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를 꿈꾸는가/靑石 전성훈
날씨가 추워지고 살얼음이 얼거나 눈이 내리는 등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하는 소설(小雪), 아침에 배달된 동영상 ‘백 년 후에’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음악이 흐르는 배경화면으로 떠 오르는 글귀는 대강 이러하다. ‘ 앞으로 백 년이 되는 2123년 우리는 모두 죽고 없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가 지은 집에서 살고 내가 가진 것은 누군가 가져가고, 우리가 할아버지의 아버지를 모르는 것처럼, 후손들은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기억조차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 몇 년은 누군가 기억하지만 몇십 년이 지나면 그들도 가고, 사람은 한 장의 사진만을 남기고, 그다음에는 빛바랜 역사가 될 것이다. 이제 멈추고 깨달아야 한다. 지금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닫고 나면, 사고방식과 행동이 바뀌고 관점도 바뀌게 될 것이다. 5년 안에 일어날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5분 이상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라’라는 다소 냉소적이면서 현실을 직시하라는 내용이다.
동영상을 보고 나니, 현재 생활을 즐기며 자비를 베풀라는 주제가 돋보이는 소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 오른다. ‘조르바’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면, 꿈속에서나 그려보는 멋지고 낭만적인 삶이 될 것 같다. 소설이나 연극이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조르바’같은 삶을 살려면 대단한 용기와 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차갑거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조르바’와는 다른 모습으로 힘들고 괴로운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나, 구속과 속박을 떨쳐버리고 마음 편하게 홀로 산중에서 ‘자연인’처럼 지내는 삶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틈새를 벗어나지 못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공동체 수레바퀴의 구성원이다. 그러기에 버릴 건 버리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꼭 지키고 싶은 나만의 삶의 방정식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지 않고, 비열한 야심과 헛된 욕망에 아귀다툼하지 않으면 존재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물 흐르듯이 자연과 벗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거나 영화나 연극을 보고, 삶에 대한 영감을 얻거나 느낌을 받으면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스스로 정한 성취 목표를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먼 훗날의 시각에서 지금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초연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더없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마치면 존재했던 순간만 의미가 있을 뿐, 세월이 지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없어진다는 건 틀림없다. 육체와 정신의 소멸에 대하여 종교에 따라 혹은 어떤 신심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고 이야기하지만,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가는 버거운 현세에서의 삶은 그렇게 마무리를 짓게 마련이다. 수천 년 전 아니 수만 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전설을 듣거나, 그 잔재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온 게 오늘의 사람들이 아닌가. 모두 없어지고 사라지는 게 우주의 이치라면, 자연의 굴레 안에서 후대 사람들이 생각해 볼 이야깃거리를 남겨두는 것도 괜찮다. ‘모든 게 끊임없이 변하고 태어나고 없어진다.’라는 의미로 읽히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처럼, 없어져 가는 것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라면, 구도의 길을 찾았던 수많은 구도자의 삶을 떠올리면 자기에게 알맞은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온 길은 어찌할 수 없지만,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가야 할 길을 두려움을 갖지 않고 담담한 마음으로 마주 대하며, 때때로 맑기도 어둡기도 한 저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202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