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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설악무산 스님 선시 해설>
설악무산스님의 무애가
권 현 수
1
법랍 80년을 눈앞에 둔 노구를 꼿꼿이 세우고 주장자 높이 들어 서슬 푸른 선기로
선방을 지키는 스님이라면 선승禪僧이라 불러 마땅하지만 스스로 선승이라기보다 시승詩僧이라 부르기를 좋아하는 시력 50년을 바라보는 승려시인이 있다.
바로 설악무산 스님, 조오현 시인이다.
스님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거의 문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여 진다. 신문 한 귀퉁이에 소개되는 한 편의 시나 시조로부터 석, 박사 학위논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 평론가 학자들의 시선으로 정리, 편집, 출간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이와 같은 문학적 조명은 선승으로서의 사자후로 드러난 선시의 독창적인 영역 개척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선의 본적지인 중국 선사들의 한문 선시를 우리글인 한글로 표기된 전통 시조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선가의 전통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최근의 성철 스님만 하더라도 열반송을 한문으로 쓰고 한글로 번역하여 발표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을 한글 선시의 효시로 보아도 무산스님의 이와 같은 행적은 한국문단의 하나의 독창적인 영역 개척이 분명하다. 1978년 첫 시조집인 “심우도”의 해설을 맡은 이근배 시인은 “조오현은 하나의 경이다. 1970년대의 한국시가 조오현과 만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라고 놀라워하며 “조오현은 우리 시단(자유시와 시조를 막론하고)에서 가장 굵은 힘줄을 드러내고 있는 시인이며 그가 이후에 더욱 진경하여 보여줄 시계에 우리는 두려움까지 느끼게 된다.”라고 예언했었다. 이와 같은 예언을 따르듯 스님은 가람 이병기가 “정형의 형식과 현대의식의 부족에서 오는 시조를 개신하자”라는 말에 부응하듯 형식을 개신하고, 내용을 개신하고, 민족혼의 근저에 뿌리한 선을 바탕으로 한 시 작업을 꾸준히 하여 그 결과가 오늘에 이른 셈이다. 그러니 “조오현의 시조는 현대시조사에 유례없는 개성적이고 독보적인 자리에 올라있다”(이숭원 평론가) “시조라는 형식을 선방으로 끌고 가 경허 달마라는 관문으로 돌진했다”(서준섭 시인)라는 평을 듣게 되면서“한국 현대 시조가 이루어 놓은 하나의 성취”(유성호 평론가)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무산스님은 지금 백담사 무금선원에서 하안거 중이시다. 제대로 된 선시의 본령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현대선시라고 이름 하는 많은 시들이 수행이 따르지 못한 시인들의 선시풍의, 선취시가 될 수밖에 없는데 반하여 스님의 시는 당연히 선시이고 현대선시라고 이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문예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려는 이즈음에 무산스님의 현대선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그 뜻을 다져 보려는 의의 또한 그러하다.
2
스님은 “나는 비구나 시인이길 원하지 않는다. 무한정 떠나고 떠나가고 싶을 뿐이다”(열흘간의 만남)라고 말한다. 바로 수행자로서의 마음 그 자체다. ‘무아’를 깨달아 진정한 자기, 본래의 자기, 진리의 그 자리를 바로 보기를 소원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님은 “굳이 불교와 문학, 훌륭한 수행승과 훌륭한 시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시인보다는 스님을 택할 것 같습니다. 말은 겸업이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본업은 수행자란 뜻이지요.”(열흘간의 만남) 그리고 스님은 이어서 “평생 시승詩僧 칭호로 살아오면서 고작 시조 100수, 시 30여 편(2004년 [열흘간의 만남] 출간당시)이 될까 말까 하니 시승이라 할 수도 없지요. 또한 스스로 자신이 시인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그것을 시로 씁니다.”라고 밝힌다. 이는 스님이 본래 자기 면목을 찾기 위한 수행의 과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시조와 시를 통해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님의 시는 그 자체가 수행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보면 시업 반세기동안 130여수라면 적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스님의 시는 게송시조, 고칙시조 등을 포함하는 선시조로부터 자유시, 콩트, 이야기시 등 스님의 선기 넘치는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 자유분방하고 무애자재하기 이를 데 없다. 모두 스님의 무애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원효스님이‘소성거사’를 자처하며 신라의 거리를 박을 치며 춤추고 노래할 때 불렀다는 그 ‘무애가’말이다.
