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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다윗 왕(삼하6:12-23)-2017.8.6
세상에 슬퍼하며 춤을 추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초상집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춤은 기쁘고 즐거워서 추고, 흥겨워서 춥니다. 춤은 기쁨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축제나 잔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춤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모습을 보며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모든 이들이 춤을 추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은 항상 춤을 추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경도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150:4).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춤추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라면 영으로 춤추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어찌 춤추지 아니하겠습니까? 날마다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춤추는 삶을 살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항상 춤을 출 만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울고 싶을 정도의 아픔과 고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이 춤을 추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마11:17).
혹시 당신도 춤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니신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신령한 춤을 말입니다. 만일 당신의 영혼이 춤을 추고 싶지 않다면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건강한 영혼은 신령한 춤을 출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춤추는 왕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은 왕의 모든 체통을 벗어버린 체 춤을 추었습니다. 춤도 그냥 춘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14절). 완전히 춤에 몰두한 것입니다. 왕의 체면이나 체통도 없었습니다. 자기 몸을 드러내며 추었습니다(20절).
다윗의 춤은 기분이나 감정에 따른 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열정을 드러내는 신앙고백이요, 거룩한 예배였습니다. 그런 다윗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입니다. 그녀는 사울의 딸이었습니다. 미갈은 춤추는 다윗 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자기 남편을 가장 잘 이해해줄 아내가 가장 큰 모멸감을 준 것입니다. 그녀는 다윗 왕을 업신여겼습니다. 심지어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윗의 아내라는 표현을 자제하고 사울의 딸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모든 일을 육신의 생각으로 접근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신령에 속한 사람들은 모든 일을 영적으로 접근하고 분별합니다. 미갈은 육신에 속한 여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춤추는 왕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내면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육신의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들의 행동을 매우 불쾌하고 거북스럽게 생각합니다. 영적인 사람들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비난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미갈은 춤추는 다윗 왕에게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혹시 당신도 춤추는 다윗왕의 모습에 거부감이 드신 적은 없으셨는지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혹시 은근히 무시하고 경멸히 여기지는 않았는지요? 그렇다면 당신 영혼이 문제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무척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형식적인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체통을 중시하고 체면문화에 길들여진 율법주의자 중의 하나일는지 모릅니다. 알렉산더 화이트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귀먹은 사람들은 언제나 춤추는 이들을 경멸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춤을 추는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 하나님 중심의 사람입니다(12절)
누구보다 다윗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하나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그에게도 한때 부끄러운 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간음죄도 지었고, 의도적으로 살인을 조장한 간사한 범죄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던 하나님 중심의 사람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요,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았던 인물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후에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법궤는 아스돗과 가드, 에그론과 벧세메스를 거쳐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계속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고 방치되고 있는 것이 무척 가슴 아팠습니다. 항상 마음에 부담감을 갖고 살아온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의 관심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오는 일입니다. 다윗은 당신의 보좌보다는 하나님의 보좌를 더욱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정권이 차츰 안정되어 갈 때 국정 최우선은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20년 동안이나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온 법궤를 모셔오기로 한 것입니다. 그가 최고의 정성을 다해 법궤를 모셔오다가 불행한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법궤를 이동하던 웃사가 현장에서 즉사한 것입니다. 그 일 후로 다윗은 자신의 선한 의지를 몰라주는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서운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간 머물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용기를 얻어 자기 성으로 법궤를 다시 모셔오기로 한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작은 궤짝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신앙 중심에는 항상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법궤를 소중히 여기면 복을 받았고, 법궤를 무시하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법궤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은 법궤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관심으로 방치한 것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의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매”(대상13:3). 때문에 사울왕의 일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다윗왕은 법궤를 정말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윗이 법궤를 이동하는 현장에서 직접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했음을 말씀합니다. 분명히 그는 흥분과 설렘으로 그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춤을 추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면 우리도 역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춤을 출 수 있는 마음이 상실된 것입니다. 사람은 기쁘고 즐거우며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어집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찬송가 85장).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당신의 보좌를 내어드렸습니다. 그는 왕복을 벗고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 베 에봇은 제사장이 직무수행을 위해 입던 소매가 없는 겉옷입니다. 물론 본문의 다윗이 입은 베 에봇은 제사장의 옷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종교의식을 위해 입었던 옷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 앞에 낮추는 겸손을 보인 것입니다. 그에게 더 이상 왕의 자존심이나 체면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때문에 천진난만하게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인간의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맑고 순수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2) 예배 중심의 사람입니다(13절)
춤을 추었다는 표현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이동하는 도중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13절). 법궤를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들이고 싶은 가장 중요한 동기는 제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법궤를 이동한 후에 더욱 활발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즉 법궤를 중심으로 하여 날마다 조석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대상16:37-43). 이는 그가 철저히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배중심의 삶을 살게 되면 영혼이 춤을 추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는 최고의 경배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고 거부하는 영혼은 절대 춤을 출 수 없습니다. 영적인 만족이나 기쁨이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무뎌진 심령을 회복하고, 무너진 영성을 회복하며 우리로 하여금 내 영혼이 춤을 추게 하는 가장 좋은 영적 행위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즐거워서 추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모습입니까?
