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align="center"><table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width="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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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able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width="100%">
<tr>
<td width="592"><p align="justify" class="txt"><font
size="2" color="red"><b>후추 REPLAY: 제
11회 봉황대기 고교 야구 대회 (1981년) </b></font></p>
<p align="justify" class="txt">1981년 여름.
MBC 청룡도, 대우 로얄즈도 존재 하지
않던 시절…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제11회 봉황기는 어느 학교의
품으로..?'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룡기 또는 황금사자기 (각각 올해로
54회, 53회 째) 만큼 전통이나 역사는 짧지만,
지역 예선 없이 전국 고등학교 야구 팀 전체가
서울에 모여서 박 터지게 싸운다는 측면에서
볼 때, 봉황대기는 '한국의 고시엔' 이라 불릴
만큼 고교 야구의 '왕좌'를 판가름 내는 무대라고
볼 수 있었다. </p>
<p align="justify" class="txt">이미 대통령기는
이건열-백인호-조계현이 이끄는 군산상고로,
청룡기는 성준--류중일의 경북고의 품으로
넘겨 줬지만,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무관의 황제' 선린상고는 봉황기만큼은 넘겨
줄 수 없다는 심정으로 독을 뿜으며 '삼복
더위 8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
초반부터, 오명록의 경남고, 김정수의 진흥고,
한희민의 세광고를 각각 8-0, 4-2, 3-0으로
물리치는 막강 화력과 특급 피칭의 조화를
바탕으로, 선린상고는 일찌감치 4강 자리에서
적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세광고와의
8강전에선 '이 바오로' 라는 잊지 못할 이름의
투수의 역투로 김건우-박노준 계투 진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기도 했다. 한편, 특급
포수 서효인을 축으로 서울 팀의 자존심을
세우며 8강까지 올라 왔던 신일고는
청룡기 대회 우승팀 경북고 성준의 산발 3안타
완봉에 역시 3-0으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김영덕 감독이 이끌던 천안
북일고와 좌완 이현택의 부산상고가 나머지
2장의 '4강 티켓'을 차지 하였다</p>
<p align="center" class="txt">.<img src="../image/famejun/3.jpg"
width="377" height="212" border="0"></p>
<p align="justify" class="txt">'선린 대
북일'…'경북 대 부산상고'가 격돌한 4강전은
많은 전문가의 예상과는 달리, 각각 5-0, 6-0이라는
선린과 경북의 일방적인 완봉승으로 끝났다.
고교 야구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던
선린의 선발 투수 김건우는 이 대회 4강까지의
등판 횟수 20이닝에 17 삼진, 3자책점, 방어율
1.35를 기록했고, 칼날 슬라이더와 슈트를
주 무기로 삼던 선린의 릴리프 전문 박노준은
16이닝에 14 삼진, 1 자책점, 방어율 0.56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자랑하며 선린의 결승 진출을
견인했다. 경북고의 좌완 투수 성준
역시, 20이닝 출전에 4삼진, 무실점
이라는 전형적인 '초고교급 투수의 괴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한 '방패'를
주무기로 삼던 양팀의 결승전을 놓고,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선린상고의 우세를 점 쳤다.
물론, 이미 한번 청룡기에서 선린상고를
잡은 경험이 있는 경북고의 전력이었지만,
선린상고가 두번 패 하진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선린상고에는
'공-수의 핵' 박노준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강-약 조절과 두뇌 피칭으로
경기 중반 이후에 '무실점 계투'를 책임져
왔던 박노준은 팀의 붙박이 3번 타자로서도
4강전 까지 5할2푼 이라는 경이적인 타율을
보여주며 '고교야구의 정점'으로 일컬어 지던
선수였다. </p>
<p align="justify" class="txt">1981년 8월
25일 아침… 대망의 봉황대기 결승전을 앞
두고 특석 2.500원, 일반 1,000원, 그리고
학생표 500원을 받던 서울 운동장엔 뒤늦은
여름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교
야구 최고의 자리를 놓고 야구 명문 두 팀간의
'최고 승부'를 손꼽아 기다리던 당시 야구
팬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인 '안티 클라이막스(anti-climax)'가
발생한 것이었다. 하루 왠 종일 내리던
비로 인해 결승전은 다음날 26일로 연기 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20일 넘게 투혼을
발휘했던 양 팀 선수들은 피로한 몸을 달랠
수 있는 달콤한 휴식을 맛볼 수 있었다. 선린상고
선수들은 모처럼 귀가해서 가족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고, 지방에서 올라 온 경북고 선수들은
숙소인 '왕도여관'에서 '정신무장'을 다지고
있었다.</p>
<p align="justify" class="txt"><img src="../image/famejun/4.jpg"
align="right" width="96" height="500" border="0">다음날
(8월26일) 벌어진 경북고와의 결승전… 후추
명예의 전당 헌액자 박노준의 호칭은 어쩌면
이 경기를 통해서 영영 바뀌게 된건 지도 모른다.
