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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한 綠衣少女
점소이의 등등한 기세에
가뜩이나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있던 녹의소녀의 안색이
아예 사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다급히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오..오빠...너무 추워서...한...한 번만..."
그러나 점소이는 그녀의 간절한 애원을 무자비하게 외면했다.
철썩!
"아악!"
녹의소녀는 점소이의 무지막지한 손찌검에 비명을 지르며
주루의 한 구석에 구겨진 휴지처럼 처박혔다.
"이 계집애! 오늘은 단단히 맛을 보여 주겠다!"
점소이는 더욱 기세가 올라 녹의소녀의 작은 몸뚱어리를 발로 걷어찼다.
퍽!
"아악!"
녹의소녀의 입에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처절하게 터져나왔다.
오송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점소이는 녹의소녀의 멱살을 붙잡고 문 밖으로 집어던지려는 참이었다.
오송학은 비호처럼 몸을 날려 점소이의 손을 치고 녹의소녀를 나꿔챘다.
순간,
점소이가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오송학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송학을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던 터가 아닌가.
허나 먼저 입을 열어 호통을 친 쪽은 오송학이었다.
"이봐, 어린아이에게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뭐야? 이 자식, 손님이면 다인 줄 아느냐?"
점소이는 다자고짜 주먹을 번쩍 날렸다.
퍽!
일격을 맞은 오송학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뒤로 밀려났다.
점소이의 얼굴에 득이의 빛이 떠올랐다.
허나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오송학이 일부러 자신의 주먹을 맞아주었다는 것을.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상대방을 패줄수 있는 명분을 얻은 것이다.
점소이의 주먹이 다시 무지막지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건방진 놈! 어디 혼좀 나봐라!"
순간 오송학의 눈에서 한줄기 냉랭한 한광(寒光)이 번뜩 스쳐지났다.
그는 점소이의 주먹을 피하며 정통으로 턱을 갈겨주었다.
빠각!
둔중한 격타음이 터져울렸다.
"아이고오-!"
점소이는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이 놈이...!"
점소이는 오송학을 사납게 노려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다시 오송학에게 달려들었다.
슉! 슈욱!
또다시 두 개의 주먹이 마주 내뻗어졌다.
그러나 비명은 또 하나 뿐..
퍼억!
"커억!"
점소이는 다시 뒤로 벌러덩 나뒹굴었다.
그는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난 것이 분명했다.
싸움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해댄 독종을 향해
세 번이나 먼저 주먹을 휘둘렀으니..
오송학은 탁자 사이를 구르는 점소이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갔다.
이어 그는 다시 달려들려는 점소이를 사납게 공략해갔다.
퍽!
퍼퍽-
"아아! 악-!"
오송학은 아예 점소이를 깔고 앉아 마구 주먹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점소이의 얼굴은 이내 피투성이가 된 채 잔뜩 일그러졌다.
일단 싸움을 시작하자 오송학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듯 살벌했다.
그의 기세는 너무도 광폭한지라 주루 내의 주객들은 감히 말릴 생각도 못하고
입만 딱 벌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리며
사십대 거한(巨漢) 하나가 쇠국자를 꼬나들고 쏜살같이 달려나왔다.
"아악!"
녹의소녀가 거한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퍽!
거한이 쇠국자로 오송학의 뒤통수를 때린 것은 그 직후였다.
"헉!"
오송학의 몸이 짧은 비명과 함께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그의 뒤통수에선 시뻘건 선혈이 주르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한은 계속 국자를 휘둘러댔다.
"이놈! 빈전루가 네놈 난동 부리라고 생긴 곳인 줄 아느냐?"
퍽!
퍼퍽..
오송학의 입에선 한 마디 신음성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미,
혼절한 듯...
얼마간 오송학을 두들겨 패던 거한은
오송학이 축 늘어진 채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자
비로소 손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씩씩거리며 오송학을 노려보더니
오송학을 번쩍 들어 쓰레기 버리듯 문 밖으로 내던졌다.
녹의소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황망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으음..."
오송학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아련한 현기증이 일며 머리속이 윙윙거리는 느낌이다.
그는 부지중에 뒤통수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피가 머리카락에 뒤엉겨 말라붙어 있었다.
'제기랄.. 머리통이 부숴지진 않은 모양이군!'
