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사도 5,27-33
복 음 : 요한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혜로운 현자가 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습니다.
부딪힌 그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며 현자의 뺨을 가차 없이 때렸습니다.
그리고 큰 싸움을 벌일 험악한 기세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현자는 실랑이가 벌어지자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혀 싸움을 피했습니다.
때린 사람도 자신이 너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현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자는 사과를 받아들였을까요? 저는 사과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현자는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맞은 기억이 없소.”
현자는 맞은 기억이 없기에 사과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이로써 나쁜 기분을 안고 가는 것도 거부한 것입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은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드는 힘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오히려 당장 패배를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대응하는 것이 정당해 보이지만, 대응한다고 해서 상대가 항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은 절대 손해 보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해를 줄여주고 함께 사는 힘을 마련해 줍니다. 큰 이득을 얻을 때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패배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가능했고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절대’라는 말에 걸려 넘어져서 커다란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권한 주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시선을 외면하고 대신 주님께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모욕당하고, 세상 안에서 단죄받는다고 해도 억울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들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믿음의 재발견”).
곧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차원인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성실함’(믿음이나 성실함은 다 같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쓴다)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의미로 ‘순전한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철저한 헌신을 토대로 하는
방향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credo)이라는 단어 역시,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cro;심장, 생명’+dare;주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 됩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오늘도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홀만 헌트의 ‘세상의 빛’ 성화입니다
문 두드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그림은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는 말씀에 기초하여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문을 보면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문 바깥쪽에서는 열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면서 문을 두드릴 때
결정적으로 내가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빛 이신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내 마음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시고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문을 열고 열지 않는 것은 자유 의지로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한없는 은총을 주시려고 해도 내가 협력하지 않으면 선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다가와 문을 두드렸을 때,
성모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성모님은 “여인 가운데서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문도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마음껏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집회서에 보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으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보다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으로 초대받았지만, 결코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에서는 ‘제22 대 국회의원’선거가 있습니다.
지역구 254석과 비례대표 46석을 뽑는 선거입니다.
저도 재외국인 투표 등록을 하였고, 지난 3월 31일에 투표를 하였습니다.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3가지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구도’입니다. 여당은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지를 호소합니다.
야당은 민생과 경제, 국방과 외교의 현안들에 대해서 잘못된 것들이 있으니
견제와 심판을 할 수 있도록 지지를 호소합니다.
때로는 이 구도에 안보와 이념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른바 ‘북한변수’라고 합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으면 여당의 구도가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정권을 심판하자는 야당의 구도가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두 번째는 ‘정책’입니다.
대통령은 ‘민생 토론’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규제를 완화하고, 개발을 약속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정부는 민생 토론이라고 하였고, 야당은 대통령의 선거 개입이라고 하였습니다.
후보들은 지역의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발표 합니다.
현실성이 있고, 창의적인 정책을 가진 후보들이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물’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공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참신한 인물을 후보로 내세웁니다.
시스템에 의해서 능력 있고, 인품이 있고, 헌신할 수 있는 후보를
공천하는 정당의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높습니다.
무엇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투표가 국가와 주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것입니다.
사제는 ‘선출’되는 직무가 아닙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서 임명되는 직무입니다.
교회는 사제에게 3가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사명을 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제사직’입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서 악의 세력을 물리칩니다.
미사를 통해서 사제와 교우들은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를 사함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충실하게 살게 됩니다.
교회의 전례와 성사에 충실한 이들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은 ‘봉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과 봉사’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낮은 자제로 봉사에 충실한 사제와 교우들이 있는 성당은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은 앞날을 미리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직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과 같은 문헌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뿐인 지구를 보호하는 것,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 것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드러내는 예언직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실의 삶에서 손해 볼 때도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앙인은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오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간다.
그러기에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우리도 말을 하려고 할 때, 말하려는 개념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말이 되어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본성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하셨다.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일보다는 하늘의 일에 익숙해져야 할 우리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요한복음 3장을 다시금 분석하면, 전반부(3,1-21)는
과월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와 머무시던(2,13.23) 예수께서
유대교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와 가진 대화를 소개하고,
후반부(3,22-36)는 세례자 요한의 예수께 대한 마지막 증언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3장의 후반부에 속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직접적인 발설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지만,
공동번역성서에 따르면 직접화법의 인용부호가 없다.
