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2022년 8월 15일 월요일
영화: 그린북(2018), 그린랜드(2020), 스틸워터(2021)
자가격리 기간 동안에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그린북은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문제를 다룬다. 그린랜드는 혜성 충돌로 지구의 생물이 멸종하는 위기 상황을 다룬다. 스틸워터는 딸의 무죄를 밝히려는 아버지의 처절한 노력을 다룬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린북은 차별이 있는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어떤 용기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린랜드는 재난 앞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가족을 돌보고 인류를 보존하는 방법에 대하여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스틸워터는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영화다.
차별 문제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인류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데 그 공동체를 허약하게 하는 가장 큰 악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연주를 들으며 멋들어진 옷차림을 한 백인들이 그 연주자를 그렇게 홀대하다니 이것이 차별문제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다.
최근에 유명해진 소설 파친코도 재일 한국인들의 차별문제를 다룬다. 그 소설의 작가 이민진 씨도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교포로서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하기야 손흥민 같은 세계적인 축구선수도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하니 일상 속에서 차별은 지금도 현재진행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차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오랜 전통으로 굳어진 어떤 행동과 말 또는 제도가 어떤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줌에도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 전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주변에서 겪는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런 인습과 전통에 이의를 제기하여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 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소리가 아름답고 위엄을 갖춘 것이 아니면 사회를 더욱 나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천재성으로는 부족하며 거기에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절제를 갖춘 용기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 신봉자들의 차별적인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 차별은 종교적인 교리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세상에 문제를 제기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누구나 차별당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상속자요,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다가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 신앙이 언제까지든지 인류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신앙 자체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차별을 유발한다면 그런 신앙은 그 자체로 이미 사회를 이끌 빛이 아니라 공동체에 가장 짙은 어둠을 드리우게 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을 치료하는 센터가 아니라 암적(癌的)인 존재가 된다.
교회는 갈래갈래 찢어진 세상에서 선인과 악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들이다. 이 말은 교회가 제 기능을 다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고 그 길을 열어가는데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자신 안에 있는 전통과 교리가 문자를 담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을 담아내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할 것이다.
이 영화 중에서 스틸워터를 보면, 주인공 빌 베이커(맷 데이먼)는 늘 식사기도를 드리고 생활 중에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 그것은 전형적인 미국 보수기독교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사는 비르지니(카미유 코탱)는 기도를 모르는 인권운동가다. 그 둘의 뜨거운 사랑을 보면서 진실한 신앙과 인류애는 결국 본질에 있어서 서로 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그린북에서 주인공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규칙과 도덕을 준수하며 살아간다. 또 다른 주인공 백인 운전사 토니(비고 모텐슨)는 가족을 사랑하는 가난한 아버지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허풍도 적절한 수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둘은 마침내 친구가 되며 서로에게 배우며 더 온전해진다.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차별을 극복하면 어떤 선한 열매를 맺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이다.
차별의 반대말은 협력과 우정이다. 차별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차별은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인데, 서로 다름을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서로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신앙이 나아갈 길이 바로 이것이다. 즉, 우정을 쌓아가고 협력을 통해 온전해지는 법을 삶에서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
끝으로, 재난 영화 그린랜드를 보면서 신앙의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지구의 종말이 될지도 모르는 혜성 충돌이 임박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영화에서 인류는 피할 길을 찾기 위해서 그린랜드에 대피소를 설치한다. 그런데 재난 앞에서 어떤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맞을 준비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파티를 열어 인생의 마지막을 즐기며 종말을 맞이하려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인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 서로를 돕고 챙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일은 지구적인 재난 앞에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행동들이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재난이 실제로 인류에게 닥칠 때 교회는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코로나 판데믹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교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고 있다. 지금도 백신을 맞는 것을 짐승의 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종교적 탄압으로 받아들인 교회들도 있다. 그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리나 신앙관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공동체에게 어떤 해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 자가격리 기간 동안에 나는 ‘기독교 신앙의 미래’에 대하여 좀 더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1. 오늘 이 시대에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2. 복음이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경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바른 의미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가?
3. 복음은 여전히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는가? 왜 그런가? 그 이유는 타당한가?
4.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일에 집중하겠다는 말인가?
이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교제의 폭을 넓히는 일에 정진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