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3.03.09(목) 10시,
참 가 : 강공수 김영부 김재일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정원길 등 11명
불 참 : 김상문(통신대 미팅 참가)
회 비 : 110,000원
식 대 : 88,000원(장어탕 8, 애호박찌개 1, 김치찌개 1, 청국장 1)
잔 액 : 22,000원
이월 잔액 : 483,000원
총 잔액 : 505,000원
부곡정에서 모인 회원들이 10시가 넘어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회원 중에서 김상문만 오늘 통신대학생들과 불국사로 미팅을 가게 되어 결석하였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덮여 있었지만 날씨가 포근하여 속 조끼를 입었기 때문에 걸음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써부터 땀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저고리 앞섶을 풀어 헤쳐야 하였다.
올라가면서, 지난주에 강공수가 결석하여, 논의하다 말았던 <구례 산수유 축제 구경(3월11일~3월19일)>에 대하여 다시 논의하였다. 우리가 다시 내년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하루라도 젊었을 지금이, 가장 좋을 때이므로 다음 주에 꼭 갔으면 좋겠다고 가자고 찬성하였다.
다음 주인 3월 16일(목), 집결지는 광주 북구 <각화동 농산물공판장> 지나서 <화물터미널> 앞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약사암 경내에 핀 매실은 이제 꽃의 색깔에 따라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더욱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음악정자로 내려와서 강공수가 유인물을 가져왔다.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이 지은 <산 너머 남촌에는>의 노랫말이 적힌 것이었다. 그것을 정지용의 <향수>을 노랫말 암송처럼 외워보라는 숙제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4월 6일(목) 십오야 합동 봄 야유회 불참자를 확인하였다. 김영부와 장휘부 두 사람을 제외하고 10명이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ㅇ들이 한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3년 9월 2일, 일본의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는데, 일본 자경단에 의해 일어난 끔찍한 만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어느 회사에 다니던 일본인 <타바타 기요시(田畑潔)>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요코하마의 나카무라촌 주변은 싸구려 여인숙이 많아 조선인 노무자가 수백 명 정도 있었는데, 자경단은 조선인을 빙 둘러 에워싸고는 손에 들고 있던 죽창이나 칼로 조선인의 몸을 푹 찔렀다. 머리를 푹 찌르는 자, 눈에 죽창을 찔러 넣는 자, 귀를 베어내는 자, 등을 패는 자, 발등을 갈라내는 자,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처참한 장면이 전개되었다. 피투성이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에게는 매단 채로 린치를 가했다. 인간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지옥의 현장이었다.
이토록 악마들의 종자인 일본〇들이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동원 노무자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사과도 보상도 않으면서 국제사회의 지도국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이 똑 같은 일본사람이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도 있다.
※2018년 일본의 오사카 고등법원 형사부 총괄 판사였던 <오카모도 겐> 판사는 36년 동안이나 재직했던 판사직에서 조기 퇴임했다는 뉴스가 일본 전국에 보도 된 바 있다.
주로 큰 사건들을 맡아 처리해 오던 유명한 판사였던 그가 정년퇴임까지 5년이 더 남았는데도 판사직을 그만두자,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변호사 개업을 해서 더 큰 돈을 벌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상과 달리 의외의 전혀 엉뚱한 길을 찾아갔다.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있는 요리학원을 찾아 수강 등록을 하였다.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음식점을 내겠다는 각오로 60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을 다녔다. 그는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식칼을 유연(柔軟)하게 쓰는 법과 맛있는 양념을 만드는 법, 여러 종류의 야채를 써는 방법부터 철저히 배우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년 만에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 냈다.그리고 자신이 36년 간 일했던 ‘오사까’ 고등법원 건너편에 두 평 정도의 조그마한 간이음식점을 차려 개업하였다.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돌출행동 같은 모양 새로 보여 질 수밖에 없었다.
개업한 손바닥만 한 작은 식당에는 유명한 판사였던 그를 알아보는 손님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판사직을 그만 두고 음식점을 낸 것을 궁금해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만큼 손님들로 부터 수많은 질문이 그에게 쏟아지기도 했다. 특히 판사의 위엄과 법복을 벗어 던지고 주방에서 입는 옷을 걸친 그에게 찾아오는 손님 마다 허리 굽혀 인사하는 그에게 식당 개업 하던 날 언론사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치듯 쏟아 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런 말로 손님들과 기자들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판사로 재판관이 되어 수 십 년간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때마다 가슴이 너무 너무도 아팠습니다. 나는 그 일을 36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해 왔습니다. 재판관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가 없는 가시방석 같은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남을 위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이 없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음성과 기능으로 좋은 음악을 세상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었지만 본래의 자질(資質)이 부족하였고 한때는 돈 없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고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 때는 의술을 익히기에 이미 나에게 너무 늦은 시기였습니다. 해서 생각하고 궁리하여 찾아 낸 것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길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일만이 이 나이에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식당 주방장이 되더라도 남에게 기쁨을 줄 수만 있다면 정말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 것만 같았습니다.”
라고 초지일관(初志一貫)되게 즐겁고 기쁜 얼굴로 주장 하는 그였다.