그렇다고 간접화법으로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대목은 몇 가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① 오늘 대목을 그냥 그 자리 두고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의 간접적인 증언이거나
요한 복음서 서문(프롤로그: 1,1-18)과 같은 저자의 증언으로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증언의 주체는 세례자 요한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의 자세한 해설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세례자 요한을 증언을 증언의 주체로 보고 몇 마디 붙여 보겠다.
세례자의 앞서간 증언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은 요한 자신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절)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 자신은 분명히 세상에 속하여 세상일을 말하는 사람이다.(31절)
그러나 그는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참되심을 확증한 사람이 되었다.(33절)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닦고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잡혀 감옥에 가기 전에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께 대한 마지막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②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요한 3,22-30을 현재 위치에서 옮겨
요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따르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속할 수 없으며,
자연히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에 붙게되어 예수님의 간접적인 증언이 되든지,
아니면 복음서 저자의 증언이 된다.
後者의 경우라면 이는 요한복음 서언(프롤로그: 1,1-18)과 같은 형식이 된다.
이는 예수님의 장소이동에 주목한 결과이다.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이 먼저 활동을 하였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세례자는 우선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1,28)
이곳은 예루살렘 근처 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아는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가 살던 곳(요한 11,1.18; 12,1. 19)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전⋅후 시점에 머물렀던 장소
(마태 21,17; 26,6; 마르 11,1.11; 14,3; 루카 19,29; 24,50)이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으로 36km 떨어진 예리고를 지나 약 8km지점에 있는
요르단강에 바로 인접한 베다니아이다.
예수님의 활동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지역인 이곳 베다니아에 오신 것으로 시작된다.(1,29)
예수께서 당신이 자라난 나자렛으로부터 오셨다면 그 길은 무려 100km 정도에 달한다.
예수께서 이곳까지 오신 이유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이다.
비록 요한복음에 세례자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언급은 없으나
공관복음을 미루어 볼 때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마태 3,13-17; 마르 1,9-11; 루카 3,21-22)
그 다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고(2,1-11), 그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2,12)
여기서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2,13)고 하는데
성서학자들은 이곳에 3,22-30을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상경하시기 전에
유다지방으로 가셔서 세례를 베풀었다.(3,22)는 말이 된다.
정확한 세례활동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물론 세례를 베풀었다면 이곳은 원래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1,28)가 틀림없다.
그 사이에 세례자 요한은 살림에서 가까운 애논으로 옮겨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23)
살림지방의 애논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강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서
사마리아 지방과 베레아 지방의 경계지역으로서 데카폴리스 지방에 속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예수께 대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증언(3,27-30)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예수께서는 과월절 축제를 맞아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상경하여(2,13)
먼저 성전을 정화하셨고(2,14-22)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關心과 好感을 얻으셨으며(2,23-25),
이곳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와의 긴 대화(3,1-21)를 주도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3,31-36)은 이 대화의 결론 역할을 맡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 대목은 예수님의 간접증언이나 프롤로그(1,1-18)와 같은
복음서 저자의 증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라 내용을 분석하면 우선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되신 역사예수의 초월성을 말한다.
이 초월성은 곧 예수의 歷史性과 성자의 先在性 사이를 오가는 自由이다.
先在하는 성자는 성부와 本性으로 같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성자의 말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34절)
하느님의 本性上 성자는 성부와 모든 것을 共有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넘겨 받았다.(35절)
이렇게 성자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고,
성부 하느님의 모든 것을 성자가 공유하는 까닭은 聖靈 때문이다.(34절)
성령 하느님이 歷史的 예수와 先在的 성자 사이를 오갈 수 있게 하는 활동의 原理인 셈이다.
따라서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느님 성부께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고,
불신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되는 것이다.(36절)
여기서 하느님의 분노는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할 수 있으나,
니고데모와의 대화(3,18)에 연결하여 본다면 불신 자체로 이미 심판받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증언을 거부하고 예수를 불신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일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31-32절)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는 불신과 신앙 사이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일보다는 하늘의 일에 점점 익숙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