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른
나는 오곡(五穀)-여러 가지의 곡식-이 여물어 가는 가을 들녘을 바라볼 때마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유년의 맹세가 있다. 세상 풍진(風塵)의 찌던 때가 묻지 않은 히말라야의 백설만큼이나 교교하고 순수했던 그 많은 날들. 어른들의 온갖 세상의 풍진들로 오염된 생활관(生活觀)과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 사고(思考)와 행위에 실망하여 심하게 도리질을 쳐 대며, 이다음 나 어른이 되면 주위 어른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 어른이 되겠다고 맹세를 하곤 했다. 내 작은 식견 때문인지, 그때는 제대로 된 참 어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간난(艱難)의 시대와 교육의 부재 탓이었으리라.
유년시절, 머리에 인 하얀 서리와 얼굴에 핀 검버섯이 그 동안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증빙했다지만, 참 어른의 모습은 맞닥뜨리질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갈구(渴求)했고, 그만큼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또한 유년의 어린이들에게 참 어른의 거울이 되고 싶었다.
방과(放課) 후,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이십 리 비포장 길을 터덜터덜 걸어서 귀가(歸家)하면, 외양간(牛舍)에서 처연한 눈빛을 한 농우(農牛) 하나만이 큰 눈꺼풀을 슴벅거리며 나를 맞이하곤 했다. 부모님은 늘 집에 계시지 않았다. 집에서 멀리 동떨어진 산 속 계곡의 논배미에서 들일을 하고 계셨다. 초가삼간(草家三間)의 청마리에는 들녘과 신작로에서 날아든 희뿌연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아 마치 오랫동안 비워 둔 폐가(廢家)마냥 을씨년스러웠다.
배가 고팠으나 요기(療飢)를 할 만한 것이 마땅찮았다.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짓는 가마솥과 부뚜막이 있는 정지 문을 열고 들어설라 치면, 시렁 위에는 새까만 보리개떡과 한소끔 삶은 보리쌀이 종댕이에 담긴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는 늘 그것의 일부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얼마 후, 나보다 고학년인 누나들이 수업을 파하고 귀가하면 보리개떡으로 헛헛한 배를 채운 뒤, 들녘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도와야하기에, 만날 놀기만 일삼는 내 배만을 채울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허기로 충만한 배를 채우기 위해, 또래의 동무들과 어울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곡이 익어가는 들녘에서 무와 생고구마를, 과실이 영글어 가는 산에 올라가 감과 밤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유년시절, 작은 위장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포만감(飽滿感)을 느껴보질 못했다.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삶터인 들녘에서 하루하루 생활의 밑천을 수확하시는 부모님의 애달픈 삶을 그 때는 몰랐다. 부모님께서 먹는 것이 늘 부족했다는 사실 또한 그 때는 몰랐다. 부모님과 동리 어른들의 팔다리는 어째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해 있는지, 또한 움푹 패인 눈언저리와 그로 인해 유난히 불거져 보이는 광대뼈(顴骨)의 까닭을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었다. 그저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부모님이 한량없이 야속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이 싫었고, 가끔 농사일을 돕는 것조차도 뜨악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면 소재지에서 생활하는 급우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유년에는 산간벽촌(山間僻村)에서의 생활이 지긋지긋했다.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신작로에서 드잡이질을 하거나 대낮에 들녘에서 일하다가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는 동리 어른들도 유년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런 모습을 마주칠 때마다 “이 다음 나 어른이 되면,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수십 번씩 맹세하곤 했다.
학교에서 학습한 내용과는 달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모범적인 생활상(生活相)을 보여주기는커녕,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을 일삼는 어른들을 보노라면, 이다음 나 어른이 되면 아이들에게 모범적인 참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또한 내 가족과 굶주린 이웃을 보살피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이타적(利他的)인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더랬다. 유년에는 아(我) 위주의 이기적(利己的)인 어른들만의 세상을 알지 못했다. 습관처럼 항시 어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양날의 검을 그 때는 몰랐었다. 보릿고개의 연속이던 그 시절,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한 신산(辛酸)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팍팍한 삶을 살고 있음을 유년의 나는 까마득히 몰랐었다.
