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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명 자소서] 기업명 자소서 첨삭 요청드립니다.
*자동양식에 맞추어 '지원회사명/직무명/지원구분/인재상' 입력하기
지원 회사명 | 예) 덴소코리아일렉트로닉스 |
지원 직무명 | 예) 생산관리 |
지원 구분(고졸/초대졸/대졸/인턴/경력) | 예) 대졸 신입 |
* 지원회사의 인재상 혹은 비전 등의 자료를 캡쳐하여 올려주세요.
<인재상> 도전 - 일상 속에서 실현하고 싶은 꿈과 뜻을 가지고 높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재 유연함 - 강한 호기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배워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발상하는 인재 커뮤니케이션 - 한층 더 깊은 커뮤니케이션으로 서로의 개성을 이끌어 내는 인재 <회사의 가치관> - 스스로 사회적 책임감을 갖는다. -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 파트너와 뜻을 함께 한다. <회사의 최우선 목표 –고객가치 창출 –도전과 혁신의 자세> |
*첨삭 받을 자기소개서 내용 작성하기
<성장과정>
【인사를 잘하는 아이】 어린 시절 저희 어머니께서는 유난히 인사를 강조하셨습니다. 잘 모른다고 해서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 날이면 언제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먼저 하였고, 혹시나 못하고 지나쳤다 싶으면 다시 되돌아가서 인사를 하고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저는 언제나 어른들께 공손하며 또래들과 사교성이 좋은 아이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주위 사람들과 아주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고, 인연의 소중함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관계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것이 언젠가 큰 자산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격 장,단점> 【세심하게, 꼼꼼하게】 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각종 아르바이트를 많이 경험해 보았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생각보다 되게 세심하고 꼼꼼하다는 말 이었습니다. 비록 생김새는 우락부락하나 남들보다 조금 더 세심하고 꼼꼼한 것이 저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삼성 에버랜드 내의 대형 식당의 즉석 우동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즉석 우동 코너에 배치 받았을 때 저희 코너가 국물 속의 이물질 문제로 컴플레인 건수 1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주방에서 식 재료를 준비하는 친구가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식 재료 준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주방장님께 자청해서 비록 힘은 들지만 그 친구와 업무를 바꾸어 주방 식 재료 준비를 담당 하게 되었고, 우동에 들어가는 식 재료 하나 하나의 준비를 매우 세심하고 꼼꼼하게 정성을 다 하였더니, 컴플레인 건수 1위의 불명예를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저의 세심함과 꼼꼼함은 다소 일의 처리가 느리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이에 저는 항상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순서를 정하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일을 처리 할 수 있도록 노력 하고 있습니다.
<학교 및 동아리 활동> 【혼자가 아닌 우리】 고교 시절 우연히 봉끼라고 하는 봉사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여학생들과의 만남이라는 다소 불손한 목적으로 가입한 동아리였지만, 하다 보니 점점 더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부터 해변청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몸이 불편한 장애우들 돌보기 활동은 가슴 뭉클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와서는 다문화 가정 멘토링 활동도 하였습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대부분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다른 나라 분들 이었기에, 우리말이 다소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처음에는 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에서 무조건 앉혀놓고 공부만 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대화였고, 저는 비로소 멘토링의 취지를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봉사활동으로부터 저는 봉사란 단순히 내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 사랑을 얻게 되는 상호유기적 행위임을 알게 되었고, 결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기 및 자랑> 【음치의 세레나데】 어렸을 적부터 저는 동네에서 소문난 음치였습니다. 고교시절 한 달에 한번씩 하는 운동장 조회 시간에도 선생님들이 시끄럽다며 애국가나 교가를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고교2학년때 음악 교생 선생님께서 오셨는데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저는 그 길로 선생님께 고백하기 위해 노래에 도전했습니다. 매일 새벽 5시면 기상해 뒷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렀고, 등교 하자마자 밴드부 보컬 친구에게 레슨을 받았으며, 하교와 동시에 근처 오락실로 달려가 조그만 노래 부스 속에서 영업이 끝날 때까지 마이크를 부여 잡았습니다. 그렇게 교생 실습 기간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연습한 결과 저는 선생님께 멋진 세레나데를 들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첫 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저는 노래라는 특기를 갖게 되었고,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자신감과 도전의 성취감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입사 동기> 【늙다리 이등병의 열정】 저는 남들 보다 다소 늦은 이십 대 중반에 입대를 하였습니다. 