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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5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4,1-12
복 음 : 요한 21,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중학생 때 시험 보기 10일 전에 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과 함께 늑장을 부리며 공부를 계획대로 하지 않았지요.
이제 시험을 3일 앞에 두고는 다시 계획을 세웁니다.
촉박하기는 하지만 이대로만 하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맞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친구들의 유혹과 이럴 때일수록 더 놀고만 싶은 것은 왜일까요?
결국 벼락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벼락치기 스타일이라며 합리화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인데도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던 것 같습니다.
계획을 통해 결과에 쉽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만 세우고 멈춰있다면 좋은 결과는 당연히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 신앙인도 계획은 가득합니다.
문제는 아직 시간이 많다면서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를 모르면서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학창 시절의 시험처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시험에도 벼락치기가 가능할까요?
마지막 순간에 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이 역시도 평소에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바로 이 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부르심, 받기 전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는 계획이 있었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양옆에 앉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었고,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그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부 출신이 많은 제자단이었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자,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 역시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야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 줍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 줍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 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하고 부활 생명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고통스럽고 힘에 겨운 길이지만,
부활을 통해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걸을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3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예수님과 지내면서
손 놓았던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야! 하는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며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한 채 힘없이 ‘못 잡았습니다.’ 했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으니,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가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의 말씀이 더욱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습니다.
혹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보 중에 ‘구약성서의 배열’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는 성서와 우리가 말하는 구약성서는 그 내용이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교회는 성서의 배열이 다르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의 삼중 구조로 성서를 배열하였습니다.
율법서는 모세5경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 성조들의 이야기,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야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서는 신호등과 같습니다. 신호등을 잘 지키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잘 지키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언서는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회개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회개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이가 뛰놀고,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한다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
인이 자기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문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시편이 있습니다.
삶의 지혜와 방향을 알려주는 지혜서와 잠언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욥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삼중 구조로 배열된 유대인들의 성서는 안정적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이런 배열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는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사중 구조로 배열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성서 배열이 안정적이라면 교회의 성서 배열은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직 메시아, 구세주가 오지 않았지만,
교회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서가 이야기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놀며,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지내는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언서가 말하는 모든 지향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구약성서 사본은 유대인들이 성서 배열과 같았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과 같은 성서 배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꿈꾸었던 희망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이방인도, 유다인도, 세리도, 창녀도, 과부도, 어린이도
모두 같은 빵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놀며,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두 가진 것을 팔아서 교회로 가져왔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초대 교회가 버린 것은 ‘소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원수마저 사랑하기 위해 그들은 ‘칼과 방패’를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비폭력 무저항은 시대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맞서 선택한
약자들의 항쟁 수단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불의와 폭력의 낡은 시대를 부수고 출현한
평화와 사랑의 새 시대를 사는 승자들의 전혀 다른 지배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의 길입니다.
예언자들의 희망을 현실의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의 희망을 현실의 삶에서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현존하시니 즉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 부재시 제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실 순간의 모습도 동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제자단에 전해졌지만,
아직도 제자들은 긴가민가했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헛것을 봤겠지? 누군가가 만든 헛소문이겠지? 생각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제 새로운 왕국에서의 물 좋은 자리에 대한 희망도 사라져 버렸으니,
앞으로 살아갈 길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 저변의 표현을 베드로 사도가 대표해서 던졌습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다른 제자들도 동조해서 함께 밤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날따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잡이라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더군요.
잔뜩 챙겨서 낚시를 떠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만연합니다.
발걸음도 얼마나 가벼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허탕 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운지?
돌아 나오는 길은 또 얼마나 멀고 가파른지?
꽝 치고 호숫가로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우중충, 망연자실...
주님 부재 시 우리들의 모습은 언제나 그러합니다.
인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의미가 사라져 버렸으니, 우리네 삶에서 기대할 것이 그리 없습니다.
삶의 방향, 중심, 지주가 사라져 버렸으니, 낙담과 절망, 무의미가 전부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시니, 그 얼마나 충만하고 화사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하셔서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현존하시니 즉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어둡고 음산하고 우중충했던 분위기는 즉시 밝고 화사한 분위기로 변화됩니다.
