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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같은 비극이 또 어디에 있을까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라고 호소했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장인이 앞장
섰고 아내는 친정과 한 통속( ? )이라면 이것은 너무 하지 않은 가.
아들 정조가 넘 똑똑하면 부모 입장에서 아주 즐거워 해야 하건만 사도세자는 아들이 저리 똑똑하니 할아버지인
영조가 손자인 정조 세자로 삼고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불안해했다니 얼마나 가엾은 분인가
이분을 정말 파 볼수록 알수록 정말이지 안타깝다.
재미로 한번 읽어보세요 사진 글 다 네이버에서 펌햇습니다.
드라마와 영화계에서 사도세자에 대한 재조명 열풍이 뜨겁다. 과거에는 유약한 광인의 모습으로 해석했던 데 반해,
최근 들어서 SBS-TV 월화드라마 ‘비밀의 문’에서처럼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사도세자가 등장하고 있다.
사도세자를 둘러싼 다양한 평가를 짚어보고, 사도세자는 진짜 어떤 사람이었는지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드라마만큼 재미있고 역사책보다 흥미로운 사도세자의 이야기 속으로 지금 떠나보자!
성군의 자질 갖췄지만…
꽃피지 못한 비운의 아이콘 문무 겸비한 ‘천재 엄친아’
영조 11년 1월 21일에 태어나 이듬해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영재였다.
만 2세부터 천지, 부모 등 63자를 모두 알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대신들은 앞다퉈 세자의 글자를 받으려고까지 했다.
9세 때는 음식을 먹고 있던 중 영조가 부르자 세자는 급히 입에 있던 음식을 뱉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유를
묻는 영조에게 「소학」의 가르침대로 했다고 답했고, 아버지 영조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이런 세자의 모습은 이른바 ‘천재 엄친아’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만 2세에 글자를 읽고 쓰며 어린 나이답지 않은
정확한 판단력과 깊이 있는 심성, 여기에 배운 것을 실천하는 행동력까지, 모든 부모가 원하는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사도세자는 호방한 무인적인 기질과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힘 좋은 무사들도 들기 힘들다던 효종의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세 때 자유롭게 다뤘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으며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고 전해진다.
또 병서를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일찍 터득했다.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가 학문에 더욱더 정진하길 바랐고 그 기준 또한 높았다.
그래서 학문보다는 무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아들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호불호가 뚜렷했으며,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학문을 익힌 영조는 때론 공부를 빼먹고 칼싸움
놀이를 하는 세자를 호되게 꾸짖었다. 이후 칼싸움 놀이를 할 때면 사도세자는 거짓말을 했고, 그 횟수는 점차 늘었다.
기록에도 여러 차례 나와 있듯, 영조는 어린 사도세자에게 무척이나 무섭고 엄격한 아버지였다.
과도하게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거짓말이 늘고, 자존감이 낮으며, 탈선에 빠지기 쉽다는 교육학 이론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멀어진 부자 사이에 노론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악화된 책임을 무조건 엄격한 아버지 영조의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
두 부자 사이엔 노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에게 소론의 정치 성향을 지닌 사도세자는 탐탁지 않아했으니
노론은 사도세자가 즉위할 시 자신들의 권력을 잃게 될 것이라 염려했다. 좌불안석이 된 노론들은 사도세자의 허물과
병증을 영조에게 과장해 고해바치며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벌려놓았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노론 집안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비였던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도 일조했다.
역사학자들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좋은 성품이나 영특한 면보다 병증이 자세히 기록돼 있고,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한보다는 아버지 홍봉한에 대한 변명과 집안의 몰락에 대한 한이 서술돼 있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혜경궁 홍씨와 장인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으로 동조했다고 분석한다.
남달리 영특했고 호방하며 문무를 겸비했던 사도세자, 그는 성군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지녔었다.
하지만 그 자질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억눌리고 당쟁에 의해 사라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영조는 아들을
잃었고, 조선은 위대한 왕이 될 인물을 잃었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앓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희대의 비극
조선 역사상 사도세자만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세자는 없다. 영조 38년인 1762년,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힌 지 9일 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가 뒤주에 가둬 아들을 죽게 한 이 사건은
왕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참한 기록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의 광증이 자초한 결과라는 것이 오랜 정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 죽음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기록돼 있다
. ‘천자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됐고, 대리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병의 증세가 더움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와 환시를 죽이고….
’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도 세자가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기술돼 있다.
부왕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까지 했다며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영조의 꾸지람을 들은 사도세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설이 퍼지게 된 것은 「한중록」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영조에 대한 공포심
역사학자들은 사도세자가 광인이 돼버린 데에는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엄격함이 큰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칭찬과 인정보다는 비난과 비판을 들었던 사도세자는 점점 더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됐고,
영조 앞에선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영조는 42세에 얻은 귀한 늦둥이 아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을까.
영조는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왕이었다.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적통이 아닌, 숙빈 최씨의
소생이라는 점이 약점이었다.
