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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5,34-42
복 음 : 요한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코린 12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우선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신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고 공동체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알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공동체성보다는 자기를 알리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
즉, 자신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신비로운 일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이 낫고, 마귀를 쫓아내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는 것 등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요나의 기적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마음의 변화 이상 큰 표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교만에 빠지게 되고, 마귀의 유혹을 받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모두 우리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 신비에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기준을 따져야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놀라운 기적이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 기적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에 예수님의 반응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그들이 당신이 보여주신 빵의 기적에서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내려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늘 공동체를 강조하셨고,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보다는 나만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어'(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 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 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아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보여주신 표징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하실 때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아 주님의 능력은 생각하지 않았고 그분께서 지니신 권능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 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예수님의 손 위에 모두를 내놓는 순간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 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적인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막에서 당신을 따르던 군중의 배고픔을 면하게 하셨듯이
성체 안에서 계속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선언하고 또한 부활을 선포합니다”(구엔 반 투안 주교).
빵의 기적은 미사 안에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랜트, 시간, 재능, 물질 등 모두가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먼저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내놓으면 풍요로워집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칭찬과 인정을 떠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아버지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91년 사제서품을 받고 33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대부분 지금은 없거나, 다른 것들로 바꾸었습니다.
자동차는 르망, 엑셀, 아반테, 코란도, 소나타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소나타는 필요한 분에게 주고
지금은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마련해준 산타페를 타고 있습니다.
서품식에 축성 받았던 성작은 교구청에서 근무하면서 복음화 학교에 기증했습니다.
컴퓨터는 데스크 탑을 쓰다가, 2000년부터는 노트북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볍고, 휴대하기에 편하기 때문에 노트북을 선호합니다.
지금은 노트북 3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관에 하나는 집무실에 하나는 여행 갈 때 사용합니다.
노트북은 제게는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강론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핸드폰은 1995년부터 사용했습니다. 30년 동안 11개의 핸드폰을 사용했습니다.
책은 읽으면 원하는 사람에게 드리기도 하고, 대부분 놓고 왔습니다.
2번 이상 읽는 책은 성경 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33년 동안 제 곁에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서품식에서 입었던 ‘서품제의’입니다.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랬지만, ‘서품제의’ 만큼은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 입고 갈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없거나 바뀌었듯이 저의 외모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모하면 좋겠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조금씩 익어가고 있습니다.
염색을 했던 머리카락은 팬데믹을 지나면서 하얀 머리카락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백발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2006년부터 안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은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33년 전의 모습을 앨범에서 보면 새 사제의 모습입니다.
열정과 패기는 있지만 멈춰야 할 때를 몰랐던 젊음이 보입니다.
지금 핸드폰에 저장된 모습을 보면 열정과 패기는 줄었지만
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구분하는 원숙함이 느껴집니다.
거룩한 변모는 아니지만 이 시간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33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하느님께서 제게 숨을 불어 넣어주신 ‘마음’입니다.
때로는 유혹에 몹시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마음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물속으로 빠져들었듯이,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늘 그렇듯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백성에게 존경받던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질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의 욕망이라는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욕망 때문에 전쟁과 폭력이 벌어지고,
그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이 죽어가기도 합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저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고, 풍족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기에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좁은 문’은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겸손과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섬김과 상생입니다.
그 깃발 아래 있으면 보리떡 다섯 개로 5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습니다.
사탄의 깃발 아래 있으면 모두가 먹고도 충분히 남을 보리떡이 있어도
10억 명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말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풀밭에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 하신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주신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그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 물 위를 걸을 예언자(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파스카와 연결시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기적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빵의 양을 증가시켜
그곳에 있던 군중을 먹이신 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이 세상에 양식으로 내어주실
희생 제사로 승화되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파악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니 소량의 빵과 물고기로 군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숫자와 데이터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어느 선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문제는 이 현실적 데이터가 쉽사리 우리를 회의와 실망, 포기로 끌어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숫자나 데이터에는 숨은 희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빛을 잃고 지치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초라함과 우리의 한계와 해결해야 할 과제의 거대함에 짓눌려 지레 주저앉습니다.
