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운 박정희
친일문제로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 한편 조경한은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출생으로 본명은 종현(鍾鉉).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을 수학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백강과 경한이란 호와 이름을 받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 한독당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김일성의 배신학교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화당시절 박정희의 천거로 승주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
-펌]박정희 친일왜곡 진실을 밝힌다
먼저 현재 인터넷이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 10가지란 글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최근 많은 단체에서 박통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입니다......
따라서 위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친일파청산에 반대하는 분들의 대표적 주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 많은 네티즌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재물 영달을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를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민족을 수탈하고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 따져야한다는 것이
지금 신세대 네티즌의 중론입니다
일제하 공무원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군인도 친일이고 사업가도 친일이면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뭘 할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10가지란 글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현재 전혀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박정희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나 현재까지 “~~카더라.” 라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혈서론의 출처가 만주일보라고 하는 데. 만주일보는 1927년에서 1934년까지라고 입니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나 박통이 입학한 때는 1942년입니다.
만주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의 소장목록입니다.. 찾아보시길...
(http://147.46.181.112/lib_service/separate/paper_list.html#마)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위의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 및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참조글:일제하에서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였다(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69nj&articleno=2650946)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부분은 좌익입장에서 보면 사실일수도 있으며 기회주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우익의 입장에서 왜 공산주의를 배신한 것이 기회주의가 되어야 하는지?그러면 공산주의자로서 그냥 남아 있어야 했다는 뜻인지?
솔직히 공산주의 배신한 것 잘한 것 아닌가요?비난을 위한 비난일뿐입니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이글 역시 ② ③번과 같습니다...첨언하자면 우리나라의 많은 창군 멤버들도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다분히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고위층 장성중에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장교출신입니다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아니면 말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임)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외교석상에 욕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반미면 어떻냐?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가서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통이 이렇게 받았겠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습니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겁니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일협정 성사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나라한테 일본에서 자꾸만 시비를 거는 독도를 포기하라고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대노할 정도로 미국의 조속한 한일수교협정체결 압력이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박통은 독도를 끝까지 배타적 경제수역 (EEZ)로 지켰습니다 단지 국제분쟁화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책에 직접적이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정책기조를 선택했고요 이는 설득력있는 정책입니다.dj정권 노정권까지 비숫한 기조를 이어오고 있지요
정작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한일신어업협정을 맺은 dj정권 그것을 계속 연장해준 노정권입니다 60년대 그당시 냉전시대의 강대국의 논리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할려고 했을까요? 수교 안해도 일본제품은 우리한테 얼마든지 내다 팔수 있습니다 덧붙여...박정권이 개인청구권을 팔아 먹었다는 것은 잘못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청구권을 팔아먹은 것은 장면정부입니다 개인청구권이란 개인이 일본정부간에 재판을 통해 배상받는 것인데 실제로 배상받은 사례는 거의 잘 없죠
일본이 주장했던 것은, 서류로 증빙할 수 있을 경우에만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전쟁 문제도 있고, 모든 부분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개인 보상도 포함해서 국가가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이라든가 하는, 국가와 개인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코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로부터 피해를 본 조선국민 개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피해보상 하겠다는 것을 국가가 가로챈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할 경제개발 종자돈을 베팅할수 찬스를 놓쳐야한다니....?
그당시 아사자 동사자 전염병자 비일비재하는 국가에서 할수 있는 최선책였을까요?
회담이 성사된 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돈을받아 투명하게 충실히 모범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금보면 긍정적 평가가 국민적인 대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금액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라니..? 논리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는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땅 독도는 현재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해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에게도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노무현대통령은 DJ정권의 해수부장관출신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신어업협정 연장하신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친일파로 치자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자금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통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통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http://www.kla815.or.kr/)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에서 박통은 신친일파로 분류 돼있습니다.
