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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문회 2월 교육법회(지월스님 계초심학인문)
-2022년 2월 11일 금요일 저녁 7시 극락전에서 불교대학총동문회 2월 교육법회가 열렸다.
동문40여명의 참석과 혜월 권순석 동문회장을 비롯한 교육부회장, 고문, 자문위원등 임원분들의 참석으로 여법한
법회를 진행 했다.
53선지수 합창단과 함께하는 노래로 떠나는 구법여행과 오카리나 연주등으로 마음을 정화하고
삼귀의, 반야심경으로 불전에 예를 드리며 법회를 시작 했다.
동문회장의 인사말과 강사스님 소개를 드리고 정수사 주지이신 지월 스님의 계초심학인문의 제1강을 경청했다.
반갑습니다. 저보다 뭐 제 이력을 더 잘 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다 잊어버렸는데..
늦은 시간에 많이 모이셨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이런 저녁에 야간에 법회를 잘 진행을 안 합니다.
체력이 좀딸리고 그래서 늦은 시간에 말을 많이 못하고 그래서 잘 안하는데 아무튼 이렇게 뵙게 됐습니다.
그래서 짧게 정해진 주제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데 오늘은 이제 첫 번째고 하니까 제가 생각하는 불교, 또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되는지 그런 걸 좀 먼저 말씀을 드리고 다음 시간부터 보조스님의 초발심에 대한 그런 얘기를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군 법회 지원을 몇 회 동안 하면서 우리 국군 장병들한테 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선택해 나가야 되고 그 선택은 자유다 그런데 그 선택의 결과는 본인의 책임이다. 이런 얘기를 서두에 많이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자유인데 책임은 본인한테 있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해야 될지가 참 망설여지고 어려울 때가 많다 라는 거죠.
그러면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선택은 가치의 선택 이다 라는 거죠.
두 가지 서로 다른 어떤 가치가 있을 때 어떠한 것을 선택할 거냐 라는 거예요.
오늘 법회에 참석할 것인지 말 것인지도 선택을 해야 되고 그런 선택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선택을 해야지 되냐 라는 선택은 가치의 선택인데 가치는 또 둘로 나눠 보면 도구적인 가치와 본질적인 가치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의 삶은 물질적 정신적 양적 측면으로 두 가지로 나눠볼 수가 있어요.
그거를 쉽게 “물심양면”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런데 이제 불교의 구체적인 가르침은 물심양면 그거를 좀 더 확대해서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그 정신적인 것을 또 수상행식 이래서 크게 다섯 가지 측면으로 우리의 삶의 구조를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인격의 구성 요소를 색수상행식 이렇게 5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를 크게 둘로 나눠 보면 물심양면이고 그런 물심양면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도구적인 것과 본질적인 가치 두 가지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거죠.
그러니까 도구라고 하면 경제적 혹은 사회적 지위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적인 것들이지 그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것일 수는 없다 라는 겁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하고 그렇지만 그런 도구적인 것들이 우리의 삶의 본질일 수는 없다는..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삶의 본질 이냐 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번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면 참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사는지가 좀 더 이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어차피 우리의 삶은 물심양면 인데 내가 물심양면인 우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시간과 어떤 열정 이런 것들이 물질적인 도구적인 가치를 얻기 위한 노력과 정신적인 어떤 좀 더 본질적인 가치를 얻기 위한 노력, 시간, 열정 그거를 비율로 나눠보면 몇 대 몇 이냐 라는 거예요.
물심양면인데 물질적인 혹은 도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시간과 열정 또 본질적인 어떤 이런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 투자하는 시간과 열정, 어느 쪽이 더 큰 것 같아요?
대부분 도구적인 가치, 어떤 물질적인 어떤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게 되죠.
그랬을 때 구체적으로 몇 대 몇이냐 이렇게 물어보면 어느 정도인 것 같습니까? 몇 대 몇인 것 같아요?
대부분 9 대 1? 아닌 것 같아요?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9 대 1에요.
이거는 제 얘기가 아니라 이거는 서양의 불교학자 콘즈라는 분이 얘기한 거예요.
9대 1이라는 겁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9 대 1로 물질적인 가치 도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 시간과 어떤 에너지를 많이 쏟게 된다...하는.. 그러면 그러한 삶을 우리가 뭐라고 그래요? 속물 그래요.. 9대 1이니까 물질적인 가치로 더 많이 기울어져 있으니까 속물이죠.
그러면 반대로 그 부등호가 이 반대쪽으로 이렇게 기울어졌다라고 하면은 이 속물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세상 물정 모른다라고 얘기해요. 세상 물정 모르는 것과 속물 어느 쪽이냐는 거예요.
나는 속물입니까 아니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그렇게 9대 1부터가 사람이에요.
