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 sus discípulos: «¿Qué os parece? Si un hombre tiene cien ovejas y se le descarría una de ellas, ¿no dejará en los montes las noventa y nueve, para ir en busca de la descarriada? Y si llega a encontrarla, os digo de verdad que tiene más alegría por ella que por las noventa y nueve no descarriadas. De la misma manera, no es voluntad de vuestro Padre celestial que se pierda uno solo de estos pequeños».
«No es voluntad de vuestro Padre celestial que se pierda uno solo de estos pequeños»
Fr. Damien LIN Yuanheng
(Singapore, Singapur)
Hoy, Jesús nos lanza un reto: «¿Qué os parece?» (Mt 18,12); ¿qué clase de misericordia practicas? Quizás nosotros, “católicos practicantes”, habiendo gustado muchas veces de la misericordia de Dios en sus sacramentos, estemos tentados a pensar que ya estamos justificados ante los ojos de Dios. Corremos el peligro de convertirnos inconscientemente en el fariseo que menosprecia al publicano (cf. Lc 18,9-14). Aunque no lo digamos en voz alta, quizás pensemos que estamos libres de culpa ante Dios. Algunos síntomas de que este orgullo farisaico echa raíces en nosotros pueden ser la impaciencia ante los defectos de los demás, o pensar que las advertencias nunca van para nosotros.
El “desobediente” profeta Jonás, un judío, se mantuvo inflexible cuando Dios mostró pena por los habitantes de Nínive. Yahvé reprochó la intolerancia de Jonás (cf. Jon 4,10-11). Aquella mirada humana ponía límites a la divina misericordia. ¿Acaso también nosotros ponemos límites a la misericordia de Dios? Hemos de prestar atención a la lección de Jesús: «Sed misericordiosos como vuestro Padre es misericordioso» (Lc 6,36). Con toda probabilidad, ¡todavía nos queda un largo camino por recorrer para imitar la misericordia de Dios!
¿Cómo debiéramos entender la misericordia de nuestro Padre celestial? El Papa Francisco dijo que «Dios no perdona mediante un decreto, sino con un abrazo». El abrazo de Dios para con cada uno de nosotros se llama “Jesucristo”. Cristo manifiesta la misericordia paternal de Dios. En el capítulo cuarto del Evangelio de san Juan, Cristo no airea los pecados de la mujer samaritana. En lugar de ello, la divina misericordia cura a la Samaritana ayudándola a afrontar plenamente la realidad de su pecado. La misericordia de Dios es totalmente coherente con la verdad. La misericordia no es una excusa para tomarse rebajas morales. Sin embargo, Jesús debió haber provocado su arrepentimiento con mucha más ternura que la que sintió la mujer adúltera “herida por el amor” (cf. Jn 8,3-11). Nosotros también debemos aprender cómo ayudar a los demás a encararse con sus errores sin avergonzarles, con gran respeto hacia ellos como hermanos en Cristo, y con ternura. En nuestro caso, también con humildad, sabiendo que nosotros mismos somos “vasijas de barro”.
«No es voluntad de vuestro Padre celestial que se pierda uno solo de estos pequeños»
Rev. D. Joaquim MONRÓS i Guitart
(Tarragona, España)
Hoy, Jesús nos hace saber que Dios quiere que todos los hombres se salven y que no es su voluntad «que se pierda [ni] uno solo» (Mt 18,14). Con la parábola del pastor que busca la oveja que se ha perdido, nos presenta una figura que conmovió a los primeros cristianos. En la portada del Catecismo de la Iglesia Católica está grabada esta figura de Jesús Buen Pastor, que en las catacumbas de Roma está ya presente entre las primeras imágenes del Señor.
Es tan fuerte el querer de Dios de salvarnos que, desde estas palabras hasta la donación incondicional en la Cruz, es Cristo quien nos busca a cada uno para que —libremente— volvamos a la amistad con Él.
De la misma manera que Jesús, los cristianos hemos de tener este mismo sentimiento: ¡que todos se salven y lleguen al conocimiento de la verdad! Tal como le gustaba decir a san Josemaría Escrivá, «todos somos oveja y pastor». Hay personas —el propio esposo o la esposa, los hijos, los parientes, los amigos, etc.— para los cuales nosotros, quizá, seamos la única oportunidad que les pueda facilitar la recuperación de la alegría de la fe y de la vida de la gracia.
Siempre podemos dejar el noventa y nueve por ciento de las cosas que nos llevamos entre manos, para rezar y ayudar a aquella persona que tenemos cerca, que amamos y que sabemos que padece alguna necesidad en su alma.