영조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스스로 학문에 더욱 매진했고 노론과 결탁했다.
아들인 사도세자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히 높았다.
아버지로서 속으로야 아들에 대한 애정이 왜 없었겠냐마는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칭찬보다는 질책을, 압박을 더 많이
준 아버지였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이 안타깝게도 잘못 표현돼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아버지 영조의 기대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했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사도세자는 점점 더
아버지 앞에서 위축돼버린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부자 사이에 점점 더 큰 오해의 벽을 쌓게 만든다.
종내에는 광증의 증상 중 하나인 옷을 잘 입지 못하는 의대증도 나타났는데, 정신분석학자들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으면 아버지 영조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진 아들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정치적 성향이 달랐다. 영조는 노론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소론 세력을 지지
했다. 이 또한 부자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사도세자가 집권당인 노론으로부터 배척받게 된 이유가 됐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무예 연습에 열중하는 것도 싫어했다. 이에 대해서는 학문에만 정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사도세자가 자신을 해하기 위해 무예에 열중한다고 생각해 진노했다는 설도 있다.
사도세자라는 이름은 영조가 아들의 사후에 붙여준 이름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영조의 행동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시대마다, 작품마다 달리 조명되는사도세자 엿보기 드라마&영화 속 사도세자
영원한 제국(1994)
이인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사도세자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해 관심을 끌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비참하게 간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려 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영화다. 이 작품에서는 사도세자가 노론의 모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MBC-TV 조선왕조 500년(1998)
세월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도세자는 화병에 걸려 광증을 일삼았던 인물로 그려진다. ‘
조선왕조 500년-한중록 편’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충실히 따랐다.
사도세자는 엄한 아버지 영조 밑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그만 화병에 걸려버린 유약한 아들로 그려진다.
혜경궁 홍씨는 부자 사이에서 이들을 중재하려 애쓰던 가련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SBS-TV 무사 백동수(2011)
사도세자를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개혁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비춰볼 때 드라마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해석으로 평가됐다. 드라마에서는
사도세자가 북벌을 꿈꾸다 청나라와 결탁한 노론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묘사했다.
SBS-TV 비밀의 문(2014)
지난 9월부터 방영되기 시작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드라마. 사도세자를 성군이 될 만한 재목이었던 인물로 조명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도세자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인물로 표현되는 한편, 아버지 영조는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보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그려지고 있다.
사도세자를 광인으로 묘사했던 과거 드라마들과 달리 오히려 아버지 영조의 광기를 보여주는
등 해석이 새롭다.
역린(2014)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주인공인 영화 ‘역린’도 사도세자에 관심 있는 이라면 볼 만하다.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로 인해 평생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 그럼에도 화합을 꾀해야 하는 왕의 입장이 뒤섞여 복잡한 내면을
안고 살았던 인물.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공표한 정조의 삶이 실감 나게 그려진다.
제목인 ‘역린’은 용의 가슴에 거꾸로 난 비늘이란 뜻으로, 정조의 역린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뜻한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네이버에서 펌
최근 각종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사도세자가 재조명되고 있다. 사도세자에 대한 붐을 어떻게 보나?
요즘 사회상과 세태 등이 맞물린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불합리하다고 느끼면서 잘못된 사회구조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모습에 감정 이입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중록」의 시각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노론의 당파 권력이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사도세자에 대한 오해가
계속됐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시스템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 싸움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2백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이다. 사도세자를 어떤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사도세자는 정치 개혁을 꿈꿨던
인물이다. 영조를 왕으로 만들어준 것이 노론이었지만, 사도세자는 노론에 대한 부채가 없었다.
북벌을 꿈꿨고 무인의 기질도 다분했다.
왕실을 강화하려는 꿈을 꿨고, 이를 위해 소론과 손을 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성향 때문에 반대편인 노론이 상당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개혁을 꿈꾸다 거세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는 어떤 인물인가?
정치적인 야망이 컸던 인물이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노론이고, 실행자는 혜경궁의 부친인 홍봉한, 동조자는
혜경궁 자신이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비극이 영조의 이상 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충돌한 결과로 자신과 친정은 연관이
없음을 강변하기 위해 쓰였다.
정조가 살아 있던 1편에서는 사도세자와 자신의 친정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어필하지만, 정조가 죽고 나서 쓴 2~4편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비난이 적혀 있다. 사실과 다른 점도 많다.
「한중록」에는 세자의 온궁 행차가 초라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영조실록」에는 호위 병력만 5백20명이 되는 장엄한
행렬이라고 기록돼 있다.
대리청정했던 세자는 이때 1천여 명에 가까운 행렬을 능숙하게 지휘했다.
정신병이라는 말과 달리 오히려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군마가 탈출해서 농토를 상하게 하자 쌀 한 섬을 주인에게 보상했고, 작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세금과 요역을 감면해주라고 하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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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책에서는 [한줄리뷰#40] 이덕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서
혜경궁 홍 씨의 기구한 생애를 그린 '한중록'은 사실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가해자의 기록이다니
혜경궁 홍 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이고 만든 주범이었다.