이것이 예배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영혼이 춤을 추고 싶은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최소한 당신이 예배의 사람이라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드릴수록 좋습니다. 한번 드림보다 두 번 드림이 좋고, 두 번 드림보다는 세 번 드림이 좋습니다. 아무리 무뎌진 영혼이라도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영성이 추방당하고 신령한 영성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영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예배에 소홀하면 영성이 무너집니다.
예배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독소를 제거하고 정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예배를 드리면서 춤추고 싶은 영성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에게 예배를 통한 영성회복이 예전 같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춤을 추고 싶은 기쁨과 감격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이 부족해서 그럴 것입니다. 아마 예배를 드린다는 것보다 본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교인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웃긴 이야기를 해도 눈만 껌벅거리며 웃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강사 목사님이 “왜 이 교회 성도들은 웃지를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앞에 앉아 있던 여자 집사님이 “당회에서 허락이 떨어져야 웃지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정말 한심한 교회요, 성도들입니다. 예배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은혜 속에 젖어 춤을 추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 원하신다면 당신은 분명히 춤을 추는 예배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예배중심의 삶을 사는 자는 춤을 추는 사람입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입니다(18-22절)
다윗이 춤을 추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춘 것입니다(14, 21절). 그러므로 다윗의 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분과 감정대로 추는 싸구려 춤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령한 춤이요, 가장 성스러운 춤이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춤은 아무나 출 수 있는 춤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만이 출 수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만 추는 춤입니다. 하늘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만이 출 수 있는 춤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교회 안에 직분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신령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절대 출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고상하게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들이나 사람들의 체면을 더 의식하는 사람들, 그리고 습관적으로 타성에 젖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신령한 춤을 출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고 기쁨을 경험한 사람만이 신령한 춤을 출 것입니다.
하물며 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주인을 보면 기쁘고 즐거워서 꼬리를 치며 몸을 흔드는데,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가 감히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은혜 받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체면입니다. 체면이 밥 먹여 주냐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춤은 자기 안에 있는 기쁨의 표현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한 집에 살아도 춤추는 기쁨을 모릅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시간에 예배를 드려도 춤추는 기쁨을 모릅니다.
미갈을 보십시오. 미갈이 다윗 왕을 얼마나 무시하고 조롱합니까? 영적인 코드가 맞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은혜의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무식한 말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여인입니다(23절).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정말 멋진 고백입니다. 다윗이 비천한 여인의 소리에 흥분하지 않습니다. 창피해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격입니다.
다윗은 영적인 창이 열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미갈은 육신의 창만 열린 사람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자기중심을 하나님께 드렸고, 미갈은 형식과 체면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창이 열린 사람과 육신의 창만 열린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때문에 미갈은 다윗성으로 들어오는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을 창문을 통해 내다보다가 무식한 말로 조롱한 것입니다(16절). 미갈의 눈으로 보는 법궤는 그저 그렇고 그런 궤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 다윗의 눈에 보이는 법궤는 자기의 전 생애를 투자할 만큼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영적인 사람이요, 미갈은 육신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감히 육신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8:6). 때문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롬8:7).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롬8:8). 미갈은 스스로 고상한 척하지만 여인으로서는 가장 불행한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맙니다.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된 것입니다(삼하6:23).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이 땅의 것보다는 하늘의 신령한 것에 더 집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집중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 땅의 육신적인 삶에 집착합니다. 육신의 삶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심지어 육신의 삶에 따라 영혼이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이 파선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한마디로 천국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천국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지라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누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세상 그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른바 천국을 누리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영적인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땅의 것으로 매인 자는 춤을 출 수 없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춤추는 것은 싸구려입니다. 내 영혼을 춤추게 하는 것은 결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춤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추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령한 춤을 추려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해야 합니다. 신령한 춤은 신령한 자만이 출 수 있는 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춤을 기뻐하십니다. 신령한 자의 춤만 받으십니다. 육신으로 추는 춤은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춤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춤은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춤입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춤을 기뻐하십니다. 신령한 춤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사람이 추는 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하여 춤추는 자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 춤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춤은 하나님께 기뻐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고백이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춤을 기뻐하십니다. 고기도 먹어보아야 맛을 알듯이 은혜도 맛본 자만이 맛을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자는 춤을 출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춤을 추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매어서 율법아래 사는 신자는 춤을 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사는 자는 날마다 춤을 추며 살게 됩니다.
때문에 기왕에 믿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춤을 추며 사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다윗처럼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며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춤추는 성도가 되십시오. 물론 육신의 생명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우리가 추는 춤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춤추는 인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마음 안에서 살 때 춤추며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십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 영혼이 기쁘면 춤을 추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 춤을 추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추는 춤을 기뻐하십니다. 아니 주안에서 춤추는 자만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 마음으로 춤을 추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30편 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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