선시 중의 선시는 역시 오도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산스님은 오도송이라고 꼭 집어 말하는 시가 없는 것 같다. 많은 글을 보았는데도 스님 스스로도 언급한 것을 찾을 수 없고 “아득한 성자”(김형중 법사)나 “출정”(최보식 기자) “내가 나를 바라보니”(이은봉 평론가)를 오도송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스님은 2007년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깨달았다는 게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우리가 먹고 살고 죽는, 삶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없어졌다 그거지. 의심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지.”라고 쉽게 풀어 말한 적이 있다. 깨달음을 인가 받은 큰스님들의 큰 말씀과는 큰 차이가 있는 소박한 대답이라 ‘역시’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필자는 숭산 스님이 주석하시는 화계사 선방 말석에 앉아 10여년 죽비소리 들으며 졸아보았던 인연으로 “무산 심우도 8 인우구망人牛俱忘”을 스님의 오도시라고 추정해 본다.
히히히 호호호호 으히히히 으허허허
하하하 으하하하 으이이이 이 흐흐흐
껄껄걸 으아으아이 우후후후 후이이
약 없는 마른버짐이 온몸에 번진 거다
손으로 짚는 육갑 명씨 박힌 전생의 눈이다
한 생각 한 방망이로 부셔버린 삼천대계여
-무산심우도 8 인우구망人牛俱忘 전문
심우도尋牛圖는‘심우/ 견적/ 견우/ 득우/ 목우/ 기우귀가/ 망우재인/ 인우구망/ 반본환원/ 입전수수’등의 열 개의 선화를 이르는 말로 수행자가 정진精進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禪畵라는 것은 불가에서는 잘 알려진 일로 많은 선사와 시인들이 이에 붙이는 선시를 써서 더욱 유명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경허스님, 만해스님을 이어 무산스님도 첫 시조집의 제목을 “심우도”라 부를 만큼 경도하고 있다.
스님은 옛시조의 율격을 그대로 살리면서 시조 한 수를 몽땅 웃음소리로 채우고 있다. 통쾌한 웃음, 장난기 어린 웃음, 허탈한 웃음 등. 그 중에서도 우리 가슴에 가장 와 닿는 웃음은 헛웃음일 것이다. 아니 그 모든 웃음소리가 바로 헛웃음이다. 그토록 매달리던‘나’라는‘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훌훌 벗어버리고 시간도 공간도 없는 바로 그 순간을 바라본 텅 빈 ‘공’ ‘무아’의 그 자리에 서 보니, 그저 허탈할 뿐이고 헛웃음 밖에 나올 것이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많은 수행자들이 그 순간에 또는 몇날 며칠을 그 웃음 속에 지냈다는 이야기는 선방의 일화로 전해 내려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스님은 “삼천대계”를 “한 생각 한 방망이로 부셔버”리라고 일갈한다. 덕산의 ‘방’이나 임제의 ‘할’을 연상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바로 눈앞을 보니 “마른버짐이 온몸에 번지고”있고 미래를 보는 “육갑”을 짚어 보아도 과거를 보는 “전생”을 보아도 거기에는 ‘공’이고 ‘무아’일 뿐이다. 스님은 드디어 본래면목을 찾게 된 것이다. 깨달음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오도송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열반송을 보아야 할 것인데 근래에 회자된 성철스님의 유명한 열반송에서도 알다시피 보통은 열반을 예감한 스님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상례인데 무산스님은 여전히 무탈하시고 오도송도 그러하듯이 열반송도 아마 딱 집어 말할 것 같지 않으시니 굳이 찾아보자면 스님의 시 중에서 많은 관심을 받으며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아득한 성자”를 조명해 보아야겠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아득한 성자聖者 전문
스님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 시를 열반송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까닭은 이 시대의 우리 눈으로 확인한 성자이신 성철 스님의 열반송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견해 속에 회자되고 있는데 그 속에 담긴 회한의 정조가 스님의 이 시조와 많이 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의 열반송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고 하신다. 물론 이 말은 말 그대로가 아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평생 말로 가르쳤으니 그 회한에서 오는 참회의 마음이다. 