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兄弟가 이어 쌓는 사랑의 城"
경향신문 / 1959. 8.12.
이 제목의 기사는 지금부터 65년 前 오늘 경향신문에 보도된 것으로 1960~70년대 서해 백령도, 연평도, 덕적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최분도 신부(Fr. Benedict Zweber)가 사제서품을 받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을 타고 한국에 오고 있을 때 실린 글입니다.
당시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가 최분도 신부의 사제서품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한국에서의 선교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화답한 어머니의 마음과 최신부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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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내 아들은 한국 땅에서 마음껏 일하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 아들이 다하지 못한 일을 한국을 위해 할 수 있고 한국을 위하여 몸을 바칠 수 있도록 신부(神父)가 된 망자(亡者)의 동생을 이번에 또 보냅니다." ㅡ 라는 편지의 주인공 ㅡ 미국의 어머니가 있어, 뜻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 미네소다 주 뉴 마케트 시(Newmarket, Minnesota)살고 있는 즈웨버 부인(Mrs. Zweber)인데 즈웨버 부인이 한국과 인연이 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아들이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 오히려 목숨을 잃은 아들대신 또 한 명의 아들을 보내기까지… 뒤에 숨은 이야기는 하나의 "휴맨 도큐멘타리"가 되고 있는데 죽은 형의 뜻을 받들어 한국에 오는 "즈웨버" 부인의 셋째 아들은 지금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다. ]
○… 즈웨버 부인의 아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기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1954년 겨울 ㅡ 어느 오후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날 시내 영등포구 흑석동 명수대에 신축 중이던 성당(聖堂)에 우연히 들리게 된 젊은 미군 병사(美軍 兵士) ㅡ 그는 본당 신부(神父)를 찾았다.
○… 공사에 여념이 없던 이경재(李알렉산델=庚宰) 신부 앞에 선 젊은 미군 병사는 자기의 이름이 메다르드 F. 즈웨버(Medardo F. Zweber)라고 하면서 "혹시 공사 중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서 도와드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 이리하여 李신부와 알게된 즈웨버 하사는 성당 신축 공사가 자금난으로 중단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 호주머니에 있던 30~40불의 돈을 희사했고, 곧 이어 본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려 부모는 금일봉을 보내오는가 하면 즈웨버 하사가 군대 생활할 동안 저축해 놓았던 2,000불의 돈을 희사까지 하려고 수속을 취하는 등 여러모로 도우려고 극력 애썼다.
○… 당시 부평(富平)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 181통신대에 소속하고 있던 즈웨버(27세) 하사는 날이면 날마다 틈나는 대로 공사장에 와서는 흙을 나르고 벽돌을 쌓는 등 일해 주었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의류, 식품 등을 부쳐다가 가난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 그런 어느 날 ㅡ 모 일간신문에 밀주(密酒)하던 어머니가 법망에 걸려 벌금 50,000환을 언도 받고 “벌금” 아니면 “구속”이라는 단계에 놓여 있을 때 딸인 안춘자(安春子)양이 구속을 해제만 해주면 벌금을 벌어 갚겠다 ㅡ 는 약속 밑에 고학하면서 하루에 300~400환씩을 물고 있다는 기사를 본 즈웨버 하사는 안(安)양 집을 찾아가 천신만고의 고생을 하고 있는 安양을 도와 벌금 중 남든 돈을 물어 주는 한편 학용품까지 사주는 등 온정을 베풀기까지 했다.
○… 1955년 7월 ㅡ 즈웨버 하사가 늘 염려하던 명수대성당은 낙성되었고 그 얼마 후 군인의 신분이면서도 갖가지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웁고 있던 즈웨버 하사는 중사로 진급 ㅡ 제대되었다. 제대된 즈웨버 중사는 "다시 한국에 와서 일하겠다"는 말을 李신부에게 남기고 귀국 ㅡ 본국에서 관리시험을 치루고 한국에 갈 것을 자원했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즈웨버 중사는 독ㆍ영ㆍ불어와 라틴어ㆍ노서아어 등 다섯 나라 말에 능통했었으며 그의 가정은 부모와 수녀가 된 세 명의 누나, 신부가 된 형, 그리고 남동생 셋, 여동생 둘을 가지고 있는 ㅡ 농장을 경영하는 집안이었다.
