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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대원사 현장스님 글)
한라산 관음사는 비구니 안봉려관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제주불교 중흥조 안봉려관 스님 이야기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전역의 당집 오백 개와 절집 오백 개를 불사르고 파괴한 것이 1702년이다.
그로부터 햇수로 200년이 되는 1901년 봄이었다. 제주 한림 서쪽의 작은 섬은 비양도로 건너가는 작은 배에 제주지역의 심방 안봉려관이 타고 있었다.
진원일이 쓴 〈고대사찰과 아라리관음사〉(《제주도지》 제39호, 1969년 7월)와 〈안봉려관 스님〉(제42호, 1969년 12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안봉려관이) 1901년 봄 비양도 가는 중에 태풍을 만나 배가 거의 침몰할 위기에 죽느냐 사느냐 할 때였는데,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지성스럽게 불렀더니 옷이나 버선이 젖지 않았다.
안봉려관은 남의 과거 미래에 대한 모든 일을 백발백중 잘 알고 예언했다. 여기를 파면 샘물이 나오고 저기를 파면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시키는 대로 땅을 파보면 샘물이 나왔다.
관음사 역시 대웅전 서쪽에 원래 물이 없었는데 땅을 파보라고 하여 샘물이 흘러나와 그 곳에 절을 지었다”
안봉려관 스님은 보통 키에 얼굴이 둥글고 몸은 뚱뚱하며 머리를 깎아 염색한 남자의복을 입고 남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전한다. 음성은 부드럽고, 온순 침착하고, 청렴결백하며, 겸손했으며 엄격하면서도 자비스러웠다. 학교문턱은 드나든 예가 없으나 한글은 물론 어려운 한문까지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안봉려관의 출가는 《불교》 제71호(조선불교중앙교무원, 1930)에 실린 백환양의 〈한라산 순례기〉와 이은상의 《탐라기행》(조선일보사, 1937)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안봉려관의 출가는 비양도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6년 뒤인 1907년 9월의 일이다.
대흥사에서는 비구니 수계의 전례가 없어 수계에 반대하는 여론이 많았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계를 주지 않으려던 대흥사 스님들을 설득한 것은 안봉려관 스님의 신통력이었다.
당시 대흥사 주지스님의 동생은 한센병을 앓았다고 한다. 안봉려관 스님이 주지스님 동생의 병을 고쳐주자 대흥사 스님들이 다시 대중공사를 벌여 마침내 1907년 성도절에 유장 스님을 은사로 청봉 스님 외 3인의 스님을 계사로 삼아 대흥사 창건 이래 최초의 비구니 삭발수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후 대흥사에서 사미니과, 사집과, 사교과를 수료하고 대흥사 제주도 담당포교사로 명을 받고 제주로 돌아온 것이 1908년 음력 정월(혹은 5월) 5일이다. 《해월당 봉려관 스님》(이은희, 2017년)
하지만 200년 동안 단절된 제주불교 전통을 비구니스님 혼자서 잇는다는 것은 녹녹치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살던 마을에 작은 절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시작했지만 마을사람들이 위협을 가해 와서 한라산으로 피신하게 된다.
“한 비구니(속명 안명 봉녀관 자)가 있어 무신년(1908년) 5월 5일에 본도에 들어와서 작은 절을 구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4월 8일에 재를 설하고 부처님 탄생을 경축할 새 도민의 소견으로 괴이하다고 생각하여 무리를 지어 저해하며 심지어 봉녀관을 가해하려 하였다.
이에 봉녀관은 몸을 피하여 한라산 절경에 올라 7일 동안 음식을 끊고 기도하다가 한 곳에 이르러 기력이 없이 그만 엎어져 절벽 위에 걸렸었다. 홀연히 수천의 까마귀 떼가 모여 옷깃을 물어 구하니 이를 기적이라 했다.”
〈제주도 한라산 법화사 니사 봉려관 비명병서(碑銘幷書)〉(태연스님 편, 《회명문집》, 1991)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안봉려관 스님은 한 스님의 인도로 산천단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운대사로 불리는 한 스님을 만나 안봉려관은 가사를 전수받게 된다.
“정신을 가다듬어 산천단이란 곳에 내려오니 마침 충청도 계룡산에 산다는 노승이 있어 합장배례하며 말하되, 원컨대 이 가사를 받으소서 하며 가사를 드리며 다시 부탁하는 말이 이를 지니시고 자중자애 하시와 큰 사업을 성취하소서 하더니 홀연히 절하고 물러가 버렸더라.”
