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마태수(三馬太守)
- 세 마리의 말을 타고 부임하는 고을 태수
[석 삼(一/2) 말 마(馬/0) 클 태(大/1) 지킬 수(宀/3)]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 淸白吏(청백리)라 하면 黃喜(황희) 정승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어진 인품으로 三可宰相(삼가재상)으로 불린 황희는 18년간 재상을 지내면서도 집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통틀어 217명이 배출됐다는 청백리는 ‘사모 쓴 도적’이란 속담대로 탐관오리가 우글거렸던 중에 빛난다.
청렴한 관리를 뜻하는 다른 말로 세 마리의 말(三馬)만 타고 오는 고을 수령(太守)이란 성어가 있다. 成宗(성종) 때의 문신으로 지방관에 부임하거나 전임할 때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했다는 宋欽(송흠, 1459~1547)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 마리의 말만 이용했다는 것으로 청렴의 대명사가 된 것에는 당시의 제도를 살필 필요가 있다. 지방관이 이용하는 驛馬(역마)의 수를 관직에 따라 정해 두었다는데 대부분이 규정을 무시하고 7~8필을 동원하여 요란하게 부임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李肯翊(이긍익)이 야사에서 수집한 역사책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 藜는 명아주 려)’에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송흠이 매번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는 ‘새로 맞는 말이 세 필밖에 안 되었는데(新迎馬只三匹/ 신영마지삼필)’ 공이 타는 한 필과 모친, 부인이 한 필씩 탔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삼마태수라 불렀다(時人謂之三馬太守/ 시인위지삼마태수)’ 고 했다.
이런 곧은 성품의 송흠이 燕山君(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났고 중종반정 후 복직했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全羅道(전라도)의 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1538년 청백리에 뽑혔다고 한다. 말의 마리 수는 달라도 비슷한 고려 忠烈王(충렬왕)때의 崔碩(최석) 이야기도 있다.
최석은 지금의 順天(순천)인 昇平(승평) 부사를 마치고 떠날 때 당시 관례로 고을 사람들이 말 일곱 마리를 바쳤는데 낳은 새끼까지 모두 여덟 마리를 돌려주었다.
그 후로 그 폐단이 없어졌다며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팔마비라 했다(州人 頌德立石 號八馬碑/ 주인 송덕립석 호팔마비)’.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에 실린 내용이다.
중국에서는 청렴을 더 강조한 유명한 성어가 있다. 뇌물을 거절하며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四知三惑(사지삼혹), 백성의 생활에 피해를 준다며 아욱을 뽑고 베틀을 버린 拔葵去織(발규거직, 葵는 아욱 규) 등이 대표한다. 공직자의 필독서가 된 丁若鏞(정약용)의 牧民心書(목민심서)에는 더 엄중하게 가르친다.
‘청렴이라고 하는 것은 목민관의 기본 임무이고, 모든 선의 근원이며, 모든 덕의 근원이다(廉者 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 염자 목지본무 만선지원 제덕지근).’
공직자의 첫 번째 도리가 청렴이라 한 깨우침이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잘 지켜지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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