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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問)ㆍ사(思)ㆍ수(修)>
문(問)ㆍ사(思)ㆍ수(修)는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 삼혜(三慧)를 일컫는다.
불교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아닌 실존적인 가르침을 중시한다.
인간존재의 실상에 관한 진리를 듣고[聞], 사유하며[思], 수행[修]을 통해
깨달음으로 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3혜에 대해서는 특히 아함부 경전 중간이나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비구들이여, 내가 인연법에 대해 설하리니,
그대들은 잘 듣고[聞], 사유(思惟)해 수행[修]하도록 하라.” -
증일아함 46권, 「방우품」
물론 불자들 입장에서도 어떤 법문이든 많이 듣고[聞],
그 진리를 깊이 사유[思]해서 자기 철학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염불이든 기도든 참선이든 실천[修]을 해야 한다.
삼혜에 관한 좀 더 깊은 내용을 살펴보자.
① 문혜(聞慧, 빠알리어 suta-maya-paññā) ― 책과 경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얻는 지혜, 문소성지(聞所成智)라고도 한다.
즉, 귀로 들어서 아는 것, 부처님 설법이나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서 얻는 지혜를 말한다.
② 사혜(思慧, 빠알리어 cintā-maya-paññā) ― 책과 경을 읽거나
법문을 들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해서 얻는 지혜, 사소성지(思所成智)라고도 한다.
즉, 생각과 사색을 통해 얻는 지혜를 말한다.
③ 수혜(修慧, bhāvanā-maya-paññā) ― 읽고 듣고 생각한 바를
실제로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 수소성지(修所成智)라고도 한다.
즉, 염불과 선정(禪定)을 닦는 것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를 말한다.
문(聞)은 많이 듣는다는 말이다. 법문을 먼저 듣고,
사(思)는 사유한다.
법문을 듣고 법문 내용이 이치에 합당한지 사유해본다.
합당하다면 닦을 수(修), 수행(修行)을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한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이다.
계ㆍ정ㆍ혜(戒定慧) 삼학(三學)과 더불어
문(問)ㆍ사(思)ㆍ수(修)를 통해 수행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삼혜(三慧)에 대해서 부연하면,
문혜(聞慧)란 귀로 들어서 아는 것,
즉 부처님의 설법이나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얻어지는 지혜로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데에 초점이 주어진다.
그러나 문혜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빌려온 지혜이기 때문이다.
들어서 얻은 지혜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인 사혜(思慧)로 가야 한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들었던 것과 읽었던 것이
논리적이고 실제적이며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받아들인다.
즉, 사혜(思慧)는 생각과 사색을 통해 얻는 지혜,
도리를 스스로 깊이 사유해서 생기는 지혜를 말한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지적인 이해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의 지혜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의 지혜는 수혜(修慧)인데,
수혜는 염불이나 선정(禪定)을 닦는 것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깨달아 얻는 지혜이다.
즉, 수행을 통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된 지혜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들어서 생기는 문혜나 사유해서 아는 사혜는
우리에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영감을 주고 길 안내를 해주지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지혜는 오직 수혜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지혜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혜는 수행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부처님은 맹목적인 믿음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직접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경험을 해보고
얻어지는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이것이 확신에 찬 믿음이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은,
“모든 것들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여 완성시켜라.”였다.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진리에 접근할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해서 완성시켜야 하는데
이를 빨리어로 “appamada sampadetha/아빠마다 삼빠데타”라고 한다.
아빠마다(appamada)는 게으르지 않고, 주의 깊게, 열심히,
진지하게 노력한다는 말로서
부처님이 경전에서 사용한 아빠마다는 모두 1,970번이나 된다고 한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문(聞)⋅사(思)⋅수(修)의 확장---
듣고 생각하고 닦는다는 뜻으로 문(聞)⋅사(思)⋅수(修)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대개는 너무 가벼운 의미로 사용하는 듯하다.
이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있다.
‘문(聞)’에는 듣는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향기 냄새를)맡다, 알다, 알아차리다, 감별하다 등의 많은 뜻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안(眼-눈)⋅이(耳-귀)⋅비(鼻-코)⋅설(舌-혀)⋅
신(身-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활용해 인지하는 단계를 가리킨다.
