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의 2차 나선정벌(1658년 효종 9년) 역주 북정일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해설 박태근 "신유 장군의 북정일기와 전사한 Stepanov 부하의 보고서를 비교하면 전황서술이 완전히 일치한다. 패잔명 Petrilovsky는 말하기를 '6월 30일(러시아력), 러시아 함대는 흑룡강 어귀에서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47척의 청국선단과 조우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대장 Stepanov와 까자끄 270명이 전사하고 황제에게 바칠 국고소유의 담비가죽 3,080장, 대포 6문, 화약, 탄환, 군기,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을 실은 배 1척이 95명을 태우고 탈출하였다'라고 햇다. 후략..." "다음 1658년 전투에서 조선군의 공헌도를 측정, 시산해 본다. 한청연합군의 병력총수는 약 2,000명, 조선군은 200명이다. 따라서 조선군의 총병력대비는 1/10 즉 10%이다. 그러나 1658년 전투의 향배를 결정한 것은 화력이므로 화력을 볼 것 같으면 청군은 209명, 조선군은 200명, 조선군의 총화력대비는 50% 즉 동수비율이다. 조선군의 명중정도는 청군보다 훨씬 우수하여 26% 즉 4발 1중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수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군은 탁월한 화력을 발휘하여 전력상 매우 힘겨운 대러시아 전투에서 승전의 주력이 된 것을 역력히 알 수 있다."
<사람 수로 보면 500: 2000이니 1:4의 비율이라서 당연히 이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그 이전의 전투에서는 1651년의 무력분쟁에서 무모한 생포작전을 쓴 청이 1500:206이라는 압도적인 비율에도 불구하고 676:10의 사상자 비율로 참패하였습니다. 아래는 국역 북정일기에서 조선군의 명중률을 나타내는 기사와 전투상황에 대한 기사를 뽑은 것입니다>
4월 나는 출정명령을 받고 도내의 포수 중에서 길주 35명, 명천 16명, 경성 22명, 부령 13명, 회령 26명, 종성 25명, 경원 23명, 온성 30명, 경흥 10명 등 모두 2백명을 가려 뽑고, 그 밖에 화병 20명, 초관 2명 신성일, 박세웅, 군관 2명 박대영, 유응천, 통사 2명 김명길 엄애남, 그리고 수솔 38명, 짐실을 쇄마의 마부 39명 등으로 부대편성을 마치고 출동을 대기하고 있었다.
4월 초6일 맑다. 회령부로 가서 출병군사들을 검열한 다음 조총시방을 한 결과 총 51명이 적중하였다.
5월 17일 맑다. 아침에 대장이 소 두 마리를 보내와서 이를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또 대통관 등이 찾아와 조총시방을 요청했다. 이날 과녘을 맞힌 자가 40명이었다.
18일 맑다. 계속 송가라강구에 머물렀다. 대장의 요청으로 포수들은 각 1발씩 조총시방을 했다. 65명이 적중하였으므로 한바탕 잘 먹였다.
20일 맑다. 송가라강구에 머물다. 전략... 한편 북경 포수의 출동에 관해서는 처음에 전혀 들은 바 없었으나 수일 전에 이 소식을 듣고 통관 이기영에게 그 수효를 물었더니, 이번 전투에 참전할 청국의 북경 및 영고탑 포수는 모두 수백명에 달한다고 했다. 그저께 아군이 조총시방을 했을 때 영고탑 포수 1백여명도 같이 시방을 했는데, 반 이상이나 포술에 생소하여 과녘을 맞추는 자는 약간 있을 정도였다. 만약 저들 청군이 포재마저 겸했더라면 이른바 '호랑이 날개돋친 격'으로 막강했을 것이다. 청군의 총포는 우리나라 조총과도 다르고 또 일본식도 아니어서 어느 나라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병부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
21일 맑다. 송가라강구에 머물다. 통관들이 와서 조총시방을 요청하므로 길이 한 발 남짓에 넓이 3치 정도의 팻말을 60보 밖에다 세우고 포수 한 사람이 3발씩 쐈다. 좌초의 포수 중에서 적중시킨 자는 총 67명이며, 그 중 세 번 맞힌 자는 3명, 두 번 맞힌 자는 8명이었다. 우초에서는 총 56명이 맞혔는데, 세 번 맞힌 자는 2명, 두 번 맞힌 자는 13명이었다. 경원포수 박사길이 사격 때 조총이 파열하여 왼팔에 중상을 입었으나 폐인을 면하고 옆에 사람들도 모두 무사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후략.
