豹) 2척(隻)을 올렸는데, 처음에는 강옥(姜玉)등이 요구하였으므로 명하여 이를 잡도록 하였으나, 이때에는 강옥등이 이미 돌아갔으므로, 그 큰 것은 놓아 주고, 작은 것은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도록 하였다.
○ 咸吉道 採訪 具謙 , 進兒土豹二隻。 初, 因 姜玉 等所索, 命捕之。 時, 玉 等已還, 故放其大者, 養小者于司僕寺。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8월 9일(병신) 2번째기사
중국 사신의 청을 미치지 못하게 하다
선위사(宣慰使)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윤문(成允文)이 평안도(平安道)로부터 돌아와 복명(復命)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7월 27일에 강옥(姜玉)과 김보(金輔)가 의주(義州)에 도착하였고, 29일에 신(臣)이 가지고 간 인정(人情)과 잡물(雜物)을 강옥등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여 이르기를, ‘저번에 전하(殿下)의 은덕을 입은 것이 얼마인 줄을 알지 못하겠는데, 이제 또 특별히 내신(內臣)을 보내어, 멀리 강상(江山)에까지 은혜를 베푸시니, 감축(感祝)의 정(情)을 비유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날 도사(都司)가 잔치를 베풀어 강옥등을 대접하였는데, 강옥등이 받은 연탁(宴卓)을 신(臣)과 반송사(伴送使) 윤자운(尹子雲)에게 바꾸어 베풀어, 도사와 지휘(指揮) 5인으로 하여금 각각 술을 올리도록 하였고, 김보는 아청단자(鴉靑段子) 1필을 윤자운에게 주었고, 유청라(柳靑羅) 1필을 신(臣)에게 주었으며, 비단과 면포(綿布)를 도사(都事), 찰방(察訪), 차사원(差使員)등에게 주었습니다. 이별함에 임하여 강옥등이 모두 신에게 말하기를, ‘전하의 은덕은 하늘과 같아서 보답(報答)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고 하였고, 강옥은 이르기를, ‘원컨대 돌아가 전하께 아뢰어 특별히 강계숙(姜繼叔)을 구휼하여 주게 하소서.’라고 하고, 인하여 오열(嗚咽)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김보는 이르기를, ‘태감(太監) 김흥(金興)은 김보의 양부(養父)입니다. 김보가 올 때에 기여(寄與)하신 금대(金帶) 1요(腰)를 김담(金淡)에게 전(轉)하여 주고 인하여 전하(殿下)께 계청하여 이를 띠게 하도록 하려 하였으나 다만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왔으며 매부(妹夫) 권철(權哲)이 모화관(慕華館)에서 같이 일하다 이를 아뢰었으나 바빠서 감히 다하지 못하였으니, 빌건대 다시 전하께 아뢰어 주소서.’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전후(前後)에 한 청은 모두 기록하여 빠짐이 없게하라.”하였다.
○宣慰使右副承旨成允文, 回自平安道復命, 因啓曰: “七月二十七日, 姜玉、金輔到義州。 二十九日, 臣以所齎人情雜物, 分賜玉等, 皆扣頭謝曰: ‘向蒙殿下恩德, 不知其幾, 今又別遣內臣, 遠惠江上, 感祝之情, 無以云喩。’ 是日, 都司設宴饗玉等, 玉等以所受宴卓, 換設於臣及伴送使尹子雲, 令都司及五指揮, 各行酒。 輔以鴉靑段子一匹, 賜子雲; 柳靑羅一匹, 賜臣; 絹及綿布, 賜都事、察訪、差使員等。 臨分, 玉等俱語臣曰: ‘殿下恩德如天, 報答無由, 奈何?’ 玉云: ‘願歸啓殿下, 特恤繼叔。’ 因嗚咽泣下。 輔云: ‘金太監興, 輔養父也。 輔之來也, 寄與金帶一腰, 轉付金淡, 因請啓殿下, 使之帶焉, 第未敢開口來也。 妹夫權哲, 同事於慕華館啓之, 然怱怱未敢悉也, 乞更啓殿下。’ 因涕泣, 悲不自勝。” 上曰: “明使前後之請, 其悉記無遺。”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명성화(成化) 4년) 9월 16일(임신) 4번째기사
백관들이 백의, 오사모, 흑대차림으로 창덕궁에서 배표하다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이석형(李石亨),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이파(李坡) 를 보내어 명나라에 가서 고부(告訃), 청시(請諡)하고 또 청승습(請承襲)하게 하였다. 백관들이 백의(白衣), 오사모(烏紗帽), 흑대(黑帶)차림으로 창덕궁(昌德宮)에서 배표(拜表)32)하였다.
그 청시(請諡)하는 표문은 이러하였다.
“시호(諡號)를 하사하여 종말(終末)을 보이는 것은 오직 제왕(帝王)의 훌륭한 법이며, 시호를 칭하여 효도를 이루는 것은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이므로, 감히 작은 정성을 펴서 총청(聰聽)을 번독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부(臣父) 선신(先臣) 휘(諱)는 폐복(敝服)33)을 맡아 지키면서 특별히 돌보심을 입으니, 항상 충성을 다하여 삼가 제후(諸侯)의 법도를 닦았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길이 성조(聖朝)를 하직하였습니다. 삼가 옛법을 상고하건대 시호(諡號)를 청함이 마땅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어버이를 나타내는 높은 정성을 양해하시고 외로운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큰 은혜를 드리우시어, 드디어 정혼(貞魂)으로 하여금 총명(寵命)을 입게 하신다면, 신은 삼가 마땅히 부지런함을 다하고 게으름이 없이 뜻을 이어 받드는 정성을 더욱 닦겠으며, 길이 잊지 않기를 맹세하여 항상 수(壽)하고 강녕(康寧)하시기를 빌겠습니다.”
행장(行狀)은 이러하였다.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 이고 휘(諱)는 유(瑈) 이며 자(字)는 수지(粹之)인데, 장헌왕(莊憲王)의 둘째 아들이다. 모비(母妃)는 심씨(沈氏)로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심온(沈溫)의 따님이다.
영락(永樂) 15년34) 정유 9월 병자에 나셨는데, 천자(天資)가 영명(英明)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아니하여 덕행(德行)과 기량(器量)이 날로 진취하였다. 수양군(首陽君)에 봉해졌는데, 장헌왕이 만년(晩年)에 병이 들자 왕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새벽과 저녁으로 곁에 모시고 일찍이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으며, 훙(薨)하자 애통하여 몸이 수척하여지니 보는 이로서 감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경태(景泰) 3년35)에 공순왕(恭順王)36)이 훙하니, 황제가 상선감좌감승(尙膳監左監丞) 김유(金宥), 상선감우감승(尙膳監右監丞) 김흥(金興)을 보내어 사시(賜諡), 사제(賜祭)하고, 또 사왕(嗣王)37)에게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하사하였는데, 사왕이 왕(王)을 택하여 보내어서 표문(表文)을 받들고 북경(北京)에 가서 칭사(稱謝)하게 하였다.
4년38)에 간신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이 무리를 모아 불령(不逞)하게도 모역(謀逆)하여 화기(禍機)가 이미 급박하므로, 왕이 사왕에게 고하여 죽여 없애었다.
6년39)에 사왕이 나이 어리고 또 병이 있으며, 나라 안에 연고가 많아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고, 나라 일을 왕에게 전해 줄 것을 청하였다.
7년40) 2월에 황제가 내관(內官) 윤봉(尹鳳)과 김흥(金興)을 보내어서 고명(誥命)을 하사하고, 인하여 왕과 왕비에게 면복(冕服), 관복(冠服), 채단(綵段)을 하사하였다. 왕이 배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서 진사(陳謝)하고, 인하여 적자(嫡子) 이장(李暲)을 세워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미 봉(封)함을 받아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조심하여 서정(庶政)에 힘써서, 항상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며 어진이를 구하고 군사를 양성함을 선무(先務)로 삼았다. 7월에 하교(下敎)하기를, ‘감사는 명을 받아 일을 나누어 맡아서 한 도(道)의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착한 이를 올리고 악한 이를 내치는 것인데, 요즈음 듣건대, 수령으로서 청렴 공평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적고 한갓 많이 거두는 것만 일삼아 심지어는 사사로이 영리를 취하여 백성을 해롭게 한다고 하니, 이와 같은데도 감사가 능히 선악(善惡)을 들추어내지 못하면 책임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무릇 국가가 국가된 바는 군사와 백성뿐인데, 군사와 백성의 폐단을 알면서 조처하는 바가 없으면, 나의 백성을 다스리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감사는 수령을 꾸짖고 나는 감사를 꾸짖으니 체통(體統)이 서로 유지되고, 근본을 받들고 조목을 베푸니 이는 나라의 큰 정사이다. 이제부터 만약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기르고, 농상(農桑)에 힘쓰고 가축 번식에 부지런하며, 병마(兵馬)를 기르고 체수(滯囚)41)가 없게 하며, 자봉(自奉)42)은 박하게 하고 늙고 병든 사람을 구호하며, 학교를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내가 반드시 불차탁용(不次擢用)43)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이에 반대됨이 있으면 반드시 중한 법이 있을 것이다. 착한 것을 상주고 악한 것을 벌주는 것은 나라의 큰 권한이다. 내가 감히 사사로움이 있어 천심(天心)을 더럽히겠는가?’하였다.
10월에 칙서(勅書)로 적자(嫡子) 이장(李暲)을 봉하여 세자로 삼으니, 왕이 표문(表文)을 올려 사례하고 인하여 세자를 보내어 조현(朝見)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유시(諭示)하기를, ‘국왕이 세자를 보내어 내조(來朝)하려고 하니, 바로 예전에 열국(列國)의 세자가 조정에서 명을 받던 뜻이며, 또한 신하가 성상을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바이나, 이제 날씨가 추움으로 인연하여 발섭(跋涉)44)하기가 어려운데, 세자가 이미 관상(關上)45)에 이르렀거든 곧 입조(入朝)하게 하고, 만일 관에 이르지 아니하였거든 내조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세자가 이미 길을 떠났는데 왕이 명을 듣고 중지시켰다.
천순(天順) 원년46) 2월에 왕이 영종황제(英宗皇帝)의 복위(復位)를 듣고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니, 황제가 한림원수찬(翰林院修撰) 진감(陳鑑), 태상 박사(太常博士) 고윤(高閏)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가지고 왕과 왕비에게 금폐(錦幣), 표리(表裏)를 하사하므로, 왕이 경내(境內)를 사유(赦宥)하고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9월에 세자 이장(李暲)이 병으로 서거하자 왕이 둘째 아들 이황(李晄)을 세워서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칙서에 이르기를, ‘짐(朕)이 생각하건대, 국토를 가지는데에는 후계(後繼)를 세움이 중하다. 이제 왕의 주청을 받아보니, 세자 이장(李暲)이 일찍 죽어서 나라 사람들이 둘째 아들 이황(李晄)을 세우기를 청한다하기에 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하여 이황을 조선국 왕세자로 삼으니, 왕은 충효(忠孝)를 가르쳐서 덕(德)을 돈독하게 하고 의(義)를 가지게 하며, 거만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게 하여 나라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하게 하라.’하였는데,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왕이 세자로 하여금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게 하고 입학(入學)시켜 치주례(齒胄禮)47)를 행하였으며, 박사가 경서(經書)를 잡고 수학(授學)하였다. 왕이 매양 일을 당하면 반드시 고금(古今)의 일을 끌어내어 간절히 논설하여 세자를 훈계하고, 또 유사(儒士)를 택하여 경사(經史)를 가르치게 하며, 친히 훈사(訓辭) 한 편(篇)을 지었는데 항덕(恒德), 경신(敬神), 납간(納諫), 두참(杜讒), 용인(用人), 물치(勿侈), 사환(使宦), 신형(愼刑), 문무(文武), 선술(善述)의 열 가지 일로 제목을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요지를 갖추어 기술(記述)하여서 항상 세자로 하여금 외게 하였다.
천순 2년48)에 왕이 제도(諸道) 수령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너희들 가운데 형벌을 줄이고 부렴(賦斂)을 적게 하며 무비(武備)를 정비하고 농상(農桑)을 권하며 법을 준수하여 임금에게 허물이 없게 하는 뜻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요(堯), 순(舜)이 아무리 성인(聖人)이라도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에는 반드시 고굉(股肱)의 신하에게 의뢰하니, 너희들은 모두 나의 고굉으로서 사방의 일을 나누어 맡은 자들이다. 대저 하늘이 만백성을 내어 사목(司牧)49) 을 세우니, 하늘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임금의 힘을 빌리는 것이며, 임금이 홀로 서정(庶政)을 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백관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과 백관은 두루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마땅히 날마다 더욱 조심하여 항상 천심(天心)에 합하지 아니할 것을 염려하라. 임금이 만약 황음(荒淫)하고 방종(放縱)하여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아니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너희 수령도 이와 같을 것이다. 만약 나의 뜻을 본받아서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여 형벌이 지나침이 없고 청백(淸白) 근검(勤儉)하면 현저하게 뛰어난 상(賞)이 있고 이름이 후세에 전할 것이며, 만약 탐하고 가혹하며 사나워서 백성에게 폐를 끼치면 곧 형벌을 받아 당자는 죽고 집안은 망할 것이다. 무릇 여러 사람의 눈이 보는 바인데 덮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12월에 산동도사(山東都司) 등주위(登州衛) 총기(摠旗) 쇄경(鎖慶)등 45인이 바람을 만나 표류(漂流)하여 우리나라 경내에 이르렀는데, 왕이 친히 보고 위로하여 후하게 의복과 양식을 주어 요동으로 돌려보내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장(褒奬)하였다.
3년50)에 왕이 전교하기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람마다 다 쓰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재질이 있어도 가르침을 권하지 아니하면 이룩하지 못하고, 비록 사람이 있을지라도 시험을 치르지 아니하면 쓰기 어려우니, 마땅히 항상 지도 권장하고 자주 시험하여 등용(登庸)할 준비를 하라.’하고, 자주 제생(諸生)을 인견(引見)하고서 경사(經史)를 강문(講問)하였다.
3월에 왕이 성균관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책문(策問)을 내어 선비를 뽑았으며, 이 뒤로부터 자주 선성을 배알하였다. 왕은 항상 배우는 자가 스승의 가르침이 밝지못하여 각각 소견을 고집하고 의논이 분분함을 근심하여, 여러 선비를 모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같고 다름을 논란(論難)하게 하였는데, 친히 임석하여 결단하고 요지[肯綮]를 분석하여 적당하게 하나로 귀결지으니 모든 의심스러운 것이 정하여졌다.
《역학계몽(易學啓蒙)》은 정밀(精密)하여 깨닫기 어려운데, 왕이 친히 주해(註解)를 지어 배우는 이를 깨닫게 하였다. 왕이 일찍이 후원에서 구신(舊臣)과 술을 마시고 인하여 사후(射侯)하였는데, 왕이 쏘면 반드시 과녁을 맞히자 시를 지어올리는 이가 있었다. 왕이 수찰(手札)을 써서 보이기를, ‘내가 나이 젊을 때에 기개가 크고 마음이 장건하여 스스로 무예(武藝)에 놀아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다. 만약 한갓 풍부(馮婦)51)가 되고 절제(節制)할 바를 알지 못하면, 다스림을 이루고 군사를 복종하게 하는 도(道)가 아니다.’하였다.
또 여러 신하의 시(詩)에 모두 경계하는 말이 있음을 보고 더욱 고굉(股肱)의 충성에 감격하여 시(詩)로 회답하기를,
‘욕심이 적으니 욕심을 채울 수 있고,
일이 간략하니 공이 곧 이루어지네.
하늘을 공경하니 하늘이 보호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니 백성이 편안하도다.
작은 재주에 마음을 쓰지 말고,
큰 정사에 마땅히 정성을 다하세.’하였고,
또 이르기를,
‘근심 걱정은 편안하고 즐거움에서 나오고,
잎이 무성하면 뿌리가 곤하다네.
천명은 본디부터 일정함이 없으니,
착한 것만 따를 뿐이로다.
사귀는 뜻 잊지 말고,
시종(始終)이 있기를 생각하세.’하였다.
4년52)에 임금이, 우리나라는 해외(海外)에 있어서 서적이 매우 적어 문학(文學)이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제(子弟)를 〈중국에〉보내어 입학하기를 청하니, 칙서에 이르기를, ‘왕의 나라는 시서(詩書)와 예의(禮義)의 교육을 전하여 익혀서 바탕이 있고, 표문(表文), 전문(箋文), 장주(章奏)와 행이(行移)하는 이문(吏文)이 모두 예식에 따랐으니, 비록 중국음(中國音)에 다 통하지는 못할지라도 통사(通事)가 통역을 전하여 일찍이 통하지 못함이 없었는데, 어찌 반드시 자제가 와서 배울 것인가?’하였다. 처음에 모련위(毛憐衛) 올량합(兀良哈) 낭복아합(浪卜兒哈)이 우리나라 회령(會寧) 지방에 대대로 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대로 서로 혼인하여 편맹(編氓)53)과 다름이 없었고, 그 아들 역승가(亦升哥)는 서울에 와 살면서 장가들고 벼슬하였다. 낭복아합이 서울에 올라오고자 하니 변장(邊將)이 예(例)대로 겸종(傔從)54) 을 줄이게 하자, 낭복아합이 분을 내어 서울에 이르러서 역승가와 공모하고 친당(親黨)을 꾀어 여러 부락을 선동하고, 역승가가 길주(吉州) 온천에서 병을 치료하겠다고 청하여 역마(驛馬)로 갑절의 길을 달려가서 아비와 같이 모반(謀叛)하였는데, 변장이 뒤따라 그 계책을 알아내고 낭복아합 부자(父子)를 나치(拿致)하여 아뢰었다. 왕이 안핵(按覈)하자 모두 자복(自服)하여 모두 법대로 처치하였는데, 건주우위도지휘(建州右衛都指揮) 동화니치(佟火爾赤)등이 거짓 날조하여 말을 만들어서 보복을 하려고 꾀하였다. 황제가 예과급사중(禮科給事中) 장영(張寧)을 보내어, 와서 근본 이유를 묻고 그 실정을 사실대로 밝혔는데, 낭복아합의 아들 아비거(阿比車)가 도망해 숨어서 무리를 불러 모아 변경을 침범하고, 9월에 강가에 집결하여 몰래 엿보고 가만히 나오니, 변장이 길을 나누어 추격하여서 거의 다 죽이고 사로잡았는데, 왕이 곧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었다.
7년55)에 왕이 전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데에는 사람을 쓰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사람을 쓰는데에는 장수를 고르는 것이 더욱 중하다. 장수란 자는 백성의 목숨을 맡고 국가의 안위(安危)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장수라는 자는 나라의 보필(輔弼)이다. 나라의 강하고 약함이 보필의 주밀하거나 틈이 있는 것에 매였으니, 임용(任用)할 즈음에 혹시라도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 이러므로 임금이 항상 스스로 장수를 선택하고 아래에서 주의(注擬)56)할 수없는 것은 어찌 임무가 중하기 때문에 남에게 권력을 빌려 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궁중(宮中)에 깊이 있어서 아무리 사목(四目)57)이 밝을지라도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어찌 능히 다 알겠는가? 이러므로 부득불 두루 묻고 널리 찾아서 여럿이 천거하게 하고, 이미 천거한 뒤에 골라서 쓰는 것은 임금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예전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일어날 때에 소하(蕭何), 조참(曹參)은 모두 패향(沛鄕)의 이졸(吏卒)이었으니, 어찌 천하에 인재가 없겠는가? 다만 알기가 어려울 뿐이다. 내가 과매(寡昧)하여 이 어렵고 큰일을 맡아서 은혜가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위엄이 멀리 이르지 못하니, 항상 편안한 데에서 위태로운 것을 잊지 아니하여 장수될 만한 인재 얻기를 생각한다. 무릇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모두 나와 더불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이니, 지위의 낮고 높음에 구애하지 말고 친척이나 인척(姻戚)관계를 혐의하지 말며, 재주와 행실을 갖추 기록하여서 실봉(實封)58)하여 아뢰라. 너희의 천거함이 적당하면 상(賞)이 마땅히 미칠 것이고, 천거함이 적당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죄주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왕은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되면 무비(武備)가 반드시 해이해질 것이라 하여 달마다 두 번씩 열진(閱陣)하고 춘추(春秋)로 강무(講武)하며, 또 스스로 설(說)을 지어 제장(諸將)을 훈계하고 권려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군사라는 것은 지(智)로써 용(用)에 응하고 용으로써 지에 응한다. 지(智)라는 것은 인의(仁義)에 근본하고, 나와 남을 헤아리며, 지리(地利)를 살피는 것이다. 용(用)이라는 것은 형수(形數)에 밝고, 절제(節制)를 한결같이 하며, 기계를 이용(利用)하는 것이다. 「인의에 근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학교를 밝게 하고 군신(君臣)을 엄하게 하며 문무(文武)를 숭상하고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 이것이다. 「나와 남을 헤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천운(天運)을 보고 장사(將士)를 비교하며 곡직(曲直)을 헤아리고 노일(勞逸)을 참작하는 것이 이것이다. 「지리를 살핀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풍수(風水)를 이용하고 도리(道里)59)에 통달하며 높고 낮음에 인하고 험난하고 평탄한데 의거함이 이것이다. 「형수에 밝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군적(軍籍)을 닦고 대오(隊伍)를 미리 만들며 인심을 정하고 이목(耳目)을 한결같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절제를 한결같이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교열(敎閱)을 부지런히 하고 상벌(賞罰)을 일정하게 하며 적(敵)에 임하여서는 조금도 용서함이 없는 것이 이것이다. 「기계를 이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사람이 각각 만들고 상용(常用)을 금하며 목마(牧馬)를 권하고 출척(黜陟)을 상고하는 것이 이것이다.’
또 일찍이 공순왕(恭順王)60)이 지은 《진법(陣法)》을 서(序)했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풍후(風后)61)의 《악기경(握奇經)》62) 이후로 제갈양(諸葛亮), 이정(李靖)63)이 그 유법(遺法)을 얻어서 비록 시의(時宜)에 인하여 팔진(八陣)과 육화(六花)가 있었는데, 그 이치는 이제까지도 다름이 없다. 우리 전하께서 미리 준비하는 뜻으로 진법(陣法)을 닦아 정하였는데, 번한(蕃漢)64)의 세(勢)를 겸하고 기정(奇正)65)의 변(變)을 다하였으며, 천지(天地)를 본받고 인륜(人倫)을 밝혀서, 선철(先哲)을 집대성(集大成)하여 후세에 큰 규모를 세웠다. 글이 간략하면서도 뜻은 깊고, 법이 간단하면서도 쓰임은 많다. 그 연진(連陣)가운데 외진(外陣)이란 것은 6, 7, 8, 9의 수(數)이고, 내진(內陣)이란 것은 5, 10의 수이며, 간진(間陣)이란 것은 1, 2, 3, 4의 수이니, 이는 하도(河圖)66)의 문(文)을 본받은 것이다. 합진(合陣)가운데 내외(內外)를 위포(衛包)한 것은 5, 10이 내외를 싼 것이고, 사위(四衛)가 방(方)을 떠난 것은 1, 6, 2, 7, 3, 8, 4, 9가 각각 그 방에서 떠난 것이니, 이는 낙서(洛書)67)의 변(變)을 본받은 것이다. 주통(駐統)은 방형(方形)으로 진열(陣列)하고 전통(戰統)은 원형(圓形)으로 모여서, 방형으로 지키고 원형으로 행하니, 이는 천지(天地)의 체(體)를 본받은 것이다. 외진(外陣)은 방형이고 내진은 원형인데, 의(義)는 밖에 나타나고 지(智)는 안에 감춘 것이니, 이는 음양(陰陽)의 용(用)을 본받은 것이다. 각각 소장(小將)을 보호하는 것은 부자(父子)의 친(親)이고, 한 장수에게서 명령을 듣는 것은 군신(君臣)의 의(義)이며, 진(陣)에 빈모(牝牡)68)가 있는 것은 부부(夫婦)의 별(別)이고, 대오(隊伍)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형제(兄弟)의 정(情)이며, 법령이 어긋나지 아니함은 붕우(朋友)의 신(信)이니, 이는 인륜의 도(道)를 본받은 것이다. 이러므로 군사를 가르치면 백성이 예의(禮義)를 알고 국가가 항상 편안하다. 전(傳)에 이르기를,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군사에 있다」고 하였고, 공성(孔聖)69) 이 이르기를, 「백성에게 전법(戰法)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이는 버리는 것이라고 이른다」하였으니, 전법을 가르치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다. 누가 7척(尺)의 몸을 아끼지 않으며 백년의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겠는가?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며 머리를 다투어 적(敵)에게 달려가는 것은 진실로 가르침을 미리하고 법을 먼저 정하며 세(勢)가 우선 튼튼하여 기력(氣力)이 이루어진 때문이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군사 3만을 가르쳐서 천하를 횡행(橫行)함은 다름이 아니라 강유(剛柔)를 변화하여 그 세를 튼튼하게 함이다」하였으니 작게는 한 집, 크게는 천하가 모두 세가 합하여 이룩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늘과 땅이 나뉜 때로부터 비롯하여 선악(善惡)이 반드시 대치함이 있고 치란(治亂)이 반드시 서로 인(因)함이 있는데, 우미(愚迷)한 무리 가운데 명을 어기고 힘을 믿는 자가 있으면 왕자(王者)가 마땅히 접(接)함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간과(干戈)를 만들어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하였으니, 이는 어지러운 세(勢)로 인하여 병(兵)을 제정한 것이고, 나라가 고요하고 세상이 편안하여 시랑(豺狼)70)이 자취를 감춤에 미쳐서는 말을 놓아 보내고 무기를 버리며 예악(禮樂)을 만들어서 때때로 구공(九功)71)을 펴고 칠덕(七德)72)을 노래하니, 이는 다스려진 세상으로 인하여 군사를 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군사의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세(勢) 아님이 없다.’
성화(成化) 3년73) 8월에 황제의 칙서에 이르기를, ‘건주삼위(建州三衛)와 동산(董山)등은 본래 번신(蕃臣)으로서 대대로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 요즈음 양(陽)으로는 조공(朝貢)한다는 이름하에 음(陰)으로는 변경에서 도둑질할 계획을 하였으니, 짐(朕)이 용서하면 더욱 방자할 것이므로 부득이 군사를 써서 토벌한다. 생각하건대, 너 조선국왕(朝鮮國王)은 대대로 예의를 지키고 우리나라에 충성하여 더함이 있고 변함이 없으니 짐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만약 우리 군사가 저 역로(逆虜)를 치거든 왕은 마땅히 좁은 관문(關門)을 닫아 막아서 저들이 도망쳐 들어갈 수 없게 하여 사로잡아 멸망시키도록 할 것이며, 만약 왕이 능히 편사(偏師)74)를 보내어 우리 군사와 멀리에서 서로 호응하여 편리함을 엿보아서 좁히면 저들에게서 항복받기가 더욱 쉬울 것이며, 왕의 공이 더욱 성하고 충성이 더욱 드러날 것이다. 짐이 어찌 왕에게 갚음이 없겠는가? 힘써 공과 이름을 세우라. 때를 잃을 수 없다.’하였는데, 왕이 곧 배신(陪臣)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를 보내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달려 건너서 길을 나누어 바로 건주(建州) 동북쪽 발저강(潑豬江) 올미부(兀彌府) 여러 진[寨]에 닿아 그 소굴을 쳐서 적(賊)의 추장(酋長) 이만주(李滿住), 고납합(古納哈) 및 그 당류를 사로잡아 베고서 그 부락을 분탕(焚蕩)하고 돌아왔는데, 왕이 배신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포로를 바쳤다.
4년75) 4월에 칙서에 이르기를, ‘짐이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건주(建州)의 역로(逆虜)를 토벌하게 하고 왕으로 하여금 제왕(帝王)의 군대에 협조하게 하였는데, 이제 왕의 주달을 받아 보니, 배신 중추부관(中樞府官) 강순(康純)등을 보내어 1만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압록강, 발저강 두 강을 건너서, 올미부의 여러 진을 쳐부수고 역로 이만주, 고납합 부자를 죽이고 그 부속(部屬)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며, 그 집과 재물을 불태우고, 그들이 약탈한 우리 동녕위(東寧衛)의 인구를 찾아서, 배신 이조참판 고태필을 보내어 포로를 바친 것을 알았다. 이미 왕이 바친 적속(賊屬)은 예에 의해 처치하고, 인구는 친족에게 주어 완취(完聚)하게 하며, 소는 군대에 주어 둔종(屯種)하게 하였다. 진실로 왕은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한 까닭에 짐이 척찰(尺札)76)로 왕에게 명하였는데, 왕의 나라 군사는 해동(海東)에서 호응하고 짐의 장졸(將卒)은 우레처럼 엄하고 바람처럼 몰아서 안팎에서 합세(合勢)하여 역로(逆虜)가 허물어졌으니, 왕은 가히 짐의 명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짐이 왕과 더불어 군신(君臣)이 마음을 같이하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제 내관(內官) 강옥(姜玉), 김보(金輔)를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 백금(白金), 문금(紋錦), 서양포(西洋布)를 하사하게 하고, 강순, 고태필등에게도 각각 하사함이 있어 그 노고를 표하게 하니, 왕은 공경히 받으라.’하였는데,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6월에 등주위총기(登州衛摠旗) 쇄경(鎖慶)등 43인이 표류(漂流)하여 우리나라 경계에 이르렀는데, 왕이 의복과 양식을 후하게 주어 요동으로 풀어보냈다. 중국 사람이 혹은 해상으로부터 표류해 오고 혹은 오랑캐 가운데에서 도망해 돌아온 자를 전후해서 요동으로 풀어보낸 것이 무려 수백인이었는데, 모두 다 후하게 위로하고 대접해 보냈다. 9월 갑자에 왕이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였는데, 향년(享年)이 52세이고 재위(在位)는 14년간이다.
왕은 영명 과단하고 용기와 지혜가 있으며 공손 근검하고 너그럽고 소탈하며, 천성이 학문에 독실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고 경사(經史)와 제서(諸書)를 한번 보면 잊지 아니하였으며, 고금(古今)을 널리 통하고 역산(曆算), 음률(音律), 의약(醫藥), 복술(卜術)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시행 조처할 일을 만나면 어느 곳에나 밝게 통하였다. 어려서부터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모두 명백하고 정대(正大)하여 추호라도 거짓과 꾸밈이 없으며, 정성으로 위를 섬기고 예(禮)로 아래를 대접하여 가법(家法)을 바르게 하여서 그 화목함을 다하고 인륜(人倫)을 후하게 하여, 그 은혜와 사랑을 극진히 하며 비첩(妃妾)의 구분을 엄하게 하고 적서(嫡庶)의 등급을 분명히 하며, 제사를 반드시 몸소 행하고 법령을 반드시 지키며 정사에 임하여 예민하고 정밀하여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민정(民政)에 부지런함으로써 마음을 삼아, 날마다 부지런하고 날마다 조심하여 조금도 한가롭게 즐김이 없었다. 어질고 능한 이를 뽑아 올리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를 내쳐 물리치며,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영재(英才)가 일어나고 무사(武事)를 숭상하여 사졸(士卒)이 정련(精鍊)되며, 상(賞)을 밝게 하고 벌(罰)을 신중히 하며, 농사에 힘쓰고 잠업(蠶業)을 중히 하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정렴(征斂)77)을 박하게 하며, 몸소 먼저 검약(儉約)하여 항상 깨끗한 옷을 입으니, 왕비 이하가 모두 화려한 복식을 배척하였다. 궁인(宮人)을 놓아 보내고 다만 겨우 청소하는 것만 갖추게 하고, 쓸데없는 음식을 없애고 헛된 비용을 줄여서 재용(財用)을 절약하니, 몇 해 되지 아니한 사이에 저치(儲峙)78)가 차고 남아서 백성이 날로 풍족하였다. 매양 감사와 수령을 거듭 경계하고 혹은 어사를 보내어 순찰하여서 백성의 폐막(弊瘼)을 모두 없애며, 외임(外任)에 나가는 배사(拜辭)하는 자도 반드시 인견(引見)하고서 지방을 맡아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을 간곡하게 효유하여 보내니, 이로 말미암아 은혜가 아래에 미치고 민정(民情)이 상달되어 환과고독(鱞寡孤獨)이 가려짐이 없었다. 날마다 신하들을 인견하여 다스리는 길을 묻고 비록 적은 일에 처해서도 역시 스스로 우(虞)79)를 스승으로 하여 자기의 의견을 버리기에 어려움이 없었고, 잘못을 바로잡고 경계하여 간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서 언로(言路)를 넓히고, 혹시 한가로운 때를 만나면 유아(儒雅)80)를 불러 맞이하여 역대(歷代)의 치란(治亂), 성패(成敗)의 자취를 의논하고 성현(聖賢)의 도통(道統)과 성리(性理)의 오묘(奧妙)를 강론해 밝혀서, 날이 기울고 밤이 깊도록 열심히해도 피로함이 없었다. 항상 세자에게 훈계하여 먼 계책을 전해주고, 조선(祖先) 이래의 헌장(憲章)이 갖추어졌을지라도 과조(科條)가 많아서 유사(有司)가 혹시 준수하기에 의혹됨이 있음을 염려하고, 또 때와 형세가 달라서 변통(變通)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에 참작하고 확실하게 헤아려서 간략하고 적절하기에 힘써 일국의 대전(大典)을 정하여 지어서 후세에 준수할 법을 만들었다. 의(義)로써 교린(交隣)하여 오직 화목하기를 힘쓰고 정성과 신의를 보이니, 이런 까닭에 비록 도왜(島倭) 와 야인(野人)같이 미련하고 사나운 무리라도 모두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에 보답하지 않음이 없었다. 수명(受命)81)한 이후로부터 정성을 다해 직무를 살피고 번한(藩翰)을 삼가 지켜서 무릇 황제의 명이 있으면 미처 삼가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황제의 돌보심이 특별히 더하여 거듭 사랑함을 입었으므로 우리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여 길이 수(壽)하기를 바야흐로 원하였는데, 하늘이 무정(無情)하여 갑자기 병이 들었다. 목숨이 끊어짐에 미쳐서도 정신이 조금도 어지럽지 아니하였고,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 장례(葬禮)할 것을 염려하여 유명(遺命)으로 상장(喪葬)을 모두 검약(儉約)하게 하라고 하여 죽으면서도 오히려 백성에게 은혜를 입혔으니, 통탄함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註32]배표(拜表): 표문에 배례하는 의식.註33]폐복(敝服): 우리나라를 낮추는 말.註34]영락(永樂)15년: 1417 태종17년.註35]경태(景泰)3년: 1452 문종2년.註36]공순왕(恭順王): 문종.註37]사왕(嗣王): 단종.註38]4년: 1453 단종 원년.註39]6년: 1455 단종 3년.註40]7년: 1456 세조 2년.註41]체수(滯囚): 오래 갇혀있는 죄수.註42]자봉(自奉): 스스로 자기 몸을 보양함.註43]불차탁용(不次擢用): 공로가 있는 사람을 벼슬에 임명할 때 서열(序列)의 차례와 자급(資級)을 무시하고 발탁하여 임명하던 것.註44]발섭(跋涉):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길을 감.註45]관상(關上): 산해관(山海關).註46]천순(天順) 원년: 1457 세조 3년.註47]치주례(齒胄禮): 세자가 학교에 들어갈 때 신분(身分)에 따르지 않고 연령(年齡)에 따라서 다른 학생 사이에 자리를 정하는 예식.註48]천순 2년: 1458 세조 4년.註49]사목(司牧): 임금.註50]3년: 1459 세조 5년 註51]풍부(馮婦): 《맹자(孟子)》진심(盡心)편에 보면, “진(晉)나라 사람에 풍부라는 자가 있었는데, 범을 잘 잡다가 나중에 좋은 선비가 되었다. 그 후 그가 들에 나갔는데, 여러 사람들이 범을 쫓다가 범이 벼랑턱을 등에 지고 버티고 있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풍부를 바라보고서는 달려가서 그를 환영하였다. 풍부는 팔을 흔들면서 수레에서 내렸는데, 그 여러 사람들은 다들 기뻐하였으나 선비들은 그를 비웃었다.”고 하였으니, 해야 할 것 같으면 따르지만 불가(不可)한데 그만두지 않으면 유해(有害)하다는 뜻임.註52]4년: 1460 세조 6년.註53]편맹(編氓): 우리나라 호족에 편입된 백성.註54]겸종(傔從): 따르는 하인 註55]7년: 1463 세조 9년.註56]주의(注擬):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3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註57]사목(四目): 사방 백성의 일을 보는 식견.註58]실봉(實封): 신하가 임금에게 생민(生民)의 이해와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에 관한 중대사를 밀계(密啓)할 때 다른 사람이 소장의 내용을 보지 못하도록 봉(封)하던 일.註59]도리(道里): 거리.註60]공순왕(恭順王): 문종.註61]풍후(風后): 황제(黃帝) 때의 재상 註62]《악기경(握奇經)》: 병서(兵書)의 이름.註63]이정(李靖): 당(唐)나라 태종 때의 명신으로 병법에 능하였음.註64]번한(蕃漢): 오랑캐와 중국.註65]기정(奇正): 기병(奇兵)과 정병(正兵).註66]하도(河圖): 옛날 중국의 복희(伏羲) 때 황하(黃河)에서 나왔다는 용마(龍馬)의 등에 나타난 도형(圖形). 역괘(易卦)의 원리가 되었음.註67]낙서(洛書):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렸을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글로서 홍범(洪範)의 원본(原本)이 된 것임 註68]빈모(牝牡): 암수 註69]공성(孔聖): 공자 註70]시랑(豺狼): 악한 무리.註71]구공(九功): 육부(六府)와 삼사(三事). 육부는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이고, 삼사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임.註72]칠덕(七德): 무(武)의 일곱 가지 덕. 곧 금포(禁暴), 집안(戢 安), 보대(保大), 정공(定功), 안민(安民), 화중(和衆), 풍재(豊財)임.註73]성화(成化) 3년: 1467 세조 13년.註74]편사(偏師): 한 패의 군대.註75]4년: 1468 세조 14년.註76]척찰(尺札): 칙서.註77]정렴(征斂): 부세.註78]저치(儲峙): 곡식의 축적.註79]우(虞): 순(舜) 임금.註80]유아(儒雅): 유학자.註81]수명(受命): 임금이 됨.
○遣中樞府知事李石亨、漢城府左尹李坡, 奉表如大明, 告訃請諡, 又請承襲。 百官以白衣、烏紗帽、黑帶, 拜表於昌德宮。 其請諡表曰:
賜諡示終, 惟帝王之令典; 易名致孝, 是人子之至情。 敢攄微悰, 庸瀆聰聽。 伏念臣父先臣諱, 叨守敝服, 特荷眷怜。 常竭忠誠, 恪修侯度, 遽嬰疾疹, 永辭聖朝。 謹稽往規, 宜請殊號, 伏望諒顯親之危懇, 垂恤孤之洪私, 遂令貞魂, 獲紆寵命。 臣謹當克勤無怠, 益修繼述之誠, 永矢不諼, 恒貢壽康之祝。
行狀曰:
國王姓李氏, 諱瑈, 字粹之, 莊憲王第二子。 母妃沈氏, 本國領議政府事溫之女也。 以永樂十五年丁酉九月丙子生, 天資英明, 好學不倦, 德器日就, 封首陽君。 莊憲王晩年罹疾, 王性至孝, 晨夕侍側, 未嘗少懈, 比薨哀痛毁瘠, 觀者莫不感歎。 景泰三年, 恭順王薨, 帝遣尙膳監左監丞金宥、右監丞金興, 賜諡祭, 又賜嗣王誥命冠服, 嗣王選遣王, 奉表赴京稱謝。 四年, 姦臣皇甫仁、金宗瑞等, 聚群不逞謀逆, 禍機已迫, 王告嗣王誅除。 六年, 嗣王弱齡且疾, 國內多故, 遣陪臣具由陳奏, 請傳付國事于王。 七年二月, 帝遣內官尹鳳、金興來錫誥命, 仍賜王及王妃冕服、冠服、綵段。 王遣陪臣, 奉表陳謝, 仍請立嫡子暲爲世子。 王旣受封, 夙夜惕厲, 憂勤庶政, 常以務農興學, 求賢養兵爲先務。 七月, 下敎曰: “監司受命分憂, 撫育一道, 黜陟臧否。 比聞守令廉平愛民者寡, 徒事厚斂, 甚至營私傷民, 若是而監司不能刺擧, 則責任之意安在? 夫國之所以爲國, 軍民而已, 知軍民之弊, 而無所措置, 則予牧民之意安在? 監司責守令, 予責監司, 體統相維, 綱擧目張, 此國之大政也。 自今若有誠心撫字, 務農桑勤種畜, 養兵馬無滯囚, 薄自奉惠老疾, 興學校者, 予必不次擢用, 少有反是, 必用重典。 賞善罰惡, 國之大柄。 予敢有私, 以累天心?” 十月, 勑封嫡子暲爲世子, 王奉表稱謝, 仍請遣世子朝見, 帝諭曰: “國王要遣世子來朝, 乃古者列國世子, 受命于朝之意, 亦人臣敬上之所當然, 緣今天寒, 跋涉艱難, 世子已到關上, 卽便入朝, 如未到關, 不必來朝。” 世子已登途, 王聞命止之。 天順元年二月, 王聞英宗皇帝復位, 奉表稱賀, 帝遣翰林院修撰陳鑑、太常博士高閏, 齎詔勑, 賜王及王妃錦幣、表裏, 王宥境內, 奉表稱謝。 九月, 世子暲病逝, 王請立第二子晄爲世子, 勑曰: “朕惟享有國土, 繼體爲重。 今得王奏, 以世子暲早逝, 國人請立第二子晄, 特允所請, 以晄爲朝鮮國王世子。 王尙訓以忠孝, 俾敦德秉義, 毋慢毋驕, 庶副國人之望。” 王奉表稱謝。 王令世子, 謁先聖入學, 行齒冑禮, 博士執經授學。 王每遇事, 必援引古今, 諄切論說, 以訓世子, 又擇儒士, 授以經史。 親著訓辭一篇, 以恒德、敬神、納諫、杜讒、用人、勿侈、使宦、愼刑、文武、善述十事爲目, 備述爲國之要, 常令世子誦之。 天順二年, 王諭諸道守令曰: “汝等孰不知省刑罰、薄賦斂、修武備、勸農桑、遵奉憲章, 致君無過爲意也? 堯、舜雖聖, 致治必資股肱, 汝等皆我股肱, 分憂四方者也。 蓋天生烝民, 立以司牧, 天不自有所爲, 必借之君, 君不能獨親庶政, 必委之百官。 然則人主與百官, 均是代天理民, 當日愼一日, 常以不合天心爲慮。 君若荒縱, 不恤民事, 天降之殃, 汝守令亦如是焉。 若體予意, 愛民如子, 刑罰無濫, 淸白勤儉, 則顯有超賞, 名垂後世; 若貪刻苛暴, 貽弊於民, 則卽受刑戮, 身死家亡。 夫十目所視, 其能掩乎?” 十二月, 山東都司登州衛摠旗鎖慶等四十五人, 遭風漂流, 到我國境, 王親見勞慰, 厚資衣糧, 解赴遼東, 帝降勑褒奬。 三年, 王敎曰: “養育人材, 非一朝可成, 又非人人皆用。 雖有材而敎不勸, 則不成; 雖有人而試不預, 則難用。 宜常誘掖勸勵, 數試之爲登庸之備。” 數引諸生, 講問經史。 三月, 王至成均館, 謁先聖, 發策取士, 自後頻謁先聖。 王常患學者師授不明, 各執所見, 議論紛紜, 會諸儒論難四書五經同異, 親自臨決, 剖釋肯綮, 至當歸一, 群疑以定。 《易學啓蒙》, 精密難曉, 王親著註解, 以曉學者。 王嘗於後苑, 酌舊臣酒, 仍與射侯, 王發必貫鵠, 有進詩者。 王手扎示之曰: “予少年氣雄心壯, 自在於游藝, 以爲平生之業, 今則不然。 若徒爲馮婦, 而不知所以節之, 則非致治服戎之道也。” 又見諸臣詩, 皆有警戒之詞, 益感股肱之忠, 和之詩曰: “欲少欲可滿, 事簡功乃成。 敬天天乃保, 勤民民乃寧。 小藝莫致慮, 大政宜致精。” 又曰: “憂患生安樂, 暢達荄窮困。 天命固靡常, 惟善以爲從。 毋忘交修志, 思與有始終。” 四年, 王以本國在海外, 書籍鮮少, 文學未精, 請遣子弟入學, 勑曰: “王國詩書禮義之敎, 傳習有素, 表、箋、章奏, 與夫行移吏文, 悉遵禮式, 雖未能盡通漢音, 而通事傳譯, 未嘗不諭, 何必子弟來學?” 初, 毛憐衛兀良哈浪卜兒哈, 世居我國會寧地面, 與我國人民, 世相婚嫁, 無異編氓, 其子亦升哥, 來住王城, 娶妻從仕。 卜兒哈欲赴王城, 邊將例減傔從, 卜兒哈發忿, 至王城, 與亦升哥同謀, 還誘親黨, 煽動諸落。 亦升哥請治病吉州溫泉, 倍道馳驛, 就父同叛, 邊將迹知其謀, 拿致卜兒哈父子以啓。 王按覈俱服, 乃置於法, 建州右衛都指揮佟火爾赤等, 虛捏爲辭, 謀欲報復。 帝遣禮科給事中張寧, 來問根由, 實得其情, 卜兒哈之子阿比車逃竄, 肅聚群黨, 侵擾邊疆。 九月沿江屯結, 潛伺竊發, 邊將分道追擊, 殺獲幾盡, 王卽具由以聞。 七年, 王敎曰: “爲國莫大於用人, 用人尤重於擇將。 將者, 生民之司命, 國家安危之主也。 故云將者, 國之輔。 國之强弱, 係輔之周隙, 則任用之際, 其可或輕乎? 故人主常自擇將, 而下不得注擬者, 豈非任之重, 故不可假人以柄耶? 雖然深居宮中, 雖明四目, 人之賢否, 豈能盡知? 故不得不疇咨博訪, 以咨僉擧, 旣擧之後, 擇而用之, 則在乎上耳。 昔漢高之興也, 蕭、曹皆沛鄕吏卒, 豈以天下之無人? 只以知之之難耳。 予以寡昧, 守玆艱大, 恩無逮下, 威不及遠, 常安不忘危, 思得將才。 凡大小臣僚, 皆與我共治者, 勿拘卑顯, 勿嫌親姻, 具錄才行, 實封以聞。 稱爾所擧, 賞當延及, 擧或不中, 予不爾罪。” 王以昇平日久, 則武備必弛, 月再閱陳, 春秋講武, 又自著說, 訓勵諸將, 略曰: “兵者, 以智運用, 以用應智。 智者, 本仁義, 度我人, 審地利也; 用者, 明形數, 一節制, 利器械也。 本仁義, 則如之何? 明學校, 嚴君臣, 崇文武, 守典章是也。 度我人, 則如何之? 觀天運, 校將士, 計曲直, 參勞逸是也。 審地利, 則如之何? 乘風水, 達道里, 因高下, 據險易是也。 明形數, 則如之何? 修軍籍, 預作隊, 定人心, 一耳目是也。 一節制, 則如之何? 勤敎閱, 恒賞罰, 比臨敵, 無少貸是也。 利器械, 則如之何? 人各造, 禁常用, 勸牧馬, 考黜陟是也。” 又嘗序恭順王所著《陳法》, 略曰: “自風后《握奇》以後, 諸葛亮、李靖, 得其遺法, 雖因時宜, 有八陳六花, 而其理則至于今, 未嘗異。 我殿下, 以迨天未雨之志, 修定陳法, 兼蕃漢之勢, 盡奇正之變, 法天地明人倫, 集大成於先哲, 立弘規於後葉。 文約而意深, 法簡而用繁。 其連陳之外陳者, 六、七、八、九之數也; 內陣者, 五、十之數也; 間陳者, 一、二、三、四之數也, 此法河圖之文也。 合陳之中, 衛包內外者, 五十之包內外也; 四衛之離乎方者, 一六、二七、三八、四九之各離乎其方也, 此法洛書之變也。 駐統方列, 戰統圓聚, 方以守之, 圓以行之, 此法天地之體也。 外陳方而內陳圓, 義形於外, 智藏於內, 此法陰陽之用也。 各保小將, 父子之親也; 聽於一將, 君臣之義也; 陣有牝牡, 夫婦之別也; 隊伍相愛, 兄弟之情也; 法令不愆, 朋友之信也, 此法人倫之道也。 是故敎兵而民知禮義, 國家恒安也。 傳曰: ‘國之大事, 在祀與戎。’ 孔聖曰: ‘不敎民戰, 是謂棄之。’ 敎戰者, 國之大事。 夫孰不愛七尺之軀, 重百年之命? 履屍涉血, 爭首赴敵者, 諒由敎之預而法先定, 勢先固而氣力成也。 管子曰: ‘敎士三萬, 橫行天下, 此無他, 變剛柔而固其勢耳。’ 小而一家, 大而天下, 無非勢合而成也。 始也乾坤之旣判, 善惡之必有對, 治亂之必相因, 愚迷之徒, 有違命負力者, 則王者當有以接之, 故不得已制爲干戈, 以討不服, 此因亂勢而制兵也。 及乎塵淸海晏, 豺狼屛迹, 放馬投戈, 制禮作樂, 時敍九功, 乃歌七德, 此因治世而偃兵也。 然則兵之出入, 無非勢也。” 成化三年八月, 皇帝勑曰: “建州三衛董山等, 本以蕃臣, 世受朝恩, 近者陽爲朝貢之名, 陰行盜邊之計, 朕宥之而愈肆, 不得已用兵致討。 惟爾朝鮮國王, 世守禮義, 忠於我國家, 有加無替, 朕甚嘉焉。 若我兵加于彼逆虜, 王宜閉絶關隘, 使彼奔逬無所入, 以就擒殄, 若王能遣偏師, 與我軍遙相應, 伺便而蹙之, 則彼之授首尤易, 而王之功愈茂, 忠愈彰矣。 朕豈無以報王哉? 勉樹勳名。 時不可失。” 王卽遣陪臣康純、魚有沼、南怡, 領一萬餘兵, 馳渡鴨綠江, 分道直抵建州東北潑豬江兀彌府諸寨, 擣其巢穴, 擒斬賊酋李滿住、古納哈及其黨類, 焚蕩屯落而還。 王遣陪臣高台弼, 獻俘。 四年四月, 勑曰: “朕命將率師, 致討建州逆虜, 俾王協助天兵, 今得王奏, 知遣陪臣中樞府官康純等, 統衆萬餘, 渡鴨綠、潑豬二江, 攻破兀彌府諸寨, 殺逆虜李滿住、古納哈父子, 斬獲其部屬, 焚其盧舍積取, 得其所掠我東寧衛人口, 遣陪臣吏曹參判高台弼獻俘。 已將王所獻賊屬, 依例處置, 人口給親完聚, 牛畜給軍屯種。 良由王世篤忠貞, 故朕以尺札命王, 而王國之衆, 響應于海東朕之將士, 雷厲風驅, 內外合勢, 逆虜瓦解, 王可謂毋負朕所命矣。 朕與王, 君臣同心, 豈不美哉? 今遣內官姜玉、金輔, 至王國, 賜王綵段、白金、紋錦、西洋布, 其康純、高台弼等, 亦各有賜, 以旌其勞, 王其欽承之。” 王奉表稱謝。 六月, 登州衛總旗鎖慶等四十三人漂流, 到我國境, 王厚資衣糧, 解送遼東。 上國之人, 或自海上漂到, 或自虜中逃還者, 前後所解遼東, 無慮數百人, 悉皆厚慰資送。 秋九月甲子, 王以病薨于正寢, 享年五十二, 在位十四年。 王英果勇智, 恭儉寬簡, 天性篤學, 手不釋卷, 經史諸書, 一覽不忘, 淹貫古今, 以至曆算、音律、醫、卜之理, 靡不精硏, 遇有施措, 觸處洞照。 自幼一言一動, 皆明白正大, 無纖毫矯飾。 事上以誠, 接下以禮, 正家法而盡其雍睦, 厚人倫而極其恩愛, 嚴妃妾之分, 明嫡庶之等, 享祀必躬。 法令必信, 臨政銳精, 唯以敬天勤民爲心, 日勤日愼, 無少暇豫。 甄升賢能, 黜退邪侫, 崇儒術而英材作興, 尙武事而士卒精鍊, 明賞愼罰, 務農重蠶, 輕徭役薄征斂, 身先儉約, 常服浣濯, 王妃以下, 皆斥華飾。 放出宮人, 只令纔備灑掃, 汰冗食, 省浮費, 以節財用, 不數年間, 儲峙盈衍, 民日殷阜。 每申儆監司、守令, 或遣使廉訪, 盡祛民瘼, 赴外任拜辭者, 亦必引見, 曲諭分憂字民之意乃遣。 由是澤下究情上達, 鱞寡無蓋。 日引臣僚, 咨詢治道, 雖處小事, 亦自師虞, 舍己無難, 有匡救箴諫者, 必虛懷聽納, 以廣言路。 或値閑燕, 招延儒雅, 尙論歷代治亂成敗之迹, 講明聖賢道統, 性理之奧, 日昃夜分, 亹亹不爲疲。 常訓戒儲貳, 貽謀經遠慮, 祖先以來憲章雖具, 科條滋多, 有司或眩於遵守, 且時異勢殊, 有不得不變而通之。 於是參酌商搉, 務從簡切, 定著一國大典, 爲後世持守之規。 交隣以義, 唯務輯睦, 示以誠信, 故雖島倭、野人之頑獷, 亦無不怛威赧德。 自受命以來, 竭誠述職, 愼守藩翰, 凡有帝命, 恐不及祗若, 天眷特加, 荐蒙寵綏, 東民歡悅, 方願永年, 昊天不弔, 遽罹于疾。 及至垂絶, 神思不少亂, 慮勞民以襄後? 樧遺命喪葬,悉從儉約,歿猶惠民,可勝痛哉?
