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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원장 김성자 수녀(윗줄 왼쪽)를 비롯해 예수성심시녀회 본원(대구 남구 대명9동)에서 생활하고 있는 수녀들이 뜰에 모여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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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성심시녀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을 섬김으로써 예수성심의 사랑을 전한다. 갈릴리 어린이집에서 아이와 놀아주고 있는 수녀의 모습. |
'섬기러 왔다' 말씀 따라 가난한 이웃들 위해
사회복지를 시작으로 의료·유아교육·본당 등
사도직 영역 넓히며 대구·경북 대표 수도회로 "토끼는 춤추고 여우는 바이올린~ 찐짠 찌가찌가 찐짠 찐짠찐짠 하더라♪"
예수성심대축일을 하루 앞둔 10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9동 예수성심시녀회에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어린이집에서
흥겨운 음악소리가 흘러나온다. 피아노 가락과 장구 장단에 맞춰 동요 '산중호걸' 연주가 시작됐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중증 장애아이들이 휠체어에 앉아 장구를 두드린다.
"창설자 신부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길 바라셨어요. 그래서 저희 집에는 정말 중증 장애아이들만 와요."
이주영(루치아) 원장 수녀가 동글동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도에 걸린 사진 속 아이들 얼굴은 하나같이 해맑다.
큰 대야 안에서 비누 거품을 온 몸에 바른 아이들과 이들을 씻기고 있는 수녀와 교사들 얼굴은 장난끼가 가득하다.
삶이 기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교사들이다.
예수성심시녀회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는 예수성심을 본받아 생활한다.
회원들은 언제 어디서든 쓰이도록 항상 대기하는 예수님의 몸종, 시녀다.
"저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주님 뜻대로 쓰여지길 원하는 도구입니다. 연필이 필요할 때 쓰여지려면
잘 깎여 있어야 하죠."
1964년 꽃다운 나이에 입회해 총원장을 지내고 있는 김성자(그라시아) 수녀는 몽당연필 같았다.
그는 전쟁과 굶주림으로 고생했던 시절을 회고하며, "지나고 보니, 모든 시련은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확신에 찬 미소를 보였다.
재정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초창기 시절에는 수녀들이 곤충과 식물을 채집해 창설자 루이 데랑드
(Louis Deslandes, 1895~1972, 한국명 남대영) 신부 고향인 프랑스에 내다 판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의 수도원 자리를 내주기까지 했다.
예수성심시녀회는 많은 시련에서도 고통받는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보육원과 양로원은 물론 무료 진료소ㆍ급식소, 나환자 정착촌 등을 설립해 많은 가난한 이들을 품어 안았다.
사회복지를 시작으로 의료ㆍ본당ㆍ유아교육ㆍ해외선교까지 사도직의 범위를 넓히며 대구ㆍ경북 지역의
대표 수도회로 자리를 잡아갔다.
1982년 수도회는 전쟁 고아들을 돌봤던 성모자애원 보육원 문을 닫는다.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 고아가 아닌 장애아동에 눈을 돌린 것. 이들은 장애아동들을 유형별로
나눠 전담교육을 시작했다.
이어 부랑인 시설 나자렛집을 비롯해 노인전문요양시설 '햇빛마을' 등을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일반아동 및 장애아동의 통합 교육기관인 갈릴리 어린이집과 성인 여성장애인을 위한
생활시설 마리아의 집도 운영하고 있다. 교구와 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기관(병원ㆍ어린이집ㆍ
복지관)이 10곳이 넘는다.
워낙 많은 회원들이 대구ㆍ경북지역 곳곳의 사회복지기관에 파견돼 있다보니 연말연시가 되면
개인적으로 받아오는 상이 많다.
그러나 김 수녀는 "우리가 상을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여서 관심이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창립자 루이 데랑드 신부는 1962년 한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7년 후에는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한 바 있다.
김 수녀는 "우리의 사도직 목표는 단순히 가난한 이들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지 않다"며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눠,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을 그들 삶의 중심으로
모시게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시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들의 주인인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시녀들의
신뢰는 스스로 주님 손 안의 연장이 되기 위해 항상 비어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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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성심시녀회 심볼. 사선 왼쪽 십자가는 예수님을, 빨간 바탕은 예수성심을, 손과 자귀는 손 안의 연장을 의미한다. 사선 오른쪽은 성모님을 모범으로 정결과 사랑, 겸손의 생활을 상징한다. 별은 성모님을, 백합은 순결을 백합 속의 빨간색은 순교하기까지의 순결을, 장미는 사랑을, 오랑캐꽃은 겸손을 의미한다. |
▨수도회 영성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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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성심시녀회 창설자 루이 데랑드 신부. |
'주님 손 안의 연장'
대구ㆍ경북 지역 대표 수도회인 예수성심시녀회의 정신은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을 섬김으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성심의 사랑을 전하는 데 있다.
수도회 누리방(www.handmaids.or.kr)에 소개된 예수성심시녀회 약사에는 시녀회 모체가 된
삼덕당(三德堂, 영천)이라는 공동체를 소개하면서 "하느님은 당신의 도구로 순진한 처녀,
부스러기 여섯을 선택했다"고 써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택된 자신들을 '부스러기' 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해 75돌을 맞은 예수성심시녀회는 고아들과 난민ㆍ나환자들이 신음하던 일제 강점기, 한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23년 부산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은 루이 데랑드 신부는 본당 사목에
전념하다 삼덕당을 설립했다. 당시 여섯 명의 동정녀들과 공동생활을 시작했고, 병든 할머니와 어린
고아 2명을 데려와 살았는데, 이는 이후 성모자애원을 설립(1946년)하는 계기가 됐다.
시녀회는 양로원과 무료 진료소 및 급식소, 나환자 정착촌 등을 세워 생사의 갈림길에 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으로 껴안았다.
그러나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데랑드 신부와 회원들은 프랑스 정부의 간첩으로 의심받아 투옥된다.
4개월 간의 고문을 받고 회원 몇 명은 공동체를 떠난다. 또 6ㆍ25전쟁 때는 돌보던 고아와 어르신 700여
명을 데리고 대이동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역경 속에서도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하느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믿음은 설립자 신부가 남겨준 유산이다.
"6ㆍ25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50년 3월, 당시에 살고 있던 영천에 회원 수가 많아지면서 포항으로
이사를 갔어요. 가톨릭 신자가 없는 포항을 선교지로 삼은 거죠. 그런데 집을 지을 재료가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설립자 신부님께서 '하느님이 이미 집을 지어 놓으셨다'는 거예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이 쓰고 남겨둔 빈 막사가 있더라구요. 하하."
총원장 김성자 수녀는 "설립자 신부님은 정말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던 분"이라며 한참을 웃었다.
매 순간, 그 시대의 뒤안길에서 전쟁과 굶주림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허기를 달래준 예수성심시녀회는
1952년 대구대교구 정식 수도회로 승격됐다.
1992년 본원을 포항에서 대구로 다시 이전했다. 1954년 첫 서원식 후 현재 9개국(대만ㆍ볼리비아ㆍ필리핀
ㆍ로마ㆍ베트남 등)에 진출해 있다.
회원 618명이 3개(대구ㆍ부산ㆍ서울) 관구에서 행복한 연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지혜 기자
※성소모임 문의
대구관구 : 010-2649-2045, 김연희(마리아) 수녀
부산관구 : 010-6866-5695, 김천애(마리 소화) 수녀
서울관구 : 010-5054-0319, 안금희(비아)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