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永生)’, ‘영생불멸(永生不滅)’, ‘영생불사(永生不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은 ‘영생(永生)’을 ‘예수를 믿고 그 가르침을 행함으로써
천국에 회생하여 영원토록 삶’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 풀이에 참으로 묘한 맛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영생(永生)’이라는 건 기독교의 한 이론체계일 뿐
보편적 사실은 아니라는 뜻이 은근하게 담겨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관한 갖가지 설화가 우리 전통사회에서도 없지 않음,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희구(希求)라는 말인데
최근에 이르러 이 영생이 누구나 꿈꾸는 것은 아니라는 데까지는
인간의 인식이 성숙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영생을 믿는다’는 말을 아주 쉽게 하곤 하는데
이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
때로 ‘영생을 믿는다’는 말보다는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
훨씬 정직할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일,
영생에 대해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어디서 언제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헤아려야 하고
또한 이 말이 단순히 시간만을 말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며
물리학적으로 볼 때 세상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시간도 없었다는 말도 살피고
인식론적 자리에서 지금 여기에서 전체를 볼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한지,
더구나 인간의 개념 안에는
실재가 아닌 것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이 개념을 파악하는 조건임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볼 때 ‘영생(永生)’이라는 말이 얼마나 신중하게 해야 하는 말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감히 누구에게 영생을 묻거나 말하지 못합니다.
다만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었으면
내일은 또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랄 뿐,
오늘 영생이라는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게와
역시 그 정도의 깊이를 가진 낱말 앞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기쁨과 즐거움, 괴로움과 슬픔을 포함한 애환,
그리고 거기서 나온 희구를 살피며
옛 사람들의 어렵고 힘들었던 삶을 쓰다듬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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