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18. 10;20
만추(晩秋)의 계절,
11월의 청량한 아침, 가을을 이대로 떠나보내기 싫어
텅 비어가는 들판을 달려 철원 주상절리길에 도착한다.
자연못지않게 인간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4년 전 2018. 1. 18일 이곳을 찾았을 때는 포성만 요란하게
들렸었다.
사람 인기척 없던 이곳이 사람과 차량이 북적이는 땅으로
바뀌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인가,
차라리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게 만든 경천동지(驚天動地)라
표현하는 게 어울리니 아마도 금환락지(金環落地)인 모양이다.
아찔한 벼랑에 낸 주상절리 길 3.6km를 보며 중국 장가계의 잔도를
떠올린다.
은퇴 후 2010. 12.17일 장가계 천문산 귀곡잔도(鬼哭棧道)에 올랐다.
그들은 해발 1400m의 깎아지른 절벽에 죄수들을 동원하여 1m 정도
넓이로 철근과 시멘트를 사용해 잔도(棧道)를 만들었다.
수직의 천 길 낭떠러지에 만든 귀곡잔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모골이 송연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곳은 공사를 하며 200여 명의 인명이 죽어 귀곡잔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약 1.6km의 귀곡잔도를 걸으며 이름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고
생각을 했었다.
귀곡잔도의 일부 구간인 유리잔도를 걸으며 절벽의 모퉁이를 돌아
다가오는 바람소리에 사람들의 비명이 실렸었지.
아마도 그 비명소리는 귀신이 된 원혼(怨魂)들의 울음소리였던
모양이다.
일명 잔도로도 불리는 '한탄강 주상절리길'을 공사하며 인명피해는
없었을까.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봐도 이 험한 길을 만들며 인명손실에 대한
기사가 없으니 암튼 대단한 우리의 기술력이다.
지금 내가 가고있는 방향은 순담계곡에서 드르니 매표소 쪽이다.
순담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 순조 임금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약 20평의 그곳에 물풀의 일종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
순담이라 불렀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여기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한탄강 세계 지질공원이다.
어림짐작으로 높이는 지상에서 약 50m 정도 되려나.
총연장 3.6km, 폭 1.5m로 주상절리 협곡과 기묘한 바위가 많은
순담계곡의 절벽을 따라 절벽과 허공 사이로 만든 길을 걷는다.
한탄강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강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한강이나 낙동강 등 4대 강은 강폭이 넓고 주변 지형과 높낮이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러나 지금 내가 걷고 있는 한탄강은 다르다.
좁고 깊게 파인 협곡으로 강물이 빠르게 지나가며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낸다.
물보라를 만들며 힘차게 흘러가는 여울이 많아 한탄강(漢灘江)
이라는 이름을 얻은 모양이다.
어느 자료에서는 6.25 전쟁 중 다리가 끊겨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크다, 넓다, 높다라는 뜻의 한(漢)과 여울, 강, 개의 뜻이 어울린
순수한 우리말인 한탄을 한문으로 음차 한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화산지형과 더불어 수억 년에 걸쳐 변화를 해온 암석과 지질
경관을 바라보며 주상절리길을 걷는다.
바닥은 철제로 된 길이라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낙엽을 밟을 때 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없어도 좋다.
해조음(海潮音)이 아니라도 큰 여울을 흐르는 물에서 알파파
(alpha波)가 흘러나온다.
알파파는 뇌파의 하나로 긴장을 풀어주고 편히 쉬는 상태를 만들어
주는데 특히 물소리를 들으며 동적명상(動的冥想)을 할 때 많이
발생한다.
예전부터 그냥 산길을 걸을 때는 야생화와 나무에 관심과 관찰을
많이 하는데 오늘같이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을 걸을 때는 소리에
집중을 한다.
나에겐 비밀이 있다.
내 귀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예민하다.
우리 나이엔 35데시벌(decibel)이 기준이라는데 내 귀는 7데시벨
(db)까지 들릴 정도로 특이하니 말이다.
따라서 절대음감은 아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는 귓속말까지
들릴 정도로 예민하다.