그는 편한 자세로 누워 긴 숨을 몰아쉬었다.
바로 그때 귓전을 파고드는 한줄기 겁에 질린 어린 소녀의 음성이 있었다.
"오빠...살아난거야?"
오송학은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녹의소녀가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겁에 질린 파리한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이 완연하다.
"난 오빠가...죽는 줄 알았어...분명히 살아난 거지?"
오송학은 자신이 낯선 숲속에 누워 있음을 깨닫고 입을 열어 물었다.
"네가 나를 이곳에 데려왔니?"
"응...오빠
비로소 확인하고 긴장이 풀린 듯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오송학의 입에서 버럭 고함이 터져나왔다.
"야, 이 계집애야! 어디 초상이라도 났냐? 울긴 왜 울고 야단이냐?"
"오..오빠는 나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흑흑.."
"너 때문이 아니야!"
오송학은 몸을 일으키며 손에 잡히는 대로 눈을 한 움큼 집어
허공에다 사납게 뿌렸다.
'제길..네가 우는 이유를 누가 모른다더냐?
하지만 난 계집애가 우는게 딱 질색이란 말이다.'
오송학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오...오빠!"
녹의소녀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그를 불렀다.
오송학은 고개를 홱 돌리며 또 한 차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야, 이 계집애야! 도대체 누가 네 오빠란 말이냐?"
"미...미안해, 오빠..."
녹의소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엉거주춤하자,
오송학은 재빨리 그녀를 외면하고
발로 눈을 마구 걷어차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녹의소녀가 쪼르르 그를 뒤쫓았다.
잠시 걷던 오송학은 그녀가 계속 따라오자 여전히 걸음을 떼어놓으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빠른 어조로 물었다.
"이길이 너희집 가는 방향이냐?"
"아...아니.."
"그럼 왜 ㅉ아와?"
"오빠 가는 데 나도 데려가 줘."
"뭐라고...? 훗..!"
오송학은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어디 한 군데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이거늘 어디로 그녀를 데리고 간단 말인가?
오송학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그녀를 돌아보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가!"
녹의소녀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싫어.. 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오빠야, 제발 나도 데려가 줘.."
"좋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봐!"
오송학은 그말이 끝나기도 전에 벼락같이 몸을 돌려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오빠!"
녹의소녀는 사색이 되어 기겁을 하고 자신도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빠야! 같이가!"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필사적이었다.
울부짖으며 쫓아오던 그녀가 갑자기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엔 격한 갈등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가 주춤하는 사이 녹의소녀는 다시 일어나 이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오송학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너 정말 안 갈래?"
"오빠...난 사람들이 무서워.
오빠는 날 위해 방패막이가 되준 유일한 사람이야...난..."
"같이 갈거야...오빠랑 같이.."
"넌 내가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냐?"
오송학의 오른손이 순간 느닷없이 허공을 매섭게 갈랐다.
철썩!
"앗!"
녹의소녀는 뺨을 감싸쥐며 눈길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오송학을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왈칵 터뜨렸다.
"으아앙!"
'이...이런 멍청한 계집애! 나를 따라오면 고생 뿐이거늘..'
오송학은 화를 내며 돌아설줄 알았던 녹의소녀가 목놓아 울자
일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당황한 그는 녹의소녀가 목놓아 우는 한편으로
자신의 표정을 은연중 살피고 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내심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나 둘이나 고생하기는 매 한 가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녹의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졌다. 데리고 갈 테니 이제 그만 울어라."
"저..정말이야?"
녹의소녀의 울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아니 울음을 그친 것 뿐만 아니라
언제 울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몸을 벌떡 일으켜
와락 오송학의 목을 껴안는 것이 아닌가?
"오빠, 고마워!"
오송학은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계집애, 혹시 거짓 울음을..?'
그러나,
자신의 목에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천신난만하고 귀여웠다.
그는 잠시 그녀가 하는대로 내버려두다 살며시 그녀의 손을 목에서 풀었다.
"네 이름이 뭐지?"
"상아(常娥)."
"성(姓)은...?"
"그런 것 없어."
"뭐야? 이런 바보같은 계집애. 성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나는 없는 걸...?"
"그래? 그럼 내가 하나 지어 주지.
음.. 네가 입고 있는 옷이 녹색이니 너는 이제부터 녹상아(綠常娥)다. 알겠니..?"
