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金陵)은 경상북도중서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의 감문소국이었다. 그후 서기 660년에 와서 감문군으로 불리웠고, 757년(경덕왕 16) 개령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41년 조선 총독부령에 의하여 금천군(金泉郡)으로 바뀌었으며, 1949년 금릉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지금의 금릉으로 고쳐졌다.
금릉 김씨(金陵金氏)는 가락국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득(金武得)을 시조로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562년(신라 진흥왕 23) 대가야가 신라의 장수 이사부와 사다함에게 정복되어 신라와 병합되고, 진흥왕이 가락국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여 시조인 무득(武得)에게 시랑 겸 총관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했으므로, 그의 아들 창현(昌玄)이 본관을 금릉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고려 고종때 문하시랑평장사, 서경유수,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우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해진 김중구(金仲龜)를 1세조로 하여 계보를 이어왔다.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보문각 제학을 지낸 위(褘)와 의(儀)의 부자가 유명했고, 석보의 아들 효탁(孝鐸)은 태자 첨사(太子詹事 : 정3품 벼슬)에 올라 좌복야를 역임한 관(琯)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광귀(光貴)가 양주 목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규(規)는 성리학에 정통한 이름난 학자로 사복시정을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금릉군 어모면 덕마동에 돌아갔다가 옥천 청산의 청량산으로 이거(移居)하여 성리학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각(珏)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이등공신에 책록되고, 덕산 현감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현감 맹지(孟智)와 이조참판 철성(哲成) 부자가 뛰어났고, 원석(元錫)은 빈곤한 가세에도 부모 봉양이 지극하여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학자로 유명한 장(樟)은 김장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훈몽서지행방편]을 저술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릉 김씨(金陵金氏)는 남한에 총 985가구, 4,327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