Con nuestra oración y mortificación, y con nuestra fe amorosa, les podemos alcanzar la gracia de la conversión, como santa Mónica consiguió que su hijo Agustín se convirtiera en el “primer hombre moderno” que sabe explicar en "Las confesiones" cómo la gracia actuó en él hasta llegar a la santidad.
Pidamos a la Madre del Buen Pastor muchas alegrías de conversiones.
♣ 험한 세상에서 회상하는 하느님의 사랑 ♣
이사야의 위로의 책(40-50장)은 기쁨의 메시지로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 이 말씀에는 서둘러 내 백성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다시 숨 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는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이 실제로 해방되리라는 하느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하러 오시어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실 것입니다.”(40,11)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비유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마음을 쓰고 눈여겨보시며 아껴주시는 인격적 사랑입니다. 우리의 하찮고 속 좁은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신분, 나이, 성별, 학식, 지위, 재산 그 어떤 것도 사랑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큰 죄 중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리는 사랑입니다. 목자는 문제없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향하고 먼저 선택하는 것이지요. 이 눈길은 ‘모두’가 행복한 사랑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보편적인 사랑이요 어머니다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견뎌내고 죽음을 무릅쓰는 사랑입니다.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는 늘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양들을 돌보지요. 그러나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가 길을 잃어버리는 양들이 생기곤 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런 양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험한 지형과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찾아 나섭니다.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오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입으로만 설명하는 관념의 놀이가 아니라 직접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대화와 친교를 나누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함께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랑을 위한 수평적 이동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품고 사랑 안에 하나 되기 위하여 길거리로 나서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함께 하기 위하여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위해 ‘하느님의 수직적 하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 높은 곳에 초월적인 분으로만 머물지 않으시고 ‘살을 취하시어’ 내려오신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을 위하는 하느님의 포기요 희생인 셈입니다.
오늘 혼탁하고 험한 세상 한복판에도 분에 넘친 하느님의 사랑은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 주님의 사랑에 행동으로 응답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야겠지요(이사 40,3).
몰상식의 일상화, 부정부패, 거짓과 탐욕, 불신, 소외와 차별, 인권 침해, 생명과 환경의 파괴, 돈의 우상화와 자본의 권력화의 결과 드러나는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심화 등의 중심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나서야 할 때입니다. 정의로운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불의와 차별보다 더 뜨거운 사랑 실천뿐임을 기억하는 오늘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되찾은 양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되찾은 양의 비유’ 라는 제목은, 내용을 생각하면,
“양을 잃었다가 되찾은 목자의 비유” 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입니다.
여기서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와 ‘길을 잃은 한 마리’를 대조시킨 것은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의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길을 잃지 않은 양들에 대해서는 기쁨이 없거나 적다는 뜻이 결코 아니고,
잃은 양에 대해서만 차별적으로 편애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길을 잃지 않은 양들은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예수님의 큰 기쁨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은
“모든 양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소중하고, 다 목자의 기쁨이다.”입니다.
그래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되찾은 양의 비유’는
파시즘이나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사상과 대립 관계에 있습니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전체주의 사상은 독재주의일 뿐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입니다.
희생이란 남에게 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목자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비유인데,
우리는 양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제목을, “목자를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비유” 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양이 길을 잃은 상황은 양 자신이 목자를 떠났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양의 입장에서는 목자를 잃은 상황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양들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수난과 죽음 때에 목자를 잃은 것과 같은 상황을 겪긴 했지만,
그때에도 목자가 양들을 떠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잠깐 동안 안 보였을 뿐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양이 목자를 잃는 때는 양 자신이 목자를 떠날 때입니다.
몸이 함께 있더라도 마음이 떠나 있다면, 그것도 목자를 잃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목자의 ‘큰 기쁨’을 말씀하셨지만,
목자를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기쁨도 ‘큰 기쁨’입니다.
(“죽다가 살아난 것과 같은 큰 기쁨.”)
그런데 자기 스스로 목자가 싫어서 떠나버린 양은,
또는 자기는 목자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양은,
목자를 잃은 슬픔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이 없으면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즉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 목자에게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목자를 잃었을 때 크게 슬퍼했던 양들만이 되찾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시편 작가는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목자를 잃은 양의 슬픔은, 이 시편에 나오는 그리움, 갈망과 같습니다.