어처구니 없게도..
오송학은 지금 남의 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멋대로 붙여주려 하고 있었다.
녹의소녀는 몇번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녹상아..? 나는 아무래도 상아가 좋은 것 같은데..
오빠야, 그냥 상아하자."
오송학은 어리광 부리듯 말하는 그녀에게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목을 돌렸다.
"너 오빠 말 안 들으려면 따라올 생각하지마."
"아냐, 난 따라갈 거야."
"그럼 녹상아 할래 안 할래?"
"알았어. 오빠가 좋다면 그렇게 하지 뭐.
그래, 이제부터 나는 녹상아야. 그런데 오빠 이름은 뭐야?"
"그냥 오빠야."
"치...그런 이름이 어디 있어?"
"상아, 너 입 좀 다물지 않을래?"
"상아가 아니야. 녹상아지."
"그래도 부를 땐 상아라고 하는 거야."
"녹상아라고 하자고 한 사람은 오빠잖아."
"이런 바보같은 계집애. 그래, 너는 다 옳고 나는 다 틀렸다."
오송학은 너무도 천진난만한 그녀의 말고 행동에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녹상아,
그녀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父母)가 누군지도 모르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왔다.
헌데,
할아버지가 한 달 전 갑자기 돌아가시자
졸지에 천애고아의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후
그녀가 겪은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누구하나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갖은 멸시와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 할아버지 외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인정을 베풀어 준 사람이
바로 오송학이었던 것이다.
절망의 어둠속을 외롭게 헤매던 그녀에게 있어
오송학은 마치 한줄기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그렇다.
모진 고난 속에 살던 그녀에게 있어 오송학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고 만 것이었다.
"오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몰라."
"치...오빠는 왜 그렇게 무뚝뚝해? 남자는 여자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거래."
"뭐? 여자, 네가...?"
오송학은 깜찍한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그만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다 그는 정말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허나,
애당초 갈 곳이 없었던 그가 아무리 생각을 해 본다한들
무슨 뾰족한 행선지가 떠오를리 있겠는가?
'우선 악양을 벗어나고 보자.
촌락의 인심은 도성(都城)의 인심보다 좋다고 했으니..'
그는 일단 생각을 굳히자 마치
목적지가 뚜렷한 사람처럼 녹상아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뎅...뎅...뎅...
어디선가 삼경(三更)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메아리쳐 왔다
. 밤은 그렇게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온통 은색의 눈으로 덮인 사위는
백야(白夜)의 그것인 양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오송학과 녹상아는 삼경을 알리는 바라소리가 스침과 동시에 닫히려는
악양성 남문(南門)을 때맞춰 빠져나왔다.
그때 녹상아가 매달리듯 몸을 기대오며 입을 열었다.
"오빠...춥고 졸려...배도 고프고..."
'내 이럴 줄 알았지!'
오송학은 측은한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만 참아. 이 근처 어딘가에 인가(人家)가 없나 찾아볼 테니.."
허나 한동안을 걸어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야단났는 걸..나는 장춘면 한 그릇으로나마 끼니를 때웠지만
상아는 틀림없이 굶었을 텐데..'
그는 졸며 걷는 녹상아를 안다시피하여 최대한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문득 상아의 입에서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오빠...저기 불빛...빨리 저쪽으로 가.."
"응?"
오송학은 반쯤 감긴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불빛이 보였다.
왼편 저만치 숲 속의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불빛이었다.
오송학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겉으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상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니 졸려도 참아야 한다.
만약 자버리면 그냥 두고 갈 테다. 알겠니?"
"아...알았어...상아 안 졸게.."
그러나,
그녀는 불빛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오송학의 품속에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것이었다.
오송학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녀석...그래도 이쯤에서 잠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는 녹상아를 들춰 업고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불빛이 뻗쳐나오고 있는 곳을 향해 가까이 접근해 갔다.
폐사(廢寺).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곳은 한 채의 폐사였다.
한 때는 예사롭지 않은 영화(榮華)를 누렸으리라 짐작되는 거대한 사찰 터.
허나 지금은 담벽이 무너지고 여기저기 눈속에 기왓장이 널브러져 나뒹구는
황량한 잔재(殘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때때로 주위에서는 야수(野獸)의 울음소리가 귀곡성(鬼哭聲)처럼 들려왔다.