예종 3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1월 1일 병진 5번째기사
명나라 사신의 지대는 강옥과 김보의 예에 따르고 윤자운으로 주관케 하다
임금이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지금 오는 명나라 사신의 지대(支待)는 한결같이 강옥(姜玉)과 김보(金輔)의 예(例)에 따라, 사섬시정(司贍寺正) 최영린(崔永潾)과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김신몽(金信蒙), 성균사성(成均司成) 고태정(高台鼎),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 이숙(李塾),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노호신(盧好愼),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임사홍(任士洪), 전남양부사(南陽府使) 김적(金磧), 호조정랑(戶曹正郞) 김초(金軺),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김춘경(金春卿), 전호군(護軍) 신지(申沚), 전 천녕현감(川寧縣監) 윤탄(尹坦)을 분예빈시(分禮賓寺)로 삼고 낭청(郞廳)을 가정(加定)하였으며, 또 무송군(茂松君) 윤자운(尹子雲)을 원접사(遠接使)로 삼고, 이윤인(李尹仁)을 도사선위사(都司宣慰使)로 삼았으며, 또 선위사로 호조참판(戶曹參判) 정난종(鄭蘭宗)을 의주(義州)에, 행호군(行護軍) 이교연(李皎然)을 안주(安州)에, 좌참찬(左參贊) 유수(柳洙)를 평양(平壤)에, 공조참판(工曹參判) 성윤문(成允文)을 황주(黃州)에,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을 개성부(開城府)에 보내고, 별도로 선위사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을 평안도에 보내고, 동부승지(同副承旨) 정효상(鄭孝常)을 개성부에 보내라”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윤자운이 근래에 자주〈원접사로〉왕래하여 또한 노고(勞苦)가 많았으나, 이런 대사(大事)는 윤자운이 아니면 불가하다.”하였다.
○傳于承政院曰: “今來明使支待, 一依姜玉、金輔例, 以司贍寺正崔永潾、禮賓寺副正金信蒙、成均司成高台鼎、通禮院相禮李塾、司宰監副正盧好愼、奉常寺僉正任士洪、前南陽府使金磧、戶曹正郞金軺、成均館直講金春卿、前護軍申沚、前川寧縣監尹坦爲分禮賓寺, 加定郞廳, 又以茂松君尹子雲爲遠接使, 李尹仁都司宣慰使, 又遣宣慰使戶曹參判鄭蘭宗于義州, 行護軍李皎然于安州, 左參贊柳洙于平壤, 工曹參判成允文于黃州, 左贊成金國光于開城府, 別遣宣慰使左承旨李克增于平安道, 同副承旨鄭孝常于開城府。” 上曰: “子雲近來數數往來, 亦甚勞苦, 然此大事, 非子雲不可。”
예종 3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2월 24일(기유) 6번째기사
원접사 윤자운이 명나라 사신이 별미를 청한 사실을 알려오다
원접사(遠接使) 윤자운(尹子雲)이 치계(馳啓)하기를,
“심태감(沈太監)이 신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강태감(姜太監)이 올린 해미(海味)457)를 황제께서 매우 좋아하셨다. 지금 우리들이 올 때에도 또 명하시기를, 「너희들이 본국에 가거든 수륙(水陸)의 이미(異味)458)가 있는 것을 반드시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하셨다. 우리들이 돌아갈 때에 가지고 가서 진헌(進獻)하려고 하니, 매 물건마다 한두 궤(櫃)씩 정도에 지나지 않게 아무쪼록 잘 가려서 준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하니,
승정원에 명하여 제도관찰사(觀察使)와 절도사(節度使)에 치서(馳書)하기를,
“지금 명나라 사신들이 진헌할 물선(物膳)을, 이 동봉(同封)한 물명(物名)의 수(數)를 잘 살펴보고, 시기에 미쳐서 정성껏 판비(辦備)하여 갖추는 대로 바치도록 하라.”하였다.
註457]해미(海味): 해물(海物).註458]이미(異味): 별미(別味).
○遠接使 尹子雲 馳啓: “ 沈太監 語臣云: ‘去年 姜大監 所進海味, 帝嘉之。 今吾等來時, 又命曰: 「汝往本國, 所有水陸異味, 要須將來。」 吾等回還時, 欲齎進獻, 每物不過一二櫃, 務要精備。’” 命承政院馳書于諸道觀察使、節度使曰: “今 明 使等進獻物膳, 審此同封物名數, 及時精辦, 隨備以進。”
예종 4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윤2월 9일(갑자) 6번째기사
명나라 사신이 정밀한 각궁을 2백장을 청한 것을 신숙주가 아뢰다
관반(館伴) 고령군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
“명나라 사신이 신에게 이르기를, ‘각궁(角弓) 2백장을 얻어서 황제께 바치고자 하니, 청컨대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십시오. 이는 황제께서 명한 것입니다. 연전에 강옥(姜玉)등이 바친 활은 모두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약 많이 만들기를 요구하면 반드시 정밀하지 못할 것이니, 단지 2백장만 만들어서 힘써 정교(精巧)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 마음에 반드시 전에 만든 활은 고의로 정밀하게 만들지 아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제 정밀하게 만들지 아니하면 중국에서 말이 있을 것이니, 이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번병(藩屛)이라고 하여 일찍이 화약(火藥)을 내려주어서 성심을 다해 우리를 대우하였고, 또 신라 때에는 중국에서 우리나라가 쇠뇌[弩]523)를 만들어 화살이 3천보(步)를 나간다는 것을 듣고서 바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1천 보 나가는 쇠뇌를 만들어 바쳤더니, 중국에서 우리에게 잘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만드는 활은 정밀하게 만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의논함이 마땅하겠다.”하였다.
註523]쇠뇌[弩]: 여러개의 화살을 쏘아 한꺼번에 나가게하는 활의 한 가지
○館伴 高靈君 申叔舟 啓曰: “ 明 使謂臣曰: ‘欲得角弓二百張, 以獻於帝, 請令精造。 此帝命也。 年前 姜玉 等所獻弓, 皆不用。 若要多造, 必致不精, 只造二百張, 務令精巧可也。’ 臣意以爲, 其心必以前所造弓, 故不致精。 若今不精造, 上國有辭, 此非好事。 況上國以我國爲藩屛, 嘗賜火藥, 推城待我。 且 新羅 時, 上國聞我造弩發矢三千步, 使獻之, 我國造一千步弩以獻, 上國以我爲曲。 今造弓, 不可不精。” 上曰: “當更議。”
예종 5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4월 3일(병진) 1번째기사
좌승지 이극증에게 명하여 정동 등에게 유관에 관한 일을 말하게 하다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에게 명하여 정동(鄭同)등에게 말하게 하기를,
“내가 잔병이 있어 오래도록 잔치를 청하지 못하였으니, 대인(大人)들이 생각나는 대로 유관(遊觀)하기를 청하라.”하니,
모두 사양하기를,
“우리들은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않아 해야 할 일도 다할 겨를이 없으며, 하물며 지금은 국휼(國恤) 중이므로 우리들이 유관할 때가 아니어서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하므로,
이극증에게 명하여 다시 청하게 하였더니, 정동 등이 말하기를,
“마땅히 초5일에 모화관(慕華館)에서 관사(觀射)하겠습니다.”하였다.
또 도승지(都承旨) 권감을 보내어 정동등에게 머무르기를 청하기를,
“오뉴월이라 바야흐로 장마[淫雨]가 져서 행리(行李)672)를 갖추기가 마땅치 않으니, 가을을 기다렸다가 시원하면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강(姜)673), 김(金)674) 두 사신이 7월에 회정(回程)하였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하니,
정동등이 말하기를,
“사신의 할 일을 이미 다했고 귀국할 뜻도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또 강, 김 두 사신은 2월에 출발하여 왔기 때문에 7월에 마침내 돌아갔지만, 우리들은 지난해 12월[臘月]에 명을 받고 왔으므로 만약 7월에 돌아간다면 중국 조정(朝廷)에서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하므로, 권감이 이로써 아뢰고 이어서 아뢰기를,
“지난해 세조대왕(世祖大王)이 강, 김 두 사신을 머무르기를 청하기를 두번이나 하였으니, 청컨대 내일 문안(問安)한 뒤에 다시 머무르기를 청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권감이 또 아뢰기를,
“사신이 여러 번 분예빈시(分禮賓寺)의 관원(官員)에게 가직(加職)하기를 청하였고, 부사(副使)도 또한 그 족친(族親)에게 영직(影職)을 제수하기를 청하였지만, 그 뜻은 사실상 녹봉(祿俸)을 받는 직책을 제수하기를 원한 것이니 실직(實職)을 제수함이 옳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672]행리(行李):행장(行裝).註673]강(姜):강옥(姜玉).註674]김(金):김보(金輔).
○丙辰/命左承旨李克增, 言於鄭同等曰: “予有微痾, 久未請宴, 請大人等隨意遊觀。” 皆辭曰: “吾等回程日逼, 治任無暇, 況今國恤, 非我等遊觀時, 未敢從命。” 克增再請, 同等曰: “當於初五日, 觀射慕華館。” 又遣都承旨權瑊, 請留同等曰: “五六月時方淫雨, 不宜行李, 待秋涼回還, 未晩也。 去年姜、金兩使, 七月回程, 今亦如是無妨。” 同等曰: “使事已完, 歸志已決。 且姜、金二月出來, 故七月乃還, 我等去年臘月受命而來, 若七月回還, 則朝廷以爲何如? 未敢從命。” 瑊以啓, 仍啓曰: “去年世祖大王, 請留姜、金兩使至再, 請於明日問安後, 更請留。” 從之。 瑊又啓曰: “使臣屢請分禮賓寺官員加職, 副使亦請其族親除影職, 其志實欲除受祿之職, 可除實職。” 從之。
예종 5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4월4일 정사 1번째기사
정동, 심회가 강옥의 집을 가서 보고, 원각사를 지나가다
정동(鄭同), 심회(沈繪)가 강옥(姜玉)의 집을 가서 보고, 원각사(圓覺寺)를 지나가다가 두목(頭目) 2인으로 하여금 점향(點香)하게 하였다. 또 차효주(車孝輈)집에 가서 모두 다례(茶禮)를 행하였는데, 정동이 심회에게 지나는 길에 정거(鄭擧)의 집에 들르자고 청하므로,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을 보내어 궁온(宮醞)을 가져가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였다.
○丁巳/鄭同、沈繪, 往見姜玉家, 過圓覺寺, 使頭目二人點香。 又往車孝輈家, 皆行茶禮。 同請繪歷入鄭擧家, 遣左承旨李克增, 齎宮醞設宴以慰。
예종 5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4월 6일(기미) 1번째기사
우승지 윤계겸이 사신의 청을 들어줄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르다
이 앞서 우승지(右承旨) 윤계겸(尹繼謙)이 음성(陰城)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사신(使臣)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큰 집을 지어주시고 또 선영(先塋)에 표석(標石)을 세워주시니, 전하의 은덕을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동생(同生)들이 미열(微劣)하여 필시 부모의 분묘(墳墓)를 능히 간수(看守)하지 못할 것이니, 간직노자(看直奴子)와 전토(田土)를 모름지기 전하에게 아뢰어 지급토록 해 주소서.’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니,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노비(奴婢) 6구(口)를 사급(賜給)하는 것이 예(例)이지만 지난해 강옥(姜玉), 김보(金輔) 두 사신의 청에 따라 이미 최안(崔安)에게 노비 2구를 주었으니, 지금은 4구(口)를 더 지급함이 옳고, 전토(田土)는 구례(舊禮)에 정수(定數)가 없으니, 지금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공한(空閑)한 전지(田地) 한두 결(結)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그대로 따랐다.
○己未/先是, 右承旨 尹繼謙 , 回自 陰城 啓: “使臣語臣曰: ‘殿下造給大家, 又立標石於先塋, 殿下之德, 不可盡說。’ 又曰: ‘同生等徵劣, 必不能看守父母墳矣, 看直奴子及田土, 須啓殿下給之,” 上令承政院議, 政院啓曰: “奴婢六口賜給例也, 而去年從 姜 、 金 兩使之請, 已給 崔安 奴婢二口, 今可加給四口, 田則舊例無定數, 今從自望, 以空閑田地一二結給之何如?” 從之。
예종 5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4월 20일(계유) 1번째기사
도승지 권감을 보내어 최안, 정동, 심회에게 백저포, 흑마포를 회증하게하다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을 보내어 최안(崔安)에게 백저포(白苧布) 2백필(匹), 흑마포(黑麻布) 2천1백필을, 정동(鄭同)에게 백저포 2백필, 흑마포 4천 4백필을, 심회(沈繪)에게 백저포 2백필, 흑마포 2천9백50필을 회증(回贈)하게 하였는데, 권감이 최안에게 이르기를,
“정(鄭)716), 심(沈)717) 두 태감(太監)이 이달 초 2일에 길을 뜨려고 하므로 전하(殿下)께서 신(臣)을 보내어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여의치 못했고, 지금 또 신에게 명(命)하여 머무르기를 청하도록 하시니, 대인(大人)은 모름지기 가을의 시원한 때를 기다려 돌아가십시오.”하니,
최안이 말하기를,
“연전(年前)에 강(姜)718), 김(金)719) 두 태감이 환경(還京)하여 말하기를, ‘전하의 후은(厚恩)을 입어 감대(感戴)가 망극(罔極)하오나, 단지 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들으니, 구례(舊禮)에는 본국(本國)에서 반송재상(伴送宰相)을 파사부(婆娑府)까지 보냈다고 하고 지금 동팔참(東八站)의 길이 막혀 압록강(鴨綠江)으로 보낸다니, 우리들의 돌아갈 때도, 원컨대 재상(宰相)을 모름지기 파사부까지 보내주시고, 또 신재상(申宰相)720)은 상종(相從)한 지 이미 오래니, 모름지기 전하에게 아뢰어 반송(伴送)으로 삼아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원상(院相)과 의논하여 드디어 신숙주(申叔舟)를 반송으로 삼고, 그 파사부의 전위연(餞慰宴)은 반송사가 그때에 가서 짐작(斟酌)해서 하도록 하였다.
註716]정(鄭): 정동 註717]심(沈): 심회.註718]강(姜): 강옥(姜玉).註719]김(金): 김보(金輔) 註720]신재상(申宰相): 신숙주(申叔舟).
○癸酉/遣都承旨權瑊, 回贈崔安白苧布二百匹、黑麻布二千一百匹, 鄭同白苧布二百匹、黑麻布四千四百匹, 沈澮白苧布二百匹、黑麻布二千九百五十匹。 瑊謂安曰: “鄭、沈兩太監, 欲於本月初二日發程, 殿下遣臣請留未獲, 今又命臣請留, 大人須待秋涼而還。” 安曰: “年前姜、金兩太監還京云: ‘蒙殿下厚恩, 感戴罔極, 但渡江到婆姿府, 水漲不得渡, 艱苦而來。’ 吾聞舊例, 本國伴送宰相, 送至婆娑府, 今印八站路梗, 送于鴨綠江, 吾等之還, 願宰相須送至娑婆府。 且申宰相相從已久, 須啓殿下爲伴送。” 上議于院相, 遂以叔舟爲伴送, 其婆娑府餞慰, 伴送使臨時斟酌爲之。
성종 4권, 1년(1470 경인/명성화(成化) 6년) 4월 1일(기유) 4번째기사
호조에 명하여 김흥의 조카들에게 곡식을 주고 강옥의 질자에게 토지를 지급하다
호조(戶曹)에 전지하여 태감(太監) 김흥(金興)의 조카 김담(金淡), 김효문(金孝文), 김징(金澄)등에게 쌀, 콩 아울러 10석(碩)을 주고, 강옥(姜玉)의 질자(姪子) 강계숙(姜繼叔)에게 경기(京畿) 근처의 전지 1결(結)을 주고, 또 강계숙의 공주(公州) 농장(農庄)과 김보(金輔)의 장단(長湍) 본가(本家)를 복호(復戶)323)하였다.
註323]복호(復戶): 호역(戶役)을 면제하던 일.
○傳旨戶曹, 給太監 金興 姪 金淡 、 金孝文 、 金澄 等米豆幷十碩, 姜玉 姪子 姜繼叔 京畿 近處田一結, 又復 姜繼叔 公州 農庄, 金輔 長湍 本家。
성종 4권, 1년(1470 경인/명성화(成化) 6년) 4월 15일(계해) 5번째기사
충청도관찰사 김필에게 강옥의 본가를 수리하고 그 부모의 묘에 치전하게 하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필(金㻶)에게 글을 내리기를,
“중국 상사(上使)가 6월 중에 선영(先塋)에 가서 제사할 차례로 공주(公州) 에 가고자 하니, 강옥(姜玉) 부모의 분묘에 치전(致奠)하고 강옥의 본가(本家)와 부모의 분묘를 폐단이 없이 수리하게 하라.”하였다.
○下書 忠淸道 觀察使 金㻶 曰: “上天使欲於六月間, 往祭先塋, 次往 公州 , 姜玉 父母墳致奠。 姜玉 本家及父母墳, 無弊修治。”
성종 6권, 1년(1470 경인/명성화(成化) 6년) 6월 10일(정사) 2번째기사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물건을 내려주다
임금이 중국 사신에게 잔치하고자 하여, 도승지(都承旨) 이극증(李克增)에게 명하여 이를 청하게 하니, 중국 사신이 이극증에게 말하기를,
“금일의 좌차(坐次)는 어찌됩니까?”하므로
이극증이 말하기를,
“손님은 동쪽에 앉고, 주인(主人)은 서쪽에 앉습니다.”하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북쪽에 앉아야 하고, 우리는 동쪽에 앉아야 합니다.”하였다.
이극증이 말하기를,
“이러한 예(禮)는 전하께서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하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는 본국(本國) 사람입니다. 전하와 더불어 대좌(對坐)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강행인(姜行人)545)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하였을 뿐입니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가 올 때에 강옥(姜玉)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다만 향로(香爐)하나만 있으면 족할 뿐이다.’고 하였으니,【강계숙(姜繼叔)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모름지기 전하(殿下)께 아뢰어서 은대직사(銀帶職事)를 받게하여 주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전에 왔을 때 본고을의 수령(守令)을 전하께 청하여 관(官)을 더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또한 원컨대 본고을의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에게 1자급(資給)을 내려주게 하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부사(副使)의 통사(通事) 장자효(張自孝)는 삽대(鈒帶)를 띠게 되었으나, 나의 통사(通事) 김계박(金繼朴)은 홀로 자급(資給)을 승진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전하께 아뢰어 주소서. 염승원(廉承源)도 또한 자급(資給)을 올려 주게 하소서.”하였다.
이극증이 아뢰니, 임금이 명하여 좌차(坐次)를 의논하게 하였다.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세조조(世祖朝)에도 본국(本國)의 태감(太監)이 왔을 때 모든 연회(宴會)에서 북쪽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습니다. 지금 만약 굳이 청한다면 그대로 따르는 것도 무방(無妨)하겠습니다.”하였다.
중국 사신이 이르니, 임금이 인정문(仁政門)밖에 나아가서 맞아들였다. 중국 사신이 전(殿)에 올라서, 임금에게 북쪽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중국 사신이 꿇어앉아 청하여 마지아니하므로, 임금이 부득이 남향(南向)하여 서쪽 가까이로 앉았다. 중국 사신이 동쪽에 앉아서 다례(茶禮)를 행하니, 임금이 친히 인정물(人情物)로서 작설다(雀舌茶) 3두(斗), 6장연폭유둔(六張連幅油芚) 1벌[事], 입모(笠帽) 20벌[事], 모마장(毛馬粧) 1부(部), 활[弓] 1장(張), 대전(大箭) 1부, 건복구궁전모(鞬服具弓箭帽) 1부(部), 호피(狐皮) 40장(張), 교상(交床) 1벌[事], 상품표지(上品表紙) 2권(卷), 중품표지(中品表紙) 2권(卷)을 주었고, 두목[頭目]에게는 각각 입모(笠帽) 3벌[事], 선자(扇子) 3자루[把]를 주었다. 드디어 잔치를 베풀고, 임금이 술을 돌렸다.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조석문(曺錫文), 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 낙안군(樂安君) 이영(李寍)이 차례대로 술을 돌렸다. 중국 사신이 술잔을 되돌리기를 마치고, 손수 옥배(玉杯)에 술을 따라서, 신숙주, 한명회, 이극증(李克增), 오백창(吳伯昌)에게 마시게 하고, 드디어 잔치를 파하고 나섰다.
註545]강행인(姜行人): 강호(姜浩).
○上欲宴天使, 募承旨李克增, 往請之。 天使語克增曰: “今日坐次, 何如?” 克增曰: “客東主西。” 天使曰: “不可。 殿下當坐北, 我坐東。” 克增曰: “此禮, 殿下必不敢當。” 天使曰: “我, 本國人也, 不可與殿下對坐。 向者, 以有姜行人, 不得已耳。” 又曰: “我來時, 姜玉語我曰: ‘吾但有一香爐足。’【指姜繼叔而言。】須啓殿下, 授銀帶職事。” 又曰: “我前來, 本州守令, 請殿下加官; 今亦願賜本州牧使、判官一級。” 又曰: “副天使通事張自孝得帶鈒, 而吾通事金繼朴獨不得陞資。 請啓殿下, 廉承源亦陞資。” 克增以啓, 命議坐次。 申叔舟、韓明澮啓曰: “世祖朝本國太監來時, 凡宴會, 請上坐北則從之。 今若强請, 從之無妨。” 天使至, 上出仁政門外迎入。 天使上殿, 請上坐北, 上固辭, 天使跪請不已, 上不得已南向近西而坐, 天使坐東。 行茶禮, 上親贈人情物: 雀舌茶三斗、六張連幅油芚一事、笠帽二十事、毛馬粧一部、弓一張、大箭一部、鞬服具弓箭帽一部、狐皮四十張、交床一事、上品表紙二卷、中品表紙二卷; 頭目, 各笠帽三事、扇子三把。 遂設宴, 上行酒。 密城君琛、上黨府院君韓明澮、仁山府院君洪允成、昌寧府院君曺錫文、寶城君㝓、樂安君寍以次而行。 天使回杯訖, 手酌玉杯, 飮申叔舟、韓明澮、李克增、吳伯昌, 遂罷黜。
성종 10권, 2년(1471 신묘/명성화(成化) 7년) 6월 24일(을축) 1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여 태감 김흥의 조카 김효문등을 승직시키라고 하다
병조(兵曹)에 전지하기를,
“태감(太監) 김흥(金興)의 조카 김효문(金效文)을 승직시키고, 김징(金澄)은 가자(加資)하여 주고, 태감(太監) 강옥(姜玉)의 조카 강계숙(姜繼叔)은 가자(加資)하여 주고 승직(陞職)시키라.”하였다.
○乙丑/傳旨兵曹曰: “太監 金興 姪 金效文 陞職, 金澄 加資; 太監 姜玉 姪 姜繼叔 加資陞職。”
성종 26권, 4년(1473 계사/명성화(成化) 9년) 1월 23일 갑인 5번째기사
좌승지 신정이 강옥이 보내준 대구를 빼앗다
태감(太監) 강옥(姜玉)의 조카 강계숙(姜繼叔)이, 강옥이 보내준 옥대(玉帶)를 진상(進上)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좌승지(左承旨) 신정(申瀞)이 이것을 보고 그 3개의 대구(帶鉤)2780)를 빼앗았다. 신정은 또 전에 별좌(別坐) 안눌(安訥)의 은대(銀帶)가 정교한 것을 보고, 처음에는 침향대(沈香帶)를 주고 바꾸었다가 곧 후회하여 다시 다른 나쁜 띠를 주고 바꾸었으니, 탐오(貪汚)하고 염치없기가 이와 같았다.
註2780]대구(帶鉤): 띠를 맬 때에 걸도록 만든 부속품.
○太監姜玉姪繼叔, 以玉所贈玉帶進上, 不受。 左承旨申瀞見之奪其三鉤。 瀞又嘗見別坐安訥銀帶精巧, 初以沈香帶易之, 尋悔之, 更以他惡帶換焉, 其貪汚無恥類此。
성종 56권, 6년(1475 을미/명성화(成化) 11년) 6월 5일(임오) 6번째기사
한명회가 중국에서 가져온 《신증강목통감》 등을 올리다
좌의정(左議政) 한명회(韓明澮)가 《신증강목통감(新增綱目通鑑)》,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신증본초(新增本草)》,《요사(遼史)》,《금사(金史)》, 유향(劉向) 의 《설원(說苑)》, 구양수(歐陽脩) 의 《문충공집(文忠公集)》 각 1질(帙)과 경회루(慶會樓),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장서각(藏書閣) 의 편액(扁額)과 용뇌(龍腦) 1기(器), 소합향유(蘇合香油) 2기(器), 먹[墨] 2봉(封) 및 중국 조정의 문사(文士)가 압구정(押鷗亭)5282)과 화답한 시축(詩軸)5283)을 올리고, 이어서 아뢰기를,
“《강목》은 태감(太監) 김보(金輔)가 본래 성상의 호학(好學)하심을 알고, 신에게 맡겨서 이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책은 중국에서도 드물게 있는 것이므로, 만약 한번 잃어버리게 되면 다시 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용뇌, 소합유 각 1기와 먹 1봉은 태감(太監) 강옥(姜玉)이 드리는 바이며, 나머지는 모두 신이 사사로이 산 것입니다. 편액은 김보의 양자(養子)로 나이 열두살된 자가 쓴 것인데, 서법(書法)이 매우 기이하므로, 신이 써 주기를 청하여 가지고 왔습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동총병관(遼東摠兵官) 한빈(韓斌)이 신을 호송(護送)하는데 매우 후(厚)하게 하였으므로, 신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창고에 저장해 둔 흑마포(黑麻布) 16필을 내어서 대강군(大杠軍)에게 나누어 주고, 그 우두머리 된 자에게는 신이 웃옷을 벗어주었습니다. 험한 길을 지니고 위태로움을 겪었으므로, 감격과 기쁨이 지극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함부로 옳지 못한 일을 저질렀으니, 황공(惶恐)하게 대죄(待罪)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강목(綱目)》을 전교서(典校署)에 내려서 장책(粧冊)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註5282]압구정(押鷗亭): 한명회 호.註5283]시축(詩軸): 시를 적은 두루말이.
○左議政韓明澮進《新增綱目通鑑》、《名臣言行錄》、《新增本草》、《遼史》、《金史》、劉向《說苑》ㆍ歐陽《文忠公集》各一帙、慶會樓ㆍ大成殿ㆍ明倫堂ㆍ藏書閣扁額、龍腦一器、蘇合香油二器、墨二封及中朝文士所和押鷗亭詩軸, 仍啓曰: “《綱目》, 太監金輔素知上好學, 付臣獻之。 此本中朝亦罕有之, 若一失, 難再購。 龍腦ㆍ蘇合油各一器、墨一封, 太監姜玉所獻也, 餘皆臣私買也。 扁額, 金輔養子年十二者所書, 書法甚奇, 臣請書以來。” 又啓曰: “遼東摠兵官韓斌護送臣甚厚, 臣至義州, 發庫藏黑麻布十六匹, 分贈擡杠軍, 其爲首者, 臣脫身上衣與之。 歷險經危, 感喜之至, 不知擅發爲不可, 惶恐待罪。” 命下《綱目》于典校署, 令粧進。”
성종 67권, 7년(1476 병신/명성화(成化) 12년) 5월 13일(을묘) 1번째기사
사은사 정효상등이 돌아와 《주자어류》등을 바치다
사은사(謝恩使) 정효상(鄭孝常), 박양신(朴良信)이 경사(京師)6249)에서 돌아왔다. 전교(傳敎)하기를,
“재계(齋戒)로 인하여 인견(引見)할 수가 없다. 그런데 중국 조정의 일은 어떠하던가? 경태(景泰)6250)를 추봉(追封)한 뒤에 천하(天下)에 포고(布告)한 것은 없던가?”하니,
정효상이 대답하기를,
“없습니다.”하고,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대전(朱子大全)》 20권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 책은 근래에 찬(撰)한 것이므로 바칩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태감(太監) 강옥(姜玉)이 신(臣)등을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조카 강계숙(姜繼叔)이 성상(聖上)의 은혜를 지극히 중하게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녹봉(祿俸)과 직위(職位)를 더 올려주기를 청하였습니다.”하였다.
註6249]경사(京師): 중국 서울.註6250]경태(景泰): 명(明)나라 경제(景帝)의 연호
○乙卯/謝恩使 鄭孝常 、 朴良信 回自京師復命。 傳曰: “因齋戒未得引見。 中朝事如何? 且 景泰 追封後, 得無布告天下乎?” 孝常 對曰: “無矣。” 仍進 《朱子語類》 、 《大全》 二十卷曰: “此書近來所撰, 故進之。” 又啓曰: “太監 姜玉 邀臣等語曰: “姪 繼叔 蒙上恩至重。 然請加祿職。”
성종 93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 14년) 6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김국광, 김유, 윤효손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국광(金國光)을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김유(金紐)를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효손(尹孝孫)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유순(柳洵)을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강계숙(姜繼淑)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사맹(行司猛)으로 삼았는데, 강계숙이 조정(朝廷)에 들어가게 된 것은 태감(太監) 강옥(姜玉)의 조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옥의 요청에 의하여 특별히 자급(資級)을 더해 준것이다.
○己未/以 金國光 爲 光山府院君 , 金紐 嘉善司憲府大司憲, 尹孝孫 嘉善同知中樞府事, 柳洵 通政弘文館副提學, 姜繼淑 嘉善行司猛。 繼淑 入朝, 太監 姜玉 姪也, 因 玉 之請而特加資。
성종 115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3월 27일(정미) 4번째기사
평안도 관찰사가 중국의 사신 정동등이 칙서를 가지고 북경을 떠났음을 치계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현석규(玄碩圭)가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24일에 주문사(奏聞使)의 통사(通事)가 먼저 강(江)10505)을 넘어와서 보고하기를, ‘중국 사신인 태감(太監) 정동(鄭同)과 강옥(姜玉)이 칙서(勅書)를 가지고 이달 11일에 북경(北京)을 떠났습니다.’고 합니다.”하니,
명하여 서계(書啓)를 가지고 온 황상(黃裳)에게 유의(襦衣) 2령(領)을 내려주라고 하였다.
註10505]강(江): 압록강.
○ 平安道 觀察使 玄碩圭 馳啓: “本月二十四日, 奏聞使通事, 先越江報云: ‘天使太監 鄭同 、 姜玉 , 齎勅, 本月十一日發 北京 。’” 命賜齎書人 黃裳 襦衣二領。
성종 116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4월 2일 임자 3번째기사
박안성에게 하서하여 태감 강옥의 조카 김남등에게 곡식을 내려주도록 하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박안성(朴安性)에게 하서(下書)하여, 공주(公州)에 거주하는 태감(太監) 강옥(姜玉)의 삼촌 조카인 김남(金男), 김을산(金乙山)에게 각각 쌀, 콩 5석(碩)을 내려주게 하였다.
○下書忠淸道觀察使朴安性,賜公州居太監姜玉三寸姪金男、金乙山,各米豆五碩。
성종 116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4월 3일 계축 1번째기사
공조에 전지하여 중국 사신 정동, 강옥의 서울 집을 수리하게 하다
공조(工曹)에 전지(傳旨)하여, 중국 사신 정동(鄭同), 강옥(姜玉)의 서울 가사(家舍)를 수리하게 하였다
○癸丑/傳旨工曹, 修天使鄭同、姜玉京家.
성종 116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4월 4일 갑인 1번째기사
박안성에게 하서하여 사신 강옥의 집을 수리하게 하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박안성(朴安性)에게 하서(下書)하여 공주(公州)에 있는 중국 사신 강옥(姜玉)의 집을 수즙(修葺)하게 하였다.
○甲寅/下書忠淸道觀察使朴安性, 令修葺公州在天使姜玉家.
성종 116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4월 4일 갑인 3번째기사
호조에 전지하여 사신 강옥과 정동의 친지에게 물품을 내려주게 하다
호조(戶曹)에 전지하여, 강옥의 동생매부(同生妹夫) 박금생(朴今生), 삼촌 조카 강계숙(姜繼叔), 김염(金廉)에게 각각 아청면포단원령(鴉靑綿布單圓領) 1령, 백면포단철릭(白綿布單帖裏) 1령, 쌀, 콩 아울러 5석(碩), 동생매(同生妹) 박금생(朴今生)의 처에게 저포삼(紵布衫) 1령, 유청면포단상(柳靑綿布單裳) 1, 동생제(同生弟) 강귀산(姜貴山)의 처에게 저포삼(紵布衫) 1령, 유청면포 단상 1, 쌀, 콩 아울러 10석, 그리고 정동(鄭同)의 삼촌 조카 정지(鄭智), 정효공(鄭孝恭), 정효지(鄭孝智)에게 각각 아청면포단원령(鴉靑綿布單圓領) 1령, 백면포단철릭 1령, 쌀, 콩 아울러 5석, 동생형(同生兄) 정거(鄭擧)의 처에게 저포삼(紵布衫) 1령, 유청면포단상 1, 쌀, 콩 아울러 10석, 동생매(同生妹) 윤쌍(尹雙)의 처에게 저포삼 1, 유청면포단상 1을 내려주게 하고, 또 공조(工曹)에 명하여, 박금생(朴今生), 김염(金廉),정지(鄭智)에게 각각 사모(紗帽) 1정(頂), 마피화(馬皮靴) 1부(部), 박금생, 강귀산, 정거, 윤쌍등의 처에게 각각 마피온혜(馬皮溫鞋) 1사(事), 정효공, 정효지에게 각각 사모(紗帽) 1정(頂), 품대(品帶) 1요(腰), 마피화(馬皮靴) 1부(部)를 내려주게 하였다.
○傳旨戶曹, 賜姜玉同生妹夫朴今生、三寸姪姜繼叔ㆍ金廉, 各鴉靑綿布單圓領一領、白綿布單帖裏一領、米ㆍ豆幷五碩, 同生妹朴今生妻, 紵布衫一領、柳靑綿布單裳一, 同生弟姜貴山妻, 紵布衫一領、柳靑綿布單裳一、米ㆍ豆幷十碩, 鄭同三寸姪鄭智、鄭孝恭、鄭孝智, 各鴉靑綿布單圓領一領、白綿布單帖裏一領、米ㆍ豆幷五碩, 同生兄鄭擧妻, 紵布衫一領、柳靑綿布單裳一、米ㆍ豆幷十碩, 同生妹尹雙妻, 紵布衫一、柳靑綿布單裳一。 又命工曹, 賜朴今生、金廉、鄭智, 各紗帽一頂、馬皮靴一部。 朴今生、姜貴山、鄭擧、尹雙等妻, 各馬皮溫鞋一事。 鄭孝恭、鄭孝智, 各紗帽一頂、品帶一腰、馬皮靴一部。
성종 116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4월16일(병인) 3번째기사
평안도관찰사 현석규가 중국 사신이 14일에 압록강을 건넜다고 치서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현석규(玄碩圭)가 치서(馳書)하여 아뢰기를,
“중국 사신 정동(鄭同)과 강옥(姜玉)이 이달 14일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하니, 명하여 서장(書狀)을 가지고 온 사람 의주지인(義州知印) 심효손(沈孝孫), 김의민(金義敏)에게 면포유(綿布?) 겹의(裌衣), 단의(單衣) 각각 1령(領)을 주도록 하였는데, 그들이 빨리 온 것을 상준 것이다.
○平安道觀察使玄碩圭馳書啓: “天使鄭同、姜玉, 今月十四日越江。” 命給持書人義州知印沈孝孫、金義敏, 緜布襦裌、單衣各一領, 賞其速來也。
성종 117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5월 1일(경진) 1번째기사
근정전에 나아가 칙서 받기를 의식과 같이 하고 사신과 재배례를 나누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서(勅書)를 맞이하고, 먼저 가서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칙서를 받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황제(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아무[姓諱]에게 조칙(詔勅)한다. 예전에 건주위(建州衛) 도적이 배역(背逆)하므로 짐(朕)이 일찍이 군사를 내어 토벌하였는데, 그대의 선왕(先王) 아무가 군사를 발하여와서 도왔으므로 이길 수 있었다. 이번에 적이 오히려 죄악을 쌓아 고치지 않으므로 조정의 의논에 따라 이에 군사를 내어 토벌하는데, 왕이 군사를 발하여 와서 도왔다. 비록 처음에는 강의 얼음이 녹아서 건너기 어려웠으므로, 우리 군사와 합세하여 함께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뒤에 군사가 또한 적의 소굴에 들어가 공격하고 엄습하여 그 부속(部屬)을 사로잡아 베고, 그 집과 축적(蓄積)을 불태워 없애고, 그들이 노략하여간 우리 변위(邊衛)의 인구를 탈환하였으며, 또 배신(陪臣)을 보내어 안동하여 와서 바치었으니, 왕의 충성은 선세에 대하여서는 능히 계승하였다하겠고, 짐의 명령에 대하여서는 저버림이 없다하겠다. 아름다운 명예가 어찌 궁진함이 있으랴! 지금 내관(內官) 정동(鄭同), 강옥(姜玉) 을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彩段), 백금(白金), 문금(紋錦), 서양포(西洋布)를 주고, 영병관(領兵官)인 좌의정(左議政) 윤필상(尹弼商), 절도사(節度使) 김교(金嶠)에게도 각각 예와 같이 줌이 있어 노고를 표하니, 왕은 공경히 받으라. 국왕에게는 은(銀) 1백냥, 금(錦) 5단(段), 저사(紵絲) 11필(匹), 채견(綵絹) 12필을 주고, 영병관 윤필상, 절도사 김교에게 각각 은 20냥, 저사 4필, 채견 4필을 준다.”하였다.
예가 끝나자, 두 사신(使臣)이 위차(位次)로 나아갔다.
임금이 두 사신을 맞아 전상에 오르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예를 행하고자 하니, 청컨대 전하께서는 남향하여 서도록 하소서.”하였으니,
임금이 굳이 사양하고, 동, 서로 나누어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상사(上使)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본국(本國)을 대접하기를 친왕(親王)과 똑같이 하는데, 본국에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기 때문에 황은(皇恩)이 여기에 이르는 것입니다.”하였다.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마치자, 두 사신이 고두(叩頭)하고 나가니, 임금이 근정문(勤政門)안까지 가서 전송하였다.
○朔庚辰/上, 幸慕華館迎勅, 先行至景福宮, 就勤政殿, 受勅如儀。 其勅曰:
皇帝勅朝鮮國王姓諱。 往年建賊背逆, 朕嘗出師致討, 而爾先王某, 發兵來助, 用能克捷矣。 玆者賊猶稔惡不悛, 從廷議, 仍出師討之, 王已發兵來助。 雖前因江氷凍解難濟, 不獲與我師合勢, 同成厥功, 而後兵亦抵巢攻勦, 擒斬其部屬, 焚毁其廬舍蓄峙, 得其所掠我邊衛人口, 又遣陪臣, 押赴來獻, 王之忠誠, 於先世, 可謂能繼; 於朕命, 可謂無負矣, 令聞寧有窮已耶? 今遣內官鄭同、姜玉, 至王國, 賜王彩段、白金、紋錦、西洋布,其領兵官左議政尹弼商、節度使金嶠, 亦各如例有賜,以旌勞勩,王其欽承之。賜國王銀一百兩、錦五段、紵絲十一匹、綵絹十二匹、領兵官尹弼商、節度使金嶠,各銀二十兩、紵絲四匹、綵絹四匹。
禮訖, 兩使出就次。 上邀兩使陞殿, 兩使曰: “我等欲行禮, 請殿下面南而立。” 上固辭, 分東西行再拜禮。 上使曰: “朝廷待本國, 一如親王, 本國至誠事大, 故皇恩至此耳。” 行茶禮訖, 兩使叩頭而出, 上送至勤政門內。
성종 117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5월10일(기축) 2번째기사
이예, 한치형, 이덕량등과 사신의 족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예(李芮)를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한치형(韓致亨)을 자헌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이덕량(李德良)을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이극기(李克基)를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정유지(鄭有智)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성귀달(成貴達)을 가선대부 행첨치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로, 구달충(具達忠)을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부사(南原府使)로, 김성경(金成慶)을 조산대부(朝散大夫)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부사(副使)의 족친(族親) 강계숙(姜繼叔)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상사(上使)의 족친 정지(鄭智), 정효공(鄭孝恭), 정효지(鄭孝智), 정군생(鄭群生), 최숭지(崔崇之) 를 아울러 어모(禦侮), 사맹(司猛)으로, 정윤례(鄭允禮)를 선략(宣略), 부사용(副司勇)으로 삼고, 상사(上使)의 아비 정송(鄭松)을 추증(追贈)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삼고, 부사(副使)의 아비 강상지(姜尙之)를 추증하여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삼았다. 임금이 도승지 김승경(金升卿)에게 명하여 관교(官敎)10568)를 싸가지고 가서주니, 상사는 분향(焚香) 배사(拜謝)하고, 부사는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오늘 정사에 상사의 족친은 은대(銀帶)를 띤 사람이 6, 7명인데, 나는 강계숙 한 사람뿐이니, 부끄러움이 없겠는가?”하였다.
註10568]관교(官敎): 교지(敎旨).
○以 李芮 爲資憲漢城府判尹, 韓致亨 資憲知中樞府事, 李德良 嘉靖工曹參判, 李克基 嘉善 漢城府 左尹, 鄭有智 嘉善同知中樞府事, 成貴達 嘉善行僉知中樞府事, 具達忠 通政 南原 府使, 金成慶 朝散司諫院獻納, 副天使族親 姜繼叔 爲嘉善同知中樞府事, 上天使族親 鄭智 、 鄭孝恭 、 鄭孝智 、 鄭?生 、 崔崇之 , 竝爲禦侮、司猛, 鄭允禮 宣略副司勇, 追贈上使父 松 爲正憲工曹判書, 副使父 尙之 爲嘉靖戶曹參判。 上募承旨 金升卿 , 齎官敎以往, 與之上天使焚香拜謝, 副天使?淚曰: “今日之政, 上使族親, 帶銀者六七人, 我則獨一 繼叔 耳, 能無愧耶?”
성종 117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5월 26일(을사) 1번째기사
인정전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다
중국 사신을 인정전(仁政殿)에서 연향(宴饗)하였다. 상사(上使)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토 백성입니다. 어찌 감히 전하와 자리를 마주 대하겠습니까?”하고, 두 사신이 친히 어좌(御座)를 북쪽에 옮기고 남면(南面)하여 자리하기를 굳이 청하니, 임금이 부득이하여 따랐다. 임금이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마치자, 도승지 김승경(金升卿)에게 명하여 두 사신에에 선물을 주니, 두 사신이 고두(叩頭)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장차 술잔을 돌리려고 하니, 상사가 고두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먼저 술을 올리기를 청합니다.”하였으나,
임금이 굳이 사양하였다. 상사가 술을 따라 꿇어앉아서 올리며 전하가 서서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사(副使)가 나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정좌(正座)하시면 강옥(姜玉)이 술을 올리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보는데 이와 같이 할 수 없다.”하였다.