6월 초 4일 맑다. 송가라강구에 머물다. 각 고산에게 25명씩 분산 배속된 조선 포수들은 한 배에 5명씩 탑승했으며, 한편 중국포수도 역시 5명씩, 중국 갑군은 25명씩 승선했다. 좌초관 박세웅과 대통관 김대헌은 한배에 탑승하여 선봉을 맡고, 우초관 신성일과 대통관 이몽선은 같은 배를 타고 후영이 되고, 차장 1명은 선봉, 또 한 차장은 중군이 되었으며, 내가 탄 배와 대장선은 후영에 자리잡았다. 이날 저녁 때 차례대로 승선했다.
초10일 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다. 아침 일찍 열벌 마을을 출범하여 흑룡강구를 지나 20여리를 내려 갔을 때 드디어 적의 선단과 맞부딪쳤다. 적선 11척이 흑룡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아군은 즉각 적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선들은 곧 돛대를 세우고 10여리를 후퇴하여 강가에 배를 모아 포진한 후 적병들은 판옥 위에 올라서서 아군의 동정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전선이 번갈아 들락거리면서 적선과의 거리가 한 마장쯤이나 접근하였을 때 일제히 대포를 쏘며 공격을 개시하자 적선들도 대포로 응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다. 이 때 후영, 전위, 중군의 모든 전선이 일시에 쳐들어가 활과 총포를 무수히 쏘았다. 적병들이 숨돌릴 겨를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듯 떨어지니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 없어서 모두 배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혹은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우리 전선들이 적선을 포위하고 쇠갈고랑이를 던져 끌어당긴 뒤 포수들이 적선에 올라가 불을 질러 태우려고 한즉, 대장은 불태우지 말라고 긴급명령을 내렸다. 한편 포수와 사수들이 강가의 풀숲 속에 잠복한 적병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하자 적병 역시 치열하게 응전하여 이 때문에 조선 군사와 청국군사는 약간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만약 여세를 몰아 일시에 적선들을 불태웠더라면 적병 중에 살아 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 또한 손실이 없었을 터인데, 대장이 탐재지심으로 불태우지 말라며 무모한 명령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처사였다. 적선에 올라탔던 포수와 사수들이 다시 원선으로 돌아와 계속 포위하고 있을 때 피아간의 거리는 불과 일 보 정도로 근접하였으며, 이 때 배속에 은신한 적병들이 연속사격을 가해와 우리는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사망자는 길주의 윤계인, 김대충,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 유복, 온성의 이응생 등 7명으로 총맞아 즉사했고, 그밖에 청나라 갑군들과 사공들도 사상자가 속출했다. 형세가 이렇듯 다급해지자 급히 화전을 쏘니 적선 7척이 잇달아 불탔다. 이미 나리 어두웠는지라 배 3척으로 하여금 닻을 내려 적선을 감시하게 하고 나머지 배들은 대안에 집결하여 밤을 새웠다. 처음 우리 군사가 앞을 다투어 적선으로 쳐들어 갈 때 명천 포수들이 탑승한 배의 포수와 사수들이 모두 배를 비우고 적선으로 옮겨 타자, 이미 상륙한 적병 40여명이 이 배를 빼앗아 강가를 따라 상류로 끌고 올라갔다. 후영에 있던 여러 배가 일시에 추격하는데 내가 탄 배가 제일 앞장을 서서 돌진했다. 여러 전선이 물고기 꿰듯 줄줄이 늘어서서 포위하니 뱃주릉 끌고 가던 적병들은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 때 갑군들이 배에 올라 적병 40여명을 죽여버렸다. 적의 선단은 모두 11척으로 그 중 7척이 불타고 4척만이 남았는데, 이것은 대장이 적선에 실은 재물을 탐내 화공을 허술히 한데다가 날도 저물어 더 공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략
13일 흐리다. 전소를 떠나 흑룡강구로 돌아와 유숙하다. 청국인들이 저들 군인과 수부의 사망자수를 분명히 말은 안하지만 대략 60-70명 가량 되는 모양이다. 심양 고산이 1명, 영고탑 보십고 1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보십고란 우리나라로 말하면 초관격 벼슬이다. 전에 청국은 이들 적군과 세번 크게 접전하였다는데 한 번은 1백여명이 총맞아 죽었고, 한번은 4백명이 쓰러졌으며, 또 한번은 여러 고산 중에서 4-5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밖에 작년에도 3명이 죽고 중상자가 부지기수였었다고 한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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