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는 임금이 있었다. 모두 여섯 가지 가축 이름으로 관직명을 정하였는데,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였다. …… (중략) …… 이 여러 가는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렸는데, 큰 곳은 수천 집, 작은 곳은 수백 집이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이 사료는 부여의 관직명[官名]과 사출도(四出道)에 관한 내용으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대략 3세기 중반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으므로, 이 사료 또한 늦어도 3세기 중반 부여의 실상을 기록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부여는 이미 기원전 1세기부터 중국 문헌에 등장하므로, 일찍부터 국가를 형성하고 정치 체제를 발전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국가 운영의 중심에 국왕이 있었으며, 그 왕위는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부자(父子) 간에 세습되어 안정적이었다. 또한 국왕은 자신에게 충성할 수 있는 인물들을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직에 임명하여 왕권을 강화하기도 했다.
이처럼 3세기 중반 국왕은 부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강한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부여의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여러 가[諸加]의 견제와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加)는 고대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던 간(干)•간지(干支)•한(汗) 등과 그 의미가 통하는 말로, 본래 일정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정치 집단의 수장(首長)을 의미했다. 고대 여러 나라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부여도 작은 규모의 여러 정치 세력이 통합되거나 연맹을 맺음으로써 국가를 이루었다. 벼슬 이름에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 등 가(加)가 보이는 사실은 그러한 과정을 잘 말해 준다.
부여의 국가 형성에 기초가 된 여러 정치 세력은 3세기 중반에도 어느 정도 자치권(自治權)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가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였던 사실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 준다. 사출도에서 도(道)란 왕이 있는 도성(都城)에서 사방, 즉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 또는 그 주변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출도는 지방을 지배하는 데 기본이 되는 4개의 도로와 그 주변 마을을 의미하며, 대체로 도성을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 네 지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출도를 ‘별도로’ 여러 가가 다스렸다는 사실은 도성이 있는 중앙을 국왕이 직접 다스렸으며, 그 밖의 지방은 국왕이 아닌 여러 가가 통치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사료에서 여러 가(加)는 큰 곳은 수천 집[家], 작은 곳은 수백 집[家]을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이는 가(加)들 중에서도 세력 기반의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작은 곳이라도 수백 집을 다스렸다는 점에서 당시 가(加)들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3세기 중반 부여에는 국왕이 존재했고, 왕권은 여러 가보다 우위에 있었다. 왕은 대사나 대사자•사자를 뽑아, 이들과 함께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도성 밖의 사방은 사출도라 하여 여러 가가 다스리고 있었고, 이곳에서는 가들이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사료는 여러 가가 연합하여 나라를 다스리던 부여의 정치 체제가 점차 국왕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던 정치 체제로 전환되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