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 씨는 부산대 철학과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 강제징집되었다.
그는 軍 복무 중이던 1981년 10월25일, 부림사건 관련자로 지목돼 보안대에서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金씨는 출소 후
“결국 교도소가 나를 단련시켜 주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출처: 上同).
비전향 장기수 다룬 소설 발표
출소 후에는 소설가로 변신, 1989년 《살아있는 무덤》(창작과 비평 刊)으로 문학계에 등단했다. 이 책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을 다뤘다.
金 씨는 獄中(옥중)에서 만난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책을 많이 썼다.
그중 《완전한 만남》이란 창작집은 자신의 著書(저서)인 《살아있는 무덤》,
《노역장 이야기》 에 담긴 비전향 장기수 내용만을 따로 묶은 것이다.
이 책은 1990년 1월, ‘제1회 임수경(注: 1989년 불법 訪北. 現 민주당 국회의원) 통일문학상’을 수상(소설 부문)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91년 1월24일字는 《완전한 만남》 관련 기사를 실었다.
신문은 책에 수록된 ‘작가 後記(후기)’를 소개했는데,
金씨는 여기서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그 는 “나도 처음에는 그들(注: 비전향 장기수)을 단순히 ‘뿔 달린 간첩’으로만 알고 경원했었다”며 “그러나 분단 45년의 역사와 시간의 궤를 나란히 하는 장기수들의 삶을 외면하고서는 우리 시대의 어떠한 문제도 떳떳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고집으로 펜을 들었다”고 썼다.
두만강 渡江해 密入北
金 씨는 1996년 8월, 북한에 密入北(밀입북)한 혐의로 당국에 구속되었다.
국내에서는 同年 7월30일 중국 延吉市(연길시)에 있는 한 식당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金씨의 실종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외무부 당국자는 “
金씨가 부산소설가협회 회원 60여 명과 함께 지난 달 26일 중국으로 가 백두산을 등정한 뒤 지난 30일 연길시 소재 북한식당 ‘금강원’에서 동생 완희 씨 등 회사원 2명과 술을 마시다 밖으로 나간 후 행방불명 되었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납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그는 술에 취해 연길에서 택시를 타고 북한 회령 건너편 두만강가에 도착해 헤엄쳐
북한에 잠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그의 身柄(신병)을 중국으로 넘겼고,
金씨는 같은 해 8월17일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
도착 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 도착 소감은?
→ 너무 기쁘고 사무치는 마음으로 달려왔다.
▲ 왜 북한에 갔나?
→ 그냥 북한도 나의 조국이라는 생각을 예전부터 갖고 있었고,
당시 술에 많이 취해 귀신에 홀린 듯이 넘어가게 됐다. 자세한 내용은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뒤 대답하겠다.
▲ 북한에서의 대우는?
→ 처음에는 안기부 직원인 줄 알고 3일 정도는 대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남한 ‘김하기’라는 이름의 소설가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좋은 대접을 받았다.
▲ 북한에서 회유한 게 사실인가?
→ 사실이다. 북한에서 단군왕릉에 관한 글도 쓰고 하면서 지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했다.
▲ 북한의 실상을 본 것이었나?
→ 보름 동안 본 것이 아무것도 없다. 회령에 있는 여관에서 내내 잡혀 있었다.>
(출처: 1996년 8월18일字 <동아일보> 보도)
당시 현지 언론에 따르면, 金 씨는 금강원 2층에서 식사를 하던 중
‘북한 쪽에서 백두산에 오르고 싶다’,
‘내 책이 북한에서 출판됐는데 印稅(인세)를 받아야겠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왔다는 한 여직원이 ‘아래 층으로 내려가면 사람이 기다릴 것’이라고 해
1층에서 택시 운전사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金씨는 자신을 태우고 간 조선족 택시 운전사와 함께 두만강의 얕은 곳을 찾기 위해
10여 군데나 옮겨가며 渡江(도강)을 시도했다.
(1996년 8월17일字 <한겨레신문> 보도 인용).
공안당국은 그의 밀입북 과정을 수사하던 중
과거 獄中(옥중)에서 사상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을 포착했다.
1996년 9월5일,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의 수사 발표에 따르면,
金씨는 부림사건으로 전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1984년 8월 경,
수감 동료였던 南派(남파)간첩 安 모 등 비전향 장기수 3인으로부터
주체사상 등 사상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출처: 1996년 9월6일字 <동아일보> 보도 인용).
안기부는, 安씨 등이 교도관의 감시를 피해 나무판에 안티푸라민을 발라 글씨를 쓴 뒤
곧바로 지우는 방식의 ‘만년글판’을 이용, 金 씨에게 사상교육을 시켰다고 했다.
金씨는 또 교도소에서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 선서를 하는 정식 입당절차를 생략하고,
북쪽을 향해 ‘당과 수령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口頭(구두) 선서를 했다고 한다.
金 씨는 당원부호도 받았지만, 수사 과정에서 ‘당원번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그는 북한에 체류하면서 北 관계자들에게 전국 교도소의 장기수 명단과
교도소 내 思想(사상)투쟁 동향 등을 보고했으며,
‘귀국하면 북한을 위한 소설을 쓰라’는 지시도 받았다는 것이다(출처: 上同).
1997년 9월9일 대법원 형사1부(주심 최종영)는 김영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찬양고무)
혐의로 징역 3년 6월,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는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인 이듬해 3월13일, 사면되었다.
영화 ‘변호인’ 관람하기도
김영 씨는 2014년 1월3일, 부산시 부산진구 소재 롯데시네마 극장에서
부림사건과 노무현 前 대통령을 소재로 만든 영화 ‘변호인’을 관람했다.
이 영화는 盧 前 대통령을 美化(미화)하고, 부림사건을 용공조작 사건으로 왜곡,
검찰, 경찰, 법원 등 법치를 부정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송병곤(現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 김재규(前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설동일(前 민주공원 관장) 씨 등 부림사건 연루자 20여 명을 비롯해
문재인 민주당 의원도 관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