예전 인기 드라마 '소머즈'나 최근 배우 이하나가 열연한 드라마
'보이스' 정도는 아니지만 바둑으로 치면 통유(通幽) 단계를 지나
좌조(坐照) 단계라 할까.
최근 몇 년간 코로나로 바깥활동이 뜸해지는 만큼 TV를 가까이하는
바람에 미스, 미스터 트롯 등 여러 경연대회를 시청했다.
1회 미스 트롯에서는 첫소절을 듣고 송가인을 우승자로 점치면서도
내심 정미애와 홍자를 응원했다.
2회 미스 트롯에서는 예선부터 양지은을 우승자로 꼽고 응원하였다.
그녀는 기존 가수 진달래에게 뜻밖에 패해 준결승에 오르지 못했지만,
진달래가 학폭으로 자진 하차하는 바람에 다시 등장하여 우승하는
한 편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만들었다.
미스터 트롯에서는 임영웅의 첫곡을 듣고 이야기하듯 노래를
부르는 매력에 빠져 그의 우승을 장담하면서도 성악가인 김호중을
응원하고 투표까지 하는 이중성을 발휘했다.
또 다른 경연대회에서는 신미래의 레트로(retro) 창법에 홀딱
반하면서도 진해성의 우승을 꼽았다.
이후 국대 가수 경연대회에서 박창근의 노래를 듣고 바로 우승을
확신하였지만 이후 그 사람의 촛불시위 경력을 알고 나서는
이솔로몬을 응원하였다.
굵직한 가요 경연대회 5개의 우승자를 예선부터 맞혔으니
이만하면 신기가 있는 귀(耳)의 소유자가 아닌가.
요즘엔 마비되어 어눌해진 팔로 치는 당구에 심취했다.
나 자신이나 상대방의 파울을 미리 예고하는데 적중률이 90%가
넘는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에게 신기(神氣)가 있다고 놀린다.
허긴 이 나이가 되도록 웬만한 일이나 사건을 예견하지 못하거나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면 나이를 삼킨 세월이 아깝지 아니한가?
애써 변명을 하면서도 이태원 참사까지 예고를 했으니 이젠
자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10;50
강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친구들에게 집중을 한다.
벼랑길은 곳곳이 절경이다.
50만 년 전에 생긴 현무암과 1억 년 전에 생긴 화강암이 절묘하게
섞인 형태의 암석과 지형을 보며 걷는다.
한탄강은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 강이다.
따라서 기반암이 화강암인데 화산이 폭발하면서 현무암질
용암이 덮였고 한탄강의 침식작용으로 U자형 협곡이 형성
되었다고 안내문에서 전한다.
종심(從心)을 넘긴 친구들을 보며,
트래킹을 함께 즐기지 못하는 환우들을 떠올린다.
공자는 73세, 두보는 59세, 이태백은 62세까지 살았다는데,
이 친구들에게 아직 청년의 기개를 느낄 수 있으니 앞으론 그냥
수로(垂老), 수백(垂白)으로 불러야겠다.
11;30
가을이 왔다.
그리고 가을이 떠나려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세상,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자연의 법칙에서 누구나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각 계절에 대하여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다.
봄이 오면 만물의 생명이 꿈틀거리며 소생하기에 봄이 좋다 하고,
여름이 되면 산하를 초록으로 뒤덮는 왕성한 생명력에 대해
경외감을 느낀다.
막상 가을이 되면 가을은 생(生)과 성(盛)을 뛰어넘어 쇠(衰)와
멸(滅)을 통해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단풍 세상이 되어 좋다고
한다.
나는 어느 계절이 가장 좋을까,
분명하게 구분하여 말하라면 나는 겨울이 좋다.
땀이 나지 않아 좋고 봄, 여름, 가을 동안 내내 숨겨졌던 자연의
속살을 볼 수 있기에 나는 겨울을 가장 사랑하는 거다.
변덕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오늘 같이 좋은 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오늘만은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할 것이다.