어느덧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네 번의 강산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나도 오래전에 불혹(不惑)의 언덕배기에 편승한 가장이 되었다. 지금 두 자식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고, 사회의 작은 구성원이 되어 타인들과 함께 먼 길을 동행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은 어떠한가! 어느덧 인생의 긴 행로에서 터닝 포인트를 지나왔건만, 정작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다. 유년의 맹세를 돌이켜보면, 커가는 자식들 앞에서 초라한 지금의 내 모습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다. 스스로에게 한없이 부끄러워 수치심(羞恥心)을 느낀다. 유년시절의 많은 날들, 나 어른이 되면 기성세대(旣成世代)와는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그 많은 날들, 그날의 맹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의 나는 그 시절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어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그땐 몰랐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이 커 가는 과정에 직장생활을 핑계 삼아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 한 번 갖지 못한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가장의 태도, 삶에 있어 정도(正道)를 벗어나기를 마치 삼시 세 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자가당착(自家撞着)과 기만(欺瞞)으로 얼룩진 철면피한 중년의 내 삶. 참으로 부끄럽기 한량없다. 이웃에 대한 관용(寬容)과 이타심(利他心)의 모럴은 차치하고라도, 아집(我執)과 독선(獨善)으로 끝내 타인의 가슴에 치유(治癒)할 수 없는 앙금을 남기고도 즐거워하는 뻔뻔스런 어른이 오늘을 살아가는 내 자화상(自畫像)임을 나는 애써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후시지탄(後時之嘆)의 중년, 그렇지만 마냥 후회와 고뇌(苦惱)만으로 소일(消日)하기엔 내 여생이 녹록치가 않다. 지금부터라도 유년시절 꿈꾸었던 참 어른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 보련다. 한편으론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에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근년에 와서 소홀해진 아내와의 사이에 사랑과 우정도 연애시절 만큼 회복하고, 두 자식에게도 자상한 아버지, 책임감 넘치는 아버지로 거듭나야겠다. 주변의 불우한 이웃들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고, 또 형편이 닿는 대로 물적(物的)인 도움도 베풀어야겠다. 내 작은 도움으로 인해 그들에게 드리워진 먹장구름 같은 실루엣이 조금이라도 걷혀진다면 무엇을 더 주저한단 말인가.
십여 년 전 삼십대 중반일 때, 직장 내에서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경쟁자들을 기망(欺罔)하면서까지 밟고 올랐던 지난날의 내 짧은 사고와 가치관을 훌훌 벗어던지고, 이웃 간에 서로 상생하며 살아야겠다. 또한 내 생명을 잉태해주시고 사고(思考)를 넓혀주신 부모님에게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드넓은 우주 공간 중 이 금수강산(錦繡江山)에 태어난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겠다. 비록 하잘것없는 갑남을녀(甲男乙女)에 지나지 않지만, 나로 인하여 내 가족과 이웃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뜻 깊은 인생이 되겠는가.
시나브로 서녘하늘에선 붉은 꽃노을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낮게 드리워진다. 한적한 한길 양 가장자리에 줄지어 늘어선 은행 나뭇잎은 어느새 가랑잎이 되어 낮게 불어오는 소슬(蕭瑟)바람에 쉴 새 없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나 또한 머지않아 산중에서 햇살을 받아 가까스로 피어난 야생화(野生花)가 소리 없이 져 가듯 그렇게 잊혀지고 사라지겠지. 부모님께 몸 받아 나와 실존의 작은 의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져 가겠지. 문득, 눈시울이 붉어져 온다.
첫댓글 행전 선생님? 이 글은 수연님이 보고나면 즉각 내릴 글입니다. 저희 회원들 중 수필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미 다 보신 글입니다.