그렇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어느 법사 스님이 10대 빵 아닙니까? 그러면 근데 9대 1부터 사람이지 10대 빵이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최소한 9대 1부터가 사람이에요. 그러면은 뭔가를 조금 더 우리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러한 법회에 참석했다라고 하는 것은 9대 1보다는 좀 더 한 8 대 2 정도로, 이렇게 좀 더 시간이 배려가 됐다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러면 이제 9대 1을 넘어서 8 대 2 정도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뭔가 좀 나의 삶을 더 낫게, 보람되게, 고귀하게 이렇게 살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7 대 3 정도 되면 어떨 것 같아요.
그때는 좀 심각하게 더 자기 삶을 이렇게 돌아보고
성찰하는 그런 분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정도만 돼도 어떤 현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7 대 3 만 돼도... 그럼 6 대 4면 어떨 것 같아요.
성인의 반열에 거의 올랐다라고 봐 야죠 그럼 5대 5 같으면 그야말로 이제 불보살의 경지로
진입하는 단계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어쨌든 우리의 삶은 이렇게 도구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으로 나눠져 있고 그런 선택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되는 어떤 그런 존재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순간순간 선택하는 선택의 총계가 나의 삶의 총계이고 그렇게 선택해온 것들이 현재 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현재의 나를 크게 5가지 측면으로 얘기하는 게 오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재 나의 삶의 총계는 지금 나의 이 오온, 내가 나라고 여기는 육체적 정신적 이게 나지 그걸 떠나서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이 따로 없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뚱아리가 1차적으로 나고, 이 감정이 나고, 이 생각이 나지 그리고 또 어떤 욕구나 의지 이런 것들이 현재 납니다.
그러한 현재의 나는 내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선택해 온 결과이고 어떤 삶의 기록이다..라는 거예요.
그게 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러한 선택은 내가 한 것이고 내가 감당을 해야 될 나의 몫으로 남아 있다 라는 거예요.
그거를 뭐라고 그래요? “자작자수” 내가 지어서 내가 맞고 “자업자득”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제가 최근에 이제 정월 대보름 이렇게 동안거 해제 법회 준비를 하면서 하남스님 법문을 이렇게 쭉 읽어보는데 선문답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 놓으신 게 있어서 읽는데 첫 번째 질문이 참선은 왜 해야 됩니까? 꼭 해야 되는 겁니까? 안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이제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하는 내용이 참 우리가 불교 신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참 간결하게, 꼭 이해하기 쉽게 표현 해놓은 법문이 있어서 소개를 드리는데 ..달마 어록을 인용을 해서 마음이 곧 부처다 부처가 곧 도고 도가 곧 선이다.
이게 이제 달마 어록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셨고, 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중생의 마음임을 알아야 된다 대체로 중생심에는 두 가지 구별이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물든 마음이다 그랬어요.
마음을 청정한 마음과 물든 마음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청정한 마음과 물든 마음으로 두 가지로 나눴는데 청정한 마음, 물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얘기하고 뭔가 얘기를 하려면 설정을 할 수밖에 없어요.
물든 마음과 청정한 마음 둘이 별개의 것으로 실제 하는 게 아니라 마음 수행을 얘기하려니까 마음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설정을 하는 거예요.
어떤 이 마음을 버리고 또 다른 마음을 찾는 게 아니라 마음을 청정한 면과 물든 면으로 나누어서 설정을 해놓고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럼 물든 마음은 뭐냐 하면 무명삼독이다..그랬어요
무명삼독, 무명삼독은 다 아시죠? 무명은 뭡니까?
무명은 명이 없는 게 무명이에요. 밝을 명자 명이 없는 게 무명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삼독을 일으키는 삼독 번뇌를 일으키는 거예요.
명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면 어둡다는 말이에요.
마음이 어두워요. 우리 마음은 본래 밝은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고 훤히 다 아는 건데 어두워져 있어요.
왜 어두워져 있겠어요.
여기도 지금 이 불 끄면 다 어둡죠 우리 마음도 이렇게 밝은 건데 왜 어두워졌냐 왜 무명이 됐냐라는.. 왜 명을 상실하게 됐냐라고 ..뭔가가 덮여 있고 가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럼 뭐가 덮이고 뭐가 가렸겠어요.
삼독 번뇌가 우리의 밝은 마음을 덮고 가려서 어두워진 것을 무명이라 그럽니다
그거를 중생의 마음, 물든 마음이라고 이렇게 설정을 했습니다.
그러면 물든 마음이 아니라 청정한 마음은 진여, 부처님 깨달은 마음 그리고 무명삼독에 가리지 않은 본래 청정한 마음을 또 따로 하나를 설정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불을 다 끄고 우리가 이런 법문을 하고 공부를 하고 뭔가를 한다 라고 하면 제대로 어떤 하고자 하는 어떤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지금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이 불을 다 끄고 어떠 어떠한 작업을 실행한다면 제대로 할 수가 없겠죠? 거기에 바로 수행을 해야 되는 어떤 이유, 목적이 있다 라는 겁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밝은 건데 무명 삼독으로 인해서 가려지고 덮여져 있어요.
그리 어두워졌어요. 빛을 잃어버렸어요.
