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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선택의 순간
1. R.O.T.C.
2. 제대 준비
3. Miss 홍
4. 후보생 수양록
5. 포병학교 일기
6. 문혜리에서 있었던 일
7. 두고 온 이불 보따리
1. R.O.T.C.
남자는 자기가 선택한 최종 학교를 졸업하면 일단 취직을 해야만 하나의 사회인으로 자격을 갖추게 되며 그로부터 자기의 새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졸업>과 <취직>.
우리의 젊음을 희망에 부풀게도 하고 멍들게도 하는 이 두 단어는 인생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임에도 생각하거나 대하기 싫은 단어임에 틀림없다.
이 세상 모든 남성들이여.
졸업과 취직에 대하여 생각과 고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
지금은 산간벽지의 촌로나 촌부까지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I.M.F.>라는 이상한 녀석 때문에 <취직>보다는 <실직> 또는 <무직>이라는 말이 우리 주변에 더 많이 나돌고 있지만, 취직 문제에 있어서 요즈음은 내가 학교를 졸업하던 65년도나 제대하던 67년도와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마음에 쏙 드는 취직자리를 얻기란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요즈음은 취직 시험 볼 수 있는 곳도 많고 불특정 다수인에게서 이력서를 받아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채용하는 업체도 많다고 할 수 있다.
또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자유업의 종류도 많아졌고 굳이 벤쳐 기업이니 뭐니 하는 특수한 것을 찾지 않더라도 나 홀로 창업하기도 쉬워졌으며 관계 기관의 도움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 풍조 또한 공무원이나 유명하다고 하는 기업체에 취직하는 것 보다 오히려 자영업 하는 사람을 더 부럽게 생각하고 유능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어 취직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부담이 덜 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65년도에서 쌍육(66)년도를 지나 내가 군에서 제대한 67년도에는 어떠했는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같은, 당시 그야말로 금의환향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고등고시나 일반 공무원에 임용되는 공무원 채용 시험 말고, <공채> 라고 하여 시험을 보아 공개 채용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한국전력> 이나 <석탄 공사> 같은 몇 개의 국영 기업체와 <은행> 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업체 수도 적고 많은 직원을 채용할 만큼 기업의 영업이 활발한 시대가 아닌 탓이기도 했지만 당시 그래도 대기업에 속한다고 하는 기업들조차 사사로이 연줄 연줄로 직원을 채용하거나, 또는 특정 학교에만 추천서를 보내어 추천 받은 사람 중에서 <특채>라는 형식으로 몇 사람의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내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요즈음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취직난이 심했으나 나는 졸업할 때 R.O.T.C. 소위의 포병 장교로 임관되었으니 의무 복무 기간인 2년 동안은 일단 취직에 대한 걱정을 덜을 수 있었다.
2. 제대 준비
A
65년 2월, 졸업과 동시에 육군소위로 임관된 나는 4월에 포병 학교에 입교하여 12주간의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7월에 부대 배치를 받았지만 병과가 포병인 관계로 예상한 대로 전방 지역인 강원도 <문혜리>에 있는 포병 대대에 배치되었다.
<문혜리>는 <지포리>라고도 일컫는 <신철원>을 조금 더 지나가면 있는 곳인데 ‘철의 삼각지’ 로 잘 알려져 있는 <구철원>과 <금화>로 갈라지는 삼거리인 관계로 교통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버스 정류장을 중심으로 몇 군데의 술집, 조그마한 여인숙, 군장품 가게, 구멍가게 등이 있어 주위에서는 제법 번화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다방도 하나 있었는데 휴대용 일제 내셔널 전축으로 당시 유행하던 ‘불-어-라 여얼풍아 바암이 새- 도오록’ 하는 <열풍>이라는 유행가도 틀어 주었기 때문에 비번인 저녁에는 노래도 듣고 다방 아가씨와 노닥거리기도 할 겸해서 가끔 들르기도 했었다.
<문혜리>에 있다고 하는 부대들이 대개는 이러한 가게가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몇Km씩 멀리 떨어져 있으나, 내가 배치된 포병 대대는 정류장이 있는 문혜리의 중심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큰길가에 있었다.
대개의 경우 포병 소위는 관측 장교 업무를 맡기 때문에 자기 부대 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를 떠나 보병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휴전 중인 때에는 관측장교 업무를 맡더라도 최전방의 OP라고 하는 고정된 관측소에서 비무장 지역 저쪽의 동태를 관측하여 그 내용을 소속 부대에 보고하는 업무가 통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 대대는 최전방 부대가 아니어서 OP를 운영하지 않았고, 예비 부대의 성격을 띈 탓으로 교육과 훈련이 주로 하는 일이어서 우리 같은 소위에게는 오히려 근무가 더 고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OP에서 관측 장교로 근무하면, OP는 대개 최전방의 산꼭대기에 있고 또 사람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도 아닌 관계로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고독감을 느끼는 것 외에는 군대생활 하기가 무척 편했다고 한다.
우선 그 곳에서 하는 일은 단조로웠고 책을 볼 시간도 많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가 제일 상관이므로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고 한다.
우리 대대에 근무하는 소위들은 거의 대부분이 R.O.T.C. 출신이었는데 선배 장교와 마찬가지로 나를 포함한 우리들 동기생 6명은 억세게 재수가 없는 탓으로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ATT다, RSOP다, RCT다 뭐다 하여 부대의 평가를 대비하여 실시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느라고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게다가 우리 부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 부대가 매년 실시하는 부대 평가를 받을 때에는 우리들 관측장교 소위는 해당 중대에 지원까지 나가 보병과 함께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연말쯤에는 몇 십 년 군대 생활한 사람도 받아 보지 못 했다는 기동 훈련까지 받았다.
더구나 이때 받은 기동 훈련은 사단 전체가 훈련장인 경기도 <여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실시하는 것은 종전과 같았으나 시나리오에 의해 실시하는 종전의 방법과 달리 시나리오 없이 통제관이 부여하는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대응해야 하는, 처음으로 실시한다는 자유 기동 훈련이어서 식사도 제때에 배달이 안 되어 한, 두 끼 씩 거르는 등, 총 만 쏘지 않았을 뿐 마치 실제 전쟁과 같아 더 없이 힘들었다.
나는 그때 어느 전쟁이든 전쟁터에서 병사들에게 식사만 제대로 공급된다면 그 전쟁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관측장교 직책인 우리들 소위는 소속된 포병부대에서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시와 마찬가지로 보병 중대에 배속되어 보병을 따라 다녀야 하는 관계로 똘똘한 보병 중대장을 만나는 것도 큰 복이었다.
나는 억세게 재수가 없었던 탓인지 후방에서만 근무하다가 진급에 필요한 지휘관 경력 때문에 전방 부대로 자원해서 전입 왔다는 보병 중대장과 훈련을 받았는데 독도법을 몰라 지도를 읽을 줄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휴대하고 있는 콤파스 조차 사용할 줄 몰라 그날따라 가랑비까지 오는 새벽, 엉뚱하게도 후방이 아니라 적진으로 부대 이동하는 바람에 보병을 따라가야만 하는 나와 일행인 관측병, 무전병은 덩달아 통제관으로부터 포로 신세가 되는 판정을 받을 뻔하기도 했다.
이렇게 불과 반년 사이에 온갖 훈련이란 훈련은 모두 받게 되어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지 못 할 정도로 호된 군대 맛을 보았다.
심지어 부대를 배치 받아 찾아가던 날조차 부대가 평가를 대비한 야외 훈련 중이어서 부대 막사는 텅 비어 있었다. 때문에 부대를 지키고 있던 대대 인사계 선임하사의 안내로 개천가에 자리 잡고 있는 야외 훈련 CP(지휘소)에 가서 대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혈질인 인상에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며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 대대장은 전입신고를 받자마자 즉시 인사 참모에게 우리의 포대 배치를 지시하였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군번 순으로 2 명씩 각 포대에 배치되어 곧바로 훈련에 참가할 정도였다.
포병 학교에서 12주 동안 열나게 교육과 훈련을 받았음에도 그동안 받은 이론에 대한 실습을 현실감 있게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군번 순으로 포대 배치를 하는 바람에 나와 김낙원 소위는 Alpha 포대에 배치되었다.
Alpha 포대는 대대에서 떨어진 곳에 따로 있기 때문에 부대 내의 높은 사람이라고는 대위 계급인 포대장이 없으면 선배 R.O.T.C 소위인 전포대장 외에는 나와 김낙원 소위가 제일 상관이었다.
그러나 문혜리 중심가에서 약 3 Km 정도 떨어진 다소 외진 곳에 있었기에 깊은 산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비번인 때 밤에 술이라도 한잔 마시거나 다방에서 아가씨와 농담이라도 주고받고 싶어 중심가로 나올 양이면, 도로 주변이 캄캄하고 괴한에게 납치될 우려도 있어 칼빈 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둘 이상 같이 다녀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Bravo 포대와 Charlie 포대 그리고 본부 포대는 구철원과 금화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도로가에 있어 중심가와 가까워 외출하기에는 편하였으나 한 울타리 안에 대대 본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대대장, 부대대장, 대대 참모 등 높은 사람이 많아 자연히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한 관계로 Alpha 포대에서 근무하는 우리들을 다른 동기생들은 무척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누가 군번이 늦으라고 했나.