〈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매일신보》1918. 3.2-3.3)
이때 가사를 전해준 운대사는 법호를 상운(祥雲)이라 했던 김석윤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제주도의 향토유학자로 제주도로 유배온 최익현, 박영효 등의 영향을 받아 1894년 전주 위봉사 만하스님에게 출가했다. 그는 스님이면서 동시에 유생으로도 활동했다. 1909년 2월에는 자신의 전답을 팔아 제주 광양에 대장간을 차리고 무기를 제조해서 제주의병항쟁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지만 제주유림의 적극적인 탄원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 뒤로도 두 차례 더 항일운동에 관여해서 복역했다. 이런 항일운동의 전력 때문에 안봉려관 스님의 불교활동에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고 뒤에서 후원하는 역할만 담당하게 되었다.
3.1운동 한 해 전에 벌인 무장항일투쟁
관음사를 중창한 안봉려관 스님은 이후 제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폐사된 절들을 중창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창건한 절이 법정사다. 10여 년의 활동으로 관음사의 신도도 늘고 1918년에는 법당도 새로 짓게 된다. 또한, 1911년부터 승려를 배출하기 위한 해월학원을 열어 1913년에는 방동화가 1914년에는 관음사 제2대 주지에 오른 오이화가 배출되기에 이른다.
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 《매일신보》, 1918. 3. 2 - 3)
이 무렵 하원리 중산간에 창건된 법정사를 중심으로 모인 승려와 신도들을 중심으로 제주도 최초의 무장항일투쟁이 벌어진다.
법정사의 승려 혹은 신도였던 김연일, 강창규와 5년 전 관음사 해월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했던 방동화가 항쟁의 지도부였다. 법정사 인근의 하원리와 도순리, 대포리, 중문리, 회수리, 월평리, 강정리 등에서 운집한 700여 명의 주민들이 강정파출소를 습격해서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해서 일제 기마병에 항거했다.
이 사건 이후 안봉려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불교는 한동안 암흑기를 맞는다.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져 66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2명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46명이 1년 6개월에서 10년에 달하는 선고형량을 받아 복역했다. 서슬퍼런 일제강점 초기에 육지에서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대규모 무장투쟁이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승려와 불자들의 힘으로 시도된 것이었다.
무오법정사무장투쟁은 관음사 법당 불사에도 영향을 끼쳐 1918년에 시작된 법당 증축이 1924년에야 낙성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안봉려관 스님은 관음사 법당 낙성식에 당시 해인사 주지로 한일강제합방 당시 일본 조동종과 조선불교를 합치려던 대표적 친일승려 이회광을 초청한다. 또한 이회광의 사제인 이회명을 제주불교협회 회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관음사 초대주지, 2대주지가 되는 안도월, 오이화를 이회명에게 건당(建幢)하게 해서 법사와 법손이 되게 한다.
관음사 법당 낙성식에 맞춰 만들어진 제주불교협회는 승려보다는 친일관변인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승려는 회장인 이회명과 구제부장 안봉려관, 포교부장 안도월, 포교부 간사 오이화뿐인데 반해 조선총독부 소속 김태민이 부회장을 맡고 총무는 전라남도 도의회 의원인 양홍기가 맡았다. 이윤희 도의원, 김종하 대정군수, 홍종시 제주읍장을 비롯해서 일본인 승려와 조선식산은행 소속 일본인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관변조직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친일관변조직이었지만 사실상의 운영은 아래 기사에서 읽히는 것처럼 안봉려관 스님이 주도했다.