천지 분간을 못하고 사물을, 어떤 판단을 못 내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물들어 있다 라는 거예요.
그럼 참선이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그런 물든 마음 무명삼독에 물든 마음 그래서 어두워진 마음 이것을 밝히는 데 있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무명 삼독에 의한 마음을 토대로 해서 살아간다면
어떠한 삶이겠느냐? 육도윤회 괴로움 이런 것들을 면치 못하게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우리의 본래 마음은 청정한 마음인데 이렇게 무명삼독에 물들어 어두워져가지고 제대로 된 어떤 삶을 살지 못하고 고해에 허덕이면서 이 육도를 윤회하게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참 안타깝냐 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아니 할 수 없다.
참선이라는 건 뭐냐 하면 이렇게 무명삼독에 가리 워서 실수를 하게 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을 바로잡는 것이 수행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제 주제로 청하신 자경문, 초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 달라 하면서 불교대학까지 다 공부를 하시고 이리저리 하면서 또 생활을 하시다 보면 또 부처님 가르침을 또 이렇게 잊어버리게 되고 뭐 이래저래 하게 되니까
우리가 다시 또 새해를 맞이해가지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부처님 공부를 다시 한 번 이렇게 하자 이런 취지로 초발심 자경문을 택했다.
뭐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말을, 시비를 걸자면 이건 말이 안 된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제가 지금 어기장을 부리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이 초심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대부분의 어떤 종교 신앙의 단계를 종교학자들이 크게 3단계 혹은 6단계 5단계 다양하게 나눠서 신행의 단계를 얘기를 해요.
근데 그거를 3단계로 나눠서 보면 청원태 희구태 체주태 3단계로 나눠서 얘기하는 학자가 있어요.
그럼 청원태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기복적인 단계예요.
뭔가 불보살님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한테 복을 준다. 어떤 구원을 준다.
이렇게 믿는 단계를 청원태 라고 그래요 쉽게 말하면 기복적 단계예요.
타력 신앙이죠. 불보살님이 나한테 어떤 복을 준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한테 구원을 준다.
이렇게 믿는 단계를 청원태라고 얘기해요. 더 쉽게 말하면 기복적 단계라는 겁니다.
그런 기복적 단계 그런 마음으로 어떤 불교든 또 신관념이 있는 타 종교든 인문을 해서 신행생활을 하는 그런 어떤 분들이 76.5% 이건 제가 정한 겁니다.
대부분이라는 거예요. 대부분이 청원태.. 기본적인 어떤 동기 목적 계기에 의해서 입문을 하게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나쁜 건 아니죠. 기복이 나쁘다 라고 할 수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을 갈구하고 또 행복한 삶을 영유하기를 원하고 바라죠.. 그러니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죠.
그런데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제 기복적 단계에서 추구하고 희구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도구적인 가치예요.
대부분 도구적인 가치를 청원태 기복적인 단계에서 추구하는 그러한 연유로, 동기로, 계기로 해서
어떤 종교 각자의 종교에 입문을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런 신앙생활들은 타력적 이에요. 밖에서 어떤 문제의 원인을 찾고, 밖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단계다 라는 그게 타력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문제는 아까 초기에 말씀드린 대로 자기의 선택이고 자기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되는 자업자득이고 자작자수인데 그런 어떤 문제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해결책 또한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타력 신앙이에요.
그런 신앙 그런 계기로 각자의 종교에 입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3분의 2 이상
그러면은 초심으로 돌아 간 다라고 했을 때 그러한 기복적인 단계 과정으로 다시 돌아 가자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아니죠?. 그럼 돌아가자는 겁니까? 우리가 이 정도로 공부를 하고 나서 다시 기복적인 타력 신앙으로 돌아가겠다.
그런 얘기는 아니겠죠. 제가 일부러 위장 불인이라고 한번 이렇게 설득을 해서 이야기를 드리는데 그러니까 그런 단계를 넘어서 초심으로 돌아가자 라고 하는 그런 얘기들은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조금 바꿨으면 좋겠어요.
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처음 불교에 입문할 때는 기복적인 어떤 그런 동기, 계기에 의해서 입문했다 하더라도 입문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또 실천을 하다 보니까
기복을 넘어서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고 답이 있다 라는 걸 알았다라고 하면 이제 뭔가 초심자 처음,
불교 입문했을 때와는 다른 형태의 신행을 지어나가야 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이 변화한 것을 발심이라고 본다면 그건 이제 초발심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다 라 는 겁니다.
화엄경에서는 초발심이 곧 견성성불이다 라고 초발심시변정각 그랬죠 그때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기복적인 자세로, 마음으로 입문한 거를, 그거를 초발심이라고 안 해요.
십신이 꽉 찬 단계, 십신이 성만된 단계를 초발심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때가 곧 정각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불교가 지향하는, 추구하는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알았다 라 는 거예요.
처음. 입문할 때는 불교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고 대부분 입문을 하게 되죠.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불교가 추구하는 가치,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 목적 이런 것들을 이제 이해를 했다 라 는 거예요.
