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지은이: 구미례 출판사: 교보문고 책머리에 문화는 의미부여의 연속이다. 우리들 주위에는 유형·무형의 수많은 대상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다. 그 하나하나의 대상물에는 우리들의 선조, 우리 민족이 살아오면서 불어넣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하나의 동물이 범종의 머리 위에 얹어지기까지, 특정한 숫자에 대한 관념이 생활습관의 하나로 굳어지기까지..... 그 뒤에는 수백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철학, 정서와 심성이 꽃피워 낸 신비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겉모습과 관념에만 집착할 뿐, 본질을 캐내려 하거나 의미 탐구에 몰두하지 않는다. 피상적으로 우리 주위를 스쳐가는 수많은 유형·무형의 인연 종자들. 그것을 무심히 스쳐갈 때 우리는 영원히 그것과 만날 수 없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의 참모습과 의미를 알기 위해 서는 먼저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본질을 규명하는 물음표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삶과 우리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상징세계. 특별히 전공한 사람이 없는 이 미개척 분야를 필자는 공부하는 자세로 자료를 뒤지고 나름대로 의문을 던져 가며 그들을 엮었다. 이 미숙한 글을 위해 나름대로 진통을 겪으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관심은 애정과 더 큰 관심을 낳는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우리 문화가 지닌 유형·무형의 무수한 대상물에 내재된 상징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반드시 전 공분야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그 세계는 우리나라 사람, 아니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껏 그 속에서 헤엄치고 발견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는 열린 세계인 것이다. 필자는 감히 기대해 본다. 우리 문화는 우리 민족의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화 속에는 우리 민족 나름대로의 상징성을 간 직하고 있다. 아직은 미숙한 이 조그마한 책이 우리 민족의 얼과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 로 작용하고, 스스로 우리의 것에 내재된 의미와 상징성을 찾아 "왜?'라는 의문을 던져 보는 적극 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데 조그마한 디딤돌이나마 되었으며 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이끌어 주시고 도움을 주신 우리문화연구원의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 드리며, 부족한 글을 책으로 엮어 주신 교보문고 출판부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992년 5월 구 미 래 책머리에 제1장 수 1. 수와 상징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의식 중에 어떤 수를 선택하거나 일부러 피하기도 하는 특정한 수 관념 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수에 대한 관념이 관습적으로 정착되어, 특정 한 숫자나 횟수가 각종 의례와 민속 등에서 그 중요한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주변에 산재한 수와 관련된 갖가지 관습, 행사, 습관 들. 꼭 그와 같은 숫자를 써야 할 필연성 을 띤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왜 그러한 횟수와 날짜, 수 등을 사용하는 것일까? 무심히 밟고 올 라가는 사찰의 계단 수, 반복으로 익숙해져 제사 때마다 습관처럼 행하는 절의 수에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으며, 때로는 숫자 하나에 고도의 상징서이 내포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은 수와 관련된 독특한 문화양상을 가지고 있고, 그 문화권에 따라 여러 가지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이 의미를 부여하고 사용했던 수에서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3'에 관한 특별한 수 관념이다. '3'이라는 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길수로 삼고 있지 만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뚜렷한 수 관념을 형성하여 사상계에서부터 민간 풍속에 이르기 까지 수 중의 수, 최상의 수로 여겨오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음양사상에서 기인한 양수와 음수의 분별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수를 판별 할 때 그 기본을 이룬 개념은 음양의 이치였다. 이 이치에 따라 각 경우에 적합한 양수 혹은 음 수를 선택하였으며, 길수나 흉수의 개념도 음양의 조화 여부로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셋째는 민속분야, 그 중에서도 특히 출산풍속이나 세시풍속에서는 이러한 상징적인 수가 하나 의 중요한 관습으로 정착되어 우리 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민속이야말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길흉을 나타내고 화복을 예 견하는 수가 서민들의 소박한 마음 속에 그대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의 여러 학자들은 멀리 전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부터 숫자에 관한 의미를 추적, 연구 하여 왔으나 대부분이 특정한 몇몇 수에 국한되고 있으며, 숫자 하나하나에 관한 의미는 성명학 에서 다룬 수리 풀이에서만 간략히 개관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명학과 같은 특수 분야의 수 관념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에 부합되거나 실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측면에서 그 숫자들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단군신화에 나타난 수 관념 단국신화에 표현되고 있는 수 관념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수의 기본개념이 이미 그 시대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3, 3.7, 20, 100 등 사상과 종교, 철학의 기본 이치에서부터 우리의 민속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에 이르 기까지, 멀리 4,3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과 닿아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내용을 단군 탄생까지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천왕인 환인은 삼위태백을 내려다보고 아들 환웅이 인간세상에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을 펴게 할 것을 결정하 였으며, 천부인 세 개의 무리 3천을 주어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펴게 하였다. 환 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 명, 병, 형, 선, 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렸 다. 어느날 곰과 범이 찾아와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간청하자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며 "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굴 속에서 햇볕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하였다. 이에 곰과 범은 이것을 먹고 금기하여 곰은 삼칠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중도에 이 를 어겨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웅녀는 단수아래에서 잉태 하기를 매일 빌었는데 환웅 이 잠깐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 아들인 단군을 낳게 되었다. 이처럼 단군신화에는 3이라는 숫자가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이라는 수는 오랜 옛날 부터 신성수로서 취급되었으며, 유달리 3을 좋아한 우리 민족의 수 관념은 단군신화에서부터 시 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인이 인간세상인 3위태백을 내려다보았고 천부인 세 개를 가 지고 다스리게 한 것이나, 환웅이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인간의 360여 사를 맡은 일, 곰이 삼칠(3.7)일 만이 사람으로 화한 것 등이 곧 그것이다. 태백은 산 이름이지만 3위에 관해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확실한 정설이 없다. 다만 '3위'가 천, 지, 인을 통합하는 제단을 일컫는 말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3위태백은 제정 을 할 수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천부인 세 개란 하늘에서 천자임을 인정하는 도장 세 개, 혹은 천자가 기록한 책자 세 권 등으 로 해석되고 있다. '환웅이 거느리고 온 3천 명의 무리'에서 3천이란 많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 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관용어처럼 되어 있다. 3천만 민족, 3천리 금수강산, 3천 궁녀, 3천 세계 등 꼭 숫자가 3천이라는 뜻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 나타난 3이라는 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이 환인, 환웅, 단군 등 3신 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셋이면서 실은 하나라는 삼일신적인 존재, 삼위일체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삼위일체적인 면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아버지인 환인은 아들인 환웅에게 초월자의 의지를 담아 지상에 내려보내는데 아들인 환웅은 여전히 신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환웅은 인간으로 변한 곰과 혼인, 사람인 단군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교학자 이은봉은, 이러한 삼위일체적 사상은 단군신화나 그 밖의 후대 문헌에 비 추어 보아 우연적으로 수입되어 삽입된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이 지닌 필연성과 연결된 한국인 의 종교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삼위일체적 표현은 초월신을 나타내기 위한 인간 지성의 내적 구조와 긴밀히 관계되는 것으로, 물질계를 널리 초월하고 있는 천신의 역할과 의미 를 설명하고자 할 때는 이러한 삼일신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초월적 세계를 보존하고 연속시켜 이 지상에 그것을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아버지 가 있어야 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초월성을 운반하는 동반자로서의 아들이 있어야 하며, 그것 을 완성시키는 지상세계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환인, 환웅,단군이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삼일신적 사상은 이들 3신을 각각 독립된 개체처럼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다만 그 임무만이 달라서 환인은 조화의 주 요, 환웅은 교화의 주며 단군은 치화의 주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단군신화에서 표현되고 있는 최고신이 삼일신적인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에서 이 신의 초월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우리나라 최고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최고 신이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가볍게 보아 넘기기 어려운 것으로, 한국인의 신앙 대상이 매우 확고한 곳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다음으로 단군신화에서 나타내고 있는 수 관념 중 흥미로운 것은 삼칠(3.7)일의 개념이다. 삼칠 일은 이레를 세번 지낸다는 것으로, 즉 21일을 뜻한다. 흔히 7이라는 수는 '럭키 세븐(LUCKY SEVEN)'이라 하여 서구인들의 전용품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우리 민족도 7이라는 수를 좋아하였 다. 환웅이 곰과 범에게 100일기를 명하였으나 삼칠일인 21일만에 곰이 인간으로 변신하게 되었 으니 삼칠일은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7일을 단위로 하여 세 번 겹치는 삼칠일은 오늘날까지 민속에 있어 금기하는 기간으 로 되어 있다. 특히 출산풍속에서 중요시하여 아기를 낳으면 초 이렛날, 두 이렛날, 세 이렛날에 는 밥과 국을 마련하여 삼신할머니에게 올리게 된다. 또한 삼칠일 동안 출산을 표시하고 액을 막 기 위하여 금줄을 쳐 두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부정한 사람, 상일 당한 사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등의 출입을 막아 부정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신화에서도 곰이 100일이 채 못된 삼칠일 만에 능히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삼칠일이 부정을 쫓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주 술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삼칠일이 신성을 요하는 기간의 단위로 단군 이 래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온 것이다. 민족학자 임동원은 환웅이 곰과 범에게 준 쑥 한 줌과 마늘 20개에 관하여 독특한 접근을 하고 있다. 쑥 한 줌에서의 '일'은 '한'으로, '한'이란 말에는 '하나, 많다, 크다, 높다, 거대하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환웅이 준 쑥 한 줌이 결코 많은 중에서 한 줌만을 취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짐승이 먹어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영초로서의 효능을 발휘하기에 충분한 양의 한 줌이란 뜻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마늘 20개'의 20이란 숫자에 의문을 던졌다. 10이란 수도 있고, 많다는 뜻에서 100 개 또는 천 개를 먹으라고 할 수도 있는데 구태여 20개라고 한 데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원시사회의 수 개념 발달과정에서 손가락, 발가락을 합한 수 20이 바로 사람 한 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됨을 상기시켰다. 따라서 마늘을 20개 먹으라고 이른 것은 한 사람 몫인 일인분을 먹으라는 뜻으로 재미있는 해석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곰과 범에게 100일 동안 햇볕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에서는 오늘날과 일맥 상 통하는 고대인의 신앙의식을 엿볼 수 있다. 100은 많은 날을 뜻한다. 백의 고어는 '온'이고, 온은 모든 것 또는 전부를 뜻한다. 100일 동안 햇볕을 보지 말고 은거기도하라는 시련과 금기를 요구 한 것은, 신의를 얻을 많큼 오랫동안 충분한 수련 근신을 하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현재에도 무속 의 100일 치성 또는 사찰에서의 100일 기도 등이 행하여지고 있는데, 그 연원은 환웅의 지시에 따른 곰과 호랑이의 백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지극한 정성으로 100일 간을 기도하면 신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 신할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될 수 있다는 고대인의 믿음이 잘 나타나 있다. 3. 숫자‘3’ 우리나라 사람에게 '3'은 특별한 숫자이다. 오랜 옛날부터 3은 길수 또는 신성수라 하여 최상의 수로 여겨져 왔다. 그러면 왜 3을 최상의 수, 수 중의 수로 여기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살펴보기로 하자. 3이란 숫 자가 지닌 깊은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숫자 1과 2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은 하나의 수량을 말하지만 동시에 사물의 전체와 태극을 나타내고 있는 수이다. 음양의 이 치에서 보면 1은 아무 수와도 섞이지 않은 순양의 수이다. 또한 최초의 수이므로 1에서부터 모든 사물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2'는 하나가 아닌 최초의 단위이자 최초의 음수이며 순음의 수이다. 또한 음과 양, 하늘과 땅, 남과 여 등과 같이 둘이 짝하여 하나가 된다는 대립과 화합의 의미를 담고 있다. '3'은 양수의 시작인 순양 1과 음수의 시작인 순음 2가 최초로 결합하여 생겨난 변화수이다. 즉 음양의 조화가 비로소 완벽하게 이루어진 수가 3이다. 따라서 3은 음양의 대립에 하나를 더 보탬 으로써 완성, 안정, 조화,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짝수인 2처럼 둘로 갈라지지 않고 원수인 1의 신성함을 파괴하지 않는 채 변화하여 '완성'이라 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3이라는 숫자는 세 개로 나누어져 있지만 전체로서는 '완 성된 하나'라는 강력한 상징을 띠고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원래 '삼'이 '솥 정'자를 표현한 것이라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정이란 중 국 고대의 국가를 상징한 보기이다. 이 보기는 다소 변형되어 불전에 향불을 담아 올리는 그릇으 로도 이용되었는데, 세 개의 다리가 달려 있다. 만일 다리가 네 개이면 지면이 평탄치 못할 경우 에 안정되게 서 있을 수 없으나, 세 개이므로 어떠한 요철바닥에도 끄떡없이 튼튼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옛 선현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이 세계가 완성되고 살아 움직이게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천, 지, 인 3재를 기본으로 하여 완성과 안정을 상징하고 있는 3수는, 앞서 '단군신화에 나타난 수 관념'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의 시조신인 환인, 환웅, 단군의 삼위일 체적 존재로 그 신성함을 더하게 된다. 이들 삼신이 셋이면서 하나로 일체를 이룬다는 삼일신적 인식은'3은 곧 완성된 하나'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는 불·법·승으로, 각각 ' 진리를 깨달은 이', '진리 자체', '진리를 배우고 추구하는 자'를 뜻하고 있다. 이들 셋이 모일 때 비로소 불교가 성립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종교로서의 올바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있어 3은 완성과 안정을 상징하는 가장 신성하고 이상적인 수 이며, 동시에 순음과 순양이 합해서 변화를 지향하는 발전적인 수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3은 대표적인 양수로서, 아들을 뜻하는 길수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들을 극히 선호한 전통사회에서는 이미 딸을 잉태하였다 하더라도 주술적인 수법에 의하여 사내아이로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딸을 아들로 바꾸는 '전녀위남'의 민속이 뿌 리박게 되었다. 이 때 '3'이란 숫자는 바로 아들을 뜻하는 길수로 사용된다. 이는 양수(홀수)가 남 성이고 음수(짝수)가 여성이라는 음양사상에 기초를 둔 것으로, 순양인 1은 아버지를, 순음인 2는 어머니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버지인 1과 2가 결합하여 생긴 3은 양의 수이 므로 아들이라 생각한 것이다. 전녀위남의 구체적인 예를 보면 수탉의 긴 꼬리털을 세 개 뽑아 임부의 요 밑에 몰래 넣어두거 나, 남자를 상징하는 활줄을 임부의 속허리에 매어놓고 석 달 만에 풀면 딸이 아들로 바뀐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의 꼬리털 세 개, 석 달이란 것 등이 아들을 상징하는 3의 길수를 주술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출산 후에는 금줄을 치게 된다. 아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고추와 숯,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숯과 백지를 각각 꽃아 두는데, 이때 숫자는 세개씩 꽃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출생을 다스리는 산신을 셋이라 보아 이를 삼신할머니라 하였으며, 아기를 낳은 뒤 초3일 또는 초7일, 두7일, 삼7 일마다 삼신할머니에게 밥과 국 세 그릇을 떠놓고 아기가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치성을 올리게 된다. 그 외에도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3년 동안 집안에 머물다가 승천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3년 상 등 관혼상제를 비롯하여, 일상생활에서 격언, 속담, 관용어 등으로 가장 많이 친근하게 사용되 고 있는 숫자가 3인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중매는 잘 하면 술 석 잔, 잘 못하면 뺨 세 대 .삼 세 번 .코가 석 자 .3척 동자 .겉보리 석 되만 있으면 처가살이 않는다. .장님을 셋 보면 그 날 재수가 좋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선조는 좋은 일, 궂은 일에도 3이라는 수를 널리 사용하여 좋은 일은 더욱 좋게, 궂은 일은 원만히 풀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그들의 마음을 담았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또한 양수가 두 번 겹친 것을 좋아하여 이를 길수로 여겼다. 우리 민족이 기리는 설날(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 중양절(9.9) 등은 1, 3, 5, 7, 9의 양수가 두번 겹쳐 이 루어진 날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된 숫자 중에서는 특히 길수인 '3'인 중수, '삼십삼(33)'을 꼽을 수 있다. 33은 가장 완벽한 수, 그리고 강력한 전체성을 상징하는 독특한 수 관념을 형성하 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높이 솟아 있다고 하고, 그 꼭대기에 이 세상의 선악을 관찰하고 다스리는 도리천(도리 : 인도어로 33을 뜻함)이 있다고 한다. 이 도리천을 우리는 33천 이라고 많이 부르고 있다. 즉 여기에서의 33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포괄하여 관장하는 수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라 경덕왕이 5악3산의 산신을 집합시켜 대덕한 스님을 천거하는 날을 중삼의 3월 3일로 잡 은 것도 이 날에 33의 전체적인 뜻을 내포시킨 것이다. 즉 대덕스님을 뽑는데 필요한 전국가적 규모의 확대를 33이란 숫자로 상징한 것이다. 또한 중삼일에 다레를 올렸던 신라풍속도 중삼일이 갖는 전체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약정을 한 신라 혜공왕 4년에 길찬 벼슬의 대공형제가 모반의 깃발을 들고 합세한 민중과 더불 어 왕궁을 33일간 포위하고 풀었다는 기록 역시 이 포위 기간의 우연적 숫자로 보기보다는 33이 갖는 전체적 의미, 즉 온 백성이 왕의 약정에 저항하고 있다는 고의적 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33사상은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된 과거의 문과 정원으로도 제도화되었다. 과거의 선발 인원 을 일정한 성적에 도달한 사람 모두를 뽑거나 필요한 수만큼 뽑지 않고 나라의 모든 것을 다스린 다는 주력적 뜻에서 33명만을 뽑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무과가 처음 생겼을 때 그 정 원을 28명으로 정하였다. 28이란 숫자는 도교의 28수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고대 사회에서 해와 달과 여러행성 등의 소재를 밝히기 위하여 황도에 따라 천구를 스물여덟 개로 구분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문과의 정원은 33명인데 무과는 왜 28일일까 하는 점 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문관은 나라를 다스리는 벼슬이므로 가장 높고 완벽하며 전체적인 것을 상징하는 '33'수를 사용하였고, 무관은 나라를 지키는 벼슬이므로 하늘 위에서 세상을 감싸고 지켜주는 28수의 '28'을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33인 제도는 화랑도 및 동자군의 선발에도 적용되었다. 동자군은 기우제 때 합창대로 또는 궁중의 약재로 많이 쓰이는 동뇨의 공급원으로, 그 외에 각 관청의 의장 소년병으로 부정기적으 로 특채되었으나 그 수는 반드시 33명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이 같이 33이 지닌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각 단체의 발기인 수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한말에 보부상 단체의 발기인 수도 33명이었고, 3.1 독립선언의 민족대표도 33명이었다. 33인이 참여한다 는 것은 곧 전민족이 참여한다는 것을 뜻하였으며, 실제로도 3·1운동은 역사상 온 겨레가 거족 적인 공감 하에 하나로 일어선 민중봉기였던 것이다. 이렇듯 33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전 체성과 정의가 깃들어 있는 숫자로 사용되어 왔다. 이제까지 숫자 '3'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 그리고 그것이 사용된 여러 가지 예를 살펴보 았다. 막연히 좋은 수, 상서로운 수로 생각하여 왔던 '셋' 또는 '삼(3)'이라는 숫자에는, 이처럼 우 리 민족의 철학과 사상, 정서와 기원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 양수와 음수 음양사상은 한국인의 관념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 불, 선 3교를 우리 민족의 주요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음양사상은 이들 3교의 공통분모로 존재하여 왔었다. 그만큼 음 양사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심상과 의식구조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현대를 사 는 우리들도 음양의 이치를 통하여 세상을 보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음양의 원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창조는 무극이라는 무기체에서부터 비롯 된다. 형체가 없던 무극에서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 형체를 태극이라 하고, 태극에서 다시 음과 양 의 두 가지 기운이 갈라져 가볍고 양명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기운은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음과 양의 최초 구분이요, 천지의 창조라 한다. 양은 하늘, 위, 해, 남성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난 것, 강한 것, 능동적인 것, 남성적인 것을 뜻하 고, 음은 땅, 아래, 달, 여성 등과 같이 숨어 있는 것, 약한 것, 수동적인 것, 여성적인 것을 뜻한 다. 수에 있어서는 흉수가 기수, 즉 양수이며 짝수가 우수, 곧 음수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 수보다는 양수를 '길수', '상서로운 수'로 여겨 왔다. 왜 우리 민족은 양수를 더 좋아하였을까? 다음 표를 보면 그 까닭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음양대비표 1.양 동, 정신, 리, 유심, 하늘, 생명, 형이상학 2. 음 서, 육체, 기, 유물, 땅, 죽음, 형이하학 즉 양은 정신·형이상학·이·하늘 등과 같이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고, 살아서 생동하는 생명력을 뜻하며,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세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수의 선택에 있어서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0, 2, 4, 6, 8 등 보다는 1, 3, 5, 7, 9 등의 수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양수가 두번 겹쳐진 설날(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 중양절 (9.9) 등과 같이 중양의 수로 이루어진 날을 '기운이 꽉찬 날', '생명력이 충만한 날'이라 하여 특별한 명절로 삼았던 것이다. 민속에서는 이러한 양수 선호가 확고하게 정착되어 생활의 일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운이나 신령한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숫자 선택에 많은 신경을 써서 불길한 모든 기운을 떨쳐 버리고자 하였다. 먼저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들은 산삼이 우연히 캐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신령님의 뜻이 따라야 한다는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규율이 엄격하고 금기가 많았 다. 이들은 입산하는 날짜를 길일로 택하여야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날짜를 택하는 데 신중을 기하였단. 길일을 택하는 방법으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액운이 없는 날을 택하기도 하지 만, 대개 양의 날이 액이 없고 길하다고 하여 음의 날을 기피하였다. 산삼을 캐기 위하여 입산을 할 때도 3, 5, 7, 9, 11명 등 홀수로 무리를 지어서 가며, 산속을 끝없이 헤매다가 산삼을 발견했 을 때 '심봤다!'하고 세 번을 외친 다음에 삼을 캐게 된다. 출산풍속에서도 음양의 수리를 이용하여 뱃속에 든 아이의 성별을 점쳐보는 여러 가지 풍습이 있다. 임부가 콩을 한 줌 쥐어 그 수가 홀수면 아들, 짝수면 딸이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령을 더하고 거기에 수태한 달 수를 합하여 홀수면 아들, 짝수면 딸이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습속을 사용, 아들을 상징하는 양수와 연관되도록 수태를 조절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혼인하기 전의 예비신부에 대한 성교육의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여 왔다. 예를 더 들면 부모 나이가 홀수일 때 홀수의 달에 수태하여 건괘로 아들을, 부모 나이가 짝수 일 때 짝수의 달에 수태하면 곤괘로 딸을 낳는다 하여 이를 참고하도록 한다. 또한 7.7법이라 하 여, 49라는 기본수에 수태한 달 수를 보탠 뒤 그 수에 어머니의 나이를 뺀 수가 홀수일 대 아들 이고 짝수일 때 딸이라 하였다. 이처럼 아들을 낳기 위한 습속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음양 사상이다. 한편, 음수와 양수의 사용에 있어 평소 특별히 의문스러웠던 점에 대하여 이번 기회에 추측을 해 본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과 관련된 음양사상이다. 음양의 성격과 특성에 비추어 보면 죽음 이 음이고 삶이 양인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왜 사람이 죽어서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양의 수인 3일장, 5일장, 7일장을 지내며,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하는 절의 수는 이치에 맞게 음의 수인 재배(2배), 4배를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 관련 분야 학자에게 문 의하였으나 해답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추측을 해 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양계에서 음계 로 가게 되므로 아직 장사를 지내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양의 기운을 듬뿍 받고 가라는 뜻이 아닐 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는 이미 저 세상인 음계에 있는 혼백을 불러 정성을 바치는 의례이므로 음계를 뜻 하는 음수인 2와 4를 절의 수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재배는 남자가, 4배는 여자가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여자는 음이므로 음의 수인 두 번의 재배를 하는 것이다. 명절 등에 어른들께 절을 올릴 때는 한 번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산 사 람에게 절을 두 번 하는 경우도 있다. 혼례식날 신부가 신랑에게 두 번 절을 하면 신랑은 답배로 한 번만을 한다. 이는 혼례식이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한다는 음양화합의 의미가 큰 의례이 므로, 음양의 이치에 맞게 신부는 음수, 신랑은 양수로 절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시작하여 관례, 혼례, 상례, 제례에 이르기까지 각각 음 양의 이치에 맞는 수를 사용하여 행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떨쳐 보리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왔다. 이 외에도 식생활에서는 기본 음식에 반찬을 곁들이는 수에 따라 반상릉 분류하는데, 그 수를 홀수로 정하여 3첩, 5첩, 7첩, 9첩 반상이라 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건축에서도 집의 칸수를 3칸, 5칸, 7칸, 9칸, 11칸 등의 양수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왕실이 아닌 민가에서는 99칸을 넘지 못하도 록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짝수보다 홀수인 양수를 길수로 여겨 즐겨 사용하였다. 5. 관용어로 쓰이는 수 1) 우주의 섭리에 따라 쓰이는 관용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오묘한 자연의 섭리와 이치에 따라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 오랜 옛날에 인류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주기, 생명의 구성원리 등 신비로운 우주의 섭리를 깊이 연 구하였다. 이에 따라 4계절, 12달, 365일, 10진법, 60진법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주인식 의 체계가 이루어졌다. 특히 동양에서는 서양과 다른 독특한 우주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우주관과 세계 관을 수로 표현하여 체계화시킨 것이 많다. 오행사상을 비롯하여 10간, 12지, 3재, 동서남북의 4방 위, 4단 7정 등이 그것이다.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이러한 인식체계가 삶에 다양하게 적용되고 친숙 하게 사용되어 오면서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관용어를 만들게 되었다. 먼저 '4'를 보자, 4는 '죽을 사'자와 발음이 같이 죽음을 연상하는 불길한 수로 인식되고 있음 을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병원, 아파트, 호텔 등과 같은 건물에서 3층 다음을 4층이라 쓰지 않고 5층으로 표기하고 있어, 우리 문화권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기피하고 있는 숫자임에도 4는 오랜 세월 동안 4방위, 4주, 4계절 등으로 익숙히 사용되면서 우리의 관념 속에 독립된 관용어로 형성되어 있다. 4라는 숫자의 핵심은 나 또는 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는 인식 이다. 따라서 중앙을 지켜줄 수 있으며, 이러한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은 '전체'로서의 의미 로 파악되고 있다. 사해(세계, 온 천하), 사민(곧 온 백성), 사천왕, 사고(생노병사), 사군자(매난국 죽), 문방사우(붓, 먹, 종이, 벼루), 사상의학(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등은 모두 이러한 관 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 '인간'을 중심으로 사방의 기둥에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네 가 지 요소를 배열함으로써 비로소 중심이 온전해질 수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따라서, '4개의 뿌 리' 또는 '4개의 기둥'이라는 4주의 말뜻도 태어난 연월일시의 각 기둥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기 본적인 네 개의 뿌리이며, 나를 중심으로 사방에 서 있어 운명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옛사람들은 하늘은 양, 땅은 음기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양은 하늘의 모양인 원으로 나타내 고, 음은 땅의 모양인 방형으로 표시하였다. 옛 문헌은 보면 하늘은 '상원, 주원' 등으로, 땅은 '사 방, 팔방' 등으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땅에 살고 있으므로 그 주변을 사방이라 표시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완성된 전체'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또한 4는 그 배수인 8과 함께 쓰여져 중복의 의미, 즉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사 방팔방, 사고팔고, 사주팔자, 사팔허통(사면팔방이 터져서 허전함), 사통팔달 등과 같이 같은 의미 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더욱 강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다음으로 5수에 관하여 살펴보자. 예로부터 동양사람들은 우주창조의 근본이 음양오행학에 있 다고 믿었다. 앞의 '양수와 음수'에서 음양의 구분을 설명하였듯이, 하늘과 땅이 생겨난 뒤에 음 과 양의 두 기운은 다섯 가지 원소를 생산하였다. 이것이 바로 목, 화, 토, 금, 수의 5행이다. 이 가운데 수기와 목기는 하늘의 양명한 기운에서 생겨나고, 화기와 금기는 땅의 중탁한 기운에서 생겨났으며, 토기는 수, 화, 목, 금의 조화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오행은 음양을 모체로 하여 생겨난 것이며, 또한 오행의 하나하나에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음양과 오행이 조화를 이루어 10간과 12지가 정립되었고, 다 시 오행의 각 기운과 직결된 5색, 5미, 5취, 5각 등이 파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에서 동양에서는 5를 모든 것을 갖춘 수로 파악하고 있다. 즉 음양오행의 원리 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수인 것이다. 방위에 있어서 동서남북에 중앙을 보탬으로써 비로서 5행 이 갖추어진 전체로서의 완전함을 뜻하게 되며, 삼색인 청, 적, 황에 백과 흑을 더함으로써 완전 한 기본색인 5색이 된다. 짠맛, 쓴맛, 단맛, 신맛, 매운맛의 5미, 인, 의, 예, 지, 신의 5상, 간장, 심 장, 비장, 폐장, 신장의 5장, 눈, 혀, 몸, 코, 귀의 5관, 궁, 상, 각, 치, 우의 5음 등이 모두 5행의 이 치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처럼 5수는 5행사상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이 이치에 맞게 갖추어진 완전함'을 뜻함으로써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수 관념을 형성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독특한 수 관념과 함께 우주의 기본 요소인 천, 지, 인 3재를 상징하 고 있는 3수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환영을 받으며 즐겨 애용되었다. 앞 부분과의 중복을 피하면 서 우리가 쓰고 있는 3수로 된 관용어를 몇 가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관례 때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는 의식인 삼가, 임금이나 왕자, 공주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세 번 고른 다음에 정하는 삼간택, 만세삼창, 하나의 대상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심불란의 경지인 삼매, 신중히 생각한다는 뜻의 삼고 등이다. 다음으로 12수는, 12지와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수로 사용되는 관용어이다. 우리 민족은 저승에 이르기 위해서는 열두 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하나의 대문을 지날 때마다 갖가지 시련이 있으며, 인정을 써야만 그 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열두 대문을 통과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서울지방의 색람굿에서는 '12개의 가시문'이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무당이나 판수가 경을 욀 때 부르는 장수도 열두 신장 또는 12신장이라 한다. 식생활 에서도 임금의 수라상은 12첩을 가장 크게 차린 밥상으로 정하고 있으며, 민가에서는 9첩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혼인 때 신부를 따르는 계집종을 12명으로 정하여 '열두하님'이라 하 고, 열두 대문, 열두 폭 치마 등과 같이 12수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는 모두 12지와 열두 달의 뜻에서 파생된 관념적인 수이다. 2) 크고 많은 수 우리 민족은 '많다, 크다, 최고이다'등의 의미를 나타낼 때 여러 가지 숫자를 관용적으로 사용 하고 있다. 즉 그 숫자가 가지고 있는 값만큼의 크기가 아니라, 관용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러한 의미를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개개의 숫자에 내재된 상징이나 의미보다는 우리 민족의 과장이 깃든 해학과 풍류의 재미를 살펴보는 내용이 주가 된다. 먼저 9수는 9,19,99 할 것 없이 '양의 기운이 가득히 충만된 수'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높다, 깊 다, 길다, 많다' 등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넓은 하늘을 뜻할 때 구천, 구중, 구건이라 하고, '구천구지'라 하면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땅 속 까지의 사이를 뜻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9수가 넓고 높고 깊음을 모두 나타내는 강력한 수로 사 용되었다. '구곡간장'은 깊은 마음속을, '구중궁궐'은 문이 겹겹이 달린 깊숙한 궁궐을, '구절양장' 은 산길 등이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고 험한 것을 일컫는다. (춘향전)을 보면 이러한 대목이 있다. 이 몸이 죽은 후에 후생하여 보려드니 금일 상봉 황홀하다. 칠년대한 단비 오고 구년지수 해 돋는다. 여기에서 '구년지수'란 9년 동안 계속되는 큰 홍수라는 뜻으로 '구년지수 해 돋는다'라는 말은 오랜 세월을 두고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또한 오래 묵어서 자유자재로 잔재주를 부려 사람을 흘린다는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인 구미호 라 하였고, 더 과장하여 아흔 아홉 개의 꼬리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썩 많은 것 중 지극히 적은 것을 말할 때는 '구우일모'라 하여 아홉 마리 소의 털 중 하나로 표현하였고, 몹시 먼 나라를 일 컬을 때는 '구역'이라 하여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듭해야만 언어가 통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과장 하기도 하였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경우에는 '구사일생'이라 표현하였다. 이처럼 9수는 많고, 높고, 깊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크고 높은 수로서 길수 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신령한 동물인 용의 앞에 사용, 구룡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구룡 강, 구룡도, 구룡폭포, 구룡연, 구룡포 등 우리나라의 섬, 강, 폭포, 못 등 많은 자연지명에 사용되 고 있다. 또한 임금의 면복에다 아홉 가지의 수를 놓아 '9장'이라 하였고, 아홉 칸으로 나누어진 찬합에 음식을 담아 '구절판'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10수는 뜻하면서 '하나의 굽이를 넘어선 수', '하나의 매듭이 끝난 수'로 인식되고 있 다. 따라서 '한 단계를 지우다', '한 굽이를 넘어서다'는 일단락의 의미가 강하게 작용되어 쓰이는 관용어이다. 예로써 '십년감수',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 등을 들 수 있다. 십년감수는 위험하거나 위태로 운 한 단계를 넘어서 이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며,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은 일단 락을 지웠다고 자부할 만한 공부를 마쳤으나 공든 탑이 무너지듯 원천적으로 허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외에도 십년지기, 십목(여러 사람의 눈, 중인의 관찰), 십분(넉넉히, 아무 부족 없이), 십사일 반, 십인십색(가지각색), 십전(조금도 위험이 없음), 십중팔구 등을 비롯하여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린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열 일 제치다' 등 격언, 속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제 수의 단위에 따른 백, 천, 만, 억, 조 등을 살펴보자. 먼저 100은 많음을 뜻하는데 가장 일 상적으로 쓰이는 관용어 중의 하나이다. 백 개의 성이라는 뜻의 '백성'이라는 말로 국민을 나타냈 고, 여러 학자들을 백가, 모든 벼슬아치들을 백관이라 불렀다. 다양하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백과 사전, 백화점, 백방(여러 가지 방법), 백출(여러 가지 모양으로 많이 나옴), 백해무익, 백행, 백화 등이 있고, 많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백문이 불여일견'을 비롯하여 백록(많은 복록), 백만장자, 백배사죄 등의 말이 있다. 또한 오래고 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백년손님, 백년가약, 백년대계, 백년해로 등 백 년 동안이나 되는 긴 세월이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으며, 이 외에도 백 일해, 백일기도 등이 있다. 천이라는 수에서 먼저 멀고 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을 비롯하여 타향천리, 천리경, 천리마, 천리안 등이 있고, 오랜 세월 또는 영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 는 것은 천고불멸, 천추(오랜 세월) 등이 있다. 무게의 무거움을 나타내는 예로는 힘이 썩 센 사 람을 일컬어 '천근역사(천근을 들어올릴 만한 장사)'라 하고, 흔히 몸이 힘들고 무거울 때는 '몸 이 천근 같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비싼 값과 많은 돈을 상징할 때도 천금, 천 냥, 천 석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며, '천금준마'라 하면 썩 좋은 말을 뜻하게 되고 '천석꾼'은 천석을 추수하는 사람, 즉 굉장한 부자라는 뜻이 된다. 속담에서도 많이 살펴볼 수 있는데, '천 냥 빚도 말로 갚는 다', '천 냥짜리 서 푼도 본다', '말 한 마디 잘 하면 천 냥 빚도 갚는다' 등이 그것이다. 한편, 많고 다양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천과 만을 함께 써서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우도 많 이 있다. 예를 들면 썩 많은 병마라는 뜻의 '천군만마', 온갖 고난과 시련의 뜻인 '천신만고', 매 우 다양하다는 뜻의 천년만년, 천추만대, 천추만고 등이 있으며, '지극히', '매우'라는 뜻으로 사용 되는 말은 천만다행, 천만뜻밖, 천만부당, 천만의 말씀, 천부당만부당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노름 판을 '천냥만냥판'이라 하기도 하며, '천석꾼에 천 가지 걱정, 만석꾼에 만 가지 걱정'이라는 과장 되고 해학적인 표현을 즐겨 하였다. 특히 불교에서는 현재겁에 1,000의 부처가 나타난다는 천불신악에 따라 천불공양, 천불전, 천불 염, 천불산 등의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불타의 헤아릴 수 없이 변화하는 몸을 강조하기 위하여 ' 천백억화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만과 억과 조에 관하여 살펴보면, 만고강산, 만고불멸, 자손만대, 만년설, 만년필, 만 수무강, 억겁, 억대 등과 같이 영구적인 오랜 세월을 뜻하는 말, 만리장천, 만리타국, 기고만장, 파 란만장, 만리경 등과 같이 끝없이 길고 높은 거리나 길이를 뜻하는 말, 만국, 만금, 만능, 만물, 만 반, 만병통치, 만부득이, 만사형통, 만일(만약,만혹), 조민, 조서(모든 백성) 등 많음을 나타내는 말 등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옛날에 백성들이 봉기하 여 학정을 하던 원이나 지방관을 쫓아낼 때 쓰던 가마를 '만인교'라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때 많 은 유학자들이 연명하여 올리던 상소를 '만인소'라 하였다. '강력한 전체성'의 의미를 지닌 숫자 33이 국민 전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음에 비하여, 만은 수의 크기로 많음을 나타내어 전체를 상징하는 다소 직접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 만을 중복하여 많고 다양함을 강조하였듯이 억천만겁, 억만년, 억만장자, 억만지중, 억 조창생 등과 같이 억과 만과 조 등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구만리 장공', '오만날', '오만가지 생 각', '오만상을 찌푸리다', '오만소리를 다 한다' 등고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제2장 색 색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색을 볼 수 가 없다. 모든 물체는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감각으로는 어둠과 함께 색도 잃어 버리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에서도 '색'을 형태가 있는 것, 대상을 형성하는 물 질적인 것, 넓게는 대상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색증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여 색을 공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궁극의 본질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색은 감각적인 것으로, 시각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색은 관습보다는 색채감각으로 파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색채를 사용할 때, 그 색체가 우리의 감각에 와 닿는 감정이나 감각에 순수하고 솔직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지식화되고 관념화된 색의 이미지 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머리에 하얀 리본을 달았다고 하자. 이 때 아무런 선입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만을 본다면 사람에 따라서 '깨끗하다', '청순하다' 등의 느낌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습과 사회규범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상을 당한 모양이다' 또는 '머 리에 흰 것을 꽂다니 청승맞고 불길하다'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순수한 감각, 즉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시작된 색감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사회를 이루어 감에 따라 이차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색에 대한 연상적 가치가 발전하여 어떤 통념을 형성하게 되면 특정한 빛깔에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부여는 개인 적인 색감이나 의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에서, 그 사회에서, 그리고 그 민 족 속에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영위되고 인식되는 색감과 의식이다. 