포병 부대에서는 평상시에도 영어의 <A, B, C, D, E ····> 등을 말할 때 <Alpha, Bravo, Charlie, Delta, Echo ····> 등과 같이 통신 용어로 말한다.
또한 숫자를 말할 때에도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 이렇게 부르므로 자기 군번이 <4239068>일 때<사,이,삼,구,영,육,팔>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넷,둘,삼,아홉,공,여섯,팔> 이라고 말해야 되는 것이다. 또 20은 <둘공>, 100은 <하나백> 이라고 부른다.
B
여기에서 내가 근무한 우리 포병 대대 이야기를 하면 이렇다.
우리 대대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처음 포병 부대를 창설할 때의 몇 안 되는 대대 중의 하나로, 창설 된지 오래된 전통이 있는 부대인 탓인지 군기가 매우 엄하였다.
내가 교육받을 때, 포병 학교 안에 있는 제일 큰 종합 강당 건물의 이름을 <풍익당> 이라고 하였는데 6·25 당시 우리 대대의 대대장 이름인 <김풍익>을 따서 강당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우리 대대가 얼마나 유명한 부대인가를 짐작할 만하다.
심지어 6·25 전쟁 때 사용하던 피 묻은 부대 깃발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대대 선임하사는 자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통 있는 부대인 탓도 있지만 원래 T/O상 대대장의 계급이 중령임에도 우리 대대에는 1년 정도 이내에 진급하지 못하면 전역을 해야 되는, 계급 정년이나 연령 정년에 해당되는 고참 소령이 대대장으로 부임 해 오는 경우가 많아 더욱 군기가 엄하였다.
우리 대대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진급을 하지 못하면 다음번의 진급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고 전역을 해야 되기 때문에 부임한 대대장마다 훈련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또 부대 내에서 사고가 없도록 하고 무언가 잘하고 있다는 평을 들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할 것은 당연하였다.
대대가 전통 있는 부대이고 훈련 평가에서 매년 우수한 성적을 받아 온 탓으로 부임 해 온 대대장마다 부대를 떠날 때쯤에는 거의 모두가 진급을 했다고 한다.
군기가 얼마나 엄하였는지, 대대장이 우리들 소위에게 속칭 <쪼인트 깐다>는 것은 하나도 의아스러울 것이 없었고 참모인 대위조차 소령인 대대장에게 군화 발로 <쪼인트>를 까일 정도였다.
그러니 장교는 물론 일반 사병들의 군대 생활이 얼마나 고되었을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해 가을, 월남 파병을 위한 백마 부대를 창설할 때, 우리 대대를 포함한 인근의 포병 부대에서 1개 포대를 차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원자를 신청 받는 과정에서 우리 대대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사병들은 “여기서 이 고생을 할 바에야 월남에라도 가는 것이 낫다.” 며 제대가 임박한 몇 사람을 빼고는 거의 모두가 지원하는 바람에, 놀란 대대장은 부대 장병들을 모두 연병장에 모아 놓고 단상에 올라가, 차고 다니는 권총을 빼 들고 공중에 몇 발 쏘더니 “너희들 월남 가면 다 죽는다. 그리고 지원한다고 모두 선발될 줄 아느냐? 지원했다가 선발에서 누락되면····!” 하며 엄포 반, 회유 반으로 만류하였던 것이다.
‘월남 전선에 가면 생명이 위험하다’ 는 말은 일반 사회에서도 유언비어로 취급되는 금기 사항이었으므로 대대장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부대에서는 오히려 지원자가 적어 인원 차출에 애를 먹는 형편이었다지만, 우리 대대장 입장에서는 소속 병사 대부분이 지원한다고 하면 상부로부터 칭찬은커녕 ‘부대 통솔에 어떤 문제점이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을 듣게 될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도박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대장의 그러한 행동으로 지원자 문제는 별 탈 없이 지나갔으며 R.O.T.C. 장교로는 같이 부임한 Bravo 포대의 이대봉 소위가 지원하여 선발되었다.
이대봉 소위는 키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당차게 생긴 체구였으며 눈이 유난히 동그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태권도를 잘했고 우렁찬 그의 목소리는 병사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때 특히 돋보였는데 애석하게도 월남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까운 장교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그의 명복을 빈다.
권총으로 병사들의 월남 파병 지원을 만류한 우리 대대장은 다음해인 66년 초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다른 부대로 갔다.
C
새로운 대대장이 부임한 66년도는 7월에 우리 부대 전체가 전라남도<광주>에 있는 상무대의 포병 학교로 이동을 하게 되어 있어 대대장이 부임한 연초부터 부대 이동 준비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포병 학교에서 교육생들의 교육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교도대로 차출되어 간다는 것이다.
한 가정이 이사하는 것도 복잡한데 하물며 하나의 부대가 몽땅 짐을 싸 들고 이사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부대 이동하기 전, 1년 선배 R.O.T.C. 장교가 전역함에 따라 대대 내에서 장교들의 보직 변경이 있어 나는 정보 참모 보좌관 겸 측지 장교를, 김낙원 소위는 정훈 장교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나와 김낙원 소위는 독립 부대와 마찬가지인 Alpha 포대에서 졸지에 상전이 즐비한 대대 본부로 가게 된 것이다.
측지라는 것은 일반 사회에서 토지를 측량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인데, 포병부대에서 대포를 쏘기 위해서는 대포가 있는 포진지 위치나 OP(관측소) 등 필요한 장소의 좌표(경도와 위도)를 알아야 가능했기 때문에 측지는 포병 부대에서 매우 중요한 필수의 업무였다.
측지 할 때 요즈음은 인공위성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그때는 건설부나 측지를 전문적으로 하는 측지 부대에서 전국 여러 곳에 설치한 삼각점 (등산 할 때 흔히 보이는 것으로 대개 산 정상 부근에 박혀 있고 상단에 + 표시가 있는 돌이나 콘크리트로 된 사각형 기둥)과의 방향과 거리를 측정하고 자료집에 있는 그 곳의 좌표를 기준으로 하여 싸인, 코싸인, 탄젠트를 이용한 삼각 측량법으로 필요한 위치의 좌표를 산출해 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싸인, 코싸인, 탄젠트가 이러한 곳에 쓰이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방향을 잴 때에는 통상 <방향틀>이라고 하는, 군사용으로 만들어진 기구를 사용하였고 정밀 측지 할 때에만 요즈음도 민간에서 쓰는 <트랜싵>이라는 장비를 사용하였다.
<트랜싵>은 우리 대대가 속한 포병 사령부 내에서 우리 대대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다른 부대는 물론 상급 부대에서조차 빌려 가는 형편이었으니 우리 대대가 얼마나 유명한 부대인가를 달리 짐작케 해준다.
측지가 상당히 전문성을 가진 중요한 업무여서 측지 장교는 중요한 보직이었고 경력 평가에 많은 영향을 주는 자리였다.
그러나 장기 복무를 할 사람이야 경력에 유리한 직책이 필요하고 높은 사람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서라도 본부에서 근무하는 것을 원할지 몰라도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 R.O.T.C. 장교 대부분은 신상 편한 것이 우선이어서 보직 변경이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정보 참모는 작전이나 인사, 군수 참모 등과 같이 계급이 같은 대위이지만 다른 참모에 비하여 하는 일이 미미한 탓으로 교육이나 기타 사유로 대위급 장교의 인원 차출이 있으면 도맡아 갈 수밖에 없어 정보참모는 공석인 경우가 많아 대대의 정보 참모 업무는 보좌관인 내가 거의 담당하였다.
몇 달 동안은 부대 이동을 위한 이삿짐을 싸고 정리하는데 눈코 뜰 새 없었다.
장비야 모두 가지고 가므로 별 문제가 없었으나 보유하고 있는 포탄이나 탄약을 인근 부대에 인계하는 일이 큰일이었다.
탄약고에 쌓여있는 나무 널빤지로 만들어진 수많은 포탄상자를 일일이 개봉하여 내용물과 수량의 이상 유무를 서로 확인해야 했으니····.
마침내 모든 이삿짐을 차량에 싣고 부대를 떠나 일단 기차역이 있는 인근의 연천으로 이동하였다.
크레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연천역에서 대포와 차량 등 중장비는 물론 모든 장비를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병사들의 육체적 힘만으로 기차에 싣고 내리는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어 그곳에서 야영을 하며 장비를 기차에 싣는데 꼬박 1주일이 걸리긴 했지만, 장비를 실은 기차가 연천역을 출발 한지 장장 15시간 만에 송정리를 거쳐 상무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하여 무사히 부대 이동을 마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도 나는 비밀문서 보관 책임자인 탓으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비밀문서가 들어있는 금고만 관리하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에 장땡을 잡았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우리 대대가 광주로 이동하는 바람에 포병 소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후방 근무를 다음해 4월 제대할 때까지 운 좋게 10개월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전방의 <문혜리>에서 근무할 때에는, 군용 전화기를 돌리면 막걸리 먹고 술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늪스- 늪스-” 하며 우리 부대의 교환대 이름을 응답하던 머스마 교환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 곳 포병 학교에서는 전화기를 들면 옛날의 컬컬한 머스마 교환병의 목소리 대신 여군 교환병의 “상무대입니다.” 하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고 그 목소리에 취해 엄벙덤벙하다 보니 눈 깜짝하는 사이에 어느덧 10 개월이라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따라서 제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아울러 취직이라는 문제도 자연히 가슴을 짓누르며 다가왔다.