보통 담이 크지 않은 사람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못낼 음산한 분위기...
오송학은 사문(寺門) 위의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풍상(風霜)을 서러워하듯 간신히 사문 위에 매어달린 편액엔
그나마 옛 이름을 잃지 않으려는 듯
세 자의 글자가 희미하게 윤곽을 남겨 놓고 있었다.
<광덕사(廣德寺).>
"광덕사라..이름은 그럴싸한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이로군.
하기사 내가 들어본 절 이름은 소림사(少林寺) 밖에 더 있나.."
오송학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사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광덕사(廣德寺)-
지금은 이렇듯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은 과거 외소림사(外少林寺)라는 별칭(別稱)으로도 불리우며
불문무공(佛門武功)의 정화(精華)를 꽃피웠던 대사철(大寺刹)이었다.
헌데 지금으로부터 칠십년전(七十年前),
이곳 광덕사에서 무림사(武林寺)에 영원히 기록될 일대의 대사건이 발생했으니..
그 사건은 백팔마녀대(百八魔女隊)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
공포의 여살성(女煞星) 집단인 백팔마녀대는
여인천하(女人天下)를 부르짖으며
출현하기가 무섭게 파죽지세로 천하를 강타했다.
구파일방(九派一幇) 중 곤륜(崑崙), 청성(靑城), 아미(峨嵋) 등
명문대파(名門大派)가 가장 먼저 와해되고,
뒤이어 당시 최대의 세력으로 공인받던 팔황부(八荒府)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채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그 어찌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랴?
천하는 순식간에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때부터 백팔마녀대를 막겠다고 나서는 방파(幇派)나 문파(門派)는
천하의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백팔마녀대는 날로 더욱 더 광폭한 살생(殺生)을 자행했다.
단 한 달만에 일백여의 내노라하는 대소문파(大小門派)를 멸문(滅門)시키는
전대미문의 대겁난(大劫亂)을 몰아붙인 것이었다.
천하무림은 휘청이다 못해 언제 몰락할지 모를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헌데 그때 분연히 백팔마녀대를 막고 나선 문파가 하나 있었으니
다름아닌 소림사(小林寺)였다.
천하무학(天下武學)의 본산(本山)이자
불문무학(佛門武學)의 산실(産室)인 대소림사(大少林寺)가
급기야 멸문(滅門)을 각오하고 백팔마녀대 척살(刺殺)을 앞장섰던 것이다.
당시,
소림의 십팔대(十八代) 장문인(掌門人) 십방대선사(十方大禪師)의 결단이었다.
그때부터 흩어졌던 천하각파(天下各派)가 소림을 중심으로 뭉쳐
백팔마녀대와 십주야(十晝夜)에 걸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혈전(大血戰)을 펼치기에 이르니..
그 결전의 장소가 바로 이곳 광덕사였다.
그러나 백팔마녀대의 힘은 너무도 가공절륜(可恐絶倫)했다.
시산혈하(屍山血河)!
결과는 소림연합맹(少林聯合盟)의 패퇴(敗退)로 끝나는가 싶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의연히 분노의 검(劍)을 들고 일어선 한 사람,
훗날 세인들에 의해 인간의 하늘로 불리우게 된 벽라천군 금무천,
그가 자신의 벽라천궁(碧羅天宮)의 수하들을 이끌고
백팔마녀대를 제거하고자 홀연히 나선 것이었다.
그 경천동지할 피의 혈전(血戰)을 무슨 말로 다 형용하랴!
백팔마녀대의 무공이 가공사이(可恐邪異)했다면
벽라천군의 무공은 박대정심(博大精深)했으며,
백팔마녀대의 무공이 잔인독랄(殘忍毒辣)했다면
벽라천군의 삼척장검(三尺長劍)에서 펼쳐지는 검법(劍法)은
패도극강(覇道極强)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번지복의 대혈투는 오주야(五晝夜)를 더 끌어
도합 십오주야(十五晝夜)만에 종식되니..
결과는 백팔마녀대의 완전한 궤멸(潰滅)이었다.
벽라천군 금무천의 위력이 드디어 백팔마녀대의 저주를 거두어버린 것이다.
허나 싸움엔 진정한 승자(勝者)가 없다더니..