즉 같은 문화권의 사람 들에게 '관념화된 보편성'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 며, 이러한 색채감정은 문화적 특성을 나타내 는 독특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색'에 대한 관련자료를 찾아보다가, 우리 민족의 색채 사용에 있어서 모든 결론 이 음양오행으로 귀결되어지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 물 론 음양오행사상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사상, 사고방식, 생활양식 등의 밑바탕을 이루어 왔으며,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음양오행의 설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문의 출발은, 색이야말로 원시사회에서부터 인간이 태양, 하늘, 나무, 꽃 등의 자연을 접하면 서 가장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미지라는 점이다. 음양오행사상이라는 사고체계가 정립 되기 훨씬 이전에도, 인간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독특한 관점을 형성하여 왔다. 색에 관해서 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태양숭배사상과 영혼불멸사상에서 새를 신성시하였듯이 그들이 숭배하 는 태양의 색깔에 대하여 무심할 리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붉은색에 대한 인간 의 보편적인 느낌과 생각이 음양오행사상을 형성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의식주 전반에 걸친 생활과 의식 및 제도적인 측면에서 음양오행에 따라 색채가 다루어진 부분이 매우 많으나, 그것을 반드시 음양오행이라는 틀에 맞추어진 시각으로 일축해 버린다는 것 은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민족 특유의 정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의 색채 전체를 가두고 있는 음양오행이라는 틀을 의식하지 않 고, 보다 민속적인 차원에서 대다수의 옛 선조들이, 그리고 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이 (음양오행과의 관련을 포함하여) 각각의 색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떻게 사용하기를 즐 겨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민족의 색: 흰색 최근에 어느 방송단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색채의식 조사에서, 한국과 한국 국민성을 상징할 만한 색과 우리 선조들의 민족성을 잘 나타내는 색으로 단연 흰색을 꼽았다고 한다. 흰색에 대한 느낌은 민족에 관계없이 순결, 깨끗함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며, 종교적인 복장이나 천사의 상징, 혼례 때의 신부복 등과 같이 성스럽고 순결한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만큼 흰색을 숭상하고 생활화한 민족은 드물 것이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위지〉동이전 등의 고대 중국문헌에 보면 부여나 변한, 진한 때 부터 한민족이 흰옷을 일상복으로 입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백의 풍습은 유 사 이전으로 소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흰옷의 비경제성 때문에 고려 건축 초 우리나라는 동 방에 속하니 오행에 따라 동방색인 청색옷을 입어야 한다고 금령을 내렸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흰옷을 입었다고 한다. 국법 개혁에 가장 과감하였던 조선의 태종도 '흰옷에만는 내가 졌다'고 손 을 들었다. 이와 같이 흰옷에 잠재된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민족의 사상적 밑바탕을 이루어 온 오행사상에서도 동방은 청이며 서방은 백이라 하였다. 이에 따르면 동방인 우리나라의 민족은 청 색 옷을 입어야 하는데, 오행사상을 역행하면서까지 흰옷을 고집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이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 온 우리의 흰옷은 일제 강점기때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무언의 항거,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백의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골 장터의 입구 마다 검정물을 담은 커다란 가마솥을 설치해 놓고, 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흰옷에 검정물을 끼 얹었다. 떡팔러 장에 갔다 베옷에 먹물탕이라. 옷이야 검었지만 배알까지 검길쏘냐. 일제 때 번진 남도아리랑 가운데 한 대목이다. 검정물 세례를 받은 한 떡장수가 배알, 곧 심지 나 정조까지야 검게 할 수는 없다고 민족감정을 토로한 아리랑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 족의 백의에의 집념은 억세고 끈질기게 계속되어 왔다. 우리 민족이 흰색, 특히 흰옷을 선호하고 상용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가 되어 왔다. 흰색을 숭상하고 선호하였던 이면에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부분들도 포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그 이유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밝사상에 근거한 것 우리 민족은 고대인의 특성 중 하나인 태양숭배와 경천사상에 따라, 고유한 밝사상을 형성하였 다. 부여, 예맥 등 고대의 부족국가는 자신들의 부족이 밝족 또는 씨족이라 자처하였다. '부여'라 는 말은 밝음을 뜻하며, 예맥족은 본래부터 동쪽과 밝음의 부족으로 자칭하였다. 이는 하늘의 태 양으로 인하여 밝음과 광명이 생겨나며, 그 태양은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쪽에서 떠오르므로 '동- 명', 즉 동방의 밝은 곳이라 한 것이다. 이러한 밝은 곧 백을 뜻하며, 흰색을 신성한 색으로 다루게 되었다. 흰빛은 모든 빛깔 가운데 가장 밝은 색으로, 흰빛을 백이라 함은 밝다는 뜻이다. 그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형성된 음양오행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오행사상에 따 르면 '동방은 청색'이 되지만, 이밝사상은 어느 한 순간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우리 민족의 전통 이 되어 수천 년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상에 있는 동물 가운데 가장 빠르고 활달한 말을 움직이는 태양과 관련지웠 다. 특히 흰색 말인 백마를 태양, 천제의 사자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늘에 맹세를 할 때는 백마 를 희생시켜 그 피를 나누어 마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렸을 때 신라 문무왕과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의 왕족이며 웅진도독인 부여융, 이 세 명 은 지금의 공주 북쪽에 있는 취리산에 올라가 신단 앞에서 백마를 죽여 강화의 맹세를 하였다. 신 앞에서 신의 천사인 백마를 희생시켜 피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그 약속을 절대화시킨 것이다. 2) 우리 민족의 기질, 심성과 관련된 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청렴결백한 선비상을 꼽고 있다. 권력 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 없이 맑고 곧은 마음으로 자신을 닦고 수련하는 선비상, 이들의 이미지는 흰색과 청색이다. 흔히 선비는 학에 비유되며 그들이 입은 도포를 학창의라 하였다. 또한 선비들 의 지조와 기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백과 청 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의미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즉 탈감각 으로써 높은 인격에 이른다는 한국인 특유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감각이나 감정을 멀리 하고 인격과 규범 등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색은 욕망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관직에 있는 문무관리들도 대궐에서는 품계에 따라 그에 맞는 색의 옷을 입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흰옷을 입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는 감정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우리 민족의 기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백자와 청자에 나타나고 있는 우아함과 신비로움도, 이러한 오랜 민족의 정신과 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금욕적인 인격완성의 의미 외에, 자연에 동화하고 자연에 귀의하는 심성과도 깊이 관련 되어 있다. 흰색은 물감을 들인 색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원색이다. 이런 의미에서 흰색은 곧 무색이며,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간직한 색이다. 무색, 있는 그대로의 색은 곧 자연 그 자체이다. 그들은 자 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동화하며 순리대로 사는 것을 올바른 삶이라 믿었다. 따라서 있는 그 대로의 무색에 굳이 염색을 하거나 칠을 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궐이나 사찰 등을 제외한 일반 민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기둥이며 벽이며 마루며, 방안의 가구에 이르기까 지 자연 그대로의 색이라는 데에 예외가 없다. 국기를 보아도 그렇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 중 흰 바탕의 여백을 남기고 있는 국기로는 태극기와 일본국기 등 몇 나라에 불과하다. 이규태 선생 은 태극기가 백지를 본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색채감각의 표현으로, 색에 물들지 않은 태초의 천진 그대로를 숭상하는 정서의 표현이라 보았다. 영어권에서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다. 구미 문화권에서는 흰색을 미개하고 미속한 것으 로 비가치화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우리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오히려 흰 것을 오염 시키는 빛깔을 악덕시 하고 비가치화한 것이다. 민속에서 쓰는 길조어에서도 흰색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흰 사슴이 나타나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 .흰 꿩이 나타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아침에 흰 말을 보면 그 날 돈이 생긴다. .꿈에 백발이 되면 그 해에 근심없이 생활한다. .흰 옷을 입으면 남의 초대를 받는다. .손톱에 흰 점이 생기면 재수가 좋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을 그대로 투영하여 담고 있는 색이 바로 흰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상복의 영향 김동욱 교수는 백의를 숭상한 것이 애초에는 거의가 경제적 요건에 지배되었겠으나 나중에는 의식복장으로서 상복의 영향으로 습성화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상복을 백색으로 하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상복은 상중에 입는 예복이다. 상복이 반 드시 흰색이어야 하는 데 담겨진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주로서의 예를 갖추기 위함이다. 상주가 색채 있는 옷을 입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슬픈 마음과 속죄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사자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인간생활사에서 상사는 가장 슬픈 일이므로 우리 민족은 상주를 죄인이라 간주하였고, 상주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여 부끄럽게 여겼다. 따라서 사자와 친분이 깊을수록 거친 천에 바느질이 험하고 투박한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밝은 색인 흰색으로 사자의 저승길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상주가 흰색의 상 복을 입음으로써 사자의 영혼이 좋은 세계에서 영생하기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믿음이 담겨져 있 다. 이와 같이 상복의 흰색에는 상중에 채색된 옷을 입지 않는다는 예로서의 의미가 선행된 다음, 저승길을 밝혀 좋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기원이 함께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유교의 영향으로 관혼상제의 예를 중요시하였고, 특히 상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국상과 친족의 범위가 넓어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 기간이 길었다. 상복을 입을 기회가 많았다는 것은 흰옷을 입을 기회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며, 이는 한민족의 백의상 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4) 금색으로 인한 영향 동서고급을 막론하고 유채색은 화려, 장엄, 사치, 권위의 상징으로 권력층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오행사상에 따라 권력이나 품계를 표시하는 특별한 색 의 옷은 일반인이 입지 못하였다. 즉 신분이 낮은 천민(예를 들면, 무당, 기생 등)의 표시로서 사 용하게 한 것과 같은 특수한 경우 외에는 극도로 채색된 옷을 제한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고려 때 회색 옷 때문에 왕씨가 망한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그대로 맞았다 하여 회색을 상서롭지 못한 색으로 여겨 회색 옷을 금하였다. 세종은 명나라 천자가 입은 복색이라 하여 노랑색, 보라색, 회 색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금색으로 인하여 색채 옷의 선택 폭이 줄어든 데다가 복색으로 존비를 나타냈기 때문에 백성들은 흰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5) 물감이 희귀하고 염료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 지초나 잇꽃, 남과 같은 염료가 우리나라에는 희귀하여 주로 외제품을 써야 했다. 따라서 베 한 필을 물들이는 데 물감값이 베 한 필 값만큼 들었다고 한다. 자연히 서민들은 있는 그대로의 색 으로 옷을 해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백의습속으로 이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흰색 및 흰옷 선호에 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논자마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는 밝사상 과 우리 민족의 기질, 심성에 많은 비중을 두고 싶다. 왜냐하면 상복으로 인한 영향은 상중에 흰옷을 입는 두 가지 이유 자체가 밝사상과 우리 민족 의 기질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채색된 옷을 입는 것은 상주로서의 예가 아니라는 생각은 우 리 민족의 심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고, 흰색의 저승길을 밝혀 준다는 생각은 '하늘과 밝음'이라 는 의미로 밝사상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금색과 염료부족의 영향은 실제로 무색 인 흰옷을 입게 하는 데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색'이라는 제도 자체가 세계적으로 공통됨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만 흰색과 깊이 관련된 백의민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 타민족과는 다른 문화적, 사상적 특수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 다. 염료 부족 역시 일부분의 요인은 될 수 있으나 전체적인 것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느낌이 든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리라. 우리들, 우리들의 선조, 또 그 들 선조들이 지닌 마음, 심성과 기질, 그것과 깊이 연관된 밝사상 .....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 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우리 민족이면 누구든 공감하고 더 많은 비중으 로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 20세기의 후반을 사는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 민족과 민족성의 상징색으로 서 슴없이 흰색을 꼽았으리라. 2. 벽사의 색 동소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은 사되고 나쁜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 고자 하는 것이다. 앞일을 알 수 없고, 가진 능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서는 삶의 과정 자체가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사고체계 가 정립되지 않은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생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이 더욱 컸을 것이다. 따라서 그 들은 보다 크고 강력한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바람이 각종 원시신앙과 주술 적인 믿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도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이나 무의식적인 생각을 순간순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과 연관된 어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든가 아침에 만나는 작은 곤충에게서도 그 날의 운세와 연관시켜 보고자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과 능력을 설정 해 놓고 이를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사된 것을 물리치고 행복과 안락함, 즉 복 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사된 것을 물리치는 힘, 그것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색과 관련된 측면에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음을 물리치는 양의 색 귀신이나 악하고 나쁜 것은 어둡고 드러나지 않은 깊숙한 곳에 있다. 밝음이나 개방된 곳은 이 들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밝고 원기와 생명력이 충만한 것을 양, 무겁고 어두우며 숨어 있는 것을 음이라고 본 음양사상에 따라 동양에서는 귀신을 음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필원잡기〉에 따르면, 귀신은 음성인 까닭에 양성인 남자보다는 여자에 부착되는 수가 많고 빛이 드는 양지나 튀어나온 곳보다는 음습한 동굴, 오래된 우물, 깊은 계곡 등의 들어간 곳과 고사찰, 폐옥, 고목 등에 운집하여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음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강자, 즉 양 이 요구된다. 음양오행사상에 의하면, 우주생성의 근본원리에 해당하는 기본색으로 백색, 청색, 적색, 흑색, 황색의 5색이 있으며, 이 중 청색과 적색이 양에 해당된다. 청색은 방위로 볼 때 태양이 솟는 동 방에 해당하여 창조, 신생, 생식 등을 상징하는 양기가 강한 곳이다. 적색은 남방에 해당하여 온 난하고 만물이 무성하므로 또한 양기가 왕성한 곳이다. 이에 반하여 서방의 백색과 북방의 흑색 은 음에 해당된다. 음양사상에 따르지 않더라도 백색과 흑색은 생명력이나 왕성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음양오행사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과 사고체계를 규격화시키는 제도적인 것의 일종이라 생 각하기 쉬우나, 실제에 있어서 음양오행은 우주의 이치를 지켜본 다음에 이를 종합하여 정리한 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음양오행사상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인 고대사회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사고와 믿음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원시사회에서 가장 큰 숭배의 대상인 태양과 불의 적색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 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상징'을 느낄 수 있었고, 왕성한 식물과 경배의 대상인 하늘의 푸른색에서 생명력과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적색과 청색은 힘과 생명의 상징 색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사되고 악한 기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할 때 적색 또는 청 색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관습은 현재까지 이어져 우리 민족의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적색과 청색은 모두 생명력과 힘이 충만한 양의 색이지만, 실제 벽사의 용도로 사용된 것은 적색이 압도적이다. 이는 적색이 태양, 불, 피와 같은 원시신앙의 주요한 대상물과 깊이 연 관되어 있어 주술적인 위력을 지닌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이 사 용한 벽사(사된 기운을 물리침)의 색으로 대표적인 적색에 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2) 적색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대인들은 그들이 신성시하고 숭배한 태양과 불의 색이 붉은 색임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또한 자신의 몸속에서 고동치며 흐르는 붉은 피는 곧 생명과 직결되는 생 명력의 상징임을 알았다. 이처럼 태양, 불, 피가 있는 곳에는 항상 생존이 가능하고 강력한 힘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태양, 불, 피가 가지고 있는 붉은색을 생명과 힘의 표식으로 삼고 이를 숭상 하게 되었다. 따라서 귀신과 질병, 재앙 등과 같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사자로서 강력한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원시적 사고체계가 실생활에 어떻게 반영되어 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재앙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에서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는 면을 중요시하여, 홍, 주, 황 등과 같은 유사한 색을 적색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언급하게 될 이러한 유사 적색은, 그 색 자체로서가 아니라 붉은색에 준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임을 알 필 요가 있다. (1) 부적 벽사진경의 가장 강력한 의지표현의 하나인 부적에는 적색으로 글씨와 그림을 그려 악귀를 쫓 는다. 문헌상 최초로 부적이 사용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문왕 6년 2월의 기록과 〈 삼국유사〉의 처용설화에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색의 명칭을 명확하게 지칭하지는 않았지 만, 길흉요찰(길흉을 조정하는 나무조각)과 벽사진경의 처용상이 모두 붉은 글씨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통설이다. 조선시대 때 임금이 위독하면 액정서에서 보의를 설치하였는데, 보의란 붉은 비단에 도끼를 그 려 넣은 병풍을 말한다. 또한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관상감에서는 주사로 쓴 부적을 만들어 단오에 대궐 안으로 올 리며, 대궐에서는 이를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막았다고 하였다. 이 때 부적에 쓴 벽사문은 귀신 귀자를 가운데에 두고 붉은 적자 12자로 주위를 두른 것도 있고, '적구절석사백사병일시소멸 '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관습은 대궐뿐만 아니라 일반 민가에서도 널리 행 하여 집집마다 붉은 부적이 붙어 있지 않은 집이 드물 정도였다. (2) 복식 복식에 있어서 이러한 예는 더욱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흉귀를 쫓는 의식인 계동난의때에는 동 자 48명이 가면을 쓰고 적색 의상을 입었고, 공인 20명이 적건과 적색 의상을 착용하였다. 정월 대보름은 귀신과 재액을 물리치는 갖가지 벽사행위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날이다. 따라서 붉은 색이 가장 많이 동원되기 때문에 이 날을 단일이라고도 한다. 이 날 궁중의 내시원에서는 옥추단이라는 붉은 선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며, 이를 오색실에 꿰어 임금을 비롯한 시종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민간에서는 부녀자들이 아궁이에 불을 떼다가 불똥이 튀어 치마에 구멍이 나는 경우가 많았는 데, 이 때 붉은 헝겊으로 구멍을 꿰매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음습한 곳을 찾아다니는 악귀를 쫓 기 위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전염병이나 괴질이 유행할 때 이를 쫓기 위하여 붉은 옷을 입었으 며, 부락 입구에는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붉은 두루마기를 걸어놓았다. 시체를 넣는 관에도 옻칠 을 하고 붉은 비단을 관 속의 사방에 붙여 사악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부의 얼굴에 바르는 연지 곤지도 시집가는 여인을 투정하는 음귀에 대한 축출의 의미에 서 사용되었다. 부락제의 신주들은 대개 남자인데도 빨간 연지를 칠했으며, 궁중에서 베푸는 기우 제 등의 천제때 주가를 부르는 천동들도 빨간 연지칠을 하였다. 상날에 직업적으로 울음을 파는 곡비의 손톱에는 빨간 물을 들이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니, 여름날 백반을 섞어 예쁘게 들인 빨간 봉숭아물도 귀신에게는 두렵고 근접할 수 없는 징표로 여겨졌을 것이다. (3) 음식 벽사의 의미로 사용된 붉은색의 매개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붉은 고추를 들 수 있다. 아 들을 낳았을 때 붉은 고추를 다는 것이 고추의 생김새가 사내 아이들의 성기를 닮은 데서 유래되 었다는 설도 있으나, 사된 기운의 근접을 막고자 하는 붉은빛의 벽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 하면 귀신의 장난이 심한 것으로 여겼던 간장 항아리에도 붉은 고추를 끼운 금줄을 두르고, 집을 상량할 때나 샘을 새로 팠을 때 치는 금줄에도 붉은 고추를 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생명의 탄생과 집의 신축, 샘의 신설 등과 같이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것들에 사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붉은색'으로 이를 막은 것이다. 이러한 습속이 가장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분야는 식생활에서이다. 이사를 하거나 굿 을 할 때 팥죽을 끓여 나누어 먹는데, 이는 팥의 붉은색을 이용하여 부정한 것이 끼어들지 못하 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나 연말의 동짓날에도 팥죽을 끓여 먹는다. 〈 동국세시기〉에도 동짓날 팥죽을 끓여 먹는 풍속을 적고, 팥죽을 대문이나 문설주 등에 뿌려 상 서롭지 못한 것을 쫓아 버리는 민속을 소개하였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은 팥, 수수, 대추 등의 붉은 곡식이 주를 이루고 있고 또한 붉은 약 식을 해 먹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에도 팥죽으로 열병을 예방하고자 하였고, 고춧가루를 넣은 개장국과 육개장을 뻘겋게 끓여 이열치열의 원리와 함께 더위병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한편, 유둣날 민간에서는 밀의 누룩을 구슬처럼 만들어 붉은 물을 들인 다음 허리에 차고 다니 거나 문설주에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식생활에서 붉은색을 이용한 벽사의 풍습은 절식으 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 주생활 주생활에서도 우리의 선조들은 건축재료로써 붉은빛이 나는 황토를 즐겨 사용하였다. 흙에도 갖가지 색깔로 된 여러 종류의 흙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붉은빛에 가까운 색을 골라 벽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서울 종로의 흙이 붉은빛의 황토였는데, 이 종로의 황토를 파다가 집 문 앞에 깔면 병귀가 들 지 않는다고 하여 마구 파가는 바람에 이를 막는 '금토방'을 붙여야만 하였다. 동신을 모신 사당 과 그 동신제의 제주가 사는 집 사이에는 붉은 황토를 깔아 사귀를 막았다. 또한 각 고을에 수령 이 새로 부임하는 날에는 마을 밖 오리정에서부터 관가에 이르는 길까지 붉은 황토를 깔았다고 한다. 이에 동원되는 부역을 '황토부역'이라 하였다. 정약용은 〈다산필담〉에서 이러한 황토를 까는 풍습이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전 제한 뒤, 태양이 가는 길인 황도를 흉내내어 귀하게 받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 는 의견을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붉은 황토의 살포 풍습 역시 새로운 사람에게 잘 붙는 악 귀를 물리치기 위한 벽사색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벽사의 용도로 사용된 적색은, 직접 붉은색을 칠하는 적극적인 행위에서부터 시작하여 붉은 옷, 연지, 봉숭아물, 고추, 팥, 대추, 붉은 황토 등 생활주변의 다양한 매개체를 통하여 그 의 미를 전달하여 왔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에도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험보러 가는 아 들·딸의 옷 속과 환자의 이불, 베갯잇 속에 붉은색의 부적을 넣어놓는다든가, 이사를 했을 때 팥 죽, 시루떡 등을 만들어 이웃에게 돌리는 등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 독 특한 적색관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일상생활에서의 불행이나 질병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는 악귀의 소치로 여겨 그 악귀가 두려워하는 붉은색을 상징적인 힘으로 사용함으로써 방대한 '붉은 기속'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3. 음양오행과 색 음양오행사상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문화권에서 우주인식과 사상체계의 중심이 되어 온 원 리이다. 먼저 아무런 형체가 없던 무극에서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다섯 가지 원소를 생산하였는데, 이것이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이다. 따라서 오행의 하나하나에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음양오행사상에서는 우주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이 이러한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청, 적, 황, 백, 흑을 오행의 각 기운과 직결된 다섯 가지 기본색이라 하여 오색 또는 오채라 불렀다. 음양오행적 우주관에 의하면 동서남북 및 중앙의 오방이 주된 골 격을 이루고 있고, 각 방위에 해당하는 오색을 다음의 그림과 같이 배치하였다. 또한 오색은 오행의 원리에 따라 계절, 오미, 오상, 오장, 오관, 오음 등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1) 오색 오색은 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으로 정색이라 부르며 모두 양에 해당된다. 또한 오행 중 상충하 는 각 방위의 중간에는 간색이 오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음에 해당된다. 즉 서방과 동방의 사이 에는 벽색, 동방과 중앙사이에는 녹색, 남방과 서방 사이에는 홍색, 남방과 북방사이에는 자색, 북 방과 중앙사이에는 유황색이 오게 된다. 따라서 오정색과 오간색은 우리 문화의 기본색으로서, 우 리 민족은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색을 생활에 사용하였다. 이상의 오색을 음양오행사상에 따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청색 청색은 방위로는 동쪽에, 계절로는 봄에 해당한다. 오행 중 목으로, 하늘과 무성한 식물 등을 상징하는 색이다. 해가 떠오르는 동방에 해당되고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인 까닭에, 청색은 청 정한 생명을 상징하며 양기가 왕성한 색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적색과 함께 사된 것을 물리치 고 복을 기원하는 벽사기복의 색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성과로는 발생에 속하며 인간의 선함을 관장하는 색이다. 각각 간장, 눈, 신맛과 연결되어 있다. (2) 적색 적색은 방위로는 남쪽에, 계절로는 여름에 해당된다. 오행 중 화로서, 태양, 불, 피 등을 상징하 는 색이다. 온화하고 만물이 무성한 남방에 해당되고 태양, 불, 피 등과 같이 생명력이 충만한 색 이므로 가장 강력한 양의 색으로 인식되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적색은 벽사의 가장 대표적 인 색으로, 흰색 다음으로 우리 민족과 매우 밀접한 색이라 할 수 있다. 성과로는 성장에 속하며 인간의 예를 관장한다. 인체의 심장, 오관의 혀, 맛의 쓴맛에 각각 해당된다. (3) 황색 황색은 오색의 중심색이다. 방위로는 중앙에 해당하며 4계절 모두에 연관되어 있다. 우주의 중 심에 해당하므로 오색 중 가장 고귀한 색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천하의 통치권자인 천자를 상징하는 색으로 다루어져,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임금만이 황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오행 중 토이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땅을 상징한다. 인간의 믿음을 관장하고 조화를 대 표하며 오장의 비장, 오관의 몸, 맛의 단맛에 해당한다. (4) 백색 백색, 즉 흰색은 서쪽과 가을에 해당한다. 흰색은 빛을 상징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모두 흰색을 신성하게 여겼다. 또한 흰색은 순결, 청렴 등을 상징하며 우리 민족의 심성과 기질에 부합 되어 한 민족의 대표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오행 중 금에 해당하며 성과는 수확에 속한다. 인 간의 의리를 관정하고 각각 폐장, 코, 매운맛에 해당된다. (5) 흑색 흑색은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에 속한다. 오행 중 수로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고 스며 들기를 좋아하는 물과 같이 음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성과로는 저장에 속하고, 인간의 지혜를 관장하며 은밀하고 현묘함을 좋아한다. 인체의 신장, 오관의 귀, 맛의 짠맛에 해당한다. 2) 음양오행에 따른 색 이상에서 살펴본 오색은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의미가 부여되어, 색의 사용에 있어서 시각적 인 이미지보다는 관념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관혼상제 및 생활 전 반에 걸쳐 음양오행에 따른 색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특히 의례나 제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색 자체가 의식화, 제도화되어 법이나 관습의 일부분으로 정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 은 오늘날에도 크게 변화되지 않는 채 우리의 고유 문화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사용된 색은 그 유형이나 표현양상에 있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고 있다. 여기에서는 크게 공간개념과 관련된 측면, 색의 사용과 가장 밀접한 분야인 복식에 나 타난 측면, 기 외에 기타 건축, 식생활 등에 관한 측면의 세 가지로 나누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 다. (1) 공간개념에 나타난 색 우리 문화에 나타나고 있는 공간개념은, 동서남북과 중앙, 오방위의 수평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대인들은 우주를 다스리는 제왕과 그 밑에 사방을 수호하는 신수를 설정하였는데, 이 신 령한 동물들을 그들이 수호하는 방위에 해당하는 색으로 되어 있다. 즉 동방에는 청룡, 서방에는 백호, 남방에는 붉은빛을 띤 주작, 북방에는 흑색의 현무로서, 풍수지리설에서는 좌청룡, 우백화, 북현무, 남주작이라 하여 가장 중요한 방위 설정의 개념으로 삼고 있다. 이는 예로부터 왕도를 정 할 때 기본적인 요건이 되어 왔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상을 모시는 묘자리 설정의 기준이 되 고 있다. 나라에서 지내는 다섯 가지 의례인 오례의 의식에서도 모두 이러한 음양오행적 이치에 따랐다. 군례의 예를 보면, 진영의 각 위치에 따라 군기로서 대오방기를 사용하였다. 동쪽에는 청룡기 또 는 청색기, 서쪽에는 백호기 또는 백색기, 중앙에는 황색기, 남쪽에는 주작기 또는 적색기, 북쪽에 는 현무기 또는 흑색기를 세워 방위신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나라의 경사스런 예식인 가례 때에도 중앙에 황룡기(황색 바탕에 황룡을 그린 그림)를 비롯하 여 오른쪽에 백호기(흰 바탕에 흰 호랑이 그림)와 현무기(흑색 바탕에 현무 그림), 왼쪽에 청룡기 (청색 바탕에 청룡 그림)와 주작기(적색 바탕에 주작 그림) 그리고 홍문대기(적색 바탕에 청룡 그 림)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공간개념에 따른 색채 사용은 음양오행적 이치에 따라 적용되어 왔으며, 특히 국가적인 의례나 의식 때에는 이를 철저히 지켜 국가의 번창과 나라의 평안을 희구하였다. (2) 복식에 나타난 색 복식분야는 그 시대의 색채문화를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분야이다. 우리 민족이 평상복으로 흰옷을 즐겨 입으며 백의민적으로 대표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혼례 등 의 의식이 있을 때나 왕실복, 관복, 사대부가의 의복, 기타 특수작업(기생·무당 등)에 종사하는 이들의 복식에서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갖추어 입었다. 먼저 색의 기본인 오색 자체를 모두 사용한 경우가 많이 있다. 청, 적, 황, 백, 흑의 오색천을 이어 붙여서 만든 색동저고리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주로 돌이나 명절 때 어린아이에게 만들 어 입힌다. 또한 까치두루마기라 하여 섣달 그믐날 어린아이에게 오색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히는 데, 이 때도 양 팔을 색동으로 하였다. 이처럼 색동은 오행사상에 따른 오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이것이 제대로 시켜지는 예가 거의 드물다. 색도 3색에서 7색까지 다양하게 사용 되고 있으며, 색깔도 검은색을 빼고 자유롭게 쓰고 있다. 원래 색동을 사용한 의미는 음양오행에 따른 다섯 가지 색을 사용함으로써, 오행을 두루 갖추 어 사된 기운을 막고 어린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오색의 배치에 있어서도 오행을 상생하는 방향으로 나열하여 무궁한 발전을 기구해 왔다. 색동처럼 오색 을 계속 반속시키면서 이어 붙이는 것 외에도 오색을 이용한 복식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주머니 는 복을 받아들이고 간직한다고 하여 오색을 갖추어 만드는 것이 상례이다. 이 주머니를 '오방낭 자'라 하는데, 청, 적, 황, 백, 흑의 다섯가지 색 비단조각으로 만들어 만사평안을 비는 뜻을 담았 다. 정초가 되면 첫 해일에 오방낭자를 만들어 왕비가 직접 재상가의 어린이들에게 사송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악공과 무인의 의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악공들은 붉은 비단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소매가 큰 황색 옷에 붉은 비단띠를 둘렀으며, 통 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끈을 맸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무복에서도 음양오행설이 바탕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궁 중무용에 이르기까지 오행사상과 결부된 형식을 고수하였다. 조선시대 궁중무용인 정재무의 복식 역시 오색을 음양과 상생의 원리에 맞게 사용하여, 무용예술에 고유의 사상을 내포시켜 시각적인 조화와 나라의 무사평안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특히 신라의 처용무에 적용된 오행사상은 조선시 대 궁중무용의 창작 또는 개작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연희에 있어서 오광대놀이의 오방신장부 등은 오행사상에 의하여 개작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봉산가면극의 팔먹중이옷도 오색 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작품에 오색을 모두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복식에서는 갖추어 입는 옷, 장신구 등을 상호간의 음양오행 원리에 적합하게 배치하거나, 입는 사람의 위치나 입장에 따 라 적절히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왕복, 왕비복, 관복, 부인복, 아동복 등과 같이 누가 입게 되는가에 따른 대상별 종류와 혼례복, 평상복, 상복, 무복 등과 같이 언제 입게 되는가 에 따른 목적별 종류 등으로 그 범위와 대상이 매우 방대해진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복식에 있 어서 음양오행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개관하는 정도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 예만을 살 펴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의 선조들은 음양의 원리에 따라 몸의 상반신은 양이고 하반신은 음이라는 양상 음하 의 원칙을 복색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의정색 상간색'이라 하여 상의는 양에 해당하는 정색을, 하의는 음에 해당하는 간색을 즐겨 입었다. 또한 길례, 빈례, 가례와 같은 의식에서는 주로 정색 가운데서도 양의 기운이 강한 적색과 청색 이 사용되었으며, 흉례 때에는 북현서백의 음이 주가 되므로 백색과 흑색을 주로 사용하고 황색 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남자는 관례 때 청포를 입고, 혼례 때의 신부는 녹의홍상을 입었다. 반면, 문무관이 종묘 제례때 입는 흑단령은 검은색이며 상례때에는 백도포, 소복, 소혜(흰 신발)를 착용하였다. 이처럼 그 목적에 따라 음양오행의 이치에 합당하게 의복을 갖추어 입었다. 또한 연령에 따라 오행설을 적용하여 그에 따른 적절한 색의 옷을 입도록 하였다. 즉 자라나는 어린이는 생기와 번 성을 상징하는 녹색 계통의 옷을 입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고, 청장년층은 화기의 상징인 홍색 계통을 주로 입었으며, 노인층은 토기인 황색 계통과 금기인 백색 계통의 옷을 입었 다. 왕실과 조정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관리들이 복색을 품계에 따라 달리 정하여 전체적으 로 조화와 위계를 뚜렷이 하였다. 고려시대의 예를 보면 문관 4품 이상의 복색은 자색, 상참 6품 이상은 비색, 9품 이상은 녹색으로 정하였다. 이 때 자색은 화기의 간색이고 비색은 목기의 간색 이며 녹색은 수기의 간색이다. 이것은 수생목, 목생화로 하급관리가 차례로 상급관리를 도와주는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특히 유채색 중에서 신분이 높고 낮음을 표시하는 가장 큰 구별은 정색과 간색의 사용으로 나 타냈다. 중국에서는 최고통치자를 황제라 하여 천자의 색인 황색 곤룡포를 입을 수 있었지만, 우 리나라의 왕은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황색 곤룡포를 입을 수 없었다. 황색은 특히 신라시 대부터 황제의 색이라 하였는데, 조선 태조 5년에는 황색 옷을 입지 못한다는 금령을 내렸다. 이 에 따라 황색과 비슷한 색인 홍, 토홍, 황할색 등도 금액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또한 황제가 하례를 할 때 입는 예복인 강사포는 붉은 비단 바탕에 봉황의 황금색 무늬가 그려 진 도포이다. 이 때 왕은 도포의 색이 주홍색인 점이 다르다. 치성하는 화덕을 본받아 나라를 다 스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천자가 정색을 쓰는 반면 왕은 간색을 사용하여 차이점을 표시한 것이다. 한편, 혼례 때 신부복이자 부인들의 가례복인 녹의홍상은 모두 오행의 상생과 깊은 관계가 있 다. 녹색은 동방 목기에 속하며 붉은색은 남방 화기에 속하므로 목과 화가 상생이 되며 장수하고 부귀가 충만하도록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3) 단청과 식생활에 나타난 색 이 외에도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색을 선택, 사용한 예는 생활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색과 무늬로 채색 장식을 하는 '단청'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가 장 오래된 단청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 등이 그려져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로 추정 되고 있다. 단청의 목적은 건물의 보존과 장식은 물론 외부를 가꾸어 장업의 표현으로 시각적 효 과를 얻는 데 있다. 대궐이나 사찰 등에서 채문하여 건물을 돋보이게 하고 장엄한 장식을 베풀어 화려하고 엄숙한 권위를 상징하게 된다. 이 때 오채 : 오색)를 기본으로 하여 장식하였다.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화려한 진채와 화식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은 건축물에도 상승계 급에서만 진채와 화식을 사용하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진골의 사가 이상의 건물에 오채를 베풀었 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와서는 일반 서민주택의 단청을 엄격하게 규제하여 왕궁과 사찰에서 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식생활에서는 음양의 원리에 따라 사된 것을 물리치는 양의 색, 즉 벽사의 색으로 붉은색을 사 용한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때 벽사의 의미로 사용되는 재료로는 고추, 팥, 대추, 수수 등이 사용된다. 또한 잔칫상에 올려지는 국수는 대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 국수 위에 오색으로 된 고명을 얹어 오행에 순응하는 기복의 의미를 더하였다. 여기에서 고명에 사용되는 다섯 가지 색의 재료를 살펴보면, 청색에는 미나리, 실파, 쑥갓, 오이 등이, 적색에는 실고추, 다호고추, 당근이, 황색에는 달걀 노른자, 흰색에는 달걀 흰자, 흑색에는 표고버섯, 목이버섯, 쇠고기 등이 해당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색을 사용할 때 많은 경우에 있어 시각적인 이미지보 다는 음양오행에 따른 관념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정과 사대부가, 그리고 민간인들에 있어서도 관혼상제 등과 같이 의례나 제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음양의 조화 와 오행의 상생에 적합한 색 사용이 제도화, 관례화되어 있다. 색채 사용에 있어 보다 시각적인 이미지에 충실하게 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옛 선조들이 이러한 관념적인 색채를 추구하게 된 의미를 되새겨 보고 거기에 담겨진 소망과 염원을 간직하게 되었으 면 하는 바람이다. 제3장 꽃 1. 꽃과 상징 1) 미와 영화의 상징 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사랑과 찬사를 받아 온 자연물 주의 하나이다. 종류에 크게 구애됨이 없이 모든 꽃은 아름다운 색과 자태, 그윽 한 향기로 인하여 그 존재의 신비스러움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윤택하게 만들어 왔다. 만원버스에 시달린 뒤 여유 없는 마음으로 바쁜 걸음을 걷는 출근길. 문득 한아름의 꽃을 안은 밝은 소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미소를 짓게 되는 여유를 느낄 것이 다. 꽃에 대한 이러한 느낌과 정서는, 동.서양은 물론 고대 원시사회나 현대에 있어서도 같은 맥 락으로 이어지는 미에 대한 추구 본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온대지방에 사는 우리 민족은 긴 겨 울이 지나 봄이 되어 꽃이 피는 즐거움을 크게 나누었으며, 평화를 사랑하고 풍류를 즐겨 봄, 여 름, 가을, 겨울 각 계절의 꽃을 다투어 노래하였다. 따라서 꽃은 아름다움, 화려함, 번영, 영화로움 등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아름다운 여자나 좋은 일, 영화로운 일에 비유하여 어여쁜 여자의 얼굴을 화용, 화한이라 하고, '꽃 같은 시 절'이라 해서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시기를 일컫기도 한다. 또한 경사스럽고 번영한 일이 있을 때 에는 '그 집안에 꽃이 피었다', '웃음꽃이 핀다'하였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어사화를 내 려 영화로움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오랜 옛날부터 구애, 숭배, 존경, 친애의 표시, 위문, 축하의 마 음 등을 전하고자 할때 가장 즐겨 꽃이 선택되었고, 장례행렬에도 상여를 꽃으로 장식하여 저승 길의 안녕과 극락왕색을 빌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를 두고 있으며, 교화, 사화 등 한 집단을 상징하는 역할에 꽃을 사용하여 그 품격과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꽃 재배에 관한 첫 기록으로, 〈동사강목〉에 백제 진사왕 때인 390년 궁실에 연못 을 파고 동산을 만들어 여러 종류의 꽃을 많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 꽃을 심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자연 속에 만발한 꽃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숭배하는 대상에게 바치거나 가까이 두고 보려는 마음에서 꽃을 꺽어 그릇에 꽂는 적극적인 행위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꽂꽂 이'는 삼국시대부터 벽화나 문양 등에서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한편, 우리 선조들은 꽃에도 품계나 등수를 매겼는데, 이 때는 꽃의 아름다움보다 꽃이 지닌 상 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가 결정되었다. 강희안은 뛰어난 운치나 절개를 의미하는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를 1등으로 다루었다. 부귀를 의미하는 모란, 작약, 왜홍, 해류, 파초를 2등, 운치가 있는 치자, 동백, 사계화, 종려, 만년송을 3 등, 역시 운치가 있는 화리, 소철, 서향화, 포도, 귤을 4등, 번화한 석류, 도화, 해당화, 장미, 수양 버들을 5등, 역시 번화한 진달래, 살구, 백일홍, 감,오동을 6등, 그 이하는 각각 장점을 취하여 배, 정향, 목련, 앵도, 단풍을 7등, 무궁화, 석죽, 옥잠화, 봉선화, 두충을 8등, 해바라기, 전추라, 금전 화, 석창포, 화양목을 9등으로 분류하였다. 또한 소나무, 대나무, 연꽃, 국화는 1품, 모란은 2품, 사계화, 월계, 왜철쭉, 영산홍, 진송, 석류, 벽오동은 3품, 작약, 서향화, 노송, 단풍, 수양버들, 동백은 4품, 치자, 해당화, 장미, 홍도, 벽도, 삼 색도, 백두견, 파초, 전춘라, 금전화는 5품, 백일홍, 홍철쭉, 홍두견, 두충은 6품, 이화, 행화, 보장 화, 정향, 목련은 7품, 촉규화, 산단화, 옥매, 출장화, 백유화는 8품, 옥잠화, 불등화, 연교화, 초국 화, 석죽화, 앵속각, 계관화, 무궁화는 9품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꽃은 아름다움과 영화로움, 화려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자연물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 으며 생활전반에 걸쳐 직접, 간접적으로 즐겨 애용되었다. 숭배, 존경, 사랑, 친애의 표시로 전달 되는 매개물에서부터 각종 생활도구와 공예품 등에 길상을 나타내는 존재로 시문되었고, 미술, 음 악, 문학작품 등에 가장 즐겨 등장하는 소재 중의 하나의 애용되었다. 이러한 예술작품에서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 중 하나이면서도 이내 시들어 지고 마는 꽃 의 속성이 인간의 삶, 특히 젊음과 비유되어 비장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즐겨 쓰이기도 한다. 2) 불교와 꽃 불교는 꽃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무소유, 무욕을 이상으로 삼는 승려들은 기운 옷에 일체의 사치를 금한 거처에서 생활을 한다. 그러나 법당, 불단, 탑, 석등 등 부처님의 세계를 묘사한 각종 건축물과 조각품은 더없이 화려하고 장엄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는 단순히 부처님에 대한 경배와 외경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세계, 법(진 리)을 깨우친 불국정토의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번뇌가 없는 상락아정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법당의 천장, 대들보, 불단 등에는 하늘을 나는 용과 극락조, 아름다움 연꽃 과 길상을 상징하는 갖가지 꽃문양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의 종이나 불벽에는 연꽃방석 에 않아 긴천의를 너울거리며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천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천상에서 비파와 장고를 연주하며 주악공양을 하는 비천도 있고, 꽃을 뿌리며 산화공양을 하는 비천도 있 다. 