어떤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든지 간에,
박해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든지 간에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신앙인은 누구나 슬퍼하게 되고, 주님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게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군인이나 선원처럼 특수한 직업이나 여건 때문에
장기간 미사 참례도 못하고 영성체도 못하고 갈망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랬다가 미사 참례와 영성체를 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대단히 큽니다.
반대로, 지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의식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목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행복은 행복할 때 지켜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자기가 아버지 곁에서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먼 고장으로 떠나서 방종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됩니다(루카 15,13).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행복을 버린 일인데,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때는,
또 아버지 곁에서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깨닫게 된 때는
곤궁에 허덕이게 되었을 때입니다(루카 15,17).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모습도 어리석은 모습인데,
그의 모습은 먼 고장으로 떠나기 전의 작은아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처럼 그런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만
자기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깨닫고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고난과 시련을 겪지 않고서도 지금 자기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잘 알고,
그 행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으려고 일부러 불행을 겪을 필요는 없습니다.
되찾은 양 때문에 목자가 크게 기뻐한다고 해서
우리가 일부러 ‘잃은 양’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회개와 용서의 기쁨을 알기 위해서 일부러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지금 길을 잃지 않은 양이라면 더욱 충실하게 목자 곁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참으로 목자를 기쁘게 하는 일이고, 우리 자신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누구나 소중한 사람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다 못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사랑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깊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마음을 키워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 졸이고 속을 태웁니까.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좌절하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 일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그 사람은 나에게 더 큰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번 더 때리랬다.”는 옛 말을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의 요구를 일깨웁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나의 시선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저도 그러한 기쁨을 이틀 전 주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느꼈던 거 같습니다.
한동안 나오지 않던 중학생 아이가 거의 1년 만에 성당에 나왔거든요.
나온 자체만으로도 참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다시 돌아온 그 한 마리 양이 내가 그리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공동체에 해를 끼칠 거 같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 사람이 와도 기쁠까?
그런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앉아서 고민을 했는데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목자 수업을 시키기 위해서 그러시는 거 같다.
나의 불편한 마음 때문에 누군가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어 주지 못하는 목자가 아니라,
모두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어 주는 그런 목자가 되길 바라시는 거 같다.
좋아하지 않는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길 바라시는 거 같다.’는 생각이었고요.
다른 하나는
‘내가 그 한 사람을 위한 사목을 준비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보통 사목적인 생각의 대부분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나
일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데,
‘소수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몸이 불편해서 캠프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 전례에 참여하기 힘든 분들,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거나 서툴러서
공동체 구성원들과 친교를 이루기 힘든 분들,
그리고 잘 들리지 않거나 보이지 않아서 복음 말씀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는 분들...
그들을 위해서 나는 뭐를 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계기가 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른 동기 신부들과 아침 해장국을 먹으러 갔는데요.
가는 차 안에서 제가 동기 신부 하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찾을 만한 양이면 괜찮은데
나와 맞지 않거나 찾기 싫은 양이면 어떡해?’
그랬더니 운전하던 신부가 바로 대답을 해 줬습니다.
“당연히 찾아야지.
우리는 목자가 아니야~ 양치는 개지~
목자가 양치는 개를 왜 데리고 다니겠어~”
그 말을 듣고 ‘개’ 라는 말에 약간 웃음이 나왔는데요.
그 신부가 말해준 이야기가 저의 시선을 조금 변화시켜 준 거 같습니다.
처음에 제 시선은 돌아온 그 양에게 가 있었습니다.
돌아온 그 양이 어떤 양이냐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안 기쁘기도 할 거 같은
그런 느낌이었는데요.
그 신부 말대로 제가 양치는 개라면 저의 시선은 목자인 주님께 가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제 기쁨은 돌아온 그 양이 어떤 양이냐가 아니라,
‘양을 돌아오게 한 그 일이 목자이신 주님을 기쁘게 했냐 안 했냐...’에 가 있는 겁니다.