두 사신이 전하를 부액(扶腋)하여 자리에 오르게 하고, 부사가 꿇어앉아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편안히 앉으시면 강옥이 마땅히 계속하여 3배(盃)를 마시겠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부득이하여 따르니, 부사가 계속하여 3배를 마시었다.
임금이 도승지 김승경에게 명하여 두 사신에게 말하기를,
“윤필상(尹弼商)이 흠사(欽賜)를 많이 받고 감하(感荷)함을 이기지 못하여, 장차 그 집에서 술을 준비하여 두 대인을 위로하고자 한다.”하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전하의 말씀이 진실로 좋습니다. 늙은 한 재상(韓宰相)도 어찌 우리들을 위로하지 않겠습니까?”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이야기하겠다.”하였다. 잔치가 파하고서 두 사신이 나갔다.
○乙巳/宴天使于 仁政殿 。 上使曰: “俺等是土民。 安敢與殿下對座?” 兩使親移御座于北, 固請南面而座, 上不得已從之。 上行茶禮訖, 募承旨 金升卿 , 贈兩使人情物件, 兩使叩頭侯恩。 上起將行酒, 上使叩頭曰: “俺等請先進酒。” 上固讓。 上〔使〕酌酒?進, 請殿下立受, 上從之。 副使進曰: “殿下正座, 則 姜玉 進酒。” 上曰: “衆目所視, 不可如是。” 兩使扶腋殿下上座, 副使?曰: “殿下安坐, 則 玉 當連飮三盃。” 上不得已從之, 副使連飮三盃。 上募承旨 金升卿 , 語兩使曰: ‘ 尹弼商 , 多受欽賜, 不勝感荷,’ 欲置酒其家, 以慰兩大人。” 兩使曰: “殿下之敎正好。 老 韓宰相 , 亦豈不慰吾等乎?” 上曰: “我當語之。” 宴罷, 兩使出。
성종 117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5월29일 무신 12번째기사
박안성에게 하서하여 강옥이 부처의 영정을 계룡산에 두려하니 준비하라고 하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박안성(朴安性)에게 하서(下書)하기를,
“강사신(姜使臣)10599)이 공주(公州)에 가서 부처의 영정을 친히 계룡산(鷄龍山)에 두고자하니, 모든 일을 준비하여 기다리라.”하였다.
註10599]강사신(姜使臣): 강옥(姜玉).
○下書于忠淸道觀察使朴安性曰: “姜天使欲往公州, 以佛幀親置于雞龍山, 其備諸事以待。”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2일 신해 2번째기사
공주의 본집으로 귀가하는 중국 사신 부사 강옥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중국 사신인 부사(副使)〈강옥(姜玉)이〉공주(公州)의 본집을 향하여 떠나니, 상사(上使)가 제천정(濟川亭)에서 전송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채수(蔡壽)를 명하여 문안하게 하고, 도승지(都承旨) 김승경(金升卿)은 선온(宣醞)10608)과 인정물건(人情物件)을 싸가지고 가서 정자위에 잔치를 베풀었는데,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노사신(盧思愼), 서거정(徐居正), 권감(權瑊), 어세겸(魚世謙), 정난종(鄭蘭宗)이 참여하였다.
김승경이 인정 물건을 두 사신에게 증정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나는 본가(本家)에 가는 것도 아닌데 아울러 후사(厚賜)하심을 받으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하였다.
잔치가 파하자, 부사가 북향재배하고 나갔다. 상사는 누선(樓船)을 타고 기생과 악공을 싣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 칠덕정(七德亭) 앞에 이르니, 좌부승지(左副承旨) 변수(邊脩)가 또 선온(宣醞)을 싸가지고 이르렀다. 중국 사신이 극진히 즐기고 북향하여 고두(叩頭)하였다.
註10608]선온(宣醞): 임금이 내려 주는 술.
○副天使發向公州本家, 上使餞于濟川亭。 上命左承旨蔡壽問安, 都承旨金升卿齎宣醞及人情物件以往, 設宴于亭上, 鄭昌孫、韓明澮、盧思愼、徐居正、權瑊、魚世謙、鄭蘭宗與焉。 金升卿呈人情物件于兩使, 上使曰: “我則非向本家, 而竝受厚賜, 多謝多謝。” 宴罷, 副使北向再拜, 而出, 上使乘樓船載妓樂, 順流而下, 乃至七德亭前, 左副承旨邊脩又齎宣醞而至, 天使極歡, 向北叩頭。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9일 무오 1번째기사
좌승지 김계창이 부사를 공주 본가에서 선위하고 와서 복명하다
좌승지(左承旨) 김계창(金季昌)이 부사(副使)를 공주(公州) 본가(本家)에서 선위(宣慰)하고 와서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부사(副使)가 그 집을 보고 노하기를, ‘이 집을 내가 전에 왔을 때에 더 짓기를 아뢰어 청하였는데, 지금 좁기가 예전 같고 또 원장(垣墻)도 없으니, 승지가 보기에 어떠합니까?’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주관(州官)에게 명하시었는데 제때에 수즙(修葺)을 못하였으니, 마땅히 전하께 아뢰겠습니다.’하였으나, 부사의 노여움이 그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하였다.
○戊午/左承旨金季昌, 宣慰副使于公州本家, 來復命啓曰: “使見其家怒曰: ‘此家吾前來時, 啓請加造, 今狹?如舊, 又無垣墻, 其於承旨所見何?’ 臣答曰: ‘殿下已命州官, 而不時修葺, 當啓殿下。’ 使怒猶未解也。”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15일 갑자 4번째기사
공주에서 돌아온 중국 사신 부사 강옥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부사(副使)가 공주(公州)에서 돌아오니, 도승지(都承旨) 김승경(金升卿)을 명하여 선온(宣醞)과 인정물건(人情物件)을 싸가지고 한강(漢江)에서 맞아 위로하고, 또 우승지 채수(蔡壽)를 명하여 문안하고 정자선(亭子船)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沈澮), 좌의정(左議政) 윤필상(尹弼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극배(李克培),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이 참여하였다. 흐름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 잠두령(蠶頭嶺)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잠두령에 올라 또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중국 사신이 극진히 즐기고 파하였다.
○副天使還自公州, 募承旨金升卿, 齎宣醞人情物件, 迎慰于漢江。 又命右承旨蔡壽問安, 設宴于亭子船。 上黨府院君韓明澮、靑松府院君沈澮、左議政尹弼商、領中樞府事李克培、達城君徐居正、東萊君鄭蘭宗與焉。 順流西下, 至蠶頭嶺, 捨舟登嶺, 又置酒天使, 極歡而罷。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19일 무진 1번째기사
경복궁에 거둥하여 중국사신 부사 강옥에게 사정전에서 잔치를 베풀다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부사(副使)에게 사정전(思政殿)에서 잔치하고 인정물건(人情物件)을 주었다. 임금이 일어나 술을 돌리려 하니, 부사가 임금이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여 꿇어앉아서 술을 올리고, 인하여 아뢰기를,
“제가 본가에 갔다오는 동안에 관찰사(觀察使)와 주관(州官)등이 전하의 명령을 공경히 받들어 지대(支待)하는 것이 극히 풍성하고 후하였으니, 모두 전하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강(江)위에 또 재상(宰相)과 승지(承旨)를 보내어 맞아 위로하시었고, 배를 타고, 유람하며 잠두령(蠶頭嶺)에 이르렀는데 풍경(風景)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북경(北京)에는 이런 좋은 경치가 없습니다. 다만 남경(南京) 절강(浙江)에 있다고 들었을 뿐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남경을 보았는가?”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저는 일찍이 가지 못하였고, 다만 달단(韃靼) 지방과 거용관(居庸關) 등지에 차견(差遣)되어 왕래하였을 뿐입니다. 정태감(鄭太監)10653)은 일찍이 가보았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진헌(進獻)하는 활을 황제(皇帝)가 어떻다 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황제께서 아껴서 가볍게 남에게 주지 않습니다. 만일 태감(太監)이 고두(叩頭)하여 주기를 청하는 것이 있으면 혹 때로 주십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도 또한 사후(射侯)10654)를 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사(侍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태감(太監) 1백여인이 서로 번갈아 시사(侍射)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솔[侯]을 베푸는 것의 멀고 가까운 것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1백보(步), 혹은 90보, 혹은 50보가 됩니다. 본국은 활 힘[弓力]이 강하여 능히 2백보를 쏘지마는, 중국(中國)은 활 힘이 약하여 겨우 1백보, 50보에 미칠 뿐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황제가 어느 곳에서 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만세산(萬歲山) 서변(西邊)에 규장(叫場)이 있습니다.”하였다.
사신이 또 말하기를,
“회정(回程)할 때에 궁자(弓子)와 반백우명적철전(半白羽鳴鏑鐵箭)을 많이 내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진헌하고자 하고, 또 조정(朝廷) 여러 관료(官僚)에게 주고자 합니다. 들으니, 정태감이 채석(彩席) 40장(張)을 내려주심을 받았다하니, 채석과 옥등잔(玉燈盞)을 더 내려주심을 받고자 원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대인(大人)에게 어찌 감히 경중(輕重)이 있겠는가? 상태감(上太監)이 요구하기 때문에 더 준 것이다.”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진헌하고 남는 매색(每色)의 솨자(耍子) 양패(兩佩)와 전자(剪子) 각 10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본국에서 진헌하는 물건을 황제가 한 번 구경하고서 부고(府庫)에 두는데, 여러 해가 되면 썩을 뿐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황제가 조회를 받을 때에 시위(侍衛)하는 태감(太監)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수효가 3백명에 이르는데, 더욱 가까이 모시는 자는 1백인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입조(入朝)한 태감 몇 사람이 가까이 모시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선덕(宣德)10655) 2년(1427)에 창사신(昌使臣)10656), 백사신(白使臣)1065 7)이 나왔을 때에 제 나이 13세였는데, 정동(鄭同)과 더불어 따라서 북경[京師]에 갔습니다. 임금에게 하직할 때를 당하여 노전하(老殿下)께서 경회루(慶會樓) 위에 나아가시어 우리들에게 분부하시기를, ‘너희들이 중국 조정에 가거든 마땅히 조심하여 복사(服事)하라.’하시었는데, 제가 지금까지 잊지 못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인이 영구히 이 말씀을 잊지말고 시종 그대로 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하였다. 사신이 또 말하기를,
“박진(朴珍), 이금동(李今同), 김보(金輔)등 8인이 동시에 북경에 갔었는데, 지금 생존한 자가 다만 4인입니다. 이금동(李今同)은 이진내(李珍乃)로 개명(改名)하였고, 저의 양자(養子) 박진(朴珍)은 황제의 친아우 덕왕(德王)이 산동(山東)에 출번(出藩)할 때에 따라갔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덕왕이 와서 조현(朝見)하는가?”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명령이 있으면 내조(來朝)하고 만일 명령이 없으면 비록 여러 해가 되어도 내조하지 못합니다. 덕왕이 생활하면서 고생되는 사유를 가지고 두세 번 진청한 연후에야 다만 내시(內侍)를 보내어 표리(表裏)10658)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내조하는 것은 허락지 않았습니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본향(本鄕)인 공주(公州)의 주관(州官)과 관찰사(觀察使)가 저를 위하여 지대(支待)를 심히 부지런히 하였으니, 원컨대 1급(級)을 승진시켜 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직분(職分)의 일인데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서재상(徐宰相)10659)이 저를 따라 또한 일로(一路)에서 근로(勤勞)하였는데, 재상이기 때문에 감히 아울러 청하지 못합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제가 중국 조정에 돌아가면 황제께 아뢰어 청하기를, ‘본국에 활이 긴요한데 흑각(黑角)이 희귀하여 활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많은 수량을 수매하도록 허락하여 용도에 넉넉하게 하소서.’하면, 황제가 반드시 허락하실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다만 황은(皇恩)이 망극할 뿐 아니라, 대인의 공도 또한 작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註10653]정태감(鄭太監): 정동(鄭同).註10654]사후(射侯): 솔[侯]에 활쏘아 시합하는 것 註10655]선덕(宣德)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戊辰/幸景福宮, 宴副天使于思政殿, 贈人情物件。 上欲起行酒, 副使請上陞座, 跪而進酒, 仍啓曰: “俺之往還本家也, 觀察使及州官等, 敬奉殿下之命, 支待極豐厚, 皆是殿下賜也。 江上又遣宰相及承旨迎慰, 乘舟遊觀, 至于蠶嶺, 風景說不能盡。 北京無此勝槪。 但聞南京浙江有之耳。” 上曰: “大人其見南京耶?” 使曰: “我不曾往, 只於韃靼地面、居庸關等處, 蒙差往來耳。 鄭太監, 則曾往見之矣。” 上曰: “我國進獻弓子, 皇帝以謂何如?” 對曰: “皇帝愛惜之, 不輕與人。 如有太監, 扣頭請賜者, 或時與之。” 上曰: “皇帝亦射侯乎?” 答曰: “有之。” 上曰: “得有侍射者乎?” 對曰: “太監百餘人, 迭相侍射。” 上問張侯遠近, 對曰: “百步、或八十步、或五十步。 本國弓力勁, 能射二百步, 中國弓力軟, 只及百步、五十步而已。” 上問: “皇帝射於何處?” 對曰: “萬歲山西邊, 有叫場。” 使又曰: “回程時, 弓子與半白羽鳴鏑鐵箭, 願蒙多賜。 我欲進獻, 且欲遺朝廷諸僚。 聞鄭太監, 蒙賜彩席四十張, 彩席、玉燈盞, 願蒙加賜。” 上曰: “兩大人, 何敢輕重? 上太監求之, 故加贈耳。” 使曰: “進獻所餘, 每色耍子兩佩、剪子各十箇, 願蒙賜。” 使又曰: “本國進獻物件, 皇帝一經賞玩, 置之府庫, 歲久腐朽而已。” 上問皇帝受朝時, 侍衛太監幾人?” 答曰: “數至三百, 而尤近侍者百人。” 上曰: “我國入朝太監, 幾人近侍?” 對曰: “宣德二年, 昌天使、白天使出來, 俺年十三, 與鄭同隨之赴京。 當陛辭時, 老殿下御慶會樓上, 敎俺等曰: ‘爾等赴天朝, 當小心服事。’ 俺至今不忘。” 上曰: “大人永不忘此言, 終始以之可也。” 使又曰: “朴珍、李今同、金輔等八人, 同時赴京, 今存者只四人。 李今同改名珍乃, 我養子朴珍, 則皇帝親弟德王, 出藩山東, 曾隨去矣。” 上問: “德王來朝見歟?” 使曰: “有命則來朝, 若無命, 雖曠年, 不得朝矣。 德王將居活艱窘事由, 再三陳請, 然後只遣內侍, 賜表裏。 然不許時時來朝矣。” 使又曰: “本鄕公州州官及觀察使, 爲我支待甚勤, 願陞一級。” 上曰: “此皆職分事, 有何功勞?” 使曰: “徐宰相隨我, 亦於一路動勞, 以大相, 故不敢幷請。” 使又曰: “我還中朝, 奏請皇帝曰: ‘本國弓子緊要, 而黑用稀矣, 造弓爲難。 請令多數許買, 以優於用。’ 則皇帝必許之矣。” 上曰: “如是, 非但皇恩罔極, 大人之功, 亦不細矣。”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21일 경오 1번째기사
중국사신 부사 강옥이 강계숙의 집에 가다
부사(副使)가 강계숙(姜繼叔)의 집에 가니, 도승지(都承旨) 김승경(金升卿)을 명하여 선온(宣醞)을 싸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庚午/副天使往姜繼叔家, 募承旨金升卿, 齎宣醞往慰焉。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21일 경오 2번째기사
중국사신 부사 강옥의 영접도감낭청 양면이 태평소 한쌍을 올리다
부사(副使)의 영접도감낭청(迎接都監郞廳) 양면(楊沔)이 태평소(太平簫) 한 쌍(雙)을 올리었다. 처음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조정의 소보(簫譜)를 전하여 익혔는데, 부사가 말하기를,
“본국이 중국과 언어(言語)가 같지 않고 퉁소 모양이 또한 다르기 때문에 전하여 익히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제게 새로 만든 퉁소 한쌍이 있는데 비밀히 진상(進上)하겠으니, 정태감(鄭太監)과 여러 두목(頭目)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마소서.”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올린 것이었다.
○副天使迎接都監郞廳楊沔, 進太平簫一雙。 初我國人, 傳習中朝簫譜, 副天使曰: “與上國言語不同, 簫形亦異, 故傳之爲難耳。 我有新造簫一雙, 秘密進上, 勿令鄭太監諸頭目知之。” 至是乃進焉。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23일 임신 5번째기사
중국사신 부사 강옥이 전에 내려준 노비를 재차 바꾸어 주기를 청하다
부사(副使)가 관반(館伴)에게 이르기를,
“전에 내려준 노비(奴婢)가 가난하고 또 병이 있어 재차 바꾸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들어주지 않으니 깊이 답답하게 여깁니다.”하였다.
관반이 대답하기를,
“저 노비가 거짓으로 병들었다 일컫는 것이지 실상은 병이 없으니, 대인이 마침내는 반드시 알 것입니다.”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본 것인데 어째서 병이 없다고 말합니까?”하고,
자못 노한 빛이 있었다. 관반이 나가니,
또 통사(通事) 유호양(兪好讓)을 시켜 관반에게 말하기를,
“왕년에 노전하(老殿下)께서 노비 7구(口)를 주셨는데, 지금은 다만 2구를 주고 또 모두 가난하고 병들었으니, 모름지기 전하께 아뢰어 바꾸어 주십시오.”하고,
또 통사 오윤손(吳允孫)에게 이르기를,
“내가 노비를 청하였는데 관반이 저지하고 전하께 아뢰지 않으며, 그대들 통사 두 사람도 또한 재상의 뜻에 따라서 하나하나 말을 전하지 않으니, 다시는 나를 보지 마시오.”하였다.
○副天使謂館伴曰: “前賜給奴婢, 貧且有病, 再請換給, 而不聽, 深以爲悶。” 館伴答曰: “彼奴婢詐稱貧病, 其實則無病, 大人終必知之矣。” 使曰: “吾所親見, 何謂無病?” 頗有怒色。 館伴乃出, 又使通事兪好讓, 語館伴曰: “往年老殿下賜奴婢七口, 今只給二口, 且皆貧病, 須啓殿下換給。” 又謂通事吳允孫曰: “吾請奴婢, 而館伴阻當, 不啓殿下, 汝通事二人, 亦從宰相之意, 不一一傳語, 更勿見我。”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23일 임신 6번째기사
신천에서 돌아온 중국사신 상사 강옥에게 잔치를 베풀다
상사(上使)가 신천(信川)에서 돌아오니, 부사(副使)가 홍제원(洪濟院)에 나가 맞아 함께 돌아와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렀다. 좌승지(左承旨) 김계창(金季昌)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고, 또 도승지(都承旨) 김승경(金升卿)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싸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겸하여 궁시(弓矢)를 주니, 상사가 두세 번 고두(叩頭)하고 사례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 좌의정(左議政) 윤필상(尹弼商), 관반(館伴) 노사신(盧思愼), 서거정(徐居正), 정난종(鄭蘭宗)이 잔치에 참여하였다. 상사가 노상에서 잉어[鯉魚]를 얻어 치진(馳進)하니, 임금이 신운(申雲)을 명하여 선온을 싸가지고 가서 사례하게 하였는데, 부사가 노하기를,
“내가 공주(公州)에서 돌아올 때에는 내관(內官)을 보내지 않고 지금은 따로 보냈으니, 이것은 한 나무에 두 가지 과실이 열리는 것이다.”하였다.
○上天使還自信川, 副天使出迎于洪濟院, 偕還至慕華館。 遣左承旨金季昌問安, 又募承旨金升卿, 齎宣醞往慰, 兼贈弓矢, 上使再三叩頭而謝。 領議政鄭昌孫、上黨府院君韓明澮、光山府院君金國光、左議政尹弼商、館伴盧思愼ㆍ徐居正ㆍ鄭蘭宗參宴。 上使在路上得鯉魚馳進, 上命申雲, 齎宣醞往謝之, 副使怒曰: “我自公州還也, 不遣內官, 今則別遣, 是一樹兩樣果子也。”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25일(갑술) 2번째기사
중국사신 상사 정동에게 진헌 물목을 부사한테도 보여주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다
김승경(金升卿)이 부사(副使)의 말로 입계(入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이와 같으니, 상사(上使)에게 말할 수 있는가? 정승(政丞)들을 불러 의논하라.”하였다.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 윤사흔(尹士昕), 김국광(金國光),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 이극배(李克培)가 의논하기를,
“마땅히 상사에게 말하기를, ‘무릇 진헌하는 잡물(雜物)을 대인(大人)이 「부사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하였기 때문에 요전에는 부사에게 고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대인과 함께 차정되어 왔으니 끝내 알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여 이것으로 말하여 그 뜻을 보소서.”하였다.
전교하기를,
“부사(副使)가 한 말을 다 상사(上使)에게 말하고자 하는데, 경(卿)등의 뜻에는 어떠한가?”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가합니다.”하였다.
이에 도승지(都承旨)로 하여금 가서 말하게 하였다.
김승경이 복명(復命)하기를,
“신이 상사에게 말하기를, ‘무룻 진헌하는 희완(戲玩)의 물건을 부대인(副大人)이 참여하여 알지못하는 것을 한하는데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내가 혼자 황제의 명령을 받았고 부사는 전연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데, 만일 황제가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 강옥(姜玉)으로 하여금 알게하지 않았는데, 네가 어째서 알게 하였느냐?」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 얼굴빛을 보니 자못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부사의 좌우에 가까이 모시고 친히 관즐(盥櫛)을 받는다.’는 등의 말을 다하면 반드시 부사와 화협(和協)하지 못하겠기에, 신이 다시 취품(取稟)하고자하여 다 전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묘당(廟堂)10662)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고 그대를 시켜 전한 것인데, 그대가 어째서 중간에서 조종(操縱)을 하고 말하지 않았느냐? 뒤에 비록 책망이 있더라도 승지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하니,
김승경이 말하기를,
“신이 망령되게 생각하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과 의논하여 정한 것을 그대가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이 가하냐? 또 말을 전할 때에 그대 말로 말하였느냐, 내 말로 말하였느냐?”하니,
김승경이 말하기를,
“어찌 신의 말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말씀으로 말하였습니다”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 명하여 김승경을 국문하게 하였다.
註10662]묘당(廟堂): 의정부(議政府).
○金升卿以副使之言入啓, 上曰: “其言如此, 可語上使否? 其召政丞等議之。”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士昕、金國光、尹弼商、洪應、李克培議: “當語上使曰: ‘凡進獻雜物, 大人勿令副使知之, 故前此不告于副使, 然與大人同差, 而來, 其終勿使知之耶?’ 以此語之, 以觀其意。” 傳曰: “以副使言, 欲盡說於上使, 於卿等意何?“ 皆對曰: “可。” 乃令都承旨往語之。 升卿復命曰: “臣語上使云: ‘凡進獻戲玩之物, 副大人恨不得與知, 何以處之?’ 上使曰: ‘予獨承帝命, 副使, 則專不與知, 若皇帝謂予曰: 「予初不使姜玉知之, 汝何故使知之?」 則予何以答之?’ 觀其色, 頗不悅。 若盡說副使, 昵侍左右, 親奉盥櫛等語, 則必與副使不協, 臣更欲取稟, 不盡傳也。” 傳曰: “已與廟堂大臣議之, 使汝傳之, 汝何操縱其間, 而不言乎? 後雖有責, 何與於承旨?” 升卿曰: “臣妄料致誤耳。” 傳曰: “與大臣議定, 汝不傳言可乎? 且傳語之時, 以己言語之乎? 以予言語之乎?” 升卿曰: “安可以臣之言語之? 以殿下之言語之耳。” 命司憲府鞫升卿。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6월 26일 을해 3번째기사
중국사신 상사에게 진헌물목을 부사 강옥한테도 통보하는 문제를 의논하다
좌승지(左承旨) 김계창(金季昌)이 들어와 일을 아뢰니, 임금이 명하여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상사(上使)에게 말하게 하기를,
“‘어제 부사(副使)가 김승경(金升卿)에게 말하기를, 「내가 상사와 더불어 함께 사명(使命)을 받고 왔는데, 진헌(進獻)하는 잡물을 정사신(鄭使臣)이 혼자 알고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정사신은 황제께 진현(進見)하는 것이 때가 있고, 나는 좌우에 가까이 모시어 친히 관즐(盥櫛)을 받드니, 만일 황제(皇帝)가 묻기를, 왜 진헌하는 잡물을 보지 않았느냐고 하면, 내가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하였는데, 상사는 부사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지마는 부사는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노엽게 생각하니 조처하기가 곤란하다.’하라. 이렇게 말하라.”하였다.
이세좌(李世佐)가 말하기를,
“친히 관즐을 받는다는 말까지 다 말하면 두 사신이 반드시 서로 화협하지 못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다만 좌우에서 가까이 모신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김계창이 태평관에 가서 말하니, 상사가 이르기를,
“강태감(姜太監)10663)이 스스로 날마다 근시(近侍)한다고 말하고 나더러는 이따금 진현(進見)한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조정에 돌아가면 마땅히 분별될 것입니다. 강태감이 스스로 근시라고 한다면 진헌하는 물목(物目)을 황제께서 어찌 나에게만 명령하였겠습니까? 또 귀국(貴國)에 흠사(欽賜)한 물건을 강태감이 그 수효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일 알리지 않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한다면, 진헌하는 물목을 써서 우리들이 함께 앉았을 때에 보이면 가합니다. 또 처음에 흠차(欽差)할 때에 나는 먼저 흠차하고 강태감은 애원하여 흠차를 받았습니다.”하였다.
○左承旨金季昌入啓事, 上命往太平館, 語上使曰: “昨日副使語金升卿云: ‘予與上使, 同差而來, 進獻雜物, 鄭天使獨知, 而予未之知。 然鄭天使進見皇帝有時, 我則昵侍左右, 親奉盥櫛, 若皇帝問何不見進獻雜物, 則予將何說以對?’ 上使云不使副使知之, 而副使怒不得與知, 處之具難。 其以此語之。” 李世佐曰: “若盡說親奉盥櫛之語, 兩使必不相協。” 上曰: “然只說昵侍左右可也。” 季昌往太平館語之, 上使云: “姜太監自以謂日日近侍, 以我爲進見有時, 此等事, 還朝當辨。 太監自以爲近侍, 則進獻物目, 帝何獨命我乎? 且貴國欽賜之物, 姜太監不知其數何歟? 若以不使知之爲憾, 則書進獻物目, 我等同坐時, 示之可也。 且初欽差時, 我則先差, 姜太監哀請, 乃得蒙差。”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 1일(기묘) 2번째기사
중국사신 정동이 요청한 도감낭청등에게 가자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다
관반(館伴) 노사신(盧思愼) 이 아뢰기를,
“상사가 말하기를, ‘어제 부사가 내게 말하기를, 「진헌하는 희완(戲玩)의 물건으로 만일 남는 것이 있으면 우리들이 전하께 청하여 별도로 바치는 것이 가하다」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혹 있더라도 별헌(別獻)할 것이 아니다」하였더니, 부사가 옳게 여기고 드디어 그만두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황제의 명령을 받아 오로지 이 일을 관장(管掌)하였지마는, 부사는 처음부터 알지 못합니다. 만일 각각 별헌(別獻)한다면 본국의 후일의 폐단이 작지 않을 것이니, 비록 남은 물건이 있더라도 부디 주지 마시오.’하였습니다.”하니,
역시 정승들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 윤사흔(尹士昕), 김국광(金國光),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이 의논하기를,
“도감낭청등 자급이 다 된 자는 대가(代加)하고, 전함(前銜)10667)인 자는 서용(敍用)하며, 자급이 다 되지않은 자는 계급을 더하소서. 또 진헌하고 남은 물건은 전일에 이미 부사의 청을 허락하였으니, 상사의 말로 인하여 신의를 잃을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에게 명하여 상사에게 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대인의 청으로 인하여 통사(通事)등의 전함이 있는 자는 서용하고, 자급이 다 된 자는 대가(代加)하며, 자급이 아직 다 되지 않은 자는 자급을 더하셨습니다.”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이른바 대가(代加)라는 것은 무엇입니까?”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자급이 다 된 자는 가자(加資)하면 당상관으로 승진시켜야 하는데, 당상관은 반드시 공이 있는 것을 기다려서 주는 것입니다만, 통사등은 공로가 없기 때문에 대신 자제(子弟)에게 주는 것입니다.”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옛날 최태감(崔太監)이 사명을 받들고 왔을 때에는 우리들의 청에 따라서 모두 그 자신에게 작위(爵位)를 주었는데, 지금은 자제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니, 어째서 같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마땅히 몸소 왕부(王府)에 나아가서 청하겠습니다.”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신천(信川)에 있을 때에 부대인(副大人)이 진헌한 나머지 물건을 요구하므로 전하께서 이미 허락하였는데, 지금 대인이 주지 말라고 말하니,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본국의 토산(土産)은 할 수 없지마는 상아(象牙)조각(彫刻)과 만세패(萬歲牌)같은 물건은 주어서는 안됩니다.”하였다.
김계창이 또 부사의 처소에 가서 통사등에게 가자(加資)하는 일을 말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만일 자제에게 대가한다면 중국조정의 법과 다릅니다. 무릇 자급은 그 사신에게 가하는 것이 옳습니다.”하였다.
김계창이 또 말하기를,
“상사가 말하기를, ‘진헌한 나머지는 대인에게 주어서는 안된다.’하였으나, 전일에 대인이 청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 주고자 하십니다.”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상사는 진헌하는 것이 있는데, 나 혼자 진헌하지 않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감히 청한 것입니다.”하였다.
김계창이 또 말하기를,
“대인이 받은 노비가 병이 있다하므로, 전하께서 3구(口)를 더 주었습니다.”하니, 부사가 북향하여 고두(叩頭)하며 사례하였다.
김계창이 나오니, 상사가 장유화(張有華)를 보내어 이르기를,
“나는 오로지 본국을 위하여 말한 것인데 모두 부사에게 전하였으니, 이것은 우리들을 이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헌에 대한 일은 강태감(姜太監)과 의논하고 나와는 말하지 마시오.”하였다.
註10667]전함(前銜): 전직(前職).
○館伴盧思愼等啓曰: “上使言: ‘昨日副使語我云: 「進獻戲玩之物, 如有所餘, 則我等請於殿下, 別獻可也。」 我答曰: 「必無所餘, 雖或有之, 不可爲別獻也。」 副使然而遂止。 我則初受帝命, 專掌此事, 副使初不與知。 若各別獻, 則本國後日之弊不貲, 雖有餘物, 愼勿贈之。” 亦命議于政丞等。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士昕、金國光、尹弼商、洪應議: “都監郞廳等, 資窮者代加, 前銜者敍用, 未資窮者宜加階。 且進獻餘物, 前日已許副使之請, 不可因上使之言, 而失信也。” 上募承旨金季昌, 往語上使曰: “殿下因大人之請, 以通事等前銜者敍用, 資窮者代加, 資未窮者加資。” 上使曰: “所謂代加何耶?” 季昌曰: “資窮者加資, 則陞爲堂上官, 堂上官必待有功而授, 通事等無功勞, 故代授其子弟也。” 上使曰: “昔與崔太監奉使而來, 其時從俺等之請, 皆爵其身, 今使子弟代之, 是何不同也? 俺等, 當身詣王府請之。” 季昌曰: “大人在信川時, 副大人求進獻之餘, 殿下已許, 今大人以謂不可贈, 將何以處之?” 上使曰: “本國土産, 則已矣, 如象牙雕刻及萬歲牌等物, 不可與也。” 季昌又詣副使處, 語通事等加資事, 副使曰: “若子弟代加, 則與中朝之法異。 凡資級加於其身可也。” 季昌又語曰: “上使云: ‘進獻之餘, 不可贈大人。’ 然前日大人請之, 故殿下欲贈之。” 副使曰: “上使有進獻, 而予獨不獻, 爲不可, 故敢請之。” 季昌又云: “大人以所贈奴婢, 爲有病, 故殿下加贈三口。” 副使北向叩頭而謝。 季昌出, 上使遣張有華謂曰: “俺專爲本國言之, 而盡傳於副使, 是欲離間我等也。 進獻之事, 與姜太監議之, 勿與我言。”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1일 기묘 3번째기사
중국 사신들이 바깥 남산을 유람하다
상사(上使)가 바깥 남산(南山)을 유람하고자 하니, 부사(副使)가 병으로 사양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근시(近侍)하는 사람이니, 어찌 소원(疏遠)한 사람과 함께 놀려고 하겠는가?”하자, 부사가 함께 가서 유람하였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 관반(館伴) 노사신(盧思愼), 서거정(徐居正), 우찬성(右贊成) 강희맹(姜希孟),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승소(李承召)가 따랐다. 도승지 김계창(金季昌)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싸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上使欲遊觀外南山, 副使辭以疾。 上使曰: “彼近侍者也, 豈肯與疏遠之人遊乎?” 副使偕往遊觀。 上黨府院君韓明澮、光山府院君金國光、館伴盧思愼ㆍ徐居正、右贊成姜希孟、平陽君朴仲善、禮曹判書李承召從焉。 募承旨金季昌, 齎宣醞往慰。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 3일(신사) 1번째기사
중국사신 정동이 자급이 다된 도감낭청등에게 대가한 것에 불만을 토로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성현(成俔)이 중국사신에게 문안하니,
상사(上使)가 성현에게 말하기를,
“전일에 우리들이 주관(州官), 통사(通事), 도감관원(都監官員)을 승직시키도록 청하여 전하께서 이미 허락하였는데, 어제 도승지가 와서 말하기를, ‘자급이 다한 자는 대가(代加)한다.’하였습니다. 그 아비가 죽고 아들이 승습(承襲)하는 법은 있지마는, 대가하는 법같은 것은 중국조정에서 듣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조정의 법제는 천하의 공통인데, 어찌 본국만 다름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우리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면 마땅히 친히 대궐문에 나아가서 기어코 청을 이룬 뒤에야 그만두겠습니다. 또 내가 강태감과 함께 명을 받고서 왔는데, 내가 한 가지 말을 발하면 반드시 강태감에게 고하여 서로 이간을 시키니, 이것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전일에 청하여 잔치할 때에 내가 인삼(人蔘) 1백근을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허락만 하고 주지 않으시니, 의심컨대 반드시 잊으셨을 것입니다.”하였다. 성현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어찌 잊으셨겠습니까? 장차 주실 것입니다.”하였다.
성현이 이것을 와서 아뢰니, 곧 좌승지(左承旨) 채수(蔡壽)에게 명하여 인삼 2백근을 싸가지고 가서 두 사신에게 주고, 상사에게 말하기를,
“지금 들으니, 대인이 도승지의 말을 가지고 이간시키는 것이라 하는데, 도승지가 임의로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 것을 전한 것입니다. 전일에 대인이 신천(信川)에 있을 때 부사가 진헌한 나머지 물건을 청하기에 내가 이미 허락하였는데, 만일 대인의 말에 따라서 주지 않으면 부사에게 신의를 잃을까 두렵고, 부사의 청에 따라서 주면 대인이 불가하다고 할까 두렵기 때문에, 도승지로 하여금 두 대인에게 말하게 한 것입니다.”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어제 도승지의 말을 듣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두 사신 사이에 드디어 혐의스러운 틈이 이루어졌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전일에 인삼만 청한 것이 아니라 또한 통사등을 승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인삼은 보내고 통사는 승직시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니,
채수가 대답하기를,
“마땅히 전하께 아뢰겠습니다.”하였다.
○辛巳/右副承旨成俔, 問安于天使。 上使語俔曰: “前日俺等, 請州官、通事、都監官員陞職, 殿下旣許之矣。 昨日都承旨來言: ‘資窮者代加。’ 如其父死子襲之, 法則有之, 若代加之法, 中朝所未聞也。 中朝法制, 通于天下, 豈本國而有異乎? 殿下若不從俺等之請, 則當親詣殿門, 期於得請而後已也。 且予與姜太監, 同受命而來, 予發一言, 則必告於姜太監, 使相離間, 是大不可。” 又曰: “前日請宴時, 俺請人蔘百斤, 殿下許而不給, 疑必忘之矣。” 俔答曰: “殿下豈忘之? 行當贈之矣。” 俔以此來啓, 卽命左承旨蔡壽, 齎人蔘二百斤, 贈兩使, 言於上使曰: “今聞大人, 珥承旨之言, 爲離間, 非都承旨擅自言之, 乃傳我所言耳。 前日大人在信川時, 副使請進獻餘物, 予已諾矣, 若從大人之言, 而不贈, 則恐失信於副使, 從副使之請, 而贈之, 則恐大人以爲不可, 故募承旨, 語于兩大人耳。” 上使曰: “昨渼承旨之言, 不勝鬱抑。 兩使之間, 遂成嫌隙, 豈有是理也哉? 予於前日, 非獨請人蔘, 亦請通事等陞職, 人蔘則送之, 獨不陞通事之職何耶?” 壽答曰: “當啓殿下。”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 11일 기축 5번째기사
중국사신 부사 강옥이 죽은 지신사 곽존중 딸의 집에 가다
중국사신인 부사(副使) 강옥(姜玉)이 죽은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 딸의 집에 가니,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싸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강옥은 어렸을 때에 이 집에서 부양되었다.
○副天使姜玉, 往卒知申事郭存中女家, 募承旨金季昌, 齎宣醞往慰之。 玉少時, 養于此家。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 15일 계사 1번째기사
중국 사신이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집에 가다
두 사신이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의 집에 가니, 도승지 김계창(金季昌)으로 하여금 선온(宣醞)을 싸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癸巳/兩使往上黨府院君韓明澮家, 募承旨金季昌, 齎宣醞往慰之。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18일 병신 5번째기사
좌승지 채수를 보내어 중국사신을 더 머무르도록 청하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채수(蔡壽)를 보내어 두 사신을 머무르도록 청하니, 대답하기를,
“10월은 황후(皇后)의 탄신(誕辰)이고, 11월은 황제(皇帝)의 성절(聖節)이니,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또 영봉(迎逢) 군사를 8월 15일에 일제히 강위에 이르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만일 우리들이 지체하면 군량을 지탱하기 어려우니, 머무를 수 없습니다.”하였다
○上遣左承旨蔡壽(諸)〔請〕留兩使。 答曰: “十月, 則皇后誕辰, 十一月, 則皇帝聖節, 固當速還。 且迎逢軍士, 約於八月十五日, 齊到江上, 若俺等遲留, 軍糧難支, 玆不得留也。”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 21일 기해 1번째기사
경복궁에 거둥하여 중국사신을 경회루 아래에 청하여 잔치하다
임금이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두 사신을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청하여 잔치하였다. 두 사신이 전하께 남면(南面)하기를 청하여 친히 어좌를 잡아서 남향하여 베풀고, 청하기를,
“자리에 오르소서. 우리들이 고두하여 행례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부득이하여 따랐다.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등에게 명하여 선물을 주니, 두 사신이 절하고 사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대인이 8월 초6일에 길을 떠난다하니, 청컨대 떠나는 기일을 조금 늦추시오.”하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4개월 동안 머물렀으니, 다시 머무를 수 없습니다.”하였다. 상사가 먼저 술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치통(齒痛)이 있어서 마시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치통에는 술을 마셔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인이 준 곡소산(哭笑散)을 먹고서 치통이 조금 덜한데, 술을 마시면 다시 아플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제게 통증을 멈추는 약이 있으니, 청컨대 다 마시소서.”하니,
임금이 드디어 다 마시었다. 부사가 잔을 올리자 임금이 잔을 드니, 부사가 물러나서 꿇어앉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이런 예가 없었는데, 지금 어째서 이렇게 합니까?”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조정의 예에 황제께 잔을 올리려면 이렇게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예를 어째서 내게 씁니까?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하니,
두 사신이 고두(叩頭)하고 말하기를,
“본국의 소민(小民)으로서 마땅히 이 예를 행하여야 합니다.”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궁각(弓角)에 대한 일은 제가 마땅히 진력하겠으니, 전하께서는 염려마소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년에 한명회(韓明澮)를 보내어 주청하겠습니다.”하니,
상사가 반갑게 농담으로 대답하기를,
“늙은 한재상(韓宰相)이 북경(北京)에 오면 마땅히 제 집에 머물게 하면서 조죽[粟糜]으로 대접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희롱하여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한명회가 반드시 야윌 것이다.”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저희들이 통사의 벼슬을 제수하도록 청하였는데, 왜 허락하지 않으십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유화(張有華)는 장차 마땅히 관직을 제수할 것입니다. 후년(後年)에 대인이 만일 오게되면 알 것입니다.”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청컨대 이때에 관직을 제수하소서. 또 한찬(韓儹)과 본향(本鄕)의 주관(州官)은 왜 관직을 승진시키지 않으십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관(州官)은 이미 제수하였습니다. 다만 한찬은 만일 칙명(勅命)이 있어 들여보낸다면 마땅히 벼슬을 승진시켜 차견(差遣)하겠습니다.”하였다.
두 사신이 두목을 시켜 전습(傳習)한 사람과 더불어 대하여 나팔을 불게 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곧 전습한 자를 불러서 불게 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나팔은 중국의 군악(軍樂)인데, 전하의 시대(時代)를 당하여 비로소 전습하였으니, 반드시 후세에 유전(流傳)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세에 말하기를, ‘아무 해에 아무 대인이 본국에 와서 가르쳤다.’하면, 두 대인의 이름이 또한 만세에 전할 것입니다.”하고,
인하여 두목등에게 궁시(弓矢)를 주니, 두목등이 일시에 고두하여 사은하였다. 잔치가 파하자 두 사신이 나가니, 임금이 연못가까지 가서 전송하였다. 두 사신이 굳이 그만두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己亥/上, 幸景福宮, 請宴兩使於慶會樓下。 兩使, 請殿下南面, 親執御座南向而設, 請: “陞座。 吾等叩頭行禮。” 上不得已從之。 募承旨金季昌等, 贈人情禮物, 兩使拜謝。 上曰: “聞大人, 於八月初六日發程, 請少緩行期。” 兩使曰: “俺等已留四閱月, 不可更留也。” 上使先進酒, 上曰: “齒痛不能飮。” 上使曰: “齒痛宜飮酒。” 上曰: “服大人所惠哭笑散, 齒痛稍歇, 飮酒則恐復痛也。” 上使曰: “我有止痛之藥, 請盡飮。” 上遂盡飮, 副使進爵, 上擧爵, 副使退跪。 上曰: “前無此禮, 今何如此耶?” 上使曰: “朝廷之禮, 進爵於帝, 則如此也。” 上曰: “此禮, 何用於我? 我不敢當。” 兩使叩頭曰: “本國小民, 宜行此禮。” 上使曰: “弓角事, 我當盡力, 願殿下勿慮也。” 上曰: “明年差遣韓明澮奏請之。” 上使欣然戲對曰: “老韓宰相赴京, 則當留我家, 以粟糜供之。” 上戲答曰: “若然則韓明澮必瘦矣。” 上使曰: !俺等請除通事職, 何不許之也?” 上曰: “張有華行當除職。 後年大人若來, 則當知矣。” 上使曰: “請於此時除職。 且韓儧及本鄕州官, 何不陞職耶?” 上曰: “州官, 則已授之矣。 但韓儧若有勅命入送, 則當陞職差遣矣。” 兩使請令頭目, 與傳習人對吹喇叭, 上卽召傳習者吹之。 上使曰: “喇叭, 乃中國軍樂, 當殿下之時, 始得傳習, 必流傳於後世矣。” 上曰: “後世云: ‘某年某大人, 到本國, 敎訓爾,’ 則兩大人之名, 亦傳萬世矣。” 仍賜頭目等弓矢, 頭目等, 一時叩頭謝恩。宴罷, 兩使出,上送至池邊。兩使固請止,從之。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23일(신축) 1번째기사
중국 상사가 요청한 차씨, 안씨, 장치자에게 물건을 보내는 문제를 논의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상사(上使)가 차씨(車氏), 안씨(安氏) 및 장치자(臧梔子)에게 또한 음식물(飮食物)을 보내기를 청하는데, ‘한씨(韓氏)는 족친이니까 오히려 가하지마는, 안씨, 차씨, 장치자는 후궁이니 사사로이 서로 주고받을 수 없다.’이렇게 중국 사신에게 말하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상사에게 말하기를,
“차씨, 안씨, 장치자에게 따로 음식물을 보내는 것은 이미 준비하였었습니다. 그러나 한씨(韓氏)는 회간왕비(懷簡王妃)의 족친이니 오히려 사사로이 물건을 보낼 수 있지마는, 차씨, 안씨, 장치자는 황제의 후궁(後宮)이니 물건을 주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대인이 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대인편에 부치고자 하니, 청컨대 대인의 뜻으로 주도록 하시오.”하였다.
상사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말하기를,
“전하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차씨, 안씨, 장치자가 전하께 드린 물건을 황제가 다 아십니다. 따로 보내는 것이 혐의스럽다고 하신다면 차씨 , 안씨의 족친에게 주어서 전송(轉送)하되, 장치자는 베[布子]로써 회답하여 주어도 괜찮습니다.”하였다.
상사가 홀연히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서 사방을 돌아보고 도로 들어와 탄식하기를,
“강태감(姜太監)의 두목(頭目)이 와서 엿보았습니다.”하였다.
이세좌가 묻기를,
“대인이 말하기를, ‘장치자에게는 베[布子]로 주어도 괜찮다.’하였으니, 그렇다면 이것 역시 족친에게 주어서 전송하겠습니까?”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장치자는 한씨(韓氏)의 시녀(侍女)이니, 후궁에 비교할 것은 아닙니다. 본국에서 주는 물건을 한씨의 소별폭(小別幅)뒤에 붙여 기록하면,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하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전에 준 활 1백장(張)은 활시위[弦]를 매어서 싸가고자 하니, 전하께 아뢰어 활시위를 보내 주시오.”하였다.
이세좌가 하직하고 나오니, 상사가 말하기를,
“부사가 반드시 승지(承旨)와 내가 이야기한 일을 의심할 것이니, 꼭 부사를 보고 가시오.”하였다.
이세좌가 부사를 만나보고 말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정태감의 지휘에 따라서 하시오.”하였다.
○辛丑/傳于承政院曰: “上使請車氏、安氏及臧梔子處, 亦送食物。 韓氏則族親, 猶之可也, 若安氏、車氏、臧梔子, 則乃後宮, 不可私相贈遺。 以此語于天使如何?” 僉曰: “然。” 命左副承旨李世佐語上使曰: 車氏、安氏及臧梔子處, 別送食物, 已備之矣。 然韓氏, 則懷簡王妃族親猶可, 私送車氏、安氏及臧梔子, 則皇帝後宮, 贈遺爲難。 若大人以爲不可不贈, 則欲付大人, 請以大人之意贈之。” 上使默然良久曰: “殿下之言正是。 然車氏、安氏、臧梔子所進于殿下之物, 皇帝皆知之。 命以別送爲嫌, 則付于車氏、安氏族親轉送之。 臧〈梔〉子, 則以布子答賜可也。” 上使忽起出房外, 四顧還入, 嘆曰: “姜太監頭目來窺矣。” 世佐問曰: “大人言: ‘臧梔子處, 可贈以布子。’ 然則此亦付於族親轉送之耶?” 上使曰: “臧梔子, 韓氏侍女, 非後宮之比。 本國贈遺物件, 付錄韓氏小別幅之後, 則有何害焉?” 仍曰: “前賜弓一百張, 欲上弦齎去, 須啓殿下送弦。” 世佐辭出, 上使曰: “副使必疑承旨與我所言之事, 須見副使而去。” 世佐謁副使言之, 副使曰: “此則從鄭太監指揮爲之。”
성종 119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7월25일 계묘 1번째기사
중국사신이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집에 가다
두 사신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집에 가니,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에게 명하여 선온을 싸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한씨의 족친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 청평군(淸平君) 한계순(韓繼純), 병조판서(兵曹判書) 유지(柳輊), 참판(參判) 윤호(尹壕), 판결사(判決事) 한한(韓僴)이 참여하였다. 두 사신이 각각 한명회에게 사(紗) 2필을 주니, 한명회는 두 사신에게 각각 흑마포(黑麻布) 6필, 입모(笠帽) 20, 선자(扇子) 30을 주고, 두목 42인에게는 각각 입모 2, 선자 3을 주었다.
