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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3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6,1-7
복 음 : 요한 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 달이었을 것입니다.
태국과 우리나라의 월드컵 예선 축구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3:0의 승리였습니다. 1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해서 불안하다고 언론에서 말했지만,
2차전에는 3:0의 완승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골에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압도적인 승리 때문이 아닙니다. 또 이제 이겼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 골을 넣은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선수의 이름은 박진섭입니다. 이 선수는 작년 12월에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무명의 시간을 보냈었지요.
실업팀, 그것도 2부리그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K리그1’까지 도달하는데 자그마치 6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로구단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생생하게 꿈을 꾸면 이뤄진다는 믿음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그가 골을 넣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 저 역시 큰 기쁨을 얻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자기 자리를 지킨 이의 웃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좌절, 절망이 우리의 단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란 단어를 품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 희망이 지금과 다른 또 다른 삶을 살게 해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죄 중에 있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다시 힘차게 사는 용기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저녁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요.
그런데 큰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이는 것이 아닙니까?
어둠 속에서 작은 배를 탄 채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을 뚫고서
건너편에 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어둠을 뚫고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 말씀 따라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주님을 모시려고 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으려고 할 때,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습니다.
아직 배 안에 모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에 이릅니다.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문제의 해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멀리하고 잊어버린다면, 두려움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또한 ‘5천 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 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껏 노력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는데 어둠이 짙어졌을 때
큰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 없이는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인생 항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의 위기 상황을 당할 때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의 기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프랑스는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1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하나가 있을 것,
다를 줄 아는 악기 한 가지 있을 것,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을 것,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공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
약자를 도우며 봉사를 꾸준히 할 것”
그런가 하면 한국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할 것,
월 급여 500만 원 이상일 것,
중형차를 소유 할 것,
통장 잔고 1억 이상 일 것,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다니는 정도,
골프장이나 콘도 회원권 소유 할 것”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가치와 수치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존재와 소유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는 도덕적인 가치, 인격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재화와 소유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기준으로 볼 때, 비록 재화와 소유가 적더라도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끄럽지 않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도덕적인 허물이 있더라도,
인격적으로 부끄러움이 있더라도
재화와 소유가 충분하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가난한 과부와 바리사이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적은 헌금을 하였지만 정성을 다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헌금을 하였지만 그것을 과시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세리와 바리사이의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단식과 희생을 다 했음을 기도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세리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비용이 들면 나중에 갚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신분과 혈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로마의 백인대장일지라도
굳센 믿음이 있다면 구원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성껏 봉헌한다면,
우리가 진실하게 기도한다면,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민다면,
우리가 굳센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중산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상류층은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나약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던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회개했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곱절로 갚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기도하였던 성모님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 성인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앙의 상류층이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것을 교회에 봉헌하였고, 필요한 것들만 받았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궁핍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나눔과 기도가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중산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상류층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신앙인으로서 나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빵의 기적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카파르나움으로 가게 하시고는
당신은 산으로 피하시어 늦도록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배를 타고 떠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려고 제자들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신다.
배를 타고 갈 때, 그 상황이 제자들을 더욱 절박하게 한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연기처럼 떠 있는 너무나도 캄캄한 밤은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배를 어디로 저어 가야 할지 몰랐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을 일으켜 높은 파도가 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17절)
그들의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상황은 적어도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분의 거룩한 법에서 떠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밟고
인간의 모든 교만을 내리누르며 물 위를 걸어오신다.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가며 이러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재난이 찾아오고 이런 일이 많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파도를 밟고 건너오신다.
그러나 너무 어려움이 커서 끝까지 견뎌내려 노력하는 이들마저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
복음과 성경을 통해 답을 찾아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럴 때 예기치 않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구해 주신다.
당신의 권능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고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기대 이상의 것을 실현하게 해주시는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며 귀에 익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2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적을 똑똑히 보도록 배 위에 오르시지 않고 물 위를 걸으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배에 모시려고 하는 동안 놀라운 속도로
배와 주님께서 모두 뭍에 닿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이미 목적지에 닿았다고 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의탁할 때,
“어느새”(21절) 바람이 걷히고 목적지에 닿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파의 난관, 박해자의 손길,
그 안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가야 하겠다.
그분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려 노력하는 삶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우리,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항상 목적지에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인생 항해의 안전한 항로이신 예수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일곱 개 기적사화 중
다섯 번째에 속하는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들려준다.
일곱 개의 기적사화는
① 가나의 혼인 잔치(2,1-11) ② 고관 아들의 치유(4,46-54) ③ 베짜타 못가의 병자 치유(5,2-9)
④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1-15) ⑤ 물위를 걸으신 기적(6,16-21)
⑥ 태생 소경의 치유(9,1-12) ⑦ 죽은 라자로의 소생 기적(11,1-44) 이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마태오(14,22-33)와 마르코(6,45-52) 복음에도 보도된다.