(http://bluecabin.com.ne.kr/index.html)
내용)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http://www.e-hanil.net/)
- 민족문제연구소 : 박통을 친일파로 주장 최근 박통친일행적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함으로써 박통의 친일논쟁을 유발 시킨 곳으로 어떤 진실을 주장하는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본다면 그는 친일파가 아니라 극일파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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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을 속이고 정적을 향한 친일청산을 외치는 거짓말쟁이들 가증스런 위선의 철가면 벗기기
민족정기 부르짖던 김희선은 알고보니 독립군 색출,고문하는게 '직업'인 일제밀정 딸,
반민족특별법 추진위원장 신기남은 일제시절 독립군 살인행각을 밥먹듯이 저지른 악질왜놈 헌병 오장 아들놈,
한국정신대 대책위원장이라며 역시 김희선과 함께 친일규명에 앞장선 이미경이라는 여자는 현지일본인을 제치고 천황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한 악질 친일후손의 딸,
큰아버지는 일제면장에,아버지는 일제훈도로 친일의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준 집안전체가 친일로 도배된 유시민일가,
이회창총재에게 친일파 운운하던 정동영은 독립운동가 나석주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으로 유명한 일제농민수탈기구(동척과 더불어 양대 농민수탈기구중 하나인 "식산")에서 친일작태를 벌인 악질친일파 아들놈,
조선일보 윤전기를 독립기념관에 전시하자는 문화부장관 정동채의 아비는 신기남 부친과 같은 악질 왜놈 헌병인 겐뻬이고쬬,
민족주의자 행세해온 김근태는 일제시절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는 최전선에 앞장서온 일제훈도놈 아들!!
김근태 역시 정동영과 함께 지난 대선때 이회창 前 총재에게 친일파라고 공격한 바 있던 황당한 인간이지요.
물론 일제하에 직업군인이나 하급 공무원등을 한게 무조건 매국이고 친일로 볼수는 없다
바로 수탈에 앞장섰느냐, 탄압에 앞장섰느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태어날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이들의 시절을 지금의 잣대로 잰다는건 엄청난 오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부친이 걸어온 추악한 반민족 친일행위들은 놔둔채
자신들의 정치활동을 위해 정적을 죽이기 위해
친일규명 운운하는 뻔뻔스런 작태를 보여주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수 없다.
이들 부친들의 자세한 악질친일행각을 지금까지 드러난 사례를 중심으로 알아보자.
계속... .
진검승부님 블로그 가기 --> http://blog.empas.com/j638066/6244446
참고:일제훈도란?
일제의 훈도는 일본천황 즉 덴노헤이까의
교육칙어를 받들어 식민지조선인을 일제에 동화시키는
첨병이었다고 볼수 있다.
신사참배,조선말 사용금지,일본말 사용권장,곡물
공출 강요,놋그릇 수탈 등은 훈도의 기본업무였으며
일제의 훈도는 대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뛰는
제1선의 자리였던 것이다
--맨손으로 일군 대한민국
1960년 당시 우리나라는 자본도 기술도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를 부흥시킨 것입니다. 더우기,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며, 공비를 내려 보내고, 땅굴을 파 내려오던 북한이 있어서 안보적으로도 매우 불안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손엔 총을 한손엔 삽을 잡아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과 필리핀 보다 3배 정도 못살았고, 베트남이나 태국 보다도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나라가 되었습니까?
60년도는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만들어 팔아먹는다는 개념조차 세워져 있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인력들이 일할 곳을 찾지 못하여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할일없이 뒷골목이나 기웃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으로 일자리 찾아서 이민도 가고, 광부로 간호사로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었지요.
이승만 정권당시 한국을 둘러본 어느 미국의 세계적인 유명언론인은 당시의 한국을 ''오물더미의 나라''라고 경멸했다고 하더군요.
그것은 외관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의 통렬한 비판이었습니다.
