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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7:1~24, 먼저와 나중의 우선순위 2. 2023. 9. 10.
지난주에 이어 같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시대의 소망을 가지고 민족의 아픔을 대신한 지도자가 엘리아입니다. 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이고 지도자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850:1의 싸움에서 영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죽었던 사르밧의 홀로 사는 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했습니다. 자연적인 세상의 질서를 바꾸어 놓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능력의 엘리야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직접 개입을 했고 강요를 했습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아합 왕의 치세 중이었기 때문에 나라는 죄악으로 물들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신음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먹는 문제로 문제제기를 했고 그 것을 엘리야에게 직접 강요를 했으며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현재의 장소를 떠나 그릿 시냇가로 가서 거기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요하고 개입하는 말씀을 수행하는 것은 엘리야의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아는 이 말 한 마디에 무너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리 시냇가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미물 까마귀한테 물과 음식을 공급받으라는 것은 참을 수 없고 무너지지 않고 견디어 내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시돈의 사르밧이라는 마을로 가서 홀로 사는 여인한테 도움을 받고 그 여인으로부터 얻어먹으라고 합니다. 참으로 굴욕적입니다.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해 먹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만 라는 여인한테, 죽음이 예비 되어 있는 소망 없는 불쌍한 여인에게 구걸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자존심이 조금만 있다면, 상식을 알고 있다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순종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고, 강요하고 개입하시는 내용이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강요하시고 말씀하신 내용 때문에, 세상이 가져다주는 상식과 기준에도 맞지 않았고, 우선과 나중이라는 우선순위에도 맞지 않았지만 엘리아는 무너지지 않았고 그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나요? 언제 어디서나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또 하나있는데 그 것이 탈무드입니다. 그 탈무드의 내용 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규범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탈무드의 마음과 탈무드의 귀가 있고, 탈무드의 눈과 탈무드의 입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행동이고 삶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탈무드의 마음에 보면 본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고, 강요해서도 안 되며, 무엇보다도 이런 일들에 대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 경험해 보지 않고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상대가 요구를 하고 부탁을 하면 그 것이 힘이 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주어진 자신의 삶과 함께 터인의 요구까지 열정과 신실함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은 다른 사람의 일과 삶을 간섭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요구받은 현실을 위하여 열심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일과 삶을 간섭하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것이 탈무드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는 서로 상반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 것은 본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강요받은 일이라도 그 것을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그 것을 하게 될 지, 아니면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강요받은 일과 주어진 일을 행동에 옮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요하지 말라고 했으면 강요받은 것은 안 해도 되잖아요? 그래야 맞지요. 그런데 강요는 하지 말고 강요받은 것은 하라고 합니다. 이 것이 탈무드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탈무드의 귀는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요구해서 무엇인가를 감당해야 할 때에 요구의 전부를 감당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가장 귀중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탈무드의 귀에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요구한 그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세상에서 필요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상태에서도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중요한 부분일수록 자제심을 잃어버린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감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감사를 바라지 않는 행동이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탈무드의 귀에서 말씀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코로나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 때문에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걱정이 되고 무섭지만 그래서 최악의 상황이지만 소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탈무드의 귀입니다. 여러분, 오늘 탈무드의 눈과 입은 말씀을 안 드렸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중요합니다. 보고 듣고 그리고 머리에서 종합하여 종합한 내용을 마음에 전달을 합니다. 또 마음에 전달된 내용을 가지고 행동을 하고 실천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가 된 상태에서 행동과 실천으로 드러난 사람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합니다. 무엇입니까? 나의 것은 내 것이고, 너의 것은 네 것이라는 일반적인 유형이 있고, 나의 것은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은 내 것이라는 별난 유형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너의 것도 네 것이라는 정의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것은 나의 것이고, 너의 것도 내 것이라는 나쁜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탈무드에 의하면 강요하면 아니 됩니다. 그런데 강요하는 내용이 무너지기 쉬운 내용일 때가 있습니다. 강요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강요를 하고 개입을 했습니다. 참으로 곤욕스럽고 구차하고 스스로 무너지기 쉬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엘리아의 모습이 인간의 유형으로 보면 일반적인 유형도 아니고 별난 유형도 아니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도 아니고 탈무드에서 웃기는 사람으로, 나쁜 사람으로 평가 받는, 내 것도 나의 것이고 너의 것도 내 것이라는 사람의 위치에 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별난 유형이나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순종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넘어지기 쉬운 강요와 개입인데도 엘리아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 나쁜 강요와 개입을 받아들이고 무너지기 쉬운 내용을 실천합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탈무드의 눈과 귀와 입과 마음과 입을 모를까요? 다 압니다. 히브리 민족이고 유대인이기 때문에 말씀과 함께 다 숙지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탈무드의 내용에 어긋나는 내용임에도 하나도 걸려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강요와 개입을 탈무드의 마음의 내용으로 실천을 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엘리야가 됩니다. 그러면 엘리야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방의 땅, 시돈지방의 사르밧에 사는 여인과 까마귀도 먼저 나중의 우선순위를 적용하지 않고, 탈무드의 내용에도 어긋나며, 평상시의 하나님의 말씀에도 맞지 않지만, 그래서 넘어지기 쉬운 강요와 개입인데도, 그 시각과 그 사건과 관계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때에 실천을 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명하시고 개입하셨나요?
