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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원문보기 글쓴이: 비키니를입은너의모습을보았을때..
아래글은『역사 한잔 하실까요?』의 어느 한부분까지 중요부분을 친것입니다. 아- 그리고 이 책은 최근에 나온 것입니다.
약1만 2000년 전에 중동에서 농사 기술을 채택.
맥주가 기원전 4000년경부터 근동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혀재의 이라크의 테페 가우라(Tepe Gawra)에서 발견된 상형문자에는 커다란 도기에 담긴 맥주를 갈대 빨대로 마시는 두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대 맥주는 표면에 곡식 낟알이나 겨 또는 다른 부유물 등이 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삼키지 않으려면 빨대가 꼭 필요했다.)
뜨거운 물에 담그면 수분을 흡수하여 부풀이 터지면서 수프에 녹말 성분을 방출하게 되고 그에 따라 농도가 짙어지는 것이다.
곡물은 말려서 보관하면 수개월 또는 수년동안 저장이 가능했으며, 별 재료가 없을때에도 수프나 죽으로 만들 수 있었다.
1시간 동안 907그램의 곡물 수확한다면 선사시대의 가족이 3주동안 8시간만 일을 해도, 가족 모두가 1년 동안 매일 453그램의 곡물을 먹을 수 있다.
곡물은 물에 담그면 바로 발아되어 단맛을 낸다. 당화 효소를 만들어 내며 그 곡물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녹말 성분은 맥아당이나 몰트로 바뀐다.
과일즙을 발효시키다가 소량의 알코올이 함유된 액체(와인)을 우연히 얻게 되기도 하고, 물과 꿀을 혼합하는 과정(그러나 특정 계절에만 수확이 가능했으며 쉽게 부패되는 단점이 있다. 야생 꿀의 경우에도 아주 재하된 양만을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보관할 수가 없었다.
보리에 함유된 녹말 성분 중 15% 정도가 당분으로 변하지만, 맥아 성분이 된 보리를 물과 혼합하여 끓이게 되면 고온에서 활동하게 되는 또 다른 녹말 전환 요소로 인해서 더 많은 녹말이 당분으로 변하게 되고 그러한 효묘 성분이 작용하여 더 많은 당분이 알코올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맥주 양조영 빵인 바피르(bappir)로 맥주의 맛과 색상을 조절 하였다. 우선 발아된 보리를 작은 빵덩어리 형태로 빚은 다음, 검은 갈색빛이 돌 때까지 불에 두 번 구워서 바삭거리는 빵으로 만든다. 그러면 이러한 바피르는 수년 동안 저장이 가능하다.
수메르 시대까지만 해도 맥주에 떠있는 곡물이나 왕겨 그리고 다른 부스러기들은 길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옥수수로 빚은 술인 치차(chicha)를 황금잔에 담아서 떠오르는 태양신에게 바쳤으며, 대지의 여신에 대한 제물로서 그것을 땅바닥에 붓거나 첫 번째 한 모금을 뱉어버렸다. 아즈텍 문명의 사람들은 용설란 즙으로 빚은 풀케(pulque)라고 부르는 천연주를 다산의 여신인 마야우엘에게 바쳤다.
맥주는 오랫동안 저장하기 어려웠으며 완전하게 발효가 되는 데에도 1주일 가량이 걸렸기 때문에, 대부분 발효가 되는 동안에 모두 소비되었을 것임에 틀림엇다. 상대적으로 낮은 알코올 성분을 지니고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발효가 중단된 효모가 풍부하여 단백질과 비타민 성분이 상당히 증가된 상태였다. 특히 비타민 B가 아주 풍부하게 쉬운 영양분을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보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빵과 맥주를 마시는 행위를 야만인과 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으로서 간주하였으며, 그 두가지를 먹고 마시게 됨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술에 취한다는 상황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의 문헌 중 술에 취한 상태에 대한 대부분의 참고자료들은 농담과 유머로 구성되어 있다.