부처님께서도 “일찍이 나는 한 말도 한 적이 없다”라고 45년 설법으로 가르치신 당신의 말씀을 전부 부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스님이“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은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다”고 참회하고 있는 그 회한의 정조다.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그저 “아득”할 뿐이니 하루살이 보다 못하구나 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야 말로 성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집착을 모두 털어버리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미련 없이 떠나는 하루살이. 무아를 체감하고 공의 세계에서 무애자재하게 사는 성자가 바로 하루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살이에게는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 시간과 공간이 소멸한 ‘지금 바로 여기’만이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하루살이의 삶이 바로 성자인데 시적화자인 스님은 아직 “아득할”뿐이라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무간지옥’과 상통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그래서 열반송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해마다 여름 겨울 두 철, 석 달씩의 안거를 한다.
신흥사 향성선원, 백담사 무금선원, 무문관, 기본선원등 네 곳의 선원에는 그 때마다 100여명의 수좌들이 안거에 들어 수행정진만을 위한 결제를 한다. 3개월의 고된 수행을 마칠 때면 선원을 지키던 조실스님은 떠나는 수행자들을 격려하면서 해제법문을 하기 마련이다. 성철스님이나 여러 큰스님의 법문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전해져오며 수행의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무산스님의 법문은 스님답게 파격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2012년 동안거 해제법문을 보자. “진리는 없다. 절마다, 교회마다, 방송마다, 신문마다 진리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음이 된지 오래다.” “노망기 있는 노승의 법문을 듣기보다 동해 바다의 파도소리와 설악산의 산새소리, 계곡물 소리를 듣는 것이 낫다.”하신다. 그리고 “대장경의 글과 말 속에 무슨 진리가 있느냐. 여러분은 오늘 산문을 나가 만나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의 가슴 아픈 삶 속에 진리를 찾아라.”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보라.‘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대승불교의 본체인 자비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호통이시다.
스님 역시 두 손을 드리우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생선 비린내가 좋아 견대 차고 나온 저자
장가들어 본처는 버리고 소실을 얻어 살아볼까
나막신 그 나막신 하나 남 주고도 부자라네.
일금 삼백 원에 마누라를 팔아먹고
일금 삼백 원에 두 눈까지 빼 팔고
해 돋는 보리밭머리 밥 얻으러 가는 문둥이여, 진문둥이여.
-무산심우도 10.입전수수入廛垂手 전문
시적화자, 스님이 서 있는 곳은 중생의 생생한 삶의 터전인 저자거리다. 그리고 그는 “장가들어 본처는 버리고 소실을 얻어 살아볼까”하는 은근한 바람을 가지고 있어 아직도 삶의 미망을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나막신 그 나막신 하나 남 주고도 부자”인 인정 넘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인은 2연에서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진문둥이”의 극한적인 삶의 현장을 노래한다. “일금 삼백 원”의 적은 돈을 받고 마누라와 두 눈까지 팔아먹을 수밖에 없는 “진문둥이” 그리고도 그 몸으로 밥을 얻으러 가야 하는 참으로 눈물겨운 중생의 참담한 현실, 그 현장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곳에 진리가 있다’라고 스님은 일갈하는 것이다.
무지에서 오는 중생의 힘겨운 삶을 측은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깨달은 자의 눈이 거기에 있다. 그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스님의 스승 경허스님의 뒷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점이다.