알았다 라 는 거예요, 그걸 확신하는 단계, 이게 초발심이라고 보면 그 단계에 이미 성불을 마쳤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일체중생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 라 고 했죠.
그거는 뭐예요.
그 본질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라 는 거예요.
현실은 중생일망정 본질은 부처와 다르지 않다 라 는 거예요.
그거를 믿는 것,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 불교의 다른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의 어떤 단계나 과정을 크게 네 단계로 나눠서 많이 얘기를 하시죠 그 네 단계가 뭐예요.
신해행증 이 네 단계로 나누어서 어떤 불교 수행의 과정 단계를 많이 얘기를 합니다.
그랬을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믿음이냐 하면 기본적인 단계에서 믿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조금 전에 말씀대로 내가 곧 부처이고 나의 지금 이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 는 것 청정한 본래 이 마음을 믿는 것 이게 이제 바른 믿음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정신,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라 는.. 그런데 이런 것을 모르는 단계 또한 어떤 믿음이 있을 수 있어요.
불교 교리에 대한 전혀 이해가 없는 가운데 나는 불교가 좋아서 절에 왔고 이런 단계는 아직 불교에 대한 이해는 없으면서 인연이 좋은 그냥 불교 쪽으로 마음이 이렇게 끌리는 이러한 단계는 그저 신앙이라고 보면 그런 신앙이 나쁘지 않죠. 또 그런 나는 그냥 불교가 좋아,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
이런 단계는 순수한 어떤 종교적 신앙이고 그런 어떤 신앙을 토대로 해서 생활하는 것을 신념이라 그래요 종교적 신념이에요.
근데 구체적인 가르침은 정확하게 잘 모르지만 어떤 그냥 좋아요...
이런 어떤 신앙과 순수한 신앙과 신념에 의해서 각자 였던 종교를 신행해가는 단계,
그 단계가 있고 그런데 그런 단계들이 나쁜 게 아니라 순수하고 좋아요.
그런데 그런 동기, 청원태의 기본적인 단계에서 입문 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한 3년 4년 5년 10년 이렇게 절에 다니고 교회에 다니면 불경을 읽고 성경을 읽어서 예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좀 바른 신행으로 나가야 되는데 10년 20년 30년이 돼도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해요.
교리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성경을 안 읽어요.
경전을 안 읽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읽어요.
이러면 종교적 신념만 강화되고, 종교적 신념만 강화되면 그러한 신앙은 맹신으로,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맹신도 크게 문제될 거 없다. 치더라도 그런 맹신으로만 지속되면 광신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아요.
그럼 이 광신이 빛 광자겠어요? 미칠 광자겠어요?
무슨 광자로, 무슨 광신으로 흐르겠어요.
빛이 나겠어요? 아니면 미치겠어요? 그러니까 광신으로 흐르면 이제 많은 문제를 야기해요.
나의 삶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가족들한테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사회 전반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그런 어떤 광신으로 흐르게 된 다라 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반드시
그 종교에서 얘기하는 교리, 가르침을 토대로 한 믿음으로 발전해 나가야 된다. 그래서 이 신과 해, 신해행증할 때 믿음이 바른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종교에서 얘기하는 그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그러한 노력이 같이 따라져야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해를 각 종교에서 얘기하는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문,사,수라고 하는 과정 단계를 거쳐야 돼요 그러니까 들어야 돼요 법문을 들어야 되고 경을 읽어야 되고 성경을 읽어야 돼요 그게 문이에요.
그러니까 법문을 많이 듣고 또 경도 많이 읽고.. 읽어야 돼요 일단 그게 문이죠.
그러면 듣고 있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라는 거예요.
그다음에 따르는 것이 사,생각할 사자죠 사유,사 사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체적으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에요. 주체화하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그대로 듣고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를 깊이 사유해서 내 것으로 주체화하는 과정이 사예요.
잘 생각을 해보고 아 이래서, 그래서, 이렇게.. 바르게 이해하는 과정 그게 사유예요.
그 사유를 통해서 주체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그게 사라고 하는 겁니다.
문사 그러면 그렇게 듣고 읽고 주체적으로 사유해서 내 것으로 만든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수는 행동이에요. 구체적으로 이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이게 수입니다.
이 수라고 하는 수행, 주체적으로 내 것으로 만드는 이 과정이 왜 필요하냐면 불교 인식 논리학에서는 우리가 앎을 얻는 단계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서 얘기를 해요.
첫째는 감각적 직관 ,보면 ..들으면.. 바로 알아요.
그걸 뭐라고 하기 전에 보면 보는 대로 알고, 들으면 듣는 대로 알아요. 이거는 감각적 직관이에요.
감각은 5가지가 있죠. 오감 이런 감각 기관의 어떤 느껴지는 그런 감각, 이거는 바로 그냥 아는 거예요.
누구든지 아는 그런 감각적 직관이 있어요. 그거는 언어와 결부되기 이전의 감각이에요.
