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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7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 : 사도 4,32-35
제2독서 : 1요한 5,1-6
복 음 :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믿음의 크기를 강조하지요.
그런데 ‘나’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더 믿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늘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클까요? 아니면 자녀의 사랑이 더 클까요?
부모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자녀를 키워 본 부모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랑을 계속 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의문만 있었지요.
자기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제가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문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토마스 사도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말씀하셨기에
전혀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선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자신 있게 자기 삶을 살아가며,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받음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자비 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줍니다.
곧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라고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할 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 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하는 일, 곧 ‘자비를 베푸는 일’이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 주며, 짊어져 주고, 덮어주고, 기도해 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 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고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 주고 걸머져 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 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 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 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외아들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목숨을 내놓으셨으며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 사건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훗날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이 자비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 자신이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것처럼,
측량할 수도 없고 다 써버릴 수도 없을 만큼 한없이 많고 큽니다.”(성녀 파우스티나).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지 않고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잘못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수난의 흔적을 보여주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토마스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찌 되었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 되어
실망하고 좌절하여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화가 있다면 그 기쁨이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한 평화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보면,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3,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평화’는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징벌’ 덕에
악행과 죄를 용서받고 치유 받은 사람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누리는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지만,
믿음으로 굳건한 이들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풀려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의 위로와 기쁨을, 성령을 통하여 주셨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2-23).
성령을 통하여, 이제는 하느님과 예수님께만 유보되었던 사죄의 권리를
제자들이 행사하게 되었고 그 후계자들과 협력자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용서를 받고,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너무 답답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하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 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용서받아야 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하고
우리의 한계를 주님께 의탁하면서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파블로 네루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모호하지만 명확하다.
자연은 덧없지만 풍성하다.
우주는 무한하지만 무관심하다.”
인생에서 명확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터널과 같습니다.
암흑과 같은 터널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서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은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겁의 시간 속에 자연은 이렇게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속에 ‘개념’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이 무한한 우주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게 되고,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우주를 있게 한 절대자를 떠올립니다.
신앙인은 그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이외에 우주라는 커다란 화폭 위에 별들을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웃을 잘못 만나서,
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라, 지금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 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토마의 불신앙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간 첫날, 새로운 창조의 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유대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과 마음을 닫아걸었다.
예수께서는 문이 잠긴 상태에서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셨다.
주님의 육체는 그들과 함께 사셨던 그 육체이다.
그러나 자기들 눈에 보이는 육체에 확신하지 못하므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잠긴 방으로 들어오신 몸을 만지도록 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여기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에는 영혼은 언제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19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시어 파견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려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권한을 주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관계 회복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완전한 것만 좋아하는지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지 않는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죽음은 알고 있었지만,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본 것이 환상에 불과한 일이 되지 않도록
“직접 보고” 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한다.
토마스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분의 육체와 거기에 난 상처를 전부 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분을 만나기를 고대한 것이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도 있었다.
여기서 여드렛날은 교회에서 거룩하게 모이는 날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보아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토마스는 결국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한다.
그는 그분의 육신을 만지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의 모습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다.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토마스가 스승의 육체에 난 상처를 만진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의 불신은 다른 제자들의 믿음보다 우리의 믿음을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의심 없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자기 마음과 모든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그 상처를 그대로 두신 것은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물은
부활이 예수님께 새 생명과 권능을 충만케 해 주어
새로운 현존형태와 활동 방법을 부여하였다.
이같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같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습의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은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또한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
자기의 재산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모든 형제와 친교를 이루고, 새로운 생명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한다.
이것은 의미가 깊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같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과 피로 세상에 오신"(1요한 5,6)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세례성사(물)와 성체성사(피)를 암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부활 할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과 결실로서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되어 친교를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이라는 선물이 진정한 사랑의 나눔으로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당신의 신부인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며,
구체적인 삶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토마스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주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주간 첫날이면, 오늘의 主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비밀리에 集會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하신 이별의 식사를 기념하여,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오늘의 발현은 그 집회 중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이 알리는 바에 의하면, 그 발현 때,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같은 장소에 모였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여드레는 一週日입니다.
이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집회에서 있었습니다.
토마스의 고백,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고백입니다.
그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언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발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話法에서 나온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다시 한번 더 말하여 강조하는 유대인의 화법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살아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구약성서 창세기(2,7)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모상에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자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숨결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생명을 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보여주신 진리,
곧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잘살아 보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베드로 제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자비로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새로운 생명,
곧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후 100년경,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이미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베드로의 편지」는
「요한복음서」보다 40년가량 먼저 기록되었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 신앙인들의 실태를 반영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시대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존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자기 생존의 의미와 과제를 읽어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 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용서하는 분이면, 그 생명을 사는 자녀들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正體性이, 바로 그 사랑과 용서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요한복음서」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느님의 자녀 됨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强者 앞에 약하고, 弱子 앞에 강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산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密林에 사는 동물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모르는 弱肉强食의 처세법입니다.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어린이에게는 성숙한 인간의 자유가 없습니다.
어린이는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 성숙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성장하여서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를 未熟하다고 말합니다.
성숙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미숙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利害關係를 넘어 사랑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미숙함을 넘어서, 스스로를 베풀며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유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하신 실천에서 성숙한 인간이 지녀야 하는 참다운 자유를 보고 배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모순된 일들이 많습니다.
善意의 사람이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불행하게 태어나서 불행하게 살다가는 생명들도 많습니다.
정직하게 노력한 사람이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런 모순들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 자녀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자유는 사랑과 용서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 질서를 실천하며 산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유와 질서를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사랑과 용서는 인류 안에 늘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었던 인류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 안에 하느님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도 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여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비는 이유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2주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여드레 뒤에 일어난 일을 전함으로써
팔일 축제의 끝을 알립니다.
매우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기에, 짧게 요약하여 보겠습니다.
첫째는, ‘평화’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샬롬 알레이켐’은 유다인들의 일상적 인사이지만,
특별히 이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라는 표현과 함께
세 번(완전함을 상징) 되풀이됨으로써,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에만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둘째는,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며 …… ‘성령을 받아라.’”라고 하십니다.
평화(‘샬롬’)는 세상의 창조 때,
죄로 손상되기 이전 완전하고 충만하였던 상태를 말하며,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줍니다.
셋째는, ‘상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상처였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필수적으로 연결된 현실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기를 요구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
그러한 토마스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넷째는, ‘1인칭적 고백’입니다.
예수님과 토마스의 대화에는 1인칭(나, 내)과 2인칭(너, 네) 대명사가 되풀이되는데,
부활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토마스처럼
1인칭적 체험으로 고백 되는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자비’입니다.
1인칭적 고백은 주변에 ‘사랑’과 ‘자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통하여 증명됩니다.
Sr. 김찬미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예수님의 말씀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새 생명을 맞이한 부모입니다.
아이가 뭘 보여주고
증명하고 드러내서가 아니라
기냥 존재 자체로 믿어 주고
기다리고 사랑합니다.
보고서야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아도 믿고 희망할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