○癸卯/兩使往上黨府院君韓明澮家, 募承旨金季昌, 齎宣醞往慰。 韓氏族親平陽君朴仲善、淸平君韓繼純、兵曹判書柳輊、參判尹壕、判決事韓僴與焉。 兩使各贈韓明澮紗二匹, 明澮贈兩使, 各黑麻布六匹、笠帽二十、扇子三十, 頭目四十二人, 各笠帽二、扇子三。
성종 120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8월 2일 기유 1번째기사
중국 두 사신이 정거의 집에 가다
두 사신이 정거(鄭擧)의 집에 가니,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싸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己酉/兩使往鄭擧家, 募承旨金季昌, 齎宣醞往慰之。
성종 120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 16년) 8월 4일 신해 1번째기사
중국 두 사신에게 경회루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다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두 사신에게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잔치하였다. 두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배사(拜辭)하고자 하니, 청컨대 전하께서는 남면(南面)하여 예를 받으소서.”하니,
임금이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선물로 두 사신에게 각각 백저포(白苧布) 10필, 흑마포(黑麻布) 10필, 호피(狐皮) 40장, 6폭짜리 유둔(油芚) 2장, 2폭짜리 유둔 2장, 작설차[雀舌茶] 2두(斗), 표피(豹皮) 2장을 주니, 두 사신이 고두(叩頭)하여 사례하였다.
부사(副使)가 친히 꽃을 잡고 임금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중국 조정의 예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의 예를 내가 어찌 당하겠습니까?”하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교할 것이 아니어서, 천하 제이(第二)의 나라입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 예를 받아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상사(上使)가 고두(叩頭)하고 먼저 쌍배(雙杯)를 올리니, 임금이 쌍배를 회사(回賜)하였다. 부사가 잔을 올리니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임금이 장차 술을 돌리려고 하자,
상사가 꿇어앉아서 고두하며 말하기를,
“청컨대 자리에 올라 술을 주소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까?”하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들은 돌아가겠습니다.”하자,
임금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따랐다. 상사가 말하기를,
“시위(侍衛)하는 환관(宦官)이 어찌 적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수가 본래 적습니다.”하였다.
상사가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에 일찍이 금내(禁內)에 출입하였었는데, 그 수가 많은 것으로 알았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천하 여러 나라에서 보낸 태감(太監)으로 대인같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천하 13포정사(布政司)10690)에서 보내는 사람을 어떻게 그 수를 다 알겠습니까?”하였다.
조금 뒤에 상사가 바로 나가고 부사가 잔을 올려 예를 이루고서 파하였다.
註10690]포정사(布政司): 명나라 관서의 명칭
○辛亥/幸景福宮, 宴兩使於慶會樓下。 兩使曰: “吾等欲拜辭, 請殿下南面受禮。” 上固讓, 不得已從之。 因贈人情物件, 兩使處, 各白苧布十匹、黑麻布十匹、狐皮四十張、六幅付油芚二張、二幅付油芚二張、雀舌茶二斗、豹皮二張, 兩使叩頭而謝。 副使親執花, 進上前曰: “此是朝廷之禮。” 上曰: “朝廷之禮, 我何當之?” 兩使曰: “我國非他國之比, 乃天下第二國也。 殿下宜受此禮。” 上從之。 上使叩頭, 先進雙杯, 上回賜雙杯。 副使進爵, 亦如之。 上, 將行酒, 上使跪叩頭曰: “請陞座賜酒。” 上曰: “何以在坐。” 兩使曰: “然則我等當還去。” 上, 不得已從之。 上使曰: “侍衛宦官何寡耶?” 上曰: “其數本少矣。” 上使曰: “吾少時, 嘗出入禁內, 曾知其數之多也。” 上曰: “天下諸國, 所進太監如大人者有幾?” 上使曰: “天下十三布政司所進之人, 何以盡知其數乎?” 已而, 上使徑出, 副使進爵, 禮成而罷。
성종 128권, 12년(1481 신축/명성화(成化) 17년) 4월19일(계해) 6번째기사
주문사서장관 권건의 문견 사건
주문사서장관(奏聞使書狀官) 권건(權健)이 중국에서 보고들은 사건을 바치길,
“1. 신등이 옥하관(玉河館)에 이르자, 정동(鄭同)이 즉시 금내(禁內)에서부터 말을 달려 이르러 먼저 전하(殿下)의 안부를 묻고, 다음에 특별히 진헌(進獻)할 물건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사신이 대답하기를, ‘없다.’고 하니, 정동이 발끈 성을 내어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전에 본국(本國)에 이르러 전하와 재상과 직접 약속하였는데, 어찌하여 응낙(應諾)한 약속을 저버리는가?’고 하였습니다.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대인(大人)이 돌아가고 성절사(聖節使) 한한(韓僴)이 갈 때에 토산(土産)으로 요구하는 물건을 모두 성지(聖旨)에 의하여 준비하여 바쳤으므로, 다시 다른 물건을 바칠 것이 없다. 또 황제의 성감(聖鑑)께서 어떻게 여기실지 알지 못하겠기에 감히 그리 하지 못한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비록 다른 물건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시 바치는데 무엇이 해롭겠는가? 대저 인자(人子)가 그 어버이에게 효도할 때 스스로 마땅히 그 마음을 다할 뿐이지, 어찌 그 어버이가 좋아할는지 싫어할는지를 묻겠는가? 황제가 본국(本國)에서 진헌(進獻)하는 바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물건을 중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곧 본국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본국에서 황제를 섬기는 것은 황제가 본국을 대접하는 뜻과는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전하의 허물이 아니라, 반드시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재상들의 논의가 자자(藉藉)하여 아마 이것을 가지고 선례(先例)를 만들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본국에서 지난해에는 매양 해청(海靑)을 바치고, 표리(表裏) 1벌을 하사(下賜)하면 또 즉시 사은(謝恩)하였으니, 그 노력과 비용을 따져볼 때 지금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지금 본국에서 황제를 섬기는 예(禮)가 이와 같으니 얼마나 박(薄)한가? 사신온 일을 장차 무슨 면목(面目)으로 황제에게 주달(奏達)하겠는가?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나에게 관계없으나, 두 노재상(老宰相)이 험한 길에 멀리 왔는데, 어찌 일을 이루어서 돌아가고자 아니하겠는가?’고 하므로, 사신이 말하기를, ‘이미 잘못 생각하였으니, 이를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만약 허락을 받고 돌아간다면, 마땅히 사은(謝恩)하는 예(禮)가 있을 것이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이를 주달(奏達)하기를, 「조선(朝鮮)의 사신이 동팔참(東八站)에 여진(女眞)의 성식(聲息)11128)이 있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물건을 창탈(搶奪)당할까봐 두려워해서, 그 짐바리[駄]에 실었던 물건을 간추렸기 때문에 특별히 진헌(進獻)하는 물건을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한다면, 황제도 반드시 이를 믿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사신이 말하기를, ‘이러한 말은 매우 좋다. 우리들이 사신온 일은 비단 고명(誥命)과 각궁(角弓) 문제뿐만 아니라, 동팔참(東八站) 하나의 길이 적경(賊境)과 매우 가까워서 여러 번 길이 막히고 저지를 당하여 중국에 조공(朝貢)하는 것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신로(新路)를 열도록 청하려는 것이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그 이남에 과연 다른 길이 있다. 그러나 중국 조정에서 새 진(鎭)을 봉황산(鳳凰山)에 세우기로 의논하였으니, 신로(新路)의 청은 그다지 긴요(緊要)치 않다. 그러나 세자(世子)를 책봉(冊封)하기를 청하는 일은 큰 문제인데, 어찌하여 늦추는가?’고 하므로, 사신이 말하기를, ‘지금 왕비(王妃)의 고명(誥命)을 청하기 때문에 겸하여 청할 수는 없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북경(北京)에 왔을 때 나로 하여금 사사로이 진헌(進獻)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차 어떻게 할까?’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지금 폐지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구례(舊例)에 의해야 한다. 그 진헌할 물목(物目)을 써서오라.’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즉시 물목을 써서 보여주니, 정동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얼굴을 부드럽게 해서 말하기를, ‘그 숫자를 정해서 오라. 부족한 것은 장차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충당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황제에게 바친 물목은 백저포(白苧布) 10필(匹), 흑마포(黑麻布) 15필, 인삼(人蔘), 세죽선(細竹扇), 소죽선(小竹扇), 우롱자(雨籠子), 도자(刀子), 백후지(白厚紙), 필묵(筆墨)과 여러 가지 음식물(飮食物) 등이었는데, 정동이 백저포 10필, 흑마포 35필을 더하도록 하고, 또 스스로 녹면포(綠綿布) 10필, 수록면포(水綠綿布) 15필, 녹면주(綠綿紬) 10필을 추가하였습니다. 그 한씨(韓氏)에게 진헌(進獻)할 물목(物目)은 백저포(白苧布) 5필, 흑마포(黑麻布) 15필, 인삼(人蔘), 세죽선(細竹扇), 소죽선(小竹扇), 우롱자(雨籠子), 백후지(白厚紙), 필묵(筆墨)과 여러 가지 음식물이었는데, 정동 이 또 백저포 5필, 흑마포 10필을 더하도록 하고, 또 스스로 수록면포(水綠綿布) 4필을 추가하였습니다. 예궐(詣闕)하여 숙배(肅拜)할 때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진헌(進獻)할 물건을 가지고 동화문(東華門)으로 가서 올려 바쳤는데, 정동이 안에서부터 나와 이르기를, ‘황제가 진헌(進獻)한 물건을 보시고 자못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고, 정동이 또 사신에게 이르기를, ‘성지(聖旨)로써 재상에게 사사로이 묻기를, 「왕비(王妃)가 이미 아들을 낳았는데, 무슨 과실(過失)이 있어서 이를 폐(廢)하는가?」고 하셨다.’고 하므로, 사신이 대답하기를, ‘폐비(廢妃)가 덕(德)을 잃은 짓이 자못 많아서 부득이 이를 폐하는 것이다.’고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들어가서 아뢰겠다.’고 하고,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뒤에 도로 나와서 말하기를, ‘이미 아뢰었다.’고 하였습니다. 정동이 또 말하기를, ‘황제가 궁각(弓角)의 일을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궁각(弓角)은 본국(本國)의 토산(土産)이 아니기 때문에 이 앞서는 숫자의 다소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그 수매(收買)를 맡겼는데, 근래에 단지 매년 한 차례 수매(收買)를 허락하여 50부(副)를 넘지 못하니, 용도에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다시 주청(奏請)하는 것이다」고 하였다.’하였습니다. 사신 하나가 한씨(韓氏) 앞에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조카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한명회(韓明澮)는 삼가 고모님 존전(尊前)에 배상(拜上)합니다. 조카는 지금 가슴에 품은 생각이 있어 좌우(左右)에 앙달(仰達)하여, 엎드려 부주(敷奏)하기를 희망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성격이 패려(悖戾)하여 왕조모(王祖母)와 왕모(王母)에게 불순(不順)하고, 덕(德)을 잃는 짓이 상당히 많아 종사(宗社)를 능히 잘 받들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조모님과 어머님의 말씀을 받들어 종묘(宗廟), 사직(社稷)에 고(告)하고 궁 밖의 사제(私第)에 폐(廢)하여 두었습니다. 돌아보건대 내조(內助)는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으므로,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왕비(王妃)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진주(陳奏)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러한 사유(事由)를 갖추어 어전(御前)에 곡진히 주달(奏達)하여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특별히 하사(下賜)하게 해 주소서. 지극한 소원(所願)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본국이 3면으로 적의 침입을 받는데, 근일에는 두 번이나 본국(本國)에 조칙(詔勅)하여 야인(野人)들을 협공(挾攻)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흔단(釁端)이 생긴 것이 적지 않으므로 군사 방비(防備)를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활의 재료로 필요한 수우각(水牛角)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바가 아니므로 오로지 중국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건의(建議)하는 자가 「본국인(本國人)이 궁각(弓角)을 수매(收買)하여 야인(野人)들에게 전매(轉賣)한다」고 하였던 탓으로 인하여 비로소 금방(禁防)의 법을 세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야인(野人) 들과 흔단(釁端)이 생긴 지는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어찌 감히 활의 재료를 판매하여 적인(敵人)을 돕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중국 조정을 공경하고 섬겨서 은혜를 깊이 입었고, 여러 차례 서적(書籍), 악기(樂器)를 하사하였습니다. 또 화약(火藥)은 병가(兵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바인데도 홍무(洪武) 7년 동안에 고황제(高皇帝)가 이를 의심없이 하사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폐하(陛下)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곡진히 은총을 베풀어서, 무릇 주달(奏達)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윤허(允許)를 내려주었는데, 오로지 궁각(弓角) 문제만은 금지를 하시니, 온 나라 신민들이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성화(成化) 13년11129)에 사유를 갖추어 진청(陳請)하여 성은(聖恩)을 받게되어, 매년에 한 차례씩 50부(副)를 수매(收買)하도록 허락하시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지극한 감격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궁장(弓張)11130)의 제조를 비록 많이 하지만 용도를 감당할 재료는 아주 적으며, 겸하여 또 쉽게 꺾어지거나 훼손(毁損)되는 지경에 이르니, 가지고 있는 50부(副)로서는 용도에 넉넉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아울러 이 뜻을 가지고 어전(御前)에 곡진히 진달(陳達)하여 특별히 허락해 주시고, 지난 해의 사례(事例)를 참작하여 매양 본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가지고 오는 값이나 돈의 다소에 따라서 숫자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수매(收買)하게 해 주소서.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1. 2월 24일에 태감(太監) 강옥(姜玉)이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러 사신의 방(房)에 나와서 소합유(蘇合油) 1근(斤), 용뇌(龍腦) 1근을 특별히 주었는데, 모두 어봉인제(御封印題)11131)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내가 황제에게 아뢰기를, 「본국에서 소합유(蘇合油)와 용뇌(龍腦)등의 약을 구하고자 하는데, 이를 구하여도 그 진짜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재상이 신에게 부탁하여 간절히 이를 구하고 있습니다.」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마땅히 이를 주도록 하라.」고 하고, 인하여 내탕(內帑)에 간직한 것을 내주면서 말하기를, 「한명회(韓明澮)에게 주도록 하라. 이어서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머리를 조아리고 배사(拜謝)하니, 강옥이 인하여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서 대접하였습니다. 마포(麻布) 10필과 선자(扇子)와 우롱(雨籠)등의 물건을 회증(回贈)하였더니, 강옥이 말하기를, ‘내가 감히 사사로이 받을 수는 없고, 장차 황제에게 바치겠다.’고 하였습니다. 강옥이 가지고 온 술그릇에는 모두 어제시제(御製詩題)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은병(銀甁)의 시(詩)에 이르기를,
‘밝은 시대에 석덕(碩德)을 등용하니
보불(黼黻)11132)이 황제의 모유(謀猷)11133)를 돕네.
금달(禁闥)에는 한가한 겨를이 많아
황류(黃流)11134) 를 옥구(玉甌)11135)에 따르노라’하고,
또 한 면의 글제에 이르기를,
‘내금(內禁)의 은총(恩寵)이 높아
은근히 그 공(功)을 협주(協奏)하네.
금준(金樽)11136)으로 아객(雅客)11137)을 맞이하니,
힘써서 단충(丹衷)11138)을 다하리.’하고,
또 ‘잔대(盞臺)로 뜰에 향기가 가득하다[盞臺滿庭芳]’라는 글제의 사(詞)에 이르기를,
‘경사스런 기운이 널리 펴지니,
어진 사람과 뛰어난 인물일세.
더구나 사해(四海)에서 오는 손님을 맞으니,
이름난 집안 어진 선비는 타고난 자질일러라.
빛나는 도학(道學)으로
경사(經史)11139)를 궁구(窮究)하여 정통하네.
정체(政體)를 논하면 이전(二典)11140) 삼분(三墳)11141)이요
은총(恩寵)으로 발탁하니 항상 황제의 궁전을 모시네.
아름다운 모유(謨猷)를 내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니,
방현령(房玄齡)11142), 두여회(杜如晦)11143)와 동류(同流)인가 하노라’하고, 또 말하기를,
‘심상하게 직업(職業)을 닦아도
그 단충(丹衷) 해를 꿰뚫네.
계옥(啓沃)11144)하기에 부지런히 힘써
존심(存心)으로 아울러 자기를 다스리도다.
오로지 날로 새로워지기를 힘써서
어려서는 배우고,
어른이 되어서는 실천함이
의(義)와 예(禮)가 아님이 없도다.
옛날에 도견(陶甄)11145)함이 지극히 공정하여
치도(治道)를 미륜(彌綸)11146)하니,
사책(史策)에 훌륭한 신하들이 나타나 있네.’하고,
또 잔면(盞面)에 글제하기를,
‘이 시대에 태평(太平) 세월을 이루니
은택(恩澤)이 창생(蒼生)을 보호하네.
조섭(調燮)하는 일은 원로(元老)에게 돌아가고
공훈(功勳)의 이름은 백세(百世)토록 영광일세.’하고,
또 이르기를,
‘세상이 태평스러운 날을 만나니
사람들은 부귀(富貴)한 때를 만났도다.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정취(情趣)를 즐기고
시(詩)와 술에 기분 좋게 취하기를 즐기노라.’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註11128]성식(聲息): 군사를 일으킨 소식.註11129]성화(成化) 13년: 1477 성종 8년.註11130]궁장(弓張): 활.註11131]어봉인제(御封印題): 황제(皇帝)가 사용하는 약이나 물건을 봉(封)하여 싸고 인장(印章)을 찍고 제목을 쓴 것. 註11132]보불(黼黻): 무늬의 하나. 곧 임금을 잘 도와주는 문무 신하.註11133]모유(謀猷): 계책 註11134]황류(黃流): 술의 이명.註11135]옥구(玉甌) : 술 그릇 註11136]금준(金樽): 금으로 만든 술항아리.註11137]아객(雅客): 손님을 존칭하는 말.註11138]단충(丹衷): 충성된 마음.註11139]경사(經史): 경전(經典)과 역사(歷史).註11140]이전(二典): 《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註11141]삼분(三墳):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의 서(書). 註11142] 방현령(房玄齡): 당(唐)태종(太宗) 때 명신 註11143]두여회(杜如晦): 당태종 때 명신.註11144]계옥(啓沃): 임금에게 충언(忠言)을 드림.註 11145]도견(陶甄): 도인(陶人)이 흙으로 와기(瓦器)를 만들듯이 성왕(聖王)이 천하(天下)를 잘 다스림을 비유한 것임.註11146]미륜(彌綸): 천지(天地)의 도(道)를 인용하여 인도(人道)에 알맞게 보합(補合)함을 이름.
○奏聞使書狀官權健, 進聞見事件: “一, 臣等到玉河館, 鄭同, 卽自禁內馳到, 先問殿下安否, 次問別獻之物幾何。 使答曰: ‘無。’ 同, 艴然變色曰: ‘我前到本國, 與殿下及宰相面約, 何負諾耶?’ 答曰: ‘頃者大人之還, 及聖節使韓僴之行, 土産耍子之物, 俱依聖旨備獻, 更無異物。 且未知聖鑑何如, 未敢爾。’ 同曰: ‘雖無他物, 何妨再獻乎? 大抵人子之孝其親, 自當盡心焉耳, 安問其親之喜不喜乎? 帝之重本國所獻, 非重其物也, 乃所以重本國也。 本國之事帝, 殊異乎帝之待本國之意。 然此非殿下之過也, 必議政府諸相, 論議藉藉, 恐以此成例耳。 本國於先年, 每進海靑, 賜一表裏, 又卽謝恩, 較其勞費, 與今相去幾何? 今者本國事帝之禮, 如此其薄, 爲來事, 將何面目, 奏於帝乎? 事之成否, 不干於我, 兩老宰相, 間關遠來, 豈不欲成事而歸乎?’ 使曰: ‘業已錯料, 悔之無及。 今若蒙準而還, 當有謝恩矣。’ 同曰: ‘然則我當奏之曰: 「朝鮮之使, 緣東八站有聲息, 恐被搶擄, 簡其駄載, 故別獻之物, 不得齎來。」 云則帝必信之。’ 使曰: ‘此言甚佳。 俺等爲來事, 非徒誥命、角弓也, 東八站一路, 與賊境甚近, 屢被邀截, 有礙朝貢, 故欲請開新路。’ 同曰: ‘迤南果有他路。 然朝廷議建新鎭于鳳凰山, 新路之請, 不甚緊要。 但請封世子, 事之大者, 何緩也?’ 使曰: ‘今請王妃誥命, 故不可兼請爾。’ 同曰: ‘然。’ 使曰: “昔年赴京時, 令我私獻, 今將若何?’ 同曰: ‘今不可廢也, 當依舊例。 其書所獻物目來。’ 使卽書物目示之, 同怒稍弛, 和顔以言曰: ‘定其數以來。 不足者, 將以吾所有充之。’ 其獻帝所物目, 白苧布十匹、黑麻(希)〔布〕十五匹、人蔘、細竹扇、小竹扇、雨籠子、刀子、白厚紙、筆墨、諸色食物等件。 同令加白苧布十匹、黑麻布三十五匹, 又自以綠綿布十匹、水綠緜布十五匹、綠綿紬十匹加焉。 其進韓氏處物目, 白苧布五匹、黑麻布十五匹、人蔘、細竹扇、小竹扇、雨籠子、白厚紙、筆墨、諸色食物。 同又令加白苧布五匹、黑麻布十匹, 又自以水綠緜布四匹加焉。 詣闕肅拜, 使、副使齎獻物, 詣東華門上進, 同自內而來謂曰: ‘帝見獻物, 頗有喜色。’ 同又謂使曰: ‘聖旨私問宰相曰: 「王妃旣生子, 有何過失, 而廢之乎?’ 使答曰: ‘廢妃失德頗多, 不得已廢之。’ 同曰: ‘我當入奏。’ 卽入內, 少間還出曰: ‘已奏矣。’ 同又言曰: ‘帝問弓角事, 我對曰: 「弓角, 非本國土産, 故前此不拘多少, 任其收買, 近來只許每年一次收買, 不過五十副, 不裕於用, 故今復奏請耳。」’ 一, 使於韓氏前呈書契, 其辭曰: ‘姪男議政府左議政韓明澮, 謹拜上姑孃尊前。 姪男今有所懷, 仰達左右, 伏希敷奏。 竊惟廢妃尹氏, 性度違戾, 不順于王祖母及王母, 失德滋多, 不克共承宗祀。 殿下承祖母及母之敎, 告于宗廟、社稷, 廢置外第。 顧惟內助不可久缺, 以副室尹氏爲妃。 是用陳奏, 伏望具此事由, 曲達御前, 特賜誥命、冠服, 不勝至願。 且念本國三面受敵, 近日再勅本國, 夾攻野人。 因此構釁不淺, 兵備不可疎虞。 而弓材所需水牛角, 非本國所産, 專仰上國。 頃緣建議者以爲: 「本國人收買弓角, 轉賣野人」始立禁防。 我國與野人, 構釁旣久, 何敢販賣弓材, 以資敵人? 我國自祖宗朝以來, 敬事朝廷, 深蒙恩眷, 累賜書籍、樂器。 且火藥, 兵家所最重, 而洪武七年間, 高皇帝賜之不疑。 欽惟我陛下臨御以來, 曲施恩寵, 凡有所奏, 必賜允許, 而獨於弓角有禁, 一國臣民咸悶焉。 於成化十三年, 具由陳請, 獲蒙聖恩, 許於每歲一次, 收買五十副, 一國臣民, 不勝感激之至。 然弓張製造雖多, 堪用者鮮少, 兼又易致折毁, 所有五十副, 不裕於用。 伏望幷將此意, 曲達御前, 特許照依先年事例, 每於本國使臣之來, 隨所齎價錢多少, 不拘數收買, 不勝至願。’ 一, 二月二十四日, 太監姜玉, 到館就使房內, 付蘇合油一斤、龍腦一斤, 皆用御封印題。 謂曰: ‘我奏于帝曰: 「本國欲覓蘇合油、龍腦等藥求之, 未得其眞。 今來宰相, 依臣懇求。」 帝曰: 「當與之。」 因出內帑所藏曰: 「可付韓明澮。 仍宴慰之。」 我爲此而來。’ 使叩頭拜謝, 玉因盛設酒飯以饋。 回贈麻布十匹、扇子、雨籠等物, 玉曰: ‘我不敢私, 將獻于帝。’ 玉所齎酒器, 皆刻御製詩。 題銀甁詩曰: ‘明時需碩德, 黼黻贊皇猷。 禁闥多淸暇, 黃流注玉甌。’ 又題一面曰: ‘內禁恩寵隆, 慇懃協奏功。 金樽迎雅況, 黽勉盡丹衷。’ 又題 ‘盞臺滿庭芳。’ 詞曰: ‘景運誕敷, 賢才傑出。 況逢四海來賓, 名家賢士稟賦質。 彬彬道學, 窮通經史。 論政體二典三墳, 恩寵擢常侍楓宸。 展嘉猷代天理物, 房、杜擬同倫。’ 又曰: ‘尋常修職業, 丹衷貫日。 啓沃效勤, 存心幷治己。 惟務日新, 幼而學, 壯而行, 莫非義禮。昔陶甄至公,彌綸治道,史策著良臣。’ 又題盞面曰:‘維時致太平,恩澤庇蒼生。調燮歸元老,勳名百世榮。’又曰:‘世際雍熙日,人逢富貴年。公餘有淸趣,詩酒樂陶然。’”
성종 129권, 12년(1481 신축/명성화(成化) 17년) 5월 3일(정축) 1번째기사
좌부승지 이세좌에게 중국 사신의 동정을 묻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세좌(李世佐)에게 이르기를,
“두 중국 사신이 서로 사이가 어떠하더냐?”하니,
이세좌가 대답하기를,
“두 사신이 지극히 친후(親厚)하였습니다. 정동(鄭同)이 김흥(金興)을 대우하는 것이 강옥(姜玉)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연향(宴享)할 때에도 김흥이 사람을 시켜서 정동의 아랫사람들에게 그가 무슨 옷을 입고 무슨 띠[帶]를 매는지를 물어보고 반드시 그 빛깔에 따라서 착용(着用)하였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도 또한 반드시 서로 대우하여 일시에 말을 탔습니다. 지난해에는 이와는 달랐으니, 오로지 서로 돕지 아니하고 다투어 먼저 길을 떠나 거의 1식(息)11165) 거리로 갔습니다. 지금 이것으로 헤아려 보건대, 두 중국 사신이 화해하여 친후(親厚)합니다. 또 정동이 소동(小童) 한 사람을 데려왔는데, 연향(宴享)할 때에는 잡희(雜戲)를 물리치고 아기(兒妓)11166)들과 더불어 호무(胡舞)를 추게 하려고 하였으므로, 신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향토 풍속으로는 폐지할 수가 없다. 잡희를 정재(呈才)한 뒤에 추더라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이다.’하고, 굳이 청한 다음에야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음악을 연주하여 기생에게 정재(呈才)하게 하고 술이 반쯤 취하자,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아기(兒妓) 6인을 거느리고 일어나 춤을 추게 하였는데, 힘을 겨루다가 6인의 기생을 다 넘어뜨리니, 두 사신이 손바닥을 치면서 크게 웃었습니다. 또 정동이 처음에 신을 보고서 기뻐하는 기색을 띠면서 신에게 묻기를, ‘전하께서도 우리를 보면 기뻐하시는 기색이 있으실까?’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대인(大人)이 지난해에도 사신으로 나왔고, 지금 또 황제의 큰 명령을 받들고 왔으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감동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는데, 전하의 기뻐하심이야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정동이 또 묻기를, ‘지금 누가 도승지(都承旨)인가?’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김승경(金升卿)이라.’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겠지. 또 지난해의 승지(承旨) 몇 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는가? 채수(蔡壽), 변수(邊脩)는 지금 무슨 벼슬을 하는가?’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어떤이는 부모의 상(喪)을 당하였고, 어떤이는 다른 관직에 바뀌어 임명되었고, 오직 이길보(李吉甫)와 내가 그대로 있을 뿐이다.’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채수, 변수는 서로 만나보기가 어렵겠구나.’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반드시 빨리 돌아갈 것이 없이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한가?’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대인(大人)이 추위나 더위에 어떠한지 안부를 전하께서 항상 듣고 계시는데, 원접사(遠接使)가 비록 자주자주 치계(馳啓)하지만, 어찌 친히 만나본 자와 같겠는가? 지금 만약 빨리 돌아가서 상세히 아뢴다면, 전하께서 안심하실 수가 있을 것이다.’하니, 정동이 미소를 지면서 말하기를, ‘과연 그렇겠다.’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김흥(金興)이 술에 취하였다고 하는데, 그러한가?”하니,
이세좌가 말하기를,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전일에 사신으로 나왔을 때에 왕왕 술에 취하면 데리고 온 두목(頭目)들에게 성을 내었을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기력(氣力)이 어떠하더냐?”하니,
이세좌가 말하기를,
“나이 70여 세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노상(路上)에서 말을 타고 피로한 기색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활을 쏘는 것을 구경하기를 좋아하여 정주(定州)에 이르자, 또한 주관(州官)을 시켜 활을 쏘게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말을 타고 오느냐?”하니,
이세좌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註11165]1식(息): 30리.註11166]아기(兒妓): 어린 기생
○丁丑/御經筵。 講訖, 上謂左副承旨李世佐曰: “兩天使相與之間何如?” 世佐對曰: “兩使極爲親厚。 鄭同之待金興, 其與姜玉異矣。 宴享時, 金興, 使人於鄭同下處, 問其着何衣何帶, 必從其色而着之。 發程時, 亦必相待, 一時乘馬。 前年則異於是, 專不相須, 爭先起程, 幾距一息而行。 以今揆之, 兩天使和厚矣。 且鄭同, 率一小童而來, 宴享時, 欲却雜戲, 令與兒妓胡舞, 臣謂之曰: ‘我國土風, 不可廢也。 呈雜戲後舞, 猶未晩也。’ 强請而後諾之。 令奏樂呈(枝)〔妓〕, 酒半, 令小童, 率兒妓六人起舞, 較力而盡仆六妓, 兩使打掌大笑。 且鄭同, 初見臣有喜色, 問於臣曰: ‘殿下見我, 則有喜色乎?’ 臣答曰: ‘大人前年出來, 今又受皇帝景命而來, 一國臣民 莫不感動, 殿下之喜, 其可量哉?’ 同又問曰: ‘今孰爲都承旨?’ 臣對曰: ‘金升卿也。’ 同曰: ‘入京則可見矣。 且前年承旨, 幾人仍在?’ 蔡壽、邊脩, 今爲何官?’ 臣對曰: ‘或丁憂, 或遞差, 唯李吉甫及我在焉。’ 同曰: ‘蔡壽、邊脩, 則相見爲難矣。’ 且謂臣曰: ‘爾不必速歸, 偕往若何?’ 臣對曰: ‘大人寒暄, 殿下常常聞之, 遠接使雖數數馳啓, 豈如親見之者乎? 今若速還詳啓, 則殿下可以安心矣。’同微笑曰: ‘果然矣。’” 上曰: “聞金興, 使酒然乎?” 世佐曰: “臣則未聞。 但有人云: ‘前日出來時, 往往酒酣, 則發怒於率來頭目而已。” 上又問曰: “氣力何如?” 世佐曰: “年踰七十餘矣, 然於路上騎馬, 未見其勞憊也。 且好觀射, 到定州, 亦令州官射矣。” 上曰: “皆騎馬來乎?” 世佐曰: “然。”
성종 129권, 12년(1481 신축/명성화(成化) 17년) 5월 9일(계미) 1번째기사
황제의 하사품에 대한 사은에 대하여 논의하다
명하여 정승(政丞)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사은사(謝恩使), 부사(副使)를 불러서 황제가 하사(下賜)한 용뇌(龍腦), 소합유(蘇合油)를 사은(謝恩)해야 할는지의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소합유, 용뇌는 모두 본국(本國)에 없는 물건인데, 강옥(姜玉)이 황제에게 주달(奏達)하여 이를 하사한 것이니, 모두 황제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지금 황제에게서 하사하는 물건을 받고서 강옥에게 사사로이 사례(謝禮)하는 것은 미안(未安)한 것 같습니다. 전자에 한명회(韓明澮)가 황제의 하사하는 물건을 받은 뒤에 마포(麻布) 10필(匹)을 가지고 회봉(回奉)하여 강옥에게 이미 그 은혜를 갚았으니, 지금 비록 보내지 않더라도 예(禮)에는 무관(無關)할 것입니다.”하고,
윤필상(尹弼商), 이극배(李克培),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용뇌, 소합유는 60필(匹)을 회봉(回奉)하되, 지금 가는데 가지고 가서 강옥 에게 사례한다고 일컫고 급부(給付)하면, 그가 반드시 사례하는 뜻을 전(轉)하여 주달(奏達)할 것입니다.”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용뇌등은 약(藥)인데, 한명회가 즉시 강옥에게 포자(布子) 10필(匹)을 회봉하였으니, 황제가 이미 수령(受領)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반드시 다시 포자(布子)를 보내어 사례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강옥에게 준다면, 포자 10필을 지금 가는 사은사(謝恩使)편에 부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윤필상(尹弼商)등의 의논을 따랐다.
○癸未/命召政丞及領中樞、領敦寧、謝恩使、副使, 議欽賜龍腦、蘇合油謝恩可否。 鄭昌孫 、 沈澮 議: “蘇合油、龍腦, 皆本國所無之物, 姜玉 奏達于帝, 而賜之, 皆皇帝特恩也。 今受賜于帝, 私謝 姜玉 , 似爲未安。 前者 韓明澮 受賜後, 以麻布十匹回奉, 已酬其恩於 姜玉 , 今雖不送, 於禮無闕。” 尹弼商 、 李克培 、 尹壕 議: “龍腦、蘇合油回奉六十匹, 今行齎去, 姜玉 處, 稱謝給付, 彼必轉奏謝意矣。” 洪應 議: “龍腦等藥, 明 澮 卽於 姜玉 處, 以布子十匹回奉, 皇帝已領。 今不必更送布子致謝。 若不得已給 姜玉 , 則以布十匹, 就付今謝恩使何如?” 從 弼商 等議。
성종 136권, 12년(1481 신축/명성화(成化) 17년) 12월22일(임술) 2번째기사
선정전에서 한치형을 인견하고 중국의 사정을 묻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한치형(韓致亨)을 인견(引見)하고 중국조정의 사정을 물으니, 한치형이 대답하기를,
“정동(鄭同)은 9월 25일에 중국 경사(京師)에 들어갔고, 신(臣)은 26일에 중국 경사에 도착했습니다. 어떤 교위(校尉)가 와서 말하기를, ‘황제(皇帝)께서 지난번에 나로 하여금 재상(宰相)11820)이 오는가를 보게했는데, 그 때 재상이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황제께서 또 나로 하여금 와보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마치 속히 진헌(進獻)하라고 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진헌할 물건을 가지고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갔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동이 돌아갈 때에 상당히 노여워하는 기색이 있었는데, 말한 바가 없었는가?”하니,
한치형이 말하기를,
“정동이 말하기를, ‘진헌하는 음식물(飮食物)에 대하여 전하(殿下)께서 성지(聖旨)가 첨부되지 아니하였다하여 답례(答禮)하려고 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전하께 아뢰기를, 「성지가 있으면 공진(供進)하겠습니까?」하니,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지가 있으면 어찌 공전하지 않겠습니까?」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나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말을 가지고 전하께 반복하여 말하면서 한낮이 되도록 힐난(詰難)하였는데, 내가 그러한 말을 들은 뒤로는 6, 7일동안 분통함이 가슴에 가득하여 마치 기운이 없는 듯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臣)이 대답하기를, ‘전하의 지성(至誠)을 대인(大人)이 어찌 모르고서 이런 말을 하시오?’하니, 정동(鄭同)이 말하기를, ‘전하의 지성은 내가 아는데, 나의 지성은 전하께서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동이 또 신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성지가 있으면 일일이 공진하겠습니까?’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만약 중국조정의 명이 있으면 어찌 공진하지 않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동이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재상은 칙서(勅書)가 내려짐을 원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만약 칙서가 내린다면 내가 어찌 감히 거절하겠습니까?’하였습니다. 정동이 말하기를, ‘내가 본국(本國)에 갔다돌아온 뒤에 황제에게 아뢰기를, 「 조선(朝鮮)의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가 봄부터 가을까지 비가 오지를 않아 지나가는 곳은 모두 적지(赤地)11821)여서 수송(輸送)하는데에 폐단이 있습니다」하였으나, 황제께서는 진헌하지 말라는 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또 황제에게 아뢰기를, 「조선의 언관(言官)들이 국왕(國王)11822)에게 말하기를, 성지(聖旨)는 흰 종이에 썼고 흑점(黑點)이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하니, 황제가 묻기를, 「국왕의 태도는 어떻던가?」하므로, 내가 아뢰기를, 「국왕은 말하기를, 성지(聖旨)가 있으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칙서를 내리는 것이 옳겠다」하였습니다. 내가 본국에 있어서는 부모(父母)의 나라이고, 또 전하의 은혜를 입음이 지극히 큰데, 내가 어찌 본국의 일에 대해서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본국에서 나를 옳지않게 여기신다면, 나의 족친(族親)은 모두 전하의 국민(國民)이므로 충군(充軍)도 할 수있고 백성으로 삼을 수도 있는데, 내가 어찌 거짓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묻기를, 「네가 가지고 간 옥대(玉帶)의 하사에 대해서 국왕은 어떻게 생각하던가?」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국왕이 이르기를, 이러한 옥대를 어떻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또 묻기를, 「향대(香帶)에 대해서는 어떻게 여기던가?」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향대는 국왕이 띨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나에게 이르기를, 이러한 향대도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러면 짐(朕)이 마땅히 띠에다 용(龍)을 새겨서 주어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언관의 일은 사실 그러한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러한 말이 있었는가? 이는 반드시 억측하여 아뢰었을 것이다.”하였다.
이어서 한치형을 위로하기를,
“서대(犀帶)를 받고 돌아왔으니, 일행(一行)의 영광이다.”하니,
한치형이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정동(鄭同)이 성지(聖旨)로써 신에게 서대를 주므로, 신이 답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으로는 오직 왕자(王子)라야 서대를 띨 수있고 여러 재상(宰相)은 띨 수가 없는데, 지금 성상(聖上)11823)께서 배신(陪臣)에게 이러한 서대를 주시니, 황공(惶恐)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하였더니, 정동이 말하기를, ‘본국(本國)의 일은 비록 미세한 일이라도 내가 모두 압니다. 의정부당상(議政府堂上)은 모두 서대를 띠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하고, 이어서 직접 신이 띠고있던 옛날 띠를 풀고 하사(下賜)한 서대를 띠게 했습니다. 서반(序班) 이상밀(李詳密)이 신에게 이르기를, ‘한씨(韓氏) 가 황제(皇帝)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이미 늙어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오라버니의 아들을 만나본다면 온 족인(族人)을 다 만나본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치형을 만나보기를 청합니다」하니, 황제가 대답하기를, 「직접 만나보는 것은 불가(不可)하니, 벼슬을 제수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직사(職事)를 주도록 한씨가 국왕(國王)에게 청하는 것이 매우 옳을 것입니다」하였습니다. 한씨가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으므로 비록 국왕에게 요청한다하더라도 국왕이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러면 일은 비록 옳지 못하더라도 짐이 국왕에게 칙서로 말해야 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서반(序班)이 신에게 이르기를, ‘황제가 나인(內人)에게 시켜서 경연(經筵)의 학사(學士)로 하여금 칙서를 짓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외국에 칙서를 내릴 때, 황제가 예부(禮部)에 하명(下命)하면 예부에서 한림원(翰林院)에 이첩하고, 한림원에서 초고(草稿)를 작성하여 아뢰면 다시 예부로 내린 다음에 외인(外人)이 예부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관례입니다. 만약 혹 존귀(尊貴)할 경우는 내정(內庭)에서 받고 관례에 구애받지 않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번에 온 칙서는 다만 예부에서만 알지 못하는 것이지 조정(朝廷)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구나?”하니,
한치형이 말하기를,
“다만 해당 부서에서만 알지 못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칙서는 정동이 반드시 황제에게 아뢰어서 만들었을 것이다.”하고,
또 묻기를,
“그전에 들으니, 황제는 도가(道家)의 일을 숭상한다고 하던데, 지금까지도 그러하던가?”하니,
한치형이 말하기를,
“도가(道家)와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반드시 소선(素膳)을 드리는데, 환관(宦官)이 이르기를, ‘본국(本國)에서 공진(供進)하는 녹포(鹿脯)는 보기에는 좋으나 냄새가 나쁘기 때문에 드리지 않습니다. 또 베[布子]같은 것은 수를 전혀 기록하지 않으며, 향점(香簟), 곤포(昆布), 전복(全鰒), 대구어(大口魚)같은 것은 드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대구어와 전복을 돼지고기, 양고기와 섞어서 탕(湯)을 만들어 드리고 반드시 남겨 두었다가 다시 드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곳에는 소찬(素饌)이 맛이 좋기 때문에 즐겨 들지마는, 그 곳은 맛이 좋은 소찬이 없던가?”하니,
한치형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소채(蔬菜)를 드리며, 본국에서 바치는 노리개의 물건은 황제가 직접 펴보고 보관해 두며, 또 염색(染色)이 된 물건을 매우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왕직(汪直)이 위엄이 천하(天下)에 떨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하니, 한치형이 말하기를,
“달자(達子)를 방어하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습니다. 왕직은 본래 남방(南方)의 1만리(里)나 되는 지역에 있었는데, 그의 아비가 1천근(斤)을 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천근’이라고 했는데, 일찍이 반역(叛逆)하였으므로 중국에서 토벌하여 평정하고 왕직을 임명하였으며, 황제가 매우 총애하여 그에게 군사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물(人物)을 진퇴(進退)시킬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름하여 ‘소황제(小皇帝)’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일컫기를, ‘왕직의 사람됨이 경솔하게 말하지 아니하며, 몸은 약하나 활을 잘 쏜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진(李珍)도 총애를 받고 있던가?”하니,
한치형이 말하기를,
“역시 매우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이진은 본래 강옥(姜玉)의 아들인데, 정동 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이 모든 일을 지휘하는데, 상당한 기세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기상(氣象)은 정동만 못하였습니다. 이진은 언제나 차견(差遣)되어 본국에 오가는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김보(金輔)도 총애를 받아, 군사를 담당하고 있는 자의 팽인(伻人)11824)인데, 신에게 말하기를, ‘정태감(鄭太監)11825)의 족친(族親)은 벼슬한 자가 많습니다. 나의 동생은 한 사람만이 가자(加資)되었는데, 모름지기 전하(殿下)께 회계(回啓)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보는 정동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강옥이 김보에게 음식물(飮食物)을 주면서 말하기를, 「정태감은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하였습니다. 신이 어느 날 강옥의 집에 갔더니, 강옥이 정동을 칭찬하므로, 그 이유를 묻자, ‘조선에 가서 진헌(進獻)하게 한 공로로〈정동의〉양자(養子)인 곡청(谷淸)에게 소감(小監)의 직위(職位)를 제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칙서를 받을 때에 정동은 한 명의 소수(小竪)로서 칙서를 받들어 내어다주었고 서책(書冊)에 대해서는 정동이 말하기를, ‘본국에서 요구한 서책 목록을 황제가 보시고 말하기를, 「혹 보지 못하던 책이 있다」하고 즉시 내장(內藏)11826)의 것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거기에 없으므로 곡청(谷淸)으로 하여금 사처(私處)에서 사다가 보내게 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정동에게 부탁하였으니, 정동이 반드시 주달(奏達)했을 것이다”하였다. 한치형이 말하기를,
“한씨가 노리개의 본[見樣]을 신에게 주고 아울러 거기에 들어갈 화은(花銀)까지 보여주었는데, 신이 농담으로 정동에게 말하기를, ‘본으로 보여주는 이 은(銀)은 적지 않습니까?’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이 곳의 은은 그대의 나라에 많이 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1년에 북경[京師]으로 항상 가게되는 사절(使節)이 무릇 세 차례인데, 이를 맞이하고 호송(護送)하는 군사는 여섯 차례입니다. 이제 정조사(正朝使)를 호송하는 군사로 성절사(聖節使)11827)의 행차를 맞이하고, 성절사를 호송하는 군사로 천추사(千秋使)11828)의 행차를 맞이하면, 맞이하고 호송하는 두 가지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천추사의 발정(發程)은 바로 농사철이니, 농민(農民)을 뽑아 호송함은 농사(農事)에 방해가 됩니다. 그 때에는 얼음이 풀려서 강변(江邊)의 방어(防禦)가 긴박(緊迫)하지 않을 때이니, 여러 고을과 여러 진(鎭)의 구전군관(口傳軍官)11829)을 가려서 보낸다면 또한 농사에 방해되는 폐단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可)하다.”하였다.
註11820]재상(宰相): 한치형을 가리키는 말임.註11821]적지(赤地): 초목이 나지 아니하는 땅.註11822]국왕(國王): 우리나라 임금을 가리킴.註11823]성상(聖上): 중국 황제를 가리킴.註11824]팽인(伻人): 심부름하는 사람.註11825]정태감(鄭太監): 정동(鄭同).註11826]내장(內藏): 궁 안에 보관해 둔 것.註11827]성절사(聖節使): 중국 황제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註11828]천추사(千秋使): 중국 황태자나 황후의 탄신에 보내는 사신.註 11829]구전군관(口傳軍官): 구전(口傳)으로 임명된 군관. 보통 관원의 임명에는 추천권(推薦權)을 가진 자가 문관은 이조(吏曹), 무관은 병조(兵曹)를 통하여 3인의 후보자[三望]를 갖추어 상신하며, 임금이 그 중 1인의 성명 위에 점을 찍어 재가(裁可)하는 것인데,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이조나 병조 단독으로 명단을 승정원(承政院)에 직송(直送)하여 재가를 받아서 임명한 군관.
