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전례 주년의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 출현의 의미와 공동체의 시작을 알립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마르 1,14)
요한이 뒤로 물러나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인간적 눈으로 보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악행 때문에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이지만,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예수님을 알리는 자신의 소명을 채우고 서서히 물러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때가 차서"라는 말씀을 제1독서에서는 "이 마지막 때"(히브 1,2)라고 부연합니다. 구약 시기 동안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던 하느님께서 이제 드디어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히브 1,2)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복음을 믿으라는 것,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스라엘은 이제껏 맺어온 하느님과의 관계를 멈추어 살피고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때를 맞이한 것입니다. 율법주의로 퇴색된 하느님 말씀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는 일과, 제도에 안주하고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영혼 없는 사목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요.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한창 제 생업에 몰두하고 있던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함께 투신할 제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형성하시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을 만나 함께 살면서 지향과 목적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 공동체부터 신심 단체나 본당, 수도 공동체 등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 본 제자들을 선뜻 부르십니다. 그들이 건실한 이스라엘 남성들이기는 하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서 있던 사제 계급이나 율법 학자, 의회 구성원이 아니었지요. 그저 단순하고 충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꾸려 나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앞으로 제자단 안에서 생길 소요나 갈등 요소를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 없지만 그분께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언젠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이 설령 배반까지 당하신다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그들은 구원 사업의 역군이 될 것임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으시니까요.
"내가 ... 되게 하겠다."
예수님께서 매우 확고히 말씀하시지요. 이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는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듯,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히브 1,3)하시는 예수님의 본성과 능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그분의 의지를 이루시는 힘입니다. 제자들은 반드시 예수님께서 되게 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1,18)
제자들도 선뜻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따르려면 기존의 것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 이치지요. 무언가 가득 움켜쥔 손으로는 다른 것을 더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삶을 비워야 새로이 시작되는 삶에 편견이나 곡해 없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버리고 따릅니다.
연중 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정표들을 제시하며 앞으로 걸어갈 시간을 준비시켜 줍니다. 기쁜 소식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지요.
비록 지상 순례 여정 안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이 불안하고 막막해도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는 우리에게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고 의무입니다.
아울러 그다지 뛰어나지도 탁월하지도 않은 죄인에 불과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기꺼이 응답하라는 과제 또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지요. 그분이 원하시는 제자됨의 길을 위해 우리가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비우고 채워지는 기적은 과감히 체험해 본 이들만이 아는 순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난 성탄 시기처럼 우리는 당분간,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짧지 않은 기간을 코로나를 걱정하며 걸어야 합니다. 우리 삶은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새로운 시작으로 초대받았으니까요. 이제 새로운 일상 안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며 기쁨을 선택해 살도록 애써 봅시다. 혹독한 현실의 무게를 지고도 주님의 제자가 되어 기쁨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