10 여러분은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오.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12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13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14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마태오 18,10-14)
10절과 14절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앞뒤에서 병풍처럼 12-13절의 잃어버린 양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는 루가 15,4-7과 도마복음 107에도 전승되어 있다. 루가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한다면 마태오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강조한다. 양과 착한 목자 또는 악한 목자 이야기는 공동성서에 자주 보인다. 양은 이스라엘 백성(열왕기상 22,17; 이사야 13,14), 목자는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이사야 44,28; 미가 5,4) 또는 하느님을 가리킨다.(창세기 48,15; 에제키엘 34,12; 시편 23,1-3) 양을 골짜기에 방치하고 자기 자신만 돌보는 악한 목자 이야기가 나오는 에제키엘 34,1-6이 오늘 단락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10절의 그리스어 카타프로네인(katapronein)은 ‘업신여기다, 돌보지 않다’는 뜻이다. 업신여기지 말라는 경고 뿐 아니라 돌보아야 한다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악행을 저지른 것이 죄라면 선행을 게을리 하는 것도 죄다. 10절은 독자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 놓고 말한다. 10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표현은 원래 왕궁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것을 종교적 언어로 도입한 것이다. 업신여기는 가해자에게 경고를, 피해자에게 위로를 전하는 10절 말씀이다.
▲ The Synaxis of the Twelve Apostles. Russian, 14th century, Moscow Museum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유다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고대 페르샤, 로마, 그리스 문화에도 그런 민간 신앙은 이미 있었다. 특별한 개인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생각은 유다교에서 비교적 오래 되었다(창세기 24,7.20; 48,16; 시편 91,11-13) 모든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하나씩 있다는 생각은 랍비 유다교에서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천사는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는 고급 천사계급에 속하지 않고 지상에만 머문다고 여겨졌다. 10절의 천사는 이와 달리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고 소개되었다.
10절은 그리스도교 천사학(天使學)의 고전적인 구절에 속하며 사람들이 개인적 수호천사를 믿게 만든 구절이다. 수호천사에 대한 믿음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졌다. 그 믿음이 마태오 18,10, 사도행전 12,15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니고 그 구절들이 그 믿음을 재확인한 것이다. 수호천사는 세례 받은 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따라다닌다고 여겨졌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랍비들처럼 수호천사를 낮은 계급의 천사로 보았다. 루터(Luther)는 수호천사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캘빈(Calvin)은 10절에서 수호천사의 존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가톨릭 교리서는 천사의 존재,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가톨릭 교리서 328, 336) 수호천사에 대한 설명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역사의 희생자 곁에 가까이 계신다는 그 본래 메시지는 중요하다.
12절에 소개된 목자의 행동은 실제 목자들의 처신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 목자는 99마리 양을 먼저 우리에 모아두거나 다른 목자에게 부탁한 후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설 수도 있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보다 99마리 양이 덜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마태오는 그런 상세한 설명에 관심이 없다. 목자의 모습에서 신자들의 올바른 태도를 제시하고 목자 뒤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하도록 촉구하려는 게 마태오의 의도다. 심판에서 어느 누구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신도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과 착한 목자 이야기는 초대교회에 특히 풍부한 영향을 끼쳤다. 착한 목자는 구세주, 양은 전체 피조물, 99마리 양은 천사,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죄에 빠진 인간이라고 오리게네스(Origenes)는 해설하였다.
오늘 단락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대목(마태오18,21-22)을 마태오는 곧 소개한다. 그런데 오늘 단락에 이어질 마태오 18,17에는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는 신자를 마치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대목이 나온다. 성서 구절 사이의 이런 긴장 관계를 마태오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목자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흔히 성직자로 비유되고 있다. 성직자가 자동적으로 착한 목자라는 뜻은 아니다. 악한 성직자가 적지 않음을 역사와 현실이 보여준다. 또한 목자의 비유를 성직자에게 제한하여 사용할 필요도 없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곧 목자다. 그리스도교 안에 착한 목자도 있고 악한 목자도 있다. 착한 목자에게 교만함은 이미 없다. 남을 돕고도 우월감에 빠지지 않기는 어렵고, 나를 도와 준 사람을 남몰래 미워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착한 목자가 되도록 애써야 하겠다.
‘나는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교황도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고 대형교회 목사나 가톨릭 주교도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다. 잃어버린 양 처지에 착한 목자로 행세하는 종교인도 많다. 나를 구출해줄 목자가 내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양은 신앙의 형제자매들에게 겸손되이 도움을 청해야 하겠다. 내가 내 인생의 스승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착한 목자인지 잃어버린 양인지 언제나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착한 목자이고 동시에 어느 정도 잃어버린 양이다. 그러니 10절 말씀 “보잘 것 없는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매일 살펴야 한다. ‘을’을 무시하고 ‘감정 노동자’를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안타깝다. 교회 안에 그런 모습은 없는지 반성할 일이다. 교황이 ‘종들의 종’이듯, 성직자는 ‘을중의 을’이다. 그런데 마치 ‘갑중의 갑’으로 행세하는 철없는 성직자도 있나 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