○上御宣政殿, 引見韓致亨, 問中朝事。 致亨對曰: “鄭同九月二十五日入京, 臣則二十六日到京。 有一校尉來言: ‘皇帝向者使予見宰相來否, 時宰相未到, 故皇帝又使予來見矣。’ 其言似若速令進獻。 臣卽將進獻之物, 由東華門而進。” 上曰: “鄭同回還時, 頗有怒色, 無奈有所言乎?” 致亨曰: “鄭同云: ‘進獻食物, 殿下以不付聖旨, 不肯答, 予啓殿下曰: 「有聖旨, 則其供進乎?」 殿下曰: 「有聖旨, 則何不供進乎?」 是殿下以予言爲不實也。 故予以此言, 反覆於殿下, 日中而詰, 予自聞此語以後, 六七日痛滿胸臆, 若無氣焉。’ 臣答曰: ‘殿下至誠, 大人豈不知之, 有是言耶?’ 鄭同曰: ‘殿下至誠, 則予知之矣, 予之至誠, 殿下不知矣。’ 同又語臣曰: ‘信乎有聖旨則一一供進乎?’ 臣答曰: ‘若有朝廷之命, 則何不供進乎?’ 同曰: ‘然則宰相不欲降勅矣。’ 臣答曰: ‘若降勅, 則予何敢辭乎?’ 同曰: ‘予往還本國之後, 奏皇帝曰: 「朝鮮平安、黃海二道, 自春徂秋不雨, 所經皆赤地, 有轉輸之弊矣。」 皇帝無有勿獻之旨也。 且予又奏皇帝曰: 「朝鮮言官言於國王云: 『聖旨乃素楮無黑點, 不可信也。』」 皇帝問曰: 「國王則何如?」 予奏曰: 「國王則云, 有聖旨, 則當唯命矣。」 皇帝曰: 「降勅可也。」 予於本國, 爲父母之邦, 而又蒙殿下之恩至大矣, 予豈不盡心於本國事乎? 本國以予爲不可, 則予之族親, 皆殿下之民也, 可以充軍, 可以爲百姓矣, 予豈作僞之有哉? 皇帝問: 「汝齎去賜帶, 國王以爲何如?」 予對曰: 「國王云: 『如此之玉, 何可易得?』」 皇帝又問曰: 「香帶則何如?」 予對曰: 「香帶則國王無帶之之時。 然國王謂予曰: “如此之香, 亦未易得也。』」 皇帝曰: 「然則朕當刻龍于帶, 以賜之。」 上曰: “言官之事, 實無之也, 何以有此言耶? 必臆度而奏也。” 仍慰(致享)〔致亨〕曰: “受帶而還, 一行榮寵矣。” 致亨起拜, 而啓曰: “鄭同以聖旨, 賜犀帶于臣, 臣答曰: ‘本國之法, 惟王子得帶犀, 諸宰相, 則不得帶焉, 今聖上賜陪臣此帶, 不勝惶恐。’ 同曰: ‘本國之事, 雖細微, 予悉知之。 議政府堂上, 皆着犀帶, 對我勿出此言。’ 因親解臣所着舊帶, 而帶以賜帶。 序班李詳密謂臣曰: ‘韓氏請于皇帝曰: 「予旣年老, 死日無幾, 若見娚之子, 則如盡見一族人矣。 請見韓致亨。」 皇帝答曰: 「親見則不可也, 授職以送何如? 且授職事, 韓氏請于國王甚可。」 韓氏曰: 予在此, 故雖請于國王, 國王不聽焉。」 皇帝曰: 「然則事雖非便, 朕當勅諭于國王。」’ 且一序班謂臣曰: ‘皇帝令內人, 製勅于經筵學士。’ 凡降外國勅書, 皇帝下禮部, 禮部移于翰林院, 翰林院製草以奏, 還下禮部, 而後外人得受于禮部, 例也。 若或尊貴之, 則受于內庭, 不拘常例。” 上曰: “然則今來勅書, 但禮部不知耳, 朝廷未爲不知也。” 致亨曰: “但該部不知也。” 上曰: “此勑, 鄭同必奏皇帝, 而爲之也。” 又問曰: “向聞皇帝崇道家之事, 迨今猶然乎?” 致亨曰: “道家、佛法, 無不崇信。 故朝則必進素膳, 宦官云: ‘本國供進鹿脯, 觀則美矣, 臭惡故不進。 且如布子, 則全不記數, 如香蕈、昆布、全鰒、大口魚嗜進。 故以大口魚、全鰒, 和猪羊肉湯之, 而進焉, 必留置餕餘, 而復進。’” 上曰: “此處素饌, 味好故嗜進耳, 其處, 則無味好素饌乎?” 致亨曰: “人言以蔬菜進之, 本國所獻戲玩之物, 則皇帝親自披閱封署, 且染色之物亦甚悅焉。” 上曰: “聞汪直威振天下, 信乎?” 致亨曰: “以(達子)〔㺚子〕防禦, 領軍出歸。 汪直, 本在南方一萬里之地, 其父能擧千斤, 故名曰千斤, 嘗叛焉, 中朝討平, 而宮汪直, 皇帝甚寵待, 使之摠兵。 然能進退人物, 號曰小皇帝。 人稱直之爲人, 不輕言, 體弱而善射。” 上曰: “李珍亦有寵乎?” 致亨曰: “亦甚寵焉。 珍本爲姜玉之子, 而呼鄭同爲父。 其人指揮凡事, 稍有氣勢, 然氣象不若(鄭國)〔鄭同〕, 珍每言承差往來本國事。 且金輔亦有寵, 而摠兵伻人, 語于臣曰: ‘鄭太監族親, 則授職者多矣。 予之同生, 只一人加資, 須回啓殿下。’ 人言: ‘金輔與鄭同不協, 姜玉贈食物于金輔, 而語之曰: 「毋使鄭太監知之。」’ 臣一日到姜玉家, 玉賀鄭同焉, 問之則以往朝鮮, 能供進獻之功, 授養子(谷請)〔谷淸〕小監之職。 且臣受勑時, 鄭同以一小竪, 奉勑書, 而出給矣, 書冊則鄭同言: ‘本國書來目錄, 皇帝覽曰: 「或有所未見之書也。」 卽命荀于內藏無之, 令谷淸, 貿易于私處以送。’” 上曰: “予囑鄭同, 同必奏達也。” 致亨曰: “韓氏受戲玩見樣于臣, 幷與其所入花銀, 臣戲語鄭同曰: ‘見此見樣之銀, 無奈小乎?’ 鄭同曰: ‘此處之銀, 多歸在爾國矣。’” 又啓曰: “一年常行赴京之使凡三次, 而其迎護送軍, 則六次。 今以正朝使護送軍, 迎聖節使之行, 以聖節使護送軍, 迎(于)〔千〕秋使之行, 則除迎逢二行之弊矣。 且千秋使發程, 正當農月, 抄農民護送, 有妨農事。 其時則解氷, 江邊防禦不緊, 以諸邑、諸鎭口傳軍官抄送, 則亦減妨農之弊也。” 上曰: “可。”
성종 139권, 13년(1482 임인/명성화(成化) 18년) 3월8일(병자) 1번째기사
정조사 이극기, 부사 한충인이 여러 책을 진상하고 궁각을 사는 일에 대해 아뢰다
정조사(正朝使)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이극기(李克基)와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한충인(韓忠仁)이 와서 복명(復命)하고, 이어서《청화집(淸華集)》 과《유향신어(劉向新語)》와《유향설원(劉向說苑)》과《주자어류(朱子語類)》와 《분류두시(分類杜詩)》와 양각서판(羊角書板)을 진상하면서 아뢰기를,
“신등을 호송하여 온 유제(劉濟)가 의주(義州)까지 와서는〈요동(遼東)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묻기를 ‘경도(京都)까지 가기가 몇 날의 노정(路程)이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거의 15일의 노정이다.’한 뒤에야 비로소 돌아가려하기에, 신등이 부득이하여 한치형(韓致亨)을 호송하였던 이상(李祥)의 예에 의거하여 의주에 간직되어 있는 흑마포(黑麻布) 7필을 주었더니, 약간 사양하는 예의를 하다가 재차 말하자 받아가지고 돌아갔습니다.”하고,
한충인이 아뢰기를,
“강옥(姜玉)등의 처소에 보낸 인정포(人情布)는 어느 곳으로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 제용감(濟用監)에서 잘못 허락한 것인 듯합니다만,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올 수없기 때문에 생초(生綃) 13필과 바꾸어 가지고 왔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한충인을 추국하라.”하였다.
서장관(書狀官) 정수강(丁壽崗)이 보고듣고 한 사건[聞見事件]을 올려 말하기를,
“순천부(順天府)에서 궁각(弓角)을 사들이는 일로 인하여, ‘공부(工部)의 우형 청리사(虞衡淸吏司)에 조회하는 공문[案]과 예부(禮部) 주객청리사(主客淸吏司)에 통보한 수본(手本)과 순천부에서 해당 통정사사(通政使司)에 보내는 연장(連狀)을 받들어 보냈는데, 조선국에서 차송(差送)되어 온 통사(通事) 최유강(崔有江)등의 장고(狀告)에 의거하면, 「지난해에 성지(聖旨)로 우각(牛角) 1백개를 사들이는 것을 인준받았고, 또 성화(成化)11999) 17년12000)에는 성지로 우각 3백개를 사들이는 것을 인준받았으므로, 이번에도 우각을 사기 위하여 이렇게 그 사유를 갖추어 해당 청리사에 보냅니다」하였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을 상고하니, 성화 13년12001)에는 조선 국왕에게 해마다 궁각 50부(副)를 허매(許買)하는 것을 인준받았고, 근자에는 본부(本部)에서 보낸 병부의 인준을 받은 공문을 받들었는데, 조선 국왕이 궁각을 더 사게 해달라고 요구한데 대하여 성화 17년 2월 21일에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장등(張等)이 복주(覆奏)하여서, 다음날 성지(聖旨)로 해마다 1백50부를 더 사도록 다시 인준받아 명을 받들어 시행하라는 본부의 자문(咨文)을 청리사에 보내어 비조(備照)12002)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전의 사유에 대하여 품당(稟堂)한 것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수본(手本)을 써야 하므로, 전에 공부(工部)의 해당 청리사에 보내어 정당(呈堂)을 번거롭게 하여 시행했던 수본을 해당 청리사에 가져다가 과거에 인준한 병부의 공문을 상고하니, 해건을 조선 국왕이 주청(奏請)하기를, 「우각은 본래 본국에서는 생산되지 아니하여 오로지 중국(中國)을 우러러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는 달자(達子)와 여진(女眞) 에 비례(比例)하여 엄하게 금약(禁約)을 가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자(聖慈)로써 궁각(弓角)을 사들이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여 주소서」하였습니다. 본부(本部)에 의의(議擬)하였으나 시행할 수가 없어, 예부와 공부로 하여금 이번에 국왕이 차견(差遣)하여 온 배신(陪臣)들이 사들이는 궁각은 한 차례에 많아도 3백부에서 5백부를 초과하지 않게 하는 한편, 예부(禮部)에서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통역을 분명하게 하여 공부(工部)에 전송(轉送)하고, 순천부의 포호(鋪戶)에 가서 수(數)있는 대로 점검(點檢)한 다음 회동관(會同館)에 보내어 양편이 공평하게 들어주되, 궁각을 사들이는 것은 허용(許容)하지 않으며, 시사(市肆)에는 출입(出入)하게 하여 완납(完納)되는 날짜에 들어주고, 스스로 나무 궤[木樻]를 비치하게 해서 담아 포장하게하여, 반송(伴送)하는 인원과 공문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친히 가져가 내조하고 변관(邊關)을 나가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화 13년12003) 11월 10일에는 본부(本府)의 관원이 사유를 갖추어 제본(題本)을 만들어 아뢰고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이는 다만 외국(外國)의 주청(奏請)이 간절함으로 인하여 해마다 한 차례 궁각(弓角) 50부를 사들이는 것을 허락하나 초과하지는 못하게 했는데, 이 흠지(欽旨)를 받들어 공문을 갖추어 해당 부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예(例)에 따라 사들이는 것을 제한 외에 또 성화 16년12004) 12월에 조선 국왕의 주청에는, 「해마다 한 차례 궁각 50부만 사가라는 허락을 받았으나, 이것을 가지고는 용도(用途)에 부족하니, 전 해의 사례(事例)를 참고하여 액수(額數)에 구애없이 사다가 군기(軍器)를 보광(補廣)하게 해주소서」 하는 사유를 공문으로 병부에 보내 의논케 하였는데, 전항에 이미 50부만을 흠정(欽定)하여 지나치게 많이 사가지 말라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다만 「본국(本國)12005)은 세 방면에서 적(敵)을 받고 있으며 더욱이 야인(野人)들이 분쟁을 일으켜 자주 침요(侵擾)를 받고 있으므로 변방의 경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한 사정의 말이 간절하니, 매 해에 다만 한 차례씩 전례에 따라 사가도록 허락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다시 청허(聽許)해 주소서. 그리고 전의 수보다 더하여 달라는데 대하여도 본부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엎드려 빌건대 성명(聖明)으로 정하여 주소서한데 대해서는 성화 17년 2월 21일의 사유를 본부의 청리사에서 제본(題本)을 만들어 아뢰고 성지를 받들어 해마다 1백50부를 사가도록 다시 인준하였으므로, 이를 받들어 시행하고, 순천부를 경유하여 각 현(縣)에 돌렸으며, 포호(鋪戶)들을 독촉하여 사서보내게 한 뒤 이제 인준한 사유의 문서가 본부에 이르렀기에 차자를 올리는 한편, 본부에서 대흥(大興)과 완평(完平) 두 현(縣)에 통지하여 만들게 하고, 해당 관리는 곧 조회하고 병부에 의거하여 시행할 절차(節次)를 아뢰며, 문서내용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해당 관리를 독촉하여 궁각(弓角)을 가지고 급히 본부(本部)에 나아가 전송(轉送)해 주어서 수매(收買)를 시행하여 지연(遲延)되거나 잘못됨이 없게 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하였다.
註11999]성화(成化):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註12000]17년: 1481 성종 12년.註12001]성화 13년: 1477 성종 8년 註12002]비조(備照):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함.註12003]성화 13년: 1477 성종 8년.註12004]성화 16년: 1480 성종 11년.註12005]본국(本國): 조선국.
○丙子/正朝使漢城府右尹李克基、副使大護軍韓忠仁來復命, 仍進《淸華集》、《劉向新語》、《劉向說苑》、《朱子語類》、《分類杜詩》及《羊角書板》啓曰: “臣等護來劉濟, 行至義州, 猶未還歸, 而問曰: ‘去京都幾日程乎?’ 答曰: ‘幾十五日程。’ 然後始欲還歸, 臣等不得已依韓致亨護送李祥例, 以義州藏黑麻布七匹與之, 稍爲辭讓之禮再言, 乃受而歸。” 忠仁啓曰: “姜玉等處所送人情布, 未知某處所送。 而意以謂濟用監之誤許也, 然不可空還, 故貿生綃十三匹而來。” 傳曰: “鞫忠仁。” 書狀官丁壽崗, 上聞見事件曰: “順天府爲收買弓角事, 奉工部箚付虞衡淸吏司案、呈準禮部主客淸吏司手本、奉府送該通政使司連狀, 送據朝鮮國差來通事崔有江等狀告: ‘先年蒙聖旨, 準買牛角一百箇, 又於成化十七年, 內蒙聖旨, 準買牛角三百箇, 今要收買, 爲此具告等因, 送司案。’ 査前事, 成化十三年, 欽準朝鮮國王, 每歲許買弓角五十副, 近奉本部送準兵部咨, 該朝鮮國王奉要添買弓角, 成化十七年二月二十一日, 兵部左侍郞張等覆奏, 次日奉聖旨, 每歲再準一百五十副, 欽此欽遵咨部送司備照。 今該前因除稟堂外, 合用手本, 前去工部該司, 煩爲呈堂, (經)〔徑〕自施行, 手本到司案査, 先準兵部咨, 該朝鮮國王奏稱: ‘牛角自來, 本國不産, 專仰上國。 目今比例(達子)〔㺚子〕(女直)〔女眞〕嚴加禁約。 伏望聖慈, (持)〔特〕許收買弓角。’ 本部議擬合無行, 令禮、工二部, 今次許國王差來陪臣人等收買弓角, 一次多不過三五百副而止, 禮部將人譯審明白, 轉送工部, 行取順天府鋪戶, 審有所數, 送入會同館, 聽其兩平, 收買不許, 容令出入市肆, 完日亦聽, 自置木櫃, 裝盛給與, 伴送人員、公文令其親齎照, 出邊關等因。 成化十三年十一月初十日, 本部官具題奉聖旨, 是但外國奏乞懇心, 準於每歲一次收買弓角五十副, 不許過多, 欽此欽遵備咨到部。 除各年照例收買外, 又於成化十六年十二月內, 該朝鮮國王奏稱: ‘蒙許於每歲一次收買弓角五十副, 不裕於用, 要照先年事例, 不拘額數收買, 以廣軍器。’ 等因咨行兵部議得緣, 已奉有前項欽定五十副, 不許過多事例, 但稱本國三方受敵, 野人構釁, 數被侵擾, 邊備不可疏虞。’ 情詞懇切, 令每歲只許一次, 照前收買, 惟復俯從聽。 請量增前數, 本府未敢擅擬。 伏乞聖明, 奪定等因。’ 成化十七年二月二十一日, 本部司, 具題奉聖旨, 每歲再準, 買一百五十副, 欽此欽遵, 又經備行順天府, 轉行各縣, 督令鋪戶, 送買去後, 今準前因案呈, 到部合就箚仰, 本部轉行大興、完平二縣, 着落當該官吏, 卽便照依兵部, 節次奏奉, 欽依內事理, 欽遵督令該吏, 帶領弓角, 作急赴部, 轉送收買施行, 毋得遲悞。”
성종 159권, 14년(1483 계묘/명성화(成化) 19년) 10월8일(정묘) 1번째기사
서거정의 《동국통감》 편찬을 허락하고 중국에 별헌(別獻)하는 문제를 논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사(知事) 서거정(徐居正)이 아뢰기를,
“신이 바야흐로 문신(文臣) 두어 사람과 더불어《연주시격(聯珠詩格)》을 주해(註解)하니, 청컨대 겸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撰)하게 하소서. 우리나라 사람이 비록 유사(儒士)라고 일컬을지라도 본국의 사적(事蹟)에는 아득하게 알지 못하니, 만약 《동국통감》을 편찬해서 완성하면 사람들이 모두 알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하였다.
도승지 이세좌(李世佐)가 아뢰기를,
“정동(鄭同)이 만약 죽으면 별헌(別獻)하는 물건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전일에 바친 물건은 모두 동화문(東華門)으로 가만히 바쳤는데, 이제 한씨(韓氏)가 이미 죽었고, 정동이 만약 죽으면 공공연히 들어가서 바칠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별헌하는 물건은 모두 칙서(勅書)에 실려있는 것이므로, 바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정동을 통해서 공물(貢物)을 없애기를 청한 것도 오히려 온당하지 못한데, 이제 다른 환관(宦官)에게 청하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강옥(姜玉), 김흥(金興)에게 은밀히 말하는 것이 오히려 가하다. 본국의 공헌(貢獻)은 정동이 주장하였는데, 이제 만약 정동이 죽고 나서 곡청(谷淸)이 대신하면 형세가 바치지 아니할 수 없다. 또 별헌의 물건은 다 없앨 수 없고 우리 땅에 없는 물건만 면제하고자 할 뿐이다.”하였다.
○丁卯/御經筵。 講訖, 知事徐居正啓曰: “臣方與文臣數人註《聯珠詩格》。 請兼撰《東國通鑑》。 我國人, 雖號爲儒士, 於本國事蹟, 茫然不知, 若撰成《東國通鑑》, 則人皆知之矣。” 上曰: “然。” 都承旨李世佐啓曰: “鄭同若不幸, 則別獻之物, 何以處之? 前日獻物, 皆自東華門潛納, 今韓氏已逝, 同若死, 則不可公然入獻。” 上曰: “別獻物, 皆勑書所載, 不可不進。 我國初因鄭同, 請除貢, 猶未穩當, 今又因緣他宦官, 無乃可恥乎? 然潛說姜玉、金興, 猶可也。 本國貢獻, 鄭同主之, 今若同不幸, 而谷淸代之, 則勢不得不進也。 且別獻之物, 不可盡除, 只欲蠲我土所無之物耳。”
성종 159권, 14년(1483 계묘/명성화(成化)19년) 10월12일(신미) 2번째기사
중국에 별헌하는 문제와 중국 상사에 대한 조제(弔祭)를 논의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정조사(正朝使) 장유성(張有誠)의 행차에 선물을 싸가지고 가서 정동(鄭同) 에게 주고 인하여 별헌(別獻)을 면제하기를 청하고자 하는데, 정동이 만약 살아서 돌아가면 혹시 면제될 수 있으나, 정동이 죽으면 비록 진헌(進獻)하지 아니하더라도 가합니다. 중국 조정에서 만약 진헌하지 아니한 까닭을 묻거든, 대답하기를, ‘한씨(韓氏)가 이미 죽었으므로 출납(出納)하기가 어렵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정동은 이것을 사사로이 바치는 까닭에 황제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이제 선물을 싸가지고 가서 다른 태감(太監)에게 면하기를 구하면, 다투어 정동을 본받아서 구색(求索)하기를 싫어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세좌(李世佐)를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예조에서 아뢴 바가 내 뜻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별헌(別獻)의 일은 칙서(勅書)에 갖추 실려서 으레 상공(常貢)으로 되었으니, 올리지 아니할 수 없다. 또 진헌은 한씨나 정동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황제를 받드는 것인데, 어찌 이로써 핑계대어 말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김흥(金興) 과 강옥(姜玉)에게 말하여 황제에게 주달하게 하면 오히려 혹시 면할 수 있을 듯하다.”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중국 상사(上使)의 흉문(凶聞)14209)이 오늘이나 내일이면 반드시 이를 것인데,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일컬으니, 치전(致奠)과 조위(弔慰)를 넉넉하고 후하게 하여 극진히 하고, 또 지나가는 고을에서 모두 치전하며, 별도로 재상(宰相)을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하였다.
註14209]흉문(凶聞): 부고(訃告).
○禮曹啓: “正朝使 張有誠 之行, 齎人情物, 往贈 鄭同 , 因欲請免別獻。 鄭同 若生還, 則或可?免, 鄭同 死, 則雖不進獻, 可也。 中朝若問不獻之由, 答以 韓氏 已死, 出納爲難, 且 鄭同 以此私進獻之, 故取寵於帝。 今齎人情物, 求免於他太監, 則爭效 鄭同 , 求索無厭矣。” 上引見都承旨 李世佐 , 謂曰: “禮曹所啓, 予意以爲不然。 別獻事, 具載?書, 例爲恒貢, 不可不進也。 且進獻非爲 韓氏 與 鄭同 , 乃爲奉上也, 豈可以此爲辭乎? 予意謂: ‘言於 金興 、 姜玉 , 以達於皇帝’, 則猶或可免也。” 世佐 啓曰: “上天使凶聞, 今、明日必至, 我國素稱禮義之邦, 致奠、弔慰, 極其優厚, 且所經州郡, 竝皆致奠, 別遣宰相弔祭何如?” 上曰: “可。”
성종 159권, 14년(1483 계묘/명성화(成化)19년) 10월14일(계유) 1번째기사
이파 등이 중국에 별헌(別獻)하는 문제에 대해 상소하고, 여러 신하들이 논의하다
예조판서(禮曹判書) 이파(李坡)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신등이 별진헌(別進獻)의 일을 가지고 우러러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였었는데, 삼가 상교(上敎)의 정녕(丁寧)함을 받드니, 신등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감히 두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아나, 다만 생각하건대, 별헌(別獻)은 모두 노리개 물건으로 자질구레한 잡동사니인데, 애초에 환시(宦寺)와 궁첩(宮妾)의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출입에 모두 동화문(東華門)을 경유하므로 중국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니, 진실로 황제의 성덕(盛德)에 누(累)가 되는 것인데도, 전하께서 감히 어기지 못하고 굽혀 순종하는 것은 진실로 신하가 위를 받드는 예(禮)가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하의 정성은 진실로 지극하나, 예부(禮部)를 거치지 아니하고 올리는 것은 나라의 올바른 바치는 공물(供物)은 거의 아닐 듯합니다. 또 처음에 한씨(韓氏)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죽고 정동(鄭同)이 있지 아니하면, 비록 가지고 온다고 하더라도 도로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오히려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형상이 있으니, 처음부터 황제의 뜻에서 나오지 아니한 것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정동이 본국에서 자기를 대접하는 것이 그 뜻에 맞지 아니함을 노여워하여 큰소리치기를, ‘칙서(勅書)가 무엇이 어렵겠느냐?’고 하여 곧 한치형(韓致亨)으로 하여금 가지고 오게 하라는 칙서가 있었는데, 그 말에, 본국에서 만들고 본국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한씨의 친족 한 사람으로 하여금 번갈아 공진(供進)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한씨가 〈황제에게〉부탁하여 이 칙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씨가 이미 죽고 정동이 또 죽었는데도 오히려 한씨의 친족을 보내어 번갈아 올리는 것은 역시 칙서의 본뜻이 아닙니다. 근년(近年) 이래로 정동이 성호사서(城狐社鼠)14225)가 되어 본국을 도리어 헐뜯고 백성을 좀먹고 해침이 끝을 알지 못하는데, 전하께서 모두 숨기고 참으면서 따르시니, 〈정동의〉얻는 이(利)가 전보다 백배나 됨은 같은 무리가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이제 만약 우리 땅에 없는 물건을 가지고 다른 환자(宦者)를 인연하여 면제를 얻고자 하면, 이 무리가 정동이 이(利)를 얻은 것을 보고는 모두 부러워하며 본받아서 반드시 장유성(張有誠)의 말을 통하여 별다른 교묘한 말을 꾸며서 〈황제에게〉품(稟)하기를, ‘국왕이 지성으로 사대하여서 별헌(別獻)을 계속해 올리고자 하는데, 동화문(東華門)에 출입하는 주장이 없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상아(象牙)등의 물건은 나지 아니하나, 그 나머지는 모두 생산되는 바로서 갖추기 쉬운 물건입니다.’하면, 황제가 어찌 외국의 폐단이 이에 이름을 알겠습니까? 생각건대, 반드시 기뻐하여 말하기를, ‘아무 환자(宦者)로 주장을 삼아서 출입(出入)을 정동과 같게 하라.’하면, 비록 생산되지 아니하는 물건은 면제될지라도 별헌안에 생산되는 물건은 반드시 상공(常貢)의 갑절 이상 댓갑절될 것입니다. 몇 해 사이에 부(府)의 저장한 것이 거의 다하였는데, 만약 다시 몇 해를 더하면 장차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나라를 위하는데에는 마땅히 영구한 계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하의 성덕(盛德)이 아래에 임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사물(事物)의 이치를 연구하여 행동을 법도에 따르시는데, 불행히 노간(老奸)이 있어서 그 사이에 허물을 만들어 위로는 황제의 덕을 더럽히고 아래로는 번국(藩國)14226)의 근심을 낳게하는 것이 어찌 없으리라고 보증하겠습니까? 그만두게 할 만한 기회가 바로 오늘에 있으니, 자세히 연구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당초 별헌의 단서를 열 적에 본국에서 계속하기 어려움을 알지 못함이 아니었으나, 다만 한씨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한씨가 이미 죽었는데도 오히려 바꾸지 아니하면, 그윽이 두렵건대, 후일에 소환(小宦)이 잇달아 일어나 지기(志氣)가 강과(剛果)하여 또 하나의 정동이 생겨서 그 폐단이 오늘보다 심함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일은 황조(皇朝) 백년 동안에 듣지 못한 바이고, 우리나라 열성(列聖)께서 하지 아니하신 바인데, 이에 한 부인과 한 환자(宦者)로 인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치고 후세에 화(禍)를 전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신등은 생각하건대, 이제 장유성이 가는데에는 다만 보통 때의 정조사(正朝使), 부사(副使)의 예(例)에 의하여 항공예물(恒貢禮物)만 바칠 뿐이고, 다른 환자와 서로 접하지 아니할 것이며, 만약 곡청(谷淸)의 무리가 별헌(別獻)의 일에 말이 미치거든 모른다고 답하면 단연코 다시 물을 이치가 없습니다. 또 명년 절일(節日)에도 우선 별헌을 정지하여 그 형세를 보면, 황제는 만국(萬國)에서 받드는 바를 향유(享有)하고 있으니, 애당초 외국의 별헌에 유의함이 없는데, 어찌 즐겨서 번거롭게 그 오고 오지 않음을 꾸짖겠습니까? 이로 인해 영구히 끊으면, 이는 청하지 아니하고는 별헌을 면할 수있고 하는 바가 없이 큰 폐단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억만 백성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혹시 그 때에 〈별헌을〉바치지 아니한 것을 나무라거든, 답하기를,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한씨의 친족을 보내어 번갈아 공진(供進)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본국에서 이 칙서에 의거하여 한씨를 통해서 바칠 수 있었는데, 이제 한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감히 사사로이 바치지 못한다.’고 이같이 말하면 황제도 반드시 묻지 아니할 것입니다. 만약 묻거든, 마땅히 한씨의 글과 정동의 말로써 말하고, 만약 또 나무라기를 그치지 아니하거든, 이유를 갖추어서 진청(陳請)하는 것도 늦지 아니합니다. 처음에 환관(宦官)으로 인하여 해를 받았는데, 또 환관으로 인하여 면하기를 구하면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듯하며, 또 바른 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거듭 생각하소서.”하였는데,
명하여 의정부와 영돈녕(領敦寧) 이상을 불러서 의논하게 하니,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 윤호(尹壕), 서거정(徐居正), 한치례(韓致禮), 김겸광(金謙光)은 의논하기를,
“이제 전례(前例)에 의한 별헌(別獻)은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는 뜻에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칙서(勅書)에 한씨(韓氏)의 친족을 보내어 번갈아 공진(供進)하라는 뜻이 있었고, 한씨가 이르기를, ‘만약 내가 죽고 정동(鄭同)이 있지 아니하면 별헌을 바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으며, 정동도 말하기를, ‘한씨가 만약 세상을 떠나고 나도 밖에 나가면 반드시 이같은 별헌은 없을 것이다.’하였는데, 이제 한씨가 죽고 정동도 죽었으므로, 이는 바로 별헌을 그만둘 기회입니다. 신등의 생각으로는, 장유성(張有誠)의 행차에 비록 먼저 환관에게 일을 도모하지 아니하더라도 황제가 반드시 처리함이 있을 것입니다. 환관이 반드시 진헌의 일을 먼저 발설하여 형세가 이 같은데에 이르렀으니, 장유성이 본국에서 나지 아니하는 물건을 가지고 면제하기를 청하는 일은 김흥(金興), 강옥(姜玉)등에게 후의(厚意)를 번거롭게 베풀어서 도모하지 아니하더라도 큰 해가 없을 듯합니다. 만약 황제가 묻지 아니하고 환관이 말하지 아니하거든, 장유성이 환관을 통해서 먼저 면제하기를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하고,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한씨의 글이 이미 저와 같고 칙지(勅旨)의 말에도 이르기를, ‘한씨의 친족을 보내어 번갈아 바치라.’고 하였는데, 이제 한씨가 이미 죽었고 정동도 죽었으니, 이는 바로 별헌을 그만둘 수 있는 때입니다. 한 번 그 기회를 잃으면 만세에 폐단을 끼쳐서 후회하여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다른 환관에게 뇌물을 주어서 면제하기를 구하면 반드시 면제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다른 환관의 탐욕(貪慾)하는 마음을 열게 할 것이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또 전하께서는 지성으로 사대하여서 극진하게 순종하는 덕의 아름다움은 진실로 틈이 없으나, 계속하기 어려운 물건으로써 끊임없는 공물(貢物)에 응하자면 형세가 능히 행할 수 없습니다. 천자의 명이 비록 중할지라도 한 나라의 화(禍)가 또 크니, 자손만대의 계책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한씨가 이미 죽었고, 정동이 또 죽었으니, 별헌을 바치는 것은 비록 그만두더라도 가할 듯합니다. 다만 일찍이 칙지(勅旨)를 받았고 여러 번 흠사(欽賜)14227)를 받았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정지하면 일이 불순(不順)에 가까우며, 만약 곡청(谷淸)이 전례에 의거하여 물으면 잘못을 책임져야 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명년 성절사(聖節使)는 일을 알고 암련(諳練)한 대신(大臣)이 간략한 수량을 가지고 가서 바치고 형세를 보아 진퇴(進退)를 결정하게 할 것입니다. 또 이제 장유성이 나아가면 곡청(谷淸)이 반드시 별헌(別獻)의 일을 언급할 것인데, 또한 이로 인하여 형세를 볼 수 있으니, 장유성이 돌아온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장유성이 김흥(金興)으로 인하여 면제하기를 얻는 것은 좋으나, 구구하게 곡청등 여러 환자(宦者)에게 번거롭게 청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예조(禮曹)에서 아뢴 바와 재상의 의논이 모두 옳으나, 다만 중국 조정에서 만약 묻기를, ‘칙서에 쓰여 있는 바를 어찌하여 바치지 아니하느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마땅할 것인가?”하니,
정창손과 윤호는 아뢰기를,
“별헌의 일은 김흥에게 말하여 면제를 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한명회는 말하기를,
“김흥이 이미 성상의 전교를 자세히 듣고 갔으므로 반드시 발설함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심회, 서거정, 한치례는 말하기를,
“별헌을 바치지 아니하되, 이제 정조사의 행차에 만약 묻지 아니하면 먼저 말을 낼 수 없습니다. 명년 성절(聖節)에 마땅히 간략하게 토산물을 갖추어서 보내고 상아(象牙)등의 물건은 갖추어 보내지 아니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김흥은 비록 말하지 아니하더라도 마땅히 청할 것이며, 강옥(姜玉)이 만약 말을 내면 선사하는 물품을 주어서 청하는 것이 옳다.”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별진헌(別進獻)은 한씨와 정동으로 인하여 시작되었었다. 이제 한씨가 이미 죽고 정동도 죽었는데, 통사(通事) 장유성을 사신으로 삼아 환관을 인연하여 뇌물을 바치고 면제하기를 구하니, 이 의논을 주창한 자가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하였다.
註14225]성호사서(城狐社鼠):성(城)안에 사는 여우와 사(社)안에 사는 쥐라는 뜻으로, 몸을 안전한 곳에 두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곧 임금곁에 있는 간신(姦臣).註14226]번국(藩國):제후의 나라 註14227]흠사(欽賜):황제의 하사
○癸酉/禮曹判書李坡等上書曰:
臣等將別進獻事, 仰煩天聽, 伏承上敎丁寧, 臣等不勝惶恐。 固知殿下至誠事大, 不敢有二, 第念別獻, 皆是褻玩之具, 細瑣雜劇, 初出於宦寺、宮妾之私, 出入皆由東華門, 而朝廷不得與知, 實是皇帝盛德之累, 而殿下不敢違忤, 委曲將順者, 良由人臣奉上之禮, 不得不如是也。 殿下之誠, 則至矣, 然非由禮部而進, 恐非庶邦惟正之供也。 且其始也, 韓氏以爲: “吾若死, 鄭同不在, 則雖齎來, 亦還將去。” 觀此, 則猶有畏避之狀, 初非出於皇帝之意, 可想已。 其後鄭同怒本國待己之不副其意, 揚言曰: “勑書何難?” 於是, 乃有韓致亨齎來之勑, 其言: “本國所製所産, 令韓族一人, 輪流供進。” 此亦以韓氏爲憑依, 而有此勑也。 今韓氏已死, 鄭同又亡, 而猶遣韓族輪流以進, 亦非勑書之本意也。 近年以來, 鄭同爲城狐社鼠, 反噬本國, 蠧害生靈, 不知紀極, 而殿下皆隱忍從之, 所得之利, 百倍於前, 儕輩所共知也。 今若以境土所無之物, 夤緣於他宦者, 欲免焉, 則此輩見鄭同因此, 而得利, 皆歆羨而效之, 必因有誠之言, 別構巧辭, 以稟曰: “國王至誠事大, 欲繼進別獻, 而東華門出入無主”, 又以爲: “象牙等件, 則不産, 其餘皆所産易備之物”, 則皇帝豈知外國之弊至此哉? 想必嘉悅曰: “以某宦爲主出入如鄭同”, 則雖或蠲不産之物, 而別獻之內所産之物, 必倍蓰於常貢。 數年之間, 府藏垂盡, 若復數年, 將何以堪? 爲國, 當存永久之圖。 殷下盛德臨下, 正己格物, 動循規矩, 而不幸有老奸, 孽芽其間, 上累帝德, 下生藩患, 豈可保其無哉? 可已之機, 正在今日, 不可不詳究, 而熟慮之也。 當初別獻之開端也, 非不知本國之難繼也, 特以韓氏之故耳。 今韓氏已死, 而猶不替焉, 則竊恐後日小宦繼起, 志氣剛果, 安知又生一鄭同, 其弊又有甚於今日者乎? 此事皇朝百年之所未聞, 我國列聖之所不爲, 而乃因一婦人、一宦者之故, 貽弊於生靈, 流禍於後世, 其可乎? 臣等以爲, 今有誠之去也, 只依常時正朝使、副吏之例, 但進恒貢禮物而已, 了不與他宦者相接。 儻谷淸輩, 語及別獻事, 答以不知, 則定無更問之理。 又於明年節日, 姑停別獻, 以觀其勢, 則皇帝享有萬國之奉, 初無留意於外國之別獻, 豈肯屑屑責其來與不來乎? 因此而永斷, 則是不請而別獻可免, 無爲而巨弊可除, 豈非萬萬生靈福哉? 倘或其時責其不進, 則答曰: “勑書云: ‘遣韓族輪流供進’, 故本國據此勑, 因韓氏而得進, 今韓氏辭世, 不敢私獻。” 如是, 則皇帝必不致問, 若致問, 則當以韓氏之書、鄭同之言爲辭, 若又責之不已, 則具由陳請, 亦未晩也, 初以宦官受害, 而又因宦官求免, 事恐難成, 而又恐未出於正。 伏望更留三思。
命召議政府及領敦寧以上議之。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壕、徐居正、韓致禮、金謙光議: “今依前例別獻, 其於殿下至誠事大之意, 實爲允當。 然勑書有遣韓族輪流供進之旨, 而韓氏云: ‘若吾亡, 而鄭同不在, 則別獻進納爲難。’ 鄭同亦云: ‘韓氏若逝, 同若出外, 必無此等別獻。’ 今韓氏逝, 而同亦死, 此正別獻可已之機。 臣等意, 張有誠之行, 雖不先事圖之於宦寺, 皇帝必有區處。 宦寺必先發進獻之事, 勢若至此, 有誠將本國不産等物, 請蠲免事, 不煩致厚意於金興、姜玉等圖之, 似不大害。 若皇帝不問, 宦官不言, 則有誠不必因宦寺, 先事求免也。 尹弼商、洪應議: “韓氏之書, 旣如彼, 勑旨之辭, 亦云: ‘遣韓族, 輪流供進。’ 今韓氏已逝, 鄭同亦亡, 此正別獻可已之時也。 一失其機, 貽弊萬世, 悔不可追。 今賂他宦官求免, 必不得免, 而反啓他宦貪欲之心, 甚不可也。 且殿下至誠事大, 委曲順從之德之美, 固無間(爲)〔焉〕, 然以難繼之物, 應無窮之貢, 勢不能行。 天子之命雖重, 一國之禍亦大, 爲子孫萬世計, 不可不慮也。” 李克培議: “韓氏已逝, 鄭同又死, 別獻之貢, 雖停似可, 但曾受勑旨, 累蒙欽賜, 一朝頓停, 事涉不順, 若谷淸據前例致問, 則曲有所歸。 臣謂: ‘明年聖節使, 諳練大臣, 略數齎進, 觀勢進退。’ 且今張有誠進去, 則谷淸必言及別獻事, 亦可因此觀勢也, 有誠回程後更議, 何如? 若有誠因金興得免, 則善矣, 不可區區煩請於谷淸等諸宦。” 傳曰: “禮曹所(啓)宰相之議, 皆是矣。 但朝廷若問: ‘勑書所載, 何不進獻?’ 當何以答之?” 昌孫、壕啓曰: “別獻之事, 言於金興, 請免何如?” 明澮曰: “金興已悉上敎, 而去必有發焉。” 澮、居正、致禮曰: “別獻不進, 今正朝使之行, 若不問, 不可先發也。 明年聖節, 當略備土宜送之, 如象牙等物, 不備送何如?” 傳曰:“金興雖不言,當請之,姜玉若發言,則贈人情物請之,可也。”
【史臣曰: “別進獻, 因韓氏、鄭同而始, 今則韓氏已逝, 鄭同又亡, 而以通事張有誠爲使, 因緣宦寺, 納賂求免, 倡此議者, 寧無愧乎?”】
성종 159권, 14년(1483 계묘/명성화(成化)19년) 10월16일(을해) 2번째기사
정조사 이계손과 부사 장유성이 하직하니 인견하다
정조사(正朝使)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계손(李繼孫)과 부사(副使)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장유성(張有誠)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이제 한씨(韓氏)가 이미 죽었고 정동(鄭同)도 죽었으니, 사사로이 진헌(進獻)하는 물건은 동화문(東華門)으로 출입하기가 어렵다. 별헌(別獻)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는 일은 강옥(姜玉)과 김흥(金興)에게 말하는 것이 가하다. 곡청(谷淸)은 본국 사람이 아니므로, 비록 백 가지로 말할지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이며, 금은(金銀), 토표피(土豹皮)등의 물건은 공공연히 면해 줄 것을 요구하여도 가하다. 본토에서 나는 물건은 형세를 보고 말을 늦추어서 조금 그 뜻을 볼 따름이며, 말로 나타낼 수는 없다. 황제는 부(富)가 사해(四海)를 가졌는데, 어찌 작은 나라의 사사로이 바치는 물건을 가지고 개의(介意)하겠는가? 김흥이 이미 우리나라의 폐단을 알고 있으니, 만약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면 다행히 면제할 도리가 있을 것이다.”하자,
장유성이 아뢰기를,
“강옥이 왔을 때에 신이 오랫동안 더불어 같이 있었으니, 신이 마땅히 성상의 뜻대로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하였다.
○正朝使知中樞府事 李繼孫 、副使同知中樞府事 張有誠 辭。 上引見語之曰: “今 韓氏 已逝, 鄭同 亦死, 私進獻之物, 由 東華門 出入爲難。 請減別獻事, 言於 姜玉 、 金興 , 可也。 谷淸 非本國人, 雖說之百端, 無益。 如金、銀、土豹皮等物, 公言求免, 可也。 本土所産之物, 則觀勢緩辭, 微觀其意而已, 不可形言。 皇帝, 富有四海, 豈以小邦私進之物, 介意耶? 金興 已知我國之弊, 若具由以聞, 則幸有可免之理。” 有誠 啓曰: “ 姜玉 來時, 臣久與同處, 臣當以上旨, 詳陳之。”
성종 175권, 16년(1485 을사/명성화(成化) 21년) 2월28일(경진) 1번째기사
정조사 이극돈, 김백겸이 와서 복명하니 중국 조정에 대해 묻다
정조사(正朝使) 이극돈(李克墩), 김백겸(金伯謙)이 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중국 조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하니,
이극돈이 대답하기를,
“다른 일은 없었고 다만 성변(星變)이 있었습니다.”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이 북경(北京)에 있을 때 성변이 있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12월 25일 밤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므로 지진(地震)인가 의아했었는데, 곧 별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우레처럼 진동하지는 않았지만 그 소리가 매우 컸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포시(哺時)16032)에는 별이 서쪽 방향에 떨어지며 흰기운이 마전한 베처럼 내려오는데 아득하여 끝이 없고 혹은 그 기운이 도로 올라가는 것도 있었으며, 땅에 4, 5자쯤 닿기 전에 벼락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이날 저녁에 육부(六部)의 상서(尙書)와 모든 대신들이 분주하게 대궐로 나간다는 것을 듣고 신이 묻기를, ‘어찌하여 이러하는가?’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재해(災害)와 이변(異變)이 이러하니 아침저녁 사이에 반드시 큰 일이 있게 될 것이다.’하면서 기꺼이 요망한 말을 하며 조금도 숨김이 없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성식(聲息)은 어떠하였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듣건대 달자(達子)16033)들이 대동구자(大同口子)에 진군(進軍)하자 소왕자(小王子)가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났다고 하였습니다.”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소위 소왕자라는 자는 진짜인가?”하니,
대답하기를,
“조정에서는 비록 진짜라고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더러 진짜라고 하였고, 또한 소왕자의 사람됨이 현명함과 지혜가 탁월하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황태자(皇太子)의 혼례[嘉禮]는 어떻게 하였던가? 전번에 여자를 간택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미 금혼(禁婚)하도록 하였던가?”하니,
대답하기를,
“그런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객관(客館)에 와서 물건파는 사람이 모두 태감(太監)16034)의 집안사람들이었으니, 만일 그런 소식이 있었다면 어찌 떠들지 않았겠습니까? 또 중국사신이 나오게 될 때에는 반종인(伴從人)16035)이 반드시 기일에 한두 달 앞서서 청구하는 것이 매우 많게 됩니다.”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황태자의 나이가 몇 살이던가?”하니,
대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이 지금 14세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보기에 태감이 몇 사람이던가?”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본 곡청(谷淸)은 사람됨이 조금 글을 알기는 하나, 다만 경박하여 믿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나이가 얼마나 되겠던가?”하니,
대답하기를,
“나이가 24, 5세 가량이었습니다. 강옥(姜玉)은 노쇠하여 단지 월봉(月俸)만 받을 뿐이었습니다. 또 김보(金輔)가 그 전에는 본국 사신이 갔을 때 거의 와보지 않았었는데, 정동(鄭同)이 죽은 후로는 자주 와서 찾아보았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황제(皇帝)가 도교(道敎)와 불교(佛敎)를 좋아한다는데, 그렇던가?”하니,
대답하기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문에서 대기하는 연소(年少)한 사람들이 그런 술수(術數)를 몹시 좋아하며, 도사(道士)의 복장을 입은 자가 많았으니, 아마도 황제께서 좋아하므로 그러할 것입니다.”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그들의 복장은 어떠하던가?”하니,
말하기를,
“도사(道士)의 복장은 장삼(長衫)과 같은데 띠를 띠지 않았고, 또한 가사(袈娑)와 같은 것을 가로로 걸치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사람들로서 조회(朝會)하러 온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및 왜인(倭人)이 모두들 들어와서 조회하였습니다. 왜인들은 거의 1천명이나 되어 금은(金銀)을 가지고 와서 무역하였고, 기타 보물 및 노리개등의 장신구를 또한 많이 가지고 왔었는데, 문을 막아 외부 사람은 사사로운 무역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 보물 및 노리개등의 물건을 태감(太監)들이 와서 무역하여 가지고 가느라 왕래가 끊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상자 하나는 개 모양으로 만들어져, 이 상자에 담은 것은 모두 강아지처럼 만든 것이었는데, 이런 물건은 모두 사서 대내(大內)로 들여갔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중들도 조정의 반열(班列)에 들어온다는데, 그렇던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전부터 그러하였습니다.”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조회를 보는 시간은 어떠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일찍 하지 않으면 너무 늦게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황제의 자녀(子女)는 몇이나 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태자(太子) 이외에 아들 둘과 딸 다섯이 있었습니다.”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천하가 태평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태평한 듯하기는 하나, 성변(星變)이 있으므로 식견있는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북경(北京)에 눈이 얼마나 오던가?”하니,
대답하기를,
“ 북경에서 동팔참(東八站)까지는 조금도 눈이 오지않아 가물 징조가 매우 심하였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만씨(蔓氏)에 대한 총애(寵愛)가 여전하였습니다.”하였으며,
임금이 이르기를,
“그와 같은 것때문에 황제에게 누(累)가 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감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를 가지고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하였다.
註16032]포시(哺時): 오후 3시에서 5시까지의 사이.註16033]달자(達子): 몽고 부족의 하나.註16034]태감(太監): 명나라의 내관(內官).註16035]반종인(伴從人): 수행원
○庚辰/正朝使李克墩、金伯謙來復命。 上引見曰: “中朝有何事?” 克墩對曰: “無他事, 但有星變。” 上曰: “卿之在京時, 有變乎?” 對曰: “十二月二十五日夜, 有聲如雷, 疑其地震, 乃星隕也。 雖不至如震雷, 然其聲甚大。 正月初一日晡時, 有星隕于西方, (日)〔白〕氣如練而下, 茫無畔涯, 其氣或有還騰之者, 未至地四、五尺, 有聲如霆。 是夕聞六部尙書、諸大臣, 奔走詣闕, 臣問曰: ‘何以如此’, 人皆曰: ‘災異至此, 朝夕必有大事’, 喜爲妖言, 略不隱諱。” 上曰: “聲息何如?” 對曰: “聞(達子)〔㺚子〕進兵大同口子, 小王子不戰退去。” 上曰: “所謂小王子者, 眞耶?” 對曰: “朝廷雖不謂之眞, 人或謂其爲眞也。 且云小王子爲人, 賢智卓越。” 上曰: “皇太子嘉禮何如? 前聞採女之奇, 已令禁婚乎?” 對曰: “如此之奇, 無聞焉。 凡到館市物者, 皆太監家人, 若有如此之奇, 豈不騰喧? 且天使出來時, 伴從人必先期一二朔求請者, 甚多。” 上曰: “皇太子, 年幾歲乎?” 對曰: “人云: ‘今十四歲。” 上曰: “所見太監幾人?” 對曰: “臣見谷淸爲人, 稍解文字, 但輕薄難信之人也。” 上曰: “年歲幾許?” 對曰: “年可二十四、五歲。 姜玉則衰老, 但受月俸而已。 且金輔於(囊)〔曩〕者本國使臣之行, 略不來見, 自鄭同之死, 數來見訪。” 上曰: “皇帝好道、佛, 然乎?” 對曰: “未知。 但侯門年少之輩, 酷好其術, 着道士服者多。 疑是上有好, 而然耳。” 上曰: “其服何如?” 曰: “道士之服, 如長衫不束帶, 又有如袈裟之物橫掛焉。” 上曰: “諸國之人, 來朝者幾何?” 對曰: “建州衛野人及倭人皆入朝。 倭人, 則幾至千人, 持金、銀貿販, 其他寶物及戲玩之具, 亦多齎來。 拒門使外人, 不得私貿, 其寶物及戲玩之物, 太監等, 來貿押去, 絡繹不絶。 有一箱, 制如狗形, 其箱所盛, 皆像狗雛, 而造者也。 如此之物, 皆購之, 入內。” 上曰: “僧人入朝班, 然乎?” 對曰: “自前而然。” 上曰: “視朝早晩如何?” 對曰: “不夙, 則太晩。” 上曰: “皇子女幾何?” 對曰: “太子外, 有二子五女。” 上曰: “今天下太平乎?” 對曰: “雖似昇平, 然有星變, 有識之人, 皆有憂懼之心。” 上曰: “北京雨雪幾何?” 對曰: “自京至東八站, 略無雨雪, 旱徵太甚。” 又曰: “蔓氏之寵如舊。” 上曰: “以此之故, 有累於皇帝乎?” 對曰: “未敢知耳。 然人多以此爲言。”
성종 180권, 16년(1485 을사/명성화(成化) 21년) 6월29일(무신) 5번째기사
지평 송질이 성절사 한찬이 요구한 인원이 법에 어긋남을 아뢰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송질(宋軼)이 와서 아뢰기를,
“ 북경(北京)에 가는 행차(行次)에 강이생(講肄生)으로 나이 젊고 총명한 자 2인을 가려서 보낸다고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제 성절사(聖節使) 한찬(韓儹)이 청하기를, 강이생 1인을 감하고 통사(通事) 2인으로써 이를 대신하게 하여, 하나는 압물관(押物官)16465)으로 삼고 하나는 타각부(打角夫)16466)로 삼게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통사중에 이익을 꾀하는 자가 있어 은밀히 한찬에게 청하여 한 것입니다. 한찬이 근일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감히 이와 같이 법을 어기는 일을 하고 있으니, 몹시 부당합니다. 또 듣건대 곡청(谷淸)에게 따로 인정(人情)을 보낸다고 하는데, 또한 매우 옳지 않습니다. 이에 앞서 한씨(韓氏)가 살아있을 당시에 정동(鄭同)은 우리나라 일을 상세히 아는 자였는데, 우리나라에 폐단이 있는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사사로이 인정물을 보내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한씨가 이미 서거하였고, 정동도 사망하였는데, 곡청에게 물건을 주는 것은 어디에 의거한 것입니까? 지난 해 한치형(韓致亨)이 가지고 간 별인정(別人情)도 부당하나, 그 때에는 진헌(進獻)하는 잡물(雜物)속에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것이 아닌 것은 그 수량을 감(減)하였다가 견책(譴責)받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였던 것인데, 이번에 까닭없이 또 뇌물을 주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중국에서 본래 우리나라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일컬어 왔는데, 이제 이와 같은 일이 만약 중국 조정에 들리게 되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지난 해 한치형(韓致亨)이 갔을 때 등잔(燈盞)을 깨었으므로 황제(皇帝)께서 노하여 꾸짖는 것을 곡청(谷淸)이 그 사이에서 잘 주선하여 마침내 허물을 없게 하여 내가 매우 기뻤기 때문에 따로 인정(人情)을 보낸 것이다. 강이생(講肄生) 1인을 없애는 일은, 성절사(聖節使)의 행차에는 진헌할 잡물(雜物)이 갑절이나 많아서 통사(通事)가 아니면 주관하여 가기가 어렵기때문이다.”