세상에 ‘한국인처럼 어리석고 게으른 민족은 처음봤다’ 면서 현상황 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이들의 타고난 ''국민성''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경제적인 번영을 누릴 가능성은 오물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60, 70년대 눈부신 산업화의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세계가 모두 인정하는 경제 성장이었습니다. 외국에서도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비약적인 경제부흥을 이루자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의 ‘한강의 기적’이 훨씬 더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비록 2차 세계대전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산업사회의 전통과 훈련된 국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한강의 기적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진정한 의미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할 때, 라인강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입니다. 라인강은 자연의 수로로서 통일 전 서독의 물류를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화물 물동량은 거의 60%를 감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건설비도, 유지비도 필요없는 천혜의 자연 수로인 라인강 덕분에 기적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후 독일의 경제 기적은 라인강이 가져다 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때 한강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눈부신 경제 성장의 기적을 만들어 낸 우리 ‘국민’ 또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상징합니다. 지도자의 옳다고 믿는 일에는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투지와 불퇴전의 용기로서 목표지향적 리더십으로 ‘우리도 잘살아 보자’ ‘하면 된다’ 라는 비전하에 우리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한 끝에 기적같은 산업화의 성공이 가능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우리 국민의 역량과 의지에 시동스위치를 누르는 지도력을 박정희 대통령이 발휘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폄하자들은 그의 위대한 공은 절대 말하지 않고, 과만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을 괴롭혔습니까? 아니면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굶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 잘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까?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박대통령의 공이 80%이고, 과가 20% 라고 평가하지 않습니까? 밥이 필요한 시절에 국민들에게 밥을 준 지도자 라고 국민들은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후진국에서 산업화가 민주화가 동시에 진행되어 성공한 예는 없습니다.
현시점에서 모든 바람직한 목표를 모조리 달성할 수 있는 정부는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를 단시일 안에 달성하려면 적어도 당분간은 다른 가치나 목표들을 지연시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민주화를 왜 소홀히 했느냐의 물음이나 비난은 지나친 요구일 것입니다. 그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 먼저 이룩되면 그 위에서 우람하고 튼튼한 민주주의의 꽃이 핀다는 철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기에, 그 토대위에서 실질적인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고, 그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도 박정희 대통령의 공이란 논리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자유만큼은 부분적으로 제약을 가했지만, 북한과는 달리 대부분이 개인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살던 시대였습니다.
사유재산제는 당연한 것이었고,
여행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학교선택의 자유, 그리고 무슨자유... 무슨자유 등이 보장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권위적이라고 비난받았던 것은
당시 자유진영의 선진민주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위적이었다는 것이지
북한과 비교하면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북한이 남침을 호시탐탐 노리던 그 때, 박정희 대통령 집권 동안 법에 의해서나 사고에 의해서나 죽은 사람은 30명도 안됩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루 평균 30명의 국민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삶의 희망을 버리고 자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서 했던 행동이 우리나라의 발전과 우리의 삶을 위한 행위였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자신의 자리의 위신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알기에 그분의 업적을 인정하고 80%의 국민이 그의 공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위대한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 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기간 중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 했음에도 불가사의하게 친인척 비리나 부정부패에 연루된 일이 한건도 없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거주이전의 자유, 사유재산제가 보장되지 않고, 시위도 허락되지 않죠. 그리고 정부에 반항하면 바로 총살시킨다고 합니다. 중국도 아직까지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완전하지 않다고 합니다.
60-70년대 당시, ‘인권’을 외치고 ‘민주’를 외치던 사람들 중에는 순수한 민주 인사들도 있었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산업화에 반대하고, 위장된 민주화를 외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북한과 내통되고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미국 일본으로 다니면서 주한미군철수를 외친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분도 있었구요.
이런 사람들이 그 당시에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떻게 했습니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고, 철강산업에 반대, 조선산업 하자는데 반대한 사람들 아닙니까?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기에 한강의 기적은 가능했습니다.
당대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기에 외로웠던 것입니다.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이루어 낸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야당은 학생들을 선동해 온갖 중상모략 왜곡을 일삼았고..
개방화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서는
굴욕외교라고 욕을 해 댔으며..
북과의 대치로 인해 안보상황이 불안해서, 안보상의 위기를 돌파하고
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결단한 월남파병에 대해서는
젊은이들 피를 팔아 먹는다고 했으며..