요한, 마태오, 마르코 복음이 五餠二魚의 기적 다음에
오늘 기적사화를 제각기 배치하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서로 다르다.
原典으로 통하는 마르코복음(6,45-52)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베싸이다로 보내신다.
그리고는 혼자 산에서 기도하신다.
그동안 날이 저물어, 즉 밤이 되었는데도 배는 역풍을 만나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신다.
시간은 흘러 새벽 4시쯤이었다.
이에 제자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모두가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50절)하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는 빵의 기적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다.
마르코는 이렇듯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권능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예수님 앞에 풍랑도 복종하는 이변(마르 4,35-41 참조)을 통해
명실공히 예수님은 인간과 자연 위에 군림하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저 놀라고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14,22-33)은 마르코복음과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벌어진 독창적인 사건을 첨가했다.
즉 베드로를 부각시켜 예수를 향하여 물 위를 걷게 하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물에 빠져들게 만든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그의 약한 마음을 탓하신다.
예수와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친다.
그때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이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3절)하고 고백한다.
마태오가 이 사건을 원전에 덧붙이고 다른 결론을 유추한 까닭은
마태오 복음공동체의 현실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박자들은 추정한다.
이는 곧 마태오 복음공동체의 당시 교회적 상황과
미래 교회의 교회론적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요한복음(6,16-21)은 원전의 내용을 대폭 줄여 기적의 다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기적의 맛을 본 사람들이 자기네들 방식으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反하는 예수의 태도(6,15)로 시작된다.
빵의 기적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해 가셨고,
그날 저녁 무렵에 제자들만 배를 타고 호수 북쪽 가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다.
어둔 밤이 되었음에도 예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고,
배는 거센 바람과 사나운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배는 힘들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로 다가가신다.
이에 제자들이 겁에 질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20절)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려 하는 순간,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닿았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6장을 통해 ‘생명의 빵’에 관한 새로운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그 가운데 삽입함으로써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구약의 하느님 현존(출애 3,14)을 예수님께 적용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며,
그 현존이 체험되는 곳이며, 하느님의 놀라운 생명이 선사 되는 곳이다.
하루의 대낮에 빵의 기적이 있었으나 그 대낮이 사람들로 하여금
표징의 참뜻을 이해시키는 데는 밝기가 충분하지 못했다.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 모두에게도 어둠이 깔려있다.
제자들은 분명 군중과는 다르지만 예수께서 不在하여 계신다는 점은 같다.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어둠과 두려움 뿐이다.
어둠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航海는 목적지에 이를 수도 없다.
그러나 빛과 안전함을 베푸시는 “나는 나다.”이신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항해는
우리의 인생을 영원한 생명 목적지로 이끌어 줄 것이다.
생명 자체이시며, 이 생명을 우리 세상에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航路가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나다.”이신 그분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확신이다.
그런 믿음과 확신이 없이는 예수가 한낱 ‘유령’(마르 6,49; 마태 14,26)으로 착각될 수도 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체험한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산으로 가십니다.
제자들도 저녁때가 되자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납니다.
큰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지만 노를 저어 목적지로 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매우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가 역풍 속에 분투하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도 풍랑이 일고 파도가 출렁이는 밤바다의 상황을 그대로 대면하시며
그 역풍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께서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트시어,
허둥대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이미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오늘 독서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할 때의 혼란을 묘사합니다.
공동체에 불평과 분열의 조짐이 발생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배에 예수님을 모시듯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사도들이 하여야 할 첫 번째 임무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늦은 밤, 낯선 길을 불안한 마음으로 걸어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멀리서 다가오는 정체 모를 형체가 주는 섬뜩한 공포가 무엇인지,
그러다 상대가 익숙한 목소리로 “나야.” 하고
말하여 올 때 드는 안심이 무엇인지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하심은
모든 상황을 돌려놓는, 그 자체로 평화이고 사랑인 완전한 구원입니다.
오 베르타 수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20)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가장 큰 은총은
예수님과 늘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삶의 기쁨과 슬픔, 평화와 두려움의
그 모든 순간 안에
“나다.” 하시며 말을 건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마음 안에서 큰 바람이 불어
이런저런 감정과 온갖 생각들의 물결이 높게 일 때,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그러나 그 때야말로 예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나간 후 뒤돌아보면
예수님께서 함께 걸어주신 발자국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목소리와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눈길,
인도하시는 손길이 내 곁에 있음에 감사드린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