즉, 정확히 알아차리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문향(聞香)’이라는 용어를 ‘향기를 듣는다’고
직설적으로 풀이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향기를 맡고 즐기거나
맛을 보고 향의 좋고 나쁨과 향 자체의 성질 등을 감별하는 것을 뜻한다.
또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의
‘문(聞)’은 귀뿐만 아니라 눈, 코, 입을 통한 인식까지를 뜻한다.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좁고 긴 모양의 문향배(聞香杯)가 있는데,
향이 좋은 차를 따랐다가 비운 뒤 빈 잔의 향기를 맡는 용도이다.
‘향 소리를 듣는 잔’이 아니라 ‘향기를 맡고 즐기는 잔’인 것이다.
‘사(思)’에도 생각, 사유, 마음 등의 뜻이 있다.
즉, 문(聞)의 단계를 거치면서 알아차린 단계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깊은 마음, 마음정리 등을 뜻한다.
불교적으로 풀이하자면 삼매에 들기 전의 일심(一心)의 단계이다.
‘수(修)’에는 닦다, 고치다, 다스리다, 베풀다, 실천하다 등의 뜻이 있다.
이는 기존의 자기 언행을 고치는 단계이거나
심적(心的)으로는 삼매(三昧)를 거쳐 해탈(解脫)에 이르는 경지이다.
그리고 다시 ‘베풀어 나가는 단계(布施)’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모든 언어는 어떤 경지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니 성현들이 사용한 언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지 말고,
자신의 경지를 상승시키는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ㅡ 어느 노스님 글 중에서
불교 수행에 있어서,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거짓,
나를 완전히 벗어나, 모양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참나’,
나의 본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그냥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이 쉽지 않은 자기 탐구, 자기 본성의 깨달음을 위해
문(聞)⋅사(思)⋅수(修)의 과정이 필요하다.
‘문(聞)’은 법문(法門)을 듣는다는 말이다.
육체와 정신은 실체가 없는 공한 존재라는 가르침,
‘참나’는 내면의 본성(本性)이라는 가르침,
내면의 본성은 모습이 없으나 신령스러운 앎을 일으키는 공적영지(空寂靈知)라는 가르침,
그 본성의 회복을 위한 공부 방법에 대한 가르침 등을 듣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자신과 존재를 보는 기존의 소박한 중생으로서의 견해로는
결코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본성(本性)을 깨달은 선지식(善知識)들의 가르침을 통해
올바른 견해를 듣는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이다.
본성(本性)을 깨달은 선지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은
다른 어떤 형태의 배움보다 수승한 방법이다.
책이나 경전을 보고 혼자서 배우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지식과 편견 때문에
올바른 견해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혼자서 깨닫겠다는 의지는 가상하다고 하겠으나,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할 가능성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이 옛 선지식들의 말씀이다.
‘사(思)’는 들은 법문을 깊이 생각해 보고 제대로 이해해서
그 법문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 법문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사(思)의 과정을 통해 법문을 자기 내면에 온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다음 과정인 수(修)를 이행할 수 없다.
‘수(修)’는 법문을 듣고[聞] 깊이 생각해서[思] 온전히 이해한 바탕에서
그 법문을 자기 삶에서 구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 수(修)의 과정을 통해 법문에서 말하는 진리가
완전히 자기 것으로 되는 것이다.
법문과 온전히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사⋅수(聞思修)의 마음공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 요소가 스승, 도반, 도량이라고 한다.
먼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올바른 수행 방법을 통해
올바른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이끌어 주고 채찍질해 줄
스승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쉽게 나태해지고, 도중에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일어날 때 같이 공부하는 도반(道伴,
진리를 향해 같이 가는 동반자)이 옆에 있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마지막은 도량으로, 공부를 할 분위기가 갖추어진 수행공간이 꼭 필요하다.
어느 정도 마음의 헐떡임이 쉰 사람들이야
시끄러운 시장바닥 한 가운데에서도 공부를 지어나갈 수 있겠지만,
마음공부의 초보자인 경우에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 도량이 꼭 산 속에 있는 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참된 것에 대한 간절한 구도심,
진리에 목말라하는 발보리심, 생사를 뛰어넘고자 하는 높은 기상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음공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사⋅수(聞思修)의 과정과,
마음공부에 꼭 필요한 3가지 요소인 스승, 도반, 도량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떤 다짐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마음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리라.