1. 하나님의 2가지 명령입니다. 그 명하여의 내용은 말 한마디에 넘어지기 쉬운 표현이고 강요입니다. 이미 엘리야에게 한 내용을 이제 까마귀와 사르밧 여인에게 명했습니다. 4절.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동물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는 것이 또 하나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9절,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홀로 사는 여인에게 건장한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게 한다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는 까마귀에게 그리고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홀로 사는 여인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까마귀에게 강요를 하고 사르밧에 홀로 사는 여인에게 강요를 했습니다. 명령이지요.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1-1. 까마귀라는 짐승에게 사람이 먹고 마실 음식을 엘리아에게 날라다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실 물이 흐르는 그릿 시냇가입니다. 그릿 시냇가의 물이 마르고 음식이 없는 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까마귀도 먹고 마실 것이 없습니다. 이유는 아합 왕과 이세벨의 우상을 섬기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횡포 때문에 엘리아가 3년 반 가뭄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국에 마실 물과 양식이 될 만할 그 무엇이 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하나님은 까마귀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그 내용이 거절 할 수 있고 아니 종물이 순종할 내용이 아닌 무너지기 쉬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까마귀는 어떤 짐승입니까? 성경에서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먼저 부정하고 가증한 흉한 새입니다.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즐겨 먹는 잡식성 새로서 레11;13-15에서는 부정하고 가증한 새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식용이 되지 않습니다. 사34;11절에는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고 하여 황무하여 저주받은 땅을 까마귀가 거하는 땅으로 언급을 했는데 썩은 시체가 많은 땅입니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까마귀가 시신을 뜯어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깊이 묻었습니다. 까마귀는 검은 몸 색깔과 거친 음성으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을 알린다고 했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창파(滄波)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는 욕심의 상징입니다. 그 부리에 물고 있는 것은 절대로 다른 동물에게 주지 않고 빼앗기지 않습니다. 까마귀는 단거리를 나는 힘은 좋은데 먼 여행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까마귀에게 명령을 합니다. 개입하고 강요를 하는데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왕상17;5-6,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시간을 정확하게 지킵니다. 순종할 수 없는 미물도 순종을 합니다.
까마귀는 새 중에 효성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어릴 때 자기 어미가 먹을 것을 자기 입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부모 새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다가 부모 새가 병들면 먹을 것을 부모 새에게 먹여줍니다. 그 새끼에게 효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어미 새가 새끼 새 앞에서 온몸을 떨며 일 죽을 때까지 얻어먹습니다. 까마귀가 나무 가지에 앉을 때, 새끼 까마귀는 어미 까마귀가 앉은 윗가지에 앉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잠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사람하고도 감사를 잘해요.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을 때에 물이 감한 줄 알고 노아가 40일을 지나서 까마귀를 먼저 내어 보냈습니다. 창8:6~7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 하였더라. 눅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여러분,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에 넘어지지 않고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욕심의 상징입니다. 자기의 것을 지키는 새입니다. 그럼에도 넘어지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를 위하여 3년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물이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까마귀 검다하여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 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이 희고 속이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백로인 척하는데 속은 까마귀라는 말씀입니다. 요13;38,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나를 따라올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당당하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자신 말대로 베드로가 순교를 했지만, 그 이전에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2번은 부인을 하며 세 번째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동물인 닭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로 그때에 꼬끼요 합니다. 그래서 말 못하는 동물이 사람과 비교 될 때가 있습니다. 이 것이 까마귀에게 명하신 내용입니다.
1-2.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홀로 사는 여인에게 한 명령입니다. 내용은 먹을 것을 엘리야에게 주라고 합니다. 9절,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지역으로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시돈 지역에서 온 이세벨로 인하여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이세벨은 시돈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과 바알 신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막강한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사르밧의 홀로 사는 여인에게 하나님께서 강요하고 개입을 하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거절하기 좋고 무너지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인의 상황은 지금 어떻습니까?