그래서 직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뭐냐 하면 지각이에요.
감각적으로 직관한 것을 언어와 결부시켜서 무엇이다, 어떠하다 이렇게 이제 아는 것을 지각이라고 그래요 그런 이제 지각적 경험 이런 것들이 쌓이고 모이고 해서 많은 어떤 경험을 쌓게 되고 하죠.
그런 그러한 어떤 경험 또 학습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해서 보지도 않고 감각기관에 촉발이 안 되는데도 그런저런 과거의 경험들을 토대로 해서 어떻다 무엇이다 라고 내리는 판단, 이를 추리 판단이라고 합니다.
추리 판단은 안 보고도 아는 겁니다. 그동안의 어떤 경험을 논리적으로 논리적 사유를 토대로 해서 많은 것을 추리하는 것을 추리판단 이라고 그래요
그럼 이 세 가지는 인간 이성이, 또 인간의 어떤 감각 또 인간 이성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해서 아는 일반적인 중생들의 어떤 이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 이런 이성의 영역은 불교 부처님의 앎과 구분 지어서 얘기하는 것이 분별지예요.
이렇게 하는 것은 분별지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이게 분별에 의한 거예요. 그럼 예를 들어가지고 지금 이게 이게 뭐예요?
종이죠. 이게 어떻게 알아요?. 이게 종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그럼 이거는 뭐예요? 칠판이 있어야 되는데 ..이건 뭡니까? 이거는 이거 마이크 줄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것들이 다 과거의 인식, 경험, 학습을 토대로 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것이 무엇이냐 무엇이다라고 하는 그러면은 이거는 또 뭐예요?
마이크예요. 이것도 마이크 ,이것도 마이크인데
그럼 이거 하고 이것이 서로 모양도 다르고, 다 다른데 이것도 마이크라고 하고 이것도 마이크라고 하는데 무엇을 근거로 이것도 마이크고 이것도 마이크냐 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인식 경험 학습을 토대로 해서 무엇은 무엇이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
분별을 내리는 겁니다.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이 모든 각자 경험한 것, 배우고 익힌 것이 동일하겠어요?
다르겠어요? 그러면 제가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했을 때 이것이 종이다 라고 하는 판단은 무엇을 토대로 내리겠어요?
각자의 인식, 경험, 학습을 토대로 해서
이것이 종이다 라는 판단을 내려요. 그럼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의 인식 경험 학습 내용이 같아요?
달라요? 다 다르죠 그럼 이런 판단의 근거는 동일해요?
달라요? 판단의 근거가 달라요? 다르죠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지고 무엇은 무엇이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럼 이러한 주장은 주관적입니까? 객관적입니까? 다분히 다 주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분별지라고 하는 거예요. 주관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아무리 내가 보기에는, 내 생각에는 무엇은 무엇이다 라고 판단을 내리고 주장을 하지만 그 판단 주장의 근거는 뭐예요?
각자의 인식 경험과 학습 내용이에요.
그걸 뭐라고 하냐면 이제 12연기를 토대로 얘기하면 무명업식 이예요 이게 각자의 무명업식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무엇이다 라는 판단을 내려요.
그런데도 내가 본 것이,내가 생각한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라는 확신이 있어요? 없어요?
왜 없어요. 있잖아 이 연사 s는 p라고 강력히 주장을 해요?
안 해요? 각자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그런 주장을 합니까? 안 합니까? 하죠!
그런데 그게 그 근거가 뭐예요. 학자의 주관적 인식 경험을 토대로 해서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떠 어떠한 주장을 하기 전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판단의 근거는 뭐라고 하는 것을 제시를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이거는 종이다. 이렇게 주장을 하기 전에 그 앞에다 문장 하나를 뭘 넣어야 되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내 인식 경험에는, 내 생각에는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겠어요?
아니면 그거 뛰고 이 연사 s는 p라고....
무엇은 무엇이라고 강력히 주장해야 되겠어요?
그렇게 우리의 삶은 주관적이에요. 보편타당성이 없어요.
그런데 네 번째는 뭐냐 하면 정관이에요.
정관지, 정관이라고 하는 것은 깊은 선정에 들어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듯이
직접 체험한 것, 그것을 정관지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깊은 선정을 통해서 본 세계,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법계실상, 연기실상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무명업식으로 주관적 인식 경험을 토대로 해서 보는 것은 뭐예요? 그 무명 업식에서 보는 분별성이에요.
그걸 또 불완전한 언어 문자를 토대로 해서 무엇은 무엇이다 라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주장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깊은 선정을 통해서 어떤 연기 실상을, 법계 실상을 보고 깨달으신 분이 부처님이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세계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우리의 언어 문자로 얘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중생들한테 그 법계 실상을, 연기의 실상을 얘기를 하려면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되겠어요? 중생들의 언어 문자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라 는 겁니다.
