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4월 6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4,13-21
복 음 : 마르 16,9-15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 있습니다.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입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사람이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류의 지능과 일류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뛰어난 지능이 네 번이나 대통령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그의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이었습니다.
뛰어난 운동 능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자기 통제를 통해
타락의 길로 떨어지는 운동선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재능이 뛰어나도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기질로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훌륭한 재능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저 자신을 통제하는 기질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기질의 변화를 조금씩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유혹이나 충동 그리고 본능에 탐닉하는 순간에 주님을 떠올리며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가 가장 행복한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얻어야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면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게 되면,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자기 기질의 향상을 가져오고, 기질의 변화를 통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성격이나 환경은 또 어떻습니까?
앞서 이야기했던 기질도 형편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으면, 예수님과 함께했을 때 들었던
수난과 죽음 예고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포기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포기하기보다는, 그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족한 제자이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과 함께했을 때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합니다.
스스로 이를 인정한다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부족한 제자들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성공적으로 거둔 것처럼,
우리 역시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인간에게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 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가라는 파견이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파견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이요,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렇다면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믿는 이들의 사명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입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내 안이 주님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명에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믿음은 더 확고해집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오늘 나를 통해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당신,
주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내(忍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忍)은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낼 정도이니 그 아픔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耐)는 수염을 하나씩 뽑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수염을 하나씩 뽑아내니 그 수치스러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조롱과 채찍질을 받았습니다.
가시관을 썼고, 창에 찔리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은 달리는 중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통증을 참아내는 것은 완주 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인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통증일 뿐입니다.
아이는 주사를 무서워합니다. 그 통증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주사의 통증을 알지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야 더 큰 통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통증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독화살을 맞은 팔의 독을 치료할 때 통증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워낙 체력도 강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여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통증과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통증과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고뇌는 사회와 역사를 위한 선택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지고 가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는 사제 ‘인사적체’가 심각했습니다.
저의 선배 사제들은 보좌신부 4년 하면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보좌신부 8년을 하고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8년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직책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보좌신부로 20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구는 ‘협력사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사목을 한 다음에는 특수사목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사적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교구에서 이런 제도를 보완하기 이전에 몇몇 선배 사제들은 기꺼이 자리를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본당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본당신부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보좌신부님들이 본당신부가 될 수 있도록 저 나름대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기꺼이 받아 주셨고,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기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에게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여인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며 은총의 전달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인다.
수난 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이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부활의 신비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기쁘고 복된 신앙인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15)
오늘 복음은 부활 사화의 요약본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16,9~11참조) 나타나셨으며,
그 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16,12~13 참조)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6,11.1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까지 믿지 않은”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습니다.(16,14)
이는 우리 역시도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강론이나 교리 등을 통해
부활을 가르치는 이들의 말을 믿지 못한 우리에게 향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들처럼 우리 역시도 자신이 보는 것과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이며 전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없다는 證左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역시도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야말로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돌을 굴러 낼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성령강림’임을 우리는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짧은 내용 중에 무려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 3번이나 반복됩니다.
믿지 않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실망이 잘 드러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내치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로 교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신뢰하고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사실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마태11,25)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깊은 뜻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남아 있다, (마태17,20참조)고 확신하셨습니다.
훗날 성령을 받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6,15) 하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은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엄중히 경고”(사4,17)를 받지만,
무식하고 평범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4,19~20)하고
고백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이며 부활을 체험한 복음 선포자의 확고한 신앙고백입니까?
본디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사4,13)들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의 놀라운 변화를
유다 지도자들 역시 알아차릴 만큼 변화된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의 담대한 모습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왜냐하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고 투철하게 증언하게 됩니다.
그런 그들의 놀라운 변화를 알고 그들의 엄청난 선포는
듣는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진중한 말과 그 삶의 변화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능력을
그들 또한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사4,16) 하고 고백할 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4,19.20)
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혹 떼려다 혹을 붙이는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쪽팔렸을까 상상하니 고소합니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시118,14)
오늘 우리가 접하는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여러분은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아니면 변할 수 없다는 것 중 어느 쪽입니까?
그리고 만일 변할 수 있다면 그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을 통해서 저는 변할 수 있다고 보며,
그 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극심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
사람이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변화는 가능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참된 자신을 되찾게 해주신 하느님을
자신들의 존재와 삶을 통해 이를 증명해 주신 분들입니다.
부활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사람은 변한다, 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변화할 때,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15참조)
“부활하신 주님,
당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고,
아직 온전히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저희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령을 저희에게 내려 주십시오. 아멘.”
세상으로 파견되는 부활의 증언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르코는 16장으로 전체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16장에서 부활사화를 보도하고 있다.
16장은 크게 다섯 단락으로 구성된다.
사건을 중심으로 볼 때, 단락을 구분하는 일은 비교적 쉽지만,
단락의 내용을 분석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단락의 내용이 상황을 보도하는 형식인지,
아니면 결과를 단순히 설명하는 형식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상황보도의 형식은 결과만을 전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열거하면서 필요하다면 간접화법을 이용한다.
이제 16장 전체를 단락으로 구분하여 보자.
