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주
1)롤로 메이(Rollo May), 「사랑과 의지」(Love and Will, New York:Dell Publishing, 1969, 1974), pp. 105, 106. 이밖에 에른스트 베커(Ernst Becker), 「죽음을 부인함」(The Denial of Death, New York:The Free Press 1973)도 보라. 미국의 해학가 마크 트웨인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적 뿌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을 조소하였다. 그가 웃음거리로 만든 첫번째 사실은, 천국에는 "모든 개별적 인간들과 그 동종(同種)들 그리고 우리들 마음 속의 첫째 가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황홀경"(「지상으로부터의 편지들」 p. 15)인 성교(性交)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2)맥다넬과 랭, 「천국:한 역사」 pp. 25, 26.
3)래드, 「미래의 임재」 pp. 87-100. 311-317.
4)후크마, 「성경과 미래」 p. 252.
5)비에텐하르트(H. Bietenhard), "천사", 「신(新)국제 신약신학 사전」 vol.l:103. 자녀를 낳지 않는 천국에서의 성적(性的) 활동에 관한 견해에 대해서는 맥다넬과 랭, 「천국:한역사」 pp. 111-144, 181-275에 실린 르네상스 시대의 입장, 밀턴(Milton), 스웨덴버그, 윌리엄 블레이크,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등에게서 채록한 기사를 보라.
6)엘머 플라크(Elmer T. Clark), 「미국의 군소 종파들」(The Small Sects in America, New York:Abmgdon Press, 1965), p. 145. 나아디 리더 켐피언(Nardi Reeder Campion), 「말씀이신 앤」(Ann the Word, Boston:Little and Brown, 1976), p. 18.
7)켐피언, pp. 18, 31, 59. 그녀는 아담과 하와가 성교를 하는 환상을 보았고 그 후 그들이 동산에서 추방당했다고 간증했다(앞의 책, p. 29).
8)「뉴욕 타임즈」지, 1980년 10월 12일자, p. 12 카톨릭 신학자들은 특히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 근거하여 순결과 금욕을 평가한다. 엘레인 페이겔즈(Elaine Pagels)는 「아담, 하와 그리고 뱀」(Adam, Eve, and the Serpent, New York:Random House, 1988)에서 원죄의 기원에 관해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은 해석을 하면서, 선천적인 죄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은 바울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어거스틴이 성적인 충동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는 견해까지 내놓는다(pp. 98-126). 어거스틴이 바울 서신에서 인간 의지의 도덕적 무기력을 읽어 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신약성경 전체의 증거로 볼 때 결코 지진될 수 없는 입장인데, 왜냐하면 선천적 죄에 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과 요한일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등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9)고든 피(Gordon D. Fee), 「고린도전서」(Grand Raplds: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7), p. 254.
10)앞의 책, p. 256.
11)제임스 던(James G. Dunn), 「예수와 성령:신약성경에 반영된 예수님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체험과 성령 은사 체험에 관한 연구」(Jesus and the Spirit: A Study of the Religious and Chansmatic Erperience of Jesus and the First Christians as Re-flected in the Nea Testament, Philadelphia:The Westminster Press. 1975), pp.121, 122. 조셉 피츠마이어, 「누가복음 ⅩⅩⅩⅣ(Garden City, NY:Doubleday & Co., Inc., 1985), vol. 28A:1577.
12)하워드 마샬(Howard Marshall), 「누가복음」(Grand Raplds: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8), p. 903. 존 웬함(John Wenham), 「부활 수수께끼 : 부활 기사들은 상충되는가?」(Enster Enigmn:Are the Resurrection Accounts in Conflict?, Grand Rapids:Academia Books, 1984), pp. 106, 107.
13)로버트 건드리, 「성경신학에서의 몸 : 바울의 인간학을 강조함」(S ma in Biblical Theology:With Emphasis on Pauline Anthropology,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lty Press. 1976), pp. 89, 90.
14)토마스 토런스, 「공간 시간, 그리고 부활」 p. 136. 토런스는 그의 스승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좇고 있다. "부활에서 제외되는 것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본질을 거스르는 것'(violation of nature)이다"(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 Ⅲ/ 2, 1960, p. 296).
