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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부목사로 섬길 때에 담임목사님께서 암 후유증으로 늘 몸이 허약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주일오전 설교만 하시고, 그외의 모든 설교와 심방은 제가 해야 했습니다. 심방을 다닐 때도 담임목사님의 사모님과 함께 했습니다. 사모님이 참 인자하시고 정이 많으셨습니다. 그 사모님은 함께 심방을 하면서 자주 자주 하셨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자신이 죽어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꼭 물으실 것 같은 물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세상에 살 때에 무엇을 하다가 왔니?”라고 물으실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주자주 곰곰히 돌아본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죽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세상에 살면서 무엇 하다가 왔니?”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것 같습니까? 어떤 대답을 하실렵니까?
이 물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달란트 비유라고 흔히 부릅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먼 여행을 떠났다가 오랜 후에 돌아왔습니다. 세 명의 종들에게 맡겼던 달란트에 대하여 결산을 했습니다. 이때에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했으며 결국은 무익한 종으로 어두운 바깥으로 내어 쫓기고 슬퍼하며 이를 갈게 된다고 했습니다(30).
반면에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에게서 ‘잘 하였도다’(21)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더 받게 됩니다.
“있는 자는 더 주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
나아가 주인이 베푼 잔치에 초대를 받습니다(23).
여기서 책망을 받는 종과 칭찬을 받는 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아 이윤을 남긴 종들에게 주인은 무엇이라 칭찬을 했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23)
칭찬받는 자와 책망받는 자의 갈림은 충성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일곱 번째 열매가 바로 충성의 열매입니다.
충성이란 헬라어로 ‘피스티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믿음’이라는 말과 거의 의미가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신앙을 의미합니다.
충성이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자질’입니다. 우리가 흔히 ‘야, 저 사람은 참 성실해, 믿을만한 친구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을 두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충성은 믿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는 능력입니다. 철저하게 ‘내면적인 성실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을 살고 나서 주님 앞에서 설 때에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고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두고서 충성된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충성된 자입니까?
1. 충성된 자로 인정되기 위해서 ‘맡은 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여기서 ‘맡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겨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맡은 자가 해야 할 일은 실제 주인의 생각이 어떠한 지를 부단히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맡은 청지기는 주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을 받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19절을 보면 중요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간 후에 한참의 시간이 흘렸습니다. 주인이 돌아온다고 했는데 시간이 가도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더 이상 주인이 자기에게 맡은 것에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추측을 하는가 하면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의 말씀(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이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 삶에 대하여 회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어떻게 살았는지 회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따지고, 무엇을 어떻게 행했는지 회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심판하신다고 하는데, 주님의 재림을 믿고 바라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되는대로 살겠습니까? ‘될 대로 되라 지’ 하고 살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세상은 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종말론 신앙을 가진 사람은 몇 년 몇 월 몇 일에 종말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들고 깊은 골짜기에 튼튼한 요새를 마련하고, 지구 종말로부터 견딜 수 있는 비상식량을 장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종말을 믿습니다마는 그 종말론자가 말하는 날짜에는 주님이 안 오실 것 같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말하는 그 날에 지구 종말이 있다고 떠들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때 오시면 거짓 예언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의 종말론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비밀에 속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다시 생각하면 지구의 마지막 날이 날은 오늘 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내 삶을 결산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어떡합니까? 그러니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는 오늘 하루 하루 준비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맡겨 주셨습니까? 여러분이 가지신 모든 것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백적 찬양을 들어보십시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오늘 내게 주어진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 자녀들, 직장, 생업터, 건강, 은행의 잔고 등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자입니다.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마치 내 소유물인양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내 방식대로 하려고 합니까? 맡은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맡겨 주신 자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다. 진짜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충성이 나오게 됩니다.
2. 충성된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받은 바 한 달란트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게 되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와서 하는 말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자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두고 ‘굳은 사람’ ‘인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는 다른 동료들이 받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보다는 적은 액수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니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주인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주인을 불공평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는 적은 양이 아닙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6000 데나리온이 한 달란트입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노동자의 20년 품삯입니다. 연봉 7만불이라면 140만불에 해당되는 엄청난 돈입니다.
여러분에게 140만불이 주어지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야, 주인이 나에게 큰 액수의 돈을 맡겨구나”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인이 나를 못 믿어서 이것 밖에 안 맡겨. 누구에는 280만불을 맡기고, 누구에는 700만불을 맡겨 기분 나쁘다”라고 불평하시겠습니까?
불평은 항상 비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이 사람은 두 달란트를 주면서 왜 나는 한 달란트냐?’ 이런 비교는 비참한 인생으로 만들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이 필요합니다. 비교하면 비참해 집니다. 지금 가진 것에 대한 바른 이해로 감사하십시오.
3. 충성된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윤을 남겼을 때에 주인은 이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21)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한 달란트가 20년 먹고살 수 있는 액수의 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섯 달란트는 한 사람이 100년 먹고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으니 200년을 먹고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을 만든 것입니다.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라면 어떤 칭찬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너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맡겼는데 또 열심히 너가 장사를 해서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겼구나. 참 대단하다. 나는 너가 자랑스럽다. 너는 참으로 대단한 종이다”
그런데 주인의 칭찬은 다릅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21)
주인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다섯 달란트 남긴 것도 작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크고 작다는 기준을 달리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 남긴 자와 두 달란트 남긴 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동일하게 “착하고 충성된 자”라고 칭찬해 줍니다.
주인의 칭찬은 그들이 남긴 이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많은 이윤을 남긴 일은 잘한 일이기는 하지만 주인은 그보다는 그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그들이 나타내 보인 성실한 삶의 자세를 바라보면서 칭찬했다고 생각됩니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태도, 인격에 대하여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심리학자는 “소유냐 존재냐?”라는 유명한 책을 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를 위해서 사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를 위해서 사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대부분 사람은 소유를 위해서 더 많은 물질과 돈, 지식과 성공과 권력을 얻기 위해서 분투합니다. 큰 것, 많은 것, 대단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헌금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100불을 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5불, 아이들은 1불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시각에서는 100불 헌금 한 사람이 가장 많이 했습니다.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은행 잔고가 50만불 있는 사람이라면 100불 헌금하는 것은 아무런 부담 없이 쉽게 할 수 있는 껌 값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행통장은 바닥이 났는데 예배에는 참석해야 하는데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집에 남아있는 동전 몇 개 가운데 하나를 챙겨서 헌금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은 숫자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어떤 인격으로, 어떤 마음으로 드려졌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이요, 교회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봉사를 했는 지의 여부는 그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서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 하는 것보다 그 자리를 물러난 후 그의 삶이 어떠한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셔서 심판하시는 그 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삶의 결과만을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소유했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었느냐 만을 보시기 않을 것입니다.
네가 이 땅을 살면서 어떤 존재로써 살았느냐? 네가 이루고 소유한 것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했느냐? 얼마나 성숙한 인격으로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라고 인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민 12:7)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입이 뻣뻣하고 자격미달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다”(신 32:4)라고 고백했습니다.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란 바로 ‘신실하신 faithful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하여 철저히 신실하신, 충성스러운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바라므로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충성된 종이라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충성! 오늘 우리도 충성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모든일에‘맡은자의식’으로
(2) 비교하여과소평가하지않고개발하여
(3)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쓰임 받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