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삶이란 만들기 나름이일 것이다. 나 또한
어느 날 누군가가 막연히 내게 던져준 곳에서
그냥 살다 스스로 더 깊은 마음 숲속을 쫓아 도심 속
자연 속에 들어간 것은 십수 년 전, 내게 주어진 인생을
내 뜻대로 한번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일로 사랑으로 배움으로 믿음으로
가장 밑바닥까지 가본 후 인생이 가르치고자 한 것을
아무런 반기없이 내 스스로 순응해 배워내며 해갈 수
있는가를 직접 부딪쳐보기 위해서였다. 거기엔
매우 뚜렷하고도 분명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내 믿음엔
거짓없이 최선을 다한 삶이란 인과도 없으며
선하고 착하게 주고 배우며 지낸 시간들 속엔 그 일들이
비록 아무도 아직 해본 적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때가되면 반드시 합당한 제자와 결과물이 온다는것을
나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일들은 우주의 진실이었기에,
비록 그것이 죽을만큼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이는 하나로서가 아니라 우주 전반의 원리와 이치로서
절로 때가 되면 순리로 온다는 것을 또 믿었기에,
오랜 시간 (월든)에서 인생을 퍼올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또한 호숫가 숲속 그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가며
스스로 세상에서 흔치않은 것들을 배우고 자신만의
삶을 터득해간 것은 아닐까? 꽤 오래전 내가 존경하던
어느 수도자도 미국(메사츄세츠 주) 콩코드 근교에 있는
(월든 호반)에서 그곳 돌판에 새겨진 소로우의 회고
전문을 보며 그 일부를 책속에 옮긴 것이라고 했었다
인생이란 결국 부단한 자기 탐험과 꾸준한 열중으로
매번 새로움과 과거 한 막, 한 막을 잘 절충하며 그 결실
로서 더 아름다운 내일을 열어가는 일이라시던 그
심오한 글들이, 실로 나를 매료 시켰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정직하게 노력하지 않은 이에게
길은 보이지도 열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또 나는 믿기에
어차피 삶이란 개척과 창조의 명패를 동시에 그의 목에
걸어놓고 있다. 그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며 추구하는
것은 매번 더 크게 눈 떠간 앎에 더 깊고 따뜻한 옷을
입히는 일이다. 잘 보이지않는, 쉽게 보이지 않기에
더 그 가치와 신비가 숨어 살 수있는 실로 가장 깊고
아름답다고 하는 이 사실 역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 다를 수 있고 또한 그 가치와 용도마저도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말 무엇이든 제대로 보고자 한다면 먼저는 그 안을
더 철저하게 직시해야 할것이며 다음으로는 외, 내의
본질과 진실에 파고 들어가 더욱 깊이 치중해야 하리라.
예를 들자면 자연과 어우러진 호수, 그를 주인으로
그 주변을 읽고 그리자면 결국엔 그 호수의 바닥인
뿌리와 정체성부터를 봐야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주변을 품고 키워낸 그의 마음과 육신의 특수성 또한
다각도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함께 오래 살아온 나무와 동 식물이며 그것들에 더해 그곳의 지리적 여건들과 그들이지닌 자연 친화적 품성등을 먼저
알지 못한다면
외부인이나 하나의 삶이 들어와 결코 어떤 것도
쉬 건져낼 수 있거나 만들어내며 살아가지 못할
것임을 나는 알기에, 그래서 또 어떤 곳에서나 먼저
(육하원칙)이란 기본의 시작 스팸이 목에 걸려있고
주어지지 않았을까? 어떤 일에서도 무엇에서도
세상 일 제대로로 먼저 "최소한 알 것을 알고 덤벼라"
란 뜻으로...
거기다 그들의 덫이나 해답은 어디까지나
무한인 속의 핵심인 더 높고 깊은 곳으로 가면 갈수록
더 (간소함과 맑은 그릇)이라는 결국
수도자의 정상이라는 그 높은 함정의 어마 어마한
시험대라는 사실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나마
스스로 알아가는 일일 것이다. 또
어쩌면
이 세상의 가장 고탑에 다다르면 다다룰수록
이 경계의 해답을 이들에 둬야하는 이유 또한
그 오묘한 세계의 마지막 퀘스천 마크에 붙은
아이러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