첫째는 시돈이라는 이방 땅입니다. 그리고 현재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사르밧은 시돈에 속했습니다. 지중해의 연안이고 너무나 좋은 환경입니다. 지금 이세벨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신이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가요? 괜히 내가 믿는 사람과 신이 우월해지지요? 이런 여인에게 하나님은 강요를 하고 개입을 했습니다. 그 것도 내용이 너무나 황당합니다. 같은 고향도 아니고 민족도 다릅니다. 그래서 넘어지기 쉬운 부탁입니다. 들어 줄 수가 없지요.
그리고 홀로 사는 여인입니다. 아들 한명을 두고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이런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오늘 본문에 엘리야와 사르밧 홀로 사는 여인과 이스라엘백성들과 그 환경인 그릿 시냇가와 시돈 땅은 양으로나 질로나 모두 함량미달입니다. 사람이나 환경이나 그 모두가 부족함과 모자람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상황의 내용입니까? 수 년 동안 혜택이 없고, 그릿 시냇가에 숨고, 땅에 비가내리지 않고, 돈줄이 마르고, 그래서 나뭇가지만 줍고, 손 안에 떡 한 조각, 가루 한 움 큼, 병에 기름 조금, 그 후에 죽으리라, 조금도 빛이 보이지 않고, 어두움이 도처에 깔린 이런 상황 아닙니까? 과부 역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 홀로 사는 여인은 삶의 자원이 없는 사람이라고 사회가 규정했습니다. 자기 목숨 하나도 부지하기 힘든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 하나님은 강요를 하고 개입을 합니다. 그 것도 내용이 너무나 황당합니다. 일반 상식이 아니고 넘어지기 쉬운 내용입니다. 탈무드의 귀와 입과 마음과 탈무드의 눈의 내용과 다릅니다. 홀로 사는 여인입니다.
외아들을 기대하며 장래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수 년 동안 혜택이 없고, 그릿 시내가 보이지 않고, 비가내리지 않고, 돈줄이 마르고, 그래서 나뭇가지만 줍고, 손 안에 떡 한 조각, 가루 한 움 큼, 병에 기름 조금, 그 후에 죽으리라고 결심한 여인입니다. 이런 상황의 여인에게 엘리야를 위하여 현재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남은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정을 해도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중해의 연안이지만 시돈 지역도 가뭄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함께 먹은 후에 죽을 것을 생각하며 나뭇가지를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음식을 아끼고 아끼면서 비가 오기를 기다렸고 언제쯤 푸짐하게 먹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나마 남은 소망마저도 사라지고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손에 떡 한 조각을 엘리야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기 처지를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드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무엇인가를 해 줄 때는 전부를 해 주는 것이 가장 귀중한데 무엇이든지 세상에서 필요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데,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상태에서도,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함께 먹은 후에 죽을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되는데, 중요한 부분일수록 자제심을 잃어버린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게 되는데 그래서 사르밧 홀로 사는 여인은 자신의 밀가루와 기름을 사용하여 자신이 떡을 만들어 배고픈 아들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밀가루와 그 기름은 사르밧 과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하여 주라는 것이 사르밧 홀로 사는 여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이고 개입이고 강요이었는데도 넘어지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았고 거절하지 않았고,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2. 그러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어떤 랍비가 자기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평범한 일 가운데서도 쉽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선생님, 그렇다면 진리는 저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입니까? 랍비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또 그러면 선생님, 왜 세상 사람들은 그 흔한 진리를 쉽게 터득하지 못합니까? 그 때 랍비는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야.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얼마든지 진리를 쉽게 주울 수가 있을 텐데, 마음이 허락하지 않고 뻣뻣해서 허리를 굽히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터득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무너지기 쉽고 받아들이기 너무나 어렵고, 이치에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과 자녀이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왜 나쁜 길로 인도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없고 지혜가 부족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인내하면 하나님이 뜻하시는 선하신 뜻을 밝히 깨달아 알게 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곤경을 속히 돌이키시고, 이전보다도 더 갑절과 놀라움의 복을 허락하십니다. 왜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꺾고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입니까? 기도는 내 마음에 품은 소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되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고 은혜이고 복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인도해 주시는 길과 방법이, 괴롭고 원망이 되더라도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삼상26:25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반드시 큰일을 행하고 반드시 승리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1. 서두르지 않고 지치지 않고 주어진 말씀 앞에서 전진 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여러분, 자기 효능 감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홀로 사는 여인은 죽는 것이 자기 효능감입니다. 왜요? 나뭇가지만 줍고, 손 안에 떡 한 조각과 가루 한 움 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기 때문입니다. 출신의 끈이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저만치 있고, 자신은 삶은 이방 땅, 시돈입니다. 비가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 됩니다. 그래서 내 것은 내가 챙기는 것이 자기 효능감입니다. 그러면 까마귀의 자기 효능감은 무엇일까요? 까마귀의 손과 발에 채인 것은 안 놓습니다. 