이들은 모두 법희선열의 환희로운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께서 영취산에 있으면서 설법을 하던 어느 해 영산회상에서의 일이다. 법좌에 오른 석존은 말없이 대중을 둘러보신 후에 조용히 꽃 한송이를 들어보였다. 감로수와 같은 법문을 듣기 위해 갈망하고 있던 모든 대중은,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이 어리 둥절해 하며 연꽃을 든 석존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 때 대중 가운데 마하가섭만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존은 여러 대중을 향해 가섭에게 법을 전수할 것을 알렸다. 가섭은 범위 눈을 떠 석존의 뜻을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꽃을 들어 대중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뜻을 마음으로 통하여 미소한 가섭. 이에 따라 후세 사람 들은 마음올 전하여 통하는 것을 '염화시중의 미소', '이심전심'이라 하여 즐겨 사용하게 된 것이 다. 한편,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향과 꽃을 올리는 향화공양이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부처님을 모 시는 불단 주위에는 향로와 함께 꽃병이 놓여졌으며, 꽃병에 꽃을 꽂고, 향로에 향을 피워 불전에 바쳤던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바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병에 꽃을 꽂는 일, 즉 꽂꽂이에 관한 글을 처음 남 긴 이는 신라의 명승 지장법사이다. 그는 13세 때 당나라에 가 지양현의 구화산 화성사에서 고행, 수도하였다. 그 때 데리고 있던 동자가 부모님을 뵈러 곁을 떠나자, 쓸쓸한 심정을 읊은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시내에 뜬 달은 볼 생각도 않고 병에는 꽃꽂이도 않는구나. 이로 미루어 보면 동자가 평소에 지장을 위해 차를 끓여 드리고 난 후 틈이 나면 꽃을 꺾어 병 에 꽂아 스님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동자가 산 아래로 내려가자 빈 꽃병을 보며 쓸쓸함을 읊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고분벽화와 막새기와 등에는 병이나 수반에 꽂힌 꽃그림이 나타나 있으며, 고 구려의 안악 2호분 가운데 선녀비천상 벽화에는 수반에 연꽃을 꽂은 그림이 있다. 따라서 삼국시 대에는 이미 향화공양이 이루어져 불가에서 꽂꽂이가 성행하였으며, 사찰의 각종 장식문양에 주 된 소재로 꽃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꽃꽂이의 역사를 언급할 때도 불가에서 성행한 꽃공양이 점차 민가의 방안 장식품으로 자리잡 게 된 것이라 보는 설이 지배적이다. 고려시대에는 석가탄신일을 음력 4월 8일이며 불상의 몸을 씻기는 행사인 관불회를 거행하였 다. 이 때 여러 가지 꽃으로 꾸민 화정, 또는 화어당을 짓고, 그 안에 탄생불상을 모신 뒤 향탕이 나 감차를 불상에 뿌렸다. 이는 석존 탄생시에 향수로 몸을 씻었다는 인연에 따라 큰 성인의 출 세를 축하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화정을 본받아 고려의 귀족들은 집 안방에 작은 당을 마련, 석가상을 안치하고 꽃을 병에 꽂아 놓은 뒤 믿음의 무아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꽃 중에서도 불교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것으로는 연꽃을 들 수 있으며, 우담바라화는 3천 년 만에 한번 피는 꽃이라 하여 아주 희귀하고 어려운 완성에 비유, 불교설화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 다. 2. 연꽃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연꽃의 자태와 특성은 불교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연꽃을 통하여 오묘한 불법을 펼치기도 한다. 이처럼 불교를 대표, 상징하는 꽃으로서의 연꽃을 살펴보기 전에, 연꽃의 일반적인 특성과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1) 연꽃의 일반적 특성 연꽃이 피는 장소는 못 속의 진흙과 흙탕물이다. 물과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물에 젖지 않고 흙에 더렵혀지지 않은 채 깨끗하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 연꽃이다. 이러한 연꼿의 세속을 초 월한 듯한 청아함과 고결한 모습으로 인해 유가에서는 연꽃을 일컬어 꽃 중의 군자, '화중군자'라 부른다.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다음과 같이 연꽃을 노래하였다. 내가 오직 연을 사랑함에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 며, 속이 소통하고 밖이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음이다.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 깨끗이 서 있는 품은 멀리서 볼 것이요, 다붓하여 구경하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연은 꽃 가운 데 군자라 한다. 또한 강희안이 꽃에 매긴 품계에서도 연꽃은 단연 1등 또는 1품으로서 그 뛰어남과 높은 품격 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은 밤에는 꽃잎을 오무렸다가 아침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태양 과 함께 피고 태양과 함께 지는 까닭에,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태양숭배사상에 의해 연꽃을 소중하게 여겨 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해가 떠서 빛을 비추면 만물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며, 그 빛을 거두면 어둠 속에서 생명이 잠든다. 따라서 소박한 토속신앙은 태 양과 관련된 연꽃 역시 재생을 상징하고 내세의 무량한 생명을 준다고 연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게 하는 예로써 고전소설 (심청전)을 들 수 있다. 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임당수에 몸을 던졌다가, 청이의 갸륵한 마음에 감복한 용왕님에 의해 환생하게 된다. 이 때 연꽃이 등장하여, 그 속에서 심청이 다시 살아나오게 되는 것이다. 연꽃이 재생과 부활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로는 꽃상여의 장식으로 연꽃 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연꽃속에서 무량한 생명을 받아 좋은 세상에 태어나라는 의미 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잔치상을 장식하는 종이 연꽃도 태양의 불멸을 상징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음력 섣달 그믐날 밤 공중에서 잡귀를 쫓기 위한 나례가 베풀어졌다. 이 때 추는 춤의 내용을 보면, 학 모양으로 꾸민 두 젊은이가 춤을 추며 나와서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연꽃 봉우리를 활로 쏜다. 그러면 연꽃이 열리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 서로 엇갈려 가며 춤을 춘다. 이는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연꽃을 결부시켜, 새해를 앞두고 장수와 번영을 염원 하기 위한 춤이라 할 수 있다. 연꽃은 도교에서도 매우 귀중하게 취급하는 꽃이다. 연꽃은 도교의 8선인중 한 사람인 하선고 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선고는 열매가 달린 연꽃줄기를 들고 있는 도상으로 그려진다. 우리나라에서 연꽃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삼국시대의 고분벽 화나 탑, 불화 등에서 연꽃이 장업의 주종을 이루었음을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건축물이 나 공예품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생활도구와 관혼상제 등의 의식용구에 이르기까지 연꽃의 장식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불교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승화되어 불교를 생활화한 데서도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연꽃이 지닌 청아함과 영생, 장수를 상징하는 특성으로 인 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보통 식물은 꽃이 먼저 피고 진 후에 열매가 맺히는데,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장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에 따라 민화에서는 화병에 커다란 연꽃을 꽂은 그림을 즐 겨 그렸다. 이는 연꽃이 꽃과 열매가 동시에 성장하므로, 빠른 시일 내에 아들을 연이어 얻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또한 연밥에 촘촘히 박힌 씨앗이 다남을 상징한다는 뜻과 함께, 연꽃의 '연'자가 연이어서 태어난다는 연생의 '연'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이 점을 인용하여 연생귀자라는 뜻으로 새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연꽃은 꽃 중의 군자로서,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사랑과 아낌을 받 아 왔음을 알 수 있다. 2) 불교의 상징 연꽃은 그 상징하는 바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연꽃이 지니고 있는 불성을 꽃의 특성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흙과 흙탕물 속에서 맑고 깨끗한 꽃을 피워낸다. 연꽃은 혼탁한 환경에 몸을 담고 있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자신의 청정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 다. 이는 세속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과 다생의 윤회 속인 혼탁한 세상에 처하였다 하더 라도,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본래의 자성을 물들지 않고 늘 청정하다는 불교의 기본교리에 비유 된다. (2)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개화하는 것이다. 다른 식물들은 꽃이 피어 성숙한 뒤 암수가 연결되 어야 열매를 맺게 되지만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겨난다. 이는 모든 중생이 태어남과 동시 에 불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성불, 즉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기본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헛된 꽃, 헛된 존재는 있을 수가 없다. 또한 「법화경」에서는, 연꽃의 꽃은 수단을 위한 방편교를 나타내고 열매는 석가여래께서 세 상에 나오신 본 뜻을 의미한다고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석존께서 권법을 설함은 실법의 방편을 설하고자 한 것으로 꽃이 열매를 위하여 피는 것과 같고, 또한 실법이 나타나면 실법 이외에 권 법이 없고 모두 실이 되는데, 이는 열매가 성취되면 꽃이 떨어짐과 같다. 그런데 연꽃은 반드시 꽃과 열매가 동시에 있으므로 일승(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견지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이 하 나뿐이며 절대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법)의 인과가 동시에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아름다움에 고상함과 기품이 있다. 연꽃은 다른 꽃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수려함과 고결한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 이는 세속을 초월한 깨달은 경지, 완성과 원만의 경지를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여인에 견주기보다는 세속을 초월한 선인, 원만의 경지에 이른 부처님이나 보살의 넉넉하고 청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연꽃은 불교의 깊은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 께 올리는 육공양물인 꽃, 향, 초, 탕, 과일, 차 중 꽃공양이 으뜸인데 그 중에서도 연꽃 공양을 제일로 치고 있다. 연꽃에 담겨진 여러 가지 의미를 대입하여 경전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으니, 이를 「묘법연화경」, 줄여서 「법화경」이라 한다. 불가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에는 연꽃의 '연'자를 넣어 만든 말이 많이 있다. 극락정토의 성중들 이 연화지에 모여 법을 듣는 것을 '연화회'라 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일종의 법회의식을 그렇게 칭 하기도 한다. 스님이 입는 가사를 '연화의'라 하고, 두 손의 열 손가락을 세워 손가락과 손바닥을 함께 합치는 최초의 합장행법을 '연화합장'이라 한다. 불가에서의 열 가지 즐거움, 즉 십락의 하나인 '연화초개락'은 연꽃에 싸여 극락세계에 왕생한 수행자가 그 연꽃이 처음 필 적에는 마치 소경이 처음으로 눈을 뜨는 것같이 기쁘기가 한량없음 을 나타낸다. 이에 더하여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의 세계를 '연화장세계'라 하였다. 곧, 향내 나는 큰 바다 위의 연꽃 속에 갖추어진 세계라 하였으니, 꽃에 대한 이보다 더한 높임은 없을 것 이다.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한 석가모니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 가지 떼어놓는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한 흰 연꽃인 분다리는 부처님을 뜻하고, 푸 른 연꽃은 우발라는 부처님의 눈, 붉은 연꽃인 파두마는 부처님의 손과 발을 나타내기도 한다. 연 꽃의 봉우리는 청정을, 활짝 핀 꽃은 기쁨과 성불을, 연밥이 드러난, 지는 꽃은 진리를 상징한다. 이처럼 연꽃은 부처님의 세계, 극락의 세계를 나타낼 때 가장 적절한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다. 활짝 핀 연꽃자리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뒤에는 온갖 꽃으로 꾸며진 광배를 두르며, 양옆에는 꽃 관을 쓴 아름다운 보살을 내세운다. 바로 한 무더기의 꽃으로 부처의 자리가 이루어져 있다. 따라 서 부처를 모신 집은 곧 화원이며 그 세계가 또한 꽃누리, 연화장세계인 것이다. 한 송이의 연꽃처럼 꾸며진 법당을 비롯하여, 사찰의 곳곳에는 연꽃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 거 의 없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 불국사를 살펴보자. 절 앞에는 연못 구품연화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를 건너 연화, 칠보교를 오르면 바로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에 이르게 된다. 또 한 부처님의 좌대, 석등의 상대석과 하대석은 연꽃 자체의 모양을 일어 있고, 종, 벽화, 단청, 문 살에도 연꽃을 담고, 등을 만들어도 연등을 만들었으니, 연꽃은 가히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연꽃은 우리 모두가 부처임을 나타내는 꽃이다. 모든 중생이 청정한 자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꽃이다. 불교의 대의를 함축하고 있는 꽃. 연꽃은 실로 부처님의 진의를 그대로 담고 있 는 진리의 꽃, 법의 꽃이라 할 수 있다. 3. 무궁화 1) 나라꽃과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국화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국화를 두고 있다. 국 화가 정해지는 것은 법으로 공식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깊은 관련을 가진 꽃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면 수십, 수백 가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중에서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옛날부터 선조들은 매, 난, 국, 죽 사군자의 기품과 절개를 아껴 왔고 모란, 이화 의 영화로움과 화려함을 즐겨 애송하였으며, 진달래, 봉숭아 등에 우리네의 정서를 담아 왔다. 이 처럼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시로 노래되고 그림으로 장식외어 온 여러 꽃들을 생각하면, 문 득 역으로 무궁화가 왜 국화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 실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하나의 기정사실로만 받아들일 뿐 의문조차 품지 않 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일단 뒤로 미루고, '국화와 무궁화'의 현상학적인 측면 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진 역사적 시점은 개화기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화 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고증은 있을 수 없으나, 대체로 이에 의견의 일치 를 보고 있다. 문호개방 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 여러 나라들이 그들 왕실의 문장, 훈 장, 화폐 등에 사용한 국화를 접하게 되자, 어떤 이유로든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나라를 대표하 고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잡고 있던 무궁화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 이다. 그 뒤 무궁화는 민족의 상징이 되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여 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채택된 애국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 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국화로서의 인정을 얻게 된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무궁화가 국화로 적합한가에 관한 시비는 195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상논 쟁까지 벌이며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자격이 평가, 재검토되어 왔다.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대 표하는 꽃, 국화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 나라의 국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는 1. 국토 전역에 분포하는 꽃, 2. 우리나라 원산종 으로 민족을 상징할 수 있는 꽃, 3. 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한 꽃, 4. 이름과 모양이 모두 아름 다운 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에 비추어볼 때 무궁화는 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하며, 둘째 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며,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며, 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점 등으로 인해 국화로서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국화는 그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꽃이 있다면 충 분히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가 현재의 무궁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궁화에 대해서 충분히 안 다음 위에서 말한 부적합한 사유들 이 타당한 것인지에 관해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한 나라의 국화 는 단순한 꽃으로서만 평가될 수 없으며, 이면에 간직된 깊은 뜻과 정신을 함께 보아야 하기 때 문이다. 2)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동양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군자국 ... 유훈화초조생춘사'라 하여, 군자의 나라 에 훈화초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국은 우리나라, 훈화초는 무궁화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훈화초, 목근, 순영, 순화, 조개모락화, 번리초 등으로 칭하였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 것은 2천 년이 훨씬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에 인용한 고금주에는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라 하여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는 것을 예찬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근역' 또는 '근화향'이라 불러 왔다. 신 라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일컬음)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하였고, 「구당서」(737년: 성덕왕 36년) 신라전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 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 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 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도 스스로 근역, 근화향, 근원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근역'은 무궁화가 많 은 땅,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무궁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규모의 글 중 에, 친구 두 사람이 근화를 일컬어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 하고 또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고 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무궁화', '무궁화', '무궁화' 등으로 쓰이다 가 조선말경에 현재의 '무궁화'로 정착되었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 우리말에 유사한 한자음을 따서 사용해 오다가 뜻이 좋은 무궁화로 통일되어 쓰여진 것이라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이라 불렀다 한다... 속명 무궁화라 한다. 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화(오얏꽃)를 왕실화로 삼았으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 는 어사화는 무궁화로 사용하였다. 또한 임금을 모신 가운데 베풀어지는 연회에 신하들이 사모에 무궁화를 꽂았는데, 이를 진찬화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노라면, 막연히 근대 이후부터 민족의 꽃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라는 무 궁화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무궁화가 본격적인 국화로 등장,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는 개화기이다. 당시 윤치호, 남궁억 등 선각자들은 민족의 자존을 높이고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나라꽃으로 무궁화를 결의 하였다. 당시에 만들어진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없이 표현된 것 도 무궁화가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인연을 맺어 온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계속된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민족정신을 상징하고 대표 하는 존재로서 민족의 가슴에 심어져 왔다. 국권이 상실되던 해 9월 애국지사 황현(1855-1910년) 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슬픔에 젖었네. 무궁화 이 강산이 이젠 침몰되어 버렸네. 또한 김좌진 장군은 '삼천리 무궁화 땅에 왜놈이 웬일인가'라고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원하였다. 이 땅의 여인들은 우리나라의 지도 위에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송이의 무궁화를 수놓으며 광복 의 그 날까지 민족정신을 심어 나갔다. 특히 남궁억은 무궁화를 통해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확산시키고자 '무궁화동산 꾸미기'운동을 전개하였다. 전 강토에 민족정신의 상징인 무궁화를 심어 무궁화 삼천리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을 확산, 고향인 홍천에다 무궁화밭을 가꾸어 해마다 수십만 그루씩 각 지방의 학교, 교회, 사회단체 에 공급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반일적 사상의 발로라 하여, 1933년 이른바 '무궁화사건'이란 이름으로 체포하여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일제는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민족지도자들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조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하고,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흉계를 꾸몄다. 그들은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 경멸하여 격하시켰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느니 심지어 '눈이 먼다'고 까지 하여 멀리 피하여 가도록 가르쳤다. 이것으로 도 부족하여 국화말살정책을 강행, 무궁화를 심지 못함은 물론 심어진 무궁화를 모두 캐내도록 하고 무궁화를 캐어낸 자리에는 사꾸라를 심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혼을 뿌리채 말살하 고 일본인화하겠다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근세의 명수필가로 알려진 김소운은 광복 후 일본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 꾸라는 내용의 서간체 연재수필을 썼는데, 제목을 「목근통신」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그대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 되어 왔으며, 그 줄기찬 화기는 민족의 줄기찬 불굴의 정신과 연관시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왔다. 그 뒤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다. 광복후 채 일어서기도 전에 6.25로 민족의 비운을 맞았다. 전쟁 이 끝난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전진만을 계속하여 왔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꽃,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꽃. 여기에는 온 국민이 관심과 의견을 제시할 권리와 필요가 있다. 이제 무궁화가 가지는 꽃 자체로서의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3) 꽃으로서의 무궁화 (1) 인생과 역사를 상징하는 꽃 무궁화는 이른 새벽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서 오므라들기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진다.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은 그의 시구에서 “무궁화는 하루 동안 스스로의 영화를 이룬다 ”고 하였다. 이처럼 무궁화는 날마다 새로 피고 반드시 그 날로 지고 만다. 그러나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 적으로 피어,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백여일 동일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의 특징이다. 무궁화의 화기가 짧다거나, 위에서 말한 백낙천의 시구절 등은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두고 말하 는 것이지 나무의 화기를 말한 것은 아니다. 화기를 두고 볼 때에 가장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 이 무궁화이다. 하루에 보통 작은 나무는 20여 송이, 큰 나무는 50여 송이의 꽃이 피므로 100여 일 동안 피운 꽃을 합하면 한 해에 2천에서 5천여 송이의 꽃을 피우는 셈이니, 다른 화목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특유한 개화습성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른 새벽 태양과 함께 피어나 태양과 함께 지는 무궁화. 그날의 태양은 졌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매일 새롭게 꽃을 피우는 무궁화. 무궁화는 태양 과 일맥상통하는, 태양과 운명을 같이 하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궁화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생과 역사를 상징하는 철학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 다. 유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람의 일생은 짧기가 그지없다. 오늘의 꽃이 최선을 다하여 피고 지면 다음날, 또 다음날을 연이어 새로운 꽃들이 대를 잇는다. 마치 한 인간의 삶은 짧지만 민족 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듯이... 또한 무궁화는 질 때에 뒤가 어지럽지 않고 조촐한 끝맺음을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질 때는 색이 바래면서 꽃잎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지저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무궁화는 봉 오리처럼 곱게 도로 오므라져 송이채 꼭지가 빠지면서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세상에 태어 나 활짝 꽃을 피운 뒤 깨끗하게 끝맺음을 할 수 있는 삶. 우리는 무궁화를 통해 인생의 철학, 역 사의 진리를 다시금 느껴볼 수 있다. 정인보의 시조 「근화사삼첩」은 무궁화를 노래한 3수의 시조이다. 신시로 내린 우로 꽃 점진들 없을쏘냐? 왕검성 첫 봄빛에 피라시니 무궁화를 지금도 너 돋 대하면 그제런 듯하여라.
저 뫼는 높고 높고 저 가람은 예고 예고 피고 또 피오시니 번으로써 세오리까? 천만년 무궁화 빛을 길이 뵐까 하노라.
담우숙 유한코나 모여 핀 양 의초롭다. 태평연월이 둥두렷이 돌아올 제 옛 향기 일시에 피니 강산 화려하여라.
이 시조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울 때 겨레의 영원한 표상으로 나라꽃 무궁화를 점지하셨으며, 우리나라의 태고적 자연과 함께 변함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의 정신을 찬양하고, 무궁화의 그윽한 자태와 향기 속에 영광스럽고 평화로운 겨레의 미래의 노래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사라져 갈지라도 새로 살아나고 자라나서 길이 무궁한 빛으로 역사를 이어 가는 우리 겨레, 이 모든 겨레의 힘으로 또한 무궁히 뻗어나갈 우리나라. 무궁화는 유구한 역사와 관계를 그대로 표출시킨 꽃이다. (2) 순결과 정열의 꽃 무궁화는 화려하거나 요염하지 않고 짙은 향기도 없다. 여성적이기보다는 중성적인 꽃이다. 품 종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이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흰색의 꽃잎에 화심 깊숙이 붉은색이 자리잡은 단심 무궁화가 손꼽히고 있다. 그 깨끗한 흰 꽃잎과 깊숙이 또렷하게 자리잡은 붉은색 심문은, 가슴 속에 열정을 간진한 순결 한 영혼을 연상하게 한다. 마치 먼 옛날 심신유곡을 찾아다니며 영혼을 맑게 하고 가슴의 뜻을 가지던 화랑도의 무리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달빛 아래서 손에 손을 잡고 긴 댕기를 휘날리며 끝없이 강강수월래를 하던 이 땅의 순결한 처녀들인 듯... 조지훈은, “희디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주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러워하는 삶” 이라 하였다. 이러한 무궁화의 순결한 일편단심을 잘 나타낸 설화가 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곱고 글 과 노래를 잘하여 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구애하여 왔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앞을 못 보는 남편이 있었고 그녀는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였으므로,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은 사람이 유혹을 해도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인을 탐내 오던 고을의 성주는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그 녀의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음을 보고 강제로 여인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끝까지 명령에 굴 하지 않자 성급한 성주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여인의 목을 자르고 말았다. 여인은 죽으면서 자 신의 시체를 집뜰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여, 소경 남편이 있는 집 뜰에 묻어 주었다. 묻은 자리 에서 싹이 돋고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은 삽시간에 그 집 뜰 안을 둘러싸고 말았다. 마치 남편을 보호하여 품안에 감싸안은 울타리처럼. 그 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번리화(무궁화의 별칭)’, 즉 ‘울타리꽃’이라 불렀다. 한편, 중국의 「시경」에는, ‘안여순화’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 마치 무궁화 와 같다는 뜻이다. 이어 시선 이백은, 함초롬히 피어난 섬돌 옆의 무궁화 온 동산 다 살펴도 이 꽃에 견줄 것이 없구려.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는 무궁화를 이상향인 샤론의 장미, ‘ROSE OF SHARON’이라 하여 꽃 중의 꽃이라 칭송하고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궁화의 고아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으나, 정작 오 늘을 사는 우리들은 화려하고 눈에 띄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취하여 무궁화의 참된 아름다움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3) 나라꽃으로 부적합한 이유에 대한 변 앞에서 무궁화가 국화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측의 이유를 살펴본 바 있다. 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1950-1960년대의 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보고된 것으로, 그 뒤 오랜 연구를 거쳐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 바 있다. 유달영 박사는 함경도 등에 무궁화가 없는 것은 단지 심어 가꾸지 않은 까닭이며, 무궁화는 어 느 땅에서도 잘 자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번식이 되는 강인한 꽃이라 하였다. 임채욱 선생은 이 점과 관련하여 무궁화를 보지 못한 북한사람들에게는 ‘무궁화 삼천리’가 넌센스가 된다는 의견은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로 오늘의 북한에서 도 무궁화가 잘 알려져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 1983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음악제 ‘아시아음악 연단’에서 「무궁화 3형제」라는 노래가 공연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궁화 꽃수건」이라는 가 극도 있으며, 의식행사 때 단상을 장식하던 꽃도 무궁화였고 소련인이 무궁화를 대한민국의 국화 로 보기보다는 분단 이전의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꽃으로 인식하고, 그 상징성을 자기들도 공유하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까지 분단상황을 떠나 겨레의 상징성으로 공유되고 있는 무궁화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역시 역사적 기록과 고증을 통 하여 잘못된 것임을 밝혀진 바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에서 살펴보았듯이,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토양에 맞아 2천여 년 이상의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 자생하여온 꽃이다. 식물학계에 서는, 무궁화의 원산지가 학명으로 미루어 시리아라고 해석되어 왔으나, 이에 대해 점차 의문이 제기되고 최근에는 인도, 중국, 한국 지방이 원산지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다는 점이다. 무궁화에는 진딧물이 많은 것이 사실이 다. 그러나 계속된 육종으로 최근 진딧물 없는 무궁화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사실 난이나 장미 같 은 꽃은 까다롭다 하여 어린아이 돌보듯 온갖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만, 무궁화는 세인의 관심 은커녕 화단에서도 밀려나 관공서, 학교의 담곁에 묵묵히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단명허세 하다는 평은 같은 현상을 놓고 나쁜 쪽으로만 본 극단론이다. 그것이 오히려 무궁화를 무궁화답 게 하는, 우리 민족의 꽃으로서의 특성 중 하나임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점이다. 무궁화가 늦게 꽃이 핀다고 불평하 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늦게 꽃이 핀다고 하여 그것이 어찌 흠이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묵묵 히 때를 기다려 다른 꽃들이 하나 둘 지고 난 다음,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줄기차게 피어나 는 무궁화야말로 우리 민족성의 강인함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무궁화는 계절상 늦게 피지만 가장 부지런한 꽃이기도 하다. 흔히들 새벽 5시경에 피어나는 나팔꽃을 부지런하다고 하지만, 무 궁화는 이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운다. (4) 나라꽃 무궁화 이제까지의 글에서 혹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갖거나, 다른 적합한 꽃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일가 견을 가진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관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장 적합한 말이 있다. “무궁화는 육안으로 보기보다는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 윤극영 선생의 말이 다. 꽃만을 보기보다는 그 속에 담겨져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정신과 역사, 그리고 도도히 흐르는 배달겨레의 맥락을 보아야 된다는 뜻의 이말은 오늘 우리가 새롭게 되새겨야 할 말이 아니겠는 가. 우리는 이처럼 우리 민족의 깊은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온 무궁화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해 왔 고 자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느 민족의 꽃이 무궁화와 우리나라만큼 깊은 유대관계로 맺어져 있겠는가. 멕시코의 선인장, 그리스의 올리브, 캐나다의 단풍 등은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나라의 상징으로 그 국민이나 외국인이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 스코틀랜드 같은 나라에서 는 애국주의적인 전설 하나 때문에 엉겅퀴 같은 독특한 꽃을 국화로 사랑하고 있다. 즉 중세기 덴마크 군대가 침략했을 때 스코틀랜드의 엉겅퀴 숲에 매복하였다가 그 가시에 찔려 패퇴한 유래 하나만으로도 지역과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웃 일본도 어떠한가. 일본은 그들이 아시아를 재패할 때 발길이 닿는 곳마다 제일 먼저 벚꽃 을 심었다. 일본은 그네들의 국화인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닌다. 벚꽃의 특성과 일본인의 기질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중학생 정도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 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는 무엇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임을 말할 수 있는지, 여기에 대해 자신있 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될까? 오히려 일제 때 왜곡된 무궁화에 대한 인식이 무의식 중에 전 해 내려와, 무궁화를 하찮게 취급한 적도 없지 않으리라.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꽃이다. 오랜 역사를 두고 그러한 위치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끊임없이 꽃을 피워 온 무궁화. 우리가 잠시 그 존재와 의미를 망각했다 하더라도, 무궁화는 늘 그대로의 의미와 상징성을 간직한 채 우리의 곁에서 오늘도 묵묵히 꽃을 피우고 있 다.
4. 사군자 1) 사군자의 의미와 기원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많은 꽃과 식물 중에 서 특별히 이들을 선택하여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의 인품에 비유, 군자라 하였다. 그 까닭은 매 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이 높은 기상과 품격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매화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난초는 깊은 산 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늦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 우고, 대나무는 모든 식물이 잎을 떨어뜨린 추울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은 간직하고 있다. 매, 난, 국, 죽의 순서는 각각이 꽃피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모든 식물이 두려워하는 추위를 이겨 찬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꽃을 피우고 푸르름을 더하는 매화, 국화, 대나무와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고히 향기를 뿜어내는 난의 기상 을 위한 것이다. 특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던 유교사회에서는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사군자가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즉 사군 자를 통하여 변함없는 뜻과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 였던 것이다.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화목 이다. 사군자라는 총칭으로 일컬어지기 이전부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시문과 그림에서 각 각의 기상을 취해 즐겨 다루어졌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 묵화의 소재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 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선 시기에 시문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최초로 대나무가 「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 며, 대나무와 함께 매, 난, 국은 화조화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960-1126년) 때에 와 서 여러 가지 고사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 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대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화목으로 등장하였다. 남송(1127-1279년) 말기부터 원대(1279-1368년)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 둔생활을 하는 한족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 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명대(1368-1644년)에 들어와서 이들 매, 난, 국, 죽 특유의 장점을 유교적 덕목과 관련시 켜 칭송하는 문화적 전통이 수립되어,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의 품격이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서 본 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회화에서는 고려시대에 송, 원 회화의 영향으로 왕공사대부 사이에 묵 죽, 묵란, 묵매가 널리 그려졌다. 조선초기에도 사군자가 문인들 사이에 계속 사랑을 받아 왔고 조선 중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수립, 후기에 와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업적 을 남기고 있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회화, 그 중에서도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 만,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양 사상의 일맥으로서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여러 예술 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꽃, 식물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 다움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함과 품격을 높이 산 것이다. 이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각각에 담긴 의미와 상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2) 매화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 이 매화 는 백화가 미처 피기 전에 제일 먼저 피어나므로 ‘화형’ 또는 ‘화괴’라는 별칭으로 불리어 왔다. 또한 봄을 가장 먼저 전해 준다고 하여 일지춘색, 철간선춘, 한향철간이라 하였고, 춘한 속 에서 홀로 핀 매화의 고고한 자태는 선비의 곧은 지조와 절개로 즐겨 비유되고 있다. 이처럼 맑은 향기와 아울러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매화의 특징이다. 선비들은 매화의 곧 고 맑은 성품을 노래한 글을 지어 일편단심으로 사무하는 임에게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고 자 하였다. 이 때 임은 나라 또는 임금일 수도 있고 자신의 굳은 뜻일 수도 있다. 특히 청초한 자태와 향기로 인해 매화는 아름다운 여인에 즐겨 비유되었다. 옛 기생들의 이름 에 유독 매화 ‘매’자가 많이 사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매화가 아름다움과 함께 정절을 상징하였으므로, 여인들은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시문한 비녀인 매죽잠을 즐겨 착용하였다. 이와 같은 매화의 상징성으로 인해 눈이 덮인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 매가 문인과 풍류객들의 연중행사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범석호는 「매보」에서 천하에 으뜸가는 꽃이라 칭송하였고, 소동파는 얼음 같은 맑은 혼과 구 슬처럼 깨끗한 골격이라 평하였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의 화목9등품론에서 국화, 대나무, 연꽃 과 함께 1등으로 분류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의 화품평론에 서 강산의 정신이 깃들고 태고의 모습이 드러난 꽃이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나타나고 있는 꽃 중에서 매화는 도화: 복숭아꽃)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 하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매화는 우리 선인들의 드높은 기개와 굽힐 줄 모르는 지조의 상징으로 애창되어 왔고, 다 썩은 고목에서도 봄기운이 돌면 어김없이 맑은 꽃을 피우는 신의의 벗으로 노래되어 왔다. 백설이 자자진 곳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의 이 시에서는 추이하는 계절과 더불어 걷잡지 못할 애상에 잠긴 마음으로 매화를 찾는 지사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매화는 달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청초한 자태와 맑은 향기를 내 뿜는 매화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자연적인 조화와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 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임포 이후로 매화와 달의 짝은 더욱 애호되고 있다. 실로 달과 매화는 예로부터 은일처사들의 아낌을 받아 온 고아함의 화신이 요, 정절의 상징인 자연이었다. 달을 벗한 매화는 그림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양매월 이제청절’이라는 화제가 적힌 윤리문자도에는 은나라의 은일처사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달과 매화를 벗삼아 은둔의 일생을 보냈다는 고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매화 그림, 묵매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매화의 꽃송이가 중국의 그림 처럼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재 전문위원 허영환 선생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 성긴 것, 어리숙한 것, 완벽하지 않은 것, 기교를 부리지 않은 것 등을 좋아한 성격 탓’ 인 것 같기도 하고, ‘한국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자연주의의 발로’인 것 같기도 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민족성은 빽빽한 것, 완전무결한 것, 아주 예쁜 것, 되도록 큰 것을 좋아한다 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묵매화가들이 어지럽게 줄기와 가지를 그리고 수십, 수백 꽃송이를 화면 가득히 그리면 서 웅장, 완벽, 섬세를 추구할 때, 우리나라의 묵매화가들은 그러한 화법과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미술의 기조를 지키면서 여백의 미와 단순의 미 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는 비록 묵매화가 사군자의 하나로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민족성에 맞게 완전히 소화, 재창조되어 한 단계 높은 미적 수준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 난초 난은 비록 한 송이가 피기는 하나 그 향기는 실내에 가득 차서 사람을 감싸고 열흘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남 사람들은 난을 향조로 삼는다. 도곡이 지은 「청이록」에 나타난 구절이다. 공자는 난의 향기를 왕자의 향이라 하였다. 특히 동양란은 서양란처럼 색채가 화려하지 않고 꽃도 작으나 담백한 색과 은근한 향기가 그 생명이 다. 따라서 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하는 것은 향이며 고귀함이다.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아한 자태로 은은한 향을 내뿜는 난은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고 있다. 