15)엘레노어 매커비(Eleanor E. Maccoby), 칼 재클린(Carl N. Jacklin), 「성 차이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Sex Differences. Stanford, CA:Stanford University Press. 1974). 이 책은 에드워드 파워즈(Edward Powers)편, 「인간의 성서론적 연구」(Hum-an Sexuality:A Preliminary Study, New York:The Pilgrim Press, 1977), pp. 122-126에 요약되어 있다. 「인간의 성」이 내리고 있는 몇 가지 윤리적 결론들에 대한 흥미로운 반론은 마틴 더피(Martin Duffy)편, 「성 윤리의 쟁점들」(Issues in Serual Ethics, United Church People for Biblical Witness, Souderton, Penna, 1979)에서 찾아볼수 있다. 남성들이 암암리에 응낙하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는 다음 진술을 한번 생각해 보라.
"남성들은 정치 경제적 힘을 독점하는 한편 그 주변에 존경과 고상함이라는 공들여 만든 예전(經典)들을 둘러침으로써 여성들에 대한 지배를 더욱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더 연약한 성(여성)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이런 싫증나면서도 유익한 허구(虛構)가 얄팍한 물리적 강제력을 통하여 여성을 착취하는 그들의 능력을 그나마 제한하고 있다"[크리스토퍼 래쉬(Chnstopher Lasch), 「나르시시즘의 문화」(The Culture of Narcissism, New York:W. W. Norton, 1979, p. 189].
남성 심리 이해에 관한 책으로서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 「그 남자」(He, San Francisco:Harper & Row, 1974, 1986)를 보라.
16)부활한 자에게 성별(性別)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교부들은 다음과 같다.
저스틴(Justin:100-165), 「부활에 관하여」(On the Resurrection), 제 3장.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 「문집」(The Missellanies), 6/ 6. 히폴리투스(Hlppolytus:170-236), 「부활 강론의 단편들」(Fragments from Discoutse on Resurrection), 제롬(Jerome:341-420), 「서한집」(Letters), 108, par. 23. 한때 오리겐의 보조자였고 후에 리키아의 감독이 된 올림푸스의 메소디우스(Methodius of Olympus: 311년에 사망)의 「부활 강론」(Discourse on Resurrectia). 루피누스 티라니우스(Rufnus Tyrannius:345-410), 「변증학」(Apolosr in Defense of Himself) 1/8. 웨일즈의 램페터에 있는 세인트 데이비스 대학교의 신학과 교수인 폴 베드햄(Paul Badham)은 "성별이 없는 부활 세상은 재창조될 남자와 여자가 신체적으로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남자와 여자와 동일하리라고 하는 믿음과 양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기독교의 신앙」(Christian Beliefs about Life after Death New York:Barnes & Noble.1976), p. 821.
17)도널드 블로쉬, 「성경은 성 차별주의자인가?」(Is the Bible Sexist?, Westchester, IL:Crossway Books, 1982), p. 35.
18)도널드 블로쉬, 「복음주의 신학」(Eu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Harper & Row, 1979), vol. 2:229. 또한 그는 "우리는 특별한 애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되고, 다만 그 애정이 이제는 새로운 기반을 갖게 될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말했다(블로쉬는 지상에서의 결혼 관계의 일면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울리히 사이먼은 「기독교 전통에서의 천국」 p. 217에서 마가복음 12장 25절에 대해 이와는 반대되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마가복음 12장 25절은) 성적인 사랑을 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본질적 인간 능력과 생식에 대한 필요를 폐기할 뿐만 아니라 가족간의 유대가 잔존할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지상에서의 인간 관제는 천국으로 옮겨지지 않는 듯하다"고 말했다. 천국에서도 성적 활동이 잔존하리라고 한 신비주의자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와 성공회 교도이자 소설가인 찰스 킹슬리(1819-1875)의 견해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맥다넬과 랭, 「천국:한 역사」 pp. 234-245, 261-264).
