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女帝 피오리나
예견된 퇴진…컴팩 인수가 ‘화근’
심상복 중앙일보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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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열린 휼렛패커드(HP) 이사회. HP의 회장으로 선임된 패트리샤 던 이사회 의장이 “피오리나는 뛰어난 CEO다. 그러나 이사회는 HP와 CEO의 실적을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을 꺼냈다. 회장 겸 CEO였던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 ·50)의 사임이 전격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피오리나는 이날 이사회와는 별도로 “이사회 결정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서로 HP의 나아가야 할 전략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나는 그들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신이 사실상 ‘해고’됐음을 시인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피오리나가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게 됐다. 피오리나의 사임에 대한 증시의 반응은 차가웠다. 사임이 결정된 지난 7일 HP의 주가는 뉴욕증시에서 6.9%나 뛰었다. 장중 한때 10.5%까지 오르기도 했다. 펄크럼 글로벌 파트너스(Fulcrum Global Partners)의 애널리스트 로버트 사이라는 “이미 월가에서는 피오리나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고 누가 오든 그녀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HP의 CEO로 부임한 피오리나의 시작은 화려했다. 다우존스지수에 편입된 대형 기업 가운데 첫 여성 CEO이며, 매력적인 금발에 뛰어난 패션 센스를 갖춘 그녀는 전세계 미디어의 표지를 장식했다. 피오리나는 HP에 밝은 미래를 열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화답했다. 그녀는 CEO로 선임된 직후 당시 5년 연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던 HP의 주주들에게 15% 매출 증가를 약속했고, HP에 ‘제2의 인터넷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피오리나는 이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 자회사들을 HP 본사로 통합했다. 또 회사의 모든 부서를 판매와 마케팅 두 부서 아래로 통합했다. 그녀의 이런 전략은 곧 만만치 않은 내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기업문화에 젖어 있던 많은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주요 임원진이 경쟁사로 옮기면서 피오리나의 뒤통수를 치는 일도 발생했다. 본격적인 갈등은 2001년 HP와 컴팩(Compaq)의 합병이 추진되면서 불거져 나왔다. 실적 부진으로 이사회와 잦은 마찰을 빚던 피오리나가 이번엔 HP 이사회의 이사이자 공동 창업자의 아들인 월터 휼렛(Walter Hewlett)과 맞대결을 벌인 것이다. 월터 휼렛은 컴팩과의 합병이 HP의 노른자위 사업부인 프린터 사업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피오리나는 PC부문에서 델(Dell)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며 190억 달러를 들여 컴팩 인수를 강행했다. 2002년 컴팩을 인수한 직후 피오리나는 2004년쯤엔 PC부문에서 나오는 영업이익이 HP 전체 매출의 3%가량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프린터부문 이익도 2002년보다 11~13% 증가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지난해 PC부문의 영업이익은 매출의 1%에도 못 미쳤다. 순이익도 99년 피오리나가 CEO로 선임될 당시의 34억9,000만 달러와 엇비슷한 수준에 그쳤다. 컴팩 인수 이후 PC부문은 고급 모델을 선보이는 IBM과 저렴한 모델로 승부하는 델 사이에서 방향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끊임없이 받았다. 컴팩 인수는 피오리나를 스타 CEO 반열에 오르게 했지만 결국 3년 후 자신의 몰락을 불러온 부메랑이 된 셈이다. 피오리나가 사임하자 그의 실패요인에 관한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에선 그녀의 실무경험 부족을 큰 요인으로 꼽는다. 그녀는 루슨트테크놀로지스(Lucent Technologies) 등 정보기술(IT)업계에서 마케팅 ·세일즈 등의 경력을 쌓았지만, 생산 ·엔지니어링 ·파이낸스나 리서치 경험은 전무했다. 영업통이었던 그녀는 HP의 진로와 전략, 문제점 등을 재빠르게 읽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대형 헤드헌트업체 등 인사전문가들은 “피오리나는 ‘뛰어난 세일즈 우먼’이지만 실무경험 부족으로 허황된 목표를 월가에 제시했고 이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해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 평했다. 피오리나는 자신의 CEO 재임기간 21분기 중 8분기나 경영목표를 지키지 못했다. 이 같은 실적 부진으로 최근 피오리나의 퇴진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그녀는 올해 1월 열린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이 소문을 강력히 부인하기도 했다. 피오리나의 사임과 함께 HP 임시 CEO를 맡게 된 최고재무책임자(CFO) 로버트 웨이먼(Robert Wayman ·59)은 최근 “피오리나의 사임으로 인한 기업 내 전략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현재 HP는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새로 선임될 CEO가 HP 내에 새로운 변혁을 가져오길 기대하는 것 같다. 그리스키 캐피털 파트너스의 대표 티모시 그리스키(Timothy Ghriskey)는 “피오리나의 사임으로 HP의 사업부문이 예전같이 세분화 ·독립화할 것”이라며 “그런 기대감이 한동안 HP의 주가 상승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카펠라스(Michael Capellas)가 피오리나를 이을 HP의 차기 CEO 후보로 꼽히고 있다. 컴팩의 전 CEO였던 그는 현재 텔레콤 회사 MCI의 대표다. 컴팩 인수로 한바탕 내홍을 겪은 HP 이사회의 선택이 주목된다. 피오리나는 퇴직금으로 2,138만 달러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6년 전 HP에 영입될 때 품었던 야망은 물거품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