예로부터 ‘유인풍치정여란’, ‘난화사미인’, ‘유란여정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난은 유인, 미인, 정녀 등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난의 독특한 향기를 취하여 유곡가인, 미인향, 군자향, 공곡유향, 군자가패, 왕자지향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으며, 난유유자풍운, 난령인수계라 하면서 난 의 고아함을 칭송하였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시대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지만,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자서전적인 장편 서사시 「이소」에서 그가 난을 즐겨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연관시킨 난초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에서 “일찍이 여항에 객으로 머물러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난을 분에 심어서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서안 위에 놓아두었는데, 한참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동 안에는 그 난이 향기로운 줄 몰랐다가 밤이 깊어 고요히 않았노라니 달은 창 앞에 휘영청 밝고 그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하여 맑고 그윽한 향기를 사랑할 만하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음을 느 꼈다”라고 하였다. 고려말의 이거인은 난을 재배한 것으로 유명하고, 조선초의 강희안은 우리나라 자생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난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묵란화 로는 조선초 강세황의 「필란도」가 있고, 김정희를 비롯하여 이하응, 김응원, 민영익 등은 묵란 화의 대가들이다. 난에 관한 시를 남긴 이로는 김부식, 김극기, 이규보,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 숭인, 최경찬, 신위 등이 있다. 난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한다. 사군자를 계절 순서로 말하면 매, 난, 국, 죽이지만 사군자화를 배울 때는 난, 국, 매, 죽의 순으로 한다. 그것은 난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많아 서화동원의 사상과 걸맞기 때문인 듯하다. 묵죽화가 직선미를, 묵매화가 굴곡미를 보여 준다면 묵란화는 곡선미를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난초그림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는 완당 김정희의 난화론은 독특하다. 그는 글씨의 정신과 그 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난초 그리는 법은 예사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가 있은 연후 에 얻게 된다. 또 난초그림의 법은 화법이라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일에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심의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이 보는 문인화의 묘미 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청나라의 왕지원은, “난의 성격은 천연고결하여 마치 대가의 주부나 명문의 열녀 같아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만약 속필로 그려 그 청고아치를 떨어뜨린다면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다” 라 하였다. 한편, 정몽주의 초명이 몽란이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난분을 깨뜨린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이 라는 기록이 있다. 난은 또한 자손의 번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도 지방에서는 난초 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지고, 충청북도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 나무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진다. 4) 국화 국화는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 여름을 지나 늦가을에 서리를 맞으며 홀로 피어난다. 이러한 모습에서 국화는 절개를 지키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에 즐겨 비유되었다. 「종회 부」에서는 국화를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 소중히 여김을 알 수 있게 한다. 국화에는 다섯 가지 미가 있으니,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려 있음은 천극을 모양한 것이요, 섞임이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빛깔이요, 일찍 심어 늦게 핌은 군자의 덕이요, 서리를 이겨 뚫 고 꽃을 피움은 경직한 기상이요, 술잔에 동동 떠 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라. 예로부터 국화는 오상고절이라 일컬어졌으며 송나라의 주돈이는 “국화는 은일이요, 모란은 부 귀요, 연꽃은 군자”라 하였다. 이처럼 국화는 군자 가운데서도 은둔하는 선비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범석호는 「국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국화를 군자에다 비유 하여 말하기를,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하게 꽃을 피워 풍상 앞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 그 품격은 마치 산인과 일사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 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오직 도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 다.” 국화가 이와 같은 은일지사의 상징으로 위치를 굳힌 것은 진나라의 도연명에 의해서였다. 도연 명은 한때 관직에 있었으나 관리란 직책이 생리에 맞지 않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 아왔다. 이 때 지은 「귀거래사」에서 집에 와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 대로 있음을 반기고 있다. 그 외에도 국화심기를 좋아하고 국화를 읊은 많은 시를 남겨, 중국 역 사상 가장 전형적인 은사 도연명과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시 「음주」는 전원생활을 주제로 하여 탈속한 설비의 풍류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 다. 그 중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는 대목의 시정은 그의 도가적 모습을 나타내는 데 즐겨 인용되며, 회화에서도 이 부분을 화의로 취택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시가문학은 당, 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당, 송의 문학은 도연명의 영향을 많 이 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자연스럽게 도연명의 시취에 빠져들어 이와 연관된 그림 을 많이 남겼다. 정선의 「동리채국도」와 「유연견남산도」에는 한 선비가 국화를 꺾어 옆에 놓 거나 들고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이한복은 상황의 설명이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국화 화분을 그린 정물화 형식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화제를 「동리가 경」으로 한 것을 볼 때 국화와 관련된 도연명의 시취를 인용하여 그린 것임을 알게 해준다. 국화는 ‘국유걸사지풍’이라 하여 호걸의 풍모를 가졌다고 표현되며, 일명 절화, 여절, 여화, 여경, 갱생, 음성 등이라고 한다. 「양화소록」에서도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단연 1등, 1품으 로 꼽고 있다. 국화의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예로부터 국유황화라 하여 황국을 으뜸으로 치 고 있다. 이처럼 국화의 높은 기개를 사랑하여 회화에서는 필묵으로, 문학에서는 글로써 그 불굴 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국화는 특히 고려자기와 이조백자, 나전칠기 등 도예품과 공예품에 문양으로써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자기 등에 나타나는 국화문이 비록 회화적인 면보다는 도안화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한국의 정취를 물씬 나타내고 있는 야국의 그림은 고려청자의 푸른 바탕에 신비스러운 조화를 이 루어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한편, 국화는 노장사상에 의하여 신선의 초화라 일컬어졌다. 더욱이 「포박자」의 내편에 기록 하기를, “감곡수에는 국화의 물이 떨어져 자액이 되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국화가 불로불사의 영초라는 사상이 고려시대에도 충만하고 있었으므로 청자, 술 잔, 술병, 거울 등에 국화문이 많이 쓰여졌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국화에 대한 신비한 효능이 전래되었고, 「신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국화는 성품을 기르는 가장 좋은 약으로 능히 장수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 남양사람 들은 국화의 담수를 마시고 다 백세를 살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에 국화주를 가지고 등고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화주는 예로부터 궁중의 축하주로 애용되었고, 민간에서는 9월 9일에 국화주를 먹으면 무병하고 장수한다 하여 즐 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가요 「동동」 9월령에는 “9월 9일애 아으 약이라 먹논 황화고지 안해 드니 새셔가만 흐 얘라 아으 동동다리”라고 하였으니, 고려 때 이미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고, 그것을 약주 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양지방의 「각설이타령」에도 “9월이라 9일날에 국화주가 좋을씨고”라는 구절이 있고, 경상북도 성주지방의 민요에도 “뒷동산 쳐다보니/국화꽃이 피었고 나/아금자금 꺽어내여/술을 하여 돌아보니/친구하나 썩 나서네”라는 구절이 있다. 국화는 선조들이 남긴 시조에서 도화, 매화와 함께 자주 제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널 리 회자되고 있는 이정보와 송순의 작품을 음미하여 보자.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풍상이 섯거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인냥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5) 대나무 사군자 중 제일 먼저 시와 그림에 나타난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 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강희안은 꽃의 품계를 정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 여 매화, 국화, 연꽃과 함께 대나무를 1등으로 삼았다. 대나무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아름다움, 실용성은 일찍부터 예술과 생활 양면에서 선조들의 많 은 아낌을 받아 왔다. 대는 소나무와 함께 난세에서 자신의 뜻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 키는 지사, 군자의 기상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상징물로 나타내고 있다. ‘대쪽 같은 사람’이라 는 말은 대를 쪼갠 듯이 곧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곧 불의나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는 지조 있는 사람을 말한다.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다음과 같이 대나무를 노래하였다. 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이는 대나무의 성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시경」의 「위풍에서 위나라 무공의 높은 덕과 학문, 인품을 대나무의 고아한 모 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는데,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기수 저 너머를 보라. 푸른 대나무가 청초하고 무성하니 고아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깎고 갈아낸 듯 쪼고 다듬은 듯 정중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여,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고아한 군자가 바로 저기 있도다. 결코 잊지 못할 모습이여.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육조시대는 대나무와 군자의 사이가 더욱 밀착되는 시대이다. 죽림칠 현이 대나무 숲을 은거지로 삼은 것이든지 왕휘지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한 일화들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특히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그 이 후로 대밭은 문학작품 등에서 은거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국사기」등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설화와, 전설 등에서도 대나무는 신비한 영물로 등장하 여,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대나무의 가치를 높이 산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 면 신라 때 이미 삼죽, 향삼죽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중 미추왕과 죽엽군의 내용을 보면,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 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때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서 적을 물리쳤는데, 적이 물러가자 그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에 미추왕이 도운 것인 줄 알고 그 능호를 죽현릉이라고 하였다 한다. 「만파식적」은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 왔는데, 그 산에는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대나무가 있었다. 신문왕은 용의 계시에 따라 그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그 피리를 불면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구전설화로는 엄동설한에 부모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대나무 밭으로 달려가 울면서 애 원하니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이 솟아올라 그것을 잘라서 부모를 공양한 효자의 이야기가 전 라북도 완주군과 경기도 강화군 등에 채록되었다. 대나무는 주기적으로 꽃을 피우는데 그 간격은 종류에 따라 5년에서 60년 주기까지 다양하다. 대개 꽃이 피면 모족은 말라죽게 되고, 대밭은 망한다. 이는 개화로 인하여 땅속 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다음해에 발육되어야 할 죽아의 약 90%가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머지 10%만이 회복 죽이 되므로 개화 후에는 죽림을 갱신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 라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신이 있으며,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회화에서는 대나무가 독립된 화목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송죽도, 죽석도 등의 배합, 또는 화조화 의 일부로 나타났으며, 그 뒤 대의 상징성과 기법의 특수성 등으로 인해 문인 수묵화의 소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때로 달방에 창호지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그대로 베껴서 묵죽을 그린 낭 만적인 화법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화원을 뽑는 시험에 관한 「경국대전」의 기록을 보면, 시험과목 중 대나 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더 중요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상감창자에 새겨진 문양에는 국화문과 함께 죽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자기의 대나무 그림은 대개 주악선인 등의 인물과 연꽃, 국화, 매화, 학, 새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자연 의 경관을 이루고 있고, 때로 흑상감한 대나무와 백상감한 군학을 같이 구성하여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8세기경의 주병류에서는 대체로 대나무 그림만을 주제로 시문하 여, 당시 유행한 사군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이처럼 대나무는 그 상징성과 고아함, 실용성 등으로 인해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설 화 등에서도 교훈적, 길상적 의미를 간직한 주된 소재로 아낌을 받아 왔다. 6) 사군자의 상징성 이제까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각각에 나타난 옛사람들의 생각과 거기에 부여한 의미와 상 징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이들 네 식물은 각자 높은 품격과 지조를 가진 뚜렷한 자연물로 인식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개별 꽃이 갖는 특성과 아름다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즉 꽃잎, 잎사귀, 줄기, 뿌리 등으로 이루어진 각 식물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공통된 특성으로 갖는 의미를 취하여 사군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들을 사군자라 하여 사랑하게 된 것은 어렵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꿋꿋하고 아름답게 서 있는 그 성품을 높이 산 것이다. 선비들이 이들을 보며 스스로 의 인격을 함양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따라서 시와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꽃을 가꾸 며 늘 곁에 두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였다. 은일지사들은 사람과 교류하지 않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이러한 뜻있는 자연물로서 벗을 삼았으며, 이름 높은 지사들이 이들을 시와 그림으로 노래 한 작품과 일화들은 후대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미쳐 더욱 사군자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사군자를 함께 여러 가지 비유로 칭송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전한다. 매화의 운치, 난초의 향기, 국화의 윤택한 기운, 대나무의 청아함이 없으면 역시 군자라 할 수 없다. 매화는 선비의 아취를 지니고, 난초는 제왕과 같고, 국화는 호걸과 같은 풍치를 지니고, 대나무 는 대장부의 기백을 지녔도다. 또한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진기 한 벗)라 하였으며, 난을 방우(꽃다운 벗), 국화를 일우(뛰어난 벗) 또는 가우(아름다운 벗), 대나 무를 청우(맑은 벗)라 하여 차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맑음과 고아함을 취하여 매, 죽을 쌍청 또는 2아, 추위를 견디는 인내를 취하여 매, 죽, 송을 세한삼우라 하였다. 매죽, 난죽, 매국, 국죽, 세한 삼우 등이 배합을 이루어 그림, 문양, 시 등에서 즐겨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연년세세 영구불변 하는 우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사군자끼리의 배합뿐만 아니라 상징성이 유사한 소나무, 돌, 연꽃, 학, 달, 술 등과 함께 어우러지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자주 등장하는 정다운 짝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군자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국화에는 술과 벗이 짝하고, 매화에는 달이 가장 즐겨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주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짝을 더함으로써 시적 운치를 높 이고 주제를 더 깊게 해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사군자의 그림은 시, 서와 함께 전인격을 투영하고 있다고 믿어, 문인 사대부들 ㅅ이에 더 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는 사군자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 꽃과 식물의 정신을 나 타내야 하므로 그리는 이의 인품과 정신이 중요하다고 본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선인들의 벗으로서, 교훈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그 상징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왔다. 꽃 자체의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우 선으로 한 전통시대의 관념적인 명분론의 일면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꽃 속에 담겨진 의미나 정신을 망각한 채 지나치게 외적이고 감각적인 미만을 추구, 화려함을 우선으로 취하는 현대인들의 흐름 또한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사군자에 투영된 제4장 산 산은 위로는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는 세상과 연결되는 곳이다. 하늘과 땅 중간에 우뚝 선 산. 이 자리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로 인간은 하늘과 태양을 숭상하여 왔다. 하늘을 향한 산의 수직성은 이러한 숭천사상, 태양숭배사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인 간은 산을 신앙의 대상, 수호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라는 말이 있듯이, 산은 그 품이 한없이 깊고 아늑하다. 인간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산으로부터 모성으로서의 위안을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이다. 산은 멀리 떨어져 바라볼 때에도, 그리고 그 품속에 깊숙히 들어가 있을 때에도 인간의 마 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세상에 산이 없다면 우리는 심리적으 로나 공간적으로 커다란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산은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그 품속에서 우리들을 성숙시킨다. 따라서 역 사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산을 찾아 은거하며 탈속의 경지를 누렸고, 숱한 사연의 인물들이 속세 를 떠나 산과 함께 삶을 영위하였다. 한편, 산은 그 민족이 강역 및 역사, 민족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러 산악이 길게 뻗 치어 줄기를 이룬 산맥은 그 민족의 약동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 산에서 잉태되고 자라난 강은 그 민족의 생명의 젖줄이 되며, 산세에 따라 한 마을, 한 부족, 나아가서는 한 민족이 형성되기도 한다. 수천 년 역사의 소용돌이를 감싸오면서, 또는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묵묵히 우리 민족을 지켜온 산. 조국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은 바로 이 산하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에게 투영된 산의 의미, 그 상징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 품속에 있 을 때에 느끼게 되는 ‘탈속과 은일의 상징’으로서의 산을 살펴보고, 멀리 떨어져서 보는 산, , 그 수직성의 상징으로 형성된 ‘산악신앙과 산악숭배사상’,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특한 산세와 지형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리체계로서의 산’의 상징성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1. 탈속과 은일의 상징 1) 은거와 은일의 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산에 수놓아진 인맥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일찍이 산의 철학을 깨 달아 산과 함께 삶을 산 많은 선각자들이 있었으며,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이를 한탄한 선비들은 산을 찾아 은거하였다. 그 밖에 숱한 민란의 주모 자들이 산을 피신처로 삼았으며, 일제 때에는 징용, 징병을 기피한 청년들과 독립운동가, 사회주 의자들이 산을 근거지로 숨어 살았고, 광복 후엔 파르티잔(빨치산)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신라 때의 최치원을 비롯한 많은 법사와 선사들은 차치하더라도 유명 무명의 인물들이 산을 중 심으로 역사의 수를 놓았다. 그런 뜻에서 산은 자연과 인생이 어우러진 무대이기도 하고, 바로 역 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산중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현실생활의 도피장소로서 산을 택하여 산 사람들이다. 이들이 산중생활을 선택하 게 된 데는 뚜렷한 현실적 이유가 있으므로, 그 문제가 해결되면 산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완성된 자아실현의 장으로서, 산 그 자체에 순수한 즐거움을 느껴 스스로 찾아 들어가 사 는 사람들이다. 즉 현실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선택하여 산중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앞의 경우는 언제나 산 밖의 인간생활이 사고의 중심이 되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또는 돌아가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있는 사람들이 은신처나 도피처 등 ‘에서 벗어난 ’장으로서 산을 인식하고 있는 반면, 뒤의 경우는 산중생활 자체가 삶의 중심이 되어 산 밖의 세상일을 관망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형태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 며 대개의 경우 복합된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현실의 도피로 산을 찾아들었으나 산과 함 께 생활을 하는 동안 새로운 철학과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초월과 승화의 경지에 이르는 경우이 다. 특히, 근대 이전의 왕조시대에는 나라의 어지러움을 피해 일시적으로 혹은 오랜 기간 동안 산 에 은거하였던 많은 선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현실에 대한 고통과 소외감으로 유배의 심정을 맛보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의 산중생활은 승화된 정신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계 기가 되었다. 이들은 주옥 같은 글과 글씨, 그림 등을 남겨, 산중생활이 그들의 정신세계를 얼마 나 풍요롭고 넓게 해 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허유가 그린 「선면산수도」에는 수려한 산수의 그림과 함께 산중 선비들의 하루 일과를 담은 글이 적혀져 있다. 이 산수도는 부채에다 그린 것으로, 거기에 담은 내용과 함 께 더욱 운치를 더하고 있다. 부채에 담긴 글을 읽어가는 동안 우리는 그들이 왜 산을 택하여 살 고 있는지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집이 산속에 있으니 봄 여름 계절이 바뀌는 때가 되면 푸른 풀이 뜰에 무성하고 낙화가 오솔길에 만발하구나. 문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없고 소나무 그림자만 어른거리네. 높았다가 낮아지는 새소리에 편안한 낮잠은 절로 오누나. 샘물 긷고 솔가지 주워 차를 다려 마시며 「주역」과 「시경」의 국풍, 「좌씨전」, 「난소경」, 「사기」, 도연명과 두보의 시, 한유와 소 동파의 문장을 읽어나간다. 조용히 산길을 걷기도 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안고 어루만지며 아기사슴, 송아지와 더불어 우거진 숲과 풍성한 풀밭 사이에 누워 함께 숨을 쉬네. 냇가에 발을 담그고 않아 흐르는 시냇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양치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어린 아들이 대순과 고사리를 다듬고 보리밥을 짓누나. 한바탕 흥겹게 취하여 크고 작은 붓으로 수십 자를 적고 법첩과 묵적을 펴 책 끝까지 읽어나간다. 시내가 흐르는 산으로 다시 나가 전원의 늙은이와 시냇가의 벗을 만나 뽕나무와 삼농사를 묻고 기장과 벼 농사에 대해 이야기하네. 날씨의 맑고 흐림도 요량해 보고 전후를 헤아려 시절을 셈해 보며 서로 더불어 담론이 만발하여라. 집에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 지팡이를 세워 놓고 방에 와 앉으니 서산 노을의 자주빛, 푸른빛이 책상 위를 물들이는구나. 소 치는 목동의 피릿소리가 들려 오고 앞 시내엔 달이 흐르고 있으리라. 한편, 산중에 은거한 선비들은 현실세계와의 갈등을 끝까지 떨쳐 버리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주 기도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경국제민의 유학적 이념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사람들이었다. 현실의 주역으로서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자기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에 산중생활에 젖 고 심취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현실과 귀거래적 이상을 다같이 긍정하였다. 이러한 점은 선비들이 현실적 소외의 극복, 사유훈련, 심성수양 등을 위한 방편으로 불교의 청 정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동경하고 좋아했으면서도 불교정신 자체에 대한 체득이나 그것에로의 완 전한 귀의를 이루지 못한 태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무심을 표방하고 산 밖의 세상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으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임금을 그리워하고 조정사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지은 시 한 수, 글 한 구절에 서 그러한 심사를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이 엮은 산중생활과 그들이 꽃피운 산중문화를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어려운 때를 만나 세속을 피해 산을 찾은 선비들 중 가장 철저히 산과 함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운 최치원을 들 수 있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와 지리산 쌍계사를 하루에 오가면서 많 은 족적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그의 시가 전하기도 한다. 거센 물결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그는 쇠망해 가는 신라의 국운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자 벼슬을 던져 버리고 뜬구름처럼 소요자적 길을 떠났다. 가야산, 지리산, 금강산, 청량산 등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남 긴 그의 산중생활의 자취는 그와 대화하려는 후학들에게 청정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선조 24년(1591) 어느날 산사를 찾아가던 노승 한 분이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다가 바위 틈에서 여러 권의 책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시 18수가 수록된 그 책에서 고운의 정교한 필적을 본 노승 의 손은 일순간 멎을 수밖에 없었다. 달빛에 적막한 산능선을 바라보며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를 돌다가 시흥이 솟아나면 그대로 적어 아무 바위틈에나 시첨을 꽂아놓았을 그의 풍류를 생각할 수 있다. 지리산에는 또한 세이암이 있다. 그가 세상을 등지고 소요하던 중 국왕이 신하를 보내 국정을 논의하자는 뜻을 전하자, 못들을 말을 들었다 하여 귀를 씻었다는 곳이다. 산에 들면 다시는 속세에 내려오지 않을 것을 말하고 이 곳을 건너며 손을 씻었다는 가야산 무 릉교, 가야금을 타면서 시와 풍류로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학사대, 그가 짚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 은 것이 자라 고목이 된 해인사의 천년고목, 곳곳의 바위에 쓰여진 시... 이렇게 자연을 벗삼아 풍 류를 즐기던 고운은 어느 날 가야산의 한 숲속에 갓과 신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아무도 그의 자취를 찾지 못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월당 김시습은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면학을 힘쓰던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 폐위의 소식 을 듣고, 대성통곡으로 3일간을 지낸 뒤 모든 책을 불사르며 통분에 몸을 떨었다. 항시 세사의 어 리석음과 부조리에 한탄하던 그로서는 너무도 큰 충격과 절망이었던 것이다. 본시 산수를 벗하며 명리를 구하지 않던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이 때부터 평생을 미친 이처럼 행 세하고 울음으로 시를 지으며 천하를 주유하였다. 금강산, 오대산을 비롯하여 내장산, 무등산, 조 계산, 가야산, 북한산 등을 유랑하면서 처처에 명시 1만여 수를 남겼다. 31세 되던 해에는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6년 동안 칩거하면서 불후의 명작인 「금오신화」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아침에 일어나 예불을 올린 뒤 통곡을 하 고 하늘을 우러러 노래를 불렀다. 시를 지은 뒤에는 시를 쓴 종이를 태워버리고, 나무를 깎아 그 위에 시를 쓴 뒤 다시 그것을 불살라 태우고 통곡하는 신산의 일과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금오산 실, 매월폭포, 매월동굴, 매월대, 매월동 등 그가 남긴 산중생활의 자취마다 천재의 유랑이 남긴 그의 탈속행각을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남아가 성세를 만다 도를 행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기의 안일과 이름을 위하 여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도를 행할 수 없는 난세를 만나면 차라리 세상을 멀 리하여 자기 일신이라도 깨끗이 하는 것이 현자의 도리”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은 평생을 태백의 웅기가 가득한 청량산의 토굴에서 글씨를 쓰며 살았다. 김생이 이 굴에서 초서를 완성하여, 후세 사람들에 의해 ‘김생굴’이라 이름지어졌다. 청량산은 36봉 36대 36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이 중 경일봉에 위치한 김생굴에 앉아 주위를 둘 러보면 오른쪽에 의상봉과 왼쪽에 금탑봉, 건너편의 축령봉이 둘러싸고 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온통 암벽으로 된 봉우리마다 폭포수가 흘러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맑은 날에는 둘러쳐진 폭포가 바위로부터 흩어 떨어져서 물방울을 날리면 나무를 쪼개어 그것을 받아 마실 물을 삼았다 하니, 가히 그의 풍류와 멋은 신선의 경지와 멀지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명필체본을 구해다가 이 굴에서 40여 년 동안 글씨공부를 하였다. 종이로는 날마 다 연습하는 양을 당해 낼 수가 없어 바위에다 연습을 하였는데, 커다란 바위에 글씨를 써서 가 득 차면 다시 물로 씻고 또 쓰곤 하여 하루에 몇 번씩 되풀이하여 썼다고 한다. 따라서 처음 쓸 때는 까끌까끌하던 바위가 몇 년을 쓰고 나니 표면이 반들반들해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변에 있는 나뭇잎에도 빠짐없이 글씨연습을 하여, 비가 오면 골짜기의 물이 온통 먹물로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이렇게 닦여진 글씨는 신품에 달하여, 이황은 「퇴계집」에서 “우 리 동쪽나라 천 년 동안에 김 생이 태어났으니 괴기한 필법은 바위와 폭포에 남겨 있도다. 사람 마음과 똑같다 감탄치 마소”라 하였고, 홍양호는 ‘동방서가의 조종’이라 극찬하였으며, 홍경모 의 글과 주세붕의 시에서도 그의 필체는 실제 깍아지른 바위와 무리지어 솟은 봉우리를 옮겨놓은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 동안 토굴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 이니, 그의 산중생활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 김생굴과 김 생이 사용하던 우물, 그의 연고지에 지어진 김생사 등에는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김생을 만나려 는 세인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다산 적약용은 천주교도로 박해 받아 전남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에서 18 년간 유배상활을 하였다. 그는 다산초당의 산객이며 은자였고 산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고적한 귀양객이었다. 이 다산초 당에서의 생활은 다산 개인에게는 일면 불행한 일이었지만, 여기에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 「목민심서」 등 방대한 경세제민서의 저술을 하고 경학과 문학, 과학 등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겨 후손과 우리 민족에게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산 윤선도는 귀양살이, 벼슬살이, 은거생활을 되풀이하였다. 유배지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과 소외감은 고산으로 하여금 문학이라는 승화된 정신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명 조식은 벼슬보다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였다. 그는 철저한 은일의 선비로, 몇 번이나 간청 에 못이겨 벼슬에 않았다가는 며칠을 넘기지 못하였고,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를 짓고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지리산을 배워 평생을 그 속에서 살 았으며, 남명에 의해 지리산은 온통 시화로 장식되었다. 그가 지리산을 읊은 시는 수백 수를 넘었 고, 지리의 산수 속에서 일생을 마쳤을 때 그 향년은 72세였다. 김만중은 남해군 용문산의 유배지에서 혈흔과 함께 인생의 유서처럼 불후의 명작 「구운몽」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명필 김정희의 서체는 유배생활 동안 더욱 무르익어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초기 의 정도를 주장하던 틀에서 벗어나 예절과 형식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유배생활 동안 산수를 벗하고 넓고 깊어진 그의 정신세계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많은 선비들이 산중생활을 통하여 깊고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가꾸어 나갔으며, 그러 한 정신세계의 결정체로 창조해 낸 주옥 같은 작품들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유산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2) 불교와 개산 사람들은 왜 산에 가서 도를 구하는가?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왜 산으로 가는가? 우리의 선저들은 예로부터 도를 닦는 가장 적합한 장소로 산을 선택하였다. 불도를 닦는 절, 신 선이 되기 위한 수양처, 신의 힘을 얻는 무속기도처 등은 모두 산 속에 있었다. 그 산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의미를 지닌 곳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은 최고의 존재가 사는 이상의 세계로 여겨지고 있다. 선도에서도, 민족 고유 종교에서도 하늘에는 천신이 머물고, 불교의 세계관에서 볼 때도 가장 높은 하늘에는 부처 님이 머무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산 아래의 땅에는 희비가 엇갈리고 생존의 암투가 판을 치고 있다. 따라서 산 아래 사람들은 막 연한 구원의 대상으로 하늘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향해 마음의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이렇듯 이 상향으로서의 하늘과 인간세상인 땅의 중간 위치에 놓여진 산, 산은 바로 위로는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는 세상과 연결되는 곳인 것이다. 이러한 산이야말로 완성된 경지를 추구하는 이들의 정진 장소로 가장 적합한 장소라 생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산중생활은 단순히 속세에서 이상세계로의 상향이라는 일방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 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산에 절을 창건하는 것을 ‘개산’이라 하고 절의 창건주를 ‘개산조’라 한다. ‘산을 열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절을 생기기 전에는 산이 닫혀 있었다는 말인가? 절을 세움으로써 비로서 산을 열게 되었다는 뜻일까? 산에 절을 창건하는 것을 개산이라 한 것은 불교가 단순히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한다는 의 미가 아니라 ‘불교문화를 꽃피운다’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다. 신라 선문구산의 개산이 그러하 고 의상대사가 전국 열 군데 명산에 세운 화엄십찰의 개산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상구보리 하 화중생’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산속에서 꽃피웠다. 한 예를 들어보자. 수행자들은 세계의 중앙에 가상적인 이상향의 산을 설정하였다. 불교에서는 수미산, 도교에서는 곤륜산을 두어 그들의 우주관을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수미산은 그 형상이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산기슭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다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점차 넓어져 맨 꼭대기는 편편한 모양을 이루게 된다. 이 수미산은 세계의 중앙에 있으며, 산 아래에는 혼탁한 중생세계가 있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먼저 수미산의 산기슭에 들어가면서 마음을 한데 모으고 구도를 위한 자세를 가다듬게 된 다. 정진을 계속하여 마음이 맑아지면 산중턱의 사천왕이 있는 세계에 오르게 되고, 더욱 수도를 하여 마침내 정상에 오르면 ‘주객이 둘이 아닌’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수미산의 꼭대기인 이 곳을 도리천이라 하며, 그 중앙의 선경성과 사방에 있는 여덟 개씩의 궁전과 함께 33천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18개의 하늘 세계를 지나면 아득한 곳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공간적인 위치로서의 부처님 자리를 뜻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산중사찰에서는 사찰 의 조형이 이 수미산을 적용하여 우리나라 특유의 불교문화를 이룩하고 있다. 즉 사찰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은 수행자가 일심의 자세로 수미산을 들어서는 것을 상징하고 있 다. 기둥이 한 줄로만 된 문을 만들어서 구도자의 일심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 문을 들어설 때는 도를 구하는 그 마음이 일심이 되어야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수미산의 중턱 사왕천에 해당하는 사천왕문이 나온다. 수미산을 오르기 시작 하여 중턱쯤 이르면 많이 지치게도 되고 마음이 해이해진다. 이 때 사천왕이 무서우면서도 조금 은 해학이 깃든 모습을 취하면서 힘을 낼 것을 꾸짖는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구도자를 지키기 위하여 사천왕상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정상을 향하면, 정상에 우뚝 선 불이문을 대하게 된다. 주객이 둘이 아니 요,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님을 상징하는 불이문, 이 불이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도리천의 33 개 궁전을 상징하는 33계단을 거쳐야 한다. 불국사의 백운교와 청운교가 33계단으로 되어 있는 것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불이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는데, 그 중앙에 불상을 안치하는 수미단이 있고 수미단 위 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수미산 위에 부처님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수미산이라는 가상적인 이상향을 통하여 해탈, 즉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는 단계를 상징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산중사찰에서는 수미산에 대비하여 불교 교리에 입각한 독특한 사찰의 조형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산 속 깊은 곳에 사찰과 암자를 조성하여 구도와 중생교화에 힘쓰는 한편 불교를 전파 하고 승려를 교육시켰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산중이라 하여도 사찰의 재정이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려들의 산중생활이 짜임새가 있었지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의 작은 사찰이 나 암자는 수도처로서의 기능만을 제공하였을 뿐 생활에는 큰 곤란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들 산중의 작은 암자에도 양식이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수행승들이 한여름 석 달과 한겨울 석 달을 암자에 기거하면서 산중 수도생활을 한다. 그들이 암자를 찾아가면 텅 빈 절일지 라도 석 달 양식은 있었다. 그 전에 머물다 간 승려가 다음 사람을 위해 떠나기 전에 탁발하였다 가 곳간에 넣어두고 갔기 때문이다. 마련된 식량으로 한 철을 난 승려는 그 암자를 떠나기 전에 탁발을 하여 다시 다음 수도승을 위한 양식을 마련해 놓게 된다. 전쟁 중이거나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도토리를 매을 찧어 벽 에 발라두어서 산중의 구황식으로 삼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산중 수도생활의 기본자세로서 누 가 말하거나 검사하지 않아도 계속되는 불가의 전통을 이어졌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구도자들은 항상 중생의 세계를 통찰하고 염려하면서 중생의 교화에도 힘썼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입산’이란 완성을 향한 수도, 즉 불교에서의 상구보리를 뜻하며 ‘하산’이란 중생계의 교화, 즉 하화중생을 뜻하는 것이 된다. 특히, 사찰이 세워진 후에야 산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자연 그대로의 산에 진리와 자비 의 등불을 밝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학교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절의 사찰은, 승려 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전국의 십산에 화엄대학이 있어 환한 지 혜의 등불을 밝히고 있던 시절의 사회는 결코 어둡지 않았을 것이다. 3) 선도의 요람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선이 된다. ‘선’은 ‘산에 사는 사람’ 또는 ‘인간세상에서 옮겨간 사람’이란 뜻의 회의문자로서, 곧 산인을 뜻하는 것이다. 몽고에서는 ‘선’을 ‘센’, ‘세이’으로 발음하였고, 무당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 고 우리나라의 경상도에서는 무당을 ‘산이’라고도 한다. 이 ‘센’, ‘세이’, ‘산이’등의 어 원은 몽고계의 ‘샤만’에서 온 것이다. 고대 몽고계의 신도사상에서 비롯된 ‘샤만’은 무당 중 강신이 잘 되는 사람과 신 지핀 사람을 지칭하는 ‘샤안’에서 파생된 말이다. 뒤에 이 ‘샤안’ 이 중국으로 들어가서 한자로 선이되고 또는 신선이라고도 하여 영가무도하였다. 우리나라의 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물이 맑은 곳이면 어김없이 선과 관련된 명칭을 갖고 있다. 비선대, 와선대, 은선암, 신선바위, 선유폭포... 고대의 신관들은 이렇듯 계속이 깊고 물이 맑으며 수려한 경관으로 된 심산에 입산수도하였다. 신관들이 입산수도한 산을 신산으로 삼았으며, 산에 서 수행하는 ‘샤인’을 곧 선, 신선이라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때 화랑은 국선, 화랑사는 선사, 화랑도는 풍류도라고 하였다. 화랑은 그 지위가 사회적으로 최고위였던 신관에 속하였고 풍류도는 신라 고대의 국교였다. 화랑은 평시에 공기 맑 고 수려한 산을 찾아 무술과 가무 등으로 심신을 수행하였다. 이 중에서 음악과 무용인 가무는 신과 교제하는 의식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전통과 습성이 생리화되어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에도 유학자는 산수 좋 은 곳에 정자를 짓고 거문고와 시를 즐겼으며, 탈속한 풍조를 사랑하는 등 신선의 풍류를 즐겼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선’의 뜻은 ‘늙어도 죽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산에 들 어가 수행하여 불로장생하는 사람을 신선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신선이 되고자 산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 그들은 그 산속에서 어떻게 생활하였는가? 그들은 마땅히 선도를 닦으면서 살았다. 선도! 그것은 곧 산중생활의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선이 되기 위해 닦는 선도의 비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다. 선도에서는 무심을 기본자세로 삼고 있다. 즉 「동의보감」에서 “사람이 무심하면 도에 합하는 것이요, 유심하면 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가 없다. 이것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불교관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이, 선도에서는 마음 의 다스림을 제일 중요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의 순리인 음양과 다섯 가지 기본요 소인 목, 화, 토, 금, 수 오행의 조화를 터득하고 그에 따라서 생활하였다. 둘째는 호흡법이다. 선인이 되는 수양법에서 호흡법만큼 득도에 필수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은 없다. 맑은 공기로 충만되어 있는 산, 그 산은 수행인들에게 우주의 정기를 담은 신선한 공기를 선사한다. 호흡양생법의 대원칙은 ‘토고납신’이다. 낡고 더럽혀진 것을 토한 뒤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들이마신다는 것이다. 먼저 바른 자세로 앉아 배꼽 아래 세 치 지점인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 기운을 단전에 모은 뒤 천천히 내뿜는데, 뿜는 양은 들이마신 것보다 적어야 한다. 이것을 단전호흡법 또는 연기법이라고 하는데 이를 더욱 연마하여 환정법, 태식법에 까지 이르게 된다. 환정법은 단전에 모여진 정기를 더 밑으로 보내 음경을 덥게 그리고 굳건하게 한다. 다시 그 정기를 항문 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를 척추에서 정수리로, 정수리에서 단전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범인은 상상 속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지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능한 일이다. 태식법은 태아가 모체에서 호흡하듯 하는 것이다. 이 호흡을 익히면 코로 숨을 들이마시지 않 더라도 복식호흡만으로 생명을 존속시킬 수 있으며, 그 정도에 이르면 입 속의 침만 삼키고 오랫 동안 가사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호흡법은 선도에서 정신과 몸을 통일하고 연마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한 수 행법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비록 기본단계이기는 하지만 단전호흡에 관심을 가지고 실행하 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는 식이이다. 