그러니까 팔만대장경 전체 내용이 깨달은 그 자체가 아니라, 깊은 선정에서 본 직접 체험한 법계 실상 연기 실상이 아니라 그런 법계 실상을 연기 실상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 그 길을 설하신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그런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 이건 신이에요. 신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방법으로 설하신 게 가르침이죠.
그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단계가 해예요.
신해 문.사.수를 토대로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배우는 단계 이게 신해죠 그럼 여기서 말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 신해를 토대로 해서 직접 체험을 위한 수행 ..이게 빠져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는 거예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지금 이렇게 어렵게 늦은 시간에 나와서 1시간 불교 공부를 같이 했으면, 그 이상으로 수행,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 이상으로 내가 내 내면을 성찰하고 돌이켜보는 또 이런 수행으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지금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의미 없는 시간이 되고 만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신행은 정법에 대한 확신이 다른 신행이에요.
정법에 대한 확신 그럼 정법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지금 이 물든 마음이 본래는 부처님의 맑고 투명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는, 이게 이러한 확신을 갖는 것이 어떤 정법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이 물든 마음이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는 확신을 갖는 것 이게 불교에 대한 바른 믿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라 는 겁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어떤 종교적 신념이나 또 신앙이나 어떤 맹신 이런 걸 가지고 내가 불교를 믿는다. 어떤 신행을 한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정법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
이게 불교에 대한 바른 믿음의 시작이다 라 는 겁니다.
그럼 정법에 대한 확신은 뭐라고 했습니까? 정법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불교에 대한 바른 신행이다.
그랬는데 무엇이 정법에 대한 확신이라는 거예요?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잖아요. 무명 삼독에 물든 나의 중생심이
청정한 부처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 고 믿는 것, 이게 정법에 대한 확신이라는 겁니다.
믿습니까? 왜 웃어요. 믿습니다. 해야지 그러니까 나의 지금 이 중생심이 무명삼독으로 물든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확신, 이 확신을 갖는 것이 불교에 대한 바른 믿음이다 이렇게 확신을 가져야 된다는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확신을 가져야 된다 라 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래서 믿음은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러한 신앙은
단조무명이다. 그랬어요. 다만 무명만 더 해 나갈 뿐이다.
무명만 더 길러 나갈 뿐이다. 맹신으로 흐른다 라는 거예요.
신이무예면 믿음은 있으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단조무명이다.
믿기만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몰라요.. 절에 왜 가냐? 좋아! 뭐가 좋은데? 그냥!
이러면 안된다 라는 거예요. 그거는 단조무명, 무명만 더해 간다라는 거예요.
내가 믿음이 10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다른 이해가 10, 같이 따라가야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럼 반대로 해의무신이면 교리에 대한 이해는 있는데 믿지를 않아요.
교리적으로만 불교 공부를 하지 어떤 신앙의 믿음이 없어요.
해의무신 믿기만 하고 공부만 하고 교리만 따지지 아무런 신행이 없어요.
예불도 안 하고 절도 안 하고 뭐 이런 걸 안 해요.
그러면서 교리만, 경전만 공부를 한다는 거죠.
그걸 해의무신 그러면은 그러한 신행은 즉타사견 그랬어요.
사견에 떨어진다는 거예요. 아무리
교리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고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다 외워도, 바르게 외우기도 힘든데 거꾸로 다 외워요.
교리를, 얼마나 책을 많이 봤는지 거꾸로 팔만대장경을 다외워 그래도 그러한 견해는 즉타 사견 그랬어요.
사견이지 정견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신행이 교리에 대한 이해가 두 발이 갖춰져야 바른 어떤 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는 겁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믿음과 교리에 대한 이해, 이거는 왼발 오른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교리에 대한 이해보다 어떤 종교적 신앙, 신념을 토대로 해서 입문한 경우가 많죠.
그다음에는 반드시 갖춰야 될 것들이 교리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된다. 한 발로 나갈 수 없다라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그렇게 해서 신과 해를 갖춰가지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을 행이라고 그래요 행. 신.해.행. 그게 이제 바로 바른 수행으로 나가는 거죠.
그래서 결과를 불교가 지향하는, 추구하는 어떤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증이라 해요.
증.. 부처님의 깨달음의 어떤 경지를 스스로 체득하는 것
이것을 증이라고 한다 라는 겁니다. 이 자리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라는 거예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는 우리 일반 언어 문자를 떠난 경지이기 때문에 언어로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경지라는 거예요.
법성계에도 보면, 의상스님 법성계에 보면 첫 4구가 뭐냐 하면 법성원융하야 무이상이라고 그랬죠
법성은 법의 참다운 성품은 무이상이에요.
무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상이 없다 라는 거죠.
무이상 , 무이상은 뭐냐 하면 중생들의 이원 대립하는 개념의 쌍으로 이루어진 언어 문자로 이야기할 수 없다. 이상.. 우리는 다 이상으로 얘기를 해요.
유무, 선악 좌우..
이렇게 이원 대립하는 개념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우리 언어는 그런데 법성은 참다운 어떤 법의 성품은 무이상이에요.
