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교회에 촛불 들다. 이게 종교냐?
박용한(20기)
지난겨울 우리는 촛불모임을 통해 “이게 국가냐?”란 질문과 저항과 소통을 요구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촛불모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기록될 만한 평화적인 시민혁명이었고, 저항이었고, 새로운 나라를 향한 열망이었다. 촛불의 열망과 함성이 아직도 귀가에 맴돈다. 그런 일련의 시간속에서 한국교회 또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루터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한국교회를 돌아보려는 애씀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런 와중에 접한 최주훈 목사의 “루터의 재발견”은 표지부터 한국 사회의 열망을 오롯이 보여주는 듯 했다. “질문해라. 저항하라. 소통하라.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라.”는 4가지 주제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이라는 것과 한국 사회가 지난 촛불모임을 통해 요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에 반가움과 전율이 느껴졌다.
어쩌면 체코의 얀 후스가 1415년 화형당하면서 “지금은 한 마리 거위가 불에 타지만 100년 후에 한 마리 백조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는 예언처럼 100여년 후 1517년에 루터는 종교개혁의 한 마리 백조로 세상에 등장한 것처럼, 한국 교회는 루터가 살던 시대보다도 훨씬 더 타락한 시대속에 놓여 있다. 손봉호 교수의 말처럼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기독교가 바로 현재 한국 개신교다’라고 탄식할 정도로 제2의 종교개혁이 요구가 전방위적으로 강력하다. 이러한 시점에 그 동안 루터에 대한 예화나 역사적인 흔적만 보았는데 이 책을 통해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신학과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 다양한 개혁적인 모습을 보게 되어 매우 반갑고 흥미롭다. 그러면서도 루터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개신교 후배 목사로 선배 루터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질문하라!!
신실한 믿음은 무엇일까? 저자는 루터를 “시대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잣대로 보지 말고, 당시 문화적인 상황과 믿음의 상황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 생각해서 루터를 바라봐야만 정확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당시 루터의 시대는 신실한 믿음이란 질문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의 시대였다. ‘유령의 시대에서 하나님을 추구한 사람’이라는 말처럼 그 시대는 유령의 존재들이 모든 사회에 떠돌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루터는 수도사에 입문하기도 했지만, 그의 운명은 수도원에 거할 동안 로마에 방문할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기대와 달리 로마 가톨릭의 타락의 모습을 직접 본 루터의 마음속에 이게 교회냐?라는 분노가 가슴깊이 쳐 올라 현실에 대한 타협이 아닌 성경으로 돌아가 마음의 질문을 답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저항하라!!
누구 맘대로? 당시 가톨릭은 구원의 교리를 매우 촘촘하게 짜놓고 수 많은 사람들의 불안한 참회에 대한 해답으로 연옥을 만들어 돈을 삥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누구도 쉽사리 종교권력에 대항하거나 저항할 수 없던 시기에 루터는 질문하면서 엿장수 맘대로 구원을 돈주고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거부한다. 그리고 성경연구를 통해 가톨릭의 연옥교리는 철저하게 반성경적인 것을 깨닫고 95개조 논조를 발표함으로 인해 종교개혁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특히 [독일 귀족에게 고함]의 논문에서 세 가지 장벽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당시 교회가 너무 높은 벽을 쌓아 스스로 갇혔다. 이 세가지 장벽은 하나,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치는 벽이다. 둘, 평신도 해석의 벽이다. 셋, 공의회 소집권의 벽이다’며 당시 폐쇄적인 가톨릭의 문제를 꼭 집어 “권위”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오직 모든 권위는 ‘성서’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은 다 평등하다며, 당시 독일의 제후들을 결집해 저항하려는 결의를 보인다. 그리고 가톨릭의 대척점에 선 교회 공동체는 바로 저항하는뜻을 가진 ‘프로테스탄트’로 불리게 되고 오늘날 개신교도의 이름이 된다. 그런데 과연 한국 교회는 저항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오히려, 종교 개혁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오늘날 믿음의 권위가 아닌 교권의 권위에 저항하는 저항 공동체가 새싹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것에 희망을 가진다.
소통하라!!
sns로 소통하는 한국사회는 광주혁명처럼 지역을 봉쇄한다고 해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세계 곳곳의 모든 사건과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개인들에게 전파되는 오늘날처럼 루터 역시 당시 라틴어 불가타성경으로 성경을 대중들로부터 통제하던 것을 인쇄술의 도움으로 오늘날의 sns처럼 무서울 정도로 독일전역에 ‘95개조 논제’가 독일어로 번역되고 인쇄되어 퍼져 나갔다. 이는 당시 대중들의 언어였던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폭팔적인 반응을 가져온다. 이는 예배에서도, 성경공부에서도 민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고, 장전한 총에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했다. 이로 말미암아 더 이상 사제를 통해 소통이 아니라, 직접 성경을 접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꿈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한국의 교회의 개혁은 평신도들이 더 이상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읽고 연구하며 질문하고 저항해야 한다. 이는 루터가 제창한 만인제사장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공동체!!
“그리스도인이란 루터에 의하면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교회자체가 구원을 매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개인뿐 아니라, 새로운 백성으로써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기에 각 개인은 교회공동체를 세워가는데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문제는 루터에게 불가능한 것이다.”고 로제는 루터의 교회관을 정확하게 피력하고 있다. 오늘날 가나안 그리스도인들의 세력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마치 새롭고 성숙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만큼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의 권위에 합당하게 세워진 공동체라야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이자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럼에도 가나안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루터의 교회관속에서도 잘 녹아 있다. 그렇기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서 새로운 교회의 싹들이 새롭게 피어나기를 루터는 기대했으리라 본다.
나가며 !!
역사속의 산물이자 성경의 사람이었던 루터의 삶과 종교개혁을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민낯을 속속들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촛불혁명을 통해 시민들이 “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저항했고, 직접 시민들이 소통해서 결국 새로운 국가를 이뤘듯이 한국 교회는 지금 촛불대신 성서를 들고, 질문하고, 잘못된 권위에 저항해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세워야 할 시대적인 사명이 루터의 후배들인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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