그는 남에게 죄를 확정하고 그에게 벌을 주는 일이 너무 싫어서 남아있는 인생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의 작은 두 평짜리 음식점의 간판은 <친구(親舊)>였다. 그 ‘친구’ 라는 이름 속에는 그의 음식점을 찾는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그의 오랜 소원을 담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바와 같이 인생의 친구를 많이 두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허물없는 친구 셋을 둔 사람이라면 인생 성공한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그마한 식당 벽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 밑에 실린 내용의 액자(額子)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나의 기도(祈禱)>
오늘 하루 <친구> 가게를 찾아오시는 손님들을 미소(微笑)로 맞이하게 하소서! 나의 언어에는 향기가 넘치게 하시고, 나의 행동에는 겸손만이 있게 하시며, 나의 가치관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사람을 향한 이해와 따뜻한 동정의 마음을 주셔서 그 누구도 미워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게 하소서! 받으려 하기보다는 항상 주고 싶은 마음으로 살게 하시고, 받은 것은 기억하고 준 것은 곧 잊어버릴 수 있도록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 하루는 <친구>집을 찾는 목마른 이들에게 샘물 한 잔의 위로를 줄 수 있게 하시고,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또는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외로운 분에게 친구가 되게 하시고, 건강을 잃은 분에게 행복을 갖게 하시며, 사랑이 필요한 분에게 온정(溫情)을 줄 수 있게 하소서! <친구>집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이 바라보는 귀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그들이 부족한 저를 통해서 위대하신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게 하소서! 영혼(靈魂)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찬송소리가 들꽃의 향기(香氣)처럼 세상으로 가득 퍼져 가게 하시고, 오늘 하루 저의 마음으로, 저의 행동으로, 저의 언어(言語)로 그려진 모든 그림들이 잠드는 시간에 아름다운 그림으로 당신께 드려질 수 있도록 도움주소서!
그러나 우리나라 법관 중에는 이토록 큰 어른이 있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거의 일본 법관들을 보면서 일본 법관들이 하던 관행대로 법조생활과 법조생활 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지나친 <전관예우>가 아닌 <전관유착>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해 오다가 요즘에는 <유검무죄> <무검유죄>의 세상으로 퇴행하고 있는가 하면, 너나없이 <국적 없는 대형로펌>들에 들어가 자기 조국도 배반하고 오직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오로지 돈벌레로 전락하고 있으며, 한 발 나아가서 검사들이 온 나라의 권력기관을 점령하여 자기들의 이익과 배치된 사건들을 물어다 주면, 국가 검찰기관이 이 잡듯이 고구마 줄기 뽑아내듯이 강압 수색하여 기소하는, <검사독재 국가>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정치적 성향이 진보이냐 보수이냐를 막론하고 공감하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퇴직 법관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인데 그 썩은 선배 법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또 현재 법복을 입고 있는 정의에 불타는 현직 판검사들은 무슨 염치로 기소장을 쓰고 판결문을 작성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법관들은 어느 〇이고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꺼리가 없고, 변호사라고 명함을 파가지고 행세하는 〇들은 이미 그 옆에만 가도 썩은 내가 진동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본다는 것은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이다.
나는 참 엉뚱한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20년 이상 법관(판검사)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고위직을 역임한 법조인은 변호사 자격을 주지 않는 법을 제정하여서 아예 <전관유착>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아도 국가에서 연금을 받게 되니까 먹고 살아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또는 고위직 법관은 퇴임 후 10년이 지나야 변호인 자격을 주는 방법도 있다. 지금까지 법조 생활로 얻은 노하우가 아까울 정도여서 진실로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을 위한 무료 재능기부를 하고 싶은 퇴직 법관들에게는 변호인의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어떤 법관은 판사나 검사로 자기가 맡았던 사건을, 퇴직하고 바로 자기가 맡았던 그 사건을 의뢰받아 변호를 맡은 파렴치한이 되어 <전관유착>으로 법을 농락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런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고 어찌할 수 없는 내 심정은 참 한숨만 나올 지경이다.
또 우리나라같이 삼심재판이 일심과 이심, 그리고 이심과 삼심이 일관성이 없고 들쑥날쑥 하니 같은 법에 의해 재판을 하는데 왜 그렇게 다른 판단이 나오는 것일까? 그런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검사 판사 변호인들이 짝짜궁하여 재판을 한다는 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대책으로 모든 사건의 변호인은 국가에 등록하여 윤번제로 지정하여 변론하는 일종의 국선변호인제도를 두거나, 사건별 수임료 상한제를 두어서 유착관계를 끊어버리는 일이다. 또 재판도 검사가 기소한 내용을 판사가 인공지능(AI)에게 맡겨서 최선의 판결을 얻어내는 것으로 판결을 종결하는 제도로, 아예 변호인 제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다음은 내 고향 선배의 이야기인데, 우리 면 출신 선배 한 분이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된 일이 있다. 입 달린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할 정도로 바른 법관이었다. 그런데 나는 조금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가 법관으로 퇴직하여 재야에 2~3년 번호사로 있다가 노무현정부에서 대법원장이 되었다. 재산등록을 하였는데 20억대의 부자였다. 법관 퇴직한지 불과 몇 년 사이에 그 돈을 번 것이다. 청렴한 법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던 그가 그런 재산을 몇 년 사이에 벌었다는 것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관유착>이 아니고 어떻게 그런 돈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