이원 대립하는 개념의 이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다 이런 얘기예요.
그거를 부득이해서 중생의 언어로 설명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삼법인 가운데 첫 번째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무상과 무아예요.
아를 부정하고 영원한 것을 부정하는 게 3법인 가운데 첫번째 두번째죠 그게 무아가 두 번째 법인이에요.
법인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감 도장이다. 이런 얘기예요. 뭐에? 불교의 인감 도장이라는 겁니다.
삼법인이라는 인감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면 그거는 불교가 아니다.
이런 얘기예요. 왜 그러냐면 인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무상과 무아에서 위배 되면, 그런데 그러한 인감에도 논리적 모순이 있는 게 뭐냐 하면 무아 그랬죠 아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이상을 떠난 것이다.
그랬죠 무이상이라고 그랬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아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럼 내가 없다는 말이에요. 이 말이 말이 돼요?.
안 돼요? 아를 부정하는 게? 이렇게 중생의 언어 문자로 설해지면 그 설해지는 순간 모순의 딜레마에 떨어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상이라고 무아라고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뭐예요?
중생들이 이 무명업식으로 이루어진 이 오온을 나라고 여기고 나라고 집착하는 이 집착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에 그 집착을 부수기 위해서 그 오온은 업계수신 ,업으로 해서 받은 이 중생신은, 오온신은
참다운 나가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어떤 가르침이 무아예요.
그러면 논리적으로는 모순이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또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면 그건 한도 끝도 없어진다는 무아의 가르침의 근본 취지는 뭐냐 하면 나에 대한 집착을 떨쳐라 이런 얘기예요.
그러면 무아라는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때는 어떤 식으로 실천에 옮겨야 되겠어요?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하심하는 것 이런 것들이 무아에 대한 참다운 가르침을 수행해 옮기는 거예요.
내가 없다 라는 얘기가 아니라 나에 대한 집착을 떨치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에 대한 집착을 떨치라고 했을 때
여기서 나는 어떤 게 나예요? 나에 대한 집착을 떨치라 그러니까 아 그렇구나 고개를 아래위로 흔드는데 그러면은 어떤 게 나에 대한 집착을 떨치는 거예요?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중생들이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이 나는 오온을 나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불교에서 인격의 구성 요소를 분석을 해서 색수상행식 5가지 측면으로 인격의 구성 요소를 분석해서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을 5가지로 이루어졌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나라고 하는 이 나를 5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분석을 해보면 육체적 정신적 크게 둘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정신적인 것을 다시 수상행식 이렇게 네 가지 측면으로 세분화해 얘기하는 것이 불교의 인격의 구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럼 내가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떨친다는 건 뭐예요?
이 몸뚱아리에 대한 집착 이걸 좀 떨치는 거예요.
어차피 이것은 4대, 4업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이 4대의 균형이 깨지면 이 몸뚱아리 또한 유지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몸뚱아리에 대한 너무나도 지나친 집착
이걸 좀 버리라는 겁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뭐예요. 정신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네 개로, 네가지 측면으로 나눠보면 첫째가 뭐예요? 수, 수는 뭐예요. 감정, 감정적인 생각 정신적인 부분을 또 세분화해서 감정, 누구나 다 감정이 있죠.
그 감정을 건들면 어때요? 기분 나빠요? 안 나빠요? 한번 감정 건들어 보세요.
오래 가죠. 근데 그 감정, 누구나 감정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죠.
그런데 그 감정에 너무 매몰되지 마라.. 이게 나에 대한 집착을 떨치는 거예요.
모든 분들이 또 생각이 있죠. 생각 없는 분 있어요?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고 사유를 하게 되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생각 사유가 뭘 토대로 하고 있다고 그랬어요?
무명업식 자기의 주관적 인식 경험, 이런 걸 토대로 한 사유에 지나지 않아요.
보편타당성이 없어요. 그런데도 자기의 어떤 생각 여기에만 집착하고 그것만 너무 강하게 주장하다 보면 대립하게 되죠. 대립하고, 투쟁하고, 싸우게 되죠.
그러니까 나의 생각만 너무 고집하지 마라.. 이게 이 얘기죠 그리고 또 우리가 어떤 욕구도 있고 의지도 있죠. 정신적인 측면에서.. 누구든지 다 욕구가 있어요.. 다양한 욕구가 없으면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수도 없죠. 욕구도 있고 의지도 있죠. 그럼 그런 욕구 의지 이게 다른 사람의 욕구 의지와 대립하고 충돌해요? 안 해요? 나의 어떤 욕구만 중요합니까? 다른 분도 중요합니까? 빵이 10개 있는데 내가 9개 먹고 다른 거 하나 가지고 나눠 먹어야 되겠어요? 아니면 10개를 좀 같이 좀 나눠 먹어야 되겠어요?
