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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9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4,32-37
복 음 : 요한 3,7ㄱ.8-15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탄광촌을 방문한 어느 젊은 신부가 탄광에 들어갔습니다.
신부는 어둡고 더러운 갱 안의 통로에서
아름답고 하얀 꽃이 자라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광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시커먼 탄광에서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광부는 “검은 탄가루를 꽃에 부어보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그 광부의 말대로 했더니 신기한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글쎄 탄가루가 꽃잎에 닿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꽃잎 표면이 너무 매끄러웠기 때문에 탄가루가 꽃잎에 붙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 매끄러운 꽃잎을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하얀 꽃이 우리 마음과 같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으로 인해서 세상의 모든 악이 들러붙지 않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에 붙어 있는 각종 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죄들이 왜 이렇게 계속 남아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똑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지었던 죄를 반복해서 짓곤 합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먼저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깨끗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죄악의 들러붙었던 것이고,
그래서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자기 마음도 깨끗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길 원한다고 요구하면
너무 큰 욕심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에서 영으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는 니코데모도 알아듣지 못하지요.
세상의 지식만으로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으며,
오로지 성령의 이끄심으로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온전하게 맡기는 사람은 주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올렸을 때 뱀을 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을 믿고 바라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자기 힘으로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으며, 세상의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똑똑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던 니코데모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께 좀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때,
우리의 마음은 깨끗해져서 죄가 더는 들러붙지 않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 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분명 죽었는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행동하는 믿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당 주변의 철쭉, 연산홍, 꽃잔디, 민들레 꽃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소나무 솔잎 꽃도 너무도 이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핀 꽃이지만 얼마 안 가서 다음을 준비하며 시들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색깔을 드러내는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느티나무의 연두색 나뭇잎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우리도 누구의 시선과 인정에 개의치 않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영양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속이 튼튼하지 못하면 생기가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 성장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밑거름이 부족하고 웃거름만 넘치면 일시적인 효과에 웃자라고 튼실하지 못합니다.
웃거름은 겉만 다스리고 속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속이 부실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웃거름은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고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단체활동 등 생색나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가장 완벽한 기도는 미사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당신의 살과 피로 영양을 주십니다. 영성체는 최고의 영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증거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그분을 알고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사회의 구조를 바꾸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복지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소유와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부정과 부패 때문입니다.
지금의 인류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두 개의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고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달콤한 열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열매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기후 위기와 같은 생태계의 파괴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철학, 문학, 예술, 인문학, 종교라는 인류의 유산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학생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갈매기의 꿈’입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먹이를 얻기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다른 가치를 찾아서 살아가는 갈매기가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갈매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입니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사랑하는 갈매기와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갈매기와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갈매기의 고통,
자신의 뜻과 다르게 행동하는 갈매기의 고통을 깊이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그런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갈매기입니다.
이 갈매기는 성공, 명예, 권력으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공감, 겸손, 회개, 식별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갈매기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갈매기는 부처님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소크라테스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갈매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모든 혁명가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처럼 예수님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자신들의 명성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온 것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과 함께 머무를 자녀들을 낳으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사로 태어났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9절)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듯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말은 그분의 기원이 성령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말씀으로서는 하늘에 계시며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 육의 기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께 있다.
그래서 육이 되신 말씀은 비록 육이시지만 결코 말씀이 아닌 적이 없으시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올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땅에 속한 인간이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때, 영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께 결합할 때,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14절)
뱀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집어삼키던 죄를 의미한다.
그 뱀을 들어 올린 표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분을 통하여
그 뱀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절)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원인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신 분이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믿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어찌 멸망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더 확실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 주며,
하느님께 또한 영광을 드리며, 구원에 이르는 삶이다.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박상대 마르코 신부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관한 복음 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 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 동안 봉독 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 말씀으로 시도된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줄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복음(요한 3,1-8)이 그 場을 열고 있다.
문맥상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이전 부분을 잠시 보자.
거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믿음이다.
그저 예수께 대한 好感이라는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2,24)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言明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0,25)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고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强行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直觀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入籍하려 하는 자는 물과 성령의 洗禮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계속된다.
오늘 복음의 대화는 물과 영으로 ‘새로 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수님의 自己啓示的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은 生命과 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
문제는‘영’에 대한 것이다.
靈에 대한 지식은 모두가 짧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나 희랍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서에서 ‘바람, 호흡,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예수께서는 ‘영’을 니고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豫報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豫想이며, 假定이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람의 성질을 통하여 영의 逆動性과 創意性을 암시하신다.
그래서 곧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8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동번역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까지 하느님 聖三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목의 ‘성령’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언급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唯一神 사상을
전부로 알고 있는 니고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다.
따라서 니고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9절)라는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10절)라는
꾸중은 니고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이다.
이제 ’정말 잘 들어 두어라.‘(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표현으로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고데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가 어제 복음에서 ”선생님, 우리는...“(3,2)하고 시작했던 물음의 서두를 기억하여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는‘이라는 표현과 니고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너희는‘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침을 내리신다.
이 가르침은 ’너희‘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保留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니고데모를 포함한 세상사람들이 ’세상의 일‘
(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發說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 저자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공관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없기 때문이며,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마‘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한다.
세례성사에서 물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다.
모든 성사에서 합법적인 성사거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은 形象과 質料이다.
세례성사에서 물은 질료에 속한다.
물은 생명과 정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이 성사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례성사가 목적으로 하는 ’새로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기운(창세 1,2)이며,
진흙 인간이 숨을 쉬도록 생명을 가져다준 하느님의 입김(창세 2,7)이다.
하느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고“(민수 16,22),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며“(이사 42,5),
”마르고 비틀어진 뼈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 주시는“(에제 37,6) 힘이다.
이러한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세례성사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맞물려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받은 사람은 이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인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시기 전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봉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 시기에 읽었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만남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면서 최고 지도층 인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그분께서 정말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 하늘로 올라간 이”이심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코데모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의미는 해당 그리스 말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노쎈’으로,
‘오래전부터’, ‘처음부터’라는 의미도 있으며,
‘처음부터’라는 뜻은 ‘하느님에게서’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곧 ‘위로부터 태어남’은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에 읽었던 이 내용을 부활 시기에 다시 읽는 이유는,
부활이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일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어남’과 ‘다시 태어남’은 다릅니다.
‘태어남’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다시 태어남’은 참된 구원을 선택하는 의지에서 일어납니다.
이 ‘다시 태어남’의 본보기를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여줍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부활을 증언한 초기 교회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변에 궁핍한 사람이 없게 하고,
이러한 결단으로 모두 큰 은총을 누립니다.
덜 교만할 때 덜 고집스러워지고, 덜 고집스러울 때 덜 두려워하게 되며, 덜 불안해집니다.
이러한 삶에 초대되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 곧 부활의 삶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