<화엄경> 「보살명난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없다.
행하는 것, 그것이 도를 구하는, 진리을 구하는 진실한 모습이다.”
듣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이 암자 저 절간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걸 갖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사⋅수(聞思修)는 들을 '문', 생각 '사', 닦을 '수'로서
들었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은 자기를 여과시키라는 뜻이다.
자신의 체로 걸러 받음이다. 그리고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상에 옮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삼혜(三慧)와 삼학(三學)의 관계를 보자.
삼혜와 더불어 불교 수행에 중요한 삼학은 戒(계), 정(定), 혜(慧)를 말한다.
① 계학(戒學) ― 윤리 도덕의 공부, 윤리적 실천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맑게 하며, 입과 몸으로 짓는 악한 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품행을 바르게 하기 위한 과정이다.
② 정학(定學) ― 명상수행, 참선을 통해 마음의 번뇌를 정지시킴으로써
마음을 고요와 행복을 얻는 공부로서, 인간 내면의 악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번뇌를 잠재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삼혜에서의 수혜(修慧)에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③ 혜학(慧學) ― 마음을 밝게 하는 혜학은 계학과 정학을 바탕으로
사성제(四聖諦)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에는 사혜(四慧)가 있다.
• 문혜(聞慧) ― 법문을 들음으로써 불법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
• 사혜(思慧) ― 법문의 이해를 깊이 숙고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 수혜(修慧) ―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통해 실재를 통찰하는 것.
• 증혜(證慧) ―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 것.
그리고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을 팔정도(八正道)와 관계 지어 보면
정견과 정사유는 혜(慧)이며, 정어ㆍ정업ㆍ정명은 계(戒)이고,
정정진은 삼학에 공통되며, 정념ㆍ정정은 정(定)과 관계 지을 수 있다.
따라서 삼학을 세분한 것이 팔정도이다.
이와 같아서 삼혜와 삼학은 많은 부분에서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불교 수행의 핵심인 것이다.
대저 학인이 법을 배움에는
문(聞)ㆍ사(思)ㆍ수(修)의 셋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즉, 법을 듣고 생각하고 실천 수행하는 세 단계를 밟아야 한다.
경문에 나오는 청(聽)ㆍ수(受)ㆍ문(問)은 문ㆍ사ㆍ수 3단계 중
듣고 생각하는 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불자는 모름지기 법문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
물론 “공부하는 수행자에게 병이 있거나 기운이 없을 때,
또 법을 설하는 법사가 법문을 거꾸로 설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법사의 설법이 일상적으로 어디서나 듣는 흔한 법문일 때,
그 법사의 법문을 이미 많이 들은바가 있을 때,
이미 들어서 다 알고 있는 내용일 때,
혹은 선정을 닦고 있거나 특별한 기도 정진을 하고 있는 중일 때이거나,
하는 일을 잠시도 폐지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는 가서
법문을 듣지 않더라도 계를 범한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문사수증(聞思修證)이란 말이 있다. 이는 가르침을 듣는 것,
가르침에 대해 사색하는 것,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외에
가르침을 체험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한다.
즉, 부처님이 설해놓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본뜻을 깊이 생각해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해,
스스로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증득(證得)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수행 과정이 문(聞)⋅사(思)⋅수(修)로 구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요한 것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일 것이다.
즉, 경전을 읽거나 사유하는 것만으로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러한 요소들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이 반드시 요구되지만,
올바른 방향에 대한 깊은 숙고나 이해 없이 그저 수행만 하는 것은
우리가 밟아가는 길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의구심이 들게 할 뿐이며,
이러한 의심은 수행을 지속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핵심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사유를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완성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깨달음으로 향하는 올바른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상도선원이 지향하는 방향 - 미산 스님 법문 -
불교는 고(苦)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의 실체를 보고 벗어나는 길을 적극 모색한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 중에 사성제(四聖諦)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모든 교리가 이 사성제에서 나온다.
삶 속에서 사성제를 어떻게 직시하고 이를 녹여 체험적으로 실천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상도선원은 수행을 중심으로 삼아 불교 교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을 지침으로 한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깊이 이해하고 체증(體證)하는 것이 상도선원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문(聞)⋅사(思)⋅수(修)라고 한다.
