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즈(Foreign Affairs)가 최근 ‘글로벌 영국의 망상(The Delusions of Global Britain)’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영국이 지난달 16일 ‘경쟁의 시대, 글로벌 영국’이라는 외교·안보 전략보고서를 발표하자 ‘현타(현실자각타임)’을 가지라고 충고한 내용입니다. 잡지는 EU(유럽연합)라는 송장에서 해방된 영국이 이제 홀가분하게 ‘글로별 영국’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찾아나섰다고 하면서 영국이 좀 더 겸손함을 갖고 다음 장(chapter)에 접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글의 요지는 영국이 ‘미들파워(middle power)’로서의 역할을 자각하고 그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영국은 절대 이 충고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듯 합니다. 정계 지도자는 물론이고 재계나 사회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다수의 일반 국민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과 축하행사가 지난 2일부터 4일간 영국 전역에서 지속됐으며, 여왕의 거처인 버킹엄궁 주변에서 트라팔가 광장까지의 거리엔 150여만 명이 몰렸다.
# 마틴 울프와 니얼 퍼거슨
파이낸셜타임스의 경제 부문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75)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2017년 유럽 특파원으로 일할 때입니다. 울프는 ‘진정한 세계 최고의 금융·경제 평론가(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저널리스트(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만 41세가 되던 1987년 파이낸셜타임스에 입사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지요.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건 울프가 자신이 글로벌한 안목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할 때였습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이 영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특히 런던에서 태어난 것이 그를 ‘국제적’으로 만든 결정적 배경이었다고 한 것입니다.
울프는 유태계 오스트리아 극작가 아버지와 유태계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 영향 덕에 지적인 자극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영어 사용, 세계 최강 제국의 역사, 무역 강국의 전통, 국가 경제 규모가 작아 다른 세계 나라와 연계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 등은 영국을 자연스럽게 국제적으로 만든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런던만큼 세계를 봐야하고, 세계와 연결돼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57)은 자신이 영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성장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영제국 덕분에 퍼거슨은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친척들을 갖게 되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온통 식민지 아프리카에 관한 것으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그의 할아버지 존은 20대 초에 에콰도르에서 인디언들에게 철물과 밀주를 팔았다고 합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영국 공군 장교로 인도와 버마에서 일본인들과 싸우며 3년 이상을 보냈다고 합니다. 작은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보낸 편지는 전쟁 당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것으로 뛰어난 관찰력과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퍼거슨의 아버지는 의대를 마치고 가족들을 데리고 케냐 나이로비에 가서 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그 덕에 퍼거슨은 케냐와 관련된 많은 추억과 기억, 인상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목각으로 된 하마와 흑멧돼지, 코끼리, 사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한때 그의 가장 소중한 재산 목록이었다고 합니다.
# 제국의 푸딩
조지 오웰이 말했습니다. 제국 없는 영국은 “우리 모두가 아주 힘들게 일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식으로 살아야 하는 춥고 하찮은 작은 섬”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 영국인에게 전 세계 무대는 없어서는 안될 공기와 식량 같은 존재입니다.
20세기 초에 국왕의 요리사가 직접 정성들여 고안한 ‘제국 크리스마스 푸딩’ 조리법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니얼 퍼거슨의 책 ‘제국’에 나온 걸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씨 없는 건포도(sultanas) 500 그램 (오스트레일리아산)
씨 없는 작은 건포도 (currants) 500 그램 (오스트레일리아산)
씨를 뺀 건포도 (stoned raisins) 500 그램 (남아프리카산)
다진 사과 170 그램 (캐나다산)
빵가루 500 그램 (영국산)
소고기 기름 500 그램 (뉴질랜드산)
설탕에 절인 과일 껍질 170 그램 (남아프리카산)
밀가루 230 그램 (영국산)
달걀 4개 (아일랜드 자유국산)
계피가루 2분의 1 (실론산)
정향가루 2분의 1 (잔지바르산)
육두구 가루 2분의 1 (해협 식민지산)
푸딩 향료 소량 (인도산)
브랜디 1 큰술 (키프로스산)
럼주 2 큰술 (자메이카산)
오래된 맥주 0.5 리터 (잉글랜드산)
퍼거슨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맛있는 조리물의 구성은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제국이 있어야 크리스마스 푸딩이 있을 수 있다. 제국이 없으면 빵가루와 밀가루, 그리고 오래된 맥주만 있을 것이다.”