부대가 다행히 후방 지역인 탓에 가능했는지 몰라도 1월 초, 대대장은 우리 전역 대상 R.O.T.C. 장교들에게 복무 연장 신청 여부의 결정을 위한 <제대 준비>를 하라며 생각지도 못한 10일간의 특별 휴가를 주었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몇 개월 후면 의무 복무 기간인 2년이 끝나니까 전역 신청을 하던지 복무 연장을 하던지 결정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주겠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를 잘 생각해서 전역 신청 여부를 결정하라’ 는 것이었으나 요는 가급적 복무 연장을 권장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는 눈치 같았다.
우리 대대장은 군인이라기보다는 기업체 사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배가 약간 나왔고 앞머리도 벗어졌으며 조금은 욕심이 있어 보이지만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나이도 많은데다가 진급에서 여러 번 누락되어 그 역시 전역해야 되는 신세인지라 홀아비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우리에게 특별 휴가를 준 것인지도 몰랐다.
제대 후 동기생들 모임에서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축에 들었던 모양이다. 다른 부대에서는 제대 전날까지 주번사관, 교육 등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느라 <제대 준비>라는 단어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R.O.T.C. 동기생 6명 중 김낙원 소위와 내 휴가 차례가 되어 <제대 준비> 휴가를 받았지만, <공채>든 <특채>든 기업들의 직원 채용 시기가 대부분 10월이었으므로 취직 문제에는 실제로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단지 하숙 짐 보따리 일부를 미리 옮겨놓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직원 채용 시기를 10월로 정한 것은 <공채>를 주도하는 은행들이 10월 중 동시에 시험을 실시하여 채용하는 바람에 그렇게 한 것 같았다.
나도 휴가를 대전 집으로 오기는 하였으나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제대 문제에 있어서는 취직을 약속 받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부모님들인지라 “제대하지 말고 그냥 복무 연장을 하는 것이 어떠냐?” 하는 눈치였다.
더구나 그때 우리 집은 아버님의 사업 실패로 경제 사정이 이만 저만 나쁜 게 아니었기에 부모님들의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R.O.T.C. 장교가 복무 연장하여 장기 복무하는 것도 어엿한 직업 군인으로서 훌륭한 직업임에도 대다수의 우리들은, 제대 후에 바로 직장을 얻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닌 사람일지라도 복무 연장하는 사람을 은연 중 무시하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이제 군 복무를 마치게 됨에도 직장을 구할 자신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복무 연장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주위 사람들은 물론 우리들 자신마저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무 연장 신청은 본인으로서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며, 육사나 갑종 출신 장교로부터도 같은 직업 군인이 되었다는 따뜻함보다는 일단 멸시를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심지어는 사병들로부터도 취직할 데가 없어서 복무 연장하는 것이라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받아야 할 실정이었다.
그러한 상황과 집안 형편, 취직 문제 등 여러 가지로 갈등을 느끼고 있는데 남의 속도 모르는 부모님의 눈치가 보기 싫어 휴가 10일 중 5일간을 집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광주로 내려와 하숙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았다.
3. Miss 홍
A
나의 하숙집은 류문동에 있었는데 광주 서 중학교 정문의 담장이 끝나는 큰길가에 있는 옛날 일본식 집이었고 김낙원 소위의 하숙집은 나의 하숙집을 끼고 돌아서 들어가는 골목 안쪽에 있는 커다란 한옥이었는데 두 집 모두 전문 하숙집으로 주인 남자가 없었다.
처음 광주에 내려 왔을 때 김낙원 소위와 나는 하숙비를 줄일 요량으로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방에서 한 달 가량 같이 하숙을 했다.
전방의 문혜리에 있을 때에는 부대 안에 있는 B.O.Q.에서 영내 거주를 하였기 때문에 식사를 부대 내에서 한 탓으로 별도로 숙식에 따른 비용의 지출이 없었으나 이곳 광주에서는 영외 거주를 하는 관계로 부식비를 받는다 해도 쥐꼬리 만한 월급에서 하숙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넓직한 B.O.Q.에서 같이 생활했던 것과 하숙방을 같이 쓰는 것과는 사뭇 달라 여러 가지가 서로 불편하여 각 각 독방을 쓰기 위해 하숙을 옮긴 것이다.
육군 소위인 나의 월급 내용과 지출 명세를 보면 그 시절의 물가를 가늠 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 급여총액 7,420 원
* 공제금액 1,076 원
* 수 령 6,344 원
공제내역
저 금 170 원 세탁 이발 60 원
운동모자 70 원 적십자회비 50 원
운동복 350 원 포 탄 20 원
전출비 50 원 포우비 30 원
조위금 100 원 P. X. 176 원
그러나 급여총액 7,420원 외에 영외 거주하는 사람에게 주는 부식비라는 명목으로 1,700원을 더 받았으니 한 달 수입 총액은 9천 원 정도 되었던 셈이다.
금전 출납부를 보니 하숙비로 3,500원 지출했고 담배 35원, 운동화 100원, 극장 65원, 플래시 230원, 어항(냇물에서 물고기 잡을 때 쓰는) 80원 등의 지출 내역도 보인다.
B
나의 하숙집에는 큰딸이 공군 중위와 동거하고 있었고 하숙생이라고는 나보다 몇 개월 먼저 하숙하고 있던 예비 사단에 근무하는 갑종 장교 출신 육군 강 중위와 나 뿐이었는데, Miss 홍이라는 1년 전에 여고를 졸업한 작은딸이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강 중위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큰딸이 집안 살림을 맡아서 했으나 2개월 전 하숙생인 공군 중위와 동거하기 시작한 뒤로는 작은딸 Miss 홍이 현재와 같이 살림을 도와주고 있으며, 공군 중위와 큰딸은 곧 결혼한다는 것이다. 얼마 후 강중위도 다른 곳으로 하숙을 옮긴 탓으로 이 집에서는 나 혼자 하숙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김낙원 소위의 하숙집은 ☐자 형태의 꽤 큰 한옥인데 바깥 주위로 돌아가며 마루가 딸린 방이 이어져 있어 하숙하기에 편리한 구조인 탓도 있지만 방이 많아 여러 명의 장교들이 하숙하고 있었다.
식구로는 주인아주머니와 두 딸, 그리고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 이렇게 넷이 살고 있었고 Miss 박이라고 하는 큰 딸이 전적으로 가사를 돌보고 있었는데 Miss 박은 Miss 홍의 고등학교 2년 선배라고 하였다.
Miss 홍은 특별히 이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꼬집어서 흠 잡을 데가 있는 것도 아닌 수수한 인물이었다.
얼굴은 통통하고 키는 다소 작은 편이나 눈이 커다랗고 마음씨가 착하였으며 나이가 두 살이 적어서 그런지 몰라도 여인 냄새가 풍기는 Miss 박에 비하면 청초하게 보이는 순정형 이었다고나 할까?
인물이나 쾌활한 성격으로 보면 고등학교 선배인 Miss 박이 훨씬 매력이 있었다. Miss 박은 갸름한 얼굴에 콧날도 오뚝하게 생긴 상당한 미인이었고 무엇보다 말할 때 눈웃음을 살살 치는 것이 매력은 있었으나 끼가 좀 있어 보였다.
김낙원 소위도 집에 가서 별로 할 일이 없었던지 나보다 이틀 뒤에 왔기에 우리는 제대하기 전에 광주 지역 구경이나 멋지게 하자고 하였다.
“Miss 홍이야 두말 않고 네 말을 따를 것이지만 Miss 박은 어떨지 모르니 네가 말해 보는 것이 어떨까?”
김낙원 소위는 구경을 핑계로 Miss 박과 같이 놀러 갔으면 하는 눈치로 슬쩍 나한테 떠넘긴다. 김낙원 소위는 서울 토박이였으나 깍쟁이 같은 구석은 별로 없고 다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오히려 대전 촌놈인 내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던 것 같다.
김낙원 소위가 은근히 Miss 박을 좋아하는 것 같기에 어느 날 넌지시 Miss 홍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김낙원 소위가 Miss 박에게 많은 관심이 있는 눈치던데···. 어떻게 생각해요?”
“박 언니는 옛날부터 사귀는 헌병 중위가 있지만, 남자 어머니가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어 그저 그러고 있다 나 봐요.”
그러나 김낙원 소위에게 그러한 말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Miss 박을 만나 이번 계획을 부탁했다.
“꽃맞이 나들이 겸 우리 넷이 함께 놀러 가지 않을래요? 기념사진의 모델도 되어 주시면 더욱 고맙고····.”
예상과 달리 쾌히 승낙하는 터라 우리들 넷은 3일간 무등산 등 광주 근교를 돌아다니며 신나게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 후 며칠 지난 어느 날 하숙집 아주머니는 웬일인지 안방에 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한다. 평상시 Miss 홍이 밥상을 가지고 와서 방문 앞의 마루에 놓고 “식사하세요.” 하면 내가 방안으로 들어다가 혼자 밥을 먹었는데 셋이 한 밥상에서 식사를 하려니까 거북하기도 했지만 기분도 좀 야릇했다.
반찬은 평상시 보다 한두 가지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생미역이 있어서 초고추장에 맛있게 찍어 먹은 것 같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하숙집 아주머니는 매우 은근한 말로 나를 추켜 세우며 술까지 한잔 따라 주는 것이 아닌가.