성철스님이 주장자 높이 들어 서슬 푸른 기상으로 선방을 지킬 때, 무산스님은 시승답게 만해스님의 뜻을 이어 펴듯 '만해사상 실천선양회'를 통하여 만해스님의 이상을 세상에 펼치며 문단에 뛰어들어 면면히 흐르는 민족혼, 불심과 시심을 챙겨들기도 하신 것이다.
대 만행이다.
1500여년 중국 선종사와 그 절대적인 영향 하에 면면히 이어온 한국 선종사의 전통을 넘어 현 시대에 부응하는 한글 선시조의 창시자로서 무산스님은 그 무애자재하고 자유분방한 파격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 가까운 절집 생활을 하는 수행자답게 진리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을 드러내 보이는 시심을 감출 수가 없다.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며칠 전 해인사에 계시는 사숙님이 오셔서 "요즘 뭘 해?" 하시기에 위의 시조를 지어 보여 드렸더니 "미친 놈! 나는 병病이 다 없어진 줄 알고 왔더니 병이 더 깊었군. 언제까지나 도道는 안 닦고 장구章句 따라 다닐 참인가? 또 헛걸음했군!"
-절간 이야기29 전문
옛시조의 음률이 그대로 남아있는 시조에다 뒷말 같은 해설을 부쳤다. “사설시조의 산문시로서의 영역확장”(이지엽 평론가)이라는 평을 듣는 시집 [절간 이야기] 속의 29번째 시이다. “미친 놈!” 소리를 들으며 “언제까지나 도道는 안 닦고 장구章句 따라 다닐 참인가?"라는 사숙님의 질책을 들으면서도 스님은 여전히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라고 절규하는 구도자이다. 나를 버리려고, 버리려고, 떠나려고, 떠나려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한 수행자의 진지한 모습이 그려진다.
“시조, 산일 1” 그리고 “마음 하나” 등 스님의 많은 시들에서 깨달음을 향한 시인의 고된 시심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스님은 깨달음을 얻고 열반송까지 노래하며‘평상심시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밤늦도록 책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 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 그 만론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파도 전문
산과 들 만이 아니다. “밤하늘”도 “먼 바다 울음소리”도 모두 하나가 되어 스님과 함께하는데 “천경 그 만론이” “바람에 이는 파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 속의 그 많은 논지들도 그것을 읽으면서 스님의 머리를 오고가는 생각의 줄기들까지 그저 모두 바람 따라 일어나는 파도 일 뿐, 그 아래 본래의 내 편안한 마음은, 바다 속처럼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은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변함이 없는 것이다. 진여의 자리, 존재의 본원 바로 그 자리다. 이제 와서 스님의 모든 생활은 ‘평상심시 도’ 그 자체가 되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 다리
-무자화無字話-부처 전문
그저 그대로 여여한 도의 경지다.
3
2016년 최근에 시인, 평론가, 대학교수, 정치인, 스님 등 무려 115명의 해설이 실려 있는 설악무산스님의 한글 선시를 엮어 [이·렇·게·읽·었·다](도서출판 반디)를 펴낸 권성훈 평론가는 “스님의 시는 한국현대시의 한 분파로 이해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스님 시 연구의 대부분이 불교적 세계관으로 집중됐던 것에서 문학적 관점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스님의 시는 한문 일변도의 선시를 한글선시로 확장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이 사실이니 스님 한글선시의 종교적 경지는 물론, 종교를 넘어선 초월적 경지의 가르침까지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문예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려는 데 즈음하여 현대선시의 한 획을 그은 무산스님의 이와 같은 행적을, 깨달음을 향한 구도자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았다. 이는 수많은 학자 평론가들의 활활발발한 스님 시의 해설에 이은 필자의 작은 소감에 지나지 않음은 물론이다.
권현수 | 2003년 《불교문예》시 등단. 시집『칼라차크라』『고비사막 은하수』가 있음.
첫댓글 김명옥 선생님~!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을 예각으로 바로보신 해설서입니다.
출가하기 전, 침묵의 경계를 거니는 근원적 습성을 옆에서 지켜 봤기에
나직히 현을 켜는 시품 속엔 수묵으로 젖어드는 감동이 엄청 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