19)홀 린세이는 "교회는 요한계시록 처음 세 장에서 열아홉 번 언급되는데 4장부터 19장까지에서는 단 한 번도 지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언급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새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p. 61). 그런데 그는 대환난 기간 동안에는 일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고 그들의 소유로 인해 죽을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이 포괄적인 주장을 철회한다(앞의 책, p. 921. 린세이가 인정한 유일한 "교회"는 조직화된 종교들의 복합체이다(앞의 책, pp. 219-224). 존 월부어드도 본질적으로 같은 입장을 취하는데, 그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린세이를 가르친 바 있다. 월부어드 역시 요한계시록 4-19장에는 교회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에클레시아」라는 특정한 단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월부어드는 문제의 그 장들에 "성도"와 "성도들"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교회가 이같은 단어들로 달리 표현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요한계시록 4장에서 묘사되기 시작한 사건들 이전에 휴거됨을 뒷받침해 준다"[존 월부어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The Reuelation of Jesus Christ), P.331고 말한다. 월부어드가 내리는 결론은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을 가치 없는 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성도들의 소망과 대조되는, 교회의 독특한 소망은 간접적으로만 암시되어 있으며, 이 소망은 4장에서 19장까지의 주요 줄거리는 아니다"(앞의 책).
이런 주장들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기각시켜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머니라는 인물로 나타나는 교회에게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또 실제로 보호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특정한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지상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나온다. 144,000명은 그리스도께 충성한 신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교회이다. 린세이는 아마 이들이 교회가 아니라 대환난 때의 성도들이라고 재치 있게 응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책략일 뿐이다. 그것은 성경 본문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성도들은 대환난을 면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의 진정한 지체의 신분을 잃게 된다. 교회는 대환난을 피하도록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 가운데서 보존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인(印)과 더불어 성도들(교회)에게는 곤경이 주어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케 된다. 조지 래드, 「종말의 일들」(The Last Things, pp. 58-72, 「복된 소망」(Blessed Hope), pp. 120-129의 "진노냐, 환난이냐"를 보라.
20)라일, 「다락방」(The Upper Room, London:Banner of Truth, 1970, 1988), p. 241.
21)아브라함 카이퍼, 「요한계시록」(Grand Raplds: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35, 1963), p. 122.
22)롤로 메이, 「사랑과 의지」 p. 113.
23)앞의 책, P. 53.
24)위르겐 몰트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San Franclsco:Harper & Row Publishers, 1977), p. 188.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동일하게 타당성을 갖는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동등성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에서의 동등성 역시 주장되고 있고 남성이나 여성이나 할 것 없이 동등하게 죄 사함받았고 둘다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25)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유일한 요점은, 현재 상태의 육신이 부패와 죽음의 표를 보여 주고 있는 만큼, 그런 상태로서는 "장차 임할 생명을 받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고든 피, 「고린도전서」 p. 799).
26)루이스가 천국에서도 성욕과 성행위가 유지될 것이라고 아주 진지하게 주장했다는 증거는 「기적들」(Miracles, New York:The Macmillan Company, 1947)이라는 제목의 책, p. 166에서 기독교를 변증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3부작으로 구성된 우주 과학소설에서 이 개념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는데, 이 작품들은 「침묵의 별을 벗어나」(Out of the Silent Pinnet), 「페레란드라」(Perelandra, 성생활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pp. 200, 201을 보라), 「그 가공할 만한 힘」(That Hideous Strength, Macmlllan, 1946)이다. 마지막 작품에 대해 제임스 패커는 "그 훌륭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가공할 정도로 조악한 작품"[「크리스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 1988년 1월 14일자]이라고 말했다[「그 가공할 만한 힘」은 사단의 하수인들인 악한 천사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N.I.C.E.(National Institute of Coordinated Ex-periments)의 회원들을 방문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이 작품의 말미에는 천사라는 지성적 존재가 어떻게 성적 특성을 보유하는가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그녀는 이 세상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것으로 생각해 왔다. 즉, 무언가 중성적이고 평등을 존중하며, 고립된 곳, 모든 불화가 사라졌고 성(性)과 의미(sense)들이 초월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라져 간 그런 곳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제 그녀에게는 불화와 대조정들이 계속 존재했다는 의혹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그녀가 본능을 거역하면서까지 혐오했던 결혼으로 그녀 스스로 진입하는 것이 만약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단순히 동물적인 삶의 흔적 또는 부족 시대의 야만주의가 아니라 거듭되어야 할 현실과의 최초의 충격스러운 대조라면... '그렇다'라고 지도자는 말했다. 탈출구는 없다. 이것이 만약 남성에 대한 순결한 거부라면 그는 이것을 허용할 것이다. 그런 영혼들은 남성을 무시하고 훨씬더 남성적인 어떤 것을 만나기 위해 계속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으며, 그것에 그들은 더 깊이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무례하게 들이닥치며, 소란스럽고, 소유욕이 강한 것(황금 사자, 수염이 있는 황소) 등 남성적인 것 자체에 분개한다. 그것은 울타리를 뚫고 들어와 마치 난장이들이 잘 정돈된 침상을 흩뜨려 놓는 것처럼 당신이 가장 소중한 것들로 꾸며 놓은 작은 왕국을 어질러 놓는다. 당신은 남성(the male)을 피할 수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성(the masculine)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만물 위에, 만물을 초월하여 있는 것은 너무나 남성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비할 때 우리는 모두 여성적일 수밖에 없다"(루이스 「그 가공할 만한 힘」pp. 315, 316).
