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를 결정했습니다. 고민을 하고 또 해보지만 역시 결론은 교수님을 만나고나니 한방에 해결이 되더군요. 일단은 설과 휴식을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확정된 결과가 나오게 되면 그 때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요 몇일새 하는 일없이 요란한 마음탓에 여유가 없었는데 고민이 해결되고나니 뭘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의과대학 재학시절의 기록들을 하나씩 써보는건 어떨까 싶어 오늘은 그 시작으로 폴리클의 '막장노트'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옵쎄네 자랑쩌네 이런 이야기 할거면 스킵하시길, 그런 타입도 아닐뿐더러 남들과 동일한 학습시간을 조금 다른 방법으로 효율적으로 투자했다고 생각하닌까요.)
오래전 의대생 노트(
기사)라는 이름으로 웹상에 떠돌던 아래와 같은 그림을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저 정도 공부는 의대생이라면 대부분은 하는데 왜 저렇게들 놀라지라며 웃어넘긴 적이 있는데 실제로 교육을 위한 의학이라는 것이 지극히 암기 일변도의 학습인지라 당연히 아래 그림처럼 형광펜으로 마르고 닳도록 긋고 칠하고 입혀서 종이가 뚫어져라 쳐다보아야만 합니다. 오히려 저희들끼리는 공대생들의 복잡한 계산술식이나 문예과의 창작작품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의 머리에서 저런게 나올 수 있지' 하며 후덜덜 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의과대학의 암기 일변도의 장벽을 넘기 위해서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정리노트나 암기비법 등을 가지고 있을겁니다.(물론 모든 학생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공부 스타일에 따라 방법 또한 천지 차이닌까요.) 수줍은 느낌의 미소에서도 그러한 암기비법이나 의과대학 학습에 대해서 몇차례 언급하기도 했으니 금번엔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저 역시도 정리노트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전 이 노트로 시험공부도 했고 실습 때도 참고서적으로 삼았으며 국시대비도 했고 미래에 수련을 하면서도 의사라는 직업으로 벌어먹고 살면서도 꾸준히 활용할 예정입니다. 생각해보니 블로그를 하게 된 계기도 순환기 노트에 삽입할 에코 사진을 찾다가 우연찮게 Hwan 선생님의 이글루스 블로그에 흘러들었고 몰래 숨어서 지켜보면서 '바로, 이거야!'하며 블로깅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지금은 후배들의 포스팅을 제외하고는 이곳의 건강 포스팅은 전부 해당노트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을 정도닌까요. 힛,
급하게 찍은 탓에 사진 퀄러티가 떨어지는 점은 양해바랍니다. 폴리클의 국시대비 막장노트는 제작기간 5년에 걸쳐 기초편 7권(의학영어, 분자생물, 해부, 생리, 생화학, 병리, 약리), 임상 13권(소화기, 순환기-흉부외과, 호흡기-알러지, 내분비-가정의학, 신장-비뇨기, 류마-감염, 혈액종양-방사선, 외과(총론), 소아과(총론, 각론), 산부인과(산과, 부인과), 마이너(안과-피부과-이빈후과-경부외과), 정형외과)해서 총 20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아리 회장, 학생회 업무, 방대한 학습량에 허덕이던 본2 시절, 체력적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 유일하게 정신과만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평생의 한으로 남을듯,
노트는 재학시절 진도에 맞추어 공부하면서 꼼꼼히 정리해두었고 시간이 지남에따라 업데이트 되는 내용들이나 추가되는 부분을 계속해서 입혀 나갔습니다. 시간이 흐름에따라 달라지는 내용들, 실습이나 문제집을 풀면서 추가하고픈 내용들, 국시대비 오답노트 정리, 체계적인 정리의 필요성까지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과감히 기성 연습장의형태를 버리고 본과3학년 여름 위와같은 철 스프링 형태로 전환하였습니다. 해마다 추가되는 내용들의 업데이트나 필요에 따라 부분부분 규합하여 휴대가능한 편의성 등 여러가지 장점도 있었지만 간혹 노트가 찢어지고 철 스프링의 고정성 미비 등 단점도 있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지금 소개하고 있는 부분은 혈액종양내과의 nonHodgkin`s lymphoma의 한 카테고리인 Follicular lymphoma입니다. 사실 follicular lymphoma는 국시나 의과대학 공부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대부분 NHL은 DBLB만 알고 있으면 되닌까요.
