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인 것은, 영적 가치의 새로운 강조와 추진을
권력 추구적 주창자들의 에고가 떠맡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교회가 과거에 했던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타인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 기본적 진실을 강탈하고자 했다.
그 도구는 유효한 사고를 수사(修辭)로 왜곡하는 것이었는데,
그 것은 바로 기원전 350년에 소크라테스가 예견했던,
언론 자유라는 장치를 매개로 하는 민주주의가 드리운 그늘이었다.
과학, 논리, 지적 온전성은 모두가 40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측정되는 반면,
논쟁적 수사는 135에서 190 수준에 내재된 허위의 귀결이다.
진실에 대한 그런 왜곡은 인도주의적 이상주의로 분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새 옷을 입은 자기애의 재출현에 불과하다.
동기는 타인에 대한 합법적 통제에 의한
그리고 에고 마음과 미성숙함에 호소하는 미화된 위치성으로서의 대체에 의한, 세속적 전체주의이다.
이러한 에너지 장이나 진실 위반의 표현들은,
지적 진실이나 영적 진실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질적인,
증오심의 출현이라는 특징적인 진단적 증상을 통해 드러난다.
200 이하의 에너지 장들은 반동적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 러한 것은 421로 측정되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207 수준에 있는 세계 자체의 의시의 전체적 진보에 역행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기때문이다.
이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는냐는, 갈등의 핵심요소들이 확인되고 해결되기까지
사회의 서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류의 진화의 수많은 측면이 갖는 의식의 측정된 수준들을
그러한 의식 수준의 표현 속에서 연구하는 것은, 뜻깊고 실용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드러내 준다.
예나 지금이나 맹목적 믿음은 인류 대다수에게 진실을 향한 대로(大路)이자만,
최근들어 '현대인'은 그것을 격하시키고 구힉화했다.
그 믿음의 시대 뒤에, 고대 그리스 시절의 지성이 다시 눈을 떴고
이성의 시대는 또 다시 승리하여 현대 과학으로서 진화했다.
현대 과학은 차례로 믿음의 새로운 보고가 되었다.
400대 중반인 과학의 높은 측정 수준으로 인해, 과학의 열매는 현대인에게 노다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덕분에 괴로움의 큰 근원들에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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