‘문(聞)’은 듣는 것으로 이루어진 지혜 즉 문혜(聞慧)이다.
‘숫따마야 빤냐’라고 한다. ‘숫따마야’는 ‘들어서 생긴’이라는 뜻이다.
‘사(思)’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지혜이다. 깊이 근원을 파악하고
궁구해 나오는 사유로 이루어진 지혜이다. ‘찐따마야 빤냐’라고 한다.
‘수(修)’는 실제 듣고 사유해 이해한 것을 몸으로 증득하는 지혜이다.
‘바와나마야 빤냐’라고 한다. ‘바와나(bhavana)'는 영어로 하면
’cultivation, development'이다. ‘갈기, 개발하기’라는 뜻이다.
무엇을 갈고 개발하나?
마음의 밭을 잘 갈아 씨앗이 잘 발아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본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나
삶이 조화롭게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수’이다.
공부의 기준은 우선 많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문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삼매에 잘 드는 사람들 중에, 많이 듣고도 그것을 지혜로 전환하는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삶 속에서
혼란한 쪽으로 진행이 된다.
초기불교에서 성문(聲聞)이라고 칭하는 수행자도 있지만,
법문을 들었을 때 마음에 계합하는 것이 있으면 견해가 질적으로 변화한다.
1시간 하면 한 만큼, 2시간 하면 한 만큼 진리가 체득된다.
그 다음 깊이 사유한다는 것[思]은 무엇인가?
개념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개념을 떠나서 살 수는 없지만,
개념은 허구이다.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다,
유식의 용어로 하자면 가유(假有) 속에 산다는 것을
명료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계가 가유이기 때문에
나는 진짜의 세계에 머물러 있겠다고 생각하고,
5온, 12처, 18계가 다 공한 공성(空性)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비추어 가상을 보고,
또 공성에도 머물지 않고 가유에도 머물지 않는 중도적 사유 방법,
즉 견해를 갖는 것이 바로 ‘사’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수행에서 옆길로 빠지게 된다.
수행이 조금만 진전되면 신기한 것이 자꾸 나타난다.
방심하면 엉뚱한 데로 가는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늘 깨어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사라지는지, 즉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문(聞)⋅사(思)⋅수(修)는 수행하는 단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수행은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고 단계가 있다.
문, 듣고, 사, 사유하고 마지막으로 수, 닦는 것이다.
중생이 구하는 ‘대박’은 유루(有漏)의 복, 다함이 있는 복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복이요, 괴로움이 따르는 복이다.
다함이 없는 영원한 복, 무루(無漏)의 복을 추구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그냥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고
단계가 있다.
그 첫 단계가 ‘듣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정신세계가 결정되고,
행위가 결정되고, 내세가 결정된다.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지낸다. 우리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 이유를 무지(無知), 무명(無明)이라고 하는데,
무지, 무명은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중생은 지혜가 없는 존재다. 이 지혜는 지식이 아니다.
연기(緣起)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아(無我), 공(空)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를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고 행위 해서, 업을 짓고, 업이 쌓이고,
그러다 죽어서 육신을 벗어나면 업의 종자만 남게 되는데,
이것을 업식(業識)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영가, 중음신(中陰身)이라고 한다.
49재는 그 중음신에게 법문을 하는 것이다.
법문을 듣고 참회해서 지혜를 얻으라고 49재를 봉행하는 것이다.
그냥 업력에 꺼들린 채 다음 생으로 가지 말고,
지혜를 얻어 좀 더 수승한 세계에 태어나라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의식세계를 형성하게 돼있는데,
그 의식세계가 윤회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보고 듣는가에 따라 업이 결정되고 다음 생이 결정된다.
수승한 업을 가지고 있으면 천상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지만
악업을 많이 지었다면 지옥, 아귀, 축생계에 태어난다.
인간계에 태어난 것은 행운이다.
수행을 하는데 첫 번째로 무엇을 듣고 보느냐가 중요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여섯 가지 신통이 열렸는데,
그 중 하나가 숙명통(宿命通)이다.
숙명통이란 내 전생을 아는 것이다.