천하각파는 그 혈전으로 인해 최소한 십년(十年) 이상을 봉문(封門)해야 하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혈전장(血戰場)이었던 광덕사는
영원한 재기불능(再起不能)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각설하고,
오송학은 광덕사의 그러한 내력도 모른 채
폐허(廢墟)로 변한 몇 채의 대전(大殿)을 지나 후원(後園) 쪽으로 걸어갔다.
불빛은 후원에 위치한 비교적 온전한 전각(殿閣)으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대웅보전(大雄寶殿) 자리였다.
오송학은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소리없이 밟아 올라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에 살며시 귀를 대어 보았다.
조용하다.
안으로부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송학은 문고리를 잡고 두 번 두들겨 보았다.
탁! 탁!
허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끼이익...
오송학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코가 아릴 정도로 훅 파고드는 짙은 피비린내가 느껴진다.
오송학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그의 시선을 파고드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석불상(石佛像)이었다.
사방 이십여 장에 달하는 드넓은 장방형(長方形)의 공간 정면에 자리잡고 있는
그 석불상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장정 열 명이 손을 맞잡고 둘러쳐도 모자랄 정도의 둘레에
, 높이는 무려 십여 장도 넘을 듯 싶었다.
그렇게 거대한 석불상이었기에
칠십 년 전의 광덕사 대혈란(大血亂)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원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오송학은 잠시 석불상을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순간 그의 안색이 흠칫 굳어 들었다.
피(血)!
벽(碧)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흥건한 핏물!
오송학은 그 핏물이 흘러내리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 그가 이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두 시체는 실로 참혹했다.
모습을 제대로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회의노인(灰衣老人)과
심장 부위에서 검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는 갈의노파(褐衣老婆)...
일견하여 그들은 치열한 혈전(血戰)을 벌인 끝에 동귀어진(同歸於盡)한 것 같았다.
'끔찍하군...'
오송학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헌데 그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으음..."
한 올의 미동도 없이 사지(四肢)를 늘어뜨리고 있던 갈의노파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성이 새어나오는게 아닌가?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직 죽지 않았구나!'
갈의노파는 두 손을 미미하게 꿈틀거리더니
이내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가까스로 상체를 반쯤 일으킨 그녀는
가쁜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오송학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오송학의 시선과 마주쳤다.
죽음의 기운이 완연한 잿빛 안색...
오송학을 바라보는 그녀의 동공은 완전히 초점이 풀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송학의 존재를 확인한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소협...부...부탁이..."
오송학은 그녀가 이미 살아날 수 없는 상태임을 직감했다.
그는 심기를 차분히 가라앉히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겠소."
갈의노파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이리.. 가까이..."
오송학은 지체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그녀 앞에 다가서자
그녀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오송학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남쪽으로..백여 리(里) 쯤 가면..
도안현(道安絃)이라는 조그만 촌락이..나오네...
그 촌락의 북쪽으로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고,
연못주위에는 버드나무가 쭉 늘어서 있는데
그 버드나무 숲속에 한 채의 집이 있을 것이네..
.이것을..그 집에 사는 사람에게...전해주면 고맙겠네..."
오송학은 그녀가 내민 물건을 받아 들었다.
그가 받아든 것은 하나의 죽패(竹牌)였다.
깨알같은 글씨가 빽빽이 쓰여져 있는
은은한 묵광(墨光)이 감도는 오죽패(烏竹牌)...
"이것이 대체 무엇이오?"
"그것은 소협에게...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네...
단지 천남독문(天南毒門)의 신물(信物)로써..
그것이 있어야만..천남독문은 일맥(一脈)이라도 이을 수 있네..
제발 노신의 부탁을...저버리지 말아주게..."
천남독문(天南毒門)-
천남독문이라면 한때 천하제일의 독문(毒門)으로 위세(威勢)를 떨치다
지난 오십년 전 홀연 멸문(滅門)을 당한 문파가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환영경(幻影鏡) 한 쌍이네...
노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라고 생각하고..받아주게..."
갈의노파는 오송학에게 무엇인가를 또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녹이 퍼렇게 슨 두 개의 조그만 구리거울이었다.
그것들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크기였는데
두 개가 합쳐져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를 이루는 듯했다.
(환영경이라..?)
오송학은 뭔가 알수없는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오..
그가 어찌 알겠는가?
<환영경(幻影鏡)>
이 이름에는 하나의 엄청난 전설(傳說)이 숨어있었으니...