산속에서 산의 정기를 받은 산삼, 약초 등 기화요초가 많다. 현세에서 되도록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식이에 의한 건강의 유지, 보강이 중요하다. 선인이 식의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우선 생기를 많이 함유한 음식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기를 많이 함유하였다는 것은 화식보다 생식이 주를 이룰 것이며, 따라서 신선하고 생명력이 왕성한 들풀, 성장력이 강한 나무열매, 어린 솔잎 등을 먹고 살았다. 산불에 의해 타죽은 집승이 나 노화된 솔잎 등은 생기가 없고 신선하지 못하다고 하여 식이에서는 제외되었다. 잡귀가 없고 신성스러운 것이어야 신선한 선도의 식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선인의 식이는 정력을 보강하는 식이를 주로 하였는데, 그 예로는 소나무의 뿌리에 생기 는 복령으로 가루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떡으로 빚어 식사 대용으로도 삼았다. 회식보다 생식을, 육식보다 채식을 위주로 하였으나, 사슴은 십이지에 속하지 않는 신성스러운 것이라 하여 사슴고 기를 육포로 만들어 상식하기도 하였다. 마직막으로는 체력단련을 위한 증강법이 뒤따르게 된다. 이들은 산속의 폭포, 바위, 나무 등을 이용하여 범인으로서는 엄두도 못낼 초인적인 체력단련을 하였다. 쏟아지는 폭포 아래 가부좌를 하고 않아 있는 하얀 도인의 모습, 험한 산등성에서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나는 듯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그림이나 글을 통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 인물 중에는 이러한 선도의 비법에 따라 신선수양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전설적인 홍의장군 곽재우는 유배 끝에 고향 현풍의 비슬산 속에 들어가 신체의 운동과 호흡조 절로 신선양도하는 선도를 닦았다. 그는 곡식을 끊고 조그맣게 뭉친 송화가루만 먹고 살았다 한 다. 또한, 명종 때의 명신 심봉원은 명신으로보다 심양하는 선인으로 더 알려졌다. 태화산 기슭에 집을 짓고 효창노인으로 불리며 하얀 수염을 날리고 산수 속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그의 생활태 도가 특이하다. 옷는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은 반드 시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동작과 휴식 또한 조절하 였고 마음쓰는 것도 그 심로의 분량을 근량으로 재듯 하였다. 그 외에도 선비 도인들이 산에 들어와 신선풍미에 젖은 생활을 한 일화는 무수히 많이 전해지 고 있다. 또한, 지리산에는 신선이 푸른 학을 타고 다닌다는 한국인의 이상향, 청학동이 있다 하 였으니 가히 그 비경과 풍류를 집작할 만한 것이다. 2. 숭배와 신앙의 대상 산은 인간 삶의 근거인 땅을 기반으로 하면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다. 하늘을 경외하고 태양을 숭배해 온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끝없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산을 신성시하여 왔다. 산은 인간세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그 산에는 하늘의 뜻을 받아 인 간의 일을 주관하는 신령함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또한,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서 산을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사람이 죽으면 냇가에 나란히 묻되 머리만은 산을 향하게 하여, 먼 옛날부터 인간의 영혼이 산으로 간다는 신앙이 있었 던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언제부터인가는 사람이 죽으면 산에도 묻고 산을 닮은 봉분을 해주고 있다. 하늘 높이 소사 있는 산에 올라, 마침내는 승천하게 될 영혼을 기원하며. 이처럼 인류는 현상학적으로 나타난 이 세상과 하늘, 그리고 관념적으로 형성된 현생과 사후세 계를 잇는 신성한 매개체로서 산을 숭상하여 왔다. 또한 하늘의 뜻을 받아 이 세상을 보호하고 인간의 일을 관장한다는 수직강하적인 신성성뿐만 아니라, 현생의 완성을 통하여 하늘에 이르기 위한 중간단계로서의 산에 대한 수직상승적인 설정은, 인간의 적극적인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인 간 내면에 간직된 본질적인 종교성을 접하는 듯하다. 이 장에서는 우리 민족이 산에 부여한 신성관념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었으며 그 이면에 내재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사상은 어떠한 것인지 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한민족의 시원지, 백두산 헤아릴 수 없는 태고의 어떤 날, 망망한 만주 평원의 황무한 초원 위에 트는 여명의 빛. 억만고 사람의 자취를 보지 못한 홍안령의 마루턱을 희망과 장엄으로 물들인 때, 체구는 장대하고 근육 은 강인한 거인의 일군이 허리에는 제각기 석부를 차고 손에는 강궁을 들고 선발대의 보무로 그 정상에 나타났다. 흐트러진 두발 사이로 보이는 널따란 그 이마에는 인자의 기상이 띠어 있고 쏘 는 듯한 안광에는 의용의 정신이 들어 있다. 주먹은 굳게 쥐어 강함을 보이고, 입은 무겁게 다물 어 근후함을 나타낸다. 문득 솟는 해가 결승선을 돌파하는 용자같이 일약하여 지평선을 떠날 때 그들은 한소리 높여 “여기다!”하고 부르짖었다. 거인배의 우렁찬 소리는 아침 광선을 타고 천뢰와 같이 울리어 끝없 는 만주 벌판으로 달려 내려갔다... 조선 역사의 출발은 아마도 이러했던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가운데, 우리 민족의 출발을 상상한 구절이다. 우리 민족이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좇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자리잡은 국토. 북으로 호대한 만주평원과 남으로 수려한 한반도에 걸쳐 구름 위로 우뚝 솟아오른 백두산은 이러한 우리 민족의 당당한 출발을 상징하는 개국의 터전, 한민족의 시원지이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고 신령스러운 하늘의 기운이 충만한 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한민족. 이들은 백두산을 태양신이 강림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경배 하였다. 백두산의 화산 분출은 이러한 관념을 더욱 강하게 심어 주었다. 더욱이 산 정상에 있는 둘레 18.7km, 수심 300m가 넘는 하늘의 못 천지는 신비의 호수로서, 하늘의 신들이 하강하여 목 욕하는 곳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북사」와 「봉천통지」에 따르면, 예로부터 백두산을 찾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반드시 용기를 지참하였다가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담아 왔다고 하였다. 또 한 산에 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세계 어느 곳에도 이처럼 외경된 산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두산은 하늘과 통하는 영산, 하늘의 뜻이 인간세계를 향해 펼쳐지는 매개체로서의 신산으로 경배되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이 세상을 다스려 줄 천자가 반드시 이 산에 강림할 것 을 믿고 있었다. 이에 환웅은 천심을 따르는 민심을 좇아 환인의 명을 받고 이 산으로 내려왔고, 신시를 열어 이 강토를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 이 단군신화를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를 만들고 후에 단군왕검을 낳아 조선을 건국하여 다스리다가, 뒤에 아사달에 가서 산신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과 백두산의 관계는, 하늘을 경외하고 태양을 숭배하여 그 곳을 향해 높이 솟 아 있는 산을 숭상해 온 고대인의 보편적인 산악숭배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국토의 성역이며 통일된 민족정신의 기원점을 이루고 있다. 즉 하늘과 새로운 국토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천제와 한민족의 맥을 잇는 시원으로서 숭배되 었던 것이다. 단군왕검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생명이 이 곳에서 기원하고, 바다 멀리 흩어져 있는 작은 섬까지 국토의 맥이 이 곳으로 잇닿아 있으며, 민족역사의 뿌리가 이 곳에 터잡고 있음을 말해주는 구심점이 바로 백두산인 것이다. 백두산이 매개가 된 이러한 신성관념은 이 땅이 하늘과 태양이 밝은 광명으로 축복받은 땅임을 믿는 ‘한밝신앙’을 낳게 하였다. 즉 백두산은 한민족의 시원지인 동시에 백의민족의 긍지인 한 밝신앙의 용출지가 된 것이다. 문헌에 처음으로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보이는 것은 「고려사」광종 10년(959년)때 “압록강 밖 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 쪽에서 살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에서이다. 그 이전에는 불함 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백산, 장백산 등으로 불리어 왔다. 학자에 따라서는 백두산이라는 명칭을 비롯, 한대이후에 불리어진 명칭의 공통점인 ‘백가’에 대하여 ‘희다’는 뜻으로 풀이함이 무난하다고 보기도 한다. 즉 백두산의 산정은 거의 사계절 내내 백설로 덮혀 있을 뿐 아니라, 산정부는 부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이 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한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도 이 산이 매우 신령스럽다 는 이야기와 함께 ‘백산’이라는 이름을 듣고 “이 산의 새와 짐승, 초목 등은 모두 희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 이름중에는 장백산, 소백산, 백운산, 백악산, 백마산, 백계산, 대백산, 대 박산, 함박산, 백복산, 백암산, 천백산, 조백산, 비백산 등과 같이 ‘백’과 ‘박’이 들어간 무수 한 산들이 있다. 이러한 ‘백’, ‘박’의 명칭들이 단순히 녹지 않고 산에 남아 있는 잔설의 모습에서 취한 것 인지, 태양을 숭배하는 우리 민족이 태양의 광명을 상징하는 밝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인지는 깊 이 고찰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한밝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백’은 희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반도 곳곳에 솟아 있는 밝은 산들의 으뜸이요,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그러한 이름을 받은 것이다. 즉 가장 신령 스러운 산, 가장 밝은 산, 가장 큰 산이라는 신앙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한밝’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가? 먼저 ‘한’을 살펴보자. 일반용어로 사용될 때는 1. 크다, 2. 하나이다, 3. 바르다, 4. 근원이다, 5. 최고이다, 6. 길다, 7. 넓다, 8. 많다, 9. 같다, 10. 한결같다 등의 최상급에 속하는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며, 명사로 쓸 때는 1. 하늘, 2. 하늘의 신 (하느님), 3. 통치자 등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밝’이란 본래 광명을 뜻한다. 따라서 한밝이란 큰 밝음, 대광명의 뜻이 된다. 그 큰 광명은 하늘에 있고 그 빛의 근원은 바로 태양인 것이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조상들의 신앙은 ‘한밝’이라는 두 글자로 상징되었고, 불을 가져다 준 태 양신의 아들 환웅이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크고 밝은 새 세계를 열었다는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두산을 크게 밝은 산, 영원토록 밝은 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침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는 한민족은 하늘의 뜻과 태양의 밝음을 계승한 신성함 과 깨끗함과 밝음을 지닌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밝신앙은 한민 족만이 가지는 신성관념으로 정착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산악숭배는 한밝신앙과 함께 뿌리내리며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맥을 이어 왔으며, 백두산은 그 구심점이자 시원지의 역할을 담당하여 왔던 것이다. 2) 국조신과 성모신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산에 대한 믿음과 경배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각 지방의 산마다 신비스러운 갖가지 전설이 얽혀 있으며, 그 마을을 지키는 산신에게 매년 정성드린 산제를 올려 왔다. 이러한 산신 중에서도 국조신과 성모신은 국가를 수호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신으로서 거국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이다. 국조신은 이름 그대로 나라를 세운 인물이 죽어서 된 산신이며, 성모 신은 산신으로 인격화되어 신앙되는 여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국조신과 성모신은 처음부터 신 의 위치에 설정되어 있는 일반 산신과는 달리, 구체적인 인물로 세상을 살다가 죽은 뒤 산으로 가 신의 되었다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국조신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조신으로는 단군과 수로왕, 주몽 등을 들 수 있다. 단군은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고조선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다가 1908세에 아사달 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가야의 수로왕은 황천의 명을 예시하고 하늘에서 자색의 줄 이 구지봉에 드리워져 탄생하게 되었고, 수를 누린 뒤 역시 산신이 된다. 고구려의 경우도 천계에 서 해모수가 능심산에 하강하여 주몽으로 이어지면서 나라를 열었고, 그가 죽은 뒤 고구려에서는 주몽신을 받들었다. 신라 건축 초기의 육촌장은 하늘에서 표암봉과 형산 등의 산정으로 각기 하 강하여 천신의 아들인 혁거세를 맞이하였다. 이들 국조신은 한결같이 천신, 산정강림, 개국, 산신으로 연결되는 신관을 보여 주고 있다. 이때의 산은, 산으로서는 그가 강림하는 자리이고 인간으로서는 강림하는 신을 받드는 자리이 다. 이러한 경우 땅 위에 우뚝 솟은 백두산이나 구지봉은 천신의 수직강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서, 그 아래에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즉 하늘과 산의 정상이 하나의 축을 이루 어 그 아래에 새로운 국가를 연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이 산을 ‘우주산’ 또는 ‘세계산’이라 하고 그 축을 ‘우주축’이라 한다. 왜 냐하면, 그 축과 산이 우주의 중심 또는 세계의 중심으로 믿어져야 하는 필요성이 따르기 때문이 다. 이 때 이 우주산 또는 세계산은 인체에 비유할 때 배꼽의 관념과 합치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배꼽은 인체의 중심이자 생명력이 연결되어 탄생되는 곳으로, 우주의 천신과 배꼽인 산은 탯줄로 연결되어 새로운 시조를 낳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우주산 신앙의 형태는 우리나라뿐 만 아니라 시베리아와 일본 등지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우주산 신앙의 특징은 산이 신의 세계인 하늘과 인간의 세계인 땅 사이에 자리잡아 그 두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산신과 연결된 고리를 통하여 산신을 향해 기원을 하게 되며 산신은 하늘과 연결된 고리를 통하여 인간의 소원을 아뢰어 그들 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조신이 나라를 세운 인물이 죽어서 된 산신임에 비해, 성모신은 한 나라 시조의 어머 니이거나 왕실의 여인, 또는 국가나 왕을 위해 훌륭한 일은 하고 죽은 사람의 부인이 죽어서 신 격화된 경우이다. 손진태 선생은 고대 산신의 성은 본래 여성이었는데 이후에 남성으로 변하게 된 것이라 전제하 면서, 이는 고대의 모계중심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이들 성모산신은 국조신이 왕 조의 쇠망과 함께 그 숭배의 정도가 크게 약화됨에 반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숭배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성모산이 개국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으며, 여성신으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모산신으로는 경주 선도산에 있는 선도성모, 가야산의 정견모주, 지리산 성모, 속리산 천황할머니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선도성모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 록을 남기고 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로서, 이름을 사소라고 하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신라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인 황제는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어 보냈다. ‘솔 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어라.’ 사소가 편지를 보고 솔개를 놓아 보내니 이 산으로 날아가서 멈추었으므로 마침내 거기에 가서 살며 지선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하였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여 나라를 진호하였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아주 많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건립된 이래로 늘 삼사의 하나로 하였고, 그 차례도 망제의 위에 있었다. 이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선도성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와 알영을 낳았 다는 것과 제54대 경명왕의 잃어 버린 매를 찾아주고 왕으로부터 대와의 작위를 받았다는 이야 기, 진평왕 때의 비구니 지혜가 안흥사의 불전을 수리하려고 할 때 황금 160냥을 주어 그 일을 쉽게 이루도록 하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모든 중생을 위한 점찰법회를 베풀 것을 지시한 내용들 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선도산의 성모사에서는 신라시대 이래로 계속된 향사를 매년 드리고 있으며, 많은 사람 들이 성모산을 찾아와서 정성을 드리고 기도하며 높이 받들고 있다. 다음으로, 김수로왕을 낳았다는 정견모주는 가야산의 산신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최치원 이 지은 「석이정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견모주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사에 감응하여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 사람 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사람들은 가야산에 전란의 화가 미치지 않았던 까닭이 모주가 산신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 으며, 모주가 머무르는 가야산을 신령스러운 산으로 믿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해인사 안에 정견천황사를 마련하고 정견모주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산신제 의식은 최근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삼신산의 하나로서 신설들이 내려와서 노닐었다는 지리산의 천왕봉에도 성 모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고 때 천신의 딸 성모마고가 이 산에 내려와서 반야도사(일설에는 암천사의 법우화상와 혼인한 뒤 딸 여덟을 낳아서 모두 무당을 만들었으며, 그들을 팔도에 보내 어서 민속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다른 무조설로는 석가모니불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지리산 신령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지리산을 남악이라 불렀는데,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 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국가의 수호신으로 숭상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렸다 고 한다. 고려 말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 산 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성모가 태조의 어머니라는 믿음과 함께 지리산은 매우 성스러운 산으로 받들어졌다. 평시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 재앙의 소멸을 위하여 신사에 기도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장수가 출정할 때에는 축원을 드렸고, 승전한 뒤에 는 성모신에게 증작하였다. 그 한 예로서 정지가 1383년(우왕 9년)에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남 해 관음포를 향할 때 사람을 지리산 성모신에 보내어서 필승을 기원하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성계가 창업의 웅지를 품고 전국의 명산에서 기도를 드렸을 때에도 오직 지리산에서만은 재의 소 지를 올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성계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리산 기슭에서 왜구를 물리치기까 지 한 인연 있는 산이지만, 고려왕조의 멸망을 담고 있는 기도를, 감히 위숙왕후를 성모로 삼고 있는 이 산에서만은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모가 있는 산은 신성하고 위대한 산, 넓고 깊은 모성애로 나라의 백성을 돌보는 산으로 존중받아 왔다. 3) 진산숭배와 민간신앙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진산숭배이다.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서 핵을 이루고 있는 백두산이나 국조신 또는 성모신이 살고 있는 산들이 특수성을 띤 것임에 반하여, 진산의 개념은 작게는 한 마을에서부터 크게는 전 국가에 이르기까 지 일반화된 산악신앙이라 할 수 있다. 즉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한 고을 또는 한 국가의 공동 체를 지키고 보호하는 주산을 설정, 민간에서는 물론 국가적인 행사로 이 산에 제사를 지내고 정 성을 드렸다. 이러한 진산숭배는 오랜 역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유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진산숭배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 때부터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항상 3월 삼짇날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되, 잡은 멧돼지며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 사를 올렸다”고 하며, 제26대 평원왕은 여름 가뭄을 당하여 끼니를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의 왕은 늙어서 자식을 두지 못하자 산천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였으며, 백제의 경우도 제5대 왕인 초고왕 때 큰 단을 모아서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신 라의 경우는 제5대 왕인 파사이사금이 메뚜기들로 인해 농사피해를 입자 여러 산천에 제사를 지 냈으며, 제7대 일성 이사금도 북쪽의 태백산에 가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대소사와 관련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빈번하였으며, 나라 에 따라서는 국가의 진산으로 삼산 또는 오악을 설정, 나라의 평안과 번창을 기원하였다. 백제에는 삼산이 있었는데, 부여군에 있는 일산(현위치 미상), 오산(부여 동남의 조산), 부산(백 마강 서쪽)이 그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국가의 전성기에는 그 위에 신인이 살았으며, 아침 저녁으로 끊임없이 하늘을 날아 왕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삼국 중 진산숭배의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나라는 신라였다. 신라는 삼산 오악을 두고 나라에서 주관하여 산악에 제사를 지냈다. 이 중 대사는 삼산에서, 중사는 오악에서, 소사는 특정 한 몇몇의 산에서 지냈다. 신라의 삼산은 나력(경주), 골화(영천), 육례(청도)였으며, 오악은 동악 에 토함산, 서악에 계룡산, 남악에 지리산, 북악에 태백산, 중앙에 부악산(대구 팔공산으로 추정) 이었다. 오악 중에서 석탈해가 스스로 산신으로 화하여 동쪽의 왜구로부터의 위협을 막고자 한 토함산은 신라 진산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삼산 오악 등에서는 국가의 수호와 함께 재해방지를 위한 기도, 기우와 풍년 등을 기원하 는 제사가 받들어졌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때 오악 삼산신이 때때로 대전의 뜰에 나타나거나 시립하는 것을 보 았다는 기록과 함께, 현강황은 남산신이 나타나 홀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는가 하면 금강령에서 북악의 신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따라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단석산에 입산수도한 김유신이 산신으로부터 보검을 받고 삼국통일을 맹세하였다는 이야 기도 진산숭배를 담고 있다. 선정을 베푸는 경덕왕 앞에 시립하는 산신과 국난 극복을 위해 애쓰는 김유신에게 보검을 내린 산신, 국사는 뒤로 하고 놀기만을 즐기는 헌강왕 앞에 나타나 나라의 위기를 경고한 산신은 모두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수호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말에 승려 도선은 곡령의 산수를 보고 그 맥을 짚어서 왕건이 태어날 집의 터를 점지해 주 었고, 왕건은 부처의 호위와 산천의 음우로 고려를 창업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고려왕조는 왕건이 산천의 음우로 나라를 일으켰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신라에 뒤지지 않는 국가수호와 왕실보존의 진산으로 산악을 숭상하였다. 이처럼 왕조 창업의 기틀이 풍수지리설과 맺어진 산악숭배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믿은 고려왕조 는, 덕적산, 백악, 송악, 목멱산 등의 진산을 두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 왔다. 또한 재변이나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명산에 기도를 드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가적인 중 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산에 대한 가호를 시행하였다. 즉 산에 신호, 덕호, 훈호, 존호, 작호 등을 붙여 높임으로써 그 이름을 영예롭게 하고자 하였다. 그 외에 총정이나 지기같은 상자를 산에다 붙여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산에 대한 가호는 태자책봉, 선왕선후에 대한 가상존호, 대묘친제, 왕의 순행과 같은 국 가의 중요 행사에 즈음하여 주로 베풀어졌다. 그와 같은 국가적 행사는 산의 보살핌과 수호에 힘 입어 이루어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었을 때 무등산, 금성산, 감악산 등의 음우가 있었다고 믿고 이에 감 사하는 제를 올린 것도 산의 가호에 준하는 산악숭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는 대궐 뜰 안에 산천의 신들을 모셔다가 왕의 친제인 ‘초’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에 와서도 고려의 산악숭배를 계승하고 있다. 왕건이 그랬던 것처럼 이성계도 창업을 위한 산신기도를 전국의 명산에서 행하였으며, 조선왕조를 이룩한 태조는 1393년(태조 2년) 명산 에 신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이에 송악의 성황을 호국공이라 칭하고 이령, 안변, 완 산의 성황은 계국백으로 삼았으며, 삼악산, 백악, 암이, 무등산, 금성, 계룡산, 치악산 등을 호국백 또는 호국신으로 삼았다. 또한 태조 때부터 국토를 지키는 오악과, 도성 및 나라를 지키는 산인 오진을 정하여 국가수호 와 왕조보존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다. 오악은 동악 금강산, 서악 묘향산, 남악 지리산, 북악 오대 산, 중악 삼각산이며, 오진은 동진 오대산, 서구 구월산, 남진 속리산, 북진 장백산, 중진 백악산으 로 정하였다. 이러한 오악, 오진 외에도 백두산신을 흥국영응왕이라 하여 모단을 세운 것을 비롯 하여 지리산에 남악사, 덕유산에 산제당, 서울 북악에 백악사, 남악에 목멱사 등의 제단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제사는 모두 나라에서 관장하였으며, 매년 중춘과 중추에 택하였고 제사에는 반드시 음악과 문무무가 뒤따랐다고 한다. 한편, 태조 이성계와 산과 관련된 다음의 일화는 조선왕조의 산악숭배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 다. 이성계는 조선왕조 창업을 위하여 남해 보광산의 산신에게 “국왕이 된다면 그 은혜에 보답 하는 뜻에서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아름답게 꾸며 드리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올렸다. 그 뒤 즉위한 태조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 산에 ‘금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국가에서 주관하여 산악을 숭배하고 제를 지내 왔을 뿐만 아니라, 각 주, 군, 현에서도 그 북쪽에 진산을 정하고 그 지역의 수호신으로서 산신을 받들었으며, 백성들은 산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드려 왔다. 이러한 숭산사상은 민간으로 일반화되면서 토착종교 내지는 민속적 신앙으로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즉 산신을 믿고 정성을 드림으로써 지역의 평화와 안녕을 지키고 제 액초복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신앙으로 정착이 되었던 것이다. 민간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띠고 있다. 지역수호신인 산 신에게 지내는 마을 단위의 산신제는, 마을 뒷산에 산신당(산신단 혹은 산제당이라고도 함)을 마 련하여 그 곳에서 모시게 된다. 산신제는 그 시기가 마을보다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개 새해를 맞아 초삼일에서부터 상원(음력 정월 대보름) 사이에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산신제의 진행은 마을 공동의 동제 형식을 취하며, 경비는 마을 공동으로 추렴한다. 산신제를 담당하는 인원은 제관, 축관, 화주 등으로, 이들은 부정 이 없는 이로서 생기복덕한 사람으로 선정을 한다. 산신제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발탁되면 일정한 기간 동안 목욕 재계하고 여러 가지 금기를 행한다. 이러한 금기는 제관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산신제를 행하는 마을사람들에게도 해당되어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고 살생을 금하는 것이 보통 이다. 특히, 무속으로서의 성황은 진산이나 산신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대관령 성황신제, 강릉단오제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또한 은산별신제나 향산제를 비롯한 지방의 부락제 들은 고유의 숭천숭산사상과 무속이 결합한 것으로서, 부락의 수호는 물론 질병과 흉액을 막고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3. 지리체계로서의 산 산은 인간세상을 둘러싼,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자연환경이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산은 그 입지나 지세 등에 따라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작게는 가옥의 배치에서부터 한 부락의 형성, 나아가서는 한 국가의 도읍을 정할 때에 도 산과의 조화를 가장 큰 요건으로 여겨왔다. 또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외침을 물리친 사례는 역사상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형태나 주민들의 기질 형성에도 산세 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산이나 대지에 자연의 생동하 는 힘인 정기나 생기가 있다는 믿음에 따라, 산을 신비하고 기묘한 힘을 가진 실체로서 이해하려 는 노력이 상호 병존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의 민간신앙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풍수지리사상이 자연스럽게 정착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은 오랜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지리관 내지는 토지관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1) 산과 삶의 조화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이 산으로 되어 있다. 국토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 간에 산맥이 놓여 있 어서 남.북, 동.서의 지역간에 기온의 차이가 큰 편이다. 특히 산이 우리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산이 취락 단위의 경계가 되고 지역과 지역 간을 격리시키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계들은 지역 간의 특수성 내 지 이질성을 형성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대산맥을 경계로 지역 구분의 기본 틀이 이루어지는 것 은 바로 산지의 격리 기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크게는 북부, 중부, 남부지방의 3대 지방 과, 그 지방에서 산맥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분류되는 각 지역들은 각기 산업, 일상생할, 사회, 문화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민가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보면, 가옥의 경우 북쪽으로부터 폐쇄적인 전자형의 북부 형(함경도), 대청이 있는 ㄱ자형의 중부형(경기, 충청도 북부), 흔히 툇마루가 있는 개방성이 큰 일자형의 남부형(전라, 경상도), 그리고 특수형으로서의 제주도형 등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기주형태 외에도 김치와 여러 가지 계절 음식을 포함한 식생활, 의복, 교통수단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지역에 따라 자연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산맥들에는 영, 재, 고개 등이 있어 지역간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통 로들이 이들을 통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 아달라왕 3년(156년)에 계림령로가 개통되었 고 158년에는 죽령이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로는 교통로의 기능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방비와 안전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령의 관문, 철령의 관문, 삼방관 등과 같이 관문이나 관 방이 중요 고개마다 설치되어 성책과 산성문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찰방과 역승을 연결하는 산로가 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높은 산정부는 통신수단으로서 봉화대의 설치장소로 이용되었다. 봉화가 제도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고려 예정 3년(1149년) 봉화식을 사용한 때부터였으며, 주로 국방상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변경의 비상사태를 중앙 또는 기지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봉화대의 설치방법은 매 30 리마다 제일 높은 곳에 봉화대를 두되, 만약 산이 서로 막혀 불편할 때에는 이수에 제한 없이 조 망이 가능한 곳에 두었다. 전국의 봉화계통을 보면 직봉이라는 5개 주요선이 있고, 이들 5직봉은 모두 목멱산(서울 남산)의 봉화대로 집중되도록 되어 있다. 산은 또한 그 지세와 위치에 따라 요새로 이용된다. 역사적으로 외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산천 의 지세를 천연의 이점으로 삼아 겨레와 나라를 지키며 국난을 극복한 경우가 많이 있다. 특히 지형을 이용하여 산성을 축성함으로써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산성의 축성은 국경의 설정이 되기 도 하였고, 취락 근방에 설치하여 도시국가나 성읍국가의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최초의 산성은 기원전 2세기의 평양성으로, 산을 이용한 취락보호의 성책이었다. 산성은 산마루와 정상을 연결하 여 쌓았는데, 대체로 배후와 좌우에 험한 능선이 둘러싸고 안에 시내나 샘이 있는 산지를 골라 성루를 쌓고 골짜기의 좁은 출구에 성문을 세운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건축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능한 한 변형시키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고자 한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민가는 자연지리와 기후에 크게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먼저 높지 않은 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산과 조화를 이루도록 높지 않은 집을 지었다. 알프스 등과 같은 높은 산지의 산악국가 들이 그 산을 배경으로 높고 지붕이 뾰족한 집을 지어 조화를 이루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높지 않고 완만한 둥근 모양의 산이 많으므로, 낮고 완만한 곡선의 가옥 들, 특히 초가들은 한국 민가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산사의 배치는 축을 여러 개 두어야 하였고, 높은 지영일수록 축의 수가 늘어나는 경향을 취하 고 있다. 이러한 예는 해인사나 부석사 등의가람 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주택은 주변의 자연 그대로가 정원이 되어, 건축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자연 은 인공의 건축을 포용하고 건축은 자연을 인공 속으로 끌여들여 서로 공존하며 자생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건축에서의 입지선택은 곧 자연으로 귀환하는 것이며, 귀속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의 조형미 자체도 깊이와 은은함을 지향하여, 자연계의 질서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촐하고 넉넉하게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산을 숭배하고 자연을 동경해 온 선조들은 서민에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산수 화를 곁에 두고 감상하기를 즐겨 하였다. 특히 궁궐의 정전 어좌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오봉산일 월도 또는 일월곤륜도는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송축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오봉산일월도에서의 오봉산은 오악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하늘의 은덕 아래 왕권 존속 및 왕실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 달, 물, 소나무와 함께 오악이 설정되어 있 는 이 그림은 전통의 오악신앙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왕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칭송 과 왕족의 무궁번창을 기원함과 동시에 조정의 최고 지위를 상징하는 그림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산에 대한 강력한 의미부여는, 실제생활의 여러 방면에서도 산의 조형을 본떠 권위와 길상을 상징하고자 하였다. 즉 산의 모양을 닮은 대감모자를 쓰고 산수가 넓게 펼쳐진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서안을 앞에 두고 십장생이 수놓아진 보료에 기대어 않 은 양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산세의 새김은 명당과 취락을 만드는 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 라, 지역주민의 기질과 성격 형성에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고남저형으로, 북쪽에서 강렬한 산세가 일어나 서남으로 흘러오면서 점차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음양의 이치에서 보면 산세가 약한 곳은 양기가 성한 곳이요, 산세가 강한 곳은 음기가 성한 곳으로, 남양북음이 그대로 적용되어 남쪽은 남자가 준수하고 북쪽은 여자가 인물이 아름다워 남남북녀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지방 산세와 관련하여 각 지방민의 성격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먼 저 장백산맥의 줄기찬 영향을 받은 함경도의 주민들은 어떤 일이나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끈질기고 참을성이 많은 기질을 지녔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백두산의 영향을 받은 평안도 사람들은 고고한 기질 때문에 타협이나 양보를 모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힘 이 없다고 한다. 높은 준령의 지맥이 순하게 서남으로 뻗어서 개활지를 형성한 황해도는 인정 많 고 온화하며 정직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팔을 내밀 듯 일자로 뻗은 태백산은 강원도민의 정직 한 성품을 길러 속을 줄은 알아도 속이지 못하는 선하고 우직한 바탕을 이루었다. 500년의 수도 로 전국의 문물이 집결하는 서울을 비롯한 기호지방은, 도읍지로서의 양명한 기운으로 총명하고 재능이 많은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 잔산천록의 영향을 받은 충청도는 완만하면서도 호인형으 로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양반기질을 형성하였고, 동해안을 끼고 뻗은 태백산맥과 중간에서 서쪽으로 흘러간 소백산백의 영향을 받은 경상도 사람은 강인한 투혼으로 일기당천의 호한들이 많고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 되었다. 총명하고 영리하며 예능에 뛰어난 전라도민 은 산세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 단결력이 강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것도 산세와 큰 관 련이 있다고 한다. 2) 풍수지리사상과 산 (1)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라는 개념 에는 다소 미신적이고 고루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풍수지리’라는 어휘에서 막연히 느 껴지는, 실생활과 무관할 것 같은 분위기와도 관련이 없지 않은 듯하다. 글쓴이도 그러한 느낌에 서 ‘풍수지리’와 같은 개념으로 ‘지리체계’라는 말을 선택하였지만,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은 그 실체를 올바로 알아보는 일이라 생각된다. ‘풍수’라는 말은 장풍득수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그 개념을 간략히 요약하며, 바람과 물에서 생산되는 신비한 힘과 땅의 생기, 즉 지덕의 힘을 입어 인간이 자연의 신비한 힘을 감응받고자 하는 사상이다. 대전제는 음양오행설에 근거를 두고서 자연을 대우주로,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자 연의 생성원리가 같다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생기는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내맥에 더욱 많고, 이것은 청룡과 백호가 감싸고 있는 혈점에 가장 왕성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왕성한 생기를 보호하여 향수하려면 외부로 흩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선결조건이 된다. 생기는 바람에 흩어지기 쉬우므로 바람으로부 터 깊숙히 감추어져야 하고, 물을 얻어야만 더욱 왕성하게 된다는 것이 기본원리이다. 이러한 의 미에서 장풍득수, 풍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인간은 고래로 주거지역의 풍토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지리적 사고를 성숙 시키고 왔을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사고는 일정한 형태의 체계를 이루게 되었고, 그 형태는 풍 토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지역적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풍수지리설 역 시 이러한 지리적 사고의 성숙, 발전된 논리체계의 하나로서, 우리 민족 역시 우리가 몸담고 있던 지기의 감지능력, 즉 자생적 풍수지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위에 신라가 삼국을 통 일한 후 중국으로부터 확립된 이론체계의 풍수지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민족 특유의 독립된 풍수지리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풍수지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간단히 말하면 명당을 찾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 여 풍수의 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지세가 왕성한 곳에 나라의 도읍이나 궁궐, 마을, 절, 집터 등을 잡아서 번성을 누리고자 하는 양택풍수이며,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명당에 모셔서 그 후손으로 하여금 발복케 하는 음택풍수를 들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허황된 미신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풍수지리 사상에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 순응하고자 하는 동양 전통사상의 기본 맥락과 함께 상당한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임동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풍수의 조화는 산과 하천과 방위 세 가지가 일치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생 활에 있어 절대적인 요소이다. 산이란 옛날에는 수렵의 장소이며, 또 연료를 공급해 줄 뿐만 아니 라 장풍에 있어서도 절대로 필요하다. 만일 산이 없다면 장풍은 불가능하며 산이 있음으로 해서 바람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물은 음료수로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농경생활이나 동식물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된다. 또 방위는 양지와 음지를 결정하고 주택이나 농작물의 성장에 영향을 주므로 생활하는 데 있어 등한히 할 수 없다. 풍수설이란 산, 물, 방위의 세 가지 요소의 조화에 의해서, 인류의 생활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적지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풍수지리에는 상당한 과학성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체로 짐승이 살기를 꺼려 하는 땅 은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양이가 살기 싫어하는 짐승이므로, 고양이가 도망가는 집의 땅 속에는 반드시 지하수의 맥이 흐르고 있기 십상인 것이다. 또한 쥐나 개미가 파고 다닌 땅도 좋 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도 땅 속에 수맥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인데, 개미나 쥐는 땅 속에 서 살 때 어느 정도 습기가 있는 곳에 집을 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를 ‘용’이라 하고 용이 뻗어오는 내맥을 용절이라 한다. 용절의 모습 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요가 지상에 반영되어 산출기를 이루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 므로 산줄기에는 신비한 생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용절에도 생기가 다해 버린 사룡 이 있다. 그러므로 지덕을 많이 받아 누리려면 생룡을 잘 판별해야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간룡법 이라는 것이다. 또한 용절 중 지덕의 생기가 가장 왕성하고 산수의 정기가 응집된 곳을 ‘혈’이라 한다. 이 혈을 중심으로 아래를 향했을 때 혈을 감싸고 있는 왼쪽 산줄기를 좌청룡이라 하고, 오른쪽 산줄 기를 우백호라 한다. 그런데 이 점혈은 매우 정밀한 것이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그 효과를 바랄 수 없다고 한다. (2) 풍수지리의 실제 풍수지리의 가장 기본적인 취락입지는 배산임수이다. 산을 등지고 물 가까이에 형성된 취락 형 태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난방적인 효과는 물론 강이 있음으로 해서 적의 침입을 방지하고 식수 및 교통 등에 매우 편리한 주거지역의 요건이 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모 든 읍취락의 산촌조에 반드시 진산을 명기하고 있다. 취락의 후면에 위치한 진산은 신앙의 대상 인 동시에 그 취락을 보호하고 상징하며, 멀리서도 취락을 대표할 수 있는 수려장엄한 산세의 산 으로 이루어진다. 그밖에도 진산은 나그네나 외부인들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지의 구실 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본 맥락에 따라, 여기에서는 역사상 또는 전설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풍 수지리의 적용 실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다양하게 전해오고 있다. 이는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 설이 도입되었다고 전해지는 신라말보다 훨씬 앞선 시기이므로,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삼국시 대에 이미 풍수지리설이 중국에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자생적인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지상에서의 생활상의 요구로부터 적하한 토지의 선택을 고려하 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가정을 해 본다면, 자생적인 풍수의 개념이 충분히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조간 등 신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한산의 부아산악에 올라 지세를 관망하고서, 강남의 땅이 북은 한산을 끼고, 동안 고악에 웅거하고, 남은 여택을 바라고, 서는 대 해를 막아 천험지리하므로 국도를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유리왕은 위라성이 산수가 험 하고 땅이 기름져서 그 곳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가 등극하기 전에 풍수상으로 대길지인 호공의 집 을 빼앗아 살았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석탈해가 임금이 되기 전 어느날 토함산에 올라가 굽 어보니, 호공의 집터가 초승달 모양의 길지였다. 이에 남몰래 그 집 뜰에다 숫돌과 숯을 파묻고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조상이 이 곳에서 대장간을 하며 살았으나 중년에 집을 빼앗겼다고 거짓 송사하였다. 관가에서 나와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므로 마침내 집터를 차지하게 되 었다는 것이다. 삼일월인 초승달은 날이 지남에 따라 점점 켜져 가게 마련이므로 이 터에 사는 사람도 그 기운을 받아 장치 크게 되리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결국 석탈해가 후일 왕이 된 것 도 이에 기인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고려왕조는 왕조의 창업이 풍수지리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에 따라 태조 완건의 풍 수지리에 입각한 도참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말년에는 후손들을 경계하는 「훈요십조」를 제정하 였다. 