“조선 불교대회 법사 이회명씨는 당지(當地) 불교 ○설인 봉려관, 안도월 양 화상의 의뢰로 지난해에 입도하여 제1회 공립보통학교에서 불교 취지를 강연하였는데 박수갈채 중에 관민 유지의 환영을 득하여 OO을 조직하고 설립 후 불과 4, 5개월에 남녀 회원이 수천에 달하였음으로 당지 부호가 송석돈 씨는 임시포교소를 무상대여하고 전 판사 양홍기 씨는 자기 사무실에서 협회사무를 취급케 하고 교무를 확장키 위하여 봉려관, 안도월 양 화상은 많은 경비를 들여 중심 시가지에 포교당을 신축하고 4월 28일 불거(佛居)를 점하여 낙성식 및 불교협회 정기총회를 개최코자 목하 준비 중인데 교당의 구조는 실로 굉장하여 내선인 중 와서 본 자가 봉려관의 철두철미로 다대(多大)사업은 말할 필요가 없고 또 이회명 법사의 전도 확장함으로 종래 무불국(無佛國)이던 제주가 유불국(有佛國)의 신세계를 이루겠다고 예측하는 중이라더라.” 제주불교의 흥륭 《매일신보》 1925. 4. 19일자)
1925년 4월 제주시 이도리 1362번지에 신축된 제주불교협회 건물에는 제주불교포교당과 더불어 제주불교협회, 불교부인회, 불교소녀단 간판을 달았고, 협회의 회원이 삼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동리별로 30여 명의 대표를 두어 조직화했으며, 안봉려관 스님과 안도월 스님은 이회명을 앞세워 제주 전역으로 순회 포교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안봉려관 스님의 노력으로 제주불교는 점차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관음사, 법정사 외에도 불탑사(1924), 법화사(1926), 월성사, 백련사, 만덕사, 보덕사 등 제주 전역에서 10곳에 가까운 절이 안봉려관 스님의 주도로 중창하게 된다.
“제주도 한림면 고산리 대흥사포교당 월성사에서는 음력 7월 25일 오전에 봉불식을 거행하였는데 법사 정금오 화주 봉려관 감원 고인경 지전 윤봉천 제씨 외 수백 명의 신자가 집합하야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었더라.” 《불교시보》제27호(1937. 10. 1)
안봉려관 스님은 입적(1938년 5월 29일)하기 한 해 전인 1937년 한림 월성사 낙성식을 마지막으로 제주불교 중흥의 바쁜 걸음을 마침내 멈추게 된다.
안봉려관 스님은 비구니임에도 박만하, 이회명, 안도월 스님과 함께 제주 관음사 조사전에 중시조로 모셔져 있다.
같이 중시조로 모셔진 이회명 스님은 안봉려관 스님이 입적하자 비명을 짓고 관음사 부도전에 세웠다.
옛 절의 흔적 그윽하기에(古寺跡痕幽)
이끼 낀 주춧돌 어지러히 널려있네(沒笞砌亂遊)
누가 알랴 봉려관을(誰知蓬廬觀)
아름다움이 물과 함께 흐름을(芳艶水同流)
제주 4. 3은 안봉려관 스님이 중창한 제주 사찰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에 걸쳐 제주 전역의 사찰들에는 학살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신도들은 불상과 탱화, 집기 등을 끌어안고 옮겨 다녔고 해안마을 빈방을 빌려 불상을 봉안해야 했다.
관음사는 1924년에 새로 세운 법당을 비롯해서 건물 일곱 동이 전소했고 주지 오이화 스님은 토벌군에 의해 고문을 당해서 그 후유증으로 입적했다.
김석윤 스님의 아들은 역시 출가해서 제주시 월정사를 지키다 총살당하고, 법화사는 토벌군 주둔지로 변했다가 폐허가 됐다.
피해사찰은 모두 14개 사찰에 16명의 스님이 토벌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피해 형태로 구분해 보면 총살 10명, 수장 2명, 고문 후유증 사망 1명, 일본으로 도피 1명, 행방불명 2명으로 가해자는 모두 서북청년단 토벌대이다.
제주 4.3만행으로 제주 사찰의 90프로가 방화로 불타 없어지고 일본 유학하고 돌아온 학덕높은 스님들이 서.청의 총칼아래 무참히 살해되었다.
오늘의 제주불교는 안봉려관 스님의 불교중흥의 홍법서원과 4.3 희생자 스님들의 희생위에 건립된것임을 알아야 한다.
조계종 25교구 본산중 유일하게 비구니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 한라산 관음사이다.
한라산은 어머니 산신 성모도량이기도 하다.
비구니스님들과 여성불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현실이다.
제주 관음사는 교육과 포교에 능력있는 비구니스님을 본산주지로 임명하여 제주불교발전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제주불교의 중흥조이신 비구니 안봉려관 스님이야기는 황찬익 선생의 글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사진 1번 관음사 경내에 모셔진 안봉려관 스님 동상
사진 2번 한라산 관음사 일주문
사진 3번 제주 현무암으로 조성된 불상
모든 공감:
13회원님, 배경한 및 외 1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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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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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히 짓밟힌 가슴 아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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