친구들에게 귀에 딱지가 생길 만큼 듣던 군대는 막상 가보니 정말 듣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습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선임들에게 늙다리 이등병은 부담스럽고, 선입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항상 “제가 하겠습니다.”란 말을 입에 달고 생활하였더니 어느새 저는 늙다리 이등병에서 부대의 맏형이 되어있었습니다. 저희 부대는 유난히 작은 소규모의 독립부대로 저는 그 안에서 화기분대원으로써의 임무뿐만 아니라 후임 병 관리 및 상황관리, 부대 내 물자관리 등 부대 전반에 걸친 관리 활동을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군입대 이전에는 이러한 관리의 중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저에게 군생활은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군 시절의 경험과 여러 가지 사회경험을 통해 저는 제 직무의 적합성이 관리직에 어울린다고 판단하였기에 이번에 덴소의 생산관리직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스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며, 주체적으로 행동 하자는 덴소의 기업가치관과 고객의 가치 창출을 먼저 생각하는 덴소의 기업목표의식이 제가 평소에 추구하는 개인적 소신과 일치 하였기에 평생 직장으로 섬기며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전공은 일본어이지만, 생산관리직에서 근무 하기 위해 경남대 지역・산업 맞춤형 인력 양성 사업단에서 실시하는 생산품질관리 전문 인력 양성과정을 충실히 수료 하였으며, 경남대 링크 사업단에서 실시 하는 생산품질 트랙 과정 또한 이수 중에 있습니다. 저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나이는 조금 많지만, 인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가정교육과 풍부한 사회 경험을 통해 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생산관리란 생산공장에서 부품입고부터 생산을 위한 생산라인의 부하판단 및 재고관리, 진척관리 등 공장전체의 업무를 관리하는 것을 말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인적 자원관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제가 저의 주전공인 일본어와 평소 꾸준히 공부한 생산관리의 지식을 합친다면, 다른 누구 보다 경쟁력 있는 사원으로써 덴소에 입사할 수 있다고 당당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입사 후 포부 및 희망> 【한국을 넘어 세계로】 현재 덴소 코리아 일렉트로닉스사의 주 거래처는 현대 자동차, 현대 모비스, 쌍용 자동차, 한국GM, 기아 자동차 등 국내 업체에 입니다. 저는 덴소 코리아 일렉트로닉스와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로 까지 함께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입사 1년차에는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현장에서의 실무와 잘 결합될 수 있도록 선배님들을 잘 따르고, 최우선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입사 5년차에는 그 동안의 실무 경험과 선배님들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후배들을 잘 이끌어 보다 나은 생산관리 시스템으로 업계를 주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입사 10년 차에는 회사를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임하여 그 동안 쌓인 생산관리 시스템의 노하우를 보다 체계적으로 구조화 시켜 회사를 국내 1위, 나아가 활발한 해외진출을 주도 하겠습니다.
<경력 및 대회 수상 이력> 【만년 2위의 서러움】 2012년 4월 20일 저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 도쿄에 워킹 홀리데이라는 비자를 받아 건너 갔습니다. 일본어 전공자로써 무조건 한 번은 가봐야 한다는 마음에 무작정 오긴 했지만, 한달 생활비 밖에 가지고 오지 않았던 터라 오자 마자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아 다녔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낮에는 일본 정식 집에서 오후에는 한국 요릿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국 요릿집의 경우에 도내에 점포만 10개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가게였는데, 제가 있던 신주쿠 지점은 신오오쿠보 지점에 밀려 항상 만년 2위의 점포였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1위로 올라 설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점장님은 별로 그럴 의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 석 달쯤 지났을 무렵 점장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2달간 출근을 못하게 되었고, 가게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제가 임시 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임시였지만, 한번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해보고자 노력 했습니다. 당시 제가 생각했을 때 가게의 큰 문제점은 매뉴얼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매뉴얼의 부재로 중구난방 식으로 이루어지던 운영을 바로 잡기 위해 저는 손님응대에서부터 청소에 이르기 까지 세세하게 통일된 저희 매장만의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첫 일주일간 매뉴얼이 몸에 익지 않아 불편해 하던 직원들도 2주차에 들어가니 매뉴얼에 몸이 익어 어느 정도 매장의 운영이 통일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매뉴얼 덕분에 일의 효율이 많이 오르게 되었고, 일의 효율이 오르자 직원들의 능률도 덩달아 올라 갔습니다. 두 달이 지났을 무렵에 저희 매장은 드디어 신오오쿠보 매장을 제치고 처음으로 매출 1위의 매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저는 우연한 기회에 임시 점장이라는 일을 맡아 직원들과 함께 노력하여 매출 1위의 매장을 만들 수 있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1번째 신규 매장의 점장으로 부임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요릿집에 불과 했지만, 이 때의 경험으로 저는 시스템의 운영과 관리의 중요성을 배울 수 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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