그 제2조에는 “새로 개창한 모든 사원은 도선이 점쳐 놓은 산수순역설에 의거한 것이니, 절을 함부로 지어서 왕업은 단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으며, 제8조는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바깥쪽의 지세와 산형은 모두 거꾸로 뻗었으니, 이 곳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면 정 사를 어지럽히거나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터이니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수도를 이전하기 위한 천도논의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수도 송도 (개성)는 철저한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선정되었다. 송도는 전형적인 장풍국의 땅으로, 주산과 좌 우의 청룡과 백호 그리고 남쪽의 주작사라는 산에 의하여 빈틈없이 둘러싸인 일종의 산간분지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방어에는 어느 정도 유리하지만 명당의 규모가 적고 물과 연료가 부족하며 더이상의 발전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은 그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므로 최대의 국사로 신중히 검토되었다. 고려시대 중엽부터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무산되기도 하였다. 도선의 비기에 의하면, 한양은 이씨의 왕도라고 이미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려 왕조는 이씨가 한양 에 왕도를 창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양 땅에다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베고 심었다가 베고 하여, 풍수적으로 이씨의 왕도 자리임을 인정하고 인위적으로 이씨 성을 견제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고 한다. 이태조는 조선왕조를 창업하고, 태조 3년(1394년) 10월에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한양에 대한 이중환의 설명이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의 한 맥이 남으로 5,6백 리를 달려 양주의 여러 작은 산이 되고 북동쪽에 서 비스듬히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된다. 여기에서 또 남서쪽으로 향해 달려가면서 조금 끊어지는 듯하다가 도 우뚝하게 일어나서 삼각산의 백운대가 된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여 만경대가 되며, 한 지맥은 서남으로 달리고 한 지맥은 남으로 내려와 백 악(오늘의 북한산)이 되는데, 이 산이 풍수가가 말하는 소위 충천목성이며 궁성의 주산이 된다. 동, 남, 북, 삼방이 모두 큰 강이고, 서쪽은 바다의 조수를 통한다. 백악은 여러 강이 모여 서로 얽힌 사이에 위치하여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인 것이다. 이처럼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이상적인 풍수지리를 갖추었다는 한양도 결함이 있다 고 한다. 한양의 풍수적인 결함은 동방의 청룡에 허점이 있는 것과 남쪽에 있는 관악산이 음양설 로 보아 화기가 왕성한 점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동대문을 세울 때 문 밖에 반월형의 석축 을 쌓아서 외풍이 들어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은 바 있다고 한다. 또한 관악산의 화기에 대해서 도 해신을 상징하는 해태 석상 2기를 설치함으로써 화귀를 막고자 하였으며, 남대문의 현판을 숭 례문이라 칭하여 화귀를 견제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군 소개면 소륜산에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던 명나라의 장군 이여 송이, 산세가 좋아서 장치 큰 인물이 나와 중국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여 산의 지맥을 잘라 아직 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경상남고 김해의 구지봉은 이름 그대로 산의 모양이 기어가는 거북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 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는 전형적인 영구하산형이어서, 이 산세대로라면 거북처럼 저력이 있 고 오래 버틸 힘이 있어 조선이 언젠가는 또다시 득세하여 왕업을 이룰 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두려워한 일본은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거북의 모리 부분인 구지봉의 맥을 잘라 버렸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비봉산에는 왕권의 안정과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퍼뜨린 옛이야기가 지금 까지 전하고 있다. 비봉산은 원래 대봉산이라 불리었는데, 고려 중엽 이후 진주에서 출중한 인재 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오게 되면 나라에 반영하는 사람 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여, 진주의 봉황새를 날려보내기로 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보아 대봉산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상이니 이 산의 혈을 파 없애고 산세를 억누르게 절을 지을 것이며, 대봉 산이란 이름 대신 봉황이 날아가 버린 산이라는 뜻의 비봉산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수지리설은 미신적인 여러 가지 요소를 함께 지닌 채 우리 민족의 사상체계 중의 하 나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사상의 기본적인 맥락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지향하 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산을 숭배하고 신성시하며 자연과 합일 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던 민간신앙으로서의 풍수지리사상의 본질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살며 쌓아 온 문화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 5 장 새 1. 새와 상징 선사시대의 유물과 삼국시대의 고분벽화 등에는 새의 형상을 새긴 문양이나 그림이 많이 나타 나고 있다. 이들 벽화에 나타난 그림에서 새와 관련되거나 새의 깃을 꽂은 사람이 상류계급의 귀 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새를 숭배하는 특별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성인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는 설화에 새가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례가 많으 며, 조류의 이상이나 변칙적인 행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암시성 혹은 상징성을 부여한 기록이 많 이 있다. 이는 고대인들이 조류에 대하여 신성시하고 나아가서는 예시적인 영물로 인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고대인들이 이처럼 새를 숭배하고 신성시하며 새에 대하여 영험성을 인정하였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일까?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새에 관한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은 시대나 지역에 관계 없이 공통 분모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 고 있다. 새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상징과 초점은 ‘날개’이다. 즉 날 수 있다는 점이다. 높고 넓은 창공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느낄 수 있는 공감대는 인간의 본성에 비 추어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이상인 하늘에 가장 가까이 사는 생물, 그것은 높고 신비스러우며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누구나의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다. 특히 의식 세계가 미분화된 고대인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여 왔으므로 하늘을 마음 대로 날아다니는 새,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날개에 대하여 큰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독특한 관점으로 새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왔다. 먼저 태양숭배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예를 들면 평남 용강군 사신총이나 쌍영총의 벽화 등에서 해 와 달을 새와 토끼의 상으로 대신하여 나타낸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관에 새 깃을 꽂고 다닌 복식풍속이 생활화되었으며, 백제 무녕왕의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도 깃을 꽂은 조관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는 머리나 관에 새 깃을 꽂고 다녔는데, 이 때 조관은 귀인을 표시한 것이며 그 이유는 새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고대인의 영혼불멸사상과 관련된 점이다. 옛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떠난 영 혼이 새를 타고 공중을 날아다닌다고 생각하였다. 「위지」동이전에서 ‘이대조우송사’라 하여 큰 새의 날개로 영혼을 실어 보낸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한의 장의풍속에 큰 새의 날개를 시체와 함께 부장하였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혼백을 모셔두는 혼백틀에도 위에다 새의 모양의 조 각하여 놓았으며 무덤과 관련된 각종 부장품, 특히 관식에 새의 형상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이러 한 고대신앙을 반영하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습속은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족과 뉴질랜 드의 마오리족은 장송행진시에 죽은 새의 날개를 공중에 날리는데, 이 새를 ‘다른 세계로 들어 가는 길의 안내자’라 불렀다. 인도차이나의 샴족은 장송시 상실을 만들고 그 관의 뚜껑에 죽은 자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새나 동물의 지형으로 꾸미는 습속이 있으며, 흑태족은 화장 때 날개 가 달린 목마를 함께 태우는 장속이 있다. 이와 같이 고대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이 공중을 비행하는 것으로 믿고, 영혼의 비행을 위해서는 새나 새의 날개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즉 새는 천상의 영혼과 육신의 세계 를 내왕하는 연락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히 새를 신성시 또는 영물시하 는 관념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과 영혼과의 접촉을 위한 중매자로서 흔히 새의 깃이 등장하게 되었다. 깃을 신통의 상징으로 여기는 풍습은 오늘날에도 무당사회에서 전승되고 있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는 반드시 모자에다 새 깃을 꽂는데, 이는 무당의 영혼이 새 깃을 타고 다른 세계(저승)의 영혼과 접촉 또는 교류할 것을 상징하기 위한 ‘신탁’의 징표인 것이다. 또한 고대의 칼은 칼자루가 두 마리의 오리나 새, 닭 모양을 하고 있음이 세계의 공통적인 현 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으로, 관련 학자들의 관심을 끈 바 있다. 우리나 라의 출토품으로는 평양에서 출토된 동검과 대구에서 나온 동검 등을 들 수 있다. 이 새 모양의 자루가 달린 칼을 ‘안테나식 검’이라 하여, 무기로서의 칼이 아닌 신탁용의 칼로서 천체의 빛 을 받아내리는 주도로 보고 있다. 때로는 칼에 새 모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는데, 이 때의 새는 모 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자’로서 선택된 것이다. 보다 민간습속적인 차원에서 새에 관한 신령성 또는 주술적 믿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 이 있다. 출산풍속에서는 임산부가 닭고기와 새고기를 먹을 수 없도록 하였다. 병자를 위한 푸닥 거리에는 닭이 쓰이는데, 닭의 양 날개 안에 ‘대수대명’이라 써서 넣고 굿을 하면 닭이 역신을 물리칠 수 있다고 본 데서 나온 것이다. 이 때 ‘푸닥거리’란 말은 ‘푸닭거리’에서 온 것으로, 닭으로 풀어준다는 뜻이라 한다. 또한 솟대 위에 나무로 만든 새를 두어 마을을 지키고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는 기원을 담기도 하였다. 혼례 때 역시 닭을 사용하는데, 이는 혼례의식이 하늘에 고하는 고천의식이므로 두 개의 성이 합해지는 것을 천신에게 전하는 무속적인 기능을 지닌 것이 다. 지금도 혼례식 때 고천문이라 하여 혼인의 성립을 천신에게 고하는 절차가 있다. 새에 관한 옛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에 따라 새의 행동이나 울음으로 앞일을 예측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즉 조류가 정상적인 궤를 벗어나 변태적인 이상을 나타낼 때 그것을 앞일에 대한 암시나 전조, 혹은 상징으로 간주하였으며 거기에서 어떤 예시성을 탐색하고자 하였 다. 구체적인 예로는 백제가 멸망하기 한 해 전인 의자왕 19년(659년)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권18에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나서 1년 뒤에 국가가 망하자, 그들은 태자궁에서 있었던 괴사가 이를 암시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고 구려의 평원왕 25년(583년)에는 궁궐에 처음 보는 이상한 새가 모여들었는데, 그로부터 두 달 후 에 대홍수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때의 기이한 새는 홍수를 예시하는 하나의 전조로 등장한 것이라 본 것이다. 새에 부여한 이와 같은 암시성과 예시성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아침 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거나 불길한 징조라는 속언이 전해 오고 있으며, 새에 의한 농사점이나 새점 등이 많이 성행하고 있다. 이처럼 새에 관한 갖가지 의미 부여와 함께, 새를 중심으로 하여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되어 왔 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새가 자유로이 그리고 높이 날 수 있다는 데서 고대인들의 숭천사상과 자 연스럽게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모든 불안과 공포, 재난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미 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영생에 대한 희구, 이러한 모든 갈망이 새가 되어 자유로이 훨훨 날아 다니고 싶은 본성으로 모아져, 새를 신성시하고 동경하며 커ㅏ란 의미 부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개별 새를 중심으로, 옛사람들이 그 새에 대해 부여한 상징과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민 족의 사상과 정서의 일면을 함께 느껴보고자 한다. 2. 까치 까치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언제나 산골 외딴집, 궁 궐의 처마 할 것 없이 어느 곳에서나 함께하면서 우리의 삶에 정감과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함 께 사는 다정한 이웃처럼 새벽에 눈을 뜨면 밤새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토담 용마름 위에서 눈이 왔다고 ‘깍깍깍’, 낯선 손님이 온다고 ‘깍깍깍’ 울어대는 까치. 소박하고 간결한 흑백의 배 경, 경쾌하고 명료한 소리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것보다는 담백하고 단아한 것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의 기질과 매우 잘 부합되고 있다. 이러한 국님의 뜻이 모아져서 까치를 우리나라의 국조로 삼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 겨레의 삶 속에서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온 까치는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우리에게 길조로 환영을 받고 있다. 또한 까치는 높고 멀리 날아다니지 않고 언제나 사람들의 주 위에서 친근하게 지내는 새이므로, 까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점은 신성시, 영물시하는 측면보다 는 인간의 생활과 관련지워 그 의미와 상징으로 인간세상의 기복과 교훈으로 삼고자 한 면이 크 다. 즉 까치를 통해 길상과 기쁨을 나타내고 옳고 그른 것의 분별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한편, 까치는 마을을 수호하고 민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서낭신의 사자로서, 신탁을 맡은 영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1) 길상의 새 우리나라 민화의 화제중 길상을 상징하는 길상화로서 봉황, 용, 거북, 기린의 그림과 함께 까치 그림인 군작도를 꼽고 있다. 봉황이 상상 속의 새인 것을 고려하면, 새 중에서 길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존재로 까치가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까치의 길상적 그림을 문자로 도 안화하여 공예품이나 의복의 장식 또는 무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예로부터 까치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새라 하여 ‘화작’이라 불리어 왔다. 회화에서 한 쌍 의 까치를 그린 쌍작도는 쌍희의 뜻을 나타내며, 반가의 부녀자들은 치맛단에 희자를 무늬로 수 놓아 기쁘고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또한 뒤주나 곳간의 자물쇠에 도 쌍희자의 문양을 넣어 항상 양식과 재물이 넉넉한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바람을 나타내었고, 베갯모나 필통 등 각종 생활용품에 이러한 문양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오동나무에 까치가 앉아 있으면 동희라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오동의 ‘동’자 가 ‘동’과 음이 같아 길함이 겹친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나 소식이 온다고 하였다. 또한 설날 새벽에 까치소리를 들으면 ‘청참’이라 하여 그 해 농사가 잘되고 행운이 온다고 하였다. 경기 도, 충청도 등 중부지방에서는 까치가 물을 치면 날이 개고, 정월 열나흗날 까치가 울면 수수가 잘되며, 까치집 있는 나무 밑에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호남지방에서는 까치둥우리가 있는 나무의 씨를 받아 심으면 벼슬을 한다는 속신이 있으며, 충청도에서는 까치집을 뒷간에서 태우면 병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까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잘 반영된 내용으로, ‘까치사람’이라 전해 오는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의 9대왕 성종은 어느날 밤 평복으로 변장을 하고 미행을 나섰다. 대낮처럼 밝은 달을 쳐다보며 막 어느 외딴 동네를 지나는데 멀리 사립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오더니, 문 앞의 나 무 밑으로 다가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깍깍 깍깍’하며 까치소리를 내는 것이 었다. 그러자 나무 위에도 사람이 있었던지 남자 목소리로 ‘깍깍깍’하는 까치소리가 났다. 이 괴이한 광경에 성종이 ‘에헴’하고 인기척을 내자 여인은 황급히 사립문 안으로 사라졌고, 이어 나무 위에서 내려온 남자도 서둘러 여인의 뒤를 따랐다. 성종이 따라 들어가서 곡절을 물었다. “젊어서부터 과거공부를 하여 나이 50이 가까웠는데도 낙방만 거듭해 왔답니다. 일찍이 들으 니 집의 남쪽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합격한다기에 10년 전 아내와 이 나무를 심었습 지요.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까치가 집을 짓지 않아, 내일 모레 과거시험을 앞두고 아내와 같이 희롱삼아 까치소리를 내면서 화답해 본 것입니다.” 성종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을 ‘지나가는 길손’이라 밝힌 뒤 집을 나왔다. 이틀 뒤 과거시 험장에서 제목을 받은 전날 밤의 선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목은 다름아닌 ‘인작’이었던 것 이다. 다른 선비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채 붓을 들지 못하였지만 이 선비는 단숨에 글을 써내려갔 으니, 급제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까치는 반가운 사람이나 소식을 알리는 길조의 새, 부자가 되거나 벼슬을 할 수 있게 하는 행운의 새로 인식되어 왔다. 옛 시가중에는 이러한 까치의 상징을 잘 나타낸 작품들이 있다. 조선시대의 명승 서산대사가 벗을 기다리다가 빨리 오기를 재촉하여 간접적인 표현을 담은 시를 띄웠는데, 그 벗이 이를 받고 즉시 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새벽의 까치소리에 헛점을 친 것이 몇 번이던가. 어흠 하며 문 두드릴 날이 어느 날인지 모르겠네. 또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 이옥봉은 조원의 소실이 되었는데, 그의 작품 중 조원이 오기를 기 다리면서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약속이 있었는데 어이 이리 더딘지요. 정원의 매화가 지려 할 때인데 홀연한 나뭇가지 위의 까치소리에 헛되이 거울 앞에 앉아 눈썹만 그립니다. 동심의 세계에서도 까치는 정답고 반가운 새로 친근한 대상이 되어왔다. 아이들이 이를 갈 때 빠진 이를 지붕에 던지며 “까치야, 까치야, 헌 이 물어가고 새 이 다오”라는 동요를 불렀다. 또 한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날이라 하고, 이 날에 입는 어린이 설빕을 까치두루마기라 하였다. 까치 설날은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그 하루 전날인 섣달 그믐날에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까치의 이름을 붙여 설날의 기쁨을 기대하고 누리게 하려는 정겨운 배려에서 생겨난 것이다. 2) 보은과 정의의 새 까치는 또한 은혜를 알고 이를 갚을 줄 알며,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까치와 관련된 설화나 전설에서는 까치가 인간에게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 는 내용이 많이 다루어져 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까치의 보은」이라는 설화의 내용을 보기 로 한다. 옛날에 어느 선비가 길을 가던 중에 뱀 한 마리가 둥지 안의 새끼까치를 삼키려 하는 것을 보 았다. 선비는 재빨리 활을 쏘아 뱀을 죽이고 까치들을 구한 디 다시 길을 떠났다. 날이 어두워 산 속의 빈 절간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떴더니 뱀이 몸을 감고서 “낮에 남편을 죽인 원수를 갚으러 왔다. 만약 절 뒤에 있는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선비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세 번 울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뱀은 스르르 몸을 풀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기 이하게 생각한 선비는 날이 밝자마자 종각으로 가보았더니 종 아래에 까치들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까치들은 은혜를 갚기 위해 머리로 종을 받아 종소리를 낸 뒤 죽었던 것이다. 또한 뱀에게 잡혀먹히게 된 까치를 구해준 사람이 그 뒤 뱀의 독이 있는 딸기를 먹고 죽었는 데, 까치가 온 몸을 쪼아 독을 제거하여 은인을 살렸다는 내용도 있다. 까치의 정의의 심판관으로 표현된 ‘까치의 재판’이라는 설화를 살펴보자. 아득한 옛날에 참새와 파리가 자주 싸웠다. 이 때 까치가 이들을 불러 인간에게 해가 됨을 들 어 꾸짖었다. 파리가 재빨리 참새의 악행을 낱낱이 고해 바치자 까치는 이를 옳게 여겨 참새의 종아리를 때려 주었다. 참새는 아파서 톡톡 뛰며 파리가 인간에게 끼치는 악행이 더함을 고하였 다. 이에 까치가 파리의 종아리를 때리려 하자 파리는 앞발로 싹싹 용서를 빌었다. 까치는 참새와 파리에게 다시는 싸우지 말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명하고, 이를 명심하도록 하기 위해 그 뒤에도 참새는 톡톡 뛰어다니게 하고, 파리는 앞발을 싹싹 빌고 있게 하였다. 한편, 세시풍속과 관련된 아름다운 전설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있다. 음력 칠월 칠석에 견우와 직녀는 수천 수만 마리의 까치와 까마귀가 서로 꼬리를 물고 은하수에 길게 다리를 놓은 오작교를 건너서 만나게 된다. 칠석이 지난 가을에는 까치와 까마귀의 머리털 이 벗겨져 있는데, 이는 견우와 직녀가 새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기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해석도 있다. 근래에 발견된 고구려 고분인 덕홍리벽화 고분에서도 이러한 견우직녀도가 그려져 있어, 견 우와 직녀의 설화가 당시에도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설화나 전설들은 까치가 그만큼 우리 겨레에게 사랑과 아낌을 받아 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또한 옛사람들은 가장 친근한 길조인 까치를 통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은혜를 아는 바른 마음씨를 가질 것을 시사하고자 하였다.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숲 속으로도 곧잘 날아들어 ‘깍깍깍’ 울어대는 까치. 흑과 백의 단아한 자태, 경쾌하고 명료한 울음소리. 바쁜 일손을 멈추고 날렵하게 앉아 있는 까 치를 보노라면 왠지 반갑고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감대이리라. 자연에 대해 무심코 보아 넘기기 쉬운 오늘날. 까치에 담겨져 있는 우리 겨레의 소박하고 아름 다운 정신을 되살려 보는 것도 오늘의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3. 학 우리 민족은 날짐승 중에서 학을 가장 귀한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학의 고고한 자태와 함께 새 중에서 가장 장수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깨끗하고 청정한 백색에 긴 목과 다리. 어딘지 모르게 고고하고 고적한 학의 자태는 세속에 물 들지 않은 선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학을 선학이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 생불사한다는 십장생(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중 하나로서, 기품과 장 수를 상징하는 길상의 대표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까치가 우리 민족에게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존재로서 길상을 나타내는 새라면, 학은 품격이 높고 귀한 존재로서 길상을 나타내는 새 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학은 고고한 기품을 지닌 십장생의 하나로서 옛 선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따라서 학을 그리기를 즐겨하고 학을 노래하는 시조를 읊었으며, 복식이 나 여러 가지 공예품에 학의 문양을 즐겨 사용하였다. 1) 문양에 나타난 학 현재까지 발견된 우리나라의 유물을 보면 청동기시대부터 여러 가지 공예품에 학의 문양이 나 타나고 있다. 이 학문양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매우 성행하여 도자기, 병, 잔, 동경 등에 시문하여 장수와 길상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당시 사람들은 장수를 송축하는 선물을 교환할 때는 그 선물에 반드시 학문양을 넣었다고 한다. 학문양을 기물에 새기면 장수, 행 복, 귀인, 기서, 풍요해지는 운이 찾아든다고 믿어 즐겨 쓴 것이다. 이들 문양에 나타나고 있는 학의 모습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고려 시대의 학은 날개를 마음껏 활짝 펼치고 다리를 수평으로 쭉 뻗치고 있는 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 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날개의 윗부분과 다리가 맵시 좋게 약간 구부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어 실제의 학 모습에 더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에 나타나고 있는 학의 문양은 크게 몇 가지로 그 유형을 살펴볼 수 있다. 즉 학과 구름을 조화시킨 운학문, 학이 입에다 불로초, 나 뭇가지, 구름, 꽃 등을 물고 있는 화손학문이 대표적인 것이며, 그 외에도 학과 소나무를 배치한 송학문 등이 있다. 재미있는 현상은 이들 유형의 공통점이 대부분 장생을 의미하는 대상과 짝을 맺고 있다는 점이 다. 즉 구름, 소나무, 불로처 등은 모두 십장생에 속하는 것으로서, 장수를 상징하는 학에다 이들 을 배치시킴으로써 불로장생에 대한 의지와 갈망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문양이 아닌 조각품 중에 서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청동학구상을 보면, 거북의 등에 학이 직립으로 서 있는 모양을 형 상화하여 십장생의 두 동물을 함께 조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 고 원초적인 불로장생을 기원하고 송축하는 마음을 문양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들 유 형중 가장 대표적인 운학문과 화손학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운학문 운학문은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학을 나타낸 것으로, 학문양 중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문양 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고대로부터 상운, 선학의 개념이 있어 회화, 조각, 공예 등 조형미술에서 다양하게 쓰여졌다. 고분벽화나 건조물에서는 청상의 길상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구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구름 사이에서 학을 타고 내려오는 천신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구름은 ‘ 상운서일’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학은 다른 이름으로 ‘일품조’라 부르기도 하였다. 구름과 학은 각기 장수를 나타내므로 십장생문의 하나로 모든 공예 의장에서 상서로움을 상징 하는 문양으로 널리 쓰였다. 이러한 운학문이 그릇 등의 표면 장식무늬로 쓰여진 것은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에서부터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운학문은 삼강청자에 잘 나타나 있다. 여 기에는 한 쌍의 선학이 구름 사이에서 비무하는 모습, 또는 두 마리의 확인 긴 목을 서로 휘감고 학무하는 형상이 은은한 청자의 바탕색을 배경으로 하여 신비스럽게 새겨져 있다. 또한 고려시대 의 동경인 쌍학비운문경에는 학 두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다리를 쭉 뻗친 모습으로 아래 위에 배치되어 있고 좌우에는 구름이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더욱 다양하고 추 상적인 운학문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범위도 자기와 그릇에서부터 문갑, 함, 필통, 베갯모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구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운학문은 학문양의 기본형태라 할 수 있다. 즉 학이 있는 곳에는 항상 구름이 함께하는 것이 일반화된 양상이므로, 다음에 살펴볼 화손학문 등도 독립되어 나타나기보다는 운학문과 함 께 복합된 양상을 띠는 것이 많다. (2) 화손학문 ‘화손’이란 말은 꽃을 먹는다는 뜻이나, 여기에서는 꽃을 입에 물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학이 꽃가지나 나뭇가지 등을 물고 나는 문양을 화손학문이라 한다. 원래 새는 꽃가지에 앉기 는 하여도 꽃을 물고 날지는 않는다. 꽃뿐만 아니라 새가 입에 무엇을 물고 다니는 형상은 화조 화의 화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그러나 공예품 등에는 이런 화손조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한나라의 사천성에 있는 침부군석궐에 봉황이 옷감 을 물고 있는 문양이 있으며, 주작문화당에 구슬을 입에 문 주작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 이후 조나라에 석호라는 만왕이 있었는데, 그는 모든 일을 중국의 전통적인 천자의 자리에서 군림하고 자 하였다. 중국의 천자란 칭호는 천제의 명을 받들어 천하만민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때 천제가 천자에 대하여 칭찬을 할 때는 여러 가지 길한 징조로 그 뜻을 나타냈고, 경고를 할 때는 천지이변을 내려 이를 깨닫게 한다는 전통적인 믿음이 있었다. 이에 석호왕은 한나라 때의 조형에서 착안, 천자인 자신이 내리는 소가 천제의 대리자의 고시이므로 신성한 것이라 하여 ‘ 봉소’라는 것을 만들었다. 즉 나무로 만든 봉황에 아름다운 칠을 하여 오색종이에 쓴 소칙을 입 에 물린뒤 궁녀를 통하여 높은 대위에서 도르래로 춤추며 내리게 하고, 대의 밑에서는 대신이 경 건하게 이 봉소를 받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새가 꽃 이외의 것을 물고 있는 형상의 문양은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꽃가지를 물고 있게 된 것은 불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향화공양이라 하여 향과 꽃으 로 공양을 하기도 하였는데, 일본 대창집고관에 소장된 남북조시대의 석불광배 등에 화손조의 예 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입에 물을 물고 있는 새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불교의 향화공양 과 자연스럽게 접합되면서 꽃가지를 입에 문 화손조가 등장하였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이 러한 조형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꽃가지보다 주로 장수길상을 상징하는 구름, 소 나무 가지, 불로초 등을 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려시대의 동경인 송손학문경은 학이 소나 무 잎이 달린 가지 세 개를 물고 나는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학, 소나무, 숫자 ‘3’등 길상과 장수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송학문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2) 복식에 나타난 학 학의 이미지는 이상적인 선비의 기상과 매우 잘 부합된다. 덕망높은 선비의 고결하고 숭고한 기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전통복식에서는 학을 그 상징으로 삼고 있다. 즉 조선시대에는 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을 학의 모습을 본떠 ‘학창의’라 하였는데, 흰 바탕의 창의에 깃, 소맷부리, 도련의 둘레를 검은 색으로 둘러 학과 같이 깨끗하고 기품있는 선비 의 기상이 돋보이도록 하였다. 한편, 당시 문무관 관복의 가슴과 등에 흉배를 부착하였는데 문관은 학을, 무관은 호랑이를 각 각 품위에 따라 다르게 붙였다. 학은 고고한 학자풍의 문관을, 호랑이는 용맹한 무사풍의 무관을 상징한 것이었다. 문관의 경우 정3품 이상은 쌍학을, 정3품 아래 종9품까지는 단학을 붙였으며 무 관의 경우도 정3품 이상은 두 마리의 호랑이를, 정3품 아래는 한 마리의 호랑이를 붙였다. 이처럼 학문을 숭상하는 문인을 학으로 비유하는 상징적인 표현은 관식의 품계를 나타내는 의 관제도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관복에 학흉배를 단다 하여 문관인 동반을 학반이라고 도 하였다. 문관의 흉배에 수놓아진 학문은 대부분이 불로초나 소나무가지 등을 물고 있다. 또한 학의 주 위에는 구름과 장생무늬가 여러 가지 색으로 수놓아져 있으며, 두 마리일 경우에는 아래위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1857년에 이한철이 그린 추사의 초상화에 나타나고 있 는 흉배에는 쌍학이 소나무 가지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도 예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에 뒤에 늘어뜨리는 띠인 ‘후수’에도 학과 구름을 수놓았 으며, 주머니, 베갯모 등 여러 가지 물품에도 학을 시문하여 여인네의 정성스런 바느질 한 땀 한 땀으로 길상과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을 수놓았다. 3) 문학과 민속에 나타난 학 학은 고시조에서 즐겨 다루어진 대상물이다. 조류 중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새라 천년을 장수한 다고 하여 신선으로 상징하기도 하였고, 고매하고 기품있는 자태로 학덕 높은 선비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선비들은 깃이 떨어진 학을 속세에 묻혀 사는 자신으로 읊었으며, 구름 위를 높이 나는 학을 노래하여 선비의 이상을 마음껏 펼치기도 하였다. 송강 정철의 시조 중에는 자신을 학으로 읊은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있다. 문득, 긴 깃이 다 떨어 지도록 속세에 묻혀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고적해 하는 선비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다. 청천 구름 밖에 높이 뜬 학이려니 인간이 좋더냐 무삼으라 내려온다. 장지치 다 떨어지도록 날아갈 줄 모르는다. 조선시대의 문관 허정이 지은 시조에서는, 눈이 내린 아름다운 달밤에 학창의를 입고 호수에 모습을 비추어 보는 선비의 자태가 신선과 다를 바 없음을 한 폭의 그림처럼 잘 나타내주고 있 다. 서호 눈 진 밤에 달빛이 낮 같을 제 학창을 이미차고 강고로 내려가니 봉해의 우의선인을 마주본 듯하여라. 최호가 지은 시에서는 학에 대한 동경과 신비스러움이 은은하게 나타나 있다. 바다에 배가 지나간 자취를 얻기 어렵고 청산에 학이 날아간 흔적을 보지 못하네. 학이 장수한다는 데서 유래하여 생겨난 여러 가지 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학발동안’이라는 말은, 머리는 학의 깃처럼 하얀 백발이나 얼굴은 붉고 윤기가 돌아 아이들 같다는 뜻으로, 흔히 동화나 전설 속의 신선을 형용하는 말로 사용된다. 장수를 다른 말로 ‘학수 ’라고도 하는데, 이는 물론 학이 오래 산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외에도 학의 목이 긴 데서 나온 것으로 ‘학수고대’란 말이 있는데, 학의 목처럼 목을 길 게 늘이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몹시 기다림을 일컬을 때 쓰인다. 또한 학의 고적한 자태를 비유하 여 ‘학고’라 하면 외롭고 쓸쓸한 사람을 말하고, 학의 곧은 자태를 비유하여 ‘학립’이라 하 면 쪽 곧게 선 태도나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학립과 관련하여 ‘학립계군’이라 하면 여럿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을 선비로 상징하여 ‘학명지사’라 하면 몸을 닦고 마음을 실천하는 선비를 말하며, ‘학명 지탄’이라 선비가 은거하여 도를 이루지 못함을 탄식하는 것을 뜻한다. 한편, 학은 한밤에 울음 을 우는데, 그 소리가 맑고 처량하여 학의 울음소리란 뜻의 ‘학려’라는 말이 ‘문장이나 말이 가엾고 처량한 것’을 이르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학과 관련된 속담을 몇 가지 살펴보자. 고본 「춘향전」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본래 기생년 수절 말이 가소롭다. 까마귀 학이 되며 각관 기생 열녀되랴. 이제로 바삐 불러 현신시키라. 여기에서 ‘까마귀 학이 되랴’라는 말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근거가 없이는 본시 타고 난 대로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 논 데 용 나고 학이 논 데 비늘이 쏟아진다’라는 속담이 있 는데, 이는 훌륭한 사람의 행적이나 착한 행실은 반드시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탈춤 중에서 학무가 있다. 새의 탈을 쓰고 추는 탈춤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고려 때 발생하여 궁중행사나 다례의식 등에서 연희되었다. 다른 동물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인 사자춤 등과는 달리, 이 학춤은 청아하고 운치있는 독특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이밖에도 우리 민족은 천 개의 종이학을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아름답고 운치있는 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학을 귀하고 상서로운 새로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과 같은 높고 청하 한 경지를 동경하고 이상향으로 삼아왔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이러한 옛 선비들의 정신을 이 어받아, 학처럼 여유롭고 청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밭을 가꾸어 나갈 수 있었으면 한 다.
4. 기러기 기러기는 인간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은 적으면서도 그 성질이나 특성으로 인해 우리의 삶과 정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새이다. 황량한 가을 하늘에 무리지어 멀리 날아가는 기러기떼는 보는 이에게 저마다의 감흥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나간 이별을 생각하기도 하며, 때로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무상에 젖기도 한다. 이처럼 기러기는 순수한 슬픔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서 시, 시조, 가곡 등에서 그리움과 이별과 고독을 노래할 때 많이 등장하고 있는 소재 중의 하나이다. 기러기는 또한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로서 가을을 알리는 새인 동시에 소식을 전해 주는 새로도 인식되어 왔으며, 암수의 의가 좋고 사랑이 지극한 새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혼례식 때 신랑이 신부집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목안)을 전하는 습속이 유래되었으며, 혼인예식을 일명 ‘전안례’라고도 한다. 「규합총서」에서도 기러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문에 돌아가니 신이요, 날면 차례 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이요, 밤이 되 면 무리를 지어 자되 하나가 순경하고, 낮이 되면 갈대를 머금어 주살(살을 매어서 쏘는 화살)을 피하니 지혜가 있기 때문에 예폐하는 데 쓴다. 이와 같이 기러기는 사랑이 지극한 새, 가을과 같은 애잔한 슬픔을 주는 새,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다. 1) 사랑의 새 기러기는 암수의 의가 좋을 뿐만 아니라 짝이 죽으면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 정절의 새이다. 이처럼 사랑이 지극하며, 또한 때를 알고 순서가 정연한 새로서 사람의 도리를 안다 하여 기러기 안자에 ‘사람 인’변을 쓰게 된 것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봄에 갔다가 가을에 돌아오는 철새를 이르는 것이고, 순서가 정연하다는 것 은 기러기의 행렬이 항상 선두를 중심으로 하여 ‘A’의 모양으로 가지런히 질서를 지켜 날아가 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남의 형제를 경칭할 때 기러기의 행렬과 같이 순서가 있고 의가 좋 다 하여 안행이라 하고, 순서를 다른 말로 안서라고도 한다. 기러기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와 사랑이 깊고 정절을 지키는 새라 하여 혼례 때 사용된 다. 신랑은 신부집에 이르러 혼례의 첫 의식으로 기러기를 바치는데, 원래는 산 기러기를 썼으나 구하기가 힘이 들고 번거로워서 나무로 만든 목기러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절차와 방법은 다 음과 같다. 혼례식날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가 신랑의 앞에 서서 가게 되는데, 이 때 기럭아비는 첫 아들을 낳고 후덕하게 사는 사람을 택한다. 일행이 신부의 집에 이르면 신부의 아버지가 문 밖으로 나와 서 신랑을 맞이하게 된다. 신랑은 기러기를 받아 머리를 왼쪽으로 가도록 안고 대청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은 뒤 기러기를 상 위에 내려놓으면 시자가 이를 받는다. 그 다음에 신랑이 재배를 하게 되는데, 절이 다 끝나기 전에 신부의 어머니나 여자하님이 기러기를 치마폭에 싸가 지고 안방으로 들어가 예를 행한 뒤 후행이 돌아올 때 함께 시댁으로 가지고 오게 된다. 이 때의 기러기는 신랑과 신부 두 사람에게는 사랑의 언약을,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해로 의 서약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사용된 것이다. 이옥이라는 문인이 지은 연대 미상의 다음 시에서 혼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신랑은 목을 쥐고 신부는 건치를 쥐었으니 그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 복 있는 손으로 홍사배 들어 낭군에 권하나니 합환주를 첫 번 잔에 아들 낳고 세 번 잔에 오래 사네. 이러한 기러기의 상징성으로 인하여, 홀로 된 외로운 신세를 “짝 잃은 기러기 같다”고 하며, 짝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어 ‘외기러기 짝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러기는 사랑 이 지극한 새이므로, ‘외기러기’라는 말은 하나의 상징어로서 사랑을 잃거나 홀로된 사람을 일 컬을 때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애수의 새 기러기는 까치, 제비 등과 같이 사람과 가까이 사는 새가 아니며,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먼 거 리에 있는 새이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기러기만큼 우리에게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새는 드물 것이다. 봄과 여름에는 산과 들, 그리고 집 가까이에 온갖 새가 날아다니며 저마다 지저귀지만, 가을과 겨울철에는 새들의 활동이 둔한데 오직 기러기만이 서릿발치는 창공을 유유히 날아, 보는 이에게 감흥을 주게 된다. 또한 삭막한 겨울의 창공과 자연을 만끽하는 기리기야말로 만인의 사 랑을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의 정서와 함께 어우러져 황량한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의 풍경 은, 즐거움이나 기쁨보다는 사색적이고 애수에 젖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또한 그 울음소 리가 매우 구성지고 처량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무심한 마음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특 히 고향을 떠난 나그네, 이별의 슬픔을 가진 이들과 같이 고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감회 가 더욱 진할 것이다. 기러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정서는 예로부터 시, 시조, 그림 등에서 풍부하게 표현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공감대를 이어 시, 가곡, 그림은 물론 동요나 삽화 등에서도 사색적 이며 고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고려, 조선시대에 귀양을 떠난 선비들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고향을 그리는 그들의 적 막한 심정을 읊은 시조 중에 기러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조선시대의 문인인 조명리가 지은 시조를 들어 본다. 기러기 다 날아가고 서리는 몇 번 온고 추야 김도길사 객수도 하도하다. 밤중만 만중월색이 고향 본 듯하여라. 또한 기러기는 이별의 슬픔에 노래되었다. 혼자 나는 외기러기를 보고 선인들은 자신의 외로운 처지로 여겼고, 구성지게 우는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더욱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이정보의 시조에는 이런 이별의 감상이 잘 나타나 있다. 꿈에 임을 보러 베개에 지혀시니 반벽 잔등에 앙금 참도찰사 밤중만 외기러기 소리에 잠 못 이뤄하노라 다음으로는 늙음과 세월의 흐름을 한탄하는 탄로의 의미로 기러기가 많이 쓰이고 있다. 기러기 떼가 날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벌써 가을이 오고 또 한 해가 멀지 않아 지나갈 것을 애석히 여기 며 선인들은 자신의 늙어감을 탄식하였다. 서릿발 치고 달 밝은 가을밤에 애처롭게 우는 기러기 소리는 세월의 무상함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역시 이정보가 지은 시조 한 수를 들면 다음 과 같다. 은한은 높아지고 기러기 우닐 적에 하룻밤 서릿김에 두 귀밑이 다 세거다. 경리(거울 속)에 백발쇠용을 혼자 슬퍼하노라. 이 외에도 동양화가 화조화에는 기러기와 갈대를 복합한 여안이 그 소재로 많이 쓰이고 있다. 갈대가 바람에 좌우로 쓰러지는 위에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는 모습은, 시정이 넘치고 계절감각을 강렬히 풍기는 사색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러한 여안문양이 고려시대의 동경에 나타나고 있어, 동경의 문양으로는 희귀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조에 오면서는 산수화의 화제와 백자, 목공예 품, 자수 등에 이 갈대와 기러기의 운치있는 문양이 널리 쓰이고 있다. 3) 소식의 새 기러기는 예로부터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도 널리 인식되었다. 이는 기러기가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멀리 한나라의 고사에서부터 이다. 한무제 때 소무라는 사람이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해상 무인처에서 억류되어 10년 간이나 고생을 하였는데, 기러기 다리에 백서를 매어 자기의 소식을 전해 마침내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 는 줄거리이다. 이러한 고사와 관련하여 조황이 지은 시조가 있다. 북해상 찬바람에 울고 오는 저 기럭아. 이상코 견빙할 줄 네가 능히 알았고나. 사람이 만물영되어 저 지각이 없을쏘냐. 고전소설 「적성의전」에서 성의는 기러기편에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다시 소식을 전했다는 내 용이 있으며, 「춘향전」의 이별요 중에는 “새벽서리 찬바람에 울가 가는 저 기러기, 한양성내 가거들랑 도련님께 이내 소식 전해주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달거리」라는 단가에서도 기러기를 소식의 새로 노래하고 있다. “청천에 울고 가능 저 홍안 행여 소식 바랐더니 창망한 구름 밖에 처량한 빈 댓소리뿐이로다. ” 한편, 민화의 문자도중 ‘신’자를 그린 그림에서도 기러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신’이란 사람 사이의 언약과 규칙을 믿고 지키는 덕목으로, 서신이라 하면 믿음을 전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자도에는 편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기러기와 청조가 입에 편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문자의 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기러기는 사람이 왕래하기 어려운 곳에 소식을 전해 주는 동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기러기를 ‘신조’라 하기도 하였다. 제6장 호랑이 한국을 소개하는 「한국문화의 뿌리」를 저술한 코벨박사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 사진을 책의 표지로 선정하고,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소개하였다. 코벨은 우리 민족과 호랑이와의 관계, 그 리고 한국인의 여유와 해학을 잘 이해하여 그 그림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옛날 이야기의 서두에서부터 서울올 림픽대회의 마스코트 호돌이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가까운 존재로 느껴 지는 동물이다. 창경원을 찾지 않으면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려운 동물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맹수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고 우호적이며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호랑이에게 부여해온 의미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설화와 이야기, 그림과 조각 등의 미술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동물은 호랑 이와 용이다. 