'고교 야구의 영웅'에서 '비운의 스타'로
말이다. 1회초 경북 공격, 무사 2, 3루의
결정적 위기를 삼진, 내야 범타로 처리한 선린의
선발 김건우의 호투를 계기로 선린은 1회말
반격에 나섰다. 1회말 박노준의 안타를
중심으로 1사 만루의 기회에서 후속 타자 조영일
(5번), 이경재 (6번)의 적시타로 먼저 3점을
선취하는 과정에서 박노준의 화려한 고교 야구
인생은 한 순간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정말 눈 깜짝 할 순간에 말이다.
2루에 있던 주자 박노준은 이경재의
좌전 적시타에 '무리'인줄 알면서도 힘차게
홈으로 대시 하였다. 선린의 탄탄한
투수력을 고려할 때, 초반 2득점과 3득점의
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홈플레이트 앞에서 '훅 슬라이딩'을
했는데 발이 맞지 않아 왼발이 완전하게 꼬였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그라운드의 흙
사정은 매끄러운 슬라이딩을 하기에 그리 이상적이지
못 했던 이유도 분명 있었다. 당시 박노준의
발목이 완전히 돌아 간 상태를 확연하게 포착해서
재방송, 또 재방송 해 주던 방송사가 매정하다고
생각 될 정도로, 그의 부상은 섬뜩한 광경이었다.
발목이 뒤 틀린 뒤에도 박노준은 엉금
엉금 기어서 홈플레이트에 도착, 선린의 석점
째를 챙겨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그의 고교 야구 신화도 그
순간 그렇게 쓰려졌다.</p>
<p align="justify" class="txt">피칭, 타격,
그리고 주루 플레이… 어느 한 분야도 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박노준의 1회 퇴장은 '전력 차이' 그 이상의
'심리적 파멸'을 선린에 초래했고, '한국병원'으로
후송 된 박노준은 '그래도 3점 차'라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담담한 마음으로
병실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봉황
히어로' 성준을 상대로 6회까지 4-2란 점수로
리드를 지켜 나가던 선린상고는, 7회에 등판한
경북의 복병 잠수함 문병권 투수의 구위에
철저히 봉쇄 당했고, 8회초엔 결국 연속 된
실책으로 대량 실점을 하게 된다. 선린
2루수 김명배의 실책의 뒤를 이은 유격수 실책,
그리고 1루 악송구, 포수 조홍기의 3루
악송구로 2실점 해서 4-4 동점을 만들어
주었고, 이어 진 경북 타선의 연속 3안타와
희생 플라이로 2점을 추가, 승부를 6-4로 뒤집어
놓고 대망의 초록 봉황기는 대구로 향하게
된다. </p>
<p align="justify" class="txt"><img src="../image/famejun/5.jpg"
align="left" width="208" height="141" border="0">고등학교
시절 3년을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숨 가쁘게
장식했던 박노준의 마지막 경기는 그렇게 비참하게
끝이 났다. 구수갑 감독이 이끄는 경북고에만
두번씩 무릎을 꿇으며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영광의 상처'는 왼발목 복사뼈
2개 골절과 3각 인대 파열이라는 무시 무시한
8주 진단과 함께… 박노준은 울었다. 수많은
야구 팬들도 울었다. 81년 전국대회
준우승만 세번을 하게 된 선린상고의 선수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조각난 박노준의 왼발을
쳐다보며 말이다. </p>
<p align="justify" class="txt"><img src="../image/famejun/7.gif"
align="right" width="200" height="136" border="0">결승전을
제대로 뛰지도 못했던 박노준이 대회 '감투상'을
받은 사실보다도 더 박노준의 진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80년대 들어 와 처음으로 6년 만에 봉황기를
안게 된 전통의 명문 경북고 선수들이 우승이
결정 된 다음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경북고
동문회 사무실도, 야구협회 사무실도 아닌…
한국병원 209호실이었다. 그리곤 박노준에게
위로의 악수와 격려의 대화를 남기고 떠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박노준을 '적수'가 아닌
한국 야구의 내일을 같이 끌고 나갈 '최고의
동반자'로 인정 해 준 장면이었다. 바로
고교야구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