필립보처럼, 안드레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11)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적은 양이지만 아버지 앞에 펼쳐놓을 양식이 있고,
또 그것을 내놓은 순박하고 용기있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제자들과 군중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은 넘치고 또 넘칩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군중은 "원하는 대로"(요한 6,11) 양식을 받아서 배불리 먹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양이 남았다고 하네요. 사실 사람은 본성상 잉여분을 챙기고 싶어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기약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도 그렇지만,
부자들도 가진 것을 더 불리고 싶어하니까요.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요한 6,15)
그런데 군중은 빵을 더 챙기지 않는 대신 빵을 많게 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소유하려 듭니다.
그분이 임금이 되시면 더 이상 양식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나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사도 5,41)
불신과 회의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 받을 수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게 된 변화야말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소유에 실망하던 그들이 스스로 보잘것없이
작은 자가 되어 모욕당하기를 기뻐하는 이로 변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파스카의 밤을 통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화답송)
주님 때문에 겪는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아들이는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 죽기를 영광으로 여기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히기 위해" 세상에 자기를 내놓는 존재로 굳건히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빵의 기적에 참여해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그 기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나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의 증인이로 우뚝 선 사도들처럼
우리도 변화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회의와 불안과 실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세례의 상징이라고?
전삼용 요셉 신부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대그룹 장가 아들을 참교육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아버지까지 죽게 된 박새로이가 3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아버지의 꿈을 이룰 15년 목표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가게 하나 갖는 것이었습니다.
박새로이는 장가 그룹을 파괴하고 자신에게 오히려 무릎 꿇게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동료들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위해 헌신한 한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됩니다.
이 드라마는 복수의 이름으로 박새로이의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아를 복종시키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란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에 도전하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박새로이는 대기업을 무너뜨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전의 객기만 있던 청소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 무너지는 것만으로는 자존심만 강해질 뿐입니다.
자존심은 성장하며 자존감으로 바뀝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성장의 시험대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배고파하는 것을 보시며 필립보를 시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나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널 위해 죽을 거야. 그러면 넌 나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겠니?”
그러나 제자들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먹일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어도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다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이제 이러한 사람이 됩니다.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3실링으로 고아원과 병원 등을 전 세계에 수백 개 지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나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그것 아니면 이기지 못할 자아와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참 자유는 주님과 함께 꿈을 이뤄나가는 데서 얻어집니다.
얼마 전에 『더 높은 기도』 책 홍보 행사를 했습니다.
북 콘서트라고도 하고 출판기념회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그 짧은 시간에 1,300권의 책을 사 주셨습니다.
저는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홍보하고 주인공 역할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튜브 생방송을 하는 중에 노래도 세 곡씩이나 했습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많이 성장했구나!’
잘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긴장도 했습니다.
아침에 고춧가루를 팍팍 넣고 끓여 먹은 라면 때문인지 속이 쓰려왔습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 앞에서도 노래를 못 하던 저였습니다.
자아가 강했기에 실수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봉사자분들과 함께 세 시간 동안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습니다.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그냥 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은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모습입니다.
그러며 주님과 함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꿈이
저의 자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감이 ‘세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배고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꿈속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결단이 있은 다음의 삶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삶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주님과 함께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십시오.
진짜 성공은 그 과정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나의 성장과 자유입니다.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실제로 유다 라삐들의 문헌에서도 그는 당시 학파의 중심인물로 거론되고 있고,
바오로도 그에게서 공부한 것을 자랑스러워할 만큼(사도 22,3 참조)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런 가말리엘이 경고합니다.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그는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도대체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이 그 답을 알려 줍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많은 군중이 먹을 것을 어디에서 구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등장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안드레아의 반문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연약하고 터무니없이 작은 것들,
그래서 남들에게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되는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시어 거대한 결과를 이루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독서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라고 합니다.
모욕당하고 이해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일하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과
그 방법에 가까워졌음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리 소모적인 체험만은 아닙니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쉽게 무시되는 것들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