‘헥트(hekt)’ 하토르(Hathor) 이집트에서 잔인한 여신
고대 이집트에선 술에 취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기록에 따르면 수메르의 사원 작업 인력 중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하루에 1실라(sila)의 맥주를 지급받았는데, 그 분량은 1회 식사의 일부로서 대략적으로 1리터 정도가 되는 것이었다. 중간 관리직들은 2실라를 받았고 고위직 관리들과 왕궁의 귀부인들은 3실라를, 그리고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5실라를 받았다.
빵과 맥주를 급여나 통화로 사용
기원전 9세기 초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와인은 그 생산지인 산악지역에서 북동쪽으로 가져와야만 했기 때문에 아주 소량만이 이용 가능했다. 와인을 산악지역에서 평지로 운송하는 비용은 맥주에 소요되는 것보다 최소한 10배 이상 비쌌다. 따라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국적인 외국의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에 따라서 와인은 오직 엘리트 집단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마실 수 있었으며, 그 1차적인 용도 또한 종교행사에만 한정되었다.
고고학적인 증거로 보자면 와인은 신석기시대인 대략 기원전 9000년 전부터 기원전 4000년경 사이에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북부 이란 지역에 해당하는 자그로스 산맥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3000년에는 와인제조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와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나톨리아까지 퍼져나갔으며, 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유역인 레반트를 거쳐 이집트에까지 전해졌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대량생산을 하기에는 기후가 적합하지 않았다.
은화 1세켈(shekel: 헤브라이의 원래의 뜻은 ‘무게를 달다’이다. 약 11.42g에 해당하는 중량 단위로서, 이후에는 화폐단위로 사용되어 그리스의 4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은화로 통용되었다. 2실링 9펜스에 해당) 당시 매월 은화 1세켈은 가장 낮은 임금 수준이었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맥주를 아주 좋아했던 사람들조차도 등을 돌리게 되면서, 가장 세련되고 문명을 대표했던 음료로서의 맥주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와인의 시대가 시작된다.
사회적인 세련됨의 정수는 개인 음료 파티 또는 심포지엄에서 제공되는 최종혼합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이는 특별한 남성 전용방이나 응접실인 안드론(andron)이라는 곳에서 열린 남성 중심의 귀족의식이었다.
준비된 안락의자에 앉아 한쪽 팔을 쿠션에 기대고 있는 자세는 기원전 8세기경에 근동지역으로부터 들여온 풍습이었다.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물을 쉬지 않고 순수한 와인을 마시는 것을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오직 디오니소스만이 아무것도 섞지 않은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당시 특히 유행했던 것은 ‘코타보스(kottabos)’ 라고 불리는 마시기 게임이었다. 이것은 특정한 목표물에다가 컵에 남아 있는 몇 방울의 와인을 손으로 겨냥하여 뿌리는 시합이었다. 다른 참석자들이나 디스크 모양의 청동 물체를 목표로 허거나, 물이 가득 찬 그릇에 떠 있는 컵 등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컵에 담신 포도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튕겨 넣는 것이었다.
기원전 146년경 이탈리아 반도는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가 된다.
바닷물 향이 느껴지는 코스(Cos) 와인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코안(Coan)은 기원의 표시라기보다는 하나의 스타일이었다. (로마공화정)
AD 2세기에 대부분 원인을 알 수 없이 퇴보의 길을 걸었던 이탈이아 와인의 뒤를 이어 3세기 초반 북아프리카 산 와인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로 가장 좋은 최고 와인은 이타리아 캄파냐 지방에서 재배되었던 팔레르니안(Falernian: 이탈리아 남부의 캄파냐 지방의 화이트 와인, 주알리아니코, 그레코, 팔란기나라는 이름의 품종으로 현재까지도 재배되고 있다.)
로마의 콘비비움(convivium)은 그리스의 심포지엄의 경우만큼 평등적이지는 않았다.
포스카(posca)는 로마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는데 신맛으로 변하여 식초와 비슷한 와인과 물을 섞어서 만든 음료였다. 로마의 와인 중에서 가장 최하 계급제품은 노예들에게 지급되었던 로라(lora)이다.
차갑고 젖은 음식은 점액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뜨겁고 마른 음식은 담즙의 원인이었다.
와인은 뜨겁고 건조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담즙을 유발시키고 점액을 감소시켰다. 따라서 차가운 사람에게는 와인이 치료제로서 간주될 수 있었다.