27)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Ⅲ/ 2(1960), p. 296(앞의 책, Ⅲ. 1, pp. 184, 308, 309도 보라). 어거스틴은 성적 구별이 유지된다고, 즉 부활 때 성별이 폐지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하나님의 도성」(New York:Modern Library, 1950), 22권, 17장. pp. 839, 840] 일부 보수 신학자들은 하나님 안에 양성이 모두 다 있다고 하는 바르트의 주장에 의문을 표시한다. 고든 클라크는 로널드 내쉬 편, 「클라크의 철학」(The Philosophr of G. H. Clark. Philadelphla: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8), p. 74, "요한계시록의 원리"에서 인간 안에 성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하는 바르트의 견해를 반박한다. 또 칼 헨리는 "이 이론은 해석학적인 충실성의 면보다는 독창적인 상상이라는 면에서 더 갈채를 받을 만하다"고 했다(「하나님, 계시, 그리고 권위」 vol.2:138). 버나드 엘러(Vernard Eeller)는 「가나안 언어와 페미니즘 문법」(The Lan-guage of Canann and the Grammar of Feminam,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2, pp. 38, 39)에서 우연히 플라크와 헨리의 반론에 답변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리즈 제 1권 3과에서 언급한 「USA위켄드」 지의 여론 조사에서는 하나님을 남성으로 믿는다는 응답이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이 조사에서 의미 심장한 것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7%의 사람들이 하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고 대답했다"(「신시내티 인콰이어러」 「USA위켄드」 1986년 12월 19-21일자, P 5).
28)크리프트, 「천국에 관해 당신이 알고 싶어했던 모든 것」 p. 72. 그가 왜 바르트의 결론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칼 헨리의 비평(앞에서 언급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77페이지에서 크리프트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성적인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동물이 아닌 오직 인간만이 사랑의 시를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동물들에게도 성적 엑스터시(ecstasy)가 있음을 간과한 듯하다. 동물과 인간을 구별시키는 것은, 인간에게는 낭만적인 시구(詩句)를 생각해 내어 글로 쓸 만한 이성과 정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29)블로쉬, 「성경은 성 차별주의자인가?」 p. 66.
30)앞의 책, p. 68. 블로쉬는 pp. 25-40(인간에 관하여)과 pp. 61-83(하나님에 관하여)에서 이같이 주장한다.
31)앞의 책, p. 70.
32)앞의 책, p. 68.
33)바우어(G. Bauer), "틱 토"(tikt ), 「신국제 신약신학 사전」 vol. 1:187. 피터 툰, 「거듭남」(Born Agaitl,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7), p. 40을 보라.
31)수잔 포, 「여성과 말씀」(Women and the Word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1), pp. 152, 153. 블로쉬, 「성경은 성 차별주의자인가?」 pp. 68-70.
35)블로쉬, 「성경은 성 차별주의자인가?」 pp, 68-70.
36)"안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어근은 「야다」(yada)인데, 이는 구약성경에 총 914번 등장하며 무언가를 관측한다는 것에서부터 성교(性交)한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세기 4장 1절, 19장 8절, 민수기 31장 17, 35절, 사사기 11장 39절, 21장 11절, 열왕기상 1장 4절, 사무엘상 1장 19절 등에서 이 단어는 성관계라는 궁극적인 친밀함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이 단어에 헌신과 사랑이라는 부대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 단어가 순종, 신뢰, 경의, 섬김 등의 뜻으로 적용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에 잘 반영되어 있다[잭 루이스(Jack Lewis), 「구약성경 신학 사전」(Chlcago:Moody Press, 1980), vol.1:366. 슈미츠(E. D. Schmitz), 「신국제 신약신학 사전」 vol. 2:395-400]. 이 단어의 실험적 측면에서 중요한 점은 "안다는 행위의 주체"(knower)가 그 앎의 대상과 실제적으로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엉거(Merril F. Unper), 화이트(William White), 패커 편, 「넬슨 구약 해설 사전」(Nelson's Espository Dicticmary of the Old Testament, Nashvlle:Thomas Nelson Publishers, 1980), p. 213].