하였다. 송질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곡청의 사람됨이 간사하고 교활하며 보잘것없다고 하는데, 이제 인정의 물품을 얻게 되면 그 재물을 탐하는 마음에 반드시 해마다 바라게 될 것이고, 조금이라도 제 뜻과 같지 않으면 도리어 성내어서 족히 근심거리만 될 것입니다. 강이생을 데리고 가는 것은 《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므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곡청에게 인정을 보내는 일은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할 것이며, 강이생의 일은 《대전》을 무너뜨리는 처사가 아니고 일시의 권의(權宜)일 뿐이다”하고, 송질이 반복해서 논하여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송질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 들으니, 한찬 에게 사사로운 인정(人情)의 물건을 주시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훈구대신(勳舊大臣)이 북경에 갈 때 인정물을 내려주는 것은 대신을 중하게 대우하는 까닭입니다. 이제 한찬은 훈구대신이 아니며 또 하는 일도 없는데, 특별히 내려 주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는 곡청(谷淸), 김흥(金興), 강옥(姜玉)등의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여 그들에게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 자료에 지나지 않습니다. 청컨대 정지하도록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앞서 북경에 간 자는 반드시 사사로운 진헌(進獻)이 있었다. 이번에 만약 황제께서 묻게되면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이나, 만일 묻지 않는다면 한찬 이 어찌 감히 망령되게 주겠는가?”하였다.
註16465]압물관(押物官):사신(使臣)이 외국으로 갈 때 수행하여, 조공(朝貢)하는 물건과 교역(交易)하는 물건등을 맡아 관리하던 책임자임.註16466]타각부(打角夫):조선조 때 외국에 왕래하는 사신 일행의 모든 물건을 감수(監守)하던 관원.
○司憲府持平宋軼來啓曰: “赴京行次, 講肄生年少聰敏者二人差送, 載于《大典》。 今聖節使韓儧請除講肄一人, 而以通事二人代之, 一爲押物官, 一爲打角夫。 是必通事之謀利者, 暗請於儧而爲之也。 儧以近日侍從之臣, 敢爲如此違法之事, 甚不當。 且聞谷淸處送別人情, 亦甚不可。 前此韓氏生時, 鄭同詳知我國之事者也, 多爲我國有弊之事, 故不得已私致人情物, 以悅其心。 今則韓氏已逝, 鄭同亦亡, 谷淸處贈遺, 有何所據? 去年韓致亨齎去別人情, 亦不當。 然其時則進獻雜物內非我國所産者減省其數, 恐受譴責, 故不得已爲之。 今無故而又致賂遺, 何也? 中朝素稱我國爲禮義之邦, 今如此之事, 若聞於朝廷, 則寧無愧乎?” 傳曰: “去年韓致亨之行, 燈盞破碎, 皇帝怒責之, 谷淸周旋其間, 終得無咎。 予甚喜之, 故別送人情耳。 除講肄一人事, 聖節使之行, 進獻雜物倍多, 非通事難以押去故耳。” 軼入啓曰: “臣聞谷淸爲人犴猾無狀。 今得人情之物, 則其貪(胃)〔冒〕之心, 必年年希望, 稍不如意, 則反生恚怒, 適足爲患耳。 講肄生帶去, 載《大典》, 不可壞也。” 傳曰: “谷淸處送人情事, 予當酌量。 講肄生事, 非壞《大典》也, 乃一時權宜耳。” 軼反覆論啓, 不聽。 軼又啓曰: “今聞欲給韓儧私人情之物。 臣意勳舊大臣赴京時賜人情物, 重大臣也。 今儧非勳舊大臣, 又無所爲之事, 而特賜之何耶? 不過使之分施谷淸、金興、姜玉輩, 以爲求媚見悅之資耳。 請停之。 傳曰: “前此赴京者, 必有私進獻。 今若皇帝有問, 則不可以不齎爲辭, 當獻之矣。 若無所問, 儧豈敢妄施?”
성종 198권, 17년(1486 병오/명성화(成化)22년) 12월27일(무술) 2번째기사
성절사 한한이 복명하다
성절사(聖節使) 한한(韓僴)이 와서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한한이 아뢰기를,
“태감(太監) 정곡청(鄭谷淸)이 와서 신(臣)을 보고 말하기를, ‘성지(聖旨)178 60)안에 있는 별진헌(別進獻)의 물품을 가져왔느냐?’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간략하게 갖추어서 왔으며, 또 별헌은 한씨(韓氏)가 생존하였을 때에는 인연으로 바칠 수 있었으나 이제는 한씨가 이미 죽었으므로 바칠 만한 인연이 없을 듯하기때문에 갖추지 아니하고 왔다.’고 하자, 곡청이 말하기를, ‘별헌의 물품은 성지(聖旨)안에 있는 것인데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온 통사(通事)가 말하기를, ‘곡청이 별헌이 없음을 노여워하여 관(館)에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고 하니, 그런가?”하니,
한한이 아뢰기를,
“곡청이 효위(驍衛)17861)의 군사로 하여금 관문(館門)을 지키게 하고 무역을 못하도록 금하였다가 꽤 오랜 뒤에야 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곡청이 신을 통주(通州)까지 전송하고 매우 정성스럽게 대접하였고, 김흥(金興), 강옥(姜玉)등은 모두 그 집에서 신을 대접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시기 때문에 황제께서 장차 관복(冠服)을 하사하는 명이 있을 것인데, 만약 그렇게 되면 곡청이 마땅히 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믿기 어렵다.”하였다.
註17860]성지(聖旨): 황제의 명령.註17861]효위(驍衛):금군(禁軍)의 영(營) 이름.
○聖節使韓僴來復命。 上引見, 僴啓曰: “太監谷淸來見臣曰: ‘聖旨內別進獻之物, 其齎來耶?’ 臣答曰: ‘略備而來。且別獻, 韓氏生存時, 可因緣得獻, 今韓氏旣沒, 恐無因可獻, 故不備來。’ 淸曰: ‘別獻物在聖旨中, 則其將何以哉?” 上曰: “先來通事言, 谷淸怒其無別獻, 禁人出入於館, 然乎?” 僴曰: “淸使驍衛守館門, 禁不得貿賣, 良久而乃罷。 然淸餞臣于通州, 待之甚款, 金興、姜玉等皆餉臣于其第。 且曰: ‘殿下事大至誠, 故皇帝將有賜冠服之命。 若然則淸當往。’” 上曰: “此言難信也。”
성종대왕 행장(行狀)
그 예부(禮部)에 보낸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국왕(國王)의 성(姓) 모(某) 휘(諱) 모(某)는 회간왕(懷簡王) 28452)의 제 2자(第二子)인데, 모비(母妃)는 한씨(韓氏)로서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한확(韓確)의 딸이었습니다. 천순(天順)28453) 정축년28454) 7월 30일[辛卯]에 왕이 탄생하였는데, 회간왕이 세자가 되어 일찍 훙(薨)하자, 왕의 조부(祖父)인 혜장왕(惠莊王)28455)께서 왕을 궁중에 기르셨습니다. 왕은 천자(天資)가 영이(穎異)하고 기도(器度)가 웅위(雄偉)하므로, 혜장왕께서 기특히 여겨 사랑하셨으며,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셨습니다. 왕이 일찍이 동모형(同母兄)인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과 함께 왕궁(王宮)에 있었는데, 마침 천둥과 비가 갑자기 몰아쳐 시인(寺人)이 곁에 있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습니다. 좌우에서 모두 놀라 넘어지면서 넋을 잃었으나 왕은 조금도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하니, 혜장왕께서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성화(成化) 5년28456) 11월에 왕의 숙부(叔父)인 양도왕(襄悼王)28457)이 병(病)으로 위독하였는데, 아들은 나이가 어리고 또 병이 있었으므로 후계자를 고르는데 왕이 덕기(德器)가 숙성(夙成)하여, 효제(孝悌)하고 학문을 좋아함으로써 국무(國務)를 권서(權署)28458)하게 하였습니다. 양도왕이 승하하자, 왕이 배신(陪臣) 송문림(宋文琳)을 보내어 부음(訃音)을 고하고, 권감(權瑊)이 승습(承襲)28459)을 청하니, 성화 6년28460) 5월에 선황제(先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짐(朕)이 비도(丕圖)28461)를 이어 지키고 환우(寰宇)28462)를 무어(撫御)하여, 먼 지방과 외딴 지역까지도 모두 군장(君長)을 세워서 그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고, 대[世]가 바뀌면 봉작(封爵)을 내려 주는 것에 그 떳떳한 법이 있었다. 고(故) 조선국왕 이(李) 휘(諱)는 선왕(先王)을 이어 받들고 사대(事大)하여서 충효(忠孝)로 알려짐이 있었는데, 봉작을 받은 지 한 해를 지나지 못하여 부(訃)를 고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돌아보건대 이 서업(緖業)28463)은 마땅히 친족의 어진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므로, 이제 태감(太監) 김흥(金興)을 특별히 보내어 칙서(勅書)를 받들고 가서 왕의 조카 휘(諱)를 봉하여 조선국왕으로 삼아 국정(國政)을 이어서 다스리게 한다. 생각하건대 휘는 실로 혜장왕(惠莊王)의 손자이니, 본국의 대소신민(大小臣民)이 한 마음으로 받들어 순종하여, 동토(東土)를 화합하게 하고 중조(中朝)의 번병(藩屛)이 되어 그대의 선왕(先王)의 업(業)을 떨어뜨림이 없게 하라. 이는 짐이 그대 나라를 권애(眷愛)하는 뜻이다.’하였고, 또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짐(朕)이 홍도(鴻圖)를 공경히 이어서 병한(屛翰)28464)을 존중하는 데 힘썼다. 이에 먼 지방을 회유(懷柔)하여 가까이 하고, 한결같이 사랑하여 차별이 없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이 동번(東藩)28465)은 세상에서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일컬으니, 진실로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서 어진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조선 국왕의 조카 휘(諱)는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학문이 숙성(夙成)하여 국론(國論)이 돌아가는 바이므로 종조(宗祧)28466)를 이음이 마땅하다. 이제 특별히 조선국왕으로 봉하여 국사(國事)를 총통(總統)하게 한다. 아아! 오직 정성과 공경만이 몸을 닦을 수 있고 오직 예의(禮義)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오직 충성만이 사대(事大)를 할 수 있고, 오직 효도만이 종족을 보호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서 훈칙(訓飭)을 잊지 말지어다.’하였으며, 또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주달(奏達)한 것을 보건대 그대의 숙부(叔父) 왕(王) 휘(諱)가 성화(成化) 5년 11월 28일에 훙서(薨逝) 하였다고 하므로, 이에 특별히 태감(太監) 김흥(金興)과 행인(行人) 강호(姜浩) 를 보내어, 제문(祭文)을 가지고 가서 유제(諭祭)하게 하고 아울러 조서(詔書)를 가지고 그대의 국인(國人)에게 보이며, 그대 휘(諱)를 봉(封)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서 나라 일을 이어 맡게 한다. 아울러 그대의 처(妻) 한씨(韓氏)를 봉하여 왕비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선업(先業)을 공경히 지켜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히 할 것이며, 충성을 돈독히 하여 조정을 섬기고 신의(信義)를 두터이 하여 인국을 화목하게 하며 절검(節儉)을 몸소 행하여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여, 동토(東土)로 하여금 백성이 편하고 물건이 풍족하게 하며 영구히 중국의 번보(藩輔)28467)의 중함이 되게 하라. 짐(朕)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여 그대와 비(妃)에게 고명(誥命)과 면복(冕服), 채폐(綵幣)등의 물건을 내려 주니, 영수할 것이다.’하였는데, 왕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어 올려 사례하였습니다.
왕이 대소신료(大小臣僚)로 하여금 각각 시의(時宜)를 진술하게 하고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 6품 이상이 각각 어질고 능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습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효자(孝子), 절부(節婦)와 그 행실이 특이한 자에게 정문복호(旌門復戶)28468)하게 하여 이를 장려하고 홍문관(弘文館)을 대전(大殿)곁에 설치하여 문학과 재행(才行)이 있는 선비 17원(員)을 골라 뽑아서 날을 바꾸어 직숙(直宿)하게 하여,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고 도의(道義)를 바르게 간하거나 풍자하여 간하게 하였습니다.
성화(成化) 7년28469) 3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대뢰(大牢)28470)로 제사를 지내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문사(文士)로 하여금 경의(經義)를 문난(問難)하게 하였습니다. 11월에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유충(幼沖)하여 선업(先業)을 이어받았는데, 무릇 조정(朝政)의 득실(得失)과 민생(民生)의 이해(利害)를 마음을 다해 다스리고 정돈하였으나, 사기(事機)가 지극히 번거로워서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제 날씨가 춥고 음(陰)이 폐색(閉塞)하는 때를 당하여 건양(愆陽)28471)이 재앙을 이루니, 하늘의 뜻이 어찌 있는 바가 없겠는가?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하매 진실로 과매(寡昧)함에 말미암았다. 여러 번 바른 말을 구하였으나 말을 다해 극진히 간하는 자가 없고 여러 번 어질고 준수(俊秀)한 이를 구하였으나 미천한 사람을 추천해 드날리게 한 자가 없었다. 백사(百司)를 독려해 다스려도 오히려 해이함이 있고 옥언(獄讞)28472)을 심리(審理)하여도 오히려 억울함과 유체(留滯)됨이 있으며, 백성의 폐단을 부지런히 근심하였으나 억울함이 아직 많고 공역(功役)을 줄이기를 힘썼으나 공역을 일으킴이 그치지 아니하니, 이를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널리 효유(曉諭)하여 자세히 연구하여 아뢰게 하라.’하였습니다.
성화 8년28473)에 황태자(皇太子)의 부음(訃音)이 이르자 예관(禮官)이 다음날 거애(擧哀)하기를 청하니, 말하기를, ‘슬픔이 마음속에 간절한데 어찌 내일을 기다리겠는가?’고 하면서, 곧 백관(百官)을 거느리고는 거애하고 표(表)를 받들어 올려서 진위(陳慰)하였습니다. 5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생재(生財)는 근본(根本)28474)에 힘쓰는데 있고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쓰기를 절약하는데 있으니, 쓰기를 절약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검약(儉約)해야 할 것이다. 대저 사치하면 쓰임이 반드시 많을 것이고 쓰임이 많으면 재물이 반드시 고갈될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은 지력(地力)이 소박(疎薄)하므로 근검 절용한다하더라도 오히려 재용(財用)의 부족함을 근심할 것인데, 하물며 근본을 버리고 말단(末端)28475)에 따르며 생산하는 자가 이미 적은데도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쓰는 것을 절제 하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이를 염려하여 말리(末利)에 따르는 것을 엄하게 금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는 법을 정하며, 급하지 아니한 일은 파하고 무익한 비용을 없애어 그대 인민(人民)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려고 하니, 그대 인민은 농상(農桑)에 힘을 다하고 태만하지 말며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사치하지 말며, 재물을 헤아려 절약하여 쓸 것이며, 함부로 허비하지 말 것이다. 집과 나라는 크고 작음은 비록 다르더라도 그 대체는 한 가지이니, 진실로 능히 줄이고 절약하는 데 마음을 두면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대 인민은 각각 내 뜻을 체득하여 생업(生業)을 이루게 하라.’하였습니다. 왕이 일찍이 《상서(尙書)》를 보다가, ‘나무는 먹줄을 따라 깎으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諫)하는 말에 따르면 성(聖)해진다.’는 데에 이르자, 말하기를, ‘임금이 되는 도리(道里)가 무엇이 이보다 더함이 있겠는가? 임금뿐만 아니라 신하가 된 자도 능히 극진한 말을 받아들인 뒤에야 능히 그 임금을 간할 수 있으니, 그대들도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일찍이 사서(史書)를 읽다가,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도둑이 나타난 것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쫓아가 잡게 하였다. 그런데 아홉 사람중에서 네 사람은 도둑이 아닌데도 유사(有司)가 황제가 이미 참(斬)하기를 결정하였다고 하여 드디어 아뢰지 아니하고서 모두 죽였다.’는 데에 이르자, 왕이 말하기를, 양제(煬帝) 는 진실로 무도(無道)하다. 그러나 당시의 신하가 알면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양제로써 경계를 삼을 것이며 그대들은 또한 아뢰지 아니한 자로써 경계를 삼아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몸을 닦으면 또한 옳지 아니하겠는가?’하고, 또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이르기를, ‘정관(貞觀)28476) 초년에는 폐하께서 절검(節儉)하고 간(諫)함을 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셨는데 근래에는 영선(營繕)이 조금씩 많아지고 간하는 것에 자못 뜻을 거스림이 있습니다.’고 한데에 이르자, 왕이 말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능히 끝까지 잘하는 자가 드물다」고 하였는데, 태종의 초년에는 성대(盛大)하다고 이를 만하였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하였다. 태종의 어짊으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태종에게 미치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근래에 자못 영조(營造)를 일으켰는데, 비록 모두 부득이한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외(中外)에서 어떻다고 하겠는가? 내가 즉위[卽政]한 이래로 일찍이 일을 말한 한 사람의 신하도 죄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대들은 뜻을 거스리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일이 적당하지 못함이 있거든 마땅히 극진히 말하도록 하라.’하였습니다.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한 마리를 길렀는데 시신(侍臣)이 이를 말하자,
왕이 곧 놓아 보내라 명하고 끝내 다시 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성화 10년28477) 9월에 왕이 배신(陪臣) 김질(金礩)을 보내어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고 용렬한데도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어 선업(先業)을 얻어 지킨 지 몇해가 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의 소생부(所生父)28478) 신(臣) 휘(諱)는 선조(先祖) 혜장왕(惠莊王) 신(臣) 휘(諱)의 적자(嫡子)로서 명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조서(早逝)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이미 왕의 작위를 받았고 처도 비(妃)가 되었는데, 소생부는 세자라고 일컫고 소생모는 명호(名號)가 없으니, 일국의 신민(臣民)의 일컫는 말이 순조롭지 못하여 인자(人子)의 마음에 진실로 미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미 선신(先臣) 양도왕(襄悼王) 휘(諱)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의(義)로 보아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고, 또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성(天性)의 친(親)은 은의(恩義)가 또한 중하니, 현양(顯揚)하는 회포를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작(爵)을 내리고 시호[諡]를 내려서 작은 정성을 펴게 하여 효(孝)로 다스림을 넓히소서. 지극한 소원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하였는데, 선황제(先皇帝)가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주본(奏本)을 보건대 왕의 소생부(所生父) 휘(諱)는 먼저 세자에 책봉(冊封)되었다가 일찍 서거(逝去)하고, 소생모 한씨(韓氏)는 현재 있으나 모두 명호(名號)가 없어, 비록 남의 후계자가 되어 의(義)가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현양(顯揚)하려는 마음은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다는 등의 말을 인하여 왕의 효성을 갖추어 알겠다. 이에 특별히 고(故) 세자(世子) 휘(諱)를 조선국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회간(懷簡)으로 하며 한씨(韓氏)를 봉(封)하여 회간왕비(懷簡王妃)로 삼아서 왕의 어버이를 나타내려는 뜻을 이루게 하고 또 고명(誥命)과 아울러 비(妃)의 관복(冠服)을 내려 주니, 영수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왕이 은혜를 입자 감격하여 경내(境內)에 사유(赦宥)를 내리고 여러 신하에게 작(爵) 1급(級)을 내려 주었으며, 표(表)를 올려서 진사(陳謝)하였습니다.
성화 11년28479) 정월에 왕이 선농(先農)에 친히 제사하고,28480) 드디어 적전(籍田)28481)을 몸소 갈았습니다. 또 왕비로 하여금 친잠(親蠶)28482) 하게 하였는데 모두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습니다. 8월에 하교하기를, ‘옥(獄)을 맡은 관리가 잘못하는 바가 하나만이 아니다. 포학[苛暴]하고 심각(深刻)한 자는 항상 얽어짜는데 빠지고, 혼미(昏迷)하고 용나(庸懶)한 자는 항상 엄체(淹滯)함에 빠지니, 얽어짜기를 좋아하면 율문(律文)을 심각하게 하고 법을 준엄하게 하며 고신(栲訊)을 엄하게 하여 끌어다붙여서 일체 보태고 꾸미니 허물없는 사람이 형벌에 잘못 걸리며, 엄체하기를 좋아하면 머뭇거리고 결단하지 못하여 문득 세월이 흘러 질곡(侄梏)28483)을 몸에 가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여 슬프게 부르짖다가 병이 들어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한 사람이 상대하는 사람 없이 구석을 향하여 슬퍼하면 당(堂)에 가득한 사람이 즐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필부필부가 그 허물이 아닌데에 죽으면 허물이 장차 누구에게 있겠는가? 대저 옥사(獄辭)는 처음에는 복잡한 것 같으나 정(情)을 인연하여 추구(推究)하면 칼로 벤 듯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다만 법을 맡은 자가 뜻을 더하지 아니한 것뿐이다. 그대는 혹 나직(羅織)하지 말고 그대는 혹 엄체(淹滯)하지 말 것이다. 어짊과 용서함으로써 근본을 삼고, 밝고 진실함으로써 이를 행하여, 죽는 자로 하여금 허물에 승복하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하였습니다.
성화 12년28484) 봄에 선황제(先皇帝)가 황상(皇上)을 책봉하여 황태자로 삼고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왕은 본래 예의(禮義)를 가지고 조정을 충성으로 공경하였다. 이에 짐(朕)이 황저(皇儲)28485)를 세우고 여러 방면에 은혜를 베푸는데, 하물며 왕의 나라는 더욱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정사(正使) 호부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과 부사(副使) 행인사좌사부(行人司左司副) 장근(張瑾)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유시(諭示)하게 하고, 아울러 왕과 비(妃)에게 채폐(綵幣)와 문금(紋錦)을 내려주게 하니, 수령(收領)하여 짐의 권대(眷待)하는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하였습니다. 두 사신(使臣)이 왕을 보고 서로 이르기를, ‘참으로 어진 임금이다.’고 하였으며, 작별할 때에 임하여 정사(正使)가 시(詩)를 지어 왕에게 주었는데, 그 서(序)에 이르기를, ‘기순(祈順)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여러 번 왕과 더불어 서로 접견하고 마음으로 심히 아름답게 여겼다. 대저 그 어린 나이에 준수영오(俊秀穎悟)하여 유(儒)를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위덕(威德)이 널리 펴지어서 일국이 화목하니, 진실로 다른 나라에 짝이 드문 바이다.’하였습니다. 왕의 전세(前世)의 명군(明君)과 암주(暗主)가 행한 선악(善惡)의 사적(事跡)을 모아서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려 병풍을 만들게 하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시(詩)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여 앉으나 누우나 보고 살피면서 권계(勸戒)로 삼았습니다.
성화 13년28486) 8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서 선성(先聖)에게 술잔을 올리고 사례(射禮)를 행하였습니다. 인하여 제도관찰사(諸道觀察使)에게 하교(下敎)하여 소재지(所在地)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음사례(飮射禮)를 행하게 하고 해마다 상례(常禮)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국왕의 생일에 훈구(勳舊)의 신하가 승사(僧寺)에 나아가서 축리(祝釐)28487)하자, 왕이 말하기를, ‘《시경》에 「복을 구함이 간사하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파하라.’하였습니다.
성화 14년28488) 4월에 왕이 성균관에 나아가서 친히 선성(先聖)에게 제사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노인들에게 좋은 말을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왕이 여러 노인에게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안으로 색황(色荒)28489)을 하고 밖으로 금황(禽荒)28490)을 하며, 술마시기를 좋아하거나 집을 높이 짓고 담장을 치장하는 것들 중 하나라도 이런 것이 있으면 망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임금의 약석(藥石)28491)이다. 내가 일찍이 이것을 써서 좌우(座右)에 붙여 두고 항상 보고 살폈는데, 이제 또 여러 노인들의 진술한 바를 들으니 모두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절요(切要)한 말이므로, 내가 마땅히 마음속에 두고 잊지 아니하겠다.’하였습니다.
성화 15년28492) 겨울에 선황제가 사신을 보내 칙서를 내리기를, ‘건주(建州)의 여진(女眞)이 천명(天命)을 거역하고 은혜를 저버려서 여러 번 변경을 침략하기에 이미 감독(監督), 총병(總兵)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정병(精兵)을 뽑아 거느리고 기한을 정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그대 국왕은 계속해서 동번(東藩)이 되어 우리 국가에 충성을 바침이 더함이 있고 쇠함이 없으니, 짐이 심히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우리 군사가 적(賊)의 경내를 덮어, 적이 국경으로 달아나 숨는다면, 반드시 사로잡아 포로를 바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왕이 만일 편사(偏師)를 보내어 멀리서 응원하여 용맹한 군사의 위엄을 크게 떨쳐 견양(犬羊)28493)의 무리를 같이 섬멸하여서 역로(逆虜)가 이미 제거된다면, 왕의 적개(敵愾)28494)의 공(功)이 더욱 성할 터인데, 명성이 어찌 무궁토록 누리지 아니하겠는가?’하였는데, 왕이 곧 배신(陪臣)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치게 하였습니다. 어유소가 강물이 얼었다가 곧 녹자 군사가 건너기 어렵다고 하여 군사를 파하고 돌아오자, 왕이 어유소가 군기(軍期)에 미치지 못한 죄를 다스리고, 다시 배신(陪臣) 윤필상(尹弼商), 김교(金嶠)를 보내어 군사 4천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굴로 쳐들어가서 적의 무리를 사로잡고 참(斬)하며, 둔락(屯落)을 분탕(焚蕩)하고 아울러 사로잡힌 요동(遼東)의 인구를 찾아서 돌아왔습니다. 왕이 배신 어세겸(魚世謙)을 보내어 포로를 바치게 하니,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지난해에 건주(建州)의 도적이 배역(背逆)하므로 짐이 일찍이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대 나라 선왕(先王) 휘(諱)가 군사를 발하여 와서 도와서 능히 쳐서 이겼다. 그런데 이번에 도적이 그래도 악한 마음을 품고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므로 짐(朕)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던 바 왕이 군사를 발하여 와서 도왔는데, 전의 군사는 비록 강물의 얼음이 풀려서 건너기 어려움으로 인하여 우리 군사와 합세(合勢)하여 그 공을 같이 이룩함을 얻지 못하였으나, 뒤의 군사는 또한 적의 소굴에 들어가서 토벌하여 그 부속(部屬)을 사로잡고 참(斬)하며, 그 집과 양식을 불태우고 그들이 약탈한 우리 변위(邊衛)의 인구를 찾아서, 또 배신(陪臣)을 보내어 압송(押送)해 와서 바치게 하였으니, 왕의 충성은 선세(先世)의 뜻을 능히 이어 받들었다고 이를 만하고 짐의 명령을 저버림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아름다운 이름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제 내관(內官) 정동(鄭同)과 강옥(姜玉) 을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 백금(白金), 문금(紋錦), 서양포(西洋布)를 내려주게 하고, 그 영병관(領兵官)인 좌의정(左議政) 윤필상(尹弼商)과 절도사(節度使) 김교(金喬)에게도 각각 예(例)와 같이 하사하여 그 공로를 표창하게 하니, 왕은 공경히 이를 받을지어다.’하였는데, 왕이 표(表)를 받들어 올려서 진사(陳謝)하였습니다.
성화 17년28495) 8월에 영안도(永安道)의 수신(守臣)이 흰사슴을 얻어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놓아 보내라.’하였습니다. 10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원유(苑囿)를 설치한 것은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농한기[農隙]에 친히 무사(武事)를 강(講)하고 수선(蒐獮)28496)에 예(禮)를 거행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유사(有司)가 백성들이 나무하는 것을 금하여 새와 짐승이 더욱 성하니, 백성을 위해 해로움을 없애는 뜻에 어긋남이 있다. 예전에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풀 베고 나무하는 자도 가고 꿩이나 토끼를 잡는 자도 간다.」라고, 이제부터는 원유가 있는 곳에는 모두 금하는 것을 풀어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하도록 하라.’하였습니다.
성화 18년28497) 6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예전의 어진 임금은 어진이와 능한이를 선발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든 정치를 함께 다스렸다. 우리나라는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를 취하고 또 천거(薦擧)하는 법을 세워서 재덕(才德)이 있는 선비를 모두 등용(登庸)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어진이를 구하는 길이 넓지 아니함이 아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 빠뜨려진 구슬은 옛부터 어려워하는 바이니, 초택(草澤)과 암혈(巖穴) 사이에 어찌 재주를 품고 기이함을 가지고도 침울(沈鬱)하여 스스로 팔리지 못하는 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릇 그 지위에 있는 자는 유일(遺逸)28498)을 찾아서 모두 이름을 계문(啓聞)하라.’하였습니다. 11월에 왕이 유신(儒臣)을 불러 내전(內殿)에 들어오게 하여,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강(講)하게 하고, 인하여 선유(先儒)의 같고 다른 해설과 역대(歷代)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진 자취를 평론하게 하였으며, 때로 규풍(規諷)함이 있으면 왕이 부지런히 들었습니다. 밤이 깊어 여러 신하가 물러가기를 청하면 왕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는 때가 많으면 기질(氣質)의 변화가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내가 오늘 아직 듣지 못한 말을 얻어들어 유익함이 크고 많아 자못 피곤하지 아니하니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하였습니다.
성화 19년28499) 2월에 왕이 적자(嫡子) 휘(諱)를 세워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이 생각하건대 작토(爵土)28500)를 가진 자는 대[世]를 길이 전하는 계책을 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다.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은 뭇사람들의 뜻이 바라는 바와 합치되게 하려는 것이니, 고금(古今)이 그러한 것이다. 주본(奏本)을 보건대 온 나라 신민(臣民)이 뜰에 모여서 명을 청하여 왕자 휘(諱)를 세워 세자로 삼으려고 하나, 왕이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사신을 보내어 아뢴다고 하니, 짐이 보고 특별히 윤허하고, 곧 명하여 태감(太監) 정동(鄭同)을 정사(正使)로 삼고, 김흥(金興) 을 부사(副使)로 삼아 칙서와 아울러 저사(紵絲), 사라(紗羅)등 물건을 가지고 가서 휘(諱)를 봉하여 조선국왕세자(朝鮮國王世子)로 삼게 하니, 그 맞추어 쓸 관복(冠服)은 왕의 나라에서 스스로 만들 것이다. 대저 조정의 명령은 왕이 받들 것이며, 번방(藩邦)의 그릇[器]28501)은 세자가 맡을 것이다. 천지(天地)의 분수는 때를 넘을 수 없음을 알아서 위를 섬기는 정성으로써 거느리며, 국체(國體)를 잇는 도(道)는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알아서 예(禮)를 지키는 가르침에 따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근본이 더욱 튼튼하고 명예가 더욱 높아져서 왕의 표문[表]을 받들어 사례를 올렸습니다. 왕이 명유(名儒)를 뽑아서 세자의 사우(師友)로 삼고 경사(經史)를 주어 서로 갈고 닦게 하며, 또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게 하니, 무릇 교양(敎養)하게 하는 바가 지극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습니다. 3월에 왕의 조모 혜장왕비(惠莊王妃) 윤씨(尹氏)가 승하(昇遐)하자 왕이 슬퍼하여 병이 났는데, 대신들이 술을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슬픔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면서, 굳이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성화 20년28502) 4월에 하교하기를, ‘백성을 가까이 다스리는 관리로서 수령(守令)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수령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생민(生民)의 큰 근심이 된다. 한 달을 관직에 있으면 한 달의 해(害)를 끼치고, 한 해를 관에 있으면 한 해의 해를 끼치는 것이니, 하물며 3기(三朞), 6기(六朞)의 오램이겠는가?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가혹한 정사는 호랑이보다 사납다.」고 하였으니, 대저 아래에서 가혹한 정사를 행하면 임금이 비록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겠는가? 내가 양덕(涼德)28503)으로써 외람되게 선업(先業)을 이어받아서 신민(臣民)의 위에 임한 지 15년인데, 그 사이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잇따라서 백성이 굶주림을 만났으니, 이는 비록 나의 덕이 없는 소치라고 하더라도, 또한 백성을 가까이 다스리는 관리가 침해를 일삼고 가혹하게 살피는 것으로 밝게 한다고 여겨,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형벌이 함부로 행해져, 그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서 한갓 자기만 살찌우기에 힘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방면(方面)의 신하는 비록 자거(刺擧)28504)의 임무를 맡았으나 그 선악[薰蕕]을 구분하는 데 어둡고 전최(殿最)28505)를 잘못하여 가끔 자상개제(慈祥豈弟)한 자가 억울함을 품고 탐포간회(貪暴奸回)한 자가 뜻을 얻음이 있으니,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앙(災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라고 못할 것이다. 내가 별도로 올리고 내치는 것을 의논하여 권징(勸懲)을 보이고자 하니, 이에 그대 의정부(議政府)는 각각 아는 바를 분별하여 아뢰라.’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순량(循良)285 06)하여 다스리는 공(功)이 있는 자와 탐하고 나태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없는 자를 들어서 아뢰니, 곧 올리고 내칠 것을 명하였습니다. 5월에 왕이 명하여 조맹부(趙孟頫)28507)가 쓴 글자를 본떠 모아 장온고(張蘊古)28508)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便殿)에 걸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친히 왕우칭(王禹偁)28509)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주면서 승지(承旨)들에게 이르기를, ‘왕우칭의 대루원기가 비록 집정(執政)을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벼슬에 있는 백집사(百執事)28510)가 모두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할 만하다. 더욱이 그대 승정원이 추기(樞機)28511)의 곳임에랴?’하였습니다. 12월에 하교하기를, ‘학교(學校)는 풍화(風化)의 큰 근원이며 어진인재는 국가의 이기(利器)인데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의 희름(餼廩)28512)이 풍족하지 못하니, 내가 숭상하는 뜻이 아니다. 전사(田肆) 1백 경(頃)을 주어서 그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주부군현(州府郡縣)의 학교에도 차등이 있게 주어라.’하였습니다. 왕이 일찍이 가뭄으로 인하여 제도(諸道)에서 공진(供進)하는 물건을 감하라고 명하자, 경상도 수신(守臣)이 아뢰기를, ‘해산물[海錯]과 같은 종류는 구하기가 쉬우니, 예전대로 올리기를 청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가 윗사람을 받드는 뜻은 비록 정성스러우나 임금이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뜻이 또한 간절하니,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23년28513) 가을에 왕이 선황제가 승하(昇遐)한 것을 듣자 곧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곧 배신(陪臣) 변종인(卞宗仁)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이봉(李封)은 진향(進香)하였으며, 노사신(盧思愼)은 황상(皇上)의 등극(登極)을 하례하게 하였습니다.
홍치(弘治) 원년28514) 봄에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朕)이 조종(祖宗)의 홍업(鴻業)을 이어받아서 만방(萬方)을 통어(統御)하니, 성교(聲敎)가 미치는 곳에는 마땅히 은택(恩澤)을 널리 베풀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왕의 나라는 대대로 충성이 돈독하니, 내려주는 예물을 더욱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할 바이므로, 특별히 정사(正使) 우춘방우서자겸한림원시강(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講) 동월(董越)과 부사(副使) 공과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가지고 가서 왕에게 유시(諭示)하고, 아울러 왕과 비(妃)에게 폐백(幣帛), 문금(紋錦)을 내려주게 하였으니, 수령(收領)할 것이며, 더욱 짐의 사랑하는 마음을 체득하여 예(禮)를 잡고 의(義)에 따라서 번보(藩輔)를 더욱 융성하게 하여 함께 태평한 복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정사(正使)가 왕을 보고 탄복하기를, ‘노생(老生)28515)이 예전에 듣건대 현왕(賢王)이 학문이 높고 밝으며, 예의(禮義)에 통달하다고 하더니, 이제 다행히 눈으로 보니, 과연 본래 들은 바와 합한다.’하였습니다. 11월에 대간(臺諫)이 옛날 이윤(伊尹)28516)과 소공(召公)28517)이 그 임금에게 권계(勸戒)했던 말을 써서 올리며 규경(規警)하는 뜻을 붙였는데, 왕이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금 그대들의 올린 말을 보건대 대개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 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궁온(宮醞)을 내려주고 밤이 되자 궁중의 초[燭]를 거두어서 보냈습니다.
홍치 2년28518) 정월에 어떤 거자(擧子)28519)가 향시(鄕試)의 대책(對策)에 부처에게 제사하여 화(禍)를 물리칠 것을 말하였으므로 시관(試官)이 이를 물리쳤는데, 왕이 이를 듣고는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유생(儒生)의 대책에 쓴 말을 내가 매우 분(憤)하게 여긴다. 부처의 해(害)를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하물며 공자(孔子), 맹자(孟子)를 배우는 자이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이단(異端)을 전공하면 이는 해(害)가 된다.’고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능히 말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이다.’라고 하였으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해는 양주, 묵적 보다 심하니, 마땅히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女色)과 마찬가지로 멀리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후세의 배우는 자가 힘써 살피고 밝게 분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치도(緇徒)들이 천상(天常)28520)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 것을 한(恨)스러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끊고 세상의 교화를 붙들어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제 유생이 국가에서 어진이를 올려 쓰는 날을 당하여 요(堯), 순(舜)의 도(道)를 진술하지 아니하고 부도(浮屠)의 법을 고창(鼓唱)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같이 사신(捨身)하고 당(唐)나라 헌종(憲宗)과 같이 막배(膜拜)28521)하게 한 뒤에 그만두게 하려는 것인가? 유자(儒者)라고 일컫는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무식한 사녀(士女)이겠는가?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국(推鞫)하여 먼 지방에 내쳐서 좋아하고 싫어함을 밝게 보이게 하라.’하고, 또 해조(該曹)에 명하여 도승법(度僧法)을 회복시키지 말게 하였습니다. 왕이 향학(鄕學)에 서적(書籍)이 적다고 여겨 《사서(四書)》,《오경(五經)》과 제사(諸史)를 인쇄하라고 명하고 제도(諸道)에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홍치 3년28522) 윤9월에 왕이 장헌왕(莊憲王)28523)의 묘(墓)에 참배하고 지나가는 고을에 관원을 보내어 선성(先聖)의 묘(廟)에 치제(致祭)하고 학생(學生)에게 쌀을 차등있게 주었습니다. 또 대가(大駕)가 머무는 곳에는 공돈(供頓)에 수고한 비용으로 이 해 전조(田租)의 반(半)을 감하게 하였습니다. 겨울에 성변(星變)이 있자 일관(日官)이 초제(醮祭)28524)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앙(災殃)이 변하여 상서로움이 되는 것은 덕을 닦는 데에 있고 기양(祈禳)28525)에 있지 아니하다.’하였습니다.
홍치 4년28526) 5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지친(至親)인 사람은 한 몸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숙질(叔姪)은 부자(父子)의 의(義)가 있고 형제는 천륜(天倫)의 중함이 되니, 마땅히 화목한 행실을 돈독히 하여 돈목하고 후한 풍속을 이루게 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왕상(王商)28527)이 후(侯)가 되자 재산을 미루어 동생에게 주었고, 설포(薜包)28528)는 분재(分財)할 때 나쁜 물건은 자기 자신이 가졌는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습속(習俗)이 요박(澆薄)하여 혹은 서로 다투는 자도 있고 혹은 서로 꾸짖고 원망하기도 하니, 골육(骨肉)을 잔상(殘傷)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이 뒤로는 형제, 숙질이 쟁단(爭端)을 일으켜서 속이고 거짓을 행하는 것이 현저(現著)한 자는 모두 변경에 옮기게 하여 풍속을 후하게 하라.’하였습니다. 또 하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중외(中外)에 일이 없으므로,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음식, 복완(服玩)28529), 거마(車馬), 제사(第舍)가 모두 사치하고 화려함이 지극하니, 내가 심히 그릇되게 여긴다. 오직 그대 신료(臣僚)들은 검약(儉約)하기에 힘쓸 것이며 폐풍(弊風)을 고치도록 하라.’하였습니다. 11월에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금년은 곡식이 조금 풍년이 들었는데 세(稅)를 거두는 것이 너무 가볍습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어찌하여 부족하겠는가? 백성에게 1분(分)을 감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아니하겠는가?’하였습니다. 평안도에 변경(邊警)이 있어 병조(兵曹)에서 본도(本道)의 군사로 하여금 모두 변경을 지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番)을 나누어 방수(防戌)하도록 예전부터 법이 있었다. 누가 부모가 없으며 누가 처자가 없겠는가? 처자와 집을 떠나있는 것을 내가 심히 가엾게 여긴다. 번을 나누어 가서 방수하게 하라.’하였습니다.
홍치 5년28530) 정월에 성균관전고리(成均館典庫吏)가 쌀 약간을 소모하였으므로 유사(有司)가 추상(追償)하게 하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작을지라도 어찌 어진 선비를 기르는 자본이 없겠는가? 추상하지 말고 특별히 미포(米布)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8월에 왕이 성균관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사생(師生)과 백료(百僚)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며 이르기를, ‘술을 마시되 진실로 어지러운데 이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일은 진실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뜻이므로 각각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게 먹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학궁(學宮)을 중수(重修)하게 하였습니다.
홍치 6년28531) 6월에 왕이 병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28532)가 있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왕이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야흐로 장마가 져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까 두려운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번거롭게 하겠는가?’하였습니다. 12월에 해조(該曹)에서 원일(元日)에 예연(禮宴)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임금은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그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홀로 즐기는 것이 가하겠는가? 정지하라’하였습니다. 왕이 전대(前代)의 여러 왕과 명현(名賢)의 묘(墓) 중에 혹시 허물어진 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는 곳에 명하여 수즙(修葺)하게 하고 초목(樵牧)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홍치 7년28533) 12월에 왕의 병이 미류(彌留)하였으나 오히려 청단(聽斷)을 멈추지 아니하고, 병이 위독해지자 관복(冠服)을 갖추고 대신을 인견(引見)하여 뒤의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이튿날 24일[己卯]에 정침(正寢)에서 승하하니, 비록 어린아이와 부녀라 할지라도 달려와서 슬퍼하며 울부짖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향년(享年)이 38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26년입니다.
왕은 총명영무(聰明英武)하고 관인공검(寬仁恭儉)하며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뜻이 독실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함에 미쳐서는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 진독(進讀)하게 하고 밤에도 소대(召對)28534)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권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리학(性理學)28535)에 더욱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백가(百家), 성력(星曆), 종률(鍾律)에 이르기까지 통하여 밝지 아니함이 없었고, 사예(射藝)와 초예(草隷)28536)에도 그 묘(妙)함에 이르렀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대(事大)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무릇 공헌(貢獻)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친히 스스로 감시(監視)하였습니다. 한인(漢人)으로서 사로잡혔다가 오랑캐들로부터 도망해 오는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후히 주어서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냈는데, 전후에 모두 5백55인(人)이었습니다.
왕은 천성(天性)이 효우(孝友)하여 혜장왕비(惠莊王妃)28537), 회간왕비(懷簡王妃)28538), 양도왕비(襄悼王妃)28539)가 한 궁(宮)에 같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섬겨서 하루에 세번 문안하고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친히 조리하며 약이(藥餌)를 반드시 먼저 맛보아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혜장왕비 가 만년(晩年)에 병으로 앓았는데, 매양 왕을 보면 문득 조금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제사일에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일이 있지 아니하면 반드시 친히 행하였습니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은혜와 예(禮)가 모두 지극하였고, 졸(卒)함에 미쳐서는 슬퍼한 나머지 철선(輟膳)하여 병을 이루는데 이르렀습니다. 종실(宗室)의 여러 친족도 때때로 내전(內殿)에 불러보고 술자리를 차려 놓고 가인(家人)의 예(禮)를 행하여 화락하게 하였습니다. 가법(家法)이 심히 엄하여 궁곤(宮壼)이 숙연(肅然)하였으며, 여러 아들이 비록 어리더라도 옳은 방법으로 가르쳐서 모두 성인(成人)의 덕(德)이 있었습니다. 대신(大臣)을 접대하기를 예(禮)로 하여 매양 진현(進見)할 때에 태만한 모습을 가진 적이 없었고, 비록 작은 관리라도 모두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죄가 있으면 너그럽게 용서함이 많았으며 세상을 마치도록 형륙(刑戮)을 당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환시(宦寺)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관대(寬貸)함이 없었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과 더불어 자세히 의논하여 처치하였으며, 조신(朝臣)으로 하여금 윤대(輪對)하게 하여 조정 정사의 득실(得失)을 물었습니다. 사람을 쓰는 즈음에 그 단점(短點)을 배척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장점(長點)을 취하고 반드시 〈모든 것을〉구비할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매년 봄, 가을로 친히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한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각 있는 곳에서 대접하게 하였으며, 가난하여 시집가지 못한 처녀에게는 자장(資裝)을 관(官)에서 주어서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수령이 배사(拜辭)하면 반드시 인견(引見)하고 계유(戒諭)하였으며, 사신(使臣)을 자주 보내어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었습니다. 달마다 두 번 열무(閱武)하고 해마다 수선(蒐獮)을 강(講)하여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청단(聽斷)하는 여가에 문사(文士)를 불러서 경사(經史)를 상고해 묻고 겸하여 문예(文藝)를 시험하며, 우림(羽林)28540) 군사에게도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간혹 후원(後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하여 권려(勸勵)하고 성취(成就)하게 하였습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모두 구도(矩度)가 있었으며, 이단(異端)에 혹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며, 유전(遊畋)을 경계하고 절검(節儉)을 숭상하였으며, 상서(祥瑞)가 이르게 하고 음사(淫祀)를 금하였으며, 직간(直諫)하는 선비를 포상(褒賞)하고 충신(忠臣)의 후손을 녹용(錄用)하였으며, 패상(敗常)28541)의 법을 엄중하게 하고 장리(贓吏)의 법을 엄하게 하였으며, 형벌이 지나치지 아니하여 영어(囹圄)28542)가 여러 번 비었었습니다. 깊은 사랑과 후한 은혜가 온 나라에 젖었는데, 슬프다!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아니하여 갑자기 이에 이르렀으니, 애통하도다.”하였다.