“그 동안 여러 사람이 하숙했지만 이 소위처럼 한 집안 식구같이 느껴진 사람은 없었제. 그런데 1년 가까이 같이 지내면서도 가깝게만 생각했지 반찬도 부실혔으니 으짠댜. 모두 다 이해 혀 줘.”
Miss 홍과는 달리 하숙집 아주머니는 다소 비대한 체구였음에도 눈이 가늘고 작은데다가 눈 꼬리가 아래로 쳐진 편이어서 약간은 집념이 있어 보이는 인상이고 사투리가 매우 심했다.
나는 ‘제대 축하 식사 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숭늉을 가지고 들어오는 Miss 홍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여러 가지 걱정을 해준다.
“제대하면 바로 취직할 곳이 있는지 모르겠네. 요새 취직이 상당히 어렵다고들 하던데 제대하지 말고 그냥 있는 것도 괜찮을 텐데····.”
식사를 끝내고 나니 술도 한 잔 했겠다, 기분도 그렇지 않아 Miss 홍하고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Miss 홍과 충장로에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오면 어떻겠습니까?”
“너무 늦지만 말더라고····.”
하숙집 아주머니는 큰 인심이나 쓰는 표정이다.
우리는 전에도 몇 번 왔었던 사직 공원의 벤치에 앉아 지난번 놀러 다닌 일, 사진 찍던 이야기와 그 동안에 서로 있었던 이야기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다.
Miss 홍이 살폿이 머리를 내 어깨로 기대 온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돌아올 때 Miss 홍은 ZIPPO 라이터와 그 라이터가 쏙 들어가도록 손수 짰다는 레이스로 된 라이터 집을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닌가. “잃어버리지 말고 잘 사용해 달라.”는 말과 함께····.
보라색의 라이터 집은 은은한 아카시아 꽃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둘이 서로 손을 꼬옥 잡고 걷는 길가의 레코드 가게에서는 Miss 홍이 좋아한다는, 한창 유행하는 <바보처럼 울었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제대를 하든, 복무 연장을 하든, 양단간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점점 닥아 오고 있었다.
복무 연장 신청하는 사람은 없고 하나 같이 “군대 생활 지겹다.” 며 너도나도 다투어 전역 신청서를 제출하는 바람에 전역 신청하지 않으면 어쩐지 낙오자가 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제대한 후에 취직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집안의 경제 사정이 어려운 것을 고려해 보면 어떤 것이 잘하는 것인지 갈등만 쌓이고 답답한 마음은 하루 저녁에도 <전역 신청> 과 <복무 연장>을 몇 번씩 되풀이하곤 했다.
이렇게 생각을 되풀이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여 이것, 저것 뒤지 던 어느 날 밤, 나는 4학년 후보생 시절 여름방학 동안 예비 사단에서 4주간 병영 훈련받으며 기록한 <수양록>과, 부대 배치 받기 전 포병 학교에서 받은 12주간의 고된 훈련기간 중에 쓴 일기를 읽게 되었다.
4. 후보생 수양록
< 640722 (수) 맑은 후 흐림 >
수양록을 쓰라고 한다. 수양? 좋은 말이다.
정신면에서의 수양이라면 좋겠지만 병영 훈련에 관하여 수양하라면 카테고리를 정해 준 것에 벌써 일종의 제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수양록을 기록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병영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군인 생활, 그것도 장교 후보생 생활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640723 (목) 맑음 >
구보-. 모든 후보생들이 싫어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R.O.T.C.에 입단한 후 군대에서 구보가 필요하다 기에 지난겨울에는 며칠에 한 번씩 새벽에 구보 연습을 했다.
집에서부터 유성 온천까지 4 Km 되는 거리를 뛰어 유성에 도착 할 때쯤에는 땀에 푹 젖고 숨이 차 헉헉거리게 되지만 바로 옷을 벗고 아무도 없는 온천 목욕탕에 들어 갈 때의 상쾌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때의 구보는 그 맛으로 즐겁게 자청해서 했던 것이나 이곳에서의 구보는 정말 힘이 든다.
물론 철모를 쓰고 탄띠를 매고 M1 소총을 들고 뛴다는 힘든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자의로 하느냐 타의로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오늘의 구보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 640724 (금) 비 >
밤에 야간 각개 전투 실습을 하다.
아무리 교육 시간표가 엄격히 짜여져 있다 하더라도 상황에 적합해야만 교육의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오늘의 교육 실습은 도무지 엉터리라고 생각된다.
낮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속에서 받은 침투 훈련과 정찰 교육 때문에 피로하고 젖은 몸이 되었는데도 야간 교육을 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철저한 교육과 실습이 목적이 아니고 야간 4시간 동안 후보생들에게 그럭저럭 보내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면 말이다.
( 후보생들이 학과 출장 즉 교육이나 훈련을 받으러 나간 후에 구대장은 모든 후보생들의 수양록을 읽어보는지 나의 이날 수양록 말미에 구대장 정재우 소위는 ‘군인-그 중에서도 장교는 모순된 일을 자각하되 그 모순을 초월할 줄 알아야 한다. 전쟁, 그 자체가 모순이니까’ 라고 평을 썼다. )
< 640725 (토) 갬 >
오랜만에 4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집에 있을 때에는 항상 자유시간 이었지만 이곳에 입소한 뒤로는 참으로 새롭고 즐겁기가 한량없이 느껴지는 자유시간이다. 대부분의 내무반원이 P.X.로, 어딘 가로 모두 나갔지만 나는 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남아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즐거운 일이다.
< 640729 (수) 맑은 후 오후에 비 >
- 06시 30분 기상
- 09시부터 11시까지 자유시간 : 의무 중대에 가서 감기약 타오고 취침. 감기로 콧 물이 줄줄 흐른다.
- 오후에는 완전 군장으로 분대 방어 학과 출장
- L.M.G. 운반이 굉장히 힘이 든다. 전쟁터에서 후퇴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경우에 과연 이것을 운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23시부터 24시까지 불침번 근무
< 640730 (목) 비 >
“촛불을 보라.” 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그 한마디에서 많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허>를 생각하고 싶다. <허>는 텅 비었다는 것,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뜻 하지만 오히려 가득할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득 찬 찻잔에는 차를 더 이상 따를 수가 없다. 넘칠 뿐이다.
그러나 텅 빈 찻잔에는 가득히, 맛있는, 향긋한 차를 부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이와 같다고 생각된다.
< 640801 (토) 맑음 >
오전에는 내무 사열을 끝내고 오후에는 부대 인근에 있는 냇물로 목욕과 빨래를 하러 갔다. 빨아서 젖은 내의를 그대로 입고 오면 오는 동안에 다 마른다. 제대로 한다면 빨아서 젖은 옷은 널어 말린 뒤에 입어야 하겠지만 왜 많은 후보생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가?
아마도 빨래를 널면 분실의 우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 수치스러운 일이다.
< 640807 (금) 비 >
얼마 남지 않은 훈련기간을 보람 있게 보내야겠다.
이 훈련기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지 결코 마이너스는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참고 견딜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젊은 우리들만이 가질 있는 무기가 아니겠는가?
뜨거운 태양열 그것을 참고, 무거운 배낭 그것을 참고, 졸음이 오는 것 그것을 참는 것, 이것들이 내 인생 일부분의 수양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5. 포병학교 일기
< 650426 (월) 맑음 >
오늘부터 12 주간의 포병 학교 교육이 시작된다. 이번 교육은 장교 계급장을 달고 받는 교육이기에 임관하기 전 후보생 때에 받은 교육과는 사뭇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저녁 후, 정신 훈화 시간에 있었던 학생단장님의 말씀은 좋은 내용이 많았다.
“2년이라는 군 복무 기간을 나 자신의 앞날에 어떠한 발판이 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자신이 결심한 목표를 뒷받침 해주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기간으로 하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었다.
< 650428 (수) 비 >
사실 인간은 왜 사는지 모르고 살고 있는 셈이다.
“왜 태어났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태어났기 때문에 주어진 본능에 의해서 살고 있긴 하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또 생명을 유지하며 생활하게 한 것을 보면 인간의 태어남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650429 (목) 흐림 >
인간은 자기 갈 길이 있다.
인간도 종국에 가서는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고 말지만, 그 것은 인생 전체의 결과를 본 것이고 조금 안목을 좁혀서 본다면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모든 노력을 집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야 할 자기의 길이 아니겠는가?
< 650430 (금) 갬 >
“군인은 똥”이라고 누가 자조 섞인 말을 한다.
악의에서 한 말이 아니라 비유로 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군인은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만일 전쟁이라는 것이 없다면 군인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전쟁은 역사의 흐름 어느 한 시점에서 반드시 생성되어 나오는, 마치 생리 작용으로 분비물이 나오듯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배설물과 같다는 것이다.
역사의 배설물 - 그것이 곧 전쟁이고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군인이라면 군인도 바로 배설물과 같을 수밖에····.
< 650501 (토) 맑음 >
인간은 모두가 생존을 원하지 결코 죽음은 원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평안과 안일을 추구한다.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죽음을 초래하는 전쟁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이 발생하고,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인이 존재하고 있으니····.