줄지도 모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 것이 까마귀의 대명사입니다. 까마귀가 다른 동물에게 자기의 것을 갖다 주거나 던져 준 것 보셨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을 듣고, 죽음의 목전에서 마지막 소망의 여인이 하나님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음이 허락을 하고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서두르지 않았고, 어떤 요구와 개입에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말씀 앞에서 허락하고 굽히고 숙여서 전진을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생각입니다. 그랬더니 엘리야와 함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이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 효능감입니다. 그러면 이 신앙의 효능감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가지고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함으로 발생 되어진 문제를 극복하고 이겨내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복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곤경에서 속히 돌이켜 주시고, 이전보다도 놀라운 상황과 은혜와 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확실히 떠오르는 라이징 사르밧 홀로 사는 여인이 되며, 확실히 떠오르는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가 되고, 확실히 떠오르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확실히 떠오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신의 효능감 때문에 무너질까봐 거절하시고, 순종하지 못하십니까? 엘리야처럼, 사르밧의 홀로 사는 여인처럼 확실히 떠오르는 여러분이 되시고 비전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기적은 어디서 시작이 되는가? 없음과 부족과 모자람에서 시작이 됩니다. 물론 신앙의 효능감을 up시키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에서 시작이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무너질 수 있는 말 한마디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엘리야를 사랑하고 이 방 땅 사르밧의 홀로 사는 여인을 사랑하고 그 여인의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르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험난한 기슭을 모르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깊은 눈물의 샘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55;8,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차이를 하늘과 땅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묘한 섭리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다르지만 우리의 인생에 이르는 과정과 신앙생활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사회생활과 사업과 나의 내일과 미래도 예외가 아닙니다. 섭리가 무엇입니까? 믿음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놓으신 것이 섭리입니다. 사르밧 홀로 사는 여인에게 수긍하기 어렵고 무너지기 쉬운 말씀이었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엘리야를 사랑하고 이 방 땅 사르밧의 홀로 사는 여인을 사랑하고 그 여인의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르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험난한 기슭을 모르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깊은 눈물의 샘을 모르기 때문에 무너지기 쉬운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자람과 부족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모자람과 부족함을 뛰어넘어 더 풍성한 열매가 되었고, 30, 60, 100배로 채워지고, 하나에 천배와 둘의 만 배로 거두게 하시는 신명기의 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늘이 있어 감사함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소망가운데 내일과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꼭 슬프고 상처를 받는 일만이 아닙니다. 왜요? 없이 살지 않았다면 이런 맘을 씻어주는 복과 은혜를 모르하지요? 모자라고, 없고, 죽을 것 같은 상황이 오히려 복이 되었고, 쓰실 만한 그릇으로 만들어 졌고, 섭리가운데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엘리야와 사르밧 홀로 사는 여인과 이스라엘백성들과 그 환경인 그릿 시냇가와 시돈 땅은 양으로나 질로나 모두 함량미달이었습니다. 사람이나 환경이나 그 모두가 부족함과 모자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전체를 통하서 왜 모자람이 은혜이고 왜 축복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앞으로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악한 아합과 이세벨을 상대로 싸워야 하고, 갈멜 산에서 이방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야 돼요. 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을 돌려놓아야 한다면 그 강력한 믿음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아니면 길이 없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산이 많다면, 명문가 출신이라면, 지혜가 사람 중에 뛰어나다면 엘리야는 무엇을 먼저 사용할까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사용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사르밧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살 것 넉넉하고 근심 걱정이 없어보세요. 통에 가루가 넘쳐나고 병마다 기름이 꽉 차 있고 이세벨이 가까이 있어 보세요. 비가 내리고 풍년이 들어 보세요. 아들이 든든하고 모든 조건들이 다 넘쳐보세요. 그러면 아들을 사용하고 통에 가루를 사용하고 병에 기름을 사용하고 이세벨의 출신을 들먹거리게 됩니다.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더구나 이방 여인인데요. 아무리 간청을 하고 은혜와 복이라고 설명을 하더라도 시작을 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나도 엘리야에게 간청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죽은 아들을 엘리야의 품에 맡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자라십니까? 앞날이 걱정되십니까? 위기의 상황과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여러분의 어두운 골짜기와 험난한 기슭과 깊은 눈물의 샘을 제거하시는 무너지기 쉬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탈무드의 귀처럼 하나님께서도 무엇인가를 도와 줄 때는 전부를 공급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고 약속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개입하실 때에 사랑이라는 큰 틀에서 무너지지 않는 그래서 기적을 만들고 역사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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