한이발 님
수필이란 이런 것이오.라고 하시듯, 그저 자신의 소싯적 일상과 환경을 그리며 당시와 지금의 생각의 변천을 담당하게 써 내려오신, 참으로 멋진 글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비록 한이발 님보다는 인생을 제법 더 살았고(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글에서 그리 해석했지요^^, 그러나 제법 개화된 시기에 태어나서 어이 그리도 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이해난망), 오래 전부터 글을 읽고 써 왔지만, 이런 고매한 글을 구상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내가 죽기까지 1,000편의 글을 쓰는 것이 소망이라니 자가당착적 삶을 미화하려 함은 아닌지 해괴한 생각이 듭니다.
내 지난 날이나 지금이나 그저 눈 앞에 보이는 熱福을 쫒아 살며 그저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뿐, 홍익인간 같은 <참 어른>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그저 남에게 이익이 되지 못할망정 해 되는 일은 하지말자는, 그저 모범적인 삶을 살아보자고 외쳐왔을뿐 뚜렸한 인생관도 없었답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군요.
다가오는 느낌이 큰 글입니다. 짧은 지식이지만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수필이라 난 평가하고 싶습니다. 다만,이제는 이런 글은 우리 기성세대만 읽을 것이 아니요, 젊은이들에게 꼭 읽혀야 할 글이니, 어려운 고사성어라면 모르지만 일상에서 늘 쓰는 단어는 그냥 우리말이라 생각하셔서 이젠 한자에서는 벗어남이 어떨까 감히 제안합니다.
절대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질없이 댓글을 길게 썼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변변찮은 글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앞으로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른이 되겠지만 참어른이 되기는 힘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전 선생님!
참, 어른? 저도 어른이면 다 존경스럽고 책임감있고 어린이들에게 가르키듯 정직한분들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몸만 커질뿐 사고가 변하지 않은 사람을 많이 보았지요. 어른이지만 덜 성숙된 인격을 많이 보았습니다. 글쎄 어른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 자격이 필요한데 말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저도 어려서 부터 고생을 많이 해봐서 그런지 그냥 세상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만 여기는 사람입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와 상관없이 말이죠. 무언가를 해보았기때문에 성공도 실패도 있는 거지요. 저의 갠적인 삶을 보면 실패입니다. 아이들은 평범한 사회인이 되었지만 저는 그냥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땅을 파는 농부가 되었지요.삶이란 정답이 없지만 제 정답은 열심히 사는 거 허투루 살지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고자가 아니라 사는 동안 내가 열정을 품었는 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철학, 학식. 그런거 하고 동떨어지게 살지만 지금도 자부할 수있는 건 나는 이제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그게 성공을 못하였지만 내겐 그 것이 최선이었다. 아이들도 공감을 하기에 엄마의 도전은 응원하지만 지금은 싶패라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궁색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렸더니 역시 내가 아니면 안돼었습니다. 점점 가세가 기울고 있다는 뒷얘기...헐^^;;~
화답글을 올리려고 하는데. 컴 인터넷이 안돼네요.
바람을 등진 채 농노를 걸으며 생각해보니 수연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시네요.
한이발님 이글을 삭제 하지 마세요.
수영 이문순님만을 보이시기 위함이라면 이메일로 보내셨어야지요
님의 글을 좋아하는 저도 여기 건강하게 존재 있고 또한 들켰으니 지우지 마시요 경고 합니데이~ㅎㅎ
제 일생을 시로 단계별로 압축 하여 표현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분의 따뜻한 마음의 수필글을 보면서 수필로 하는것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 쓰는 방식을 배우지 않았으니 님의 글솜씨 패러디 좀 하며
어휘력을 늘려 가면서 제 일생 자화상 삶을 그려 볼까 합니다
알겠죠~
헐, 그럼 일주일 후에 내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