이와 같이 군인의 존재가, 인류의 공통적 소망과는 달리 파괴와 살인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군 제도는 모순된 제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에 군인은 그 제도 창설의 목적부터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 650509 (일) 비 >
오늘은 휴일이다. 너무 자유로워지면 자연적으로 나태해지는 것일까? 물론 그러한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어떠한 제약 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처음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스스로 자기를 규율하는 생활 습관에 젖어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제약을 받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항상 자기 규율을 할 수 있지만, 타인의 감시와 제약 하에서 생활 해 온 사람은 그 제약이 없어지면 마냥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 650510 (월) 맑음 >
사람은 항상 자기가 서야 할 위치를 알고 거기에 섰을 때 결코 위태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있어야 할 정당한 자리에 있는 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 것이 곧 자기를 위하는 길일 것이다.
< 650520 (목) 흐림 >
“만나면 헤어지고 또 언젠가는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말은 흔히들 하는 말이고 더러는 체험도 해보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만나면 헤어진다.>는 것은 반드시 있는 일이지만 <헤어진다고 다시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번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본다.
< 650522 (토) 맑음 >
내일은 외출 할 수 있는 날.
모두들 마음이 들떠 있는 것 같다. 입대한 후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나가 보는 바깥세상이니까 외출에 거는 기대가 많겠지.
그러나 막상 내일 외출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특별하게 할 일은 별로 없다. 우선 오랜만에 이발과 목욕을 하고 내무 생활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사고 나면 그만일 것이다. 무지개 - 그 것은 멀리서 바라 볼 때 보기 좋은 것이다.
무지개를 잡고자 하는 동경, 그것은 결코 이룰 수 없지만 설령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섰다 하더라도 그 때 느끼는 감정은 전에 멀리서 느끼던 때처럼 달콤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동경이 있기에 사람은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650526 (수) 흐림 >
OP(관측소)에 올라가 난생 처음으로 실탄 사격 관측을 했다.
관측하는 내가 목표물의 내용과 군사적인 경도와 위도로 표시하는 좌표로 목표물의 위치를, 대포를 쏘는 포진지에 알려주면 포진지에서는 명중되도록 여러 가지 계산을 해서 첫발을 쏜다.
계산을 하는 것은 총을 쏠 때 조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알려 준 목표물의 좌표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정확하였다 하더라도 포탄이 하늘을 날아가는 동안에 바람과 같은 기상 상태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부분 첫발에 명중되지 않으므로, 쌍안경으로 첫 번째 날아온 포탄의 떨어진 위치를 관측하여 목표물과의 차이를 포진지에 알려 준다.
관측한 결과 수정할 내용을,
“우로 삼공(30) 더하기 하나백(100).” 하고 알려 주자 잠시 후 포진지에서, “떴다.” 하며 무전기로 알려 온다.
‘떴다.’ 라는 말은 포탄을 쏘았다는 말이다.
내가 지시한 대로 이번에 쏘는 포탄은 처음 쏜 것보다 우측으로 30m 가고 100m 멀리 떨어지도록 쏘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떨어지는 포탄은 내가 볼 때 거리상으로는 당초의 목표물에서 50m 멀리 떨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포탄이 그렇게 떨어지도록 내가 지시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목표물에 명중 되도록 최종적으로,
“줄이기 오공(50). 효력사.” 라고 통보한다.
이 말은 목표물에 명중되도록 방금 쏜 것 보다 50m 가까이 떨어지게 쏘되, 쏘아야 할 포탄의 수량은 목표물의 중요성, 보유한 포탄 수량 등을 전술적으로 판단하여 포진지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이다.
한 번에 명중시키려고 욕심내지 않고 멀리 쏘았다가 다시 가깝게 쏘면서 점차 목표물에 근접시켜 결국 명중시키려는 이러한 포 사격술은 기업 활동을 하는 사람이 경영에 응용하면 좋을 것 같다.
< 650612 (토) 맑음 >
오후에 사병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막사로 실병지휘 실습을 위한 주번 사관 근무를 나갔다. 아무래도 병사들을 다스릴 때에는 이마에 주름살을 짓고 큰 소리를 쳐야 효과가 있는가 보다.
너무 자주 하면 안 되겠지만 가끔 강압적인 방법도 조미료 같이 가미해야 할 것 같다.
내무반이 협소한 것과 냄새가 날 정도로 침구가 깨끗하지 못한 비위생적인 점을 시정하기에는 국가 예산이 너무 부족한가?
< 650613 (일) 맑음 >
외출을 했다.
목욕을 하고 차도 마시고 여기 저기 다니며 구경하다가 시간이 되어 귀대했다.
부대로 돌아와야 할 시간 20시 - 그것은 넘어서는 안 되는 사선과 같은 것이기에 합승 정류소, 버스 정류장에서는 귀대 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장교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초만원인 차안에서 붐비노라면 땀은 흐르고 신경질이 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타고 있는 이 버스가 불행히도 어떤 사유로 도중에 운행이 늦어지면 귀대 시간을 어길지도 모르니 “제발 제 시간에만 도착하게 해 다오.” 라는 바램이 더 절박하다.
이러한 초긴장의 귀대 마감 시간 20시.
언젠가는 이 20시를 잊어도 좋을 날이 오겠지.
< 650616 (수) 비 >
우리들한테 의무 복무 기간인 2년만 복무할 생각을 하지 말고 “장기 복무하는 것이 어떠냐?” 고 권장하는 눈치다. 지금 장기 복무 의사 표시를 하면 부대 배치 등 여러 면에서 우대 조치가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장기 복무 희망자가 적은가?
군대 생활이 생리에 맞지 않아서? 아니면 보수가 적기 때문에?
사람은 물론 앞일을 염려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함이 현명한 일이겠지만 앞날의 일을 너무 걱정하는 나머지 오늘의 일을 망쳐서는 안 될 것이다.
< 650618 (금) 맑음 >
저녁을 먹은 후 <송정리>까지 12Km 의 완전 군장 구보가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먼 길을 뛴 셈이다. 그 것도 무거운 철모를 쓰고, 배낭을 메고, 칼빈 소총을 앞에 들고····. 뛰는 다리 보다 무거운 철모 때문에 목이 더 아프다.
많은 사람이 낙오했으나 나는 죽기 살기로 악착같이 뛰는 바람에 낙오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생의 시련의 일부 일수도 있다. 구보란 체력 단련만이 결코 그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시련을 괴롭게만 생각한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 투성일 수밖에 없다. 괴로운 시련도 시간이 지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 650629 (화) 맑음 >
오전 중에는 지역 사격이 있었고 오후에는 <평동>으로 나가 야전 축성 실습을 했다. 점심은 시원스러운 평동 저수지 뚝에서 맛있게 먹었다.
사람들은 목적을 위해 가장 빠른 길로 가려고 한다. 그것이 비록 비정상적인 길일 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지로 빨리 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 모든 생물이 다 그러한데 하물며 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인간에 있어서야····.
비록 생존 경쟁이라고는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이기는 자 때문에 생기는 피해자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 650711 (일) 비 >
장마철로 접어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60년만의 심한 가뭄이라고 야단이더니 이제는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서 더 야단이다.
같은 내무반 친구와 함께 셋이 외출하여 극장에서 <007 위기일발> 영화 감상하다.
졸업 후에 최전방 산골에서 또는 산꼭대기 OP에서 근무할 생각을 하면 난감하다. 배치되어 갈 부대가 이미 결정되어 내려 왔다는데 어느 부대로 가게 될는지 궁금하다.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많이 느껴 왔다. 운명론자가 아니더라도 때때로 인간은 자기의 일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간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6. 문혜리에서 있었던 일
일기를 읽다 보니 지난 시절이 엊그제 일 같이 머리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이었다.
전방 문혜리에 있을 때의 단편적인 사건을 기록한 글로, 김낙원 소위와 관계된 <탈영병>과 당시의 어려운 군대 생활을 쓴 <나막신>, <담력 훈련>과 <결혼 신고>, <보초 근무>, <배구 시합>, <만리장성>등은 ‘전역이냐?’ ‘복무 연장이냐?’로 갈등하는 마음을 잊을 정도로 재미있고 기억이 생생하였다.
<결혼 신고>는 갑종 장교 출신으로, 교육을 마치고 우리 부대에 전입 왔다가 바로 월남전에 참가한 최 소위에 관한 이야기다.
A. 탈영병
아침에 일어나니 당번병이, 김낙원 소위의 전갈이라며 “행정반으로 와 주셨으면 좋겠다.”고 한다기에 아직 인계인수 할 시간도 아닌데 웬 일인가 싶어 의아해 하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갔다.
김낙원 소위는 “어제 미귀한 정일권 일병을 찾으러 분대장들하고 <지포리>까지 만이라도 나가보고 싶은데, 인계할 시간은 안 되었지만 포대 일을 부탁한다.”며 “어제 정일권 일병이 ‘시골에서 면회 온 어머님이 문혜리에 계신데 외박은 평일이라 어렵더라도 만나 뵙도록 외출만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하여 외출증을 끊어주었는데 아직 까지 부대에 안 돌아오는 것을 보니 탈영한 것 같다.”고 한다.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하루 밤사이에 그토록 초췌해 질 수가 없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B.O.Q. 에서 잠에 빠져 있었으니 은근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 고 한 후 급히 세면을 하고 있는데 대대에서 일직 사령인 군수 참모 송 대위로부터 전화가 왔다.
‘인원 장악 잘하라.’며 ‘김낙원 소위는 어디 갔느냐?’고 묻기에 탈영한 병사를 찾아보러 나갔다고 대답해 주었다.
어제 저녁 일석점호 후 김낙원 소위로부터 이미 보고를 받았겠지····. 삐쩍 마르고 징징거리기 잘하는 송 대위가 김낙원 소위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했을까?