중생은 전생을 모르니까 원망을 많이 하고, 전생을 모르니까
그냥 대충 사는 것이다. 의식의 저 아래 깊숙이
제8식(八識)에 남은 업의 종자가 중생을 조정하는 것이다.
내 전생을 내가 볼 수 있다면 죄업을 안 짓고 선업을 닦을 텐데
자기가 한 짓을 모르니까 또 죄업을 짓는 것이다.
인과의 이치를 확실히 알아야 원망이 없고
더 이상 미래에는 수렁에 안 빠진다.
‘내가 절을 열심히 다녔는데 뭐 되는 일이 없고 뭐 그렇다,’
그렇게 해서 원망을 한다면 악업에 원망까지 더해서
다음에는 더욱더 수렁에 빠진다.
절에 열심히 다녔는데 뭐가 안 된다고 안 오는 분이 있다.…
그건 뭐냐면 전생의 빚을 갚고 있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내가 절에 다니는데 되는 일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업이 열매를 맺는 것은 시간 차이가 있다.
씨를 똑같이 뿌려도
식물마다 싹을 틔우고 열매 맺는 시기가 다 다르듯이,
업도 마찬가지로 지금 어떤 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업의 열매가 맺는 것은 시간 차이가 있다.
중한 업은 보통 나중에 열매 맺게 된다.
인과를 분명히 믿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이치가 인과로 이루어져 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에도 없다.
좋은 행위에 나쁜 결과나 나쁜 행위에 좋은 결과가 온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인과를 믿어야 된다.
그리고 전생에 지었던 악업의 종자를 소멸해야 된다.
그러려면 참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복을 쌓아야 된다. 사람들 마음 가운데 업의 저장창고가 다 있다.
저장창고 안에 사람들의 과거 생에 지은 것들이 전부 저장돼있다.
그 종자에 언제 싹이 돋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지금 봄이라서 새싹이 돋아나고 풍성해진다.
산과 들이 온통 푸르다.
그런데 이것들이 지난겨울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혀 보이지는 않았지만 겨울에도 전부 그 종자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의 종자도 때가 돼야 싹이 돋는다.
부지런히 참회를 해야 악업의 종자가 싹을 틔우지 못한다.
햇볕과 물이 없으면 씨가 그냥 말라 죽듯
악업도 참회로 인해 싹을 틔울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그냥 소멸된다.
지옥에 떨어질 정도의 죄업도 열심히 참회하면
가벼운 감기 정도로 끝난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첫 째다.
두 번째 단계는 생각, 사유하는 것이다.
꽃이나 나무 같은 대상을 보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꽃을 본 후에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이렇듯이,
법문을 보고 들은 후에는 생각이 꼭 필요하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중요한 특징이 이것이다.
다른 종교는 생각을 전혀 못하게 한다.
생각하고 의문을 가지면 그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다.
신에 대한 거부다.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한다.
그냥 믿음으로 충만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라고 이야기한다.
부처님 말씀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이다.
왜 무아(無我)라 그랬는가. 왜 윤회(輪廻)라 그랬는가.
왜 인과(因果)라 그랬는가.
이런 생각이 깊어져야 내면적인 침잠이 이뤄지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망상에만 끌려 다니는 사람은 수행을 못한다.
부처님 말씀에 따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면
지금 삶의 한계성을 알게 되고 따라서 복을 짓고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닦는 것, 수행하는 것이다.
듣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자기 것이 되려면 닦아야 한다.
법문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계속 듣고 생각하는 데만 그친다면 발전이 없다.
수행은 몸짓이다. 수행은 신(身), 구(口), 의(意)로 하는 것이다.
입으로 계속 염불하고 다라니를 해야 하고,
몸으로 절을 하고 정신을 함께 모아야 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요리를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신 것이고,
그 말을 듣고 이해하고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은 자신이다.
전생에 지은, 다생에 지은 업장은 태산 같은데…
미약한 몸짓으로는 안 돼, 수행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양이 없다.
아무 변화가 없다. 내 삶, 내 주변, 내 인생에 아무 변화가 없다.
수행은 항상 해야 하는 것이다.
문⋅사⋅수를 부지런히 닦아야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스스로 닦지 않으면 좋은 열매가 맺지 않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