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탄 축하드립니다.우리가 어둠과 혼란 속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말씀이신 구세주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늘 이 땅에 오셨습니다.그러나 오늘 복음의 요한 사도는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에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우리 인간은 말을 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고, 말이 없이는 이 세상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말은 소중한 것이오, 말은 우리의 생명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한마디의 말이 우리의 희망이 되고 우리 인생의 빛이 되고 우리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지극한 사랑이요 인격적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말이 나오기 전에 형제의 인격을 인정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하며 그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말은 냉담한 말이 되고 남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이 되며,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여기서 불신과 불화가 생기고 분열과 갈등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오늘 하느님께서는 상처 입은 우리 마음을 위로하시고 불신과 불화로 분열과 갈등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를 화해시키려고, 당신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빛으로 보내주셨습니다.하느님은 당신 외아들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내어주시기까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차마 보고만 계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비참을 몸소 함께 하시려고 우리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그러므로 오늘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사랑이요 평화의 사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기에 그분을 연민의 정을 지닌 말씀이고 우리의 비참을 함께 짊어지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인간을 진실하게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말 무엇인지, 인간을 참된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빛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시키기 위해 어떤 사랑이 필요한지를 깊이깊이 생각하시고 인간의 내면을 똑똑히 통찰하시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마음을 열어 비우신 분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그러므로 탄생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 인생을 치유하고 비추며 인도하고 완성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다 들어 있습니다.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요, 빛이요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람마다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해마다 태어나신 이유가, 우리가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오늘 복음처럼 우리도 온갖 불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더욱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달리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에 어려움이 참으로 많이 있을 것입니다.그런 만큼 때로 황량한 사막에 들어온 느낌마저 들 것이니라, 사막과도 같은 세상에서 영적인 물을 퍼 올려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따라서 평화와 기쁨은 내 힘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성탄의 참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성탄이 이루어지고 형제와 함께 있을 때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우리는 무엇이 알파이고 무엇이 오메가인지 정확히 감지할 수 있어야 됩니다.그러기에 내적인 것이 우선되고 그다음에 외적으로 내적인 것을 표출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차례 강론을 통해서 들었습니다.아울러 성탄은 이웃을 향한 의무인 시기라는 점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나와 함께 계시듯이 나 역시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맑고 청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반딧불이는 어두운 밤에 잘 보입니다.초롱초롱한 반딧불이 반짝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이처럼 깊은 어둠 속에서는 작은 불꽃 하나가 의외로 큰 빛을 바랍니다.
작은 불꽃 하나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우리는 볼 수 있게 되고 우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우리를 사로잡는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생각합니다.어둠은 빛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만, 빛은 어둠을 꿰뚫어 버립니다.어둠과 빛은 평화롭게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빛과 어둠의 싸움은 우리 인간이 놓인 상황과 너무나 일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빛은 어둠을 극복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힘은 누구에게서 받고 있는지 자문해 보고 싶습니다.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로 같은 삶의 여정에서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길을 걷고 있는가?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을 비추시고 사랑의 온화한 빛으로 감싸 주십니다.주님께서 계심으로써 세상은 더 밝아집니다. 주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그 사람 또한 밝고 행복해집니다.
또한 우리의 죄와 허물을 태워 없애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빛이 되게 하십니다.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으로 오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불을 지펴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셨습니다.오늘은 우리가 그 선물을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작년에도 말씀을 올렸지만 구상 시인이 <성탄을 쉰 번도 넘어>라는 시가 있습니다.지금 생존해 계시면 구상 시인께서는 지금 105살 정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저도 이제 성탄을 50번을 넘게 맞이했습니다. 구상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탄을 쉰 번도 넘어> 구 상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권능의 천주만을 모시고 있어
저 베들레헴 말 구유로 오신
그 무한한 사랑 앞에
양을 치던 목동처럼
순순한 환희로 조배할 줄 모르옵네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허영의 마귀들이 들끓고 있어
‘지극히 높은 데서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좋은 사람들에게 평화‘
그날 밤 천사들의 영원한 찬미와 축복에
귀먹어 지내고 있습네.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안일의 짐승만이 살고 있어
헤로데 폭정 속, 세상에 오셔
십자가로 완성하신
그 고난의 생애엔 외면하고
부활만을 탐내 바라고 있습네.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 자신 거듭나지도 않고선
누릴 수 없는 명절이여!
이것이 바로 구상 시인께서 바로 우리에게 성탄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성탄을 수없이 맞이합니다.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예수님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거기에 따라 성탄의 의미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어 가장 높은 분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그 크신 사랑에 고개 숙여 경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겸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소명을 알아듣지 못하면 사명을 수행하자 수행을 못하기에 결국 부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받아들이는 소명과 내어놓는 사명이 성탄과 부활임을 잘 아시고 나는 늘 알파로 출발해서 오메가로 막을 내리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