위 노트처럼 폴리클의 막장노트에는 별의별 사진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소화기에는 X-ray나 초음파부터 생검소견까지 순환기에는 심전도 사진, 호흡기에도 질환마다 chest x-ray사진, 외과에는 심하게는 수술 사진까지... 그냥 보이는대로 다 집어 넣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참고는 학교 메뉴얼, 해리슨-쎄실-사비스톤(교과서, 물론 다보지는 않고필요한 부분만), 파워(교과서 요약집) 등의 요약집 4종, 실습 기록(케이스나 만났던 환자들에 대한 병력을 포스트잇 형태로 적어두었습니다.), 저널-논문-웹자료까지 의과대학 재학시절 만났던 자료란 자료는 필요하다 생각되면 간략하게나마 기록해 두었죠.
지난번에 소개했던 사진입니다. 산부인과 산과파트에 출산의 과정에 한 부분으로, 후두위 정상분만의 8가지 운동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림과 내용을 매치업시켜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헷갈리는 부분들을 위처럼 간단하게 정리해두니 재차 공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오래 기억에 남더라구요. 오른쪽 끝 사진은 임상편 노트중에서도 국시관련 노트만 모아둔 것입니다. 도서관 자리 오른편에 항상 놓여 있었죠. 대개 의과대학생들은 파워, 스텝 등을 공부 자료로 많이 이용하고 그 위에 본인들의 정리를 덧씌우거나 아예 KMLE라는 국시 문제집에 정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스스로 정리했던 노트가 있었기에 다른 자료는 필요하지 않았고 국시 1시간 전까지 제 노트와 운명을 같이했습니다. 노력은 절 배신하지 않을거란 믿음이자 일종에 도박이었죠. 아, 물론 저 역시 문제집은 당연히 풀었습니다. 지금 세어보니 정확히 3독 한거 같네요.
국시 전날 핸드폰으로 촬영했던 사진입니다. 노트가 많고 무게도 제법 되다보니 들고 다니느라 죽는줄 알았습니다. 이래서 국시는 하루만 봐야한다고... 각설하고 하루전날과 마지막 날에는 그간에 문제를 풀면서 자주 틀렸던 부분이나 미친듯이 외워야만 해결될 적응증, 진단기준들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는 심전도 소견들을 한데 묶어서 국시 시험장에 들고 갔습니다. 오른쪽 위에는 유일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정신과 책이 보이네요. 아쉽긴 하지만 정신과 마저 손으로 다 썼다면 팔목이 부러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시간을 두고 정리를 하다보니 에피소드들도 많습니다. 본과 3학년 초 실습하면서 내분비 노트를 잃어버려서 다시 만들었던 기억이나 해부학 교과서에 꼭 넣고 싶은 그림이 있어서 동기형님에게 사정사정하여 책을 얻어서 칼로 난도질했던 기억이나(대개 의과대학생들은 기초서적을 학생시절 이외엔 보지 않고 때론 버리는 경우가 많기에 잘만 구슬리면 교과서 득템을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한번 보고 책장에 쳐박아두었다 졸업하면서 버리기보다는 필요한 부분을 오려서 자주 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서적을 칼로 난도질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점 양해를 구합니다.) 야마만 빨았는데 탈야마타서 다들 재시걱정하고 있을 때 별 걱정없이 방학을 즐기러 고향에 내려갔던 추억이나 재미있는 기억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공부하느냐'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 6년간 공부를 하면서 원칙으로 세워둔게 한가지 있습니다. '당장 마음이 급해서 허술하게 공부하거나 임의로 암기하여 넘어가지는 말자'가 그것인데 얼마나 잘 지켰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다보니 소위 야마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시험보기가 일쑤였고 때론 동기들은 왜 고생을 사서하냐는 말도 했지만 배움의 과정에서 소홀히 한 부분때문에 미래의 내 환자가 될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항상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한다는 개인적 신념, 노력의 댓가는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믿음으로 꿋꿋히 노력했습니다. (아마 이는 대한민국의 모든 의사, 그리고 의사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을 의학도들 누구나 같은 마음일껍니다.)
물론 국시수석이나 내신 1등과 같은 가문의 광영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나름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으며 요사이 무척이나 나를 괴롭혔던 병원문제도 원하는 전공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고 정리노트를 기반으로 작성한 의학포스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익혀지고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합니다.
폴리클의 노트는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이곳에는 임상을 통해 경험했던 환자의 케이스나 2~3년이 멀다하고 바뀌는 최신 의학정보를 꾸준히 업데이트 할 생각입니다. 오래전 친한 동기 형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넌, 이 노트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거냐고' 딱히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지금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정리노트가 없어진다면 아마 의사생활 그만두고 낙향해서 또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웃으며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정도로 제게는 소중하고 절실한 노트닌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그럼 다음시간엔 더 재미있는 의과대학 이야기로 찾아뵐께요.
+) 힘냅시다. 이번에 인턴 들어가시는 전국의 동기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