피시 앤 칩스
영국에 관해 얘기하다보면 많은 분들이 “영국엔 도대체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나”라고 묻습니다. 저도 그분들도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피시 앤 칩스(fish & chips).” 여기서 칩스는 수퍼에서 파는 감자칩 고구마칩 같은게 아니고, 햄버거에 같이 나오는 감자튀김입니다.
영국에 정착한 지 수십년 된 교포 몇 분께 불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엔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없지요?” 그랬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런던에 가면 얼마나 맛있는 음식들이 많은데…” 그 말엔 동감입니다. 런던 시내 또는 ‘하이스트리트’라고 하는 번화가에 가면 정말 많은 음식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도 음식, 중국 음식, 일본 음식, 동남아 음식, 이탈리아 음식 등 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피시 앤 칩스’ 말고 영국 음식 중 정말 맛있게 먹을만 한게 뭐가 있냐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치킨만 해도 그렇습니다. 영국에 ‘난도스’라는 치킨 전문 체인점이 있는데요. 저와 제 가족 입맛에도 그저 그런대로 먹을만 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치킨에는 상대가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치킨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절대 꿀리지 않을거라 자신합니다. 그래서 저와 제 아내가 런던에 한국식 치킨집을 해보자고 심각하게 논의한 적도 있습니다.
# 망상 또는 글로벌
영국이 포린어페어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달리 앞으로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국제적 이슈에 나설 것이라는 점은 100% 확실합니다. 문제는 이런 포부가 영국의 밝은 미래를 활짝 여는 ‘전략적 비전’으로 드러날 것인가, 아니면 헛된 망상에 불과할 것인가일텐데요. 누가 그걸 알 수 있겠습니까만, 영국의 꿈이 비관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객관적 상황을 보면, 영국의 국토는 24만2495 ㎦로 세계 78위이고, 인구는 6790만명으로 21위 입니다. 하지만 국민총생산(GDP)은 미국과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5위이고, 1인당 GDP는 20위 입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고, 핵탄두를 215개나 보유한 군사 강국입니다. 최근엔 퀸엘리자베스함 프린스오브웨일즈함 등 2척의 항공모함을 새로 보유하게 됐습니다.
이 정도의 역량을 가진 국가가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그 국민의 의지이고, 그것을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여부일겁니다. 여기서 저는 인구라는 요소를 꼭 눈여겨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소호 거리에 인파가 붐비고 있다.
최근 구글 검색을 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유럽 주요국 소개를 보다가 영국 인구가 프랑스를 추월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인구는 작년 기준 6789만명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올해 3월 기준 6740만명입니다. 유럽 내 인구 톱은 여전히 독일입니다. 2020년 기준 8317만명입니다. 그동안 인구 기준 유럽 국가 순위는 언제나 독일-프랑스-영국 순이었습니다.
영국의 인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입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영국 인구는 오는 2043년 7240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인구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으로 전망되며, 어쩌면 영국이 독일도 추월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독일은 거의 인구가 늘지 않고 있으며, 어느 순간 급감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2015년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는 2080년 영국이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에 등극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현재 5182만명인데 오는 2029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2043년엔 5000만명에 턱걸이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이란 책에서 중국이 미국 패권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지만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그 이유를 ‘셰일 오일·가스’와 함께 ‘인구 요인’을 거론했습니다. 중국은 늙어가고 있고 인구도 줄지만 미국은 상대적으로 젊고 어린 인구가 튼튼하게 받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국이 패권을 놓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 논리로 보면, 영국은 향후 유럽 내에서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감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전 세계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글로벌을 향한 영국의 꿈은 망상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지요.
출처 : 조선일보, 2021.04.06.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6] 글로벌, 망상 또는 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