그리고 혜경궁 홍 씨는 자신의 집안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도세자가 아니라 친정 가문을 택해
그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왕들은 전부 사도세자의 자손들이었다
그후 왕실의 가계는 사도세자손.
. 영조는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썼지만 자기 아들은 당쟁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보여지니 참 아이러니하다.
참고로 말하면 <한중록>도 노론의 입장에서 쓴 책으로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보면 노론을 두둔하고 세도세자가 죽게
된 경위를 허위로 기재한 부분이 여러 군데에 보인다.
나중 이야기이지만 사도세자가 혜경궁 홍씨 외에 여러 여자를 가까이 하여 아들을 여럿 둔 탓에 조선의 왕위가 이어져 갔으니,
정조 다음 다음인 헌종 대에 가서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손을 찾다보니 모두 사도세자가 낳은 아들의 후손이었다.
즉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손이고, 고종은 사도세자의 아들에게 양자로 들어간 사람의 후손이다.
사도세자―정조―순조―(익종)―헌종
―은언군―상계군
―풍계군 * 은전군의 양자로 감
―전계군―회평군(원경)
―영평군(경응)
―철종(원범)
―은신군―남연군 ―흥녕군 *남연군은 인조의 7대손으로 은신군
에게 양자로 온 것임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고종-순종
―은전군―풍계군―완평군
** 은언군, 은신군은 후궁 임씨의 소생이고 은전군은 후궁 박씨의 소생이다.
** 은언군, 은신군은 영조47년(1771) 2월 제주도로 귀영을 갔다가 은신군은 그해4월12일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 중에 임세재(林世載)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옹진군향리지에 의하면 그의 조상들은 신분은
양인(良人)이나 실제 하는 일은 천민과 다름없는 목장의 목부(牧夫)였다. 임세재는 힘이 장사였고 서울로 올라와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사도세자를 호위하는 무사가 되었고 사도세자의 권유로 무과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상관(上官)이 뒤주를 치우라고 하자 “ 가장 존경하는 분을 가두어 죽인 이 뒤주만은 치울 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가 상관이 거듭 치우라고 하자 할 수 없이 치웠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정조의 배려로 군수, 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품계도 많이 올라가 그 사람부터 양반 행세를 하였으며 그 후손들도 양반행세를 하였다고 한다.
위 글 사진 네이버 여러곳에서 펌 에서 펌 ( 함춘원과 경모궁 [출처] 사도세자는 왜 뒤주속에서 죽었나)
융능을 찾아서
용이 노니는 장소에서 용의 눈물인 여의주를 문 용의 조각을 보고 작은 원의 호수에서도 용이 잠겨있을 것 같고
가볍게 내린 눈이 마치 하얀 비늘을 가진 용이 구불구불 산의 능선의 길을 넘어가는 갓 같은 그 오솔 길을 난 걷고 있는 것이다.
융릉의 문인석과 무인석18세기 조선 문화의 꽃이 만들어낸 최고의 미감이다. 석상이 장엄하면서도 우아하다.
푸근한 솔숲 사이로 난 흙길을 소풍 하듯 걸어가면 왕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잘 다듬어진 공원 같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은 음력 섣달 햇살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 홍살문을 뒤로하고 정자각과 능묘가 한눈에 들어온다.
융릉 병풍 담 뒤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가 한눈에 보아도 서기가 넘친다.
융릉의 형국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으로 지세가 부드럽지만 힘이 있다고한다.
정조는 이런 지세를 알고 융릉에서 내려다보이는 오른쪽 용의 머리 부근에 여의주 모양을 한 원형의 연못을 파게 했으며
화룡점정처럼 용이 여의주가 없으면 결정적인 무엇이 없어 보일 터인데,
용이 노니는 장소에서 용의 눈물인 여의주를 문 용의 조각을 보고 작은 원의 호수에서도 용이 잠겨있을 것 같고
가볍게 내린 눈이 마치 하얀 비늘을 가진 용이 구불구불 산의 능선의 길을 넘어가는 갓 같은 그 오솔 길을 난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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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도 안탑깝고 가슴아픔 사연인데 이해를 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를 할수없는게 정치인가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성들여 만드신 자료 감사히 읽었구요.
낭만님은 역탐방 보물이세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효자 정조 임금 역사적인 맥을
그런대로 정리 가늠 할 수 있게 해 줘 너무도 고맙구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은 자료 제공 더 없이 감사 드립니다.
낭만님~~~~잘읽고 갑니다....
역사 공부를 다시 했습니다. 안타까운 사도세자의 죽음은 슬픈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낭만님 대단하시군요...
긴 역사의 터널을 이렇게 밝게 비춰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언제나 좋으신 역사선생님 오늘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제대신 짝지가 읽어보고는 좋아 합니다요 ㅎㅎㅎ
隆陵,健陵 보던날도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을듯.............../듯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