언제 누구의 입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나
오랜 세월을 두고 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 되어온
신비스런 하나의 전설의 내용은 이러했다.
환영경(幻影鏡)이 합쳐지는 날,
천하는 환영신부(幻影神府)의 무학(武學) 아래 굴복케 되리라!
단지 그 짤막한 한 마디가 전설의 모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환영경을 찾아 미친 듯이 천하를 헤맸다.
천하를 굴복시킬 수 있는 무학!
그것은 곧 천하를 제패(制覇)할 수 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허나 지금까지 환영경을 찾았다는 사람은 커녕 보았다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이 그러하듯 전설 그 자체가 그저 잡을 수 없는 환영에 불과했던 듯,.
그리하여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전설은 점차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헌데,
뜻밖에도 오늘 갈의노파에 의해 그 환영경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오송학은
환영경을 도로 갈의노파에게 건네며 고개를 저었다.
"대가는 필요없소."
"소..소협은..환영경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솔직이 그렇소."
"환영경은..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내는.보물 중의 보물이네..
이것으로 인해 노신의 사제(師弟)가.사부(師父)와 사문(師門)을 배반했으며..
그 여파로 노신의 사문인 천남독문은 멸문까지 당했을 정도이네.."
갈의노파는 일순 장탄식을 터뜨리고는
처참하게 죽어있는 회의노인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자가 바로. 노신의 사제라네..
음살귀독(陰殺鬼毒)이라면 소협도 들어 보았을 것이네.."
'음살귀독!'
오송학은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음살귀독이라면 황보노태야가 언급한
일군이제삼독사혼오작(一君二帝三毒四魂五爵) 중
삼독의 일인(一人)이 아닌가?
당금 무림의 십오대절세고수(十五大絶世高手) 중 하나인 그가
저토록 비참한 종말을 당할 줄이야!
"노신은 복수를 한 것만으로..만족하네...
애초 환영경엔 조금도 욕심이 없었으니.
노신의 성의라 생각하고.받아주게.."
갈의노파의 음성은 진정이 어려 있었다.
오송학은 본래 보물에 욕심을 품는 위인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환영경을 받아들었다.
"고맙게 받겠소. 그보다 이름 석 자라도 알려 주시구료
. 내 초라하나마 무덤이라도 만들어.."
그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갈의노파가 안색을 굳히며 다급히 오송학의 말을 가로챈 때문이었다.
"쉿...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말게..."
그녀는 긴장어린 표정으로 재빨리 바닥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이어 그녀는 느닷없이 두 손을 뻗어 오송학의 몸을 덥썩 잡더니 위로 홱 집어 던졌다.
졸지에 허공으로 붕 뜨여진 오송학은 찰라간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다 죽어가던 노파에게 이런 힘이 남아있었더니..!'
그의 몸은 거대한 석불상의 왼쪽 귓불속으로 떨어졌다.
그의 귓가에 갈의노파의 마지막 희미한 음성이 스며든건 거의 동시였다.
"노신은..냉모모(冷母母)라는 사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듯하니.. 조..조심.."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영혼(靈魂)을 잃은 갈의노파의 육체(肉體)는 맥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한 줄기 흑영(黑影)이 장내로 바람처럼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스슥!
나타난 자는 머리에 방립(方笠)을 깊숙이 눌러쓴 흑의인(黑衣人)이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음살귀독과 냉모모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송학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거대한 석불상의 귓속에 숨어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가 숨은 공간은 그리 좁은 편은 아니엇다.
녹상아를 품에 안고 있음에도 공간은 여유가 남을 정도였다.
이때,
음살귀독과 냉모모의 품속을 뒤지던 흑의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음살귀독의 몸에도 없고 이 노파의 몸에도 없으니 어찌된 일일까?"
그 말을 엿들은 오송학은 흑의인이 환영경을 찾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흑의인은 방립새로 귀화(鬼火)와도 같은 새파란 안광을 번뜩이며
대웅전 안을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오송학은 더욱 긴장했다.
돌연 주위를 살피던 흑의인이 동작을 우뚝 멈추었다.
아니 멈추었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은 석불상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오송학은 황급히 몸을 감추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제기랄! 저자는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렸단 말인가?'