용이 상상의 동물인 점을 고려하면, 실제의 동물 중에서는 호랑이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주역」에서 호랑이의 방위를 지칭하는 인방도 만주와 우리나라를 지목하는 동북방이며, 우리나라의 지도가 호랑이의 도양하려는 모습으로 형성 된 것 등도 우리 민족과 호랑이와의 특별한 인연을 말해 주는 듯하다. 그리고 호랑이가 우리 민족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 용하고 있는 다양한 속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호랑이 보고 창구멍 막기 .호랑이에게 개를 꾸어 준다 .호랑이 코에 붙은 것도 떼어 먹는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갈 줄 알면 누가 산에 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도 새끼가 열이면 스라소니를 낳는다. 우리 민족이 본 호랑이에 대한 관념의 변천과정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민족 의 지혜와 여유와 해학이 깃들어 있다. 즉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있었으며, 그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야성의 포악함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호랑 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에 직접, 간접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존재,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셔 제를 지내는 등 호랑이가 노하 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편을 취하였다. 호랑이를 이처럼 강력하고 신령한 존재로 상정한 뒤에는 이러한 힘에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생 겨나게 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호랑이의 역할을 의로운 존재로 설정하고, 호랑이의 용맹성과 강력한 힘이 인간을 괴롭히는 각종 잡귀와 사된 것을 물리쳐 주기를 소망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편에 선 정의의 사자, 벽사의 주재자로서의 위치를 굳힌 호랑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친숙한 관계로까지 발전되었다. 가장 용맹한 맹수의 왕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물리고, 곶감 이야기에 놀라 황급히 도망가는 어수룩한 호랑이를 탄생시킴으로써 호랑이는 우리와 급속도로 가 까워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사납고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에 가장 가깝고 친근한 관계로 만들어 버린 우리 민족의 예 지와 해학이 놀랍지 않은가?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아도 현대의 전위적인 미술품을 제외하고는 호랑이와 같은 사나운 맹수에게 담배를 물린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호랑이에 대한 이와 같은 관념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민속과 유형, 무형의 산 물이 표출되었다. 실로 호랑이와 관련된 우리의 문화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용, 학, 사슴, 거북 등 과 같은 동물이 우리 민족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도 비교적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에 반 하여, 호랑이 매우 다중적 성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호랑이의 존재가 그만큼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었으며, 그에 대해 표출된 우리 민족의 갈등의 반영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호랑이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부여한 의미를 관념상의 변천과정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1. 호랑이에 대한 관념의 출발: 맹수로서의 호랑이 호랑이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동물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 이상이 산 으로 이루어진 산악국으로,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한반도와 만주, 중국의 동부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산중 혹은 인근마을에서 부딪힌 가장 무서운 맹수가 바로 호랑이였다. 단군신화에 보면 곰과 호랑이는 모두 인간으로 화하길 원한다. 그러나 동국 속에서 마늘과 쑥 을 먹으며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뛰쳐나와 맹수로 머무는 호랑이의 모습에서도 얼마나 다루기 힘든 야성의 맹수인가가 잘 나타나고 있다. 호랑이가 인간에게 끼친 민폐는 매우 심하여, 호랑이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환난을 일컬어 ‘호환’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헌강왕 11년(885년) 2월에 호랑 이가 궁궐마당에까지 뛰어들었다고 하였으니, 호랑이의 피해가 나라 전체에 걸쳐 매우 심각하였 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규경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우리나라에 호환이 많았음을 기록하 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날이 어두워지면 함부로 나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호랑이를 산군이라 하 여 무당이 진산에서도 도당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때 음식이 불결하거나 부정한 음식을 바치는 등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내어 울부짖고 마을에 내려와 사람이나 가축을 물어 갔다는 기록이 남 아 전한다. 이처럼 살아있는 호랑이가 신으로 받들어지고 제사까지 받아먹는 풍속은 「후한서」 동이전에 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는 호랑이에게 부모, 자식, 남편 등을 잃은 가족이 그 원수를 갚고 시신을 찾아오는 등 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륜행실도」에는 고려 때 수원에 살았던 최누백의 이 야기가 나온다. 누백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범에게 물려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호랑이 를 죽이고 그 뼈와 살을 꺼내 장사를 지낸 효자로 유명하였다. 「삼강행실도」에는 호랑이와 싸워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오는 금지박호도, 아버지의 시신을 뺏 는 연수겁호도, 호랑이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권씨부토도, 호랑이에게 물려간 남편을 따라 자결하 는 소사자서도 등 수많은 이야기가 전하다. 또한 정초의 풍속에서 정월의 첫 호랑이날, 특히 산골 부녀자들은 바깥 출입을 꺼렸다. 그 이유는 이 날에 여자가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용변을 보면, 그 집의 가족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 호랑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면 호랑이가 나타난다 하여 ‘산신령님’, ‘산군님’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이처럼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였고, 호환은 언제나 온 나라의 근심거리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따 라서 나라에서는 적극적으로 호랑이를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숙종 때 편찬된 「수료집록」에 의하면, 인명을 살상하는 악호를 잡는 사람에게 금포 20필을 상으로 내리고, 두 마리 이상 잡는 자에게는 20필을 추가로 지급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영조 때 편찬된 「속신보수교집록」에는 호랑이를 잡은 변장이나 수령에게도 상을 내려야 한다고 거론된 기사가 보인다. 이 외에도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로부터 국도상정의 어명을 받고 한양의 지형을 살펴보니, 외 백호격인 관악산 서봉 호암산의 산세가 호랑이가 북쪽을 향하여 곧 뛰어들 듯 위급하고 위태한 형상이었다. 이에 호랑이 머리맡에 호암사라는 절을 짓고 마주 보이는 상도동에 사자암을 지어 기세를 누르고 견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호형의 거센 산세를 염려하여 삼정산의 복부에 도성을 향해 예배하는 얼빠진 모습의 호랑이를 배치, 호환을 물리치고자 하였다고 한다. 특히 호환이 심하였던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호랑이에 의한 피해를 방 지하고자 범굿을 행하였다. 이 굿에서는 한지에다 호랑이의 얼굴과 몸뚱이를 그린 호탈을 쓴 사 람이 호랑이의 역할을 하면서 굿의식을 행한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여러 과정을 거친 후 마지막 에는 호랑이가 사람의 손에 죽고 가죽까지 벗겨지게 된다. 이처럼 호랑이가 죽임을 당해야 마땅 한 악호로 설정된 데에는 산간지방에서의 현실적인 피해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 다. 2. 수호신으로서의 호랑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호랑이의 강력한 힘 앞에 인간은 무력한 조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 서 호랑이를 노하지 않도록 산신으로 모셔 정성을 다하여 받들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산악국 가인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발달해 온 산악숭배사상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12지신 등으로 호랑이가 본격적인 수호신으로서 그 위 치를 굳히게 되었고, 실제생활에서의 호랑이에 의한 피해와 두려움과는 별개로 호랑이는 사된 기 운과 악귀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 벽사의 존재,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되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폭우를 피해 동굴 속에서 친구들과 머물게 되 었다. 이 때 호랑이가 굴 입구에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으려 하자, 친구들과 의논하여 모자 를 던진 뒤 호랑이가 물어 올리는 모자의 주인이 굴 밖으로 나가 희생을 당하기로 하였다. 호랑 이가 왕건의 모자를 물어 올려 왕건이 약속한 대로 굴 밖으로 나가니, 그 순간 굴이 무너져 간발 의 차이로 살아나게 되었으며, 호랑이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람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의 호랑이에 관한 이러한 전설이나 설화는 누구든지 한두 가지쯤 은 알고 있는, 우리에게 널리 일반화된 소재이다. 1) 산신으로서의 위치 우리나라에는 산악숭배사상과 산신신앙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가 있어 서로 간섭할 수 없다....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라고 우리 민족의 풍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산을 숭배하여 산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온갖 정성과 치성을 드려 왔다. 제주도는 섬이기 때문에 매년 해신인 바다의 용왕에게 용왕제를 지내는데, 용왕제를 지낸 후에 는 반드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는 해신은 용왕의 영검한 힘만 신성시하는 것이 아니라 산신 의 수호 없이는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산신은 호랑이 또는 백발노인으로 상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때로 백발노인이 호랑 이로, 호랑이가 백발노인으로 변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호랑이가 별칭하여 산신, 산군, 산군자, 산령, 산신령, 산중영웅 등이라 하였으며, 오늘 날에도 심메마니들은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깍듯이 대접하고 있다. 산신을 모셔 놓은 산신당(산신각, 서낭당, 당산, 수호신당 등이라고도 함)에는 호랑이가 산신의 사자로 묘사되기도 하고 호랑이 그 자체가 산신으로 모셔져 있기도 하다. 이 때 산의 형세에 따 라 산신의 성별을 구분하여 여자산신은 할머니 모습으로, 남자산신은 할아버지 모습으로 묘사된 다. 그러나 이처럼 성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여자산신을 산신도로 그린 것은 극히 드물게 전해지 고 있다. 또한 산신도의 내용과 양식에 따라 도교적인 것, 유교적인 것, 불교적인 것으로 구별되는데 이 러한 양상은 토착신앙과 외래종교와의 습합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특히 불교에서 폭넓게 수 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신도에서 묘사되고 있는 호랑이는 무섭고 사납기보다는 점잖고 친근한 만화풍으로 애교있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호랑이의 자세도 공격적이거나 서 있기보다는 산신의 옆 또는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복호, 즉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도에 서의 호랑이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의 군자 호랑이는 엎드려 있어도 모든 헤아림이 그 속에 있다”라는 말에 나타난 바와 같 이,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의 신지를 받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어떻게 관장할 것인가를 헤 아리고 있는 사려깊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소곳이 엎드려 길게 다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는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인 토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으며, 호랑이의 기상과 기개를 나타내는 꼬리는 소나무 사이로 길게 뻗어 구름 속까 지 닿게 하여 화면 전체에서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눈은 왕방울만하게 그려 전체적으로 아래와 내려뜨린 모습이며, 파란색 금박으로 눈동자를 박아 어둠 속에서 신비스런 빛을 발하게 하고 있 다. 이러한 호랑이의 모습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애교가 있고, 신성한 영물로서의 분위기와 함께 친 근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분위기를 나타냄으로써, 확실하게 선과 정의의 편에 선 인간적인 모습 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2) 십이지신, 사신 십이지신은 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으로, 십이신장 또는 십이신왕이라고도 한다. 열두 방위에 맞 추어서 쥐,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동물을 수호신으로 배치하였다. 이 십이지 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삼 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써 그 신격이 변모하여 갔다. 이때 호랑이는 음양오행사상에 따 라 음양으로는 발톱이 다섯 개이므로 양, 오행으로는 목, 방위로는 동쪽에 해당한다. 사신은 우주를 진호하고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네 마리의 동물을 의미한다. 즉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동양사상의 하나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붉은 봉황), 북쪽에는 현무(검은 거북)라는 이름을 가진 방위신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 네 신 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서 군사적으로는 부대의 깃발과 포진에도 응용되었으며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라 하여 풍수지리에서도 널리 적용되었다. 이 때 백호(흰 호랑이)는 서쪽의 수호신으로, 오행으로는 금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 다. 백호는 청룡과 대칭되는 것으로, 특히 풍수에서는 용호가 혈의 호위로 인식되어, 좌청룡 우백 호가 서로 어울려 여러 겹으로 주변을 감싸는 것이 최고의 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용호상 박이란 말이 있듯이, 용과 호랑이는 강한 상대가 서로 대치하는 것을 나타낼 때 같이 쓰이고 있 다. 이처럼 사신과 십이지신을 통하여 호랑이는 우주의 섭리에 따라 사방을 수호하고 땅을 지키는 존재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무덤을 쓸 때 좌청룡 우백호를 보아 자리를 정하고, 무덤을 보 호하는 능호석에는 십이지의 하나로서 호랑이상을 새겼으며, 또 무덤 앞의 식물에도 호랑이상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십이지신은 육십갑자에 따라 사람의 띠를 나타내게 되어, 호랑이는 인간과 더욱 친밀한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3) 벽사의 주재자 산신으로서 받들어지고 십이지신과 사신 등의 수호신으로 자리를 잡은 호랑이는 우리의 생활 전반에서 길상의 동물, 강력한 벽사의 주재자로서 그 상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매년 정초가 되면 대궐과 민가 할 것 없이 벽사용 세화로서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고, 기 둥이나 출입문 위에 ‘호축삼재’, ‘용호오복’이라는 방문을 써붙여 귀신을 쫓고, 액땜을 하고, 복일 빌기도 하였다. 특히 호랑이가 등장하는 부적은 삼재를 쫓는 부적이라 하여 ‘삼재부적’이라 부른다. 삼재는 풍, 수, 화에 의한 재난으로서 인간의 병으로는 심화, 풍병, 수종을 들 수 있고, 인패, 재패, 우환 등의 재난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세계 최고의 의학서 「본초강목」에서는 호랑이가 치료제로 쓰이는 이치와 호랑이 삼재부적의 쓰임이 서로 직결됨을 기록하고 있다. 즉 호랑이의 뼈는 사악한 기운과 병독, 발작 등 을 멈추게 하여 풍병 치료제로 쓰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푸른 인광을 발하는 호랑이의 눈 을 마음이 산란한 환자에게 쓰면 사귀가 놀라 달아나므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 다. 이 외에도 호랑이 코는 미친병 치료와 어린이 경풍에, 이빨은 남자의 매독, 종기, 부스럼 치료 에, 발톱은 어린이 팔뚝에 붙은 병도깨비를 쫓는 데, 털가죽은 사악한 귀신들을 놀라게 하므로 학 직을 떼는 데, 수염은 치통에 쓰이며 오줌은 쇠붙이를 삼켰을 때 물에 타서 마시면 녹아버린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풍속 중에서 ‘쑥범’이라 하여 단오절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여 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무관의 표시로 관복의 흉배에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수놓았는데, 정3품 이상은 두 마리의 호랑이, 종3품 이하 종9품까지는 호랑이 한 마리를 수놓았 다. 호랑이 그림을 걸어두면 관직이 높은 귀한 자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태교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관직에 나가도록 하거나 벼슬을 높여주는 최관부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 해 관상서 「마의상법」에는 호랑이 모습의 얼굴 모양은 영화를 누릴 상이라 하였으며, 귀인들이 쓰는 모자에는 호수라 하여 호랑이의 수염을 꽂았다고 한다. 이처럼 호랑이는 양물이며 뭇짐승의 우두머리여서 능히 악귀와 사된 기운을 물리치므로 호랑이 의 주술적인 힘을 빌어 기복과 벽사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회화에서도 호랑이는 동물 중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동물화 중 독특한 장르를 이루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벽사용 호랑이 그림은 오늘날에도 일반 가정의 대청이나 거 실에 큼직하게 걸려 있을 만큼 널리 일반화되었으며, 여러 가지 산신도에서 나타나고 있는 호랑 이 그림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호랑이 그림 중 여느 그림과 달리 특별히 까치호랑이 그림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항 상 호랑이와 함께 까치가 등장하고 있는 독특한 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다. 먼저 김호연 선생 등은 이때의 까치는 서낭신의 신탁을 호랑이에게 전 하고 있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호랑이를 신의 사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규정한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허균 선생은, 이러한 까치호랑이 그림이 신당에 모셔진 적이 없고 그림에 따라 까치와 전혀 무관하게 배치되어 있는 호랑이의 모습 등을 예로 들면서, 길상의 동물인 호랑 이와 길상의 새인 까치를 함께 배치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길상적 의미의 표현일 수 있음을 말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호랑이와의 친숙도가 더해짐에 따라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다양하게 호랑이 문양과 장식 이 성행되었다. 필통, 벼루, 먹, 도장, 서안, 붓자루, 지통, 책장 등 문인용품과 화살통, 칼, 관복함, 혁대, 완장, 군기 등의 무관용품에서부터 도자기, 병풍, 목침, 떡살 등에 이르는 크고 작은 생활용 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문양으로 호랑이가 장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의 노리개에도 칠보로 단장한 호랑이 발톱이 장식되었으며, 혼례날에 받 아놓고 신행하는 신부의 가마 위에 드리웠던 호담, 상여나 무덤가에 장식된 호상 등도 모두 벽사 기복의 소망을 담은 옛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3. 친근한 동물로서의 호랑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 밤이 이슥 하자 배가 출출한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어느 집 앞에 다다랐다. 방문 안에서는 심하게 보채며 우는 어린아이 울음소리와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쉿, 계속 울면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잡아간단다” 하면서 아이에게 겁을 주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계속 울어댔다. 잠시후 어머니가 “자, 여기 곶감이 있다”고 하자 갑자기 울음소리가 뚝 그치며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문 밖에서 지켜 서서 듣고 있던 호랑이는 “어이쿠, 나보다도 더 무서운 곶 감이라는 것이 있었구나”하면서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맹수 중의 왕인 호랑이를 어수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갑자기 친근하고 정다운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왕방울만한 눈, 고양이처럼 짧은 다리와 커다란 머리, 어리숙하고 느긋한 표 정.... 산신도나 까치호랑이 그림등에 표현된 호랑이는 익살스럽기 그지없다. 도한 담뱃대를 문 호 랑이에게 토끼가 불을 붙여 주는 그림, 긴장죽을 물고 연기를 내면서 담배를 피우는 그림 등은 한국인의 해학과 익살을 나타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해학은 우리나라 민간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과 같은 맥락의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화 혹은 민요 등은 일반 서민들의 심성과 숨결이 담겨진 것이다. 그것은 그림이든, 노래든, 소설이든, 격식이나 정형을 찾아볼 수 없으며 소박한 익살과 건강한 풍 자, 친밀한 솔직함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가 아무리 두려운 존재라 하더라도 겉모습 을 과감히 벗겨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본성에 직접 접근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공감의 미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두려움을 두려움으로만, 고난을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기발한 환상과 해학의 웃음을 안겨주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호랑이를 통해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신단수 아래서 곰과 함께 사람이 되고자 굴로 들어갔던 호랑이에서부터 맹수로서의 포악함, 산 신으로서의 신령함과 위엄, 십이지신과 사신의 수호신 및 벽사의 주재자로서의 믿음직한 모습, 각 종 민화와 전설, 생활용품에서 만나는, 때로 의롭고 때로 친근하며 어리숙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민족과 함께하면서 많은 문화를 꽃피우게 한 상서로운 동물임에 틀림없다. 선인들의 의미지향적 안목에 공감을 느끼고, 그 정시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다. 제 7 장 소 1. 생활 속의 한 식구 소는 농경생활에 바탕을 둔 우리 민족에게 있어 단순한 가축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 다. 농사를천하의 근본되는 일이라 생각한 전통사회에서는 소를 한집안 식구처럼 생각하여 생구 라 부르기도 하였다.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일컫는 말로서, 소를 사람으로 대접하여 줄 만큼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소는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서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여 줄 뿐만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나르는 운송의 역할도 거뜬히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소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효용성이 높은 가축으로서 민가의 가장 귀한 재산 이기도 하였다. 최근 소값 폭락 파동이 있기 전가지만 하여도 농가의 재산목록 제1호였던 소는, 농민이 큰 일을 당할 때 급한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고나 보험통장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고 할 수 있다. 1950-1960년대의 대학을 우골탑이라 불렀을 만큼, 소는 농촌출신 영재들의 중요한 학자금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소는 지금부터 1800-2000년 전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의 소 는 주로 제천의식의 제의용이나 순장용으로 사용되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부여에서는 군사가 있을 때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벌어져 있으면 흉 한 징조, 붙어 있으면 길한 징조라 점을 쳤다고 한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기형이나 이상한 빛깔의 털이 난 송아지가 태어나면 응양오행과 관련시켜 길흉을 예측하는 습속은 계속되었다. 「삼국사기」에는 84년 고타군주가 신라 사파왕에게 청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청우는 털 빛깔이 검은 소로 추정되는데, 중국문헌에서 늙은 소나무의 정 이 청우로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청우는 선인, 도인, 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진 듯 하다. 또한 마한에서는 순장에 이용하였고, 백제에서도 소를 기르는 목적이 순장용이었던 것으로 기 록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에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중국대륙에서도 같은 모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소를 제의, 순장, 점술에 이용한 고대 우리나라의 습속은 북쪽의 대륙에서 전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농사에 소를 이용한 우경이 시작된 것은 신라 지증왕 3년(502년)이며, 눌지왕 22년(438년)에는 백성에게 소로 수레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우경과 우차를 생활에 적용한 이 시기부터 농업과 운송수단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안악고분 벽화에 바퀴가 큰 이륜차의 가마와 여물을 먹고 있는 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경주 98호 고 분에서도 진흙으로 만든 우차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실생활에서 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를 제의 및 순장용으로 사용한 초기의 풍습은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고려 때에는 궁중의 희 생용 동물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생서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전구서, 전생서 등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풍년을 빌기 위하여 농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매년 경칩 후 첫 해일에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 이 때 제물로 소를 바쳤으며, 그 제의 이름을 선농제, 제단을 선농단이라고 하였 다. 선농제에 즈음하여 임금에게 바친 헌시 가운데 “살진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선농제에서 희생의 제물로 바쳐 진 소는 의식이 끝난 다음에 탕으로 만들어 많은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는데, 오늘날 ‘설렁탕’ 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선농탕’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귀중한 가축으로서, 한 가족처럼 정성들여 보살펴 왔다. 부엌 가까이에 외양간을 마련하여 통풍이 잘 되도록 배려하고 외양간의 위층은 가마니, 짚 등의 창고로 삼아 보온의 효과를 겸하도록 하였다. 날씨가 추워지면 짚으로 짠 덕성을 입혀 등이 따뜻 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하였으며, 봄이 오면 외양간을 깨끗이 쳐내고 다시 겨울이 오기까지 보 름마다 청소를 해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낮에는 양지바르고 따뜻한 곳으로 내어다 매어 주고, 솔로 빗기고 비로 쓸어 주어 신진대사가 잘 되며 털에 윤기가 나도록 하였다. 먹이는 아침 저녁으로 짚을 잘게 썬 여물로 쇠죽을 쑤어 주며, 수시로 풀밭이나 야산으로 몰고 가 싱싱한 풀 을 뜯어먹였다. 이 때 이슬이 묻은 풀은 먹이지 아니하고 힘든 일을 많이 하게 되는 일철에는 특 히 콩을 많이 먹였다. 삼복더위에 소를 부릴 때면 야경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먼 길을 갈 때에 는 짚으로 짠 신을 신겨 발굽이 닳는 것을 방지하였다. 소를 사들이거나 외양간을 짓는 경우에도 반드시 음양오행에 기초를 둔 택일을 하여 길일을 받아 시행하였고, 특히 소를 사거나 송아지를 들여오는 날을 납우일이라 하였다. 이처럼 소를 한가족처럼 각별히 아끼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 것은, 그만큼 농사일을 신성시하 고 소중하게 생각한 우리 선조들의 심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일 것이다. 한편, 어느 정도 자란 송아지에게는 몸체를 꾸미는 소치레를 하게된다. 소치레는 소를 보호하고 잘 부리기 위한 것으로, 먼저 생후 5-6개월이 지난 송아지에게 목사리를 하여 고삐를 매며, 1년이 지나면 대개 음력 5월 단오날을 택해 동구 밖이나 야산에 가서 나무에다 붙들어 매고 코를 뚫은 다음 코뚜레를 한다. 이 때 앞걸이와 목사리를 데고 굴레를 짜게 되는데, 코뚜레에 줄을 걸어 고 삐와 연결하고 한두 개의 방울을 단다. 이 방울은 잃어 버린 소의 위치를 빨리 확인하기 위해 달 기도 하였지만, 소는 겁이 많고 무서움을 잘 타서 헛소리를 들으면 놀라 크게 동요하므로 이 헛 소리를 듣지 못하게 달아주기도 했다. 우직하고 순박하여 성급하지 않은 소의 천성은 은근과 끈기, 여유로움을 지닌 우리 민족의 기 질과 잘 융화되어, 선조들은 특히 소의 성품을 사랑하고 아껴 왔다. 다소 미련하지만 술수를 부리 지 않고, 재빠르지 않지만 꾸준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거대한 몸집에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길게 여운을 남기는 독특한 울음소리를 가진 초식동물. 소의 이러한 성품과 특성은 우리의 농촌사회를 한층 여유롭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떠오르게 한다. 풀밭이나 야산에서 대여섯 살박이 꼬마에게 긴 고삐를 맡긴 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 꾸준하지만 결코 성급하지 않은 동작으로 묵묵히 앞에서 쟁기를 끄는 소와 뒤에서 보조를 맞추며 따라가는 농부의 모습, 양지바른 토담 곁에 편안 히 앉아 긴 꼬리를 천천히 휘둘러 등에 붙은 파리를 쫓아 가며 낮잠을 즐기는 모습, 때로 고개를 젖히며 길게 한 번 울어대는 ‘음메에’소리... 소는 그 어느 동물보다도 농촌에 어울리는,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분위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 다. 이처럼 소는 우리의 생활 가까운 곳에서 가장 친근한 동물로 함께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속 담과 관용어 속에서도 그 속성과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는 농가의 조상’이라 하여 농가에서는 조상같이 소를 위한다는 표현으로 소의 귀중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처에게 한 말은 난다’는 속담은 소의 신중함을 들 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을 조심하라는 경계를 담고 있다. 소의 근면함을 들어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어라’는 속담을 통해 성실히 일하고 절약할 것 을 일깨웠고, 인간에게 한없이 유익한 존재임을 역으로 이용하여 ‘소한테 물리다’라고 하면 전 혀 뜻밖의 상대에게 해를 입는다는 뜻이 된다. 또한 소의 우직하고 다소 미련한 면을 들어 ‘쇠귀에 경읽기’, ‘소궁둥이에 꼴을 던진다’라 는 속담은 몹시 둔하여 깨닫지 못할 사람에게는 아무리 교육시켜도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 었고,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기’라 하여 우연히 공을 세웠음을 나타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속 담 속에서 우리와의 친근한 관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소 잡은 터전 없어도 밤 벗긴 자리는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한다 .소 잡아먹은 귀신 같다 .소 탄 양반의 송사 결정이라 .소도 웃을 일이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한다 이제까지 생활 속의 한식구로서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소의 의미와 간략한 역사,소의 특성 과 성품 등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소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념은 어떠했는 지, 2000여 년 동안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오면서 소가 우리의 민속과 인식세계에게 어떠한 위치로 자리잡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2. 풍요와 힘의 상징 우리나라의 민속에는 특히 소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의 민속이 농경사회의 특성을 중심으 로 발달되었기 때문에, 농사의 주역인 소가 민속과 깊은 관련을 맺어 온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 이다. 힘든 농사일을 도맡아 하는 주역이요, 풍요와 힘을 상징하는 소. 우리의 민속, 특히 세시풍 속에서는 그 해의 농사가 풍작을 이루어 많은 수확을 거두기를 소망하였고, 이러한 소망은 풍요 와 힘을 상징하는 소를 매개체로 하여 다양한 형태의 민속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상축일 풍습 새해가 되면 정월의 첫번째 축일인 ‘소의 날’에 다양한 풍습과 금기가 전하고 있다. 이 날은 명절날로 취급하여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잘 먹이게 된다. 또한 상축일에는 도마질을 하지 않는데, 이는 쇠고기로 요리를 할 때 주로 도마에 놓고 썰 었으므로 이 날만은 이러한 잔인한 행동을 삼간다는 뜻에서 도마질을 꺼리는 것이다. 이 날 연장 을 만지면 쟁기의 보습이 부러지고 방아를 찧으면 소가 기침을 한다는 말이 있다. 연장이나 연자 방아를 다룬다는 것은 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연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 밖으로 곡식 을 퍼내면 소에게 재앙이 온다고 하여 이를 꺼리고 있다. 곡식의 대부분이 소가 일을 해준 덕분 에 얻어진 결실이므로, 소를 위하려면 자연히 곡식까지도 소중히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 적인 풍속이 하나이다. 또한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지를 점쳐보는 방법으로 ‘소 밥주기’가 있 다. 상축일에 밥과 나물을 키 위에 상처럼 차려서 소에게 준 뒤, 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 나 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라 점쳐보는 것이다. 이처럼 새해가 시작되는 첫 축일에 소의 공로를 치하하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동시 에, 새로 시작될 한 해 동안의 풍년을 소망하는 마음을 담았다. 2) 나경 정월 대보름에 관동, 관북지방에서는 예로부터 나경의 습속이 있었다. 나경은 정월 보름날 성기 가 큰 숫총각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목우나 토우를 몰고 밭을 갈며 풍년 을 비는 민속이었다. 땅은 풍요의 여신이요, 쟁기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산력을 지닌 대지 위에 남자 의 성기를 노출시킴은 풍성한 수확을 소망하는 뜻이 담긴 것이다. 이 나경의 습속이 북쪽지방에 만 있고 남쪽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 토질이 척박하고 곡식의 결실이 잘되지 않는 북쪽의 자연 조건 때문에 풍년을 비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풀이된다. 3) 소먹이놀이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전승한 민속놀이 중 소먹이놀이가 있다. 젊은이 두 사람에게 멍석과 종 이를 씌워 소로 변장시킨 뒤, 앞뒤로 소의 주인과 머슴이 서서 이를 몰고 마을의 집집을 찾아다 닌다. 이 때에는 농악대를 비롯한 청년들이 떼를 지어 뒤를 따르게 된다. 살림이 넉넉한 집에 이 르면 소가 ‘음메 음메’하면서 울음소리를 내며, 몰이꾼은 “옆집의 누렁소가 평소에 즐기는 싸 리꼬창이(산정)와 쌀뜨물(술)이 먹고 싶어 찾아왔으니 푸짐하게 내어주시오”하고 외친다. 기다리 고 있던 주인은 산적과 술을 내어 이들을 대접한다. 이 때 농악대가 흥겹게 농악을 울려서 신명 을 돋우면 소는 이에 맞추어 춤을 추고, 마을사람은 물론 주인도 이에 합세하여 흥겨운 춤을 추 게 마련이다. 한바탕의 춤이 끝나면 몰이꾼은 이 집의 올해 농사가 대풍이 들고 집안이 두루 평 안하리라는 내용의 덕담을 늘어놓음으로써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 놀이가 베풀어지는 시기는 정월 대보름과 8월 한가위로서, 정월 대보름의 소먹이놀이는 그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기풍의례이며, 한가위의 소먹이놀이는 풍년을 이룩한 데 대한 감사의례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4) 영산쇠머리대기 경상남도 창년군 영사년에서 전승되어 오는 정월 대보름의 민속놀이 ‘영산쇠머리대기’는 나 무를 엮어 소의 형태를 만들고(나무소) 사람들이 이를 어깨에 매어 서로 맞부딪혀서 승패를 가리 는 놀이이다. 이 때 사용되는 나무소는 동리사람들이 한 달 전부터 산으로 돌아다니며 적당한 나 무를 찾다가, 재목으로 결정이 되면 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고, 날을 가려 산신제를 올린 다음 베게 된다. 나무소가 다 만들어진 뒤에는, 아들을 못 낳은 여인이 이 소의 몸 을 넘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신과 함께, 자기 편의 소를 여자가 넘으면 싸움에 진다고 하 여 밤낮으로 이를 지키게 된다. 싸움을 시작할 때 주민들은 줄다리기와 같이 동부와 서부 두 편 으로 나누어진다. 해가 뜨는 쪽의 동부는 양으로 남성을, 해가 지는 쪽의 서부는 음으로 여성을 상징한다고 보아서, 출산, 수확을 뜻하는 여성 쪽인 서부가 이겨야 농사가 잘되고 마을이 태평하 리라는 믿음도 줄다리기의 경우와 같다. 농사의 주역인 소를 매개체로 하여 준비과정에서부터 놀이가 끝날 때까지 온 마을사람들이 합 심하여 정성을 다함으로써, 그 해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흥겹고 평화로운 마을놀이라 할 수 있다. 5) 소놀이굿 경기도 양주지방에서는 소의 형태를 취한 곡물령을 모시고 소놀이굿을 행하여 오고 있다. 소놀 이굿의 절차는 먼저 동리 당산에서 간단한 산치성을 드린 후 집으로 옮겨, 첫 거리인 행주물림에 서부터 열여덟째 거리인 뒷전까지 이어진다. 열셋째 거리인 제석거리와 열넷째 거리인 호구거리 사이에 소놀이굿을 연희하는데, 장구 앞 목두에 소를 위한 공을 수북이 담고 북어 한 마리를 꽂 아놓은 뒤 시작하게 된다. 그 내용은 소장수가 굿을 청한 뒤 성주에게 소를 파는 줄거리로, 소장수는 소의 머리, 뿔, 눈, 이, 꼬리, 굽에 대한 치레를 타령으로 장황하게 나열하며 소에게 글자를 가르친 후 다시 소의 굴 레 치레를 하면, 무당이 이렇게 좋은 소를 팔라고 권하고 소장수가 승낙하여 소의 흥정이 이루어 진다. 악귀를 쫓고 달래는 다른 굿과는 달리 이 소놀이굿은 경사굿, 재수굿으로서 농사나 사업, 장사 가 잘되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빌어 청하는 굿이다. 소를 부의 풍요로움의 척도로 삼아온 농민들 은 소를 위하고 숭상하면 부가 집안으로 들어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 대보름과 팔월 한가위를 중심 으로 하여, 풍요와 힘을 상징하는 소를 등장시켜 여러 가지 풍습과 민속놀이를 행하여 왔다. 힘든 농사일을 도맡아 처리하여 풍성한 결실을 얻게 해준 소의 노고를 치하하고, 다시 한 해 동안의 풍년과 마을의 평화를 소망하는 마음이 농경사회의 주역인 소를 중심으로 펼쳐진 다양한 풍습에 서 잘 나타나 있다. 3. 도가적 은일과 평화의 상징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는 우직하고 순박하며 성급하지 않고 여유로운 천성으로 인해 선 조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소의 모습에서는 긴장감이나 성급함을 찾아볼 수 없으며, 순박한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롭고 자적한 느낌에 젖게 한다. 소가 현실적으로 효용성이 높은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선비들의 시문, 그림, 고사 등에 자주 등장하였던 것은 소의 이러한 특성이 옛 지식인들의 취향에 맞아 각별한 동물로 여겨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를 현실적,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소가 지니고 있는 성품이나 속성에서 나오는 도가적인 자적함과 평화로움에 젖 고자 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의 사상을 펴려고 하였으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에 의 해 저지당하자,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소를 타고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장자는 ‘여동언여신생지독’이라 하여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되어라. 그것은 오직 무심히 눈을 뜨고 있을 뿐 아무것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 그와 같은 상태야말로 진정으로 바람직한 인간의 자세 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공감과 동경은 특히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전반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도가 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소를 타고 가는 기우행을 즐겨 하고 그러한 분위기를 시나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서거정은 말을 마다하고 항상 소를 타고 관에 출퇴근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맹사성도 온양을 왕래할 때 소 등에 의지하고 다녔다 한다. 송질은 이천에 살면서 늘 소를 타고 오갔으며, 김백련은 궁궐 출입할 때 소를 타고 동지를 거느린 채 소요음영하였다고 한다. 소가 먼 거리를 왕래할 때 교통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기우행이 걸어서 갈 때의 피곤함을 덜 수 있다는 현실적인 편의성보다 소를 타고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무심히 주 변의 자연과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고 스스로의 여유와 자족함을 맛볼 수 있는 이상적인 행 보의 방법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권근은 「기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옛 선비들의 기우행의 참 의미를 깊이 느낄 수 있 게 한다. 무릇 물체에 눈을 주시함이 빠르면 정하지 못하고, 더디면 그 미묘함을 다 얻는다... 말은 빠르 고 소는 더딘 것이니, 소를 타고 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만 가지 일을 뜬구름같이 여기 고 긴 휘파람을 불며 소를 놓아 가는 대로 맡기고 생각하는 대로 술을 부어 마시면 가슴 속이 유 연하여 스스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니 이 어찌 사사로움과 누에 구애된자 능히 할 바이랴. 이덕무의 시 「기우」에서도 도가적인 은일과 평화를 동경하는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산속 외딴길에 소를 몰고 가니 소 등은 마치 자리처럼 편하구나. 겨우 몸 하나 편안히 붙이고 나니 다시는 공명 생각할 여지도 없네. 소를 타고 가는 선비의 모습은 그림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김호도의 「선인기우도」에는 한 선비가 소를 타고 언덕을 돌아나오는 모습이 주변을 흐르는 잔잔한 물결과 함께 어울려, 도가 적인 은일의 세계를 그대로 느끼게 하고 있다. 목동이 소를 타고 가는 「목동기우도」 역시 정선, 김홍도, 이경윤, 박제가, 김식 등 많은 화가 들이 즐겨 그렸다. 이 소재의 그림에서는 목동이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경우 가 대부분이어서, 소와 목동이 연출해 내는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더하여 선비들이 동경 해 마지 않던 도가적 이상세계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외에도 평화롭게 누워 있는 소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이 많이 전하고 있어, 소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소의 성품과 특성이 창출해 내는 도가적인 분위기를 통하여 이상적인 삶에 대한 염원이나 동경을 담았으며, 조선시대 선비들 이 추구하였던 정신세계의 한 단면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소에 대하여 인간적인 해석을 시도하거나 인격화한 일화도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조선시대의 황희 정승이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물었다. “어느 소가 밭 을 더 잘 가는가?”하니 농부는 황희의 옆으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쪽 소가 더 잘 갑니다”하 고 대답하였다. 이상히 여긴 황희가 “어찌하여 그것을 귓속말로 대답하느냐?”하고 물으니, 농부 는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한 쪽만을 칭찬하면 다른 쪽이 질투 를 하지 않겠습니까?”하여 크게 느꼈다고 한다. 또한 김시습은 소가 꼴을 먹는 것과 불자가 설 법 듣는 것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삼각행실도」등에는 위기에 처한 주인을 위해 호랑이와 싸운 끝에 주인을 구하고 죽은 소에 관한 전설이 실려 있으며, 이러한 충직하고 의로운 소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지방에서 전해 오고 있다. 즉 개성에는 눈먼 고아에게 자신의 꼬리를 잡혀 이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시킨 소의 의로운 소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우답동이라 이름을 붙인 마을이 있으며, 경상북도 상주군 낙동 면에는 권씨 성을 가진 농부의 생명을 구하고자 호랑이와 싸우다가 죽은 소의 무덤과 관련된 전 설이 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소는 의롭고 충직한 동물로 상정되어 인간에게 평화로움과 기쁨을 주는 존재로 인식되 어 왔다. 불교의 선종에서는 심우도라 하여,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 화가 있다. 소와 동자를 통해 선의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도해한 그림으로서, 십우도라고도 한다. 십우도의 대략적인 내용은, 처음 선을 닦게 된 동자가 ‘본성’이라는 소를 찾기 위해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도를 깨닫게 되고, 최후에는 선종의 최고 이상향에 이르게 됨을 나타내고 있다. 10단계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1. 소, 즉 본성을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매다가, 2. 소 발자국을 발견하여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3. 멀리서 소를 발견하고, 4. 소를 붙잡아 고삐를 낌으로서 견성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때의 소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묘사되 는데, 아직 삼독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이라는 뜻에서 검은색으로 소의 빛깔을 표현하였다. 5.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게끔 길들여 점차 검은색이 흰 색으로 바뀌어 가며, 6.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 때의 소는 완전한 흰색으로 묘사된다. 소는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아도 동자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며, 이 때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상징하게 된다. 7. 집에 돌아와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만 남아있다. 결국 소는 마지막 종착지인 심 원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편을 잊어야 함을 보 여주고 있다. 8. 소 다음에는 자기 자신도 잊어 버린 상태, 텅빈 원상으로 묘사된다. 주(동자)와 객(소)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 라고 일컫게 된다. 9.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는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친다. 조그마한 번 뇌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10. 마침내 주인공은 중생에게 복과 덕을 베풀기 위해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내려간다. 본성을 찾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소를 찾는 데 비유한 불교의 십우도.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자성, 즉 본성은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고 청정하며 순진무구하다는 불교의 기본교리 에 입각하여 볼 때, 소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생활 깊숙한 곳 에서 가장 현실적인 효용가치가 높은 존재로 인식되면서도 동시에 순박하고 평화로운 천성을 지 니고 있는 소는,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순진무구한 본성에 비유되기에 모자람이 없 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현실적인 이용도가 높은 동물임에도 불 구하고, 넉넉하고 군자다운 성품으로 인해 특별한 상징성과 신성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비들은 소를 통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을 음미하고자 소에게 인간적인 해 석을 시도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불교에서도 소의 천성을 신성하고 귀하게 대우하 였다. 