또 오늘 아침 대대장이 출근하면 최상의 부동자세로, 놀란 토끼 눈에 더 놀란 눈을 해 가지고 병사의 탈영 사실을 보고하는 송 대위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도 나온다.
보고 도중에 대대장이 소리라도 한번 꽥 지르면 뒤로 나자빠지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쪼인트>나 안 까일는지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나서 평상시와 같이 병사들에게 작업 배당을 하고 감독을 하고 있노라니까 대대에서 또 전화가 왔다.
역시 주번 사령 송 대위다.
“병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작업 배당을 했습니다.”
“작업시키지 말고 제식 훈련과 총검술을 시키도록.”
작업이래야 교육이나 훈련이 없는 날 실시하는 부대 내의 무너진 배수로 정비, 막사 수리, 부대 주변 풀베기 등 뭐 그런 것들이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내 체면은 말이 아니지만 할 수 없이 작업을 중단시키고 보초병을 제외한 전원을 단독 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시켜 총검술을 시키니 병사들도 툴툴거리는 눈치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대장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이제 출근하여 정식 보고를 받은 모양이다.
“Alpha 이 소위 입니다.”
“어느 이 소윈가?”
어느 이 소위라니 우리 포대에 김낙원 소위와 나 말고 소위가 또 있단 말인가.
“이방주 소위 입니다.”
“어제 주번은 누군가?”
김 소위라고 말하려다가 또 어느 김 소위냐고 물으면 귀찮을 것 같아 이름을 말해 주었다.
“네, 김낙원 소위 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Alpha 포대는 비상이니 포대장에게 연락하여 결과 보고하라.”
대대장은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탁 끊어 버린다.
포대장 숙소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나 마나 가끔 금요일 저녁이면 몰래 서울로 나들이 갔다가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곤 했던 포대장이 어제 저녁에도 서울 나들이 가는 눈치였는데 있을 리 없고 숙소 당번병인 송 일병이 전화를 받는다.
수완 좋은 포대장이 대대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지만 대대장도 포대장의 이러한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에 전화를 걸어 사실대로 상황을 보고했다.
“포대장은 서울 나가고 없습니다.”
“그러면 비상 대기하라. 오늘 저녁부터 Alpha 포대는 내가 직접 점호를 취하겠다.”
꼭 무슨 분풀이하는 것 같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김낙원 소위가 돌아왔다. 혹시나 하여 <포천>까지 가 보았다고 한다. 정말로 자기 어머니가 왔었는지 확인을 해야 했는데 안 해서 이런 결과가 되었다며 후회하고 있다.
군대라는 것이 그렇다. 자기 과실이 아니지만 장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풀이 죽어 있는 김 소위를 보니 딱했다.
내가 어제 주번 사관이었더라면 지금쯤 내가 저렇게 풀이 죽어 있겠지. 김 소위가 어제 정일권 일병에게 외출증을 발급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가 발급했을 것이고 그러면 내 책임으로 돌아 올 것이었으니 어쨌든 나는 용꿈을 꾼 것만 같았다.
비번인 내일 일요일 운천에 있는 산정 호수를 구경하려던 모처럼의 계획은 생각으로 끝나고 말았다.
B. 나막신
앞으로 영내화의 보급이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니 영내화를 대신할 나막신을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영내화라고 하는 것은 하루 일과가 끝났을 때 내무반에서 신는 신발로 검정 고무신인데 국가 재정이 어려워서인지 개인별로 하나씩 지급이 안 되어 병사 몇 사람 당 1 켤레 정도였다.
그것도 고참병이 신는 것을 빼고는 바닥이 거의 모두 닳았고, 심지어는 찢어진 옆구리를 실로 꿰매어 사용하는 것도 더러 있었다.
참모 회의 때 결정된 지시에 의해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 나막신.
나도 분대장을 불러 놓고 고무신이 없는 병사는 모두 나막신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어쩔 수 없이 무조건 만들어 내라는 지시를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얼마 전, 영내화 대용품 전시회가 포병 사령부에서 있었는데 짚신, 나막신 등 구구했으나 우리 부대는 나막신으로 정했다고 한다. 우선 나무로 된 포탄 상자가 있어 재료 조달이 용이한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병사들은 잘 만들었다. 우리 병사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군대’ 라는 관념에 투철하다. x 대가리로 밤송이라도 까라면 깔 것이다.
나막신의 재료로서 포탄 상자를 뜯은 널판은 아주 제격이었다. 나무는 포탄 상자에서 구했지만 끈과 끈을 박을 못은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폐품으로 반납하려고 모아 둔 총 멜빵이 그렇게 좋은 끈이 될 줄이야····.
못? 못은 철조망의 철사를 펜치로 끊어서 사용하니 진짜 못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철조망 철사 토막을 주우려고 모두 영내 순찰 자가 되어 버렸다.
가난한 나라의 군대니까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야간에 용변 보러 갈 때 따각따각하는 나막신 소리가 곤히 잠자는 병사의 잠을 깨우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C. 담력 훈련
주번 사관 근무를 하고 있는데 밤 10시쯤 보급계 선임하사인 신석천 중사가 오더니 할 말이 있다고 한다. 퇴근한 신 중사가 늦은 이 시각에 왜 부대에 들어왔는지 의아스러웠다.
포대장의 비밀 지령(?)이 있었는데 지시를 못 받으셨냐는 투로 다소 신바람이 난 표정이다.
“곧 실시할 FTX 훈련 시 야외에서 포대장이 쓸 메트리스(깔고 자는 요)가 필요한데 그렇다고 내무반에서 사용하는 메트리스를 가지고 나갈 수 없어 대용 깔개를 만들 볏짚을 훔치러 가야겠는데요.”
그러나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말투다.
“볏짚을 사려고 해도 계절적으로 살 수 있는 시기도 아니니 별 수 없이 낮에 정찰해 둔 곳으로 훔치러 갈 수 밖에요.”
그러면서 오늘밤은 달이 없고 지금이 밤 10시로 초저녁잠이 한참 들어, 사람들이 곤히 자고 있을 때이니 좋은 시각이라며 나름대로 아는 체까지 한다.
평소 덜렁덜렁하고 가끔은 거짓말도 서슴없이 잘 하는 신 중사인데다 포대장의 아무런 지시도 없었고, 또 “훔치러 간다.”는 말이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포대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니 못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으로는 지난 가을, 창고 지붕에 쓸 짚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이 해 온 땔나무를 짚과 바꾸는 과정에서 농민들이 얼마나 배짱을 부렸는지 그 때의 내 심사가 지금까지 뒤틀려 있는지라 내색은 못하고 속으로는 “잘 해 보라.”고 하였다.
병사들이 경사가 급한 부대 뒷산에서 보름 동안이나 고생 고생해서 만든 잡목을 트럭에 가득 싣고 가서 볏짚과 교환하자고 하면, “우리는 이런 잡목보다 짚을 연료로 사용하는 편이 재를 사용할 수 있어 훨씬 좋다.”며 배짱을 부리던 농민들의 얄밉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나무하느라고 계속된 보름간의 중노동에,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행정반 유 일병은 코피까지 쏟았고 코피가 그치지 않아 결국에는 야전 병원으로 후송까지 시키지 않았던가.
후송된 유 일병은 그 뒤 돌아오지 않았으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농민들의 내심은 바꾸는 비율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신 중사 보고 마음에 드는 병사 10명을 뽑아 데려 가라고 하였다. 이른바 특공대를 조직해 준 것이다.
보내기는 하였으나 만에 하나 잘 못되면 나는 시체 말로 작살이 나는 터이라 마음을 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포대장이야 당연히 “지시한 일이 없다.”고 발뺌할 것이 뻔하고 신 중사 역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눈치를 보아 가며 상황이 유리한 쪽으로 말할 위인이니 나만 완전히 사면초가의 바보가 되고 말 것이다. 잘못되면 군법회의에 회부될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니 앞뒤를 재지 않고 공연히 호기를 부린 것 같아 후회스러워졌다. 그러나 기왕에 벌어진 일인데 별일 없기만을 바랄 수밖에는····.
“이미 엎지러진 물, 에라 모르겠다. 모든 것이 운명이다.”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다행히 12시쯤 모두 무사히 특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내일 아침, 잃어버린 집에서는 난리가 나겠지.
엉뚱한 신 중사는 볏짚 외에 닭도 두 마리 가져 왔다. 특별 지시에는 그것도 부가적으로 있었다 나.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녀 온 병사들은 철도 없이 한결 같이 입을 모아 무용담처럼 떠들어댄다.
“지난번 유격 훈련장에서 실시한 <담력 훈련>은 어린애 장난 같았다. 오늘밤의 임무 수행이야말로 최고 수준의 <담력 훈련>이었다.”
D. 결혼 신고
최 소위가 퇴근하면서 저녁 8시쯤 자기 숙소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영문을 몰라 했더니 무작정 나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치를 보니 술 한 잔 나누자는 것 같다. 낮에 당번병 보고 숙소에 나가서 무엇인가 준비하라고 시키는 낌새가 있었기에····.
저녁을 먹고 B.O.Q. 에 앉아 있노라니 최 소위 숙소에서 전화가 왔다. 곧 나오라고 한다. 숙소라고 해야 바로 부대 앞의 큰길 건너편에 있는 초가집 몇 채 중의 하나다.