오송학을 발견한 흑의인은 단숨에 석불상의 왼쪽 어깨부위에 내려앉았다.
'이제 난 죽었구나!'
오송학은 무림의 초절정고수인 상대를 피해낼 방법이 도저히 없음을 깨닫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후후..거기 얌전히 있거라."
흑의인이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다시 오송학이 있는 귓불속으로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크크크크ㅋ..!"
난데없이 지옥(地獄)의 유부(幽府)에서 들려 오는 듯
모골이 송연한 한 줄기 음산한 괴소(怪笑)가 장내를 진동시켰다.
순간 오송학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 괴소엔 엄청난 내력(內力)이 실린 듯
들려오기가 무섭게 기혈이 터져버릴 듯 진탕되었던 것이다.
막 석불상의 귓속으로 날아들려던 흑의인의 신형이
허공 중에서 또 한 차례 크게 휘청인 것은 거의 동시,
그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번개같이 신형을 돌려 다시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는 괴소가 들려온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보냈다.
"소소실혼(笑笑失魂)! 네가 감히 노부의 일을 방해하겠다는 것이냐?"
"ㅋㅋㅋ...환영경은 너보다 내가 먼저 점찍고 있었다. 시계명(侍計冥)!"
말과 함께 장내로 한 사람이 느릿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수세미처럼 헝크러진 백발(白髮)이 얼굴을 온통 덮사시피하여
용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폐포노인(弊袍老人),
일견하기에 매우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허나 머리카락 새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그의 안광은 비수처럼 날카로왔다.
헌데,
흑의인은 폐포노인을 가리켜 소소실혼이라 했으며
, 폐포노인은 흑의인을 가리켜 시계명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일군이제삼독사혼오작 중
사혼(四魂)의 두 자리를 더불어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 아닌가?
광세경혼(狂世驚魂) 시계명-
그는 잔인하다.
비단 잔인할 뿐만 아니라 살생(殺生)을 자행할 때는
마치 미친 광인(狂人)과도 같이 무자비하다.
그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천 여의 순박한 촌민(村民)들을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문하고
무참하게 살육(殺戮)한 적이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소소실혼(笑笑失魂) 거상시(巨常屍)-
그는 잘 웃는다.
그러나,
천하에 그가 웃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결단코 아무도 없다.
그의 웃음 뒤엔 항상 죽음이 뒤따르기에...
음공(音功),
그의 웃음은 가공할 음공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괴팍한 성격으로 인하여
천하에서 가장 대하기 힘든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때,
소소실혼은 유유자적하듯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시계명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시계명의 이 장여 앞이었다.
그것은 실로 대범한 행동이었다.
절세고수들에게 있어서
이 장여의 거리란 언제든지 죽음의 손길이 뻗칠 수 있는 사정(射程)거리이므로.
허나 소소실혼은 시계명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유유히 고개를 들어 오송학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것은 오송학이 환영경을 가지고 있으리라 확신하는 듯한 미소였다
. 소소실혼은 이내 시계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허공 중에서 서로의 시선과 시선이 불똥을 퉁길 듯 얽혔다.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는 일촉즉발로 긴장되었다.
오송학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으음..."
녹상아가 나직한 신음을 불어 내쉬며 부시시 눈을 떴다.
오송학은 재빨리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쉬..."
"오빠야... 왜 그래...?"
"저 밑을 봐..."
녹상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별처럼 초롱한 그녀의 두 봉목에 의혹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녀는 조그마한 음성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야...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거야..?
그리고 저 사람들은 누구야..?"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지금 우리는 몹시 위험해..."
"위험..?"
녹상아는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느꼈는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때,
시계명의 살기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소소실혼, 끝내 피를 보겠다는 것이냐?"
"네가 조용히 물러간다면야 그럴 필요가 없지."
"물러가야 할 사람은 노부가 아니라 바로 너다!"
"크크ㅋ..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먼저 네놈부터 없애고 나서 환영경을 취하겠다."
"동감이다, 거상시!
노부는 오늘 네놈의 음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기필코 시험해 봐야겠다."
"크크ㅋ..어리석은 놈! 죽어랏-"
소소실혼은 한 소리 냉갈과 함께 우수(右手)를 휘두르며
시계명을 향해 짓쳐들었다.
평범한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일식(一式)이었다.
