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마 5:1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오송이라, 교회를 오고 가는 길에, 미호강을 건너가게 되는데, 그 근처에만 가도,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새는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좁고 답답한 새장 속에 갇혀, 주인이 주는 먹이를 배불리 먹을 때일까요? 아니면, 풍족하게 먹이를 못먹는다 할지라도, 넓고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때, 가장 행복할까요?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때, 새들은 가장 행복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새들은 넓고 푸른 하늘을 날아다닐 때, 행복하다면, 우리는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심리학자인 어니스트 리곤은 “팔복은 예수님의 행복 이론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만 반응할 수 있다면, 진정 그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행복한 인생을 원하십니까? 팔복의 말씀대로만 산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팔복 가운데,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팔복 가운데, 네 번째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그때, “의라고 하는 것이, ‘옳다’, ‘바르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옳은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배부를 것이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에 대한 설명을 한 마디로 줄이면, “의는 예수님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갈망한다”라는 말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은 넓고 편한 길, 쉬운 길이 아닙니다. 힘든 일입니다.
행복을 누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데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당시에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마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길 때, 성도들은 “예수님만이 나의 왕이시다”라는 고백과 함께, 황제 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후에는 경기장에서, 피에 굶주린 로마인들의 오락거리로, 사나운 맹수들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에 달리거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중세 시대에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수많은 성도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은 목숨을 내놓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핍박 속에서도 행복을 누렸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그 길 자체가 행복의 길이었습니다. 행복했기에, 그 핍박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고, 즐거워했고, 행복해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만족과 영광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을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난은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하였고, 즐거워하였고,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사도 요한의 제자이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에게, “황제를 신이라고 말하고, 그에게 제사를 지내어, 목숨을 구하는 것이, 무엇 그리 해로운 일이냐?”라며, “로마 황제를 숭배하라”고, “예수님을 버리라”고 끈질기게 회유했을 때,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기며 살았으나, 그분은 한번도 나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단 말이오? 나는 예수님을 버릴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은 “예수님을 버리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면, 죽이지 않겠다.”라는 총독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초대교회의 박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초대교회 때,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목숨보다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장 중요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아주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청교도 시대의 설교자였던 토마스 왓슨은, “가짜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갈보리까지는 갈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팔복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산을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감람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예 그 산 이름을 팔복산이라고 바꿔 부르기도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감람산에서, 팔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팔복에 기록된 대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갈보리 십자가 산까지 올라가야 진짜 성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도 하고,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에게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몸의 가죽을 벗기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 예배한다”라고 소리치며,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베여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의 밧드라에서 ×자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탑에서 던져져, 돌과 곤봉에 맞았으나, 살았다가, 톱으로 켜서 죽었습니다. 유다(다대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셀롯인 시몬은 페르시아만 근처에서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쓰러진 후,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라고 말했습니다. 그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뿐 아니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단계에까지,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에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4)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성도가 박해를 받지 않고 산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행복하고, 평안하고,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당한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그들은 그 모진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믿음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자화자찬의 삶이 아니라,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만나는 고난과 희생과 헌신과 수고를 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팔복의 마지막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뽑혀, 천국의 길로 들어섰지만, 천국의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쉬운 길을 택했지만, 그 길은 믿음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마”라는 사람을 가리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을 했던 데마도 처음엔, 천국의 길로 들어섰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중도에 포기하고, 천국의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천국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천국을 향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영원토록, 천국의 행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의 길에 들어섰지만, 중도에 포기한다면, 천국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의 참된 행복을 누리려면, 고난도 참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고, 때로는 희생하고, 헌신하고, 수고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난들은 대부분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내 고집대로 살다가 만나는 것들입니다. 내 이익을 얻기 위해서, 불의한 일을 하다가, 만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만약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벧전 4:15)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실수해서, 받는 고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 고난은 받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기를 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니, 그 사람이 “주님도 고난을 받으셨다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자기가 받고 있는 고통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조건 고난을 받는다고, 다 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믿는 그 순간부터,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핍박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복음 사역을 위해서라면, 교회를 위해서라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박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당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욕먹고,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모함을 당하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맞추고, 자기 편할 대로 믿으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기에 맞추고, 자기 편할 대로 믿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 앞에서, 믿음 생활은 불합격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고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요,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내 뜻은 버리고, 내 고집과 내 주장은 과감하게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감당하면, 반드시 주님의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이 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왕에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이런 최고의 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복은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결단하고,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우리 앞을 막는다 할지라도, 태산같은 장애물이 우리 앞에 있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 믿음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때로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고, 고난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 앞에 서는 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어떤 고난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믿음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해놓으신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하루하루가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옵소서.
어떤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새 힘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