○… 이런 집안에서 관리가 된 즈웨버 씨는 1956년 2월 ㅡ O.E.C. 직원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또다시 한국 땅을 밟은 즈웨버 씨는 한국의 예의를 배우고 온돌방에 꿇어앉아 노인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한국을 위해 일한다"는 신념으로 약 6개월을 일하던 그해 8월 5일 ㅡ 친구 세 명과 함께 광나루로 소풍을 나갔다.
○… 이때 깊은 물 속에 소년 한 명이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발견한 즈웨버 씨는 소년을 구하고자 물 속에 뛰어들어 소년을 구해냈다. 그러나 즈웨버 씨는 소년만을 구해놨을 뿐… 그는 그대로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ㅡ 힘에 지쳐 익사한 것이었다.
○… 이렇게 하여 즈웨버 부인은 둘째 아들을 잃어 버렸다. 즈웨버 씨의 영결식은 그가 요람지처럼 못 잊어하던 명수대(明水臺) 성당에서 엄수되었고, 한국 친구들은 목놓아 울었다. "세상을 떠난 즈웨버 씨를 추모하면서 ㅡ O.E.C. 직원 일동" ㅡ 현대식 조각으로 된 성상을 O.E.C. 직원들이 명수대성당에 기증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
○…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본국의 즈웨버 부인은 "죽은 내 아들 대신 그가 가장 존경하던 李신부를 양자로 삼겠다"는 약속과 함께 "비록 내 아들은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으나 망자의 동생인 셋째 아들을 한국을 위해 또 바치겠다"고 자원한 것이었다.
○… 즈웨버 씨가 세상을 떠난지 3년 ㅡ 지난 5일 명수대(明水臺)에서는 즈웨버 씨의 3주기 추도 미사가 진행되어 고인이 된 즈웨버 씨를 추모했다. 한국에서 그러고 있을 무렵 ㅡ 본국에서는 즈웨버 부인의 셋째 아들 즈웨버ㆍ분도(Benedict Zweber) 씨는 신학생 생활을 마치고 6월 13일 뉴욕에서 신부(神父)가 되어 한국에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즈웨버ㆍ분도 신부는 임지를 한국으로 택한 후 신부서품 기념카드를 한국을 위한 기구로 만들어 이미 한국을 위해 기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 즈웨버ㆍ분도 신부는 지금 선편으로 한국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 그는 한국을 위하여 몸을 바치려고 오는 것이다. 어머니와 형의 뜻은 즈웨버 신부 가슴에 맺혀있으리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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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메리놀외방선교회 최분도 신부는 1959~1990년까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백령도, 연평도, 덕적도를 비롯한 외곽도서(문갑, 굴업, 백아, 울도, 지도)와 인천 근해의 영흥, 대부, 이작, 자월, 풍도 등 서해중부 도서에서 15년간 가난과 질병을 극복하고 섬마을 주민들과 동거동락을 하시며 문명화를 추진했습니다.
1976년에 인천에 올라온 최분도 신부는 송현동, 부평3동, 산곡3동성당을 신축 봉헌하고, 66세가 된 2017년부터 러시아 사할린에서 성야고보성당을 건축하던 중 골수암이 발병하여 2001년에 뉴욕에서 선종하셨습니다.
현재 옹진군청에서는 인천교구와 협력하여 최분도 신부가 1966년에 건축한 덕적도성당의 유베드루병원 건물을 활용하여 "덕적도 천주교 역사기념관"으로 조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