혜택 받은 사람들이 다시 원기를 찾을 수 있는 샘물인 타스민(Tasmin)의 물로 그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서기 1000년 말, 서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문화가 발달했던 도시는 로마나 비잔티움 런던도 아니었고 바로 아랍 안달루시아의 수도인 코르도바 였다. 서기 970년경 완성된 공공 도서관은 약 50만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도서관은 코르도바에 세워진 70개의 도서관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구성 성분을 서로 분리시키고 정화시키기 위해서 액체를 기화시키고 다시 응축시키는 이 과정은 기원전 4000년경으로 올라가는 이것은 북부 메소포타미에서 발견되었는데, 이후의 상형문자 기록으로 판단해보면 그것은 원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었다. 그리스가 로마인들 또한 그러한 기법에 익숙해 있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끓는 소금물로부터 압축된 기체는 짠맛이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증류기술을 이용하여 와인을 만들었던 것은 아랍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증류시킨 와인은 알코올 성분이 더 강해지는데 그것은 비등점(섭씨 78도)이 물(섭씨 100도)보다 낮기 때문이다. 와인은 천천히 열을 흡수하기 때문에, 수증기는 액체가 끓기도 전에 표면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수증기에는 상온에서보다 더 많은 알코올이 포함되어 있으며 비례적으로 물은 더적게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알코올 성분이 풍부한 수증기를 추출하여 응축시키면 100% 순수한 알코올은 아니지만 와인보다 알코올 성분이 더 높은 액체가 만들어진다. 그 이유는 약간의 물과 다른 불순물이 100도 이하의 지점에서 기화되기 때문이다. 알코올 성분은 증류가 반복되면서 증가될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을 정류과정이라 한다.
현대어 알코올은 아랍 연금술사들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알코올음료의 기원을 예증하는데 ‘알코올’이라는 단어는 눈꺼풀에 무언가를 바르거나 칠할 때 사용되는 검은 색 가루인 정체 안티몬에 부여되던 알 코흘(al-koh'l)에서 유래 한다.
증류된 음료는 오랫동안 보관도 가능했다.
1386년 북서 스페인지역인 나바레의 통치자 찰스 2세는....(이 통치자가..술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12세기에는 증류된 와인은 불이 붙을 수 있기 때문에 ‘불타는 물’ 이라는 의미로 아쿠아 아르덴스(aqua ardens)라고 불려졌다.
13세기 말 증류된 와인은 기적같은 새로운 약으로 ‘생명의 물’의 의미인 아쿠아 비태(aqua vitae)로 불렸다.
아쿠아 비태에 해당하는 켈트어(아일랜드 등)인 ‘우스케 바하’는 현대어인 위스키의 기원이 되는 말이다.
아쿠아 비태는 독일어로는 ‘브란티바인’ 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브랜디 와인’ 또는 그냥 ‘브랜디’라고 부르게 된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려면 엄청난 양의 물과 인력이 필요했다. 아랍인들은 서족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일정한 관개 기법과 노동 절감 장비 등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페르시아인들의 지하 도수관 혁식품인 워터 스크루와 사탕수수를 가공할 수 있는 수력방앗간이 포함되어 있다.
유럽인들은 십자군 종교전쟁 기간 동안 아랍의 수많은 설탕 플랜테이션 농장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설탕을 재배하는 데 경험이 부족했으며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이처럼 아랍인들의 영향을 받은 설탕 생산은 대부분 동아프리카에서 수입한 노예들에 의존하였다.
1500년 까지 대서양 마데이라에는 여러 곳의 작업장이 생겨나고 2천여명의 노예를 거느리게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설탕 수출 지역이 된다.
4세기 기간 동안 약 1100만 명의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신세계 지역으로 이전되었는데, 이러한 수치는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서 잡힌 노예 중 절반이 선적되기 위해 해안가로 이동 하는 중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고통 받는 자들의 전체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노예를 공급해주었던 아프리카 노예상들의 대부분이 원했던 것은 강한 알코올 음료 같은 것이었다.