이 큰길에서 우리 포대의 보초가 있는 정문까지는 약 200m 정도의 오르막길이 가운데 화단을 경계로 오는 길과 가는 길로 구분된 넓은 길이 곧게 뻗어 있는데 큰 길에서 바라보면 길 끝에 있는 부대 정문만 보이고 안쪽은 보이지 않아 굉장히 큰 부대로 느껴진다.
포대장의 숙소도 바로 부대 앞에 있는데, 아침에는 ‘포차’라고 하여 ‘대포’를 끌고 다니는 G.M.C. 트럭을 숙소로 나오라고 해서 그것을 타고 출근한다.
숙소에서 부대 막사까지 가려면 정문 입구까지의 경사진 길을 200m 쯤 걸어 올라가 정문 초소를 거쳐 연병장도 지나야 하기 때문에 걸어서 출근하기에 다소 귀찮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큰길에서부터 2단 기어를 넣고 검은 연기를 품으며 올라가는 G.M.C. 트럭의 요란한 엔진 소리와, 정문을 통과할 때 보초병이 ‘앞에총’을 하며 엔진 소리보다 더 크게 “충성!” 하고 외치는 고함 소리가 포대장의 아침 기분을 으쓱하게 해주는 바람에 G.M.C. 트럭이지만 타고 출근하는 것이 더 큰 이유가 될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와 김낙원 소위는 목소리가 큰 병사를 정문 보초병으로 배치하였다.
우리는 포병 부대라 차량도 많고 포대장이 탈 수 있는 찦차도 있지만 휘발유 사용을 지나칠 정도로 통제하고 있어서 휘발유를 사용하는 차량은 대대장 찦 차와 부 대대장 찦 차만 운행하고 있어 대대 참모들도 찦 차를 타지 못했다.
최 소위 숙소에 나가보니 선임하사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조촐한 술상이 들어 왔다.
최 소위 애인(?)이 포대장에게 큰 절을 올렸다.
말하자면 약식 결혼 신고라고나 할까? 애인이라는 여자가 면회를 와서 최 소위와 며칠 같이 지내더니 집에 다녀와 본격적으로 살림을 시작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최 소위 입장에서 보면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결혼 생활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것이다. 자기 말로는 더 있다가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것이었지만, 청춘 남녀가 짝을 이루는 일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격식이 필요한 모양이다.
약혼식도 결혼식도 안한 최 소위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고 자기 부인(?)을 간접적으로나마 소개시키는 것을 보면····.
E. 보초 근무
Alpha 포대에서 주번 사관 근무할 때였다.
보초 근무를 하러 가는 병사에게 근무 교대할 초소 위치를 알려주고 휴대할 실탄을 지급하고 회수하는 일은 통상 주번 하사관이 한다.
처음에는 우리 부대에서도 인근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주간 보초가 되었건 야간 보초가 되었건 보초 근무자에게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다. 보초가 그저 빈총만 들고 서 있는 것이다.
아무리 최전방은 아니라 해도, 언제 적군이 침투해 올지 모르는 전방 지역에서,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보초 근무하다가 자해 행위 하는 병사가 생길 수 있다는 핑계로 보초 근무자에게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는데 드디어 사고가 터지고 만 것이다.
인근의 어느 부대에서 야간 보초 근무 중,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하고도 총알이 없어 놓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보초가 대항 한번 못하고 살해당할 뻔했다고 한다.
그 후 보초 근무자에게 실탄을 반드시 지급하라는 상부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는데 포병은 병사의 직책에 따라 가지고 있는 총이 M1 소총과 칼빈 소총으로 나누어지므로 초소에서 근무자와 교대자 간에 서로 실탄을 인계인수하도록 하였다가는 휴대한 총에 맞지 않는 실탄을 휴대하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으므로 보초 근무하러 가는 병사에게 휴대한 총에 맞는 실탄을 지급해 주고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에게서는 실탄을 회수하였는데 이 일이 다소 번거로웠다.
실탄이라고 해도 인계인수 할 때 파악하기 쉽게, 탄창에서 실탄을 꺼내면 표가 나도록 탄창을 흰 종이로 여러 겹 감고 도장으로 봉인한 것이어서 정작 유사시에 즉각 사용하기 어렵게 되어 있어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열악한 군대 환경을 견디지 못한 병사가 보초 근무 중에 휴대한 총으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어, 지휘관들은 만에 하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괴한의 침입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휘 책임에 대한 걱정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Alpha 포대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전에 고사포 대대가 사용하던 곳인 탓으로 바운다리가 넓지만 병력은 보병으로 말하면 중대 규모보다 적기 때문에 전체를 다 사용하기에는 외곽을 경비할 보초 차출이 어려운 형편이라 관리하기에 용이한 3분의 1정도만 사용하고 있었다.
주번 사관은 보초의 근무 상황 파악을 위해 가끔 순찰을 하는데 통상 주번 하사관에게 시키기 일쑤다. 그러나 나는, 멀고 후미져서 낮에도 가기가 썩 내키지 않는 곳이지만 제일 중요한 탄약고의 야간 보초만큼은 많은 신경을 썼다. 4종 창고 앞에서 탄약고 보초를 큰 소리로 불러 보는 것이다.
탄약고는 부대 막사 뒤쪽의 높은 지역에 있어서 낮에는 잘 보이지만, 밤에는 안 보여도 대답하는 소리로 제 위치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병사가 지정된 위치에 있지 않고 탄약고 가는 길 중간에서 대답하기 일쑤였다. 보초가 있는데도 나는 거기에 가기가 싫어서 이곳에서 확인하고 있는데, 하물며 그 곳에 혼자 서 있는 병사야 오죽하랴 싶다.
지정된 위치에서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근무를 철저히 한 것 같은 박 일병이 기특하여 교대하고 내려오면 칭찬이라도 해 주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내려온 박 일병이 휴대한 실탄을 보니 가지고 있는 총은 칼빈인데 M1 실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 내가 깜박 조는 사이에 주번 하사도 보초 교대를 지휘하지 않아 저희들끼리 교대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하고 칭찬은커녕 괘씸한 생각이 들어 한 대 쥐어박아 주려는데 문득 낮의 일이 생각났다.
박 일병이 모레 휴가를 가기로 되어 있는데 이 녀석은 발이 매우 큰 편이어서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군화 중에는 발에 맞는 깨끗한 군화가 없어 장교님의 군화를 빌릴 수 없느냐는 분대장의 부탁이 있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국가 재정이 어려워 장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말이 아니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 낡고 헤어져 여기 저기 기웠고 색도 바랜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저것도 군복인가 싶었으나 훈련할 때에는 아무래도 흙 속을 뒹굴고 해야 되니까 ‘버릴 헌옷’을 입고 훈련을 하는가 보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것이 평상시 병사들이 입고 있는 <전투복>이라는 것을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영낙없는 거지꼴이었다.
정말이다.
그러나 휴가나 외출, 또 검열 같은 비상시를 대비하여 깨끗한 <전투복> 한 벌씩은 내무반 관물대 위의 벽에 모셔 놓고 있었는데 왈 <일계장 피복>이라고 하였다.
가죽으로 만든 군화와 헝겊으로 만든 작업화가 각각 한 켤레씩 지급되어야 할 신발은 군화가 모자라 작업화만 두 켤레 가지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어서 휴가나 외출을 하는 경우에는 군화 빌리는 일이 큰일이었다. 이 무렵 <통일화>라고 하여 외출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품위가 있고, 군화를 대용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작업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전방에는 아직 보급이 안 되었다.
병사들이 신고 있는 작업화는 국방색 헝겊으로 만들어진 농구화 모양이었으나 전투복과 마찬가지로 많은 병사가 낡은 것을 신고 있었다.
제대로 지급도 하지 않으면서 복장이 불량하면 군대 망신 준다고 하여 휴가는 어림도 없었으니 박 일병도 군화를 빌리지 못하면 휴가 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형편이다.
뭐가 뭔지 모를 만큼 엉망이었다.
F. 배구 시합
국군의 날이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 식사에는 특식으로 건더기도 많고 국물도 진한 쇠고기 국이 나왔고 병사들에겐 하루 종일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가끔 나오는 고기국은 병사들이 말하기를 “소가 목욕한 물.”이라고 할 정도로 멀건 국이었는데 오늘은 진짜 쇠고기 국 같다.
병사들 중에는 속칭 별을 달았다고 하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병사들까지 전방으로 보낸 탓에 이러한 병사들이 각 부대마다 몇 명씩 있어서 병사들 다루기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군 교도소에서 복역한 병사들은 그 곳에서 고생이 너무 심했는지, 날이 궂으면 삭신이 아프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그런 병사일수록 지시에 잘 순종하려는 것 같았으나 그들이 말하듯,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고 하였다.
나쁘게 말하면, 순종은 하고 있으나 언제 폭발할지 몰라 마치 시한폭탄을 데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런 병사는 통상 취사반에 배치하였으며 그 곳에서 먹고 자게 하여 다른 병사와 부딪치지 않도록 했다. 훈련은 물론, 교육과 점호에서 조차 열외로 취급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제대할 때까지 다른 병사와 말썽 안 부리고 부대 영내를 무단으로 이탈하지 않으며 병사들이 먹을 식사를 제 때에 맛있게 만들면 최상의 근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주어야 했다.
