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5GpSz8B4
홈페이지
http://feelpoem.com
제목
현대시와 시정신의 의미 / 김완하
현대시와 시정신의 의미
김완하
블란서의 시인 말라르메는 ‘백지의 공포’라는 말을 통해서 스스로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고통스러움을 고백하였다. 그가 공포를 느끼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백지’는 시인들이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 칸을 메워 나가야 하는 종이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시인들이 짐 지고 살아가야 할 삶의 백지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갈 시간의 ‘백지’와 시가 쓰여질 원고지의 ‘백지’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은 삶의 고통과 시적 창조의 고통을 동시에 짐 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시인들에게 역설로 작용한다. 바로 그 고통을 시인들은 기쁨이자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이다. 시인들은 오히려 불행한 현실 위에서도 그것을 딛고, 더욱 빛나는 언어의 광채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설의 의미와 예술적 승화의 가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혼미한 삶, 전망이 부재 하는 시대, 가치가 전도된 세계 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문학이론가 바흐친은 이미 서정시를 쇠퇴해버린 장르라고 단언한 바가 있지만, 나는 시인들이 컴퓨터의 칩(chip) 속에 들어앉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영원히 꿈을 잃지 않는 한, 시는 끊임없이 쓰여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도구적 세계관으로 전락한 시대, 삶의 가치 척도가 양과 속도의 개념으로 전환되어버린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도 시인들은 시 한 줄을 갈고 닦기 위해서 몇 날 밤을 지새운다.
시인들은 고통스러운 세계로부터도 상상력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시의 정신을 펼쳐내기 위해서 ‘피를 잉크 삼아’ 쓰고 또 쓴다. 그들은 대량 복제의 규격화된 사회에서도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에 촛불을 밝히고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들이 ‘백지의 공포’와 싸우는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루이스도 참된 시인이라면 그들은 자만에 떨어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보다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느 사람들이라면 직업이나 일을 그만두고 여생을 즐길 나이에도 시인들은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그의 몸에서 최후의 한 방울의 시라도 짜내고자 마냥 고된 작업을 계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시인들이 이렇게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 가면서도 시를 쓰는 이유는 결코 자신만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시인들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세계와의 싸움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자신의 절망과 어둠을 넘어서는 용기와 결단을 통해서 이 세계의 절망이나 어둠과 대결하는 지혜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한 시대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인식하며 그것들 사이의 조화를 꾀하며 새로운 세계로 도약해 가려는 꿈과 의지를 펼쳐 보여 주는 것이다.
시인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 하는 불확정성의 시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극도로 상실되어 가는 세계 속에서도 새로운 시적 가치를 추구하며 꿈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들은 이미 상투화, 자동화, 일상화된 자아와 세계 사이에 시정신을 주입시켜 낡고 분열된 세계를 새롭게 정립시킨다. 그들은 모순된 상황을 해체시키고, 갈고 닦은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적 이미지의 공간을 축조해낸다.
이는 혼돈과 무질서한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들의 생명을 지켜내는 참다운 일이면서, 그 생명이 생명답게 발휘될 수 있도록 꿈의 세계를 그려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계간지의 신인공모에 응모된 시작품을 심사한 결과 거기에는 수천 편에 달하는 작품이 응모되어 있었다. 단지 2-3 편의 시를 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습작을 통해 갈고 다듬는 과정을 거쳐서 걸러진 작품 10편 이상을 정성들여 묶어보낸 20대의 젊은이들로부터 50대나 60대 장년에 걸쳐서까지 끊임없이 언어와의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예비 시인들을 대하며 시를 쓴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거듭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시정신이고 시가 이 땅에서 쓰여지게 하는 힘일 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를 쓴다는 일은 물질적 욕구나 권력에 대한 관심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면서 더 큰 고뇌와 절망의 깊이에서 차 오르는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추는 촛불 한 자루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생의 온기와 사랑의 빛을 잃지 않으려는 시정신인 것이다. 요즈음 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일반적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이나, 시에 대한 관심은 저조해지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리, 신인 등단 시 응모작들을 통해서 보면 우리 주변에서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더 많아지고 있으며, 그들의 노력 또한 대단히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자못 난감해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문화향유의 세분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기에 일반의 시에 대한 관심의 저조라는 평가에는 일정 부분이 출판유통 및 독서시장의 상업성과 연관되어 있는 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그래도 행복한 일은 문학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역설을 떠올려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경제적인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자신이 하고 싶은 문학을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인 응모작들 가운데서는 어느 경우 세간의 베스트 셀러 시집처럼 단순한 감정으로 시적 분위기를 풍기려는 것들도 없지는 않지만, 놀라운 것은 전체적으로 응모자들의 작품이 어느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단어 하나라도 함부로 쓰지 않으려는 퇴고의 흔적이 역력했다. 서정성에서부터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까지 담아내고 있는 역작들도 보였다. 또한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작품들도 많았다.
물론 실험정신이 너무 강해서 서투른 결과로 읽히는 시편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움직임 모두가 한국시단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족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시의 모색은 엄청난 것이기도 하다. 문학이란 우리 삶을 통해서 도전해 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인생관과 연관되는 큰 문제의 선택과, 조사(助詞) 하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작품 완성을 향한 아주 작은 선택 사이에 서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이야말로 우리 삶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한 편의 시를 어떻게 완성시킬 것인가 하는 참다운 기쁨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작품의 성패를 떠나서라도 시에 관심을 갖는 일 자체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시정신이기도 한 까닭이다. 점차로 시의 위상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날로 많아지고 있으며, 실제로 시가 많이 쓰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기현상 속에서도 우리 시대의 시정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시의 독자보다는 시 창작의 주체로 서려는 것이 아닐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또 한편으로 시가 점점 하향식 평준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도 판단된다. 그리하여 생에 대한 넓은 성찰과 깊은 감동을 주는 시들이 적어지는 것이다. 요즈음 시 창작의 주체들은 대다수가 30대나 40대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단은 생활이라는 문제의 압박을 벗어난 세대들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생활과 문학 사이의 갈등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생활의 고민을 벗어난 30대, 40대에 이르면 시 창작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생활의 부유함만으로는 삶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시를 읽고 쓰는 정신적 영역이 반드시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앞으로도 강한 감동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시가 나올 때 시의 가치는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가 가로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곳에서부터 새롭게 우리 시를 돌아보며 점검하고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 시란 본래 다소 어려운 문학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는 고급예술이라 하듯이 모든 사람들이 시에 관심을 갖고 시를 생활화하는 상황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독자들의 반응이나 독서시장의 동향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삶과 시, 이 사이에는 경제성의 원리라는 현실 논리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러나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여, 생이란 좀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질적 풍요나 부의 축적보다는 정신의 깊이와 영혼의 높이를 추구해 가는 삶의 소중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시정신의 핵심적 요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 삶은 현실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정신의 깊이를 향한 자기 몰입과 치열하게 그것을 밀고 나아가는 데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 삶은 얼마든지 풍요로워질 수 있게 된다. 시는 결코 우리 삶의 일차적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거기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우리 삶의 이차적인 문제 즉, 진실이나 정신을 지향하는 것이다.
시정신을 통해서 자기만의 진실을 펼쳐 내려는 노력과 마음의 풍요를 누리는 삶이란 진정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자본주의 앞에 굴복해 버린 정신,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의 자세가 희박해진 시대에 그것들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것이 시정신이다. 또한 그러한 의지를 갖는 사람들만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시정신, 그것을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삶은 얼마든지 가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