37)메이, 「사랑과 의지」p. 112.
38)크리프트, 「천국에 관해 당신이 알고 싶어했던 모든 것」 p. 72. 그는 이 점에서 C. S. 루이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루이스의 「기적들」 pp. 165, 166로 보라.
39)엘러, 「가나안 언어와 페미니즘 문법」 p. x.
40)앞의 책, p. 44. 지면상의 제약 때문에 여기서는 얼러가 최근 해석학의 히스트가 되고 있는 티슬턴(A. C. Thlselton)의 영향력 있는 글 「두 지평」(Two Horizotls)의 제안들을 어떻게 취하고 있는지 채 설명하지 못했다.
41)칼 바르트, 「슬라이엘마허의 신학」(The Theology of Schleiermachr, Grand Rapids: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8, 1982), pp. 70. 71.
42)칼 렝스토르프(Karl Rengstorf), "마타타스"(mathatas), 「신약신학 사전」 게르하르트키텔(Gerhard Kittel) 편(Grand Raplds: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7), vol. 4:434.
43)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 I:1:717.
44)워필드, 「벤자민 워필드 저술집」(The Works of Benjamin B. Warfield), vol. 8:379. 참조 pp. 374-381, 388-390, 453, 454. 이 주제에 관한 주된 자료로는 「마담 기용 자서전」(The Autobtogmphy of Modnme Guron, Moody Press, n. d.), 한나 스미스(Hannah Whitall Smith),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The Christran's Secret of a Happy Life, Fleming H. Revell, 1942)이 있다.
45)워필드, 앞의 책, 8:539.
46)리차드 러브레이스,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Dynamics of the Christian Life, Downers Grove. IL:InterVarsity Press. 1979), p. 116.
47)제임스 패커, 「늘 성령과 함께」(Keep in Step with the Spirit, Old Tappan:Revell Pub-lishing Co., 1984), p. 157.
48)조지 나이트(George Knight) 3세, 「남성과 여성의 역할 관계에 관한 신약성경의 교훈」(The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Role Relationship of Men and Women,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77). pp. 14. 20.
49)루이스, 「천년왕국의 숨겨진 면」(The Dark Side of the Millennium), pp. 63, 64. 루이스는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한 설명을 한다. 래드가 「복된 소망」에서 주장하는 말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래드는 요한계시록 19장 8절을 거룩하게 된 오늘날의 신자가 아니라 회복된 이스라엘에 속한 구약의 성도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어떤 종말론자의 해석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지적하는 내용과 상충되어 보이는 추론"이다(p. 136). 이 문제에 관한 자료들을 읽으면서 필자가 발견한 사실은, 이 신부가 이스라엘이라고 믿는 종말론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이 본문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연대기적으로 추론함으로써 지극히 잘못 해석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이 이후의 장(章)들이 연대기적으로 잇달아 전개되고 있다고 보는 래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구속받았으되 아직 부활하지 않은 자들의 사건일 것이라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보기에 요한계시록 20장 4절이 천년왕국을 장래의 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앞의 책, p. 102). 이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혼인 잔치가 예정적으로 즉 장차 있을 사건이지만 이미 진행된 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며[러셀(J. S. Rus-sell), 「파루시아」(The Parousia, Baker Book House, 1983), p. 509], 20장은 그리스도의 재림(19장) 후의 일을 시간 순서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두 차례의 강림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의 정복 양식을 삽입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50)내세에서의 성에 관해 크리프트는 "영적으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라고 성도들의 교계에 관해 그가 진술했던 말과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다(「천국에 관해 당신이 알고 싶어했던 모든 것」 p. 75).
"천국에서의 성(性)이라? 사실 이 문제는 얼굴이 창백해질 일도 아니고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성은 그저 정신적인 그림자이다. 지상에서의 성은 그림자이다"(앞의 책, p. 78). 크리프트의 진술은 플라톤주의에 너무 근접해 있어서 우리에게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 시리즈 제 3권 1과에서 이런 종류의 추론이 지니는 한계를 논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