①단락 : 안식일 다음날 새벽녘에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야고보의 마리아)
향하여 천사가 예수부활을 선포한다.(18절) ⇒ 상황보도
②단락 : 일요일 이른 아침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 예수가 발현한 사건이 있었고,
마리아가 이 사실을 전하자, 제3자인 제자들이 부활과 발현 자체를 불신한다.(9-11절) ⇒ 단순설명
③단락 : 부활하신 예수께서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발현한 사건이 있었고(루카 24,13-35 참조),
당사자가 이 소식을 전하자 제3자인 제자들이 불신한다. ⇒ 단순설명
④단락 : 부활 예수께서 열 한 제자들의 식탁 모임에 발현하시어
그들의 완고한 불신을 꾸짖으신 뒤
직접 화법으로 지상사명을 전달하고 필요한 능력을 수여하신다.(14-18절) ⇒ 상황보도
제5단락 : 부활 예수께서 승천하셨고, 제자들은 스승의 명을 따라 활동한다.
부활 예수는 靈的으로 存續하여 제자들의 활동에 함께 하신다.(19-22절) ⇒ 단순설명
오늘 복음은 16장의 ②단락, ③단락, 그리고 ④단락의 발현과 꾸중과
지상 사명 전달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9-15절)
①단락(1-8절)은 우리가 ‘나해’ 부활 성야의 복음으로 듣게 된다.
그런데 성서학자들은 마르코의 원복음이 16장 8절로 끝난다는 데 입을 모은다.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의 부활사실을 선포하고,
이 소식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전할 것을 분부했지만,
“여인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덥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고,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8절)
여기서 마르코 복음이 끝나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 근거로 8절이 그다음에 이어지는 9절 이하의 내용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고 있으며, 9절 이하의 내용이
마르코의 문체와 표현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②단락의 완전한 상황 보도기사가 요한 20,11-18에서 발견되고,
③단락과 ④단락의 완전한 상황 보도기사가 루카 24,13-35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복음의 후기 편집자가
이 부분들의 상황 보도기사를 그대로 베껴오지 않고
단순 설명 기사로 축약하여 첨가하였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후기 편집자가 무엇 때문에 이들을 첨가했을까?
우선 마르코 복음 공동체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신자들은 16장 8절로 끝나는
마르코 복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매김 되는 과정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불신과 부활 체험 與否가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추가 보도의 필요성이 提高된다.
즉 부활 사건을 선포해야 할 여인들이 사명을 수행하지 않자(8절: 원복음의 끝),
직접 체험자인 막달라 마리아(9-11절; 요한 20,11-18)와
엠마오의 두 제자(12-13절; 루카 24,13-35)가 등장하고,
체험자가 예수 부활 사실을 전해주는 데도 불구하고 부활 사건을 체험하지 못한
제3자에 해당하는 열 한 제자들이 믿지 못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마지막으로 부활 예수가 직접 발현하여 제자들의 완고한 불신을 꾸짖는 동시에
그들의 不信을 拂拭시키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제자들을 파견하고자 하는 것이
후기 편집자의 의도인 셈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 부활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오늘 복음만 본다면 그렇다.
그러나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16-22절)을 읽어보면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은
靈的으로 제자들 가운데 존속하시는 예수님에 의해 채워진다.
특히 여인들도 다물었던 입을 열어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자기들의 체험담을 보고했다.(21절)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영적 실존이 효력을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어야 했을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입을 다물어 버린 것으로 끝날 뻔한 마르코 복음에 후기 편집자가
마태오, 루카,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 등에 보도된 발현 사화와 파견 전승을
간략하게나마 덧붙임으로써 복음서 전체의 내용을 만족스럽게 마무리 짓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복음서가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讀者의 결말이 남았고, 아직도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결말도 남아 있다.
당장은 우리의 부활 신앙도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일요일 새벽에 아무도 확실한 부활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며,
제자들조차 빈 무덤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영적 도움으로
자신의 부활 신앙을 채워갔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팔일 축제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토요일 복음은
지금까지 봉독된 내용,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를 묘사한 내용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내용이 소개되는데,
모두 ‘나타나다–믿지 않다’라는 동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그 뒤 시골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지만 다른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몸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마지막 과제를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불신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신뢰가 강조되어 있는 것이고
그분의 이러한 신뢰는 제자들을 담대하게 만들어 이 과제를 수행하게 합니다.
독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 놀라워하였다.”라고 증언합니다.
자신들을 믿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들은 놀라운 담대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어 주심을 알게 되었을 때 나오는
두려움 없는 당당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날마다 미사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가 과연 불신과 완고함에서 온전히 자유로운지 질문하여 봅니다.
부활은 구원이고, 그 구원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감사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완고한 마음에서 풀려날 수 있고,
그 믿음은 우리를 ‘파레시아’(담대함)로 인도합니다.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견고하고 담대한 자유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최 코르디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두 번이나 전해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뵙고는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역시 봐야만 하는 걸까요?
사순시기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뵌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당신을 마주하고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을 증언하는 것에 대한,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도,,, 예수님도 뵌 적이 없는데,,,’
생각하다가
문득 수난받고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얕은 숨을 몰아쉬고 계신 예수님 앞에 서서
가만 마음을 들여다보니
뭔지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올라왔습니다.
조금 더 머물러 바라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왈칵 무서워졌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내 앞에 있는데도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느낌, 혼자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보이는 게 다가 아니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담대하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기쁨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알렐루야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