소에 대한 인식이 점차 극도로 실용화되어 우유나 고기를 제공하는 가축의 하나로만 인식되어 가는 오늘날, 선조들이 소에게서 느끼고 추구하였던 정신적인 여유와 풍요로움을 되새겨본다면, 좀더 윤택하고 아름다운 오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제8장 용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동물로는 봉황, 기린, 해태를 비롯하여 백호, 주작, 현무 등 신비로운 능력과 상징성을 지닌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용은 그 권위 와 조화로운 능력에 있어서 단연 압도적이다. 인간은 용에게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무기를 모두 갖추게 하고, 이에 더하여 무궁무 진한 조화능력을 부여하였다. 최고의 권위를 지닌 최상의 동물인 용. 이러한 용의 힘에 의탁하여 인간은 끝없는 이상과 꿈을 펼치기도 하였고 벽사기복과 무병장수를 소망하였으며, 때로 권선징 악의 교훈을 스스로에게 깨우쳐 주기도 하였다. 용에 대한 관념은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중국, 인도 등 문명의 발상지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특히 동양에서는 용에 대한 숭배사상이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여, 수천 년 동안 동양인의 마 음과 정신세계를 지배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용은 우리의 문화와 사상, 생활양식을 논할 때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가진 신비의 동물로서, 그 의미와 상징성은 생활전반에 걸쳐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기에 모자람이 없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용에 관한 수 많은 신화, 설화, 전설은 용에 대한 신앙, 사상, 문학과 미술의 형태로 발전하여 왔으며, 민속과 민간신앙, 각 종 지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활과 의식구조에 가장 밀접하고 깊이있게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은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을 탄생시켜, 우리의 사상사에서 빛나는 호국정신의 극 치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처럼 용은 단순히 조화로운 능력자로서만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고 천지의 조화에 순응하는 신성한 영물로서 우리 민족의 의식과 정서 속에 독특한 상징성을 지켜 왔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 어 낸 불가사의한 동물인 용. 용은 창조된 것이기에, 그 설정 자체에서부터 의미부여에 이르기까 지의 전 과정을 통해 옛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사고방식을 더욱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소중한 문 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1. 용인 무엇인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에서는 용을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상서로운 사령의 하나로 인식 하여 왔다. 용은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동물이지만, 오랜 옛날부터 상상으로 정형화된 뚜렷 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용’이라 말할 때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독특한 형태적인 특성은, 구름과 함께 긴 몸을 굽이굽이 틀며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다. 관련학자들은 용의 모습 이 뇌성, 괴운, 회오리바람, 번갯불, 폭우 등과 밀접한 관련하에 탄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용의 이 미지가 승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은나라 때 뇌운문에서 용의 형태가 도상적으로 나타나게 되 었다는 점 등은, 용이 단순한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자연현상이 융합하여 탄생된 신비로운 창조물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문헌 「광아」 익조에 따르면, 용의 모습은 아홉 가지 다른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 였다. 즉 1. 낙타의 머리에 2. 사슴의 뿔 3. 토끼의 눈과 4. 소의 귀에 5. 목덜미는 뱀과 같고 6. 배는 조개와 같으며 7. 잉어의 비늘에 8. 호랑이의 발 9. 매의 발톱을 가졌다고 하였다. 또한 비늘 은 양의 수 9가 중복된 81개(9.9)로 되어 있고,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듯한 우렁차고 힘있는 소리를 내며, 입 주위에는 긴 수염, 턱 밑에는 구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용의 조화능력에 관해서는 「관자」 수지편에서, “용은 물에서 나며, 그 색깔은 오색을 마음대 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게 오므라들 수 있고 커 지고자 하면 천지를 덮을 만큼 부품 수 있다.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위로 치솟을 수 있고 밑으 로 내려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의 밑바닥까지 잠길 수 있는 변화유일하고 상하무시한 신이다”라 고 하였고, 「설문」에서는 “능히 어둡거나 밝을 수 있고 가늘거나 커질 수 있으며 짧거나 길어 질 수 있다. 춘분에 하늘에 오르고 추분에 연못에 잠긴가”고 하였다. 이처럼 날짐승, 들짐승, 물에 사는 짐승의 복합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기상천외한 모습과 천변만 화하는 조화능력을 가진 용은 뭇 동물 중의 우두머리, 힘과 조화의 최고자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회남자」에서는 ‘만물우모린개개조어용’이라 하여 조류, 수류, 어류, 갑각류의 모든 동 물은 용을 조상으로 한다고 하였고, 「본초강목」에서는 비늘을 가진 것들의 우두머리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최고자로서의 용의 위치는 권위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왕권이나 왕위의 상징 물로 그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즉 임금의 얼굴을 용안, 임금의 덕을 용덕, 그 지위를 용위라 하 였고, 임금이 앉는 자리를 용상, 용좌, 임금이 입는 의복을 용의, 용포, 임금이 타는 수레를 용가, 용거, 임금이 타는 배를 용가라 하였으며, 심지어 임금이 흘리는 눈물을 용루라 하였다. 특히 임 금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라 하는데, 조선 세종 때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선조 여섯 대의 행적 과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용비어천가」의 제목과 내용도 이러한 맥락으로 일관되어 있 다. 이처럼 임금과 관계된 것에는 예외없이 용과 관련시켰으니, 이는 용의 경이로운 조화능력과 권 위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외경심과 신비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용에게는 각기 성격이 다른 아홉 아들이 있다고 하는데, 명나라의 호승지가 쓴 「진주선 」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들의 종류와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비희: 패하라고도 하며, 모양은 거북을 닮았다.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하며 돌비석 아래에 놓는다. 2. 이문: 조풍 또는 치미라고도 하며, 모양은 짐승을 닮았다.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해 높고 험한 곳을 좋아하며 화재를 누를 수 있어 전각의 지붕 위에 세운다. 3. 포뢰: 모양은 용을 닮았고, 울기를 좋아하며 범종의 상부 고리에 매단다. 포뢰 용은 특히 바 다의 고래를 무서워하므로 종을 치는 당목은 고래모양을 취하여, 포뢰를 겁주어 더욱 우렁차고 힘차게 울도록 한다. 4. 폐안: 헌장이라고도 하며, 모양은 호랑이를 닮았다. 위력이 있으므로 옥문에 세우거나 관아의 지붕에 장식한다. 5. 도철: 치문이라고도 하며,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므로 주로 솥의 뚜껑에 세우거나 식기, 반 기에 시문한다. 6. 공하: 범공이라고도 하며, 물을 좋아하여 다리의 기둥에 세운다. 7. 애차: 살생을 좋아하므로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조각한다. 8. 산예: 금예라고도 하며 모양을 사자를 닮았다.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기며, 또한 앉 기를 좋아하여 불좌나 용좌에 쓴다. 9. 초도: 초도라고도 하며, 모양이 나방을 닮았다. 닫기를 좋아하여 문고리에 붙인다. 이 외에도 각종 문헌에는 용의 새끼를 교룡, 뿔이 없는 용을 이룡, 날개를 가진 용을 응룡, 뿔 이 달린 용을 규룡,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을 반룡, 물을 좋아하는 용을 청룡, 불을 좋아하는 용 을 화룡, 울기 좋아하는 용을 명룡 등이라 하여 그 종류와 성격 및 특성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 다. 2. 용신신앙과 물 용은 그 신비롭고 초월자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옛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뚜렷한 영적 존재 로 인식되어 왔다. 여의주를 문 용이 우주의 운행이나 자연의 온갖 조화로움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 특히 구름을 박차고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이미지는 신적 존재로서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용은 오랜 옛날부터 미래를 예시해 주고 자연의 조화를 몰고 다니는 신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으며, 특히 물을 지배하는 수신으로 신앙되면서 독특한 용신신앙이 형성되어 왔다. 용이 등장하는 문헌, 설화, 민속 등에서는 용의 출현이 반드시 어떠한 앞일을 예시해 주는 것으 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개설서라 할 수 있는 「문헌비고」에는 신라 시조 원년으로부터 조선 1714년(숙종 40년) 사이에 무려 29차례나 용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 뒤에는 거의 빠짐없이 거국적인 대사가 잇따라 기록되어 있다. 즉 용이 출현하고나 서 성인이 탄생하였다던가 군주나 큰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농사의 풍흉, 변방군사의 동태, 민심의 흉흉 등의 국가적인 길흉사가 따르고 있다. 또한 「고려사」에서 서해용왕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에게 ‘군지자손 삼건필의’라 일러준 것처럼 직접 미래를 일 러주기도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된 용 과 관련되는 설화는 무려 86편에 달하고 있는데, 이에 등장하는 용 역시 대부분 예시자의 역할로 설정되어 있다. 이처럼 용은 미래를 예시해 주는 신령한 동물로 숭상되어 왔을 뿐 아니라, 건국 시조와도 밀접 히 관련되어 있다. 즉 신라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은 계룡의 왼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삼국사기 권 1), 고려의 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녀라는 설화가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용은 특히 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인식되었다. 용은 바다, 강, 샘, 못 등 의 물속에 살면서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수신의 역할을 하였다. 이익의 「성호사설」 천문부에 보면, 비는 용이 성내어 싸울 때 내리고, 벼락은 독룡이 놀라 움 직일 때 생기고, 풍수해는 용이 성날 때 생기므로 임금은 이 용의 거동에 따라 정사를 근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관자」 형세해 등에서도 용은 물을 얻음으로써 무궁한 조화의 위세를 떨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용이 미래를 예시하기 위해 나타나는 장소도 바다, 못, 우물 속 등으로 설정된 것을 볼 때, 옛사람들은 물과 용을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용이 왜 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물의 신의 역할을 하게 되 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용의 도상이 뇌운 등에서 도출되었다는 점, 용의 모습과 조화가 물의 속성과 유사하다는 점 등과 긴밀히 연결된다. 즉 용은 ‘물의 원리를 표상화한 것’, ‘물을 상징한 것’이라 볼 수 있 다. 용의 모습과 유연한 움직임은 물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며, 비와 관련된 뇌운 등에서 결정적인 도상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용의 변화무쌍한 형체는 천변만화하는 물의 능력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리고 조용한 이슬에서부터 거센 폭풍우에 이르기까지,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서부터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성난 파도에 이르기까지, 때로 평화롭게 대지를 기 름지게하며 때로 파괴적이기도 한 물의 성격과 특성이 그대로 용에게 반영된 것이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 온 옛사람들에게 비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으며, 홍수, 천둥, 번개, 폭우 등은 불가항력의 두려움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에 면해 있어, 배를 타는 어민들에게 바다는 생명 그 자체일 만큼 소중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이러한 물과 관련 된 모든 자연조건을 다스리는 신으로서 물의 모습과 성격이 닮은 용을 탄생시키게 되었고, 물과 관련된 기원과 소망이 간절한 만큼 용은 최상의 위치와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처럼 수신으 로서 강력한 위치를 확보한 용은, 더 나아가 다른 모든 것에서도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로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50년에 용의 그림을 그려 놓고 비를 비는 화룡제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용왕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관장하는 관청인 용왕전을 두어 사해제, 사독제 등의 용신제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도 고려 현종 12년에 흙으로 용상을 만들어 놓고 비를 비는 토룡제를 지냈으며, 가뭄이 계속된 숙종 13년에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용왕인 오해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가적인 의식으로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사가 그대로 전승되어 토룡 제, 화룡제 등을 거행하였고, 오방토룡제로써 기우십이제차의 마지막 의식을 끝맺기도 하였다. 「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해로서 동해의 양양, 남해의 나주, 서해의 풍천, 독으로서 남에 웅진과 가야진, 중에 한강, 서에 덕진과 평양강, 압록강, 북에 두만강 등이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제장으로 지켜져 왔다고 한다. 민가에서도 비가 오지 않으면 특히 ‘용’자가 들어간 연못이나 강, 바다, 산, 바위 등에서 기 우제를 지내거나, 그 곳의 물을 병에 넣고 솔잎으로 막아 사립문에 거꾸로 매다는 등 주술적인 방법으로 비를 빌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의 용지, 용두산, 충청도의 용연, 황해도의 용정, 평안도의 구룡산, 경상도의 용수암, 전라도의 용지, 함경도의 장자지 등은 효험이 큰 기우처로 널 리 알려져 왔다. 이처럼 조정과 민간의 구별 없이 정성스럽게 용신에게 제를 지냄으로써, 애타가 기다리는 비를 내려 주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의지하였다. 용은 또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민들에게 가장 지극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바다 밑 용궁에 살고 있는 용왕에게 고기잡이 나간 어부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고 풍어를 비는 제 또는 굿을 용왕제, 풍어제, 용왕맞이 등이라 한다. 일반적인 용왕제는 주로 어촌에서 음력 정초나 2월초의 만조시를 택하여 해변에 제물을 차려놓 고 사해 용왕에게 마을주민과 가족의 안전 및 풍어를 비는 의식이다. 제가 끝나면 자려놓았던 제 물을 골고루 조금씩 떼어 네 덩이를 만드는데, 가족 중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을 때는 그의 몫으로 한 덩이를 더 만들게 된다. 그것을 백지로 싸서 한 덩이 한 덩이 바다로 멀리 던지며 용 왕으로 하여금 기꺼이 그 제물을 받아 주기를 마음 속으로 빈다. 특히 사면이 바다로 된 제주도에서는 ‘용왕맞이’굿이 유명하다. 큰 굿의 한 제차로 하기도 하고, 바다에서 익사한 영혼을 건져내어 저승으로 고이 보내거나 풍어를 빌기 위하여 하기도 한 다. 어느 경우이든 그 중심 제차는 용왕이 오시는 길을 치워 맞아들이고 소원을 비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대 제사상차림에는 용왕이 거느리고 있는 바닷고기를 올리지 않아야 한다. 이 외에도 식수의 고갈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으로 농악대가 마을의 우물을 찾아다니며 하는 ‘ 샘굿’이 있다. 농악대는 우물 주의를 돌며 빠른 농악을 올리다가 갑자기 뚝 그친 뒤, 상쇠잡이가 우물을 향하여 “물 주소, 물 주소. 용왕님네 물 주소, 뚫려라, 뚫려라. 물구멍만 핑핑”하고 기원 하게 된다. 또한 농가에서는 음력 6월 15일, 유두일이 되면 논의 물꼬에 보리개떡이나 밀개떡을 한 덩이 쪄다 놓고 마음 속으로 풍년을 빌게 되는데, 이를 ‘유두제’라 한다. 이처럼 용은 물에서부터 탄생한, 물과 델 수 없는 초월자적 존재로서 숭배되어 왔다. 용을 물에 서 살며 물을 지배하는 신으로 받들어, 나라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용신제, 용왕제 등을 올 리며 용의 조화로운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제는 오늘날에도 풍작을 염원하는 농민의 마음과 안전한 항해 및 풍어를 비는 어민들의 소박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땅의 곳 곳에서 신비롭고 겸허한 의식으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3. 호국과 호법의 용 우리나라에서 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용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용은 장엄하고 신비로운 능력으로 인해 제왕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 며, 이러한 생각은 용-임금-하늘의 관계로 맺어져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수호하는 호국신, 호국룡 의 자연스러운 탄생을 낳게 되었다. 임금은 하늘에 계시는 천제의 후손으로 받들어졌으므로, 이 천제와 임금의 밀접한 관련을 생각할 때 하늘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용의 존재가 호국의 상징성 을 확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생각하더라도, 한 개인의 일에서부터 국가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고 보는 인간의 한계능력 속에서, 하늘과 인간세계를 왕래하며 무궁무진한 조화능력을 갖춘 ‘용 ’의 존재는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상정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우리나라의 건국시조는 용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 거세의 부인이 된 알영은 계룡의 왼쪽 갈비뼈에서 탄생되었다고 하고 혹은 용이 나타나 죽자 그 배를 갈라 얻은 동녀라고도 하였다. 또한 신라 탈해왕은 동해변에 떠내려온 큰 궤짝 속에서 칠보, 노비와 함께 발견되었다는데, 7일만에 일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 라에 일찍이 28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나왔으나 나만이 알에서 태어났으므로 불길 하다고 하여 궤짝에 넣어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고려의 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녀로서, 태조가 된 왕건이 그의 선조를 용궁에 결부시키고 그 용의 혈통을 합리화하기 위해 용 비늘 하나를 조작하여 왕통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도 용을 매체로 천제와의 관련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용의 능력과 신성성으로 인하여 국가와 왕권을 수호한다는 믿음과 상징성에서, 호국사상에 따라 호국용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통일신라를 전후하여 신 라에 불교가 융성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불교는 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유사」 등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라의 용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사를 돕는 호법의 용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국정토를 이상으로 한 신라는 불 교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호법룡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평안을 이루기 위해 호국의 용으로 발전시켜, 불법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 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나타냈다. 즉 불교를 통해 순화된 용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이상적인 경 지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처럼 신라에서 융성한 불교사상은 숭불호국의 용신사상을 낳게 하였으며, 수백 년 동안 찬란 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왔다. 따라서 앞으로 살펴볼 호국과 호법의 용은 신라시대가 그 중심이 될 것이며, 호국과 호법이 함께 어우러진 신라의 독특한 용신사상이 주가 될 것이다. 불교와 용의 관련은 고대 인도의 사신숭배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에는 원래 독사의 위험이 많아 일찍부터 뱀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중국 용의 모습에 인 도 뱀을 신격화한 용의 관념이 혼합되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단순한 초능력적 존재나 악신이었 던 용의 존재가 부처님의 설법 속에서 마침내 불교의 호교자로 그 위치를 굳히게 된다. 이에 따 라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의 하나로 수용되었으며, 용은 불법을 옹호하고 선신으로 존경 받는 팔대용왕으로 분류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때로 세간 을 파괴하고 해를 주는 악신으로도 등장하여, 전체적으로 인간세계에 커다란 교훈의 역할을 수행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특히 신라시대의 호국과 호법의 용을 살펴보기 전에,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나타나고 있는 용의 성격 및 역할 등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용의 모습이다. 불교경전을 보면 많은 용왕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불본행집경」등에 의하면, 석존의 성불한 뒤에 가장 먼저 부처님으로부터 삼귀 오계를 받고 세간에서 최초의 우바새가 된 것이 용왕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라발 용왕과 상거 용왕은 석가불의 출세를 기다리다가 녹야원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삼귀 오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부처님의 설법시에 용왕들이 많은 권속을 거느리 고 와서 법문을 듣는다는 내용도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으며, 「인연승호경」과 같은 경전에서 는 대해 용왕이 사람으로 변하여 부처님이 머무는 기원정사로 찾아가 비구니가 되어 수도생활을 하였다는 내용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인간세상에 정법을 펼쳐서 이로움을 베푸는 용의 모습이다.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용에는 정법대로 행하는 선룡과 법대로 행하지 않는 악룡이 있다. 이들 용은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선 룡과 악룡으로 태어나는데 선룡, 즉 법행룡을 때를 맞추어 비를 내리고 세간의 오곡을 성숙시켜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불법승 삼보를 깊이 믿어 수순법행으로 불사리를 수호한다. 이에 비해 악 룡은 열사의 비를 내려 세상을 태우고 두꺼비를 삼키고 사토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바람을 들 이마셔 뭇 생명이 있는 것들을 파괴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악룡의 등장이 단순한 선과 악 의 대치로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인간세상의 비리나 악행을 바로잡고자 한 인과응보의 교훈으 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세상사람들이 법행에 순응하는가 역행하는가에 따라서 선룡과 악룡이 각각 그 세력을 증대하게 된다. 세간의 사람들이 법에 순응하여 부모를 효도로 공양하고 사문과 바라문을 공양하며 정법을 수행하면 곧 법행룡인 선룡이 세력을 떨치게 되고, 반대로 중 생이 법을 어기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사문과 바라밀을 불경하면 곧 악룡이 그 세력을 떨치게 된 다는 것이다. 셋째, 경전을 봉안하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용왕이 바닷 속의 용궁에 경전을 안치 봉장하고 있 는 내용이 여러 경전에 전하며, 따라서 경전을 용장이라고도 한다. 「용수보살전」에 따르면, 「 화엄경」은 오랫동안 용궁에 감추어졌던 경이라 하며, 유명한 화엄사상의 대가 용수는 대룡보상 에 의해 용궁으로 인도되고, 칠보로 장엄한 보장안의 경전들을 얻어 그것을 세상에 유포시키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용왕은 대승경전의 수호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이 외에도 부처님 탄 생시에 ‘난다’와 ‘우파난다’라는 용왕이 한 줄기는 따뜻하고 한 줄기는 시원한 청정수를 토 하여 탄생불의 몸을 씻어 주었으나, 부처님이 나무 밑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이레 동안이 나 큰 비가 계속되자 용왕이 나와 부처님 주위를 일곱 번 돌고 일곱 개의 머리로써 위를 덮어 비 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는 등 부처님의 주위에서 부처님을 보호하고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도 하였 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의 용의, 불법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법을 수호하고 세간중생의 이익을 증대시키며 경전을 봉안 수호하고 부처님을 보호하는 등, 불교와 밀 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어떠한 불교국보다도 우리나라에는 용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 를 중심으로 불교설화를 기록한 각종 문헌에는 용이 불법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초월자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사찰의 법당이나 탑 등에 무수히 장식된 용도 모두 호법신으로서의 역 할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이러한 호법룡의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용이 호법신 의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신라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특히 사찰의 창건연기 에서 호법룡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 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14년(553년) 2월에 궁전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 땅에 황룡이 나타났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궁전을 불사로 고쳐 짓게 되었는데, 이 절이 바로 황룡사이다. 이 때의 황룡이 바로 호법룡 이라는 사실은 이후 자장 법사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즉 636년(선덕여왕 5년) 당나라로 떠난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불사리를 얻은 후 중국 태화지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홀연히 용왕이 나타나 황룡사를 지키고 있음을 밝히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항복을 받고 태평국가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자장은 귀국 후 호법룡이 지키고 있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다. 호법신의 보호를 받아 창건된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은, 당시 불안한 대외관계 속에서 국민들 에게 커다란 희망과 신념을 심어 주었다. 황룡사는 그 건립기간이나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적 신앙면에서도 당대는 물론 신라 일대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찰이었 다. 이러한 황룡사를 세울 때 나타났던 황룡이 바로 호법룡으로서, 최초로 등장하는 호법호국의 용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은 주위 모든 나라 가 신라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져 영원한 불국토를 이룩할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기원 하는 통일탑,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자장은 문수사리의 부촉을 받고 영축산 통도사를 창건하여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곳의 신지에는 아홉 마리의 독룡이 살고 있었다. 자장은 이 악룡들을 위 해 설법하고 수계하여 그들의 나쁜 마음을 조복시켰는데, 9룡 중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 리는 삼동곡으로 가고 오직 한 마리가 남아 그 절을 호지할 서원을 세우므로 작은 못을 만들어 그 용을 머물게 하였다. 이는 설법을 통해 용의 나쁜 마음을 항복받고 호법룡으로 그 역할을 바 뀌게 하는 개과천선의 의미를 짙게 풍기고 있다.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사찰창건에는 이러한 유형의 설화가 많이 전해지게 되었다. 즉 악룡이 살 고 있는 명당을 찾은 고승이 설법을 통하여 용을 감화시킨 뒤 그 자리에 사찰을 짓고, 그 용은 사찰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변화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신라 화엄종의 초조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그를 사모하는 여인 선묘를 만나게 되 었다. 그녀는 의상의 인격과 도심에 감복되어 세세생생 의상이 불도를 성취할 때까지 학업에 필 요한 물자를 대겠다는 대원을 세웠다. 그 뒤 의상이 선묘를 만나지 못한 채 귀국의 뱃길에 오르 게 되자, 뒤늦게 선창가로 뛰어나간 선묘는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서원하였다. “원컨대 이 몸이 대룡으로 되어서 저 배를 무사히 갈 수 있게 하고 스님의 홍법을 도우리라.” 선묘는 곧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의 뱃길을 편안하게 인도하였고 신라에 돌아온 의 상을 도우며 호법룡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의상이 부적사를 창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의상은 당시 도적의 무리가 들끓던 태백산에 화엄의 중심사찰을 만들려 하였으나 도적들의 방해가 끊이 지 않았다. 이에 호법룡이 된 선묘가 스스로 부석이 되어, 공중에 뜬 큰 바위로 도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사찰을 창건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찰명을 ‘부석사’라 하였으 며, 지금도 부석사에서는 석룡의 모습으로 사찰을 수호하고 있는 선묘호법룡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의 호법룡사상은 자장과 의상에 의해 널리 제창되어, 불국정토를 이상향으로 한 신 라인들에게 더욱 깊은 불심과 통일에 대한 신념을 불어 넣었다.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 왕은, 항상 왜구를 염려하여 사후에는 용으로 화하여 왜침을 막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 죽자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해를 다비하여 그 유골을 동해 가운데의 큰 바위에 수 장하였다. 현재 경주 동쪽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그 곳이다. 그 뒤 과연 문무왕은 용 이 되어 나타났으며 이듬해(682년)에 신문왕은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기슭에 감은사를 세우고 금 당 섬돌 아래에다 동해 쪽으로 구멍을 뚫어 용으로 화현한 대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해 5월 초하루,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솟아났는데, 그 산 위에는 낮에는 둘로 되었다가 밤이 면 하나로 되는 대나무가 나 있었다. 신문왕이 그 산으로 들어가니 한 용이 나타나 “이 대나무 를 피리로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문무왕께서 대룡이 되시고 김유신이 천신이 되 어 이들 2성이 마음을 모아 호국의 큰 보물을 내리도록 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맑아져서 국태민안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만 가지 파도를 잠재 워 평온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이처럼 문무왕이 보여준 호국정신,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대원을 이룩한 호국사상은, 문무왕에 대한 흠모와 함께 이후 역대왕에게 동해호국룡 신앙으로 계승되었다. 효성 왕과 선덕왕도 그 유명에 따라 동해에 유골이 수장되었으며, 혜공왕과 경문왕은 감은사로 행행하 여 멀리 바다를 망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성왕 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원성왕 11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머물다 간 일이 있는데, 그 다음날 두 여인이 내정에 나타나 왕께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해룡과 천지룡 의 처이온데, 당나라 사신이 데리고 온 하서국인 두 사람이 저희들 두 부룡과 분황사 우물의 용 등 세용을 주술로써 작은 고기로 만들어 통 안에 넣어갔습니다. 저하께서는 호국룡인 저희 남편 들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사신이 뒤를 쫓아 그들을 만난 뒤 하서 인에게 “너희들이 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가지고 가느냐?”하고 호통을 쳐서 고기를 돌려받 아 모두 제 자리에 넣어주니 다시 용으로 화현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십 가지의 용과 관련된 불교설화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한 여러 문헌에서 전 해지고 있다. 이들 설화는 단순한 설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상과 정신적인 내면세 계가 깊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호법호국의 용은, 통일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불교와 국운 의 성쇠에 ㄸ라 그 양상과 성격이 변화되고 있다. 즉 진흥왕 때의 황룡은 황룡사 창건의 동기를 제공하였을 뿐 별다른 특색이 없었음에 반하여, 선덕왕 때 자장에 의하여 인식된 용은 호법룡으 로서의 적극적인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호법룡이 지키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서 삼국을 통일하고 왜적의 침해를 막도록 하였으니, 호법룡에서 한걸은 더 나아간 호국룡으로서의 매우 적극적인 사상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따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해룡이 용궁에 비장된 「금강삼매경」의 산경을 신라에 주어 대안대사로 하여금 순서를 맞추게 하고 원효대사로 하여금 소를 지어 강설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때의 용신은 신라의 불교와 국가를 수호하는 용 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적극적인 홍법활동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동해룡, 그의 불사를 도운 선묘룡에게서도 적극적인 활동성을 볼 수 있으며 문무왕의 대원으로 화현한 동 해호국룡, 명랑을 용국으로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황금을 시주한 서해룡 등은 모두 활기찬 호법 과 호국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성왕 때의 세 호국룡은 한낱 외국인의 주술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잡혀가는 허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나타나 있다. 또한 진성왕때의 거타지 이야기에 나오는 서해룡은 사미로 변한 여 우의 주술에 맥을 못추는 비참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고 보양을 따라왔던 용자 이목도 주벌을 피하여 법사의 의자 밑에 숨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가 크게 흥하고 국운이 창성하였던 진흥왕 이후로부터 통일을 완 성한 경덕왕대에 이르기까지는 한결같이 활기차고 적극적이던 호법호국룡이, 불교가 침체되고 국 정이 혼란해지기 시작한 원성왕 때부터는 무력하고 허약한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시대의 정신력과 국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신라인들은 불국정토의 이상 아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오면서 독특한 호법호국룡 사 상을 이룩하였다. 숭불호국의 용들이 동해와 서해에서 그리고 사찰과 연못 등에서 신통한 능력과 위엄으로 신라의 불법을 수호하고 국가를 지켰다는 점에서 신라의 불교 국가적 위치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용들은 불법을 숭상하는 국토가 아니면 머물지도 않을 것이며 불법이 없는 세 간에는 출현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에 있어서의 호법호국룡은 숭불호국의 신라 불교정신이 낳은 필연적인 소산이며 불국정토 의 가장 믿음직한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4. 권위와 길상의 상징 용은 우리 민족, 나아가서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초능력적인 상상의 동물로 그 위치를 굳혀 왔다. 민가와 조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민간신앙과 불교 또는 유교의 구분 없이 널리 수용된 용은 시대 및 수용분야에 따라 그 역할과 조화능력 등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지 만, 기본적인 이미지는 ‘권위’와 ‘길상’을 대표하고 있다. 단순히 사된 것을 방지하고 복을 기대하는 길상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갖춘 가장 능동적이며 적 극적인 형태의 길상자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최대의 권위와 적극적인 길상의 존재로 자리잡은 용에 대한 관 념은, 다양한 분야에서 유형, 무형의 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권위와 길상의 상징인 용은 옛 선비들에게 있어서 성취와 최상의 것을 의미하는 존재로 여겨졌 다. 따라서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 하고, ‘미꾸라지가 용이 되었다’ 또는 ‘개천에서 용 났다’하는 말은, 갑자기 크게 성공하거나 단계를 뛰어오른 사람을 말할 때 쓴다. ‘등용문’의 고사는, 중국 황하의 잉어들이 산서성에 이르면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서 상류의 협곡이 있 는 용문으로 다투어 뛰어오르는데, 그 곳을 넘어서면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여 입신출세의 관문 을 등용문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의 유명한 화가 장승요가 용을 그린 후 눈동자를 그려 넣자 용이 갑자기 생기를 띠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성취하는 것을 화룡점겅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가 꾸는 꿈 중에서는 용꿈을 최고로 치는데, 특히 태몽으로 용꿈을 꾸면 크게 될 인물을 잉태했다고 하여 집안의 경사로 삼는다. 이러한 대길의 용꿈을 몰래 간직하기 위하여 용꿈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오죽헌에 있는 몽룡실은 선비들이 용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게 하 는 한 예이다. 용꿈에 얽힌 실화를 몇 편 살펴보자. 세조 때 홍재상이 낮잠을 자다가 문득 하늘에서 뇌상병력 이 진동하고 청룡이 그에게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홍재상은 급히 시비 춘성과 관 계를 맺었고, 그날부터 춘성에게는 태기가 있어 출산을 한 아이가 바로 홍길동이라 한다. 전북 정읍군 칠보면에 사는 함풍 이씨 문중의 이승지 아버지는, 어느 여름 돌확(돌로 된 조그 만 절구)에서 청룡 세 마리가 나와 두 마리는 하늘에 오르고 한 마리는 올라가다 떨어지고 올라 가다 떨어지고 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돌확에 가보니 큰 지렁이 세마리가 있어 그것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나서 아들 3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인물과 재주가 뛰어났으며, 한 명은 승지가 되고 한 명은 대동군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문과에 장원한 사람들의 모임을 용두회라 하였고, 군자의 덕을 칭친하여 용광이라 하였으며, 뛰어난 인물을 용과 봉황에 비유하여 용봉이라 하기도 하였다. 또한 호걸이 민간에 숨어 있는 것을 용이 서린 것에 비유하여 용반이라 하였고, 천자나 영웅의 위엄을 비유하 여 용의 비늘, 즉 용린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용은 심이지신의 하나로 진시의 시작신장의 임무를 차지하였고, 사신의 첫번째 존재로 동 방의 수호신 역할을 담당하였다. 십이지신장으로서의 조형은 신라시대 왕릉병 풍호석으로서 표현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불교식 장례에 쓰여진 현화로서 인신용면의 특이한 형상을 나타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청룡도는 사신 도의 최고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풍수지리에서 좌청룡, 우 백호의 신앙에 따라 우리 일상생활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좌청룡 우백호의 방위수호신은 점차 가장 강력한 두 동물, 용과 호랑이를 함께 설정함 으로써 더 큰 힘을 얻고자 하는 소망에 따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해가 되면 ‘호축삼재 용수오복’의 뜻으로 대문에 걸거나 붙이는 「용호도」에서 이러한 민심을 잘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용과 호랑이의 기세를 함께 설정한 것으로, ‘용미에 범 앉은 것 같다’라는 말은 위 엄이 넘쳐 타인을 억압하는 듯한 인상을 가리키며, ‘용호상박’이라 하여 막강한 두 사람이 서 로 싸운다는 뜻을 담았다. 또한 ‘용양호시’라 하여 영웅이 일세를 응시하는 태도가 용처럼 활 달하고 범 같은 눈초리로 본다고 표현하였고, 웅장한 산세가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하다 하여 ‘용반호거’라 하기도 하였다. 미술분야에서의 용은 궁궐의 지붕이나 임금이 임하는 곳, 사찰의 법당을 비롯한 탑, 종, 부도 등과 그림, 가구, 의류, 잡기, 문구, 장신구 등에 이르기가지 생활 전분야에 걸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구려시대의 변화에서부터 근세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나 유형적으로 방대하게 전하 고 있는 이들 자료를 통하여, 고대 용신앙이 불교와 습합되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사상이 융합되어 새롭고 독창적인 우리 용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벽사용 그림으로 그려진 용은 호랑이, 도깨비, 해태 등과 같은 다른 벽사용 그림에서와 마 찬가지로 부드럽고 친밀감이 넘치는 한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할아버지 얼굴 같은 인자한 용을 비롯하여 어리숙한 표정, 토끼처럼 귀여운 표정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용의 얼굴은 전통 귀면과 일치되며 눈, 코, 입, 이, 뿔, 눈썹, 촉각, 수염의 표현으로 용의 관 상을 결정짓는데, 때로는 용두를 남근형으로 그려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해학적인 면도 있다. 신 흥사 대웅전의 계호석 석룡조각은 부드러운 우리나라 용조각의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신라시대의 이수조각은 귀염성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조선조의 용 그림은 매우 해학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용그림은 그 종류도 다양하여, 구름을 배경으로 삼는 운룡도, 물속에서 뛰어나오는 수룡도, 아 무 배경도 없이 그려지는 반룡도, 한쌍으로 꾸며지는 쌍룡도, 호랑이와 짝을 짓는 용호도, 호랑이 와 힘 다툼을 하는 용호상박도, 용궁의 용왕으로 나오는 용신도, 하늘로 올라가는 승룡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 용꿈을 그린 몽룡도 등이 있다. 글씨에 있어서도 용자를 크게 쓴 글씨는 예로부터 선비들이 다투어 쓰던 글씨였다. 이는 용그 림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용이 움직이는 것같이 아주 활기있는 필력을 ‘용사비등’ 이라 하기도 하였다. 용조각은 용이 등장하는 미술품 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분야이다. 특히 용조각은 일반적 인 길상의 의미를 넘어서서 조각된 용도에 따라 뚜렷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많아 흥미롭다. 전각의 지붕 위에 장식된 용은 이문이라 하여 목조건축물에서 가장 우려되는 불을 누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범종의 종뉴(용을 매달기 위해 종 위쪽에 있는 부분)에 조각된 용은 바다 의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 모양의 당목으로 종을 치면 우렁차고 힘차게 우는 포뢰로 되어 있다. 돌비석에 조각된 비히는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하고, 산예는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 기며, 살생을 좋아하는 애차는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새긴다. 이 외에도 물을 좋아하여 다리의 기둥에 세우는 공하,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솥두껑이다 식기 또는 반기에 시문하는 도철 등 이 있다. 이들 용은 모두 자신이 처해 있는 장소나 용도에 맞추어, 사된 것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특성을 발휘하면서 더욱더 강력한 수호자, 길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반 민가에서 세시풍속에 따라 행하는 여러 가지 민속에서도 용과 관련된 다채로운 내용 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경남 밀양군 무안면에서 전승되는 용호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그 해의 풍년을 기 원하는 행사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마을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용마을과 범마을이 새끼를 꼬아 거대한 줄로 용과 호랑이를 만들고, 각각 대장이 진두를 지휘하는 가운데 장정들이 대진하여 대결을 벌인다. 이러한 놀이를 통하여 용과 호랑이를 한바탕 혼쾌하게 대결시킴으로서, 한해 동안 용호의 천변만화하는 능력으로 사됨을 물리치고 능동적인 기복을 소망하였다. 전북 남원지방에서는 섣달 그믐이나 정월 대보름에 사는 곳을 남과 북, 두 편으로 나누어 각각 큰 용마를 만든 뒤 오체에 용의 무늬를 그려 외바퀴수레에 싣고 거리로 나오면서 백 가지 놀음으 로 대진하여 승부를 겨루는 용마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악귀를 제어하고 재앙을 쫓으며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 위한 것으로, 남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북쪽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한 다. 이 외에도 정월 들어 첫 진일(용의 날)에 부인들이 닭이 울때를 기다렸다가 서로 앞을 다투어 물을 길어오던 풍습으로 ‘용알뜨기’가 있다. 이것은 전날 밤에 용이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 는데, 그 알을 낳아 놓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 해 자기 집 농사가 잘된다고 하는 속신때 문이었다. 용알을 먼저 떠 간 사람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지푸라기를 우물물 위에 띄워 놓으며, 뒤에 온 아녀자는 알이 남아 있을 다른 우물을 찾게 된다고 한다. 또한 용을 이용하여 그 해의 풍흉을 알아보던 ‘용의 밭갈기’라는 것이 있다. 「동국세시기」 에 전하는 전설로서, 동지무렵 함창의 공검지, 밀양의 남지, 당진의 합덕지, 연안의 남대지 등 못 에 얼음이 얼면 그것이 흡사 극젱이(쟁기와 비슷한 농구)로 밭을 갈아 놓은 득산 모습을 하고 있 어, 그 지방의 옛 농민들이 이를 용의 소행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모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 하여 갈아 나갔으면 풍년이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갈아 나갔으면 흉년이며, 동서남북으로 엇갈려 있으면 평년작이 된다고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이처럼 용은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광범위하게 성장되어 왔다. 왕권과 권위를 타나내는 상징으로서, 천변만화하는 조화로 물을 주관하는 수신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 키는 호국호법의 존재로서, 사됨을 물리치고 길상을 불러오는 벽사기복의 강력한 주재자로서, 그 리고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방을 지켜주는 방위신으로서 용은 우리 민족과 역사의 흐름을 함께하 여 왔던 것이다. 용은 우리의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용을 통하여 다채롭게 꽃피워 온 이 땅의 얼과 문화를 올바로 인식할 때, 우리 민족이 지녀 온 꿈과 이상을 함께 느껴볼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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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좋은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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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좋은글 주셔서 감사 합니다
살롬!!!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