항상 목마르고 배고프고, 결핍투성이였던 우리네 나날이었는데,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즉시 풍성하고 충만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 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물 밖으로 나오셨고 돌아가시고(십자가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한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다음으로 153마리는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끊임없이 물 밖으로 나와 죽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그래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와서 아침을 먹어라.” (21,12)
주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결국 배신하고 그런 자신들에 대한 실망과 환멸 가운데,
베드로와 동료들은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사실 위기의 때에는 익숙한 고향과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초심을 되살리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간 베드로 일행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요20,3참조)
역설적으로 그런 낙담과 실망의 순간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물가에 서 계셨지만, 아직도 자신들의 실망과 낙담 안에 갇혀 있는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에게.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21,5) 하고 그들이 한 일에 관심과 아울러 친밀감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들이 ‘못 잡았습니다.’라고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자,
예수님은 즉시 그들에게 문제 해결책을 지시하듯,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20,6)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거절의 말이나 거부의 몸짓 없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20,6)
이처럼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의탁할 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제자들은 뼈저리게 자신들의 무능과 약함을 통해서도 권능을 드러내시고
그런 자신들을 당신의 구원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특히 그 순간 뭍에 서 계시면서 그물을 던져라, 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린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제자가
이내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20,7)하고 상기해 주자
베드로는 주저함 없이 하느님 은총의 바다에 뛰어듭니다.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바다로 뛰어든 것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며, 그 뛰어듦을 통해 어제의 베드로는 죽고
오늘의 새로운 베드로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강권하고선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나아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25~33참조)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며, 그 믿음은 바로 하느님은 자비이시다, 는
체험에서 기인하였기에, 이는 바로 그 자비에 온전히 내어 맡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절정의 순간은 제자들의 배신과 배반 그리고 도망침을 묻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와서 아침을 먹어라.” (21,12) 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초대의 순간입니다.
이 말씀 곧 ‘와서 아침을 먹어라, 는 말씀은
자신들의 죄책감과 자기 환멸의 갇힘에서 풀어 주시고 용서하심을 통해,
떠나시기 전날 밤의 사랑과 섬김의 마지막 만찬의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아무도 “누구십니까?” (21,12)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 순간의 은혜로움을 묘사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이 초대에는 우리 역시도 예외가 아니며,
우리 모두 이렇게 부활의 새 아침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을 다시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담대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듯이 무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4,4참조)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이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4,7) 라고
추궁하지만 용감하게 증언합니다.
자신들의 하는 모든 일은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4,10) 하고
당당히 밝힌 그 원동력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연극이나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와 후반부의 다른 색깔과 분위기를 보면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세 번째 발현하신 예수님이 등장하기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름을 느낍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인한 밤과 아침, 어둠과 밝음, 낙담과 기쁨,
텅 빔과 충만을 다양한 색깔로 연출하고 특히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나눈 ‘대화 내용’은
그 상황에 맞는 긴장감과 함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낙담과 실망으로 가득한 삶의 어두운 순간, 돌연 부활의 아침 우리를 찾아오시어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는 당신 위로와 위안의 말씀이 저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저희 또한 당신과 아침을 먹고 새로운 길을 걷겠습니다.
늘 저희와 함께 동행 하여 주십시오. 부활하신 주님! 그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아멘”
자녀를 낳는 게 양식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신 분은 영광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해야 함도
인정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도 눈이 가려 알아볼 수 없습니다.
누구나 예상하는 것만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부모의 얼굴에서 영광을 보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믿는 것은 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연결해서 오늘은 생명을 경시하고 자녀를 낳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은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만날 때도 자녀를 낳을 때입니다.
그제야 부모가 자신을 낳을 때의 바로 그 부모를 알아보게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보다 부모의 영광을 보는 더 완전한 방법은 나도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는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져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어집니다.
유튜브에 “‘동물과 감정 나눠요’… 심리 치유 효과 ‘주목’”이란 짧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학교 아이들에게 동물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게 했더니,
생명 존중감 8%, 인성 8.2%, 자아존중감 13.2% 상승했다는 결론입니다.