註28452]회간왕(懷簡王): 덕종(德宗).註28453]천순(天順):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註28454]정축년: 1457 세조 3년.註28455]혜장왕(惠莊王): 세조(世祖).註28456]성화(成化) 5년: 1469 예종 원년. 성화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註28457]양도왕(襄悼王): 예종(睿宗).註28458]권서(權署): 대행.註2845 9]승습(承襲): 왕위를 이어받음.註28460]성화 6년: 1470 성종 원년.註 2846 1]비도(丕圖): 제위(帝位).註28462]환우(寰宇): 천하.註28463]서업(緖業): 왕위 계승.註28464]병한(屛翰): 제후국을 가리킴.註28465]동번(東藩): 조선을 가리킴.註28466]종조(宗祧): 종묘. 왕위를 뜻함.註28467]번보(藩輔): 제후(諸侯)를 가리킴.註28468]정문복호(旌門復戶): 열녀(烈女), 의부(義婦)등을 상줄 때 그 문려(門閭)에 홍문(紅門)을 세워주고, 그 집에 조세(租稅)를 면제하여 주던 것.註28469]성화(成化) 7년: 1471 성종 2년.註28470]대뢰(大牢): 소,양, 돼지 세 가지 희생을 갖춘 제수(祭需).註28471]건양(愆陽): 겨울날이 따뜻함.註28472]옥언(獄讞): 옥사를 평의함.註28473]성화 8년: 1472 성종 3년. 註28474]근본(根本): 농사를 가리킴.註28475]말단(末端): 농업 외의 상공업을 가리킴.註28476]정관(貞觀): 당태종의 연호.註28477]성화 10년: 1474 성종 5년.註28478]소생부(所生父): 낳은 아버지.註28479]성화 11년: 1475 성종 6년.註28480]선농(先農)에 친히 제사하고: 동교(東郊)의 제단(祭壇)에서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지내던 제사. 경칩(驚蟄) 후의 길일(吉日)인 해일(亥日)에 행하였음 註28481]적전(籍田): 임금이 친히 밟고 가는 전지라는 뜻으로, 임금의 친경전(親耕田)을 말함.註28482]친잠(親蠶): 양잠(養蠶)을 장려하기 위하여 왕후(王后)가 몸소 누에를 치는 것을 말함 註28483]질곡(侄梏): 수갑과 차꼬.註28484]성화 12년: 1476 성종 7년.註28485]황저(皇儲): 황태자.註28486]성화 13년: 1477 성종 8년.註28487]축리(祝釐):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복을 빔 註28488]성화 14년: 1478 성종 9년.註28489]색황(色荒): 여색에 빠짐.註28490]금황(禽荒): 사냥하는데 탐닉(耽溺)함 註28491]약석(藥石): 경계가 되는 유익한 말.註28492]성화 15년: 1479 성종 10년.註28493]견양(犬羊): 여진을 가리킴.註28494]적개(敵愾): 제왕(帝王)을 위하여 원한을 풀려고 함.註28495]성화 17년: 1481 성종 12년 註28496]수선(蒐獮): 봄 사냥과 가을 사냥.註28497]성화 18년: 1482 성종 13년.註28498]유일(遺逸): 빠뜨려진 인재.註28499]성화 19년: 1483 성종 14년.註28500]작토(爵土): 작위(爵位)와 영지(領地).註28501]그릇[器]: 명위(名位)와 작호(爵號)를 가리킴. 註28502]성화 20년: 1484 성종 15년.註28503]양덕(涼德): 박한 덕.註28504]자거(刺擧): 악(惡)을 꾸짖고 선(善)을 쳐듦.註28505]전최(殿最):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정하던 일.註28506]순량(循良): 법을 지켜 백성을 잘 다스림.註28507] 조맹부(趙孟頫): 원(元)나라의 문인(文人).註28508]장온고(張蘊古): 당나라 때 문장가.註28509]왕우칭(王禹偁): 송나라 때 문장가.註28510]백집사(百執事): 백관(百官).註28511]추기(樞機): 중요한 기관.註2851 2]희름(餼廩): 녹미(祿米).註28513]성화 23년: 1487 성종 18년.註28514]홍치(弘治) 원년: 1488 성종 19년.註28515]노생(老生): 자신을 가리킴.註28516]이윤(伊尹): 은(殷)나라 때 명신 註28517]소공(召公): 주(周)나라 때 명신.註 28518]홍치 2년: 1489 성종 20년.註28520]천상(天常): 인륜(人倫).註 2852 1]막배(膜拜): 땅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절함 註28522]홍치 3년: 1490 성종 21년.註28523]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註28524]초제(醮祭): 별에 지내던 제사.註28525]기양(祈禳):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침.註28526]홍치 4년: 1491 성종 22년.註28527]왕상(王商): 한(漢)나라 때 사람.註28528]설포(薜包): 후한(後漢) 때 사람.註28529]복완(服玩): 의복과 노리개.註28530]홍치 5년: 1492 성종 23년.註28531]홍치 6년: 1493 성종 24년.註28532]즉어(鯽魚): 붕어.註28533]홍치 7년: 1494 성종 25년 註28534]소대(召對): 경연(經筵)의 참찬관(參贊官) 이하를 불러서 임금이 몸소 글을 강론(講論)함을 말함.註28535]성리학(性理學):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례를 설명(說明)한 유교철학(儒敎哲學). 송(宋)나라의 주염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희(朱熹)등이 주창(主唱)한 학설(學說).註28536]초예(草隷): 초서와 예서.註28537]혜장왕비(惠莊王妃): 세조비.註28538]회간 왕비(懷簡王妃): 덕종비.註28539]양도왕비(襄悼王妃): 예종비.註28540]우림(羽林): 궁중의 숙위(宿衛), 배종(陪從), 호위(護衛)를 맡은 군대 註28541]패상(敗常): 삼강오륜(三綱五倫)에 위배되는 행위 註28542]영어(囹圄): 감옥.
○其申禮部行狀曰:
國王姓某諱某, 懷簡王第二子, 母妃韓氏, 議政府左議政確之女也。 以天順丁丑七月辛卯生王, 懷簡王爲世子早薨, 王祖父惠莊王, 育王于宮中。 王天資穎異器度雄偉, 惠莊王特奇愛之, 封爲者山君。 王嘗與〔同〕母兄月山君婷, 在王宮, 適雷雨暴作, 有寺人在傍震死。 左右皆顚仆褫魄, 王略不動色, 惠莊王尤異之。 成化五年十一月, 王叔父襄悼王病革, 嗣子年幼且病, 擇所宜後, 以王德器夙成, 孝悌好學, 令權署國務。 及襄悼王薨, 王遣陪臣宋文琳告訃, 權瑊請承襲, 六年五月先皇帝賜詔曰: ‘朕嗣守丕圖撫御寰宇, 遐方絶域咸立君長, 俾治其民, 易世錫封厥有彝典。 故朝鮮國王 李諱承先事大, 忠孝有聞, 受封未及踰年, 告訃遽云卽世, 顧玆緖業宜屬親賢, 今特遣太監金興齎勑, 封王之姪諱爲朝鮮國王, 繼總國政。 惟諱實惠莊王之孫, 本國大小臣民, 其一心奉順, 用輯和東土藩屛中朝, 無替爾先王之業。 斯稱朕眷待爾國之意。’ 又賜制曰: ‘朕祗紹鴻圖懋隆屛翰, 肆懷遠以爲近, 庶一視仁仁。 眷此東藩世稱秉禮, 允惟承序, 宜屬仁賢。 朝鮮國王姪諱聰明天賦, 問學夙成, 國論攸歸宗祧當繼。 今特封爲朝鮮國王, 總統國事。 於戲! 惟誠敬可以修身, 惟禮義可以爲國, 惟忠可以事大, 惟孝可以元宗。 尙愼始終毋忘訓飭。’ 又賜勑曰: ‘得奏爾叔王諱, 於成化五年十一月二十八日薨逝, 玆特遣太監金興、行人姜浩, 齎文諭祭, 幷齎詔示爾國人, 封爾諱爲朝鮮國王繼主國事, 幷封爾妻韓氏爲王妃, 爾宜敬守先業保國安民, 篤忠誠以事朝廷, 敦信義以睦隣境, 躬節儉以舒財用, 俾東土民物康阜, 永爲中國藩輔之重。 朕惟爾嘉, 特頒賜爾及妃誥命, 晩服、綵幣等件至可領也。’ 王遣陪臣奉表稱謝。 王令大小臣僚各陳時宜, 宗親文武六品以上, 各擧賢能。 命該曹, 孝子節婦其行卓異者, 旌門復戶以奬之。 設弘文館於殿側, 選文學才行之士十七員, 更日直宿, 侍講經史規珌義。 七年三月王至成均館, 謁先聖祀以大牢, 坐明倫堂, 令文士問難經義, 十一月上敎曰: ‘予以幼沖纉承先業, 凡朝政得失民生利害, 盡心釐整, 然事機至繁罔知攸措。 今當冱寒陰閉之時, 愆陽爲災, 天意豈無所在歟? 反身省己實由寡昧。 累求直言未有盡言極諫者, 累求賢俊未有明揚側陋者。 董治百司猶有懈弛, 審理獄讞猶有冤滯, 勤恤民隱而無告尙多, 務省功役而興作不息, 其令政府廣曉中外, 詳究以啓。’ 八年三月皇太子訃音至, 禮官請以明日擧哀, 王曰: ‘哀切於中, 奚待明日?’ 卽率百官擧哀, 奉表陳慰。 五月下敎曰: ‘生財在於務本, 裕財在於節用, 如欲節用必先儉約。 蓋奢侈則用必廣, 用廣則財必竭。 念我東方地力踈薄, 勤儉節用猶患財用之不裕, 況棄本逐末, 生之者旣寡, 事尙華侈, 用之者不節哉? 予爲是慮嚴逐末之禁, 定役民之法, 罷不急之務, 除無益之費, 庶不擾爾人民, 爾人民盡力農桑勿爲惰慢, 崇尙節儉勿爲奢靡, 量財節用勿爲橫費, 家之與國大小雖殊, 其體則一, 苟能存心省約, 於裕國乎何有? 爾人民各體予意, 以遂生業。’ 王嘗觀尙書, 至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謂侍臣曰: ‘爲君之道孰有加於此乎? 非獨人君, 爲臣者能受盡言而後, 能諫其君, 爾等亦宜知之。’ 嘗讀史至隋煬帝勿發, 使人逐捕。 九人內四人非賊, 有司以帝已令斬決, 遂不執奏竝殺之, 王曰: ‘煬帝固爲無道, 然當時之臣知而不言, 豈得無罪? 予以煬帝爲戒, 爾等亦以不執秦者爲戒, 君臣交修不亦可乎?’ 又讀至魏徵言於太宗曰: ‘貞觀之初, 陛下節儉求諫不倦, 比來營繕微多, 諫者頗有忤旨。’ 上曰: ‘古稱: 「鮮克有終。」 太宗之初可謂盛矣, 至於末年漸不如初。 以太宗之賢猶若此, 況不及太宗者乎? 近來頗興營造, 雖皆出於不得已, 中外以謂何如? 予卽政以來, 未嘗罪一言事之臣, 爾等勿以忤旨爲虞, 事有不便當盡言之。’ 鷹坊嘗畜一海東靑, 侍臣以爲言, 王卽命放之, 終不復畜。
十年九月, 王遣陪臣金礩奏曰: ‘臣以愚庸特蒙聖恩, 得守先業有年。 顧惟所生父臣諱, 先祖惠莊王臣諱嫡子, 受命爲世子, 不幸早逝。 今臣旣受王爵, 妻亦爲妃, 而所生父稱世子, 母無名號, 一國臣民稱說不順, 於人子之心誠有未安。 然臣旣爲先臣襄悼王諱之後, 義不可顧私親, 且懼天威囁嚅至今。 竊念天性之親, 恩義亦重, 顯揚之懷不能自已, 敢昧死塵瀆, 伏望聖慈賜爵、賜謚, 俾伸微誠以廣孝理。 不勝至願。’ 先皇帝賜勑曰: ‘得奏, 王所生父諱, 先封世子早逝, 及所生母韓氏見在, 俱未有名號, 雖爲人後者義不可顧私親, 然顯揚之懷不能自已等, 因具悉王之孝忱。 玆特追封故世子諱, 爲朝鮮國王, 謚懷簡。 封韓氏爲懷簡王妃, 以遂王顯親之志, 及頒給誥命, 幷妃冠服, 至可領也。’ 王蒙恩感激, 宥境內, 賜群臣爵一級, 奉表陳謝。
十一年正月, 上親祭先農, 遂躬耕籍田。 又令王妃親蠶, 皆如其儀。 八月下敎曰: ‘司獄官吏所失非一, 苛暴深刻者, 常失於羅織, 昏迷、庸懶者, 常失於淹滯。 好羅織則深文峻法, 嚴加栲訊援引傅會, 一切增飾, 無辜之人橫罹斧鑕, 好淹滯則依違不決, 動隔炎涼桎梏加體, 飢寒切身悲號疾病, 遂死狴獄, 豈不冤哉? 嘗聞一人向隅, 滿堂不樂。 匹夫匹婦死非其辜, 咎將誰執? 大抵獄辭, 初若轇輵緣情推究, 迎刃自解。 但司臬者, 不加之意而已, 毋或爾羅織、毋或爾淹滯。 本之以仁恕、行之以明允, 使死者服辜, 生者無冤, 豈不美哉?’
十二年春, 先皇帝冊皇上, 爲皇太子, 賜勑曰: ‘王素秉禮義忠敬朝廷。 玆朕建立皇儲嘉惠多方, 矧惟王國尤所當厚, 特遣正使戶部郞中祈順、副使行人司左司副張瑾, 齎詔諭王, 幷賜王及妃綵幣紋錦, 至可收領, 用副朕眷待之意。’ 兩使見王相謂曰: ‘眞賢王也。’ 臨別正使作詩贈王, 其序云: ‘順使朝鮮, 累與王相接, 心甚嘉之。 蓋其妙齡秀穎, 崇儒好學, 威德旁敷, 一邦輯睦, 誠他邦所罕儷也。’ 王採前世明君暗主所行善惡事迹, 命工圖畫爲屛, 命詞臣作詩, 書于其上, 坐臥觀省, 以爲勸戒焉。
十三年八月, 王詣成均館, 酌獻先聖, 行射禮, 仍下敎諸道觀察使, 令所在官守令, 行飮射禮, 歲以爲常。 前此國王生日, 勳舊之臣就僧寺祝釐。 王曰: ‘詩不云乎?: 「求福不回。」 豈可侫佛而求福哉? 其罷之。’
十四年四月, 王詣成均館, 親祀先聖, 坐明倫堂養老乞言。 王謂群老曰: ‘書云 「內作色荒, 外作禽荒, 甘酒嗜飮, 峻宇雕墻, 有一於此, 靡或不亡。」 此實人君之藥石。 予嘗書此貼於座右, 常常觀省, 今又聞諸老所陳, 皆修身治國切要之言, 予當服膺勿失。’
十五年冬, 先皇帝遣使賜勑曰: ‘建州女眞, 逆天背恩, 累寇邊陲, 已令監督、總兵等官, 選領精兵刻期征勦。 惟爾國王紹作東藩, 輸忠於我國家, 有隆無替, 朕甚嘉悅。 我兵壓境, 賊有奔竄國境, 諒必擒而俘獻之, 王如申遣偏師, 遙相應援大奮貔貅之威, 同殲犬羊之孽, 逆虜旣除, 則王敵愾功勤愈茂, 而聲名豈不有以享於無窮哉?’ 王卽遣陪臣魚有沼等, 領兵入攻。 有沼以江水氷合旋解, 難於渡師罷兵廻還。 王治有沼不及軍期之罪, 更遣陪臣尹弼商、金嶠, 領兵四千直擣賊穴, 俘斬醜類焚蕩屯落, 幷得被虜遼東人口而還。 王遣陪臣魚世謙獻俘, 先皇帝賜勑曰: ‘往年建賊背逆, 朕嘗出師致討, 而爾國先王諱, 發兵來助用能克捷矣。 玆者賊猶稔惡不悛, 朕從廷議, 仍出師討之, 王發兵來助, 雖前兵因江水凍解難濟, 不獲與我師合勢, 同成厥功, 而後兵, 亦抵巢攻勦, 擒斬其部屬, 焚燬其廬舍蓄峙, 得其所掠我邊衛人口, 又遣陪臣押赴來獻。 王之忠誠, 於先世可謂能繼, 於朕命可謂無負矣。 令聞寧有窮已耶? 今遣內官鄭同、姜玉, 至王國, 賜王綵叚、白金、紋錦、西洋布, 其領兵官左議政尹弼商、節度使金嶠, 亦各如例有賜, 以旌勞勩, 王其欽承之。’ 王奉表陳謝。
十七年八月, 永安道守臣獲白鹿以聞, 王曰: ‘此非予所喜, 其放之。’ 十月下敎曰: ‘苑囿之設, 非以病民也。 常於農隙親講武事, 擧蒐獮之禮耳。 今有司禁民樵採, 禽獸益繁, 有乖爲民除害之義。 古不云乎?: 「芻蕘者往焉, 雉兔者往焉。」 自今苑囿所在, 悉令弛禁, 與民共之。’
十八年六月, 下敎曰: ‘古昔賢君莫不選賢與能, 共康庶績。 我國家設科取士, 又立薦擧之法, 欲其才德之士, 咸使登庸, 求賢之路不爲不廣。 然滄海遺珠自古所難, 草澤巖穴之間, 豈無懷才抱奇, 沈鬱而不能自售者乎? 凡厥在位搜訪遺逸, 咸以名聞。’ 十一月, 王引儒臣入內殿, 講中庸、大學, 因尙論先儒同異之說、歷代治亂之迹, 時有規諷, 王聽之舋舋。 至於夜分諸臣請退, 王曰: ‘古人有云: 「接賢士大夫之時多, 則氣質變化自然而成。」 予今日得聞所未聞之言, 裨益弘多, 殊不爲倦勿退。’
十九年二月, 王請立嫡子諱爲世子, 先皇帝賜勑曰: ‘朕惟有爵土者, 莫不爲長世之圖。 立嫡長者, 得以係群情之望, 古今然也。 得奏, 擧國臣民旅庭請命, 欲立王子諱爲世子, 王不敢顓貢使以聞, 朕覽之特加兪允, 乃命太監鄭同爲正使, 金興爲副使, 齎勑幷紵絲、紗羅等件, 封諱爲朝鮮國王世子, 其合用冠服, 王國自制。 夫朝廷之命, 王其承之, 藩邦之器, 世子其主之。 知天地之分不可踰時, 率以事上之誠, 知繼體之道不可忽罔, 替夫秉禮之訓。 若是則本愈固、譽愈隆, 王國享福, 詎有窮耶? 欽哉!’ 王奉表陳謝。 王選名儒爲世子師友, 授以經史交相切磋, 又令謁先聖, 入學于成均館, 凡所以敎養之者無所不至。 三月王祖母惠莊王妃尹氏薨, 王哀毁成疾, 大臣請進酒, 王曰: ‘忘哀飮酒予所不忍也。’ 固請不聽。
二十年四月, 下敎曰: ‘親民之官莫重守令, 守令之匪人生民之大患也。 在官一月, 則貽一月之害, 在官一年, 則貽一年之害。 而況三朞、六朞之久乎? 仲尼有言: 「苛政猛於虎。」 蓋苛政行於下, 則人主雖有仁民愛物之心, 何能澤及於民乎? 予以涼德叨承前緖, 臨莅臣民十有五年, 間者水旱相仍, 民罹飢饉, 是雖寡躬無德之致, 亦恐親民之官, 以侵耗爲事, 以刻察爲明, 貨賄公行刑罰縱濫, 不修厥職徒務自肥, 方面之臣雖任剌擧, 眩於薰蕕失於殿最, 往往慈祥(豈弟)〔愷悌〕者抱屈, 貪暴姦回者得志, 傷和召災未必不由乎是。 予欲別議陞黜以示勸懲, 玆爾政府各以所知, 旌別以聞。’ 議政府擧循良有治効者, 貪懶不宜臨民者以啓, 卽命陞黜焉。 五月王命摹集趙孟頫字, 刻張蘊古大寶箴, 揭于便殿以自警, 親寫王禹偁 待漏院記, 以賜承政院, 謂承旨等曰: ‘禹偁之記, 雖爲執政而作, 然在位百執事, 皆可以代座右之銘, 況爾院爲樞機之地乎?’ 十二月下敎曰: ‘學校風化之大源, 賢材國家之利器, 而成均儒生, 餼廩不豐, 非予崇重之意也。 給田肆百頃以贍其用, 州府郡縣之學, 亦給有差。’ 王嘗因旱, 命減諸道供進之物, 慶尙道守臣啓曰: ‘如海錯之類得之甚易, 請依舊以進。’ 王曰: ‘臣子奉上之意雖勤, 人君恤下之情亦切, 其勿進。’
二十三年秋, 王聞先皇帝昇遐, 率百官擧哀, 卽遣陪臣卞宗仁陳慰, 李封進香, 盧思愼賀皇上登極。
弘治元年春皇帝賜勑曰: ‘朕嗣守祖宗鴻業, 統御萬方, 聲敎所曁宜覃恩澤。 矧伊王國世篤忠誠, 錫齎之典尤所當厚, 特遣正使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講董越、副使工科右給事中王敞, 齎詔勑諭王, 幷賜王及妃幣帛、紋錦, 至可收領, 尙其體朕眷懷, 秉禮服義益隆藩輔, 共享大平之福。’ 正使見王歎曰: ‘老生舊聞, 賢王學問高明, 通達禮義, 今幸目覩果愜素聞。’ 十一月, 臺諫採古伊尹、召公勸戒其君之辭, 繕寫以進以寓規警之意, 王嘉悅曰: ‘今觀爾等所進之辭, 蓋欲納君於無過之地也。 爾等愛君之誠寧可忘耶?’ 賜以宮醞, 至夜撤宮燭送之。
二年正月, 有擧子於鄕試對策, 言祀佛禳禍者, 試官斥之, 王聞之, 手札下敎曰: “儒生對策之辭, 予甚憤焉。 佛之爲害誰不知之? 況學孔、孟者耶? 孔子曰: ‘攻乎異端斯害也已。’ 孟子曰: ‘能言距楊、墨者聖人之徒也。’ 程子曰: ‘佛氏之害甚於楊、墨, 當如淫聲美色以遠之。’ 後之學者, 可不力察而明辨之乎? 予嘗恨緇徒, 蔑棄天常, 耗蠧民財, 將欲絶其根株, 扶植世敎, 而今者儒生, 當國家擧賢之日, 不陳堯、舜之道, 皷唱浮屠之法, 是欲使予, 如梁武之捨身, 唐宗之膜拜, 而後已乎? 號爲儒者猶尙如此, 況無識士女乎? 宜令有司推鞫, 屛諸遐裔, 明示好惡。’ 又命該曹勿復度僧。 王以鄕學書籍尠少, 命印《四書》、《五經》及諸史, 頒于諸道。 三年閏九月, 王謁莊憲王墓, 所過州縣, 遣官致祭于先聖廟, 給學生米有差。 又以駐駕之地, 供頓勞費, 減是年田租之半。 冬有星變, 日官請行醮祭, 上曰: ‘變災爲祥在於修德, 不在祈禳也。’ 四年五月下敎曰: ‘至親之人一體而分, 叔姪有父子之義, 兄弟爲天倫之重, 宜敦雍睦之行, 以成敦厚之風。 昔王商爲侯推財與弟, 薛包分財以惡物自與, 今世之人習俗澆薄, 或有交爭自相詆怨, 殘傷骨肉莫此爲甚。 今後兄弟、叔姪起爲爭端, 詐僞著現者, 竝令徙邊以厚風俗。’ 又下敎曰: ‘比年以來昇平日久, 中外無事, 競尙華靡, 飮食、服玩、車馬、第舍, 皆極侈麗, 予甚非之。 惟爾臣僚務要儉約, 以革弊風。’ 十一月, 戶曹啓: ‘今者年穀稍稔, 而收稅太輕。’ 王曰: ‘百姓足君誰與不足? 寬民一分不亦可乎?’ 平安道有邊警, 兵曹請本道軍卒竝令戍邊, 王曰: ‘分番防戍古有其法, 誰無父母誰無妻子? 靡室靡家予甚憐憫。 其令分番往戌。’
五年正月, 成均館典庫吏耗米若干, 有司欲令追償, 王曰: ‘國雖小豈乏養賢之資? 其勿追償特給米布。’ 八月, 王至成均館祀先聖, 大饗師生及百僚謂曰: ‘飮酒固不可及亂, 然今日之事, 實崇儒重道之意, 其各醉飽。’ 因命有司重修學宮。 六年六月, 王有疾醫云: ‘鯽魚可治。’ 王謂近侍曰: ‘今方雨潦採捕之人, 恐罹沒溺之患, 豈可以口腹累人乎?’ 十二月, 該曹請設元日禮宴, 王曰: ‘人君當與民同其憂樂。 今當歲歉民飢, 而獨樂可乎? 其停之。’ 王以前代諸王及名賢之墓, 或有頹毁者, 命所在修葺禁樵牧。
七年十二月, 王寢疾彌留, 猶聽斷不輟, 及疾篤, 具冠服引見大臣, 屬以後事。 翼日己卯薨于正寢, 雖童稚婦女, 莫不奔走悲號。 享年三十八, 在位二十六年。 王聰明英武寬仁恭儉, 自少篤意經史, 及嗣位, 令講官日三進讀, 夜又召對, 終始不倦。 尤邃於性理之學, 至於百家、星曆、鍾律靡不洞曉, 射藝、草隷亦臻其妙。 畏天事大出於至誠, 凡干貢獻必親自監視。 漢人被搶, 自虜中逃來者, 厚資衣糧解送遼東, 前後共五百五十五人。 王天性孝友, 惠莊王妃、懷簡王妃、襄悼王妃, 同處一宮, 事之如一, 日三問安, 甘旨必親調, 藥餌必先嘗, 未嘗少懈。 惠莊王妃晩年患疾, 每見王病輒少間, 人稱孝誠所感。 凡祀事盡其誠敬, 非有故必親行之。 待月山君婷恩禮備至, 及卒悲悼輟膳, 以至成疾。 宗室諸親亦時召見于內, 置酒行家人禮, 怡怡如也。 家法甚嚴宮壼肅然, 諸子雖幼敎以義方, 皆有成人之德。 接大臣以禮, 每進見未嘗有惰容, 雖小官亦皆禮遇之。 有罪多寬假, 終世無遭刑戮者, 至宦寺不少㒃。 國有大事, 必與大臣詳議處置, 令朝臣輪對問以朝政得失。 用人之際人有斥其短者, 取其所長不必求備。 每歲春秋親宴老人, 亦令守令各於所在饗之, 處女之貧乏未嫁者, 官給資裝無使失時。 守宰拜辭必引見戒諭, 數遣使臣問民疾苦。 月再閱武, 歲講蒐獮以嚴武備。 聽斷之暇引文士, 考問經史兼試文藝, 羽林之士亦令受學。 或於後苑較射, 以勸勵成就之。 凡所施爲皆有矩度, 不惑異端不近聲色, 戒遊畋、崇節儉、却祥瑞、禁淫祀, 褒賞直諫之士, 錄用忠臣之後, 重敗常之典, 嚴贓吏之法, 刑罰不濫囹圄屢空。 深仁厚澤洽于一國, 噫! 天不假年, 遽至於斯, 痛哉!
연산 2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1월13일(정유) 2번째기사
성종대왕의 행장
대행대왕 행장(行狀)에,
“국왕은 성이 이씨요, 이름이 아무이며, 회간왕(懷簡王)88)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 한씨, 의정부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이 천순(天順) 정축년89) 7월 30일(신묘)에 왕을 낳았다. 회간왕이 세자(世子)가 되었다가 일찍 훙(薨)하고 왕의 조부 혜장왕(惠莊王)90)이 왕을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왕의 타고난 자질이 특이하게 총명하고 그릇과 도량이 웅위(雄偉)하여 혜장왕이 기특히 여겨 사랑하였고,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였다. 왕이 일찍이 모형(母兄)91)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과 함께 왕궁에 있을 때에 뇌우(雷雨)가 갑자기 이는데, 환관(宦官)이 옆에 있다가 마침 벼락을 맞아 죽으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엎어져 넋을 잃었으나, 왕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혜장왕 이 더욱 기특히 여겼다.
성화(成化) 5년92) 12월 왕의 숙부 양도왕(襄悼王)93)이 병이 위독할 때에 사자(嗣子)가 어리고 병이 있었으므로 후사(後嗣)가 될 만한 이를 선택하는데, 왕이 덕기(德器)가 숙성하여 효도하고 공순하며 학문을 좋아하였으므로 국무(國務)를 권서(權署)94)하게 하였다. 양도왕이 훙(薨)하매 왕이 신(臣) 송문림(宋文琳)을 보내어 고부(告訃)하고 권함(權瑊)을 보내어 승습(承襲)을 청하였다.
6년95) 5월에 선황제(先皇帝)께서 조서[詔]를 내리기를,
“짐(朕)이 큰 업(業)을 이어받아 천하를 통어(統御)하매, 지방 이역(異域)에 다 그 임금을 세워 그 백성을 다스리게 하고 대[世]가 바뀔 때마다 봉하여 주는 것은 떳떳한 전례(典禮)가 있도다. 고(故) 조선국왕 아무가 선대를 계승하고 대국을 섬겨 충효(忠孝)로 소문이 있었는데, 봉(封)함을 받은 지 해를 넘기지 못하여 문득 세상을 떠났다고 부고가 왔으니, 이 물린 왕업(王業)은 마땅히 친근하고 현명한 자에게 맡겨야 하리로다. 이제 특히 태감(太監) 김흥(金興)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서 왕의 조카 아무를 조선 국왕으로 봉하여 국정(國政)을 총리하게 하노라. 아무는 실로 혜장왕의 손자이니, 본국의 대소신민(大小臣民)은 일심으로 받들어 순종하여 동토(東土)를 화평하게 하고 중조(中朝)의 번병(蕃屛)이 되어, 그대들의 선왕의 업을 변케 하지 말아서, 짐(朕)이 그대 나라를 돌보아 준 뜻에 맞추라.”하고,
또 제서[制]를 내리기를,
“짐이 공경히 제업(帝業)을 이어받아, 속국(屬國)을 잘 돌보기에 힘써서, 먼 데 사람을 회유(懷柔)하여 가깝게 만들고, 일체(一體)로 보아 똑같이 사랑하노라. 동번(東藩)은 대대로 예의를 숭상한다 일컬으니, 세대를 상속하는 데는 어진 이에게 맡겨야 하리로다. 조선국왕 아무는 총명을 타고났고 학문이 숙성하여 국론(國論)에 일치한 바 되니, 종사(宗祀)를 이어 마땅하리로다. 이제 특히 조선 국왕으로 봉하여 국사를 총통(總統)하게 하노라. 아! 성경(誠敬)이라야 몸을 닦을 수 있고, 예의(禮義)라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다. 충성이라야 대국을 섬길 수 있고, 효도라야 종사(宗祀)를 맡을 수 있도다. 종시 삼가서 훈계를 잊지 말라.”하고,
또 칙서[勅]를 내리기를,
“아뢴 것을 보면, 그대의 숙왕(叔王) 아무가 성화(成化) 5년 11월 28일에 훙서(薨逝)하였으니, 이에 태감 김흥(金興)과 행인(行人) 강호(姜浩)를 보내어 글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조서[詔]를 가지고 가서 그대 국인(國人)에게 보이고, 그 아무를 조선국왕으로 봉하여 국사를 계승하여 맡게 하고, 아울러 그대의 아내 한씨를 왕비로 봉하노라. 그대는 마땅히 선대의 업을 공경히 지켜서,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며, 충성을 돈독히 하여 조정을 섬기고, 신의를 두텁게 하여 이웃 나라와 화목할 것이며, 몸소 절약하고 검소하여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여, 동방의 백성이 편안하게 할 것이며, 물자를 풍부하게 하여, 길이 중국의 중요한 울타리가 될지어다. 짐(朕)이 그대를 가상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그대와 비(妃)의 고명(誥命)과 면복(冕服)과 채폐(綵幣)등 물건을 주니, 이르거든 받으라.”하매,
왕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가서 사례하였다. 왕이 대소신료(大小臣僚)로 하여금 각기 당시의 정사에 마땅한 의견을 진술하게 하고, 종척(宗戚) 문무(文武) 6품 이상으로 하여금 각각 덕있는 이와 재능있는 이를 천거하게 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효자, 절부(節婦)와 행실이 특이한 자에게 정문(旌門)과 복호(復戶)를 내려 장려하고, 홍문관을 전(殿)옆에 설치하여 문학과 재행(才行)이 있는 선비 11원(員)을 뽑아서 날마다 번갈아 숙직(宿直)하면서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고 도의(道義)로 간하게 하였다.
7년96) 3월에 왕이 성균관에 이르러 선성(先聖)97)을 배알(拜謁)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문사(文士)들로 하여금 경서(經書)의 뜻을 문란(問難)하게 하였다.
11월에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선대의 업을 이어받아서 무릇 조정 정사의 득실(得失)과 생민(生民)의 이해(利害)를 마음껏 바로잡으나, 일이 지극히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 엄한(嚴寒)에 음(陰)이 폐색(閉塞)된 때를 당하여, 가물어 재앙이 되니 하늘의 뜻에 어찌 까닭이 없으랴. 자신을 반성하니 실로 덕이 적고 어두운 까닭이다. 여러 번 직언(直言)을 구하였으나 말을 다하여 극진히 간하는 자가 없고, 여러 번 인재를 구하였으나 숨은 인재를 드러내는 자도 없다. 백관(百官)을 단속하여도 오히려 해이함이 있고, 옥사(獄事)를 심리(審理)하나 오히려 억울하고 지체되는 것이 있으며,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여도 호소할 곳없는 사람이 오히려 많고, 공역(工役)을 감하려고 힘써도 흥작(興作)이 쉬지 않는다. 정부로 하여금 널리 중외에 알리어 상세히 강구하여 아뢰게 하라.”하였다.
8년98) 3월에 황태자(皇太子)의 부고가 이르매, 예관(禮官)이 다음날 거애(擧哀)99)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슬픔이 마음에 간절한데 어찌 내일을 기다리랴.”하고,
곧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하고 표문을 받들어 위문하였다.
5월에 하교하기를,
“재물을 생산하는 것은 본(本)100)에 힘쓰는데에 있고, 재물을 여유있게 하는 것을 절용(節用)하는데에 있다. 만약 절용을 하려면 반드시 먼저 검소하여야 할 것이다. 대개 사치를 하면 용도가 반드시 넓을 것이요, 용도가 넓으면 재물이 반드시 마를 것이다. 우리 동방은 지력(地力)이 박하여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절용하여도 오히려 재물이 넉넉하지 못할 것이 걱정되는데, 하물며 본을 버리고 말(末)101)을 일삼아서 생산하는 자는 이미 적고,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다투어 숭상하여 쓰는 자가 절약하지 아니하매, 나는 이것을 염려하여 말을 일삼는 자에 대한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고, 백성을 사역하는 법을 정하고, 급하지 않은 일을 파하고, 무익한 비용을 제거하노라. 너희 인민은 농사와 양잠(養蠶)에 힘을 다하여 게으르지 말며,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하지 말며, 재물을 헤아려 절용하여 낭비하지 말라. 집과 나라가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나, 일은 일반이다. 진실로 능히 절약하기로 마음을 가진다면 나라를 넉넉하게 하기가 무엇이 어려우랴. 너의 인민은 각각 나의 뜻을 알아서 생업을 이룩하라.”하였다.
왕이 일찍이 《상서(尙書)》102)를 보다가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발라지고 임금이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스러워 진다.’라고 한 데에 이르러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임금 노릇하는 도리가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임금뿐 아니라 신하된 자도 능히 하는 말을 다 받아주어야만 능히 그 임금에게 간하는 것이니, 너희들도 알아야 한다.”하였다.
또 역사를 읽다가 ‘수양제(隋煬帝)가 도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9인을 잡았는데, 그중에 4인은 도둑이 아니었으나 관원이 제(帝)가 이미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명하였다하여 아뢰지 않고 다 죽였다.’고 한데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양제는 진실로 무도하나 당시의 신하가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으랴? 나는 양제를 경계로 삼을 테니, 너희들도 또한 집주(執奏)하지 않은 것을 경계로 삼아, 임금과 신하가 서로 닦음이 옳지 않겠는가.”하였다.
또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말하기를 ‘정관(貞官) 초년에는 폐하(陛下)가 절검(節儉)하고 간하는 말을 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요즈음 영선(營繕)이 조금 많았는데 간하는 자가 자못 뜻에 거슬려 견책을 당한 이가 있습니다.’한데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옛말에 ‘능히 마지막까지 잘해내는 이는 드물다하였는데, 태종 초년에는 잘한다할 수 있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였다. 태종 같은 현명한 임금으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태종보다 못한 사람임이랴? 근년에 자못 영조(營造)하는 역사(役事)를 일으켰으니, 비록 부득이 한 것이나 중외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즉위한 이래로 한 사람도 일을 말한 신하를 죄준 일이 없었으니, 그대들은 내 뜻에 거슬릴 것을 염려하지 말고 일이 잘못되는 것이 있거든 다 말해야 한다.”하였다.
응방(鷹坊)에서 해동청(海東靑) 한 마리를 기르다가 시신(侍臣)이 말을 하니 왕이 곧 놓아주라고 명하고 끝내 다시 기르지 않았다.
10년103) 9월에 왕이 배신(陪臣) 김질(金礩)을 보내어 아뢰기를,
“신이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질로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사와 선대의 업을 지켜온 지 여러 해 되었사온데, 소생부(所生父)104) 신 아무는 선조(先祖) 혜장왕의 적자로 황제의 명을 받아 세자가 되었다가 불행히 일찍 죽었습니다. 이제 신이 이미 왕작(王爵)을 받았고, 처도 또한 비(妃)가 되었으나, 생부(生父)는 세자(世子)로 칭하고 어머니는 명호(名號)가 없으므로 일국의 신민들이 순하지 못하니, 자식된 마음에 진실로 미안합니다. 그러나 신이 이미 선신(先臣) 양도왕 아무의 후사가 되었으니, 의(義)로는 사친(私親)을 돌볼 수가 없고, 또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말하려다가 머뭇거리기를 지금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성지친(天性之親)의 은혜가 또한 중하므로 현양(顯揚)하려는 마음 능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히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로 작(爵)을 주고 시호를 주어 이 정성을 펴게 하시어, 효치(孝治)를 넓히소서. 지극히 바라는 바입니다.”하니,
선황제(先皇帝)가 칙서를 내리시기를,
“아뢴 바를 보니, 왕의 소생부 아무가 먼저 세자로 봉하였다가 일찍 죽고, 소생모 한씨(韓氏)가 현재 살아있는데, 모두 명호(名號)가 없으니, 남의 후사로 들어간 자가 의(義)로는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으나, 현양하려는 생각이 능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왕의 효성을 잘 알았다. 이에 특히 고(故) 세자 아무를 조선국왕으로 추봉(追封)하여 시호를 회간(懷簡)이라 하고, 한씨를 회간왕비로 봉하여 왕이 어버이를 현양(顯揚)하려는 뜻을 이루어 주고, 고명(誥命)과 비(妃)의 관복(冠服)을 주니, 이르거든 받으라.”하였다.
왕이 은혜를 입고 감격하여 경내(境內)에 사령(赦令)을 내리고, 신하들에게 작(爵) 1급(級)씩을 올려주고, 표문을 받들고 가서 사례하였다.
11년105) 1월에 왕이 친히 선농(先農)106)에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몸소 적전(籍田)을 갈고, 또 왕비로 하여금 친히 누에를 치게 하되, 다 의식대로 하였다.
8월에 하교하기를,
“옥사를 맡은 관리가 잘못이 많다. 가혹하고 심각한 자는 늘 얽어넣는 잘못을 저지르고, 혼미하고 용렬한 자는 늘 지체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얽어넣기를 좋아하면 엄하게 고문하여 억지로 끌어다붙이고, 꾸며대므로 죄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형벌에 걸리고, 지체하기를 좋아하면 어물어물 결단하지 않아서 걸핏하면 더위와 추위를 넘기게 되고 몸에다 질곡(桎梏)을 채우고, 주림과 추위가 몸을 엄습하여 병들어 슬피 부르짖다가 드디어 옥중에서 죽게 되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랴. 옛말에 한 사람이 구석을 향하여 울면 같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때문에 즐겁지 않게 된다.’하였으니, 미천한 남녀 한 사람이라도 죄없이 죽는다면 그 허물을 장차 누가 지랴. 대저 옥사(獄辭)는 처음에 얽힌 것같아도 사정(事情)을 따라 추구하면 칼에라도 닿은 듯이 저절로 풀리는 것인데, 다만 법을 맡은 자가 마음을 쓰지 않을 따름이다. 그대들은 얽어 넣지도 말고 지체하지도 말 것이며, 인서(仁恕)를 근본으로 하여 밝고 알맞게 행하여, 죽는 자로 하여금 죄에 자복하고 산 자로 하여금 원통함이 없게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하였다.
12년107) 봄에 선황제(先皇帝)가 황상(皇上)을 황태자로 책봉(冊封)하고, 칙서를 내려,
“왕은 본디 예의(禮義)를 지켜 조정에 충성하고 공경하였으니, 짐이 황태자를 세우고 여러 나라에 은혜를 베푸는데, 왕의 나라에는 더욱 후하게 할 바니라, 특히 정사(正使) 호부랑중(戶部郞中) 기순(祈順)과 부사(副使) 행인사 좌사(行人司左司) 장근(張瑾)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반포하고 아울러 왕과 왕비에게 채폐(綵幣), 문금(文錦)을 주노니, 이르거든 받아서 짐이 우대하는 뜻에 맞추라.”하였다.
두 사신이 왕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참으로 현명한 왕이로다.”하였다.
작별할 때 정사(正使)가 시를 지어 왕에게 주었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순(順)이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여러번 왕과 서로 접촉하였는데, 마음으로 심히 갸륵히 여겼으니, 대개 그 젊은 나이에 총명 준수하고 유교[儒]를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위엄과 덕이 퍼져서 온 나라가 화평스러우니 진실로 짝할 만한 나라가 드물다.”하였다.
왕이 고대에 밝은 임금과 어두운 임금의 선하고 악한 사적을 채집하여 화공을 시켜 병풍에 그리고서 사신(詞臣)108)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여 그 위에 써놓고, 앉으나 누으나 보고 반성하였다.
13년109) 8월에 왕이 성균관에 가서 선성(先聖)에게 제사지내고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으며, 각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고을 수령(守令)들로 하여금 음사례(飮射禮)를 행하게 하여, 연례행사(年例行事)로 삼았다. 전에는 국왕의 생일에 훈구(勳舊)의 신하들이 절에 가서 축수재(祝壽齋)를 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시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복을 구하되 부정한 것으로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어찌 부처 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겠는가? 파하라.”하였다.
14년110) 4월에 왕이 성균관에 나아가서 친히 선성(先聖)에게 제사지내고 명륜당에 앉아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고서 좋은 말을 청하였다.
왕이 여러 늙은이에게 이르기를,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안으로 여색(女色)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에 미치거나 술을 달게여겨 즐겨 마시거나 궁전을 높이고 벽에다 단청하는 것 중에서 한 가지가 있으면 망하지 않는 이가 없느니라.’하였으니, 실로 임금된 사람의 약석(藥石)이다. 내가 일찍이 이것을 좌우(座右)에 써붙여놓고 항상 보고 반성한다. 이제 또 여러 늙은이의 말을 들으니, 다 수신치국(修身治國)하는데에 긴요한 말들이다. 내가 항상 가슴에 새겨 잊지 않겠다.”하였다.
15년111) 겨울에 선황제(先皇帝)가 사신을 보내어 칙서를 내리기를,
“건주(建州)의 여진(女眞)이 하늘을 거스리고 은혜를 배반하여 여러번 변방을 침노하므로 이미 감독(監督), 총병(摠兵)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정병을 거느리고 기일을 정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그대 국왕은 동번(東藩)의 위(位)를 이어 우리 국가에 충성을 바치기에 융숭하고 변함이 없었으니, 짐이 심히 가상히 여기고 기뻐한다. 우리 군사가 여진의 경계를 쳐들어가면 적이 국경으로 도망해 갈 것이니, 반드시 사로잡아 바칠 줄로 믿는다. 왕이 만약 군사를 보내어 멀리서 서로 응원하여, 범같고 곰같은 군사의 위엄을 크게 떨쳐서 개돼지와 같은 종자들을 같이 섬멸하여, 역적 오랑캐가 이미 제거되면, 근왕(勤王) 적개(敵愾)한 공이 더욱 장하여, 성명(聲名)을 어찌 무궁토록 누리지 않겠는가?”하매,
왕이 곧 어유소(魚有沼)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치게 하였다. 유소는 강물이 얼었다가 도로 풀려서 군사를 건너기 어려우므로 군사를 파하여 돌아왔다. 왕은 유소가 군기(軍期)에 미처 가지 못한 죄를 다스리고, 다시 배신(陪臣) 윤필상(尹弼商), 김교(金嶠)를 보내어 군사 4천명을 거느리고, 다시 적의 소굴을 무찌르게 하니, 반역의 무리들을 사로잡거나 베고 부락을 분탕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포로되었던 요동(遼東)의 백성들을 찾아가지고 돌아오매, 왕이 배신 어세겸(魚世謙)을 보내어 적의 포로를 바쳤다.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전년에 건주의 적이 배반하므로 내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때에 그대 나라 선왕 아무가 군사를 일으켜 와서 능히 이겼으며, 이번에 적이 오히려 죄악을 고치지 않으므로 짐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군사를 내어 토벌하였는데 왕이 군사를 보내어 와서 도왔다. 비록 앞에 온 군사가 강물이 얼었다가 풀려 건너기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 군사와 합세하여 같이 공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뒤에 온 군사가 적의 소굴을 쳐 무찔러 그 무리들을 사로잡거나 베고 그 집과 양식을 불지르고 그들이 노략해 간 우리 변방의 백성들을 찾아오고, 또 배신을 보내어 포로를 압송하여 와서 바치니, 왕의 충성이 선대에 대하여는 능히 계승하였다하겠고, 짐의 명령에 대하여는 저버림이 없었다하겠다. 착한 이름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지금 내관(內官) 정동(鄭同), 강옥(姜玉) 을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彩緞), 백금, 문금(紋錦) 서양포(西洋布)를 주고, 군사를 거느리고 왔던 좌의정 윤필상과 절도사(節度使) 김교(金嶠)에게도 또한 각각 주는 것이 있어서 그 공로를 표창하노니, 왕은 공경히 받을지어다.”하니, 왕이 표문을 바쳐 사례하였다.
17년112) 8월에 영안도(永安道)113) 수신(守臣)114)이 흰사슴을 잡아서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니, 놓아 주라.”하였다.
10월에 하교하기를,
“원유(苑囿)를 설치한 것은 백성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농한기(農閑期)에 친히 무사(武事)를 연습하여 수미(蒐獮)의 예(禮)115)를 거행하려는 것인데, 지금 유사(有司)가 나무하는 것을 금하여 새와 짐승이 더욱 번성한다하니,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는 뜻에 어긋난다. ‘꼴베는 사람도 들어가고 꿩이나 토끼잡는 사람들도 들어간다.’고 옛글에 이르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원유(苑囿)가 있는 곳에는 모두 금령(禁令)을 해제하여 백성들과 같이 쓰게 하라.”하였다.
18년116) 6월에 하교하기를,
“옛적 어진 임금들은 덕있는 사람을 뽑고 재능있는 사람을 등용하여 함께 정치를 이룩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국가에서는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고, 또 천거법(薦擧法)을 만들어서 재주와 덕이 있는 선비로 하여금 다 등용되게 하였으니, 인재를 구하는 길이 넓지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창해(滄海)에 진주를 빠뜨림을 예로부터 탄식하는 바이니, 초야(草野)나 산골에 어찌 훌륭한 재주를 품고도 숨겨져서 능히 스스로 펴보지 못하는 자가 없겠는가? 무릇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은 유일(遺逸)을 찾아내어 다 이름을 적어 올리라.”하였다.
11월에 왕이 유신(儒臣)들을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강(講)하고, 이어 선유(先儒)들의 해석이 서로 같고 다른 것과 역대(歷代)의 정치가 잘되고 잘못됨을 강론하여 때로 간(諫)하고 풍자하였는데, 왕이 열심히 들어 밤이 깊어지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촉하는 때가 많으면 기질(氣質)의 변화가 자연히 이루어진다.’하였는데, 내가 오늘 전에 듣지 못하던 말을 얻어 들으니, 유익한 점이 매우 많다. 조금도 피로하지 않으니, 물러가지 말라.”하였다.