소나무 등 침엽수를 제외하고 활엽수의 단풍이 사라졌다.
단풍이 없으면 어떤가.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인 주상절리길의 단풍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온다.
몇 년 전 걸었던 강 건너 저쪽 절벽 위로 난 길이 그리워진다.
잠시 사람들에 포위된 채 걸었다.
도시를 떠나 이곳까지 와서 인파에 밀려서 걷다니 문득 이태원
참사가 떠오른다.
한반도 중서부 화산지대를 관류하는 134.5km의 한탄강
주상절리 지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주상절리는 수직절리이다.
대표적인 주상절리로는 무등산의 입석대와 서석대를 꼽으며,
판상절리 즉 수평절리는 속리산의 문장대와 북한산의 백운대,
인수봉을 꼽는다.
강물이 용암대지를 침식하며 흐른다.
이 용암대지는 신생대 말인 제4기로 오리산(454m)을 중심으로
분출한 현무암이 구조선을 따라 철원 평강의 용암대지를 형성
하였다고 안내서에서 설명을 한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면 저렇게 생긴 삼도천(三途川)을 건널까.
담소화락과 주색잡기와는 거리를 멀리 하고, 세상사 그렇게도
안달복달을 떨던 고등학교 선배가 어제 타계를 했다.
그러고 보니 은퇴 후에도 꾸준하게 인연을 이어가던 선배가
최근에 두 명이나 타계를 했다.
여기는 바로 상상 속의 삼도천과 흡사하다.
사람이 죽어서 첫 7일, 진광왕을 만나러 가는 길의 강에 세 갈래
길이 있다는데 생전의 업(業)에 의해 하나를 건너가게 된다.
첫째가 산수탄(山水灘)이요, 둘째는 강심연(江心淵)으로 험난하고
깊은 물을 말하며,
셋째는 다리가 있는 유교도(有橋渡)인데, 유도교는 살아생전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만 건너갈 수 있다고 한다.
한탄강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수심 30m가 넘어 보이는 강심연이다
그 선배는 저승 어디쯤 갔을까,
주택은행 인사부에서 나한테 고약하게 굴어 불면증과 일시적인
스트레스성 당뇨병을 안겨주었던 선배지만 고인이 되었으니 가던 길
잠시 멈추고 마음속으로나마 명복을 빈다.
거대한 잉어인가, 아님 악어일까,
보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토르(tor) 형태의 눈과 입이 뚜렷한 거대한 생명체를 보는 느낌이
든다.
11;50
순담계곡길의 종점이자 드르니 주상절리길의 출발점에 도착한다.
이젠 원점 회귀해야겠지.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가다 이곳을 들렸다 해서,
'들르다'라는 말이 변형되어 '드르니'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 여기
또한 출발지라 순담계곡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이삼십 대의 치열했던 청춘도 지났고,
위로만 치닫던 정열의 순간들도 다 지났다.
이젠 인생의 가을이다.
그래도 나머지 인생에서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좋을 때나 힘들 때 같이 한 세월이 50년이 넘고,
숫한 세월 같이 호연지기를 길렀던 친구들 사이로 햇살이 파고든다.
물 한잔에 또다시 걸어갈 힘을 얻고 보호 철망이 처진 다리를 건넌다.
얼마 전 거칠게 내리는 폭우 속에 도전을 시도했건만,
거대한 문이 열리지 않아 포기했던 철원 주상절리길 완주가 끝나간다.
12;45
왕복 7.2km, 2,000여 개 정도 되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몸은 흠뻑
젖었다.
오늘도 한 번뿐인 나의 삶을 충만하게 살았다.
삶의 기쁨을 누리며 그냥 가을이 되었고,
이젠 가을을 떠나보내려 한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이곳의 풍경은 어떠려나,
다시 찾을 수 있으려나,
여행과 삶은 늘 미완성이다.
눈 내리는 날 다시 찾을 수 있는 여백을 남겨준 한탄강 뒤로 나타난
2011년 11월 17일 완주했던 복계산을 올려다본다.
2022. 11. 18.
석천 흥만 졸필