허나,
그것이 일단 그의 손에서 펼쳐진 순간,
그것은 이미 일반 무림인이 펼치는 횡소천군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거산준령(巨山峻嶺)을 그대로 허물어 버릴 듯한 가공할 기세!
시계명의 흑의가 돌풍(突風)에 휘말린 듯 찢어질 듯 거세게 휘날렸다.
파아악!
시계명은 지체없이 삼 장여 높이로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소소실혼의 우수가 시계명의 발바닥을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났다.
시계명이 허공에 뜬 자세 그대로
양손을 칼날같이 세워 맹렬히 떨쳐낸 것은 바로 그때,
휘리리리릭...
열줄기의 검은 색 강기( 氣)가 그의 손끝으로부터 뻗쳐나와
소소실혼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을 향해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순간,
"타앗!"
실로,
귀신같은 변식(變式)!
그 돌연한 변화에 시계명은 대경을 금치 못하며 우수를 맞받아쳤다.
퍼펑-!
우뢰와 같은 굉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천정이 무너질 듯 요동치며 뽀얀 먼지가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두 줄기 답답한 신음성이 동시에 울렸다.
"헉...!"
"으음..!"
최초의 격돌에서 두 사람은 모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한편,
석불상의 귓속에서 그들의 일전(一戰)을 지켜본 오송학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세상에..무공이라는 것이 저토록 엄청난 것일 줄이야!'
녹상아도 놀람과 두려움에 찬 눈망울을 굴리며 격전을 지켜 보다가
문득 오송학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오빠야..누가 이길 것 같아..?"
"조용히 해..."
"오빤 누가 이길지 몰라..?"
"조용히 하라니까...!"
"씨.. 왜 말만 걸면 화를 내..?"
"이 바보야, 지금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냐..."
"바보는 오빠야..모르니까 괜히 나한테 화만내고.."
"알았다, 알았어...빠는 원래 바보니까 똑똑한 상아는 제발 입 좀 다물고 있거라.."
"흥...앞으로 오빠하고 말을 하나 봐라..."
"어...? 오빠야, 왜 그래..?"
뽀로통하니 입을 삐죽이고 있던 녹상아가 돌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송학이 언제부터인가 몸을 일으켜 기이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는 지금 점점 더 치열한 격전을 벌여가고 있는
시계명과 소소실혼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오빠...?"
녹상아는 오송학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싶었는지
겁먹은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허나,
오송학은 녹상아의 말도 들리지 않는 듯
정신없이 갖가지 동작을 연속적으로 취해 나갔다.
오른손은 시계명의 동작을,
그리고 왼손을 소소실혼의 동작을...
놀라운 것은 그의 동작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이 어 기막힐 일이 아니랴.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는 그가 절세의 두 고수가
치열한 격전 중에 펼쳐내고 있는 초식(招式)의 연계동작을
식은죽 먹듯이 쉽게 흉내내고 있으니...
헌데 돌연,
소소실혼의 동작을 흉내내고 있던 오송학의 왼손이 그 동작을 뚝 멈추었다.
시계명의 싸늘한 냉소가 장내를 울린 것은 바로 그때,
"흥! 기다리고 있었다.
네놈의 쇄혼혈혈마소(碎魂血血魔笑)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서 펼쳐 보아라!"
쇄혼혈혈마소라면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소소실혼의 성명절기(姓名絶技)!
그렇다.
소소실혼은 지금 입술을 반쯤 벌리고 쇄혼혈혈마소를 시전하려 하고 있었다.
헌데,
그때다.
돌연,
슈파악-!
한 줄기 핏빛 섬광이 대웅보전의 입구로부터
석불상의 미간(眉間)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날아들었다.
다음 순간,
꽃(花)!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한 송이 조화(造花)가
석불상의 미간새에 파르르 잔떨림을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시뻘건 핏물을 뚝뚝 떨굴 듯한 붉디 붉은 혈매화(血梅花)였다.
사악한 아름다움을 풍긴다고나 할까?
혈매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시계명과 소소실혼이 전신을 부르르 떤 것은
혈매화가 모습을 드러낸 것과 거의 동시였다.
"혈..혈살귀화(血殺鬼花)!"
"으..암흑마천(暗黑魔天)의 혈살귀화가 나타나다니!"
첫댓글 즐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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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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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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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즐감합니다......
잘~~감상~~~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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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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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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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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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즐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