고속도로 건설한다고 했을때 재벌들을 위해 길 놓아주는 것이라고 매도 했으며..
포항제철과 조선소 건설을 한다고 했을 때도, 우리가 무슨 제철사업을 할 수 있으며 조선소 건설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반대했습니다.
인기에 영합하는 것 만큼 손쉽고 재미있고 편한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인기에 영합했더라면 지금의 조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내외의 수많은 비판을 무릎쓰고 추진한 산업구조안에서 지금 먹고 살고 있는 셈입니다.
현재의 수출을 이끌고 있는 것이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제품이란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만 부흥시킨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국민교육과 의식계몽에 힘썼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과 선현유적을 정비하는데 애쓰셨습니다.
충무공을 모신 이순신 사당, 유관순 유적, 윤봉길 의사 유적, 칠백의사 총, 율곡 이이 서원, 이퇴계 서원, 박물관, 신라, 백제 유적지 등 전국방방곡에 문화유산을 정비하셨습니다.
또한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제주도 개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6.25때 폐허가 되었던 벌거숭이 산을 산림육성을 하여 푸른산으로 만들었고, 경제개발을 하면서도 환경보전을 위해서 그린벨트를 지정하고, 자연보호를 위해 자연보호헌장을 공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업적들과 국민에 대한 헌신 때문에 국민들의 80%가 공이 과보다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아일보(자유토론방)
--독립군 김학규 장군 -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
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으로 열하성(熱河省)에 있는 만주군 보병 8단 부관(중위)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광복직후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 3지대 ‘평진대대’에 합류했다. 그때 제3지대장이 김학규 장군이었고, 박정희는 제2중대장이었다.
김학규 장군은 열병 등의 신병으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8년 4월16일 영국 상선편으로 귀국했다. 김 장군은 곧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한독당(韓獨黨) 조직부장에 취임한다. 1949년 6월26일 현역군인이던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저격하자, 안두희의 한독당 입당을 주선했던 김 장군은 배후조종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김학규 장군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재수감된 김 장군은 4·19 직후 풀려나 1960년 한독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한다.
1961년 5·16 이후 박정희는 옛 상사였던 김학규 장군을 보살폈다. 김 장군을 복권시키고,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토록 했다고 한다.
원로 한국학자인 최서면(崔書勉·78·일본거주)씨는 “김학규 장군이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 대통령이 내게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라’고 부탁해 내가 그 분을 등에 없고 가서 국군 병원에 입원시켜 드렸다”면서 “김학규 장군은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광복군 3지대 ‘평진 대대’ 대대장이었던 신현준(申鉉俊·88·미국 거주) 전 해병대 사령관은 “내 아래에서 중대장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학규 장군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예전 상관을 깍듯하게 모셨다”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정리(情理)를 생각하면, 세상을 ‘친일이다, 아니다’로 재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알게 된다”고 했다.
1967년 9월20일 김 장군이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케 했다. >>
吳東龍 월간조선 기자 gomsi@cho
--조선인병사를 독립군으로 빼돌린 박정희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벅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가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 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 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입니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직 박정희 대통령께서..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 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박 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요? 만약 박 정희 대통령이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하시었습니다.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
민족과 자주를 부르짖는 저들이 지끔까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일본군 위안부들이 울고 있습니다. 탈북동포들이 통곡하고있습니다.
우리민족은 독립투사들을 포함하여 일제시대, 해방시대, 6.25전쟁, 유신시절, 민주화시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국가와 민족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 <좌파>세력과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기냥 속쓰리고 눈물밖엔 나오는게 없는 핸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으 ~흐흫흑~~~
거사님 손수건 받으세요...^^
내이름은 없더라... 와 없는기야...
거사가 직접 타이핑했나 퍼왔나? 대단혀~~ 읽는데만 석달열흘 걸리겠다. ㅋㅋㅋ 일로삼아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조용할때...
거사님! 존경스럽습니다. 잘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