19년117) 2월에 왕이 적자(嫡子) 아무[諱]를 세워서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이 생각하건대, 봉작(封爵)과 국토를 가진 자가 다 대대로 길이 전할 계획을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적장자(敵長子)를 세워 여러 신민들의 기대를 걸게하는 것은 고금이 그러하다. 지금 아뢴 바를 보니, 온 나라 시민들이 대궐 뜰에 모여서 왕자 아무를 세자로 삼기를 청하는데, 왕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않고 사신을 보내어 아뢰니, 짐이 보고 특히 윤허(允許)하여, 태감 정동(鄭同)을 정사(正使)로 김흥(金興)을 부사(副使)로 하여 칙서와 저사(紵絲), 사라(紗羅)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아무를 조선국 왕세자로 봉하게 한다. 그가 쓸 관복(冠服)은 왕의 나라에서 스스로 만들어 쓰라. 조정의 명령은 왕이 받들고, 번국(藩國)의 계통은 세자가 맡은 것이다. 천지의 분수는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때로 상국(上國)을 섬기는 정성을 가지고, 왕위를 잇는 도리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알아서, 예의의 교훈을 잃지 말라. 이와 같이 하면 근본이 더욱 굳어지고 명예가 더욱 높아져서 왕의 나라가 복을 누리는 것이 어찌 끝이 있으랴. 공경할지어다.”하매,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왕이 이름난 유학자(儒學者)를 선발하여 세자의 사우(師友)로 삼아서 경사(經史)를 교수하여 서로서로 연마하고 또 세자로 하여금 선성(先聖)에게 배알하고 성균관에 입학하게 하여, 무릇 교양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3월에 왕의 조모인 혜장왕비(惠莊王妃)가 훙(薨)하매, 왕이 애통하여 병이 되었다. 대신이 술을 들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애통을 잊고 술을 마시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하고,
굳이 청하여도 듣지 않았다.
20년118) 4월에 하교하기를,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는 관원으로는 수령(守令)보다 더 중한 것이 없으므로, 수령이 옳지못한 사람이면 백성의 큰 화환이다. 한달을 있으면 한달 해를 끼치고, 1년을 있으면 1년의 해를 끼치는데, 하물며 삼기(三期) 육기(六期)나 오래임에랴. 공자의 말씀에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모질다.’하였다. 대개 아래에서 가혹한 정치가 행해지면, 임금이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어찌 혜택이 백성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 내가 덕이 엷은 사람으로서 선대의 업을 이어받아 신민의 위에 있는지 15년이 되었는데, 근자에 수재, 한재가 서로 겹쳐서 백성이 기근(饑饉)에 걸렸으니, 이것이 비록 내가 덕이 없는 소치이기는 하나 또한 혹시 백성에게 혜택을 입혀야 할 수령들이 침해하기를 일삼고, 각박하게 살피는 것을 밝은 것으로 삼아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형벌을 함부로 지나치게 하고 그 직책은 닦지 않으면서 한갓 저만 살찌기에 힘쓰는데, 방면(方面)을 맡은 신하[監司]가 비록 감찰하는 책임이 있으나 선악을 잘 분별치 못하여 전최(殿最)119)를 옳게 하지 못하므로, 간간히 인자(仁慈)하고 화평한 자가 억울함을 당하고, 탐욕 많고 포악하고 간사한 자가 뜻을 얻으니, 〈천지의〉화기(和氣)를 손상하여 재해를 부르는 것이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리라. 나는 특별히 승진과 파면을 의논하여, 착한 수령을 장려하고 나쁜 수령을 징계하려 하노니, 정부는 각기 아는 대로 드러내어 아뢰라.”하매,
의정부에서 명관으로 치적(治績)이 있는자와 탐욕스럽고 게을러서 백성 다스리기에 합당치 못한자를 들어서 아뢰니, 곧 명하여 승진시키고 파면하였다.
5월에 왕이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모아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 편전(便殿)에 달아놓고 스스로 경성(警省)하고, 왕우칭(王禹偁)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친히 써서 승정원에 주면서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우칭(禹偁)의 기문(記文)이 비록 집정(執政)을 위하여 지은 것이나,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할 만한 것인데, 하물며 너희 승정원은 추기(樞機)의 자리임에랴.”하였다.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어진 이를 구하기에 수고하고 사람을 얻고 나면 편한[逸] 것이다. 요(堯)가 사악(四岳)에게 물었고, 순(舜)이 사문(四門)을 열었고, 성탕(成湯)이 삼준(三俊)을 얻고, 무왕(武王)이 십란(十亂)을 얻는 것이 모두 인재를 얻어 태평의 정치를 이룩하지 않음이 없었고, 주공(周公)이 원성(元聖)으로서 성왕(成王)을 보좌하니, 다른 어진 사람에게 기대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한번 밥먹는 동안에 세번이나 먹었던 것을 토하고 한번 머리감는 동안에 세번이나 머리털을 움켜쥐었으니, 어진사람 접견을 급히 여긴 것이 이와 같았다. 우리나라의 인재가 비록 중국 에 견줄 수는 없으나 열집이 사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자가 있는 법인데 넓은 사방에 어찌 그런 사람이 없으랴. 요컨대, 쓰고 버리는 것을 합당히 하여 어진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분할 것이다. 지금 관리임용하는 책임이 전조(銓曹)120)에 일임되어 있는데 전조에는 연격(年格)121)에 구애되어, 오직 연월(年月)이 오래되고 안된 것만을 따지고 인물의 어질고 어질지 않을 것은 가리지 아니하여, 비록 뛰어난 인물이 있어도 범상한 무리에 혼동되니, 이것이 어찌 현재(賢材)를 뽑아쓰고 인물을 저울질하는 뜻이겠는가? 만약 재주와 행실이 출중(出衆)한 자가 있으면 특별히 이름을 들어 아뢰어서 통상 격식에 불구하고 차서에 관계없이 등용하여 어진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혼동되지 않도록 하라.”하였다.
12월에 하교하기를,
“학교는 풍화(風化)의 큰 근원이요, 현재(賢材)는 국가의 이기(利器)인데, 성균관 유생(儒生)을 먹이는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 자못 숭상하고 중히 여기는 본의가 아니다. 토지 4백경(頃)을 주어서 경비(經費)를 넉넉하게 주고, 주 부군현(州府郡縣)의 학교에도 또한 차등 있게 주라.”하였다.
왕이 일찍이 한재(旱災)로 인해 각도에 진상(進上)하는 물건을 감하게 하니, 경상도관찰사가 아뢰기를,
“해물(海物)같은 것은 구하기가 심히 쉬우니, 전과 같이 진상하게 하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신자(臣子)가 임금을 받드는 정(情)은 비록 정성스러우나 임금이 백성을 생각하는 정도 또한 간절하니, 바치지 말라.”하였다.
23년122) 가을에, 왕이 선황제가 승하(昇遐)하였다는 것을 들으매,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곧 배신 변종인(卞宗仁)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이봉(李封)을 보내어 진향(進香)하고 노사신을 보내어 황상(皇上) 등극(登極)을 하례(賀禮)하였다.
홍치 원년123) 봄에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이 조종의 큰 업을 계승하여 만방(萬方)을 통치하니, 속국에 대하여 마땅히 은택을 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왕의 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도탑게 하니, 내려주는 은전(恩典)을 마땅히 후히 하여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정사(正使) 우춘방우서자겸한림원시강(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講) 동월(董越)과 부사(副使) 공부우급사중(工部右給事中) 왕창(王敞)을 보내어 조칙을 가지고 가서 왕에게 이르고, 아울러 왕 및 비(妃)에게 폐백 문금을 주니, 이르거든 받고, 짐의 돌보아주는 마음을 알아서, 번국(藩國)의 직책을 더욱 잘하여 함께 태평의 복을 누릴지어다.”하였다.
정사가 임금을 보고는 탄식하며 아뢰기를,
“노생(老生)이 현왕(賢王)께서 학문이 고명하고 예의에 통달하다는 것을 들은 지 오래인데, 지금 다행히 눈으로 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습니다”하였다.
11월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옛적 이윤(伊尹)과 소공(召公)이 그 임금에게 권하고 경계한 말을 써바쳐서 간하는 뜻을 표시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지금 그대들이 바친 글을 보니, 대개 임금을 허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니, 그대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하고,
궁온(宮醞)124)을 주고 밤에 궁촉(宮燭)125)을 보내었다.
2년126) 정월에 어느 거자(擧子)가 향시(鄕試)의 대책(對策)에, 부처에게 빌어서 재앙을 물리치자고 말한 자가 있으므로, 시관(試官)이 물리쳤는데,
왕이 듣고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유생(儒生)의 대책(對策)한 말을 내가 심히 분하게 여긴다. 불교가 해가 되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하랴. 하물며 공자 맹자를 배우는 자임에랴. 공자의 말씀에 ‘이단(異端)을 공부하면 해가 된다.’하였으며, 맹자의 말씀에 ‘능히 말로써 양주(楊朱), 묵적(墨翟)을 배척하는 이는 성인의 무리다.’하였으며, 정자(程子)의 말씀에 ‘불교의 해독이 양주, 묵적보다 심하므로 마땅히 음탕한 음악과 아름다운 여색과 같이 생각하여 멀리 하여야 한다.’하였으니, 후세의 배우는 자가 힘써 살피어 밝게 변별[辨]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항상 승려들이 천륜(天倫)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 것을 한(恨)하여, 장차 그 뿌리를 뽑아 세상의 교화를 부식(扶植)하려 하는데, 지금 유생이 국가에서 인재를 뽑는 날에 당하여 요(堯)순(舜)의 도를 진술하지 아니하고 부처의 법을 주장하니, 이것은 장차 나로 하여금 양무제(梁武帝)가 몸을 희사(喜捨)하는 것이나, 당나라 헌종(憲宗)이 〈부처에게〉길게 꿇어앉아 절하던 것과 같이 하게 하고야 말려는 것이냐? 명색이 유생이라는 것이 오히려 이 꼴인데, 하물며 무식한 남녀들이랴! 마땅히 관에서 문초하여 먼 데로 귀양보내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미워하는지를 명백히 보여 주라.”하고,
또 예조에 명하여 다시는 중에게 도첩(度牒)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향교(鄕校)에 서적이 적다하여 《사서(四書)》,《오경(五經)》, 제사(諸史)를 출판하여, 각도에 내려주도록 명령을 하였다.
3년127) 윤9월에 왕이 장헌왕128)의 묘소에 배알할 때 지나가는 고을에 관원을 보내어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내고 학생들에게 차등있게 쌀을 주고, 또 머물렀던 고을에는 백성들이 행차를 대접하기에 수고하고 비용이 났다 하여 전조(田租)129)의 반을 감해 주었다. 겨울에 성변(星變)이 있으매, 일관(日官)이 초제(醮祭)130)를 지내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재앙을 변하여 상서(祥瑞)가 되게 하는 것은 덕을 닦는데에 있지 기양(祈禳)하는데에 있지 않다.”하였다.
4년131) 5월에 하교하기를,
“지친(至親)은 한 몸이 나누어진 것이므로, 숙질(叔姪)은 부자(父子)의 의(義)가 있고 형제는 천륜(天倫)의 중한 것이니, 마땅히 친목한 행실을 도탑고 화하게 하여 돈독하고 후한 풍속을 이루어야 한다. 옛적에 왕상(王商)은 후(侯)가 되어 재물을 동생에게 밀어주고, 설포(薛包)는 동생에게 분재(分財)할 때에 나쁜 물건만 자기가 차지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풍속이 박하여 혹은 서로 다투고 저희들끼리 서로 헐뜯는 일이 있으니, 골육(骨肉)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것보다 더함이 없다. 이제부터는 형제 숙질이 소송하여 간사와 거짓이 현저한 자는 아울러 사변(徙邊)하여 풍속을 도탑게 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중외에 별일이 없으매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다투어 숭상하여 음식 의복과 거마(車馬) 주택이 모두 극도로 사치하니, 내가 매우 그르게 여긴다. 너희 신하들은 검소한 행실을 힘써서 폐풍을 개혁하라.”하였다.
11월에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곡식이 약간 풍년이 들었는데, 수세(收稅)가 너무 가볍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풍족하지 아니하랴. 백성에게 일분(一分)을 너그럽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하였다.
평안도에 국경이 소란하므로 병조(兵曹)에서 본도의 군졸을 모두 변방에 수자리 살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번(番)을 나누어 방수(防戍)하는데는 예로부터 법이 있다. 누가 부모가 없으며 누가 처자가 없겠느냐? 집이 이산되는 것을 나는 매우 불쌍히 여긴다. 번을 나누어 가서 방수하게 하라.”하였다.
5년132) 정월에 성균관 창고를 맡은 아전이 쌀 약간을 축내었다. 관에서 추상(追償)을 시키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라가 비록 작으나 어찌 양현(養賢)할 물자가 없겠느냐? 추상(追償)시키지 말라.”하고, 특별히 쌀과 베를 주었다.
8월에 왕이 성균관에 이르러 선성(先聖)에게 제사지내고 유생 및 백관을 크게 먹이면서 이르기를,
“술을 정신없이 마셔서는 안된다. 그러나 오늘일은 유(儒)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뜻이니, 각기 취하고 배부르도록 먹으라.”하고,
이어 유사(有司)에게 명해서 학궁(學宮)을 중수하게 하였다.
6년133) 6월에 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즉어(鰂魚)가 약이 됩니다.”하니,
왕이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야흐로 장마철에 그것을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으니, 어찌 내가 먹으려고 폐를 끼칠 수 있겠는가?”하였다.
12월에 해조(該曹)에서 원일례연(元日禮宴)을 준비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임금이란 마땅히 만민(萬民)과 더불어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 하여야하는 것이니, 지금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데 홀로 즐기는 것이 옳겠는가? 그만두라.”하였다.
왕이 전대(前代)의 여러 임금 및 명현(名賢)의 묘가 혹 무너지고 헐린 것이 있으므로, 해당 수령(守令)에게 명하여 수리하고 나무하거나 마소를 먹이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7년134) 12월에 왕이 병이 더하였으나 오히려 정무(政務)를 정지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하게 되매, 면복(冕服)을 갖추고 대신을 접견하여 뒷일을 부탁하고 이튿날 24일(기묘)에 정침에서 훙(薨)하니, 아이들과 부녀까지도 슬피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향년(享年) 38세요, 재위 26년이었다.
註88]회간왕(懷簡王): 덕종.註89]정축년: 1457 세조 3년.註90]혜장왕(惠莊王 ): 세조.註91]모형(母兄): 같은 어머니가 낳은 형.註92]성화(成化) 5년: 1469 예종 원년.註93]양도왕(襄悼王): 예종.註94]권서(權署): 천자로부터 아직 왕으로 인정받기 전에, 우선 나라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註95]6년: 1470 성종 원년.註96]7년: 1471 성종 2년.註97]선성(先聖): 공자.註98]8년: 1472 성종 3년. 註99]거애(擧哀): 상(喪)을 당하여 애례(哀禮)를 행하는 것.註100]본(本): 농사.註101]말(末): 장사[商].註102]《상서(尙書)》:《서경(書經)》.註 103]10년: 1474 성종 5년.註104]소생부(所生父): 낳은 아버지.註105]11년: 1475 성종 6년.註106]선농(先農): 중국 상고 시대에 처음으로 농사를 가르쳤다는 신농(神農)이라는 임금과, 농사를 잘 다스리므로 순임금에 의해 후직(后稷)의 벼슬에 임명된 주(周)나라 왕실의 선조인 기(棄), 또 그들을 제사하던 선농단(先農壇)의 약칭.註107]12년: 1476 성종 7년 註108]사신(詞臣): 문학으로 시종(侍從)하는 신하.註109]13년: 1477 성종 8년.註110]14년: 1478 성종 9년.註111]15년: 1479 성종 10년.註112]17년: 1481 성종 12년. 註113]영안도(永安道): 함경도.註114]수신(守臣):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신하. 수령(守令).註115]수미(蒐獮)의 예(禮): 사냥을 하여 무사(武事)를 익히는 예. 수는 봄사냥, 미는 가을사냥.註116]18년: 1482 성종 13년.註117]19년: 1483 성종 14년.註118]20년: 1484 성종 15년.註119]전최(殿最): 전은 하공(下功), 최는 상공, 공적의 우열(優劣)을 고과(考課)하는 것. 註120]전조(銓曹): 문무관을 전형(銓衡)하는 조(曹). 이조와 병조.註121]연격(年格): 어느 기간을 근무하여 다른 벼슬로 옮길 수 있는 자격.註122]23년: 1487 성종 18년.註123]홍치 원년: 1488 성종 19년.註124]궁온(宮醞): 임금이 내리는 술.註125]궁촉(宮燭): 임금이 내리는 초.註126]2년: 1489 성종 20년.註127]3년: 1490 성종 21년.註128]장헌왕: 세종.註129]전조(田租): 농지세.註 130]초제(醮祭): 별에게 지내는 제사.註131]4년: 1491 성종 22년.註132]5년 : 1492 성종 23년 註133]6년: 1493 성종 24년 註134]7년: 1494 성종25년.
○大行大王行狀:
國王姓李氏, 名諱, 懷簡王第二子。 母妃韓氏, 議政府左議政確之女, 以天順丁丑七月辛卯生 王。 懷簡王爲世子早薨, 王祖父 惠莊王育 王于宮中。 王天資穎異, 器度雄偉。 惠莊王特奇愛之, 封爲者山君。 王嘗與母兄月山君婷在王宮, 適雷雨暴作。 有寺人在傍震死, 左右皆顚仆褫魄, 王略不動色。 惠莊王尤異之。 成化五年十二月, 王叔父襄悼王疾革, 嗣子幼且病, 擇所宜後, 以王德器夙成, 孝悌好學, 令權署國務。 及襄悼王薨, 王遣臣宋文琳告訃, 權瑊請承襲。 六年五月, 先皇帝賜詔曰: “朕嗣守丕圖, 撫御寰宇。 遐方異域, 咸立君長, 俾治其民, 易世錫封, 厥有彝典。 故朝鮮國王李諱, 承先事大, 忠孝有聞。 受封未及逾年, 訃告遽云卽世, 顧玆緖業, 宜屬親賢。 今特遣太監金興, 齎勑封王姪諱爲朝鮮國王, 繼總國政。 惟諱, 實惠莊王之孫, 本國大小臣民, 其一心奉順, 用輯和東土, 藩屛中朝, 無替爾先王之業, 斯稱朕眷待爾國之意。” 又賜制曰: “朕, 祗紹洪圖, 懋隆屛翰, 肆懷遠而爲近, 庶一視而同仁。 眷此東藩, 世稱秉禮, 允惟承序, 宜屬仁賢。 朝鮮國王李諱, 聰明天賦, 學問夙成, 國論攸歸, 宗祧宜繼。 今特封爲朝鮮國王, 總統國事。 於乎! 惟誠敬可以修身, 惟禮義可以爲國; 惟忠可以事大, 惟孝可以元宗, 尙愼終始, 毋忘訓飭。” 又賜勑曰: “得奏, 爾叔王諱, 於成化五年十一月二十八日薨逝, 玆特遣太監金興、行人姜浩, 齎文諭祭, 竝齎詔示爾國人, 封爾諱爲朝鮮國王, 繼主國事, 竝封爾妻韓氏爲王妃。 爾宜敬守先業, 保國安民, 篤忠誠而事朝廷, 敦信義以睦隣境, 躬節儉以舒財用, 俾東土民物康阜, 永爲中國藩輔之重。 朕惟爾嘉, 特遣頒賜爾及妃誥命、冕服、綵幣等件, 至可領也。” 王遣陪臣, 奉表陳謝。 王令大小臣僚, 各陳時宜, 宗戚、文武六品以上, 各擧賢能, 命該曹, 孝子、節婦其行卓異者, 旌門、復戶以奬之。 設弘文館於殿側, 選文學才行之士十七員, 更日直宿, 侍講經史、規珌義。 七年三月, 王至成均館, 謁先聖祀以大牢, 坐明倫堂, 令文士問難經義。 十一月, 下敎曰: “予以幼沖, 纉承先業。 凡朝政得失、生民利害, 盡心釐正。 然事機至繁, 罔知攸措。 今當冱寒陰閉之時, 愆陽爲災, 天意豈無所自歟? 反身省己, 實由寡昧。 累求直言, 未有盡言極陳者; 累求賢俊, 未有明(楊)〔揚〕側陋者。 董治百司, 猶有懈弛; 審理獄讞, 猶有冤滯。 勤恤民隱, 而無告尙多; 務省工役, 而興作不息, 其令政府, 廣曉中外, 詳究以啓。” 八年三月, 皇太子訃音至。 禮官請以明日擧哀, 王曰: “哀切於中, 奚待明日?” 卽率百官擧哀, 奉表陳慰。 五月, 下敎曰: “生財, 在於務本; 裕財, 在於節用, 如欲節用, 必先儉約。 蓋奢侈則用必廣; 用廣則財必渴。 念我東方, 地力疏薄, 勤儉節用, 猶患財用之不裕, 況棄本、逐末, 生之者旣寡, 爭相華侈, 用之者不節哉! 予爲是慮, 嚴逐末之禁、定役民之法、罷不急之務、除無益之費, 庶不擾爾人民, 爾人民, 盡力農桑, 勿爲惰慢; 崇尙節儉, 無爲奢靡; 量財節用, 勿爲橫費。 家之與國, 大小雖殊, 其體則一。 苟能存心省約, 於裕國乎, 何有? 爾人民, 各體予意, 以遂生業。” 王, 嘗觀《尙書》, 至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謂侍臣曰: “爲君之道, 孰有加於此哉? 非獨人君, 爲臣者, 能受盡言而後, 能諫其君, 爾等亦宜知之。”
嘗讀史, 至隋煬帝勿發, 使人逐捕九人, 其罒人非賊。 有司以帝已令斬決, 遂不奏竝殺之。 王曰: “煬帝固爲無道, 然當時之臣, 知而不言, 豈得無罪? 予以煬帝爲戒, 爾等亦以不執奏者爲戒。 君臣交修, 不亦可乎?” 又讀至魏徵言於太宗曰: “貞觀之初, 陛下節儉, 求諫不倦。 比來, 營繕微多, 諫者頗有忤旨。” 王曰: “古稱: ‘鮮克有終。’ 太宗之初, 可謂盛矣, 至於末年, 漸不如初。 以太宗之賢, 猶若此, 況不及太宗乎? 近年, 頗興營造。 雖皆出於不得已, 中外以爲何如? 予卽政以來, 未嘗罪一言事之臣。 爾等勿以忤旨爲虞, 事有不便, 當盡言之。” 鷹坊, 嘗畜一海東靑。 侍臣以爲言, 王卽命放之, 終不復畜。 十年九月, 王遣陪臣金礩奏曰: “臣以庸愚, 特蒙聖恩, 得守先業有年。 顧惟, 所生父臣諱, 先祖惠莊王臣諱嫡子, 受命爲世子, 不幸早逝。 今臣旣受王爵, 妻亦爲妃, 而所生父稱世子, 母無名號, 一國臣民, 稱說不順, 於人子之心, 誠有未安。 然臣旣爲先臣襄悼王諱之後, 義不可顧私親, 且懼天威, 囁嚅至今。 (切)〔竊〕念, 天性之親, 恩愛亦重。 顯楊之懷, 不能自已, 敢昧死塵瀆, 伏望聖慈, 賜爵、賜謚, 俾伸微誠, 以廣孝理, 不勝至願。” 先皇帝賜勑曰: “得奏, 王所生父諱, 先封世子, 早逝及所生母韓氏, 見在俱未有名號。 雖爲人後者, 義不可顧私親, 然顯(楊)〔揚〕之懷, 不能自已等因, 具悉王之孝忱。 玆特追封故世子諱, 爲朝鮮國王, 謚懷簡, 封韓氏爲懷簡王妃, 以遂王顯親之志及頒給誥命, 竝妃冠服, 至可領也。” 王, 蒙恩感激, 宥境內, 賜群臣爵一級, 奉表陳謝。 十一年正月, 王, 親祭先農, 遂躬耕籍田。 又令王妃親蠶, 皆如儀。 八月, 下敎曰: “司獄官吏, 所失非一。 苛暴深刻者, 常失於羅織; 昏迷庸懶者, 常失於淹滯。 好羅織則深文峻法, 嚴加(栲)〔拷〕訊, 援引傅會, 一切增飭, 無辜之人, 橫罹斧鑕; 好淹滯則依違不決, 動隔炎涼, 桎梏加體, 飢寒切身, 悲號疾病, 遂死獄狴, 豈不冤哉? 嘗聞, 一人向隅, 滿堂爲之不樂。 匹夫匹婦, 死非其辜, 咎將誰執? 大抵, 獄辭初若轇轕, 緣情推究, 迎刃自解。 但司臬者, 不加之意而已。 毋或爾羅織、毋或爾淹滯。 本之以仁恕; 行之以明允, 使死者伏辜; 生者無冤, 豈不美哉!” 十二年春, 先皇帝冊皇上爲皇太子, 賜勑曰: “王, 赤秉禮義, 忠敬朝廷。 玆朕建立皇儲, 嘉惠多方。 矧惟王國, 尤所當厚。 特遣正使戶部郞中祈順、副使行人司左司副張謹, 齎詔諭王, 竝賜王及妃, 彩幣文錦, 至可收領, 用副朕眷待之意。” 兩使見王, 相謂曰: “眞賢王。” 臨別, 正使作詩贈 王, 其序云: “順使朝鮮, 累與王相接, 心甚嘉之, 蓋其妙齡秀穎, 崇儒好學, 威德傍敷, 一邦輯穆, 誠他邦所罕儷。” 王採前世明君、暗主所行善惡事迹, 命工圖屛, 令詞臣作詩, 書于其上, 坐臥觀省。 十三年八月, 王詣成均館, 酌獻先聖, 行射禮, 仍下敎諸道觀察使, 令所在守令, 行飮射禮, 歲以爲常。 前此, 國王生日, 勳舊之臣就僧寺祝釐, 王曰: “《詩》不云乎! 求福不回。 豈可侫佛, 而求福乎? 其罷之。” 十四年四月, 王詣成均館, 親祀先聖, 坐明倫堂, 養老乞言。 王謂群老曰: “《書》云: ‘內作色荒, 外作(無)禽荒, 甘酒嗜飮, 峻宇雕墻, 有一於此, 靡或不(忘)〔亡〕, 實人君之藥石。 予嘗書此。 貼於座右, 常常觀省。 今又聞諸老所陳, 皆修身、治國切要之言, 予(嘗)〔常〕服膺勿失。”
十五年冬, 先皇帝遣使賜勑曰: “建州女眞, 逆天背恩, 累寇邊陲。 已令監督、摠兵等官, 選領精卒, 刻期征勦。 惟爾國王, 紹祚東藩, 輸忠於我國家, 有隆無替, 朕甚嘉悅, 我兵壓境, 賊有奔竄國境, 諒必擒而俘獻之。 王如申遣偏師, 遙相應援, 大奮貔貅之威, 同殲犬羊之孽。 逆虜旣除, 則王敵愾, 功勤愈茂, 而聲名, 豈不有以享於無窮哉?” 王, 卽遣臣魚有沼等, 領兵入攻, 有沼以江水氷合旋解, 難於渡師, 罷兵回還。 王治有沼不及軍期之罪, 更遣陪臣尹弼商、金嶠, 領兵四千, 直擣賊穴, 俘斬醜類, 焚蕩屯落, 幷得被擄遼東人口而還。 王遣陪臣魚世謙獻俘, 先皇帝賜勑曰: “往年, 建賊背逆, 朕嘗出師致討, 而爾國先王諱, 發兵來助。 用能克捷矣。 玆者, 賊猶稔惡不悛, 朕從廷議, 仍出師討之, 王發兵來助。 雖前兵因江水凍解, 難濟, 不獲與我師合勢, 同成厥功, 而後兵亦抵巢攻勦, 擒斬其部屬, 焚燬其廬舍蓄峙, 得其所掠我邊衛人口, 又遣陪臣, 押赴來獻, 王之忠誠, 於先世可謂能繼; 於朕命可謂無負矣, 令聞寧有窮已耶? 今遣內官鄭同、姜玉, 至王國, 賜王綵段、白金、紋錦、西洋布, 其領兵官左議政尹弼商、節度使金嶠, 亦各有賜, 以旌勞勳, 王其欽承之。” 王, 奉表陳謝。 十七年八月, 永安道守臣, 獲白鹿以聞, 王曰: “此非予所喜, 其放之。” 十月, 下敎曰: “苑囿之設, 非以病民也。 嘗於農隙, 親講武事, 以擧蒐獮之禮耳。 今有司, 禁民樵採, 禽獸益繁, 有乖爲民除害之義。 古不云乎? 芻蕘者往焉, 雉兔者往焉。 自今, 苑囿所在, 悉令弛禁, 與民共之。” 十八年六月, 下敎曰: “古昔賢君, 莫不選賢與能, 共康庶績。 我國家設科取士, 又立薦擧之法, 欲其才德之士, 咸使登庸。 求賢之路, 不爲不廣, 然滄海遺珠, 自古所歎。 草澤巖穴之間, 豈無懷才抱奇, 沈鬱而不能自售者乎? 凡厥在位, 搜訪遺逸, 咸以名聞。” 十一月, 王引儒臣入內殿, 講《中庸》、《大學》, 因尙論先儒同異之說, 歷代治亂之跡。 時有規諷, 王, 聽之亹亹, 至於夜分。 諸臣請退, 王曰: “古人有云。” 接賢士大夫之時多, 則氣質變化, 自然而成。’ 予今日, 得聞所未聞之言, 裨益弘多。 殊不爲倦, 勿退。” 十九年二月, 王, 請立嫡子諱爲世子, 先皇帝賜勑曰: “朕惟, 有爵土者, 莫不爲長世之圖。 立嫡長者, 所以係群情之望, 古今然也。 得奏, 擧國臣民, 旅庭請命, 欲立王子諱爲世子, 王不敢顓, 貢使以聞。 朕覽之, 特加兪允, 乃命太監鄭同爲正使, 金興爲副使, 齎勑幷紵絲、紗羅等件, 封諱爲朝鮮國王世子, 其合用冠服, 王國自製。 夫朝廷之命, 王其承之, 藩邦之器, 世子其主之。 知天地之分, 不可踰時, 率以事上之誠, 知繼體之道, 不可忽罔。 替夫秉禮之訓, 若是則本愈固、譽愈隆, 王國享福, 詎有窮耶? 欽哉!” 王, 奉表陳謝。 王選名儒爲世子師友, 授以經史, 交相切磋。 又令謁先聖, 入學于成均館, 凡所以敎養之者, 無所不至。 三月, 王祖母惠莊王妃薨。 王哀毁成疾, 大臣請進酒。 王曰: “忘哀飮酒, 予所不忍也。” 固請, 不聽。 二十年四月, 下敎曰: “親民之官, 莫重守令。 守令之匪人, 生民之大患也。 在官一月, 則貽一月之害; 在官一年, 則貽一年之害。 而況三期、六期之久乎? 仲尼有言: ‘苛政猛於虎。’ 蓋苛政行於下, 則人主雖有仁民愛物之心, 何能澤及於民乎? 予以涼德, 叨承前緖, 臨莅臣民, 十有五年。 間者, 水旱相仍, 民罹饑饉, 是雖寡躬無德之致, 亦恐親民之官, 以侵耗爲事; 以刻察爲明, 貨賄公行, 刑罰縱濫, 不修厥職, 徒務自肥。 方面之臣, 雖任剌擧, 眩於薰蕕; 失於殿最, 往往, 慈祥豈弟者抱屈; 貪暴姦回者得志, 傷和召災, 未必不由乎是。 予欲別議陞黜, 以示勸懲。 咨爾政府, 各而所知, 旌別以聞。” 議政府, 擧循良有治効者, 貪懶不宜臨民者以啓, 卽命陞黜焉。 五月, 王命摸集趙孟頫字, 刻張蘊古《大寶箴》, 揭于便殿以自警。
親寫王禹偁《待漏院記》, 以賜承政院, 謂承旨等曰: “禹偁之記, 雖爲執政而作, 然在位百執事, 皆可以代座隅之銘。 況爾院, 爲樞機之地乎?” 下敎曰: “自古, 帝王之代天理物, 莫不勞於求賢, 逸於得人。 堯咨四岳, 舜闢四門。 以至成湯之於三俊; 武王之於十亂, 無非得人材, 以成泰和、雍熙之治。 周公以元聖, 輔成王, 宜無待於賢者, 以一食三吐(甫)〔哺〕; 一沐三握髮, 其急乎見賢如此。 我國人材, 雖不得與中國比擬, 然十室之邑, 必有忠信。 四方之廣, 豈無其人? 要使用舍得宜, 而賢愚異途耳。 今典選之任, 一委銓曹, 而銓曹拘於年格, 唯取日月久近, 不簡人物(藏)〔臧〕否, 雖有卓爾之人, 混於凡庸之流, 此豈選用賢材、權衡人物之意乎? 如有才行出衆者, 特以名聞, 不拘常調, 不次用之, 無使賢愚同滯。” 十二月, 下敎曰: “學校, 風化之大源; 賢才, 國家之利器, 而成均儒生餼廩不贍, 殊非崇重之意也。 給田四百頃, 以贍其用, 州、府、郡、縣之學, 亦給有差。” 王嘗因旱, 命減諸道供進之物, 慶尙道守臣啓: “如海錯之類, 得之甚易, 請依舊以進。” 王曰: “臣子奉上之情雖勤, 人君恤下之情亦切, 其勿進。” 二十三年秋, 王聞 先皇帝升遐, 率百官擧哀, 卽遣陪臣卞宗仁陳慰, 李封進香, 盧思愼賀 皇上登極。 弘治元年春, 皇帝賜勑曰: “朕嗣守祖宗洪業, 統御萬方。 聲敎所曁, 宜覃恩澤。 矧伊王國, 世篤忠誠, 錫賚之典, 尤所當厚。 特遣正使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講董越、副使工部右給事中王敞, 齎詔勑諭王, 幷賜王及妃幣帛、文錦, 至可收領。 尙體朕眷懷, 秉禮服義, 益隆藩輔, 共享太平之福。” 正使, 見王歎曰: “老生, 久聞賢王學問高明, 通達禮義。 承今幸目覩, 果愜所聞。” 十一月, 臺官, 採古伊尹、召公勸戒其君之辭, 繕寫以進, 以寓規警之意, 上, 嘉悅曰: “今觀爾等所進之辭, 蓋欲納君於無過之地也。 爾等愛君之誠, 寧可忘耶, 賜以宮醞, 至夜, 撤宮燭送之。 二年正月, 有擧子於鄕試對策, 言祀佛禳禍者, 試官斥之。 王聞之, 手札下敎曰: “儒生對策之辭, 予甚憤焉。 佛之爲害, 誰不知之。 況學孔、孟者耶? 孔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孟子曰: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 程子曰: “佛氏之害, 甚於楊墨, 當如淫聲、美色以遠之, 後之學者, 可不力察, 而明卞之乎? 予常恨緇徒, 蔑棄天常, 耗蠧民財, 將欲絶其根株, 扶植世敎。 而今者, 儒生當國家擧賢之日, 不陳堯、舜之道, 鼓倡浮屠之法, 是欲使予, 如梁武之捨身; 唐宗之膜拜而後已乎? 號爲儒者, 猶尙如此, 況無識士女乎? 宜令有司推鞫, 屛諸遐裔, 明示好惡。” 又命該曹, 勿復度僧。 王以鄕學書籍尠少, 命印四書五經及諸史, 頒于諸道。 三年閏九月, 王謁 莊憲大王墓所, 所過州縣, 遣官致祭于先聖廟, 給學生等米, 有差。 又以駐駕之地, 供頓勞費, 減是年田租之半。 冬有星變, 日官請行醮祭, 王曰: “變災爲祥, 在於修德, 不在祈禳也。” 四年五月, 下敎曰: “至親之人, 一體而分。 叔姪有父子之義, 兄弟爲天倫之重, 宜敦雍穆之行, 以成篤厚之風。 昔王商爲侯, 推財與弟, 薛包分財, 以惡物自與。 今世之人, 俗習澆薄, 或有交爭, 自相詆毁, 殘傷骨肉, 莫此爲甚。 今後, 兄弟叔姪, 起爲爭端, 詐僞顯著者, 令竝徙邊, 以厚風俗。” 又下敎曰: “比年以來, 昇平日久, 中外無事, 競尙華靡, 飮食服玩, 車馬第舍, 皆極侈麗, 予甚非之。 惟爾臣僚, 務要儉行, 以革弊風。” 十一月, 戶曹啓: “今者, 穀稍稔, 而收稅太輕。” 王曰: “百姓足, 君誰與不足? 寬民一分, 不亦可乎?” 平安道有邊警, 兵曹請本道軍卒, 竝令戍邊, 王曰: “分番防戍, 古有其法。 誰無父母, 誰無妻子? 靡室靡家, 予甚憐憫, 其令分番往戍。” 五年正月, 成均館典庫吏, 耗米若干, 有司欲追償, 王曰: “國雖小, 豈無養賢之資? 其勿追償。” 特給米布。 八月, 王至成均館, 祀先聖, 大饗儒生及百僚, 謂曰: “飮酒固不可及亂, 然今日之事, 實崇儒重道之意, 其各醉飽。” 因命有司, 重修學宮。 六年六月, 王有疾, 醫云: “鯽魚可治。” 王謂近侍曰: “今方雨潦, 採捕之人, 恐罹沒溺之患, 豈可以口腹累人乎?” 十二月, 該曹請設元日禮宴, 王曰: “人君, 當與萬民, 同其憂樂。 今當歲歉民飢, 而獨樂可乎? 其停之。” 王以前代諸王及名賢之墓, 或有頹毁者, 命所在修葺, 禁樵牧。 七年十二月, 王, 寢疾彌留, 猶聽斷不輟。 及篤, 具冕服, 引見大臣, 屬以後事。 翼日己卯, 薨于正寢, 雖童稚婦女, 莫不奔走悲呼。 享年三十八, 在位二十六年。
연산 43권, 8년(1502 임술/명홍치(弘治) 15년) 3월11일(계미) 7번째기사
영의정 한치영등이 자녀가 없는 왕자에게 준 노비를 다시 거둘 것을 건의하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길,
“각 사(司)의 노비(奴婢)와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는 전에 여러 군(君)들에게 나누어 하사하고 거의 없어져서 각사의 현재 부리는 것이 더러는 5, 6명밖에 되지 않으니, 신등은 청컨대 자녀가 없는 왕자(王子)에게 하사한 노비를 장례원(掌隷院)으로 하여금 찾아오게 하여 모두 본사(本司)에 돌려보내면, 각사와 내수사에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그리 하라.”하였다.
전교하기를,
“전에 중국사신 강옥(姜玉)등의 친척에게 하사한 노비를 도로 찾아 속공(屬公)시키는 것이 가한지를 정승들에게 물어보라.”하니,
한치형등이 아뢰기를,
“내년에 중국 사신이 반드시 나올 것이니, 만약 와서 듣고보면 어찌 불가(不可)함이 없겠습니까? 우선 중국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領議政 韓致亨 、左議政 成俊 、右議政 李克均 啓: “各司奴婢及內需司奴婢, 前此分賜諸君殆盡, 各司時役, 或少至五六口。 臣等請無子女王子賜牌奴婢, 令掌隷院推刷, 皆還本司, 則各司及內需司可得實矣。” 傳曰: “可。” 傳曰: “前此天使 姜玉 等族親所賜奴婢, 推刷屬公便否, 其問政丞。” 致亨 等啓: “明年天使必出來。 若來聞見, 則無奈不可乎? 姑待天使行還, 更議何如?”
연산 49권, 9년(1503 계해/명홍치(弘治) 16년) 4월 22일(무오) 2번째기사
성준, 박건 등이 활제조에 대해 의논하다
군기시 제조(軍器寺提調) 성준(成俊), 박건(朴楗), 신준(申浚)이 아뢰기를,
“사신에게 주려고 만드는 활을 반드시 정밀 견고하게 할 것없이 장식만 좋게 하면 될 것이요, 그 안까지 정밀 견강하게 할 것이 아닙니다. 그 안을 거칠게 하더라도 외부를 좋게하였고, 오랜 뒤에 시위를 맬 것이니, 저들이 어찌 정교한지 졸(拙) 한지를 알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믿고 방어에 쓰는 것은 활과 살뿐이니, 진실로 중국에서 우리의 좋은 기술을 알게 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등이 야인(野人), 달자(㺚子), 중국의 활을 보았는데, 모두 우리나라만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인심은 겁이 많고 나약하여 죽기를 두려워하는데도 수(隋)나라와 당나라 때에 천하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공격하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 것은, 반드시 활과 살이 정밀하고 날카로워 그랬던 것인듯 합니다.
대저 신하로 인군을 섬기는 것과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그 자취는 같지만 실지는 다릅니다. 즉 신하가 인군에게는 그 나라가 파멸되게 되면 자기 몸 역시 따라야 하기 때문에, 인군과 신하 사이에 조금도 숨김이 있을 수 없지만,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는데 있어서는, 큰 나라가 망하더라도 작은 나라가 같이 망할 것은 없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자를 어찌 반드시 일마다 모두 숨기지 않을 것이겠습니까? 이번에 만드는 활은 비록 황제의 명이라고는 하지만, 정밀하고 견고하게 할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두 사신의 조정에 돌아가서 진상하는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진상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저희들의 공으로 할 것이니, 어찌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 정원에서 아뢴 것을 듣건대 ‘이렇게 하면 중국의 흑각(黑角)4018)을 반드시 구하지 못하게 된다.’하는데, 이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 천순황제(天順皇帝)4019)가 승하했을 때 신이 진위사(陳慰使)로 북경에 갔었는데, 이는 천하가 다 모일 때이지만 모인 나라가 많지 않으며, 가지고 온 방물(方物)도 우리나라처럼 정밀하지 않았습니다. 경술년4020)에 성절사(聖節使)로 북경에 갔을 때에도 운남(雲南)등 3, 4나라만이 와서 조회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성심으로 섬겨 세 큰 명절[三大節]마다 방물을 가져가고, 일이 있을 때면 가서 위로하였는데, 중국 조정에서는 어찌 이번 한 가지 일이 정성스럽지 못하다하여 흑각을 주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신이 보온 즉, 김보(金輔)가 하는 짓이 오만하고, 이번에 와서 더욱 심한데, 어찌 다 그 마음에 맞게 할 것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조정에 들어가 황제의 명을 받고 온 사람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강옥(姜玉), 김흥(金興), 정동같은 사람은 혹은 돈화문(敦化門)밖에 와서 말에서 내렸으며, 혹은 전하를 높혀 북쪽으로 향하여[北面]4021) 앉았고 정동은 손수 의자를 들어서 옮겨놓고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는데, 지금 김보는 당돌함이 이러하니, 신이 실로 마음 아픕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가만히 감조관(監造官)을 시켜 거칠게 지어주게 하고, 다시 통사(通事)들에게 엄중히 지시하여 만일 조금이라도 이 뜻을 누설하는 일이 있으면, 관반(館伴)이라 하더라도 중죄로 논하기 하라.”하였다.
註4018]흑각(黑角): 활 만드는데 쓰는 뿔.註4019]천순황제(天順皇帝): 명나라 영종(英宗). 천순은 연호임.註4020]경술년: 1490 성종 21년.註4021]북쪽으로 향하여[北面]: 임금으로 섬기는 것.
○軍器寺提調成俊、朴楗、申浚啓: “天使所造弓, 不必精固。 但當好飾而已, 不宜幷與其內而精强。 雖麤其內, 旣好其外, 而日久上弦, 則彼豈知巧拙也? 我國所恃而備禦者, 徒以弓矢耳, 固不可使中國知我長技也。 臣等見野人、㺚子、中國之弓, 皆不如我國。 況我國人心, 㤼懶畏死, 而隋、唐之世, 擧天下而來攻, 竟無功者, 意必弓矢精利而然也。 大抵以臣事君, 以小事大, 迹同而實異。 臣之於君, 國破則身亦隨之, 故君臣之間, 不可少有所隱。 若以小事大, 則大國雖亡, 小國不與之俱亡。 事大國者, 豈必事事而皆不隱耶? 今此造弓, 雖是帝命, 宜不至精强, 況兩使還朝進上之言, 豈盡取信乎? 且雖進上, 必以爲己功, 豈有助於我國也? 今聞, 政院啓: ‘如此則中朝黑角, 必不可得矣。’ 此言非是。 曩者天順皇帝昇遐, 臣以陳慰使赴京。 此天下畢會之時, 所赴之國不多, 其方物亦不如我國之精密。 庚戌年以聖節使赴京, 只雲南等三四國來朝。 我國則事之以誠, 三大節每致方物, 有事則陳慰。 中朝豈以此一事爲不誠, 而不給黑角乎? 萬無是理。 臣觀, 金輔所爲傲慢, 此行尤甚, 豈可盡副其心? 我土人入中朝, 受命來者非一。 如姜玉、金興、鄭同或至敦化門外下馬, 或推殿下坐北面。 鄭同則至於手執交倚徙置, 不敢仰視。 今金輔唐突若此, 臣實痛心。” 傳曰: “潛令監造官, 麤造以給, 更加嚴敎通事等, 若少漏洩此意, 則雖館伴重論。”
중종 83권, 31년(1536 병신/명가정(嘉靖) 15년) 12월18일(기해) 4번째기사
간원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다
대사간 성윤(成倫)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박원형(朴元亨)의 행장(行狀)을 보건대 세조(世祖) 때 성화(成化)179 48) 무자년17949) 4월에 황제가 강옥(姜沃)·김포(金浦)등을 보내왔을 때에 위에서 좌의정 박원형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태평관(太平館)에서 잔치하였습니다. 잔치가 파하고 상께서 경의실(更衣室)로 나오시자 박원형이 들어가 일을 아뢰니, 상께서 ‘내가 경을 굽혀서 접반을 삼았는데 경의 뜻에는 어떠한가?’하고 물으셨는데 ‘신이 무상(無狀)하기는 하나 삼공(三公)으로 있으니 중국조정이 의정으로 접반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전하의 사대하는 정성을 더욱 믿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하였습니다. 관반(館伴)은 중요한 임무이므로 신들이 이 전례에 의거하고 또 물정(物情)에 따라서 아뢴 것이지, 새로운 선례를 만들려 한 것이 아닌데, 이제 정부(政府)가 신들이 아뢴 것을 헛된 말이라 하였습니다. 신들은 벼슬이 언관(言官)이므로 말씀을 아뢰었는데, 곧 남에게 헛된 말이라는 무함을 당하였으므로 뻔뻔스레 재직하기가 참으로 미안하니, 신들의 벼슬을 체직하소서.”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무자년 강옥·김보 때의 《등록(謄錄)》을 들여오도록 하라.”하였는데,
이윽고 간원에 답하였다.
“박원형의 일을 《등록》에서 보건대, 그때 박원형은 정승이었는데 박원형을 관반으로 삼으려 하시자 정원이 ‘정승을 관반으로 삼는 것은 관례에 어그러집니다.’라고 아뢰므로 찬성(贊成)으로 가함(假銜)하려하였으나, 정부에서 진연(進宴)할 때의 좌차(座次)가 어려우므로 영중추(領中樞) 심회(沈澮)의 패(牌)를 빌어서 거행하였다고 하였다. 행장에는 이 뜻을 쓰지않고 정승을 시켰다고 하였을 것이므로, 대간의 소견이 그러한 것이니,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註17948]성화(成化): 명헌종(明憲宗)의 연호.註17949]무자년:1468세조14년.
○大司諫成倫等啓曰: “臣等見朴元亨行狀, 當世祖朝成化戊子四月, 帝遣姜沃、金浦等來。 上以左議政朴元亨爲接伴使, 而因宴于大平館。 旣罷, 上出御更衣室, 元亨入啓事。 上問曰: ‘予屈卿爲接伴, 於卿意何如?’ 對曰: ‘臣雖無狀, 待罪三公。 朝廷若聞以議政爲接伴, 則益信殿下事大之誠矣。’ 云。 館伴重任, 臣等據此例, 且因物情啓之, 非欲肇開新例, 而昨日政府, 以臣等所啓, 爲虛語也。 臣等職忝言官, 有所啓辭, 而旋被人虛語之(淪)〔論〕。 靦然在職, 實所未安。 請遞臣等之職。” 傳于政院曰: “戊子年姜沃、金浦謄錄, 入之可也。” 俄而答諫院曰: “朴元亨事, 於謄錄見之, 其時元亨爲政丞。 欲以元亨爲館伴, 政院啓以政丞爲館伴, 違例云。 欲以贊成假銜, 而於政府進宴, 坐次爲難, 故乃假領中樞沈澮牌而行之矣。 行狀則必不書此意, 而以政丞爲之云, 故臺諫所見如此, 豈是虛語? 勿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