사람이 반려동물의 눈을 바라보면 출산과 수유 시 분비되는
어머니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동물을 사랑하며 어머니가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어머니가 보이게 됩니다.
어머니가 보이면 어떻게 될까요? ‘자존감’이 상승합니다.
‘아,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 존귀한 존재라는 느낌, 이것이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다른 생명도 존중할 줄 알게 되고 인성도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엄마를 지독히 미워하는 여자 주인공이
엄마보다 더 심한 사형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그 사형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와 화해하려 합니다.
혼자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죽어가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가 됩니다.
그때 어머니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에 모반이 크게 있다고 어머니는 김희아 씨를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딸을 낳고 어머니를 보았다고 합니다.
딸의 모습에서 자기를 그렇게 바라보며 가슴 아파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가장 완전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수난 하실 수밖에 없으셨고 부활의 영광에 드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자녀를 잘 낳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건 이런 마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부활 체험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창조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에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보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 주셔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생명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에게 보여 주셔야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하기에 당신을 감추십니다.
온라인 미디어 굿 타임스는 중국에서 사고를 당해
뒷다리를 잃은 한 어미 개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는 기차역 근처 거리를 떠돌다가
그만 사고로 뒷다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주민들은 강아지가 기찻길을 돌아다니다가
기차에 치여 뒷다리가 잘려 나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강아지는 뒷다리가 없어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기적과 같은 삶을 보여줬습니다.
살아난 강아지는 새끼들을 건강하게 출산해 어미 개가 되었고,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은 두 다리로 씩씩하게 살아갔습니다.
새끼들이 젖을 떼자 열심히 구걸해서 새끼들을 먹이며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미 개와 강아지들에게 또 한 번의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역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어미 개와 새끼들을 모두 입양하기로 한 것입니다.
강아지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직원은
“어미 개는 엄청난 모성애를 보여 줬다.
음식을 주면 절대 자신이 먼저 먹지 않고 새끼들을 먼저 먹이고 나서 남은 것만 먹었다.”라며
“사람보다 낫다.”라고 전했습니다.
왜 역무원은 그 유기견과 새끼들을 키우려 했을까요?
당연히 어미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해하는 주인을 잘 따를 것도 알았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를 가진 이에게 자비를 보이십니다.
이처럼 자녀를 낳을 줄 아는 사람은 생명에 대해 소중함과 창조의 이유를 볼 수 있기에
창조자 하느님을 알아볼 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처럼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을 하는 베드로를 부르셔서
함께 하느님 자녀를 상징하는 물고기를 드십니다.
자녀를 먹는다는 말이 웃기지만,
물고기 ‘153’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뜻이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선교하시고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는 일이 양식인 사람은 주님을 만납니다.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빛을 봅니다.
생명에 대한 자비를 가진 이들만 모든 생명의 창조자를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첫 명령을 이렇게 내리신 것입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주님 부활 사화의 대부분은 밤에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베드로와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고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던지자 ‘큰 고기가 가득 들어 있었고,
그토록 많은 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문장은 풍요를 표현하는 수식어들,
곧 ‘큰’, ‘가득’, ‘많은’을 연달아 세 개(완벽함을 상징)나 사용함으로써,
예수님 말씀대로 하였을 때 따라오는 결과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요한으로 보이는 제자가 곧바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주님이십니다.”
독서에서는 이렇게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와 요한이,
이제 예수님 말고는 누구도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장엄히 선포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버림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내용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시편 118[117],22; 마태 21,42; 마르 12,10; 루카 20,17; 사도 4,11; 1베드 2,7 참조).
‘버림받음’과 ‘선택됨’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통하여
우리 삶에서 체험하는 극단의 상황들,
배제와 영광, 증오와 사랑, 소외와 축복을 융합시킵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시간’을
‘크고 많은 것을 가득’ 거두어들이는 시간으로 변화시키시는 분,
버려진 것 같은 인생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드시는 분,
나의 모든 것을 준비하고 마련하시는 분,
그분을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체험하여야 할 부활의 참된 은총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