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군 동원을 담당하는 군사위원회(우리 식으로는 병무청) 위원(징병관)들의 습격에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동원 대상자인 25~60세 남성들 중 동원 기피자들은, 일부는 운좋게 달아났지만, 나머지는 군사위원들과 경찰에 연행돼 최전선행 버스(훈련소를 거쳐 최전선으로 간다)를 타야만 했다.
우크라이나 매체인 스트라나.ua는 동원 기피자를 색출하는 지난 주말 군사위원회의 활동을 '군사위원들의 급습(Облавы военкомов)'이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군사위원들은 금요일 밤 키예프에서 열린 인기 그룹 콘서트장을 시작으로, 불금을 즐기는 주요 도시의 나이트클럽과 고급 레스토랑, 주말에는 대형 마트와 리조트에 온 남성들을 대상으로 기습적으로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스포츠 궁전에서 열린 인기그룹 콘서트를 앞두고 군징병관들과 경찰이 동원 기피자를 끌고 가고 있다/텔레그램 영상 캡처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군 징병관들은 11일 밤 키예프 스포츠 궁전(Дворeц спорта в Киеве)에서 열리는 인기 그룹 오케안 엘지(Океан Эльзы)의 콘서트 장에 들이닥쳤다. 약 50명의 군 징병관들은 경찰과 함께 오케안 엘지 공연을 기다리고 있던 남성들을 상대로 검문검색을 시작했고, 합법적인 병역 면제 수첩을 갖지 못한 기파자들 중 일부는 달아나고, 일부는 동원 버스로 끌려갔다. 텔레그램 등 현지 SNS에는 흰 셔츠를 입은 청년이 몸부림치며 강제 연행을 거부하는 영상 등 수많은 영상들이 올라왔다.
군사위원회의 대중문화시설 급습은 키예프를 시작으로 크리보이 로그, 오데사, 부코벨 등에서도 단행됐다.
군복을 입은 수십 명의 징병관들이 부코벨 리조트 주차장에 들어가는 모습이, 오데사와 크리보이 로그의 대형 쇼핑 센터 통로와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쇼핑객들을 지켜보는 영상들이 SNS에 게재됐다.
키예프의 프로스펙트 쇼핑센터와 리보프(르비우), 흐멜리츠키 쇼핑센터도 징병관들과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고 현지 텔레그램 채널들은 전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군사위원회가 주말을 빌어 콘서트장, 쇼핑센터 등 공공장소를 급습한 것으로 두가지 이유에서다.
연행된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강제로 미니버스에 태워지는 장면/사진출처:영상 캡처
우선 동원 기피를 막기 위한 새 동원법 발효(5월) 이후 늘어나던 동원 증가 속도가 지난 달 심각하게 주저앉았다는 것. 동원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군사위원회의 압박감이 주말 급습의 주된 이유가 됐다.
또 하나는 돈있고 '빽'있는 사람은 빠지고 힘없는 서민들과 전선으로 끌려간다는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는 차원이다. 동원된 예비군들은 참호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건강한 남자들이 고급 식당이나 클럽에서 놀고 있다는 불만이 우크라이나 일각에서는 팽배한 상태다. 이같은 사회적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보여주기식이라도 강제 동원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득(得)보다 실(失)이 많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공공 장소 급습으로 수천 명의 남성들이 곧바로 한꺼번에 잠수를 탈 것이라는 것. 그래서 효과는 현장에서 체포된 남성들을 제외하면 실제로 제로(0)에 가깝다는 해석이다.
게다가 나이트 클럽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끌려간 남성들은 대부분 큰 돈을 주더라도 결국은 풀려나올 것으로 서민들은 생각한다. 동원에 관한 한 군사위원회에 대한 우크라이나인의 부정적 인식은 생각보다 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영속적이고 집요하게 단속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집권여당 '인민의 종' 소속의 의원 니키타 포투라예프는 12일 군사위원회의 공공시설 급습을 찬성하면서 “'오케안 엘지'의 콘서트장에서 이뤄진 남성들에 대한 병역 문서 확인이 우크라이나 문화예술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레스토랑이나 나이트 클럽에서의 검문검색도 우크라이나 경제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이같은 단속은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이뤄지고,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렇게 강제동원된 남성들은 기회만 생기면 부대를 이탈하거나 탈영하고, 그 병력을 메우기 위해 또 후방에서 강제동원해야 하는 악순환에 있다. 나라를 지킨다는 애국심에 더이상 의존하기 보다는, 징병에 대한 경제적 보상, 체계적인 휴가및 동원 해제(전역)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스트라나.ua가 11일 보도한 세르게이 그네즈딜로프의 케이스가 이를 웅변한다. 이 매체에 따르면 키예프 페체르스키 지방 법원은 이날 제56 기계화보병 여단 소속의 그네즈딜로프를 탈영 혐의로 60일 동안 구속했다. 그러나 그는 국방부가 동원해제 법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단식투쟁에 돌입하겠다고 맞섰다.
그는 19세에 우크라이나군에 3년 복무하기로 계약했다. 계약대로라면 2022년 3월로 전역해야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지금껏 복무했다. 그가 계약한 대로 전역했다면, 아직 25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원 대상자도 아니다.
법정에 온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데리고 나가던 보안군에게 "당신은 왜 최전선에 가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는 지난 9월 21일 페이스북을 통해 탈영을 예고했다. 자신의 부대원들은 대부분 전사해 동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부대 순환도, 전역도 시켜주지도 않고 있다고 그 이유를 댔다. 그는 지난 9일 국가수사국에 의해 체포돼 탈영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군 강제동원과 캠페인은 계속된다. 지난 9월 13일에는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고로드에서 군사위원회가 레스토랑과 피트니스 센터를 급습했다. 탈영한 오데사 출신의 장교와 사병, 부상자들이 체포됐다.
콘서트를 준비하다 동원 소환장을 받고 입대한 4인조 그룹 '부지모'/사진출처:페이스북
또 이바노 프란키프스크에서는 콘서트를 하러 온 4인조 그룹 '부지모'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 그룹은 8월 21일 그곳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었으나 현장에서 소환장을 받고 입대했다. 당연히 콘서트는 취소됐다. 이후 '부지모'의 공식 페이스북에는 "우리는 자진해서 군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며 군복을 입은 사진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