와인은 편리한 화폐 형태였다. 그러나 유럽의 노예상들은 브랜디가 더 낫다는 것을 빨리 깨닫게 되었고 선체의 비좁은 창고 내부공간에다가 더 많은 알코올을 채워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음료에 포함된 높은 알코올 성분이 방부제 역할을 하여 이동중에 변질을 줄일 수 있고 와인에 비해서 비교적 오랫동안 보관이 됐다.
노예가 찾아와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은 그가 원했던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개종될 수 있는지 물어보았을때 “영국 법률에 의해서 우리는 기독교도를 노예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노예들은 기독교로 개종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또 그렇게 된다면 개종한 노예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안되었다.
플랜테이션 기록에 따르면 캐러비안 구도 바바도스의 노예들은 일반적으로 1년에 7.5~11리터의 럼(사탕수수 물질등을 섞어 정류해 만든 술)을 지급받았는데(경우에 따라서는 50리터까지 받기도 함) 노예들은 지급받은 럼을 마시거나 다른 음식과 물물교환을 하기도 하였다.
럽을 배급하는 데 책임을 지고 있던 해군 회계관들은 영국 병기고에서 고안된 것으로 전해지는 주먹구구식으로 아무것도 섞지 않은 럼의 도수를 측정하였다. 그들은 럼에 약간의 물과 검은색 화약을 섞은 다음, 태양빛을 모으기 위해서 확대경을 이용하여 혼합물을 가열하였다. 만일 화약이 점화되지 않는 경우에 그 혼합물이 너무 약해서 더 많은 럼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또한 화약이 간신히 점화 되었을 때 그 혼합물은 48%의 알코올 성분에 해당하는 적당한 농도를 지닌것으로간되었다. (만일 혼합물의 농고가 너무 세면 폭발이 일어날 수 있으며, 회계관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선원들은 자체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전해진다.)
비타민 C가 부족하면 괴혈병에 걸리는데 맥주에는 이 비타민 C가 없었기에, 18세기에는 맥주에서 그로그로 교체되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그들에게 표준적으로 지급되는 음료는 맥주가 아니라 4분의 3리터의 와인(gis대의 와인병과 동일한 크기)이었던 것이다. 장기간의 항해 동안 이러한 음료의 할당분은 316밀리리터의 오드비(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로 대체된다. 와인은 비타민 C를 소량 포함하도 있었지만 오드비는 그렇지 않았다.
18세기 초 한 무역상은 럼이 아프리카 노예 거래 해안에서 주된 물물교환 항목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심지어는 금하고도 바꿀 정도였다. 럼은 또한 브랜드로부터 통화의 자리를 건네받아 카누 배를 젓는 사람과 경계병에게 지급되기도 했다. 럼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비가 가능했으며 훨씬 더 수익성이 있는 물품이었다.
북위 34~38도에 위치하는 북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의 지중해 지역과 동일한 위도에 있었기에 영국인들은 그쪽 기후도 지중해와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해왔다. 따라서 영국인들은 일단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세우기만 한다면 올리브와 각종 과일 같은 지중해산 농산물을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며, 영국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는 것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17세기 초 선원들은 항해시에 맥주를 마시면 괴혈병을 막을 수 있다고 찰못 믿고 있었다.
영국의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럼은 비싼 와인에 비해서 찌꺼기로 남는 당밀로 말들었기에 브랜디보다 훨씬 저렴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럼은 산업을 번성하도록 만드는 근간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뉴일랜드 지역에서는 캐러비안 군도등에서 당밀 원료를 수입해서 자체적으로 증류하여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럼은 서인도제도에서 만들어진것보다 못하였지만, 대부분의 음주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던 가격 면에서는 훨씬 저렴하였다. 그리고 럼은 뉴잉글랜드에서 생산된 것중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가공제품이 되었다.
설탕을 생산하는 영국령 섬지역이나 런던의 후원자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때문에 뉴잉글랜드의 증류업자들은 프랑스 지배하의 설탕 생산 섬 지역으로부터 당밀을 수입 했다. 프랑스는 자국의 브랜디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럼 생산을 금지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령 섬의 설탕 생산업자들은 유럽의 설탕 시장에서 프랑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형세였다.