그들 자신이 노력은 하고 있으나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잘 선도해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병사가 아니더라도 <무전 전방, 유전 후방>이라고 할 정도로 전방 부대에는 시골 농촌 출신이거나 가정환경이 어려운 병사가 많았고 학력 수준도 낮았으며 심지어는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도 있었다.
따라서 공휴일 주번 근무할 때 제일 골치 아픈 것은 P.X.에서 술을 사 먹고 취하는 병사가 발생할 때였다. P.X.에서 술을 팔지 않으면 좋으련만, 여러 번 건의해도 소용없는 것으로 보아 부대장의 권한 밖인 것 같았다.
쉬는 날이라고 술이나 퍼먹고 횡설수설하는 병사가 많으면 나도 골치 아프고 저지른 일에 대해서 술이 깨고 난 후 당사자는 더 후회할 것이니 오늘은 운동 시합이나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쥐꼬리 만한 월급이지만 조금 떼어 상금도 걸었다.
과격하지 않으면서 여럿이 할 수 있는 배구 시합을 해보라고 주번 하사에게 일임하고 나는 B.O.Q. 에 들어가 책을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깜박 졸았나 보다.
시합에 열중하는지 가끔 “와- 와-” 하는 함성 소리와 응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의 내 계획은 참 좋았구나 생각하며 연병장으로 나가 보니 아차 싶었다.
“경상도 이겨라!”
“전라도 잘한다!”
병사들이 전라도와 경상도 양편으로 갈라져 응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응원 대열에 끼지 못한 몇 명은 경기도 아니면 충청도나 강원도인지 응원도 못하고 심판 뒤쪽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다.
내 표정이 일그러졌는지 “경상도 출신 병사와 전라도 출신 병사의 수가 거의 반반이어서 그렇게 편을 갈랐다.” 며 주번 하사가 눈치를 살피며 굽실거린다.
G. 만리장성
오늘로 벌써 Alpha 포대에서 대대로 부임해 온지 한 달이 된다.
병사 10여명을 데리고 부대 뒤에 있는 소총 사격장에서 하루 종일 사격만 하는 것이 요즈음의 내 일과다. 그런 일과가 벌써 보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괴한이 밤에 침입하여 피해를 입은 부대가 있으니 야간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 주간 경계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다고 한다. 특히 <탄약고>와 <유류 저장소>의 완벽한 경계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다.
전방 관측소에서 관측 장교가 밤에 자다가 목을 잘렸다는 해괴한 소문도 있고 인근의 어느 부대에서는 <탄약고>가 폭파당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나돌았다.
우리 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도 Alpha 포대처럼 부대의 바운다리가 부대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보병의 사단 본부 지역만큼 넓은데도 부대 울타리는 철조망 같은 견고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기는 하였으나 울타리가 없이 경계 표시만 된 곳도 있고 일부는 한, 두 줄의 녹 쓸은 철조망으로 된 곳도 있으나 어떤 곳은 병아리 울타리 같이 싸리나무를 엉성하게 꽂아 만든 곳도 있다.
중요한 큰 도로 쪽에 면한 울타리도 서울의 암사동 <풍납토성>울 축소한 양 야트막하게 흙으로 경계 표시만 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최전방은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경계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보초 인원을 차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초소가 많아야 했다. 철조망 보급만 원할 하다면 보초를 서야 하는 초소를 중요한 곳 몇 군데만 설치해도 될 텐데 말이다.
처음에는 부대 주변의 돌을 모아서 <탄약고>와 <유류 저장소>에만 돌담을 칠 계획이었으나 주위와 조화가 되지 않아 오히려 눈에 띄게 되어 표적이 될 수 있으니 기왕이면 부대 주변도 정리할 겸 견고하고 보기 좋게 부대 전체의 울타리를 모두 돌담으로 만들자고 한다.
돌담 높이도 가슴 높이로 정했으나 공사 도중에 계획을 변경하여 초소를 몇 군데만 세워도 될 수 있도록 아예 넘어 다니지 못하게 키 높이로 올리고 보니 담을 얼마 높이지 않는데도 작업량은 의외로 많이 늘어났다.
담이 높아지니 담 벽을 수직으로 쌓기 어려워 양쪽 담 벽이 위로 올라 갈수록 약간씩 좁아지는 경사형으로 쌓으려니까 밑 부분을 넓게 해야 함으로 들어가는 돌의 양이 많아지고 당연히 작업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대 앞 도로 건너편에 큰 냇물이 있어서 돌은 충분하였으나 계획했던 것 보다 공사 기간이 길어져 부득이 포대 구분 없이 돌을 날라 오는 팀, 담을 쌓는 팀, 보초만 서는 팀 등으로 구분하여 분업 형식으로 병력을 운용하였다.
옛날의 돌 성을 쌓는 것 같았다. 담을 다 쌓으면 문혜리에 <만리장성>이 생겼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사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졌으나 중단할 수도 없었다.
공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 부대 장병 모두가 동원되었기 때문에 교육 계획표 상의 자체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검열이 나와도 교육이야 계획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계획표와 교안만 잘 작성되어 있으면 종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사격 훈련이었다.
사격은 반드시 총을 쏜 표적지가 있어야 하고 표적지의 명중 점수로 평가했을 뿐더러 쏜 수량만큼 탄피를 반납해야 하므로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격 팀 구성이었다. 사격 팀이 모든 병사 대신 총을 쏘는 것이다. 총을 잘 쏘는 10 여명 정도의 사격 팀을 데리고 부대 뒤쪽에 있는 사격장에서 하루 종일 M1 소총, 칼빈 소총과 캐리버 30 LMG 및 캐리버 50 대공기관총 사격하는 일을 지휘하는 게 내 임무였다.
정식 사거리 사격이 아니라 단축 사거리 사격으로 하게 되어 있어 안전 관리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관총의 총열이 대부분 너무 닳아서 10 여m 앞에 표적지를 놓고 쏘는데도 총알이 옆으로 박히는 것이었다.
총을 쏘지 않고 표적지에 그냥 총알구멍을 내면 총으로 쏘았을 때와 달라 아무리 잘 뚫어도 구멍 주변이 약간씩 찢어져 표가 나는데, 총으로 쏘는데도 아예 총알이 옆으로 표적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검열관에게 무어라고 변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몇 안 되는 잘 나가는 기관총을 골라 그 총으로만 쏘려니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총을 쏘는 병사, 탄피를 수거하는 병사, 표적지에 이름을 쓰는 병사로 나누어 철저한 분업 체제를 실시하여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경제학자 누구의 말처럼 분업은 아주 효율적이었다.
사격을 잘하는 병사들이 도맡아 사격을 하니 표적지에 나타난 사격 성적도 모두 우수 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검열관이 와서 보고는 병사들의 사격 솜씨가 너무 우수하다는 평을 하며 시범을 보이게 할까 봐 은근히 걱정도 된다.
군대에서는 중간이 눈에 안 띄고 제일 좋은 데 말이다.
7. 두고 온 이불 보따리
다 읽은 일기장을 덮고 나자 지난 2 년간의 군 생활 시절에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것들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전역 신청>한 것은 너무 경솔한 행위였다는 후회와 함께 신청을 취소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계속되는 마음의 갈등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 마침내 1967년 4월 어느 날로 전역식이 닥쳐왔다.
그 날, 나라는 존재는 생각과 몸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고 나와는 상관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전역 자 대열에 서 있는 그 녀석을 또 다른 내가 단상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어서 <국발 제346호. 육군 소위 이방주. 예비역에 명함> 하는 부대장의 명령서 낭독과 그 명령서를 받는 순간 비로소 단상에 있던 나는 현실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공장의 콘베어 벨트 위에 놓인 제품이 벨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흘러가듯이, 도열하여 환송하는 부대 장병들의 터널 속을 빠져 나오는 것으로 전역식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오니 ‘제대를 한 이상 이곳은 내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 원망스러워 하는 듯한 Miss 홍의 눈망울.
- 언짢아하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표정.
- 정들었던 하숙집이라고는 하지만 왜 가벼운 작별 인사로 훌쩍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기를 아쉬워하는가?
아마도 이곳은 1년 동안 아무 걱정 없이 편안히 지낸 곳이고 앞으로 갈 곳은 부모 형제가 있는 집이지만 집안 사정은 경제적으로 엉망이고 당장 취직 문제 등 여러 가지 걱정만 산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만일 오늘 전역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일 바로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2개의 중위 계급장을 달게 될 것이다.
임관 할 때 받은 육군참모총장 표창과 군수기지사령관 표창, 화학학교 교육 과정에서 받은 화학학교 교장 표창 등의 많은 표창과 측지장교 보직 경력은 다른 사람 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므로 직업군인으로서 어느 정도 앞날이 보장되어 안정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나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며 해맑은 눈망울로 쳐다보던 ‘Miss 홍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자 방금 전역식을 마치고 왔으면서도 이곳에서 그냥 종전처럼 생활 할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당장 부대로 돌아가서 ‘전역을 취소할 수 없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역 신청을 강력히 만류하지 않은 Miss 홍이나 주인아주머니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 제대를 했으니 떠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지고 갈 것이라고는 이불 보따리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을 가지고 나올 용기도 없었거니와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이곳과의 인연이 모두 끊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머뭇거리다가,
“일단 집에 갔다가 며칠 후에 다시 올 터이니 이불 짐을 보관해 달라.” 말하고는 도망치듯 하숙집을 빠져나와 <송정리> 발 <대전> 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가 정성 드려 곱게 만들어 준 솜이불을 그대로 남겨 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