나의 욕구 의지만 중요해요? 아니면 전체의 어떤 욕구 의지가 중요해요? 그러니까 나의 욕구 의지만 너무 이렇게 충족하려고 하지 마라 ..또 의식 이렇게 다섯 가지 측면으로 나눠 봐가지고
우리 인격의 구성 요소를 얘기하는 게 오온설입니다.
그럼 내가 나에 대한 집착을 좀 버리라는 얘기는 뭐예요.
그렇게 다섯 가지 측면으로 나를 좀 성찰해 보고 좀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이런 방식으로 삶을 영유하라는 어떤 이런 얘기가 무아의 근본 가르침이다 라고 할 수가 있다라는 겁니다.
아함부 경전 전체에 보면 주로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 99.9%예요.
유아, 유아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게 아니에요.
무아만 얘기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에요.
아함부 경전이 한 3천 몇백 개가 되는데 대부분이 무아에 대한 가르침 이예요.. 왜 그러면 그런 무아에 대한 가르침만 시중에서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중생들이 나에 대한 집착이 강렬한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가르침을 주로 설하셨다 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그런 약이 지금 필요한 거예요.
무아에 대한 무아라는 약 그게 지금 전반적으로 필요해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그러지 않아도 세상 참 우울하고 별로 이렇게 살고 싶지 않고 막 이래 쭉 가라앉아 있어요.
그럼 그럴 때 무아라는 약을 처방을 해야 되겠어요?
참나가 있다 라는 이런 약을 처방해야 되겠어요?
있다 라고 해야죠 ..그럴 때는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중생들이 어떤 병에 걸려 있어요?.
나에 대한 집착, 잘못된 나에 대한 집착
잘못된 나에 대한 집착은 뭐라고 했습니까 ?오온 몸뚱아리에 대한 감정 내 생각 내 욕구 의지 이런 것만을 중히 여기는 집착 이게 나에 대한 집착이에요.
그 막연하게 아집 했을 때 아집이 뭔가 이러지 말고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내 몸에 대한 내 감정 생각 욕구 의지에 대한
집착 이게 아집이에요. 그런 아집이 강하기 때문에 무아라는 가르침을 대부분 설파하셨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우울해.. 우울하고 참 사는 게 힘들고 칙칙하고 그래요 그런 분들한테는 어떤 법을, 약을 투여해야 되겠어요.
중생심이 부채의 본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참나가 있다. 이런 가르침을 설해야 희망을 주고 뭔가 이렇게 좀 바른 길로 나갈 수 있는 이런 약을 설해야 되겠죠.
그런데 주로 그런 약은 설하잖아요. 그래서 없는 게 아니지만 대부분 무아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라는 ...그러니까 무아를 허무 단멸로 이해하지 말고 나를 성찰하고 돌이켜보고 좀 바르게 세우는 그런 어떤
가르침으로 읽어야 된다라는 거죠. 아시겠죠?
대중 :예“
그래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런 나에 대한 집착을 떨치는 노력, 이런 걸 토대로 해서 참나를 체득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끝내 알 수 없는 것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순한 지식에 불과하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어떤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정법에 대한 확신이고
이렇게 처음에 우리가 불교에 입문했을 때는 비록 기복적인 타력 신앙을 토대로 해서 입문했을 지언정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면서 정법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갖는 것 이게 뭐라고 했습니까? 초발심 했다라는 거 ..이제 처음으로 바르게 불교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
이걸 초발심이라고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초심, 초발심을 한 사람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자세로 어떤 수행을 해야 되는지 이것을 상세하게 아주 자세하게 전한 것이 계초심학인문이다 라는 겁니다.
경계하는 거예요. 뭘 ? 초발심을 한 이런 바른 수행자들
불자들을 바른 수행으로 이끌기 위해서 경계한 그러한 가르침, 이게 보조스님의 계초심학인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렇게 초발심을 한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자세로 수행을 신행을 해야 되냐라고 하면 수5계, 10계 등 하라 그랬어요.
5계, 10계 이런 것들을 받아서 잘 지켜야 된다, 그러니까 계획을 잘 지켜야 된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 또 친근현사 하라고 그랬어요.
현사를, 다시 말하면 선지식을, 선우를 늘 가까이 하라는 거예요.
선지식을, 선우를 가까이 하게 되면 좋은 어떤 법문을 듣게 되고 나를 돌아보게 되는
이런 계기, 동기가 생기게 된다 라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구체적으로 보조스님이 설하신 초발심자들이 어떠한 자세의 마음을 지녀야 되는지 이런 것들을 좀 몇 가지 키워드 뽑아가지고 그런 내용들을 가지고 같이 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좀 짧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귀를 이렇게 쫑긋하고 세우고 들으셔가지고 짧게 하고 나갈 수가 없어서 좀 말이 길어졌습니다.
마치겠습니다.
법문을 마친후 홍보부 대자행 김경신님의 발원문 낭독과
총무부장 보현행 안영주님의 공지사항을 듣고 사홍서원과 기념촬영으로 법회를 마쳤다.
첫댓글 대철 이학구 교육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