1733년 당밀조례(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산출되는 설탕, 당밀, 럼주 등에 고율관세를 매기고, 영국령 산물은 면세조치 함) 제정. 법안을 통과시킨 것 자체가 영국 정부의 입자에서 보면 엄청난 실수였다. 밀수를 사회적으로 용인함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영국법에 대한 존경심을 떨어뜨렸으며 주요한 선례를 남기게 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설탕을 생산하는 영국의 다른 섬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뉴잉글랜드의 럼주 산업에 충분한 당밀을 공급할 수 없었다.
만일 그 조례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면, 프랑스 당밀 생산량을 줄이도록 강요했을 것이묘 그에 따라 가격도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국 식민지에서 수출의 80%를 차지했던 럼 경제의 주도둰을 빼앗게 됨으로써 뉴잉글랜드의 번영도 갑작스런 결말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세관관료들은 영국에서 임명하였는데, 세관 관료들 대부분은 영국 본토에 머무르며 급료를 받고 해외에서 이무를 수행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고 그에 해당하는 급료를 지급했다. 이에 따라서 이러한 하위직 관리들은 런던에 있는 그들의 상관들보다도 식민지에서 정착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을 더욱 동경하였다. 법안이 통과되어 몇 년 후의 몇몇 추정 치에 따르면 생산된 대다수의 럼중에서 6분의 5가 여전히 밀수된 당밀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보스턴에서 럼을 만드는 증류주 제조장은 1738년에 8곳에서 1750년에는 63곳으로 증가했다.
럼은 식민지 시대와 미국 혁명을 주도한 음료였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의 수많은 시민들은 또 다른 형태의 증류 음료로 인해서 럼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동쪽 해안가에서 서쪽지역으로 이동해간 정착민들이 발효된 시리얼 곡류로부터 증류해낸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정착민들이 스코틀래드 출신이기도 했지만 곡물 증류를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럼의 원료가 되는 당밀의 공급이 전쟁 기간 동안 중단되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보리나 밀, 호밀, 그리고 옥수수 같은 곡류들은 해안가에서 재배하기가 어려웠다.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손쉽게 재배가 가능해졌다. 럼은 해상을 통해 수입된 당밀을 원료로 해안가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제품이었다. 그러한 당밀 원료를 내륙지방으로 이송하는 것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반면에 위스키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만들 수 있었으며, 세금을 내거나 봉쇄되는 수입 원료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다.
17세기 독일에서는 아침식사에까지도 알코올 성분이 적은 ‘싱거운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관습은 15세기 중엽 예멘에서 처음으로 인기를 얻게 된다. 커피 열매는 흥분 효과를 위해서 씹어먹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음료로 마시는 풍습은 무하마드 알 다브하니(Muhamman al Dhabhani ~1470, 수피 수도자)라는 한 예멘 사람이 이룩한 혁신 덕분 이었다.
당시 커피(아랍어로는 쿠아바qahwah)는 야간에 진행되는 종교행사에서 졸음을 막기 위해 수피교도들이 이용했다.
커피가 1510년까지 메카와 카이로를 거쳐 아랍세계를 통해서 여과되는 동안에 그 물리적인 효과의 정확한 상태도 상당한 논쟁거리의 주제가 되었다.
커피는 수많은 무슬림들이 알코올 대신에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는 대체 음료가 되었다.
메카의 종교 지도자들은 1511년 6월에 커피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커피 소비를 금지하기 위한 가장 최초의 시도이다.
카이로의 고위 관리들은 카이로에서의 커피 판매와 소비를 금지한다는 법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커피 마시는 모임과 장소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커피하우스를 폐쇄하려는 의도는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1524년 메카와 1539년 카이로에서와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도 되었다.
1650년에는 커피하우스가 영국에서 문을 열었으며, 1660년에는 암스테르담과 헤이그에서도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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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와인을 끓여서 그 증류수를 모은 게 바로 브랜디로군요....당밀에다가 사탕수수 등을 섞어 발효시켜 정류(精溜)한 건 럼이고요....또 잡곡을 발효시켜 끓인 증류수가 바로 위스키라는 야그네